리스본의 겨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1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나송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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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겨울’이라니, 다소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제목이다. 그 도시에서 발원했다는 대중음악인 파두(fado)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그조틱한 느낌이다. 파두의 전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맑은 슬픔’의 분위기를 간직한 노래들은 또 어떤가. 리스본은 저 먼 이국의 도시이면서 정서적으로는 오랫동안 친숙했던 어떤 아우라를 간직한 곳 같다. 민음사판 세계문학 전집에서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라는 낯선 작가의 소설을 빼 든 것도 그 때문이다. 스페인의 현대소설은 별로 읽어보지 못하기도 했다. 모더니즘의 색채를 짙게 풍기는 이 소설은,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해설을 보니 스페인의 포스트모던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이었단다.

 

재즈바 피아니스트인 비랄보는 그 카페 단골 손님인 루크레치아를 사랑한다. 그녀의 남편은 미술품 암거래상, 둘의 사랑은 은밀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었고, 짧은 시간 동안의 밀회거나 쪽지나 편지를 주고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느날 루크레치아는 남편 말콤과 함께 베를린으로 떠나버리고, 비랄보는 그녀를 찾아 방황하거나 체념한 채 상실의 시간을 견딘다. 이후 루크레치아는 살인 사건을 목격한 뒤 남편 곁에서 도망쳐 비랄보를 다시 만나지만, 리스본으로 떠나는 와중에 둘은 다시 결별하고 만다. 그녀는 남편과 그의 동업자들이 세잔느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훔치는 과정에 개입하게 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 것.

 

소설은 비밀의 사랑을 다루는 연애소설로 시작되다가 갑작스레 ‘느와르 영화’로 바뀌어 버린다. 더구나 범죄의 소재가 된 작품이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세잔느의 실제 작품이기도 하니,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는 기묘한 독서경험이다. 한밤의 재즈바, 피아노와 트럼펫 연주, 도시의 뒷골목, 도망치는 연인들, 미술품을 둘러싼 암거래와 범죄, 살인. 느와르 영화의 요소는 고루고루 갖춘 것 같다. 소설 속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읽는 과정도 그리 속도감이 붙질 않고 인물들의 내면을 따라 느릿느릿 흘러간다. 잘 쓰여진 고급소설(?)인 것 맞는데, 쉬이 책장이 넘어가질 않는다.

 

비랄보와 루크레치아의 사랑은, 여느 연애소설과 달리 달콤하지도 않고, 실연의 고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본래 근원적 고독과 격절감을 가진 자들의 아주 가느다란 마음의 교류쯤이랄까. 리스본의 겨울은 이 소설에서처럼 어둡고 쓸쓸할까. 파두의 고향에 사는 연인들은 저마다 근원적 외로움을 간직한 채 그 결핍과 상처를 안고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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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3-0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자에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가 들렸습니다. ㅎㅎ

모든사이 2012-03-07 11:00   좋아요 0 | URL
파두, 하면 강금실 전장관이 떠오르네요. 고종석이 자기 산문집에서 쓴 글. 두 여자는 시인 황인숙과 강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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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여자가 닮은 점이 또 있다. 파두 가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좋아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다른 점으로 꼽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숙은 아말리아를 ‘아주’ 좋아하고, 금실은 그 여자를 ‘꽤’ 좋아하니 말이다. 아무튼, 이 두 친구와 리스본의 파두 박물관에서 어느 겨울날 오후를 함께 보낸 적이 있다. 파두의 역사와 그 주역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인상적인 박물관에는 아말리아를 위한 방이 따로 하나 마련돼 있었다. 생전의 아말리아 모습을 담은 영상물이 돌아가는 가운데, 그 여자의 노래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방은 어두컴컴했고, 그 곳엔 우리 셋뿐이었다. 아말리아말고는 말이다. 나는 거기서,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처럼, 아말리아를 숭배하게 된 것 같다. 인숙과 금실도 어둠 속에서 둥근 스탠드테 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는 파두의 서러운 선율에, 아말리아의 서러운 목소리에 홀려 있었다. 우리는 그 날 저녁 리스본 시내의 한 파두 카페에 가서 이 서러운 숙명(파두)의 노래들을 실연(實演)으로 들었다. (고종석)

차트랑 2012-03-07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두는 자칫
빠질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음악입죠 ㅠ.ㅠ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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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책세상 문고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경제적으로 재해석한 점이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고대의 철학자를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경탄이랄까. 그때부터 홍기빈이라는 ‘소장학자’(이젠 소장이 아닐테지만)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가 번역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그 책에 실린 해제도 텍스트의 세부에 대한 집착이 아닌, 거대한 그림과 지형도를 그리는데 탁월한 그의 특장을 잘 보여줬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나 시사지에 실리던 그의 글들도 종종 읽었는데, 비슷한 연배의 자칭 B급 경제학자 우석훈에 비하면 지적 깊이와 폭, 문장의 밀도와 수준이 훨씬 윗길이라는 느낌이었다. 출근시간 라디오에서 진행하던 ‘손에 잡히는 경제’도 글만큼이나 매끄러웠다. 언젠가부터 그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라는 이름부터가 무지막지하게 거창하기 그지없는 ‘연구소’를 차린 듯한데,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글로벌 경제 시대의 정치경제 지형도를 그리겠다는 야심만큼은 이 이름에서부터 얼추 짐작이 간다.

 

홍기빈이 최근에 출간한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는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면서, 동시에 우리사회의 이런저런 현실에 빗대어 읽는 실천적 함의를 동시에 건질 수 있는 드문 책이다. 에른스트 비그포르스(1881-1977)의 이름은 이번에 나온 그의 책에서 처음 알았다. 비그포르스는 스웨덴 사민당의 핵심적 인물로 사민당 정부의 재무장관을 17년간이나 재임하면서 현재의 ‘복지국가 스웨덴’의 기틀을 다진 탁월한 정치인의 이름이다.  이 책은 비그포르스의 사상과 정치적 역정을 줄기로 삼아 복지국가 스웨덴이 어떤 과정과 정치적 전환을 거쳐 탄생되고 수정되고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제를 붙인다면, ‘복지국가 스웨덴의 역사적 형성’ 쯤 될 것 같다. 우리나라의 언론에는 종종 스웨덴이 복지국가를 포기했느니, 복지국가를 해서 외려 망했다느니, 세금회피자들의 탈스웨덴 러시가 벌어진다느니 하는 보도들이 종종 나오는데, 이 책은 이 나라의 복지체제가 매우 견고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 쉽사리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비그포르스의 출발은 마르크시스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낳은 황폐한 인간사회를 혐오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꿈을 꾸었던 ‘윤리적 이상주의자’였다. 나로서는 비그포르스의 이런 점이 무척 맘에 들었는데,  ‘직업적 혁명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공동체를 향한 낭만적 열정 같은 것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시인 최영미가 쓴 ‘자본론’ 같은 시가 던지는 의미도 그렇다.  “맑시즘이 있기 전에 맑스가 있었고/맑스가 있기 전에 한 인간이 있었다/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토요일 저녁 쏟아져나오는/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들을, 집요하게, 연민하던.(최영미, 자본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분석가이기 전에 당대의 가장 어두운 터널 속에 살아가던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다시 말해 ‘가슴’과 ‘분노’를 가진 인간이었다. 시인의 비유를 훔쳐 말하자면, 비그포르스는 자본론 이전의 마르크스인 것이다. “비그포르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씨앗을 심은 것은 물질적 의미에서의 계급의식도, 마르크스주의가 내건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매혹도 아니었다. 그것은 도덕적·윤리적 관점에서 싹튼 분노였으며, 그 분노의 기반에는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게 연대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의 인간적 발전을 일구어 내는 공동체의 꿈이 있었다.”(p.83) 마르크시스트라면 이같은 태도를 두고 계급의식이 성숙되지 않은 부르주아적 감상주의라고 폄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윤리적 열정이 수반되지 않는 혁명은, 아니 어떤 변혁도,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설령, 혁명이 도래한다 하더라도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끔찍한 국가주의로 귀결되고 말 가능성이 높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앙리 드 망의 사례. 사회주의자에서 나치로 전향한 그는 총살형을 받았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포스트모던 이론가 폴 드 만의 아버지다.)

 

홍기빈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핵심적 개념은 ‘잠정적 유토피아’다. 책 전체의 구성상 돌출적으로 보이는 이 책의 1장은 ‘잠정적 유토피아’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실천과 실패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컨대, ‘과학’을 표방하고 나선 마르크스주의는 실제로는 현실에 대해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먼 미래로서의 사회주의거나 ‘총파업’과 같은 파국적 경로만을 제시하는 ‘공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전복시키는 비판인데, 기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2차 대전 이전의 마르크스주의는 파산직전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은 끊임없이 현재를 ‘유예’하고 먼 미래로서의 사회주의만을 부르짖는 실천적 무기력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경로를 제시해야 하고, 그런 경로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다. 비그포르스는 “우리 사회민주당은 향후 100년 동안 성취할 경제 강령은 가지고 있지만, 향후 10년 동안의 경제강령은 갖고 있지 못하다”라고 말하는데, 건설해야할 '천년왕국'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당대의 스웨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당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라는 ‘좌’와 시장근본주의자라는 ‘우’를 모두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우파는 국가를 배제한 시장만을 떠들고 있었고, 좌파는 ‘모든 산업의 국유화’만을 떠들고 있는 상황, 생산성과 효율성을 달성하면서도 노동자 등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에는 좌우파 모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파는 “시장경제의 자동적 운동법칙에 대한 맹신”에 빠져 있었고(하이에크의 일화가 흥미롭다. 현재의 불황이 과도한 소비 때문에 벌어졌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에 대해 칸(R.F Khan)이 “그럼 내가 새 외투를 구입하면 그 때문에 실업이 늘어난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하이에크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아주 긴 수학적 설명이 필요하다”라고 했다는. 경제적 우파의 논리적 파산.) 좌파는 마르크스주의 교조에 빠져 “자본주의가 완전히 붕괴하여 사회화 및 국유화의 시기가 올 때까지 경제정책에서 할 수 있는 있는, 또 해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되뇌고 있었다는 것. 혁명적 국유화 vs. 철저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이라는 양 극단에서 민중의 삶은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 

 

잠정적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비그포르스가 1919년 제출한 예테보리 강령이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전국단위의 의료보험, 출산 및 양육수당, 주택건설의 공공지원, 압도적으로 누진적인 재산세와 상속세, 자본과세, 은행 및 보험사의 사회화, 산업현장의 노동자 경영참가 등등.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같은 내용들은 오늘날 스웨덴 복지국가의 주요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동시에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될 만한 정책들이다.(자본과세나 공공임대주택, 출산과 양육수당, 의료보험 등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들도 있다. 주목할 것은 스웨덴의 경우, 이같은 정책들이 우리의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것) “비그포르스는 아득하게 멀어보이는 유토피아를 강령으로 외치는 대신 노동자와 근로대중이 지금 여기에서 절박하게 여기는 여러 문제들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제시하는 미래 사회의 비전을 그려내자고 제안한 것이다.”(p.109) 이러한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은 이 책에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데, 사회주의(목표로서의 사회주의라기 보다 자본주의의 폐해 극복과 노동대중의 삶의 질 향상)를 향한 실천적인 대안적 경로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유토피아적 전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한 근본적 변혁 전망에만 머물지 않은 채, 지금 여기서(here&now)의 제도와 정책을 찾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런데, 비그포르스와 스웨덴 사민당이 뛰어난 점은 이같은 구상과 강령을 제시하고 실천했다는 데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이같은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권력’을 잡았고, 아니 잡을 줄 알았고, 또 그 권력을 제대로 활용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같은 정책들을 추진할 정치적 리더십을 만들고 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페르 알빈 한손을 당 지도자에 오를 수 있도록 후원하고, 당내 좌파 그룹과의 논쟁과 당내 투쟁을 거치면서 사민당을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라고 할 만한 정치노선으로 탈바꿈시킨다. 한손 총리와 경제정책의 비그포르스, 복지정책의 묄레르가 결합한 사민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44년간의 사민당 장기집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브라질 피티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오르기도 하고,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된 칠레의 아옌데 사례도 있지만, 스웨덴 사민당의 경우는 보기드문 성공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한국의 진보정당에게도 대단히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책과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력과 정치적 리더십을 갖는다는 것, 비그포르스가 ‘대중정치인’인 한손을 총리로 내세우거나 당내 좌파와의 반발을 물리치고 사민당을 혁신시켜 나가는 성공적인 과정은, 애석하게도, 우리의 어떤 진보정당에서도 비견할 만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역사적 유물론을 ‘과학’으로 맹신하고 그 필연성을 강변하는 유럽 구좌파처럼, 제 정파의 노선을 타협할 수 없는 진리로 간주하는 정치세력에게 ‘현실주의’ 노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전문 경제학자가 아니라 그 분야의 비전문가였다. 케인즈가 <고용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쓰기 이전에 그는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을 구사했기 때문에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잠정적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방법론으로서 그는 ‘나라살림의 계획’을 제시하는데, 이는 국가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산업의 합리적 조직을 통한 생산성 향상, 사회복지의 강화, 작업장 민주주의 등으로 요약되는 이 계획은 얼핏 사회주의의 계획경제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코르나이의 사회주의 경제론에 대해 누군가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바 있는데, 그중 ‘계획의 세부화’라는 대목에 이르러서 정말 코미디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것은 말하자면 연간 소요되는 연필의 수량 하나하나까지도 ‘세부적으로 계획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엄청난 비효율로 들렸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시경제하에서나 전후의 경제에서도 상당부분 ‘계획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비효율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높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나라살림의 계획은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제도와 정책의 안배 및 조정 일반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내용은 잠정적 유토피아가 그러하듯 하나의 작업 가설로서 끊임없이 변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스웨덴 사민당, 그리고 비그포르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어쩌면 그는 칼 포퍼와 마르크스를 창조적으로 결합한, 두 노선의 한계를 넘어서고 융합시킨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급진주의적 전망을 가슴에 안은 채 현실주의 노선을 걸었던 정치 지도자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가장 래디컬한 좌파이념으로서 트로츠키주의와도, 우파로 전향한 좌파노선인 블레어의 제3의 길과도, 쿠바의 카스트로와도 분명히 구분되는 노선이다. 소유권 없는 기업이나 임금노동자 기금, 주주가 아닌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를 연상시키는 기업관, 과학과 윤리의 문제 등 이 책에서 홍기빈이 제기한 다른 문제들도 충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테마들이다.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비그포르스가 이상적 공동체를 꿈꾼 낭만적 열정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엄연한 계급차별, 불평등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바꾸기 위한 노력이 여기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좌파와 우파의 노선과 철학을 떠나 이런 소박한 휴머니즘이 모든 정치적 실천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슘페터가 말하는 '차가운 이성' 이전에 존재해야할 '뜨거운 가슴'의 문제다.  한국적 현실이 압도하기 때문일까. 사람에 대한 애정, 연대에 대한 열망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비그포르스와 그의 사민당이 내게 주는 고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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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3-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그포르스가 경제 비전문가라는 사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은
말씀해주신 뜨.거.운. 가.슴.의 문제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 일 것입니다.

제게 '존스튜어트 밀'의 삶이 그토록 아름답게 전해오며
'케인즈'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 확~ 벗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마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은근 팬들을 많이 몰고다니시네요
추천, 이제 막 13을 찍습니다^^

모든사이 2012-03-12 17:06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스웨덴의 복지체제가 부러운 게 아니라, 이런 정치인들이 있다는 게 부럽더군요..
 
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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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아마 국내의 다른 독자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박이엽 선생이 번역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를 통해서였다. 그에게 미술은 단순한 미학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신과 주변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서의 예술형식이었다. 파란많은 그의 가족사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그 책에서 미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성찰되고 있었다. 창비 교양문고의 하나로 출간된 이 책의 반향은 나에게도 아주 깊은 것이어서 오래도록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그는 나에게 프리모 레비를 가르쳐 주었고, 재일조선인이라는 하위주체의 실존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소년의 눈물>과 같은 빼어낸 에세이거나 한겨레에 연재되는 심야통신도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삶이라는 서경식적 주제를 깊이 있게 드러내는 산문으로서 매혹적이었다. 철학자 김상봉과의 대화를 책으로 펴낸 <대담>(돌베개)도 두 사람의 개인적 이력 못지 않게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 전이던가. <소년의 눈물>의 번역판 출간을 계기로 그를 만났을 때 생각과는 다른 퉁퉁한 풍채와 어눌한 한국어에 놀랐다. 그의 형들인 서승과 서준식의 면모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서 보았지만, 정치범 가족이라는 선입견은 왠지 비만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편견이다. 그런데, 이런 편견은 ‘살찐 랭보’거나 ‘배나온 보들레르’처럼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과도 같다.) 그는 산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마디 한마디를 조용조용히 매우 사려깊게 풀어놓은 인물이었다. 그에게 모든 사유의 출발은 디아스포라와 재일조선인이라는 일본 내 타자의 실존이었다. 산문이란 한 개인의 내밀한 고뇌와 실존이 새겨진 주관적 형식이라는 것을 서경식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인 여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바로 그 여인이 바로 이 책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등장하는 ‘F’이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음악과 여행, 그리고 서경식의 연인인 F와의 음악을 둘러싼 교유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음악가들과 그들의 음악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지휘자, 작곡가가 숱하고 생전 처음 듣는 유럽의 음악축제도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이 재미있게 읽혔던 까닭은 음악을 둘러싼 서경식의 삶과 사유를 따라가는 맛 때문이다. 정치범 가족이자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음악이라는 예술형식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현실과의 긴밀한 상호관련 속에서 사유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의 관심은 이 책에서 윤이상과의 인연, 아우슈비치의 수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고민으로 등장한다. (여성 수인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알마 로제에 관한 일화는 따로 기억할 만하다. 연주를 계속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엄격하게 단원들을 다뤘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시인 김갑수가 쓴 <텔레만을 듣는 아침에>라든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과 같은 음악 에세이들과 구별시켜주는 대목이다.


“음악이란 무서운 것이다. 한없는 청순과 고귀함, 그리고 바닥모를 질투와 욕망을 동시에 지닌 존재, 이쪽의 이해를 거부하면서 끌어당기고는 다시 뿌리치고 농락해 마지 않는 존재,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거지’하고 누가 물어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존재. 한마디로 불가해한 여성과 같은 존재, 그것이 음악이다. 음악에 깊이 빠지는 것은 여자한테 빠지는 것과 같아서 평온하게 살고 싶은 보통사람에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위험한데도 연을 끊어 버릴 수가 없다.” 이런 대목, 과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라는 오래된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은 다른 예술형식과 달리 그 ‘직접성’으로 인하여 뚜렷이 구분된다. 언어와 캔버스와 같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직접 닿아 격랑을 일으키는 예술인 음악, 서경식이 말한 ‘무서움’이란 바로 그러한 것일 터이다.


음악에 대한 서경식의 생각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제목의 에세이에서도 되풀이 된다. “다가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 거절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음악이다”라는 말 끝에 “음은 피부를 알지 못하며 한계 또한 모른다. 거기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라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 인용된다. 키냐르는 다시 “모든 경계를 없애버리는 음향은 귀를 개별화하기 보다는 집단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 특히 세련되고 복잡한 음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듣고 눈물까지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동시에 모질고 사납게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있다는 데 나는 놀란다. 예술은 야만의 반대가 아니다”는 구절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뛰어난 음악가들은 세이렌에게 몸을 바친 사람들이며 서경식 자신은 위험한 음악에 몰입하는 세이렌 앞에서 밧줄로 몸이 묶여 있는 오디세우스 같은 존재다. 그가 매년 짤즈부르크 음악제를 찾고, 유럽의 공연장을 누비며, 한국에 와서도 FM 라디오의 클래식 코너를 듣는 극성스러움을 보면 그는 음악에 사로잡힌 영혼 같다. 나로서는 서경식이 말하는 ‘위험한 음악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쿤데라는 어느 소설에서 “바이올린의 영혼을 가진 여인”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육체성과 영혼이 결합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마음이 떨리면 몸도 떨리며, 몸이 울면 마음도 덩달아 통곡하며, 영혼의 울림이 몸으로 현현하는 그 흔연한 일체성 말이다. 바이올린처럼 민감하게 몸과 마음이 동시에 울리는 사람, 온갖 자극에 노출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타고난 천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읽으면 질투가 난다. 서경식은 뛰어난 미술에세이스트에서 탁월한 음악에세이스트까지 겸비한 모양이다. 내 질투는 그의 빼어난 글솜씨와 깊이있는 사색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나같은 범인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니 질투의 대상조차 못된다. 내 질투는 해마다 짤즈부르크 음악회를 찾는 그의 여유(?)에 대한 부러움이다. 결국은 경제력과 시간인가? 하기야 그것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야 불가능할 것, 결국 나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1만5천원짜리 밑줄을 그어가며 저자를 동경하다가 바닥모를 질투에 빠지는 것, 그거 말고는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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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1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을 소재로한 에세이가 독자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시대에 와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박종호선생님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하고 싶어집니다.
서경식님의 글발에 감탄하는 독자분들이 다수인 듯해요.
왠지 읽어보고 싶어지는 작가입니다 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모든사이 2012-01-11 23:06   좋아요 0 | URL
님이 언급하신 박종호 선생이 뉘신가 했더니 풍월당 주인이시군요. 그 동네에서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문외한인 저도 이름 석자는 들어봤네요. 방문 감사드립니다..

차트랑 2012-02-04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이 기셔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2-1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라는 표시를 보았습니다.
축하드리러 방문 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모든사이 2012-02-16 15:26   좋아요 0 | URL
방문,그리고 축하 말씀 감사드립니다.

얼마전까지는 그래도 꾸역꾸역 책도 읽고 리뷰도 썼는데, 요즘엔 그게 참 힘들군요..^^

개인적인 일에다 직장에서의 일이 두배로 겹치니 말이지요.

거듭 댓글과 방문 감사드립니다..

차트랑 2012-03-0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파본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늘 염려하게 마련입니다.


모든사이 2012-03-05 23: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 찔리네요. ^^

김정선 2012-03-2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첫 방문! 인사드립니다.
제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이은 책이군요.
서경식, 한승동 콤비의 책을 꼭 사서 보리라 결심합니다. ^^;
자주 들르겠습니다. ^^

모든사이 2012-03-25 12:47   좋아요 0 | URL
방문, 그리고 댓글 감사.. 자주 들르기엔 요즘 너무 리뷰를 안올려서 보기 좀 누추하구만.. 서경식 선생의 팬이라니 더욱 반갑네.

콩알탄 2012-05-15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에 붙은 '님의 질투'를 읽다가 빵터졌고 갠적으로 이 글의 반전이자 백미네요 ㅋㅋ

B612 2015-07-24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블로그에서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저께 회식(?) 때 말씀주셔서 들어왔습니다. 점심시간때는 못뵙지만 블로그에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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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김훈의 <黑山>을 읽었다. 그의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으면서 이제 더 이상 김훈은 장편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소설은 김훈의 창작소설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탁월한 문장에 비해 그에게는 서사적 상상력이 매우 빈곤하다. 하지만, 이번 소설 <흑산>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김훈식 장편의 특장이 다시 한번 발휘되고 있다. <칼의 노래>에서 <현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김훈식 역사소설. 고독한 무사(이순신)에서 패배한 예술가(우륵), 그리고 불가피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치가들(최명길 등)에 이어 유배자들(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을 불러와 또다른 김훈식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 궁녀가 쓴 <산성일기>가 전작들의 밑그림이 되었듯이, 이번 소설은 조선후기의 천주교 탄압의 상징적 인물인 황사영이 남긴 <황사영 백서>가 밑그림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쉽게 번역 전문을 구할 수 있는 황사영 백서는, 일종의 탄원서이기는 하지만 분량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거의 장편소설이다. 허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내력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황사영 백서를 읽으면서 그의 기록과 사람에 대한 열정에 새삼 놀랐다. 아마도 목숨이 달린 문제, 그것도 여럿의 생과 사가 갈리는 절박의 순간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글에 감동이 없을 수 없다.


<흑산>에서 다시 한번 도드라지는 것은 ‘숙명적 현실주의’라고 명명해야할 김훈식의 세계관이다. 정약용 형제들이 생존하던 당시 조선의 봉건적 질서는 일종의 자연적 질서다. 자연적 질서속에서 뭇 생명들은 제각기 제 몫의 삶을 살게 마련이다. 불합리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고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저 준엄한 자연의 질서. 김훈의 인물들은 바로 그러한 자연적 질서를 ‘숙명’으로 수락하며, 그 안에서 제 몫의 삶을 살아간다. 어떤 명분과 가치를 내세워 이 질서를 전복시키거나, 그 현실을 초월하려는 의지는 모두 헛된 시도다. 사람이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자연적 질서를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주교 탄압에 나서는 대비가 “사학의 요설이 들불처럼 펴져서 군왕을 능멸하고 신주를 불살라서 제사를 폐하고 있다”며 신자들을 죽이고 가족을 멸하는 것도 마땅한 노릇이다. 조선 봉건사회의 지배자로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고독하고 격절된 유배생활을 그에게 주어진 남은 삶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러니, 가서 바다를 보고 물고기를 살펴 제 몫의 삶이 낳은 결과로서 <자산어보>를 펴내고, 과부와 통정하고 아이를 낳고 산다.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어린 양들을 위해 북경의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백서를 쓴다. 노비였던 육손이와 마부 마노리도 신분적 질서의 맨 끝에 위치한 자들답게 주어진 노동을 하다 죽는다. 천주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던 조선후기의 이 땅은 앞이 안보이는 캄캄한 세상[黑山]이지만, 이러한 삶들이 당대가 허용한 삶의 최대치이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김훈이 서슬퍼런 5공화국 당시에 당시 신군부를 빨아주는 기사를 아무런 저항 없이 혼자 다 썼다고 고백하거나, 시사저널 사태가 났을 때 파업하는 기자들을 제치고 발행인이 알바들을 고용해 짝퉁 시사저널을 펴냈을 때, 발행인으로서는 불가피한 “결호방지용”이라고 말할 때, 개발바닥의 굳은 살을 보며 맨발로 다녀야 하는 개의 숙명을 사유할 때, 자전거를 끌고 제 발과 허벅지의 힘으로 페달을 밟을 때, 불륜을 다룬 소설을 읽고 한번도 외간 여자와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할 때, 김훈의 삶과 소설이 보여주는 그의 세계관은 한치의 빈틈없이 일치한다.


그의 숙명적 현실주의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전망 부재라거나 극복의지가 없다고 타박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의 현실주의가 훌륭하다는 것 역시 아니다. 그냥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김훈이라는 얘기다. 그의 소설을 읽고 어떤 답답함이 느껴졌다면 아마도 그것은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이러한 세계관 때문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거창한 명분과 거짓 선지자가 득세하고, 과장된 수사와 삶에 대한 미화가 미덕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라면, 김훈의 현실주의는 차라리 우뚝할 수 있다. 정약종이 참수되고, 황사영이 능지처참을 당하는 상황에서 동생 정약전은 흑산도의 포구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소학의 가르침은 물 뿌려서 마당 쓸고 부르면 응답하는 것이다. 元亨利貞은 하늘의 법칙이고 仁義禮智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늘의 법칙과 그에 대응한 인간의 본성, 자연의 질서(숙명)과 인간의 삶(현실주의)는 그렇게 이 책의 결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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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1-0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올 한 해 건강하시고 좋은 일 주변에 가득하길 빕니다. 첫 해 인사겸 댓글 남깁니다.^^

모든사이 2012-01-10 16: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빵가게도 잘되고, 습격에도 성공하시길.. ^^

차트랑 2012-01-0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흑산을 읽지 않아서 댓글을 달 자격은 없습니다만,
다만 한가지 정약전께서 소학의 가르침과 주역의 원형이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셨다니
그 제자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요즘의 학교는 천,지,인의 이치를 가르치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니 말입니다.

김훈의 소설을 몇 종 읽어본 느낌은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소설가 라는 정도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모든사이 2012-01-10 16:52   좋아요 0 | URL
정약전의 소학 가르침 얘기는 이 책 뒤부분에 나옵니다.. 실제 그가 가르쳤는지 여부를 알수 없지만, 어쨌건 소설에서는 그렇게 나오네요..

수수꽃다리 2012-01-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젊은날의 숲>을 읽으면서 답답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어, 이거 김훈이 쓴거 맞어? 뭐이래?! 오늘 아침, 또 하필이면 조카 방 책꽂이에서 툭 떨어진 책이 바로 <,,숲>이네요. 김훈의 소설을 '숙명적 현실주의'라고 정의 내린 생각에 동의하면서, 저는 어쩌면 그 철문같은 현실을 밀고 나가는 소설 속 평범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에 경의를 표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김훈 소설의 힘이라고 생각하고요, 지금도. '서사적 상상력'이 '매우' 빈곤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그의 서사적 상상력에 환호를 하는 독자라서 쫌 의아했어요.^^ 제가 무언가를 잘못 생각했나 싶기도 했고.
글읽고, 글쓰기가 도통 되지 않아서 낙담하고 있는데, 모든사이님의 힘있는 글을 읽으니 좋아서^^

모든사이 2012-01-10 16:54   좋아요 0 | URL
김훈의 서사적 상상력 빈곤 운운은 그냥 제 느낌일 뿐입니다. 서사가 뛰어난 소설도 있고, 문장이 뛰어난 소설도 있고, 인물이 매혹적인 소설도 있으니 다 제각각일테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1-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전께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면
소학과 주역은 수업에 포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수업 교재들이니가요^^

저는 오늘 날의 학교들도 연령에 따라
소학과 명심보감 그리고 4서등을 교과에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양 철학의 기본도 가르치지 않는 현대의 우리학교가
그저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유학 골수분자로 만들자는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골수 유학자가되면 그것도 골치가 아프거든요 ㅠ.ㅠ
 


서재를 연 뒤 최근 몇 달만큼 공백이 긴 시간도 드물었던 듯 싶다. 책이 읽히지 않기도 하고, 책을 보고도 끝까지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했기도 하다. 개인적인 게으름이 가장 큰 문제이리라. 심란하게 돌아가는 최근 한국사회의 사정도 아마 작용했으리라. 책읽기라는 심모원려(深謀遠慮)는 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도, 우리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도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두어 해 동안 서양문학의 고전을 읽어온 것도 그래서다. 모두가 앞으로 갈 때, 옆으로 혹은 뒤로 가야 내 공간이 생길 것이라는 헛된 희망 말이다. 최근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한 책들은 심모(深謀)를 필요로 하지도, 원려(遠慮)가 생길 것 같지도 않은 책들이다. 네 권의 책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기.

최인석의 장편소설 <연애, 하는 날>(문예중앙)은 남녀간의 사랑과 투기적 자본주의의 일상, 그리고 노동탄압을 적절히 뒤섞어 놓은 소설이다. 그 사랑은 냉혹한 투기꾼과 순정한 노동자 아내 사이의 그것이고, 투기자본은 투기적 과정을 거쳐 한 노동자와 그가 속한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간다. 최인석의 소설의 ‘재미’는 극작가였던 그의 내력이 잘 발휘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 스토리를 드라마틱하게 전개해 나간다. 동시에, 한국 자본주의의 파행성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계급의 삶을 그리는데도 탁월하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도시-상류층의 추악한 일상을 겨누고 있다. 재미있고 책장도 잘 넘어가는데 읽고 나면 답답하고 암담하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문학동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에세이다. 1장은 그가 먹은 음식이야기고, 2장은 그가 마신 술 이야기, 3장은 그가 마신 차와 기타 다른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게 그의 전언인 셈인데, 나로서는 그의 구라를 흥미롭게 따라가면서 내가 먹었던 음식들, 내가 들이켰던 술과 술자리의 아우라들을 문득문득 생각해 냈다. 성석제의 글은 그의 소설이 그렇듯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때로는 유익하기도 하다. 한물 간 유머를 즐겨 쓰는 그의 너스레가 유쾌하고, 약간의 한학적 지식과 잡식을 보여주면서 늘어놓는 ‘정보’들이 유익하다. 성석제는 동창생이 모인 술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구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어차피 술자리 구라이기 때문에 그가 늘어놓는 구라가 정확한 지식일 필요는 없다.

그의 글은 경북 상주라는 시골 소읍 출신다운 촌놈 기질, 70년대적 낭만주의와 바둑, 화투와 같은 잡기, 이백과 두보같은 약간의 한학적 지식이 버무려져 있다. 그의 유머를 이해하는 연령상의 하한선이 적어도 30대 중반이라는 얘기다. 예전에 그가 썼던 예컨대, <위대한 거짓말>(문예마당)이나 <재미나는 인생>(강),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비) 같은 소설도 아마 지금의 장년층 이상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성석제의 문장에서 재미를 느끼지는 어려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동네 형들”에게서 배웠던 자들만이 온전히 성석제의 독자다. 그래서 성석제의 세계는 다소간은 마초적 세계에 가까이 가 있다.

우석훈의 <나와 너의 사회과학>(김영사)는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입문서격의 책이다. 우석훈은 몇 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는 있지만, 그게 생계유지의 방편은 못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경제학 분야의 ‘생계형 저술가’로 나선 모양이다. 생계형 저술가가 성공하려면 책 자체가 뛰어나야 하는데, 새로운 상상과 접근법은 있어도 정보의 구체성과 서술의 객관성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가 최근 들어 펴내는 책들은 제 나름의 체계 속에서 집필된 것이겠지만, 대개의 책들이 장광설이 너무 심하다. 이 책도 아주 쉬운 입문서라고는 해도, 불필요한 췌사와 너스레가 너무 많다. 중간까지 읽다 멈춘 <디버블링>(개마고원)도 쓸데없는 구라를 빼면 그렇게 두꺼워질 이유가 없다. 고 김진균 교수의 <사회과학과 민족현실>(한길사)가 수입학문으로서의 사회과학이 민중과 민족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80년대적 입문서라면, <나와 너의 사회과학>은 발랄한 상상을 촉구하는 21세기적 입문서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이나 방법론이 새롭지는 않지만, 개념의 새로운 해석은 참고할 만하다.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4.0>(컬처앤스토리)은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시리즈의 단초를 제공한 책이다. 그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되고, 시장의 문제는 시장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편다. 좌파의 히스테리도 우파의 오만도 모두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지탱해온 야망, 기업정신, 개인주의, 경쟁 같은 가치들은 여전히 지속하며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사람이 말하는 4.0의 실체는 모호하다.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쉽게 동의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2008년 경제위기를 초래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합리적 선택’이었다는 주장은 더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당시 미국인들은 나름의 합리적 판단으로 부동산 투자를 했던 것이고 이 판단은 틀리지 않다는 주장인데, 이런 ‘과감한 주장’은 일반적 통념과는 사뭇 다르다. 흔히 말하는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이 책에서는 거부된다. 조선일보의 자본주의4.0의 결론도 기업과 자본가의 ‘기부가 희망이다’라는 허망한 내용이니, 글쎄, 이 러시아출신 경제평론가의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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