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에 쓴 글. 게시판에 흘러넘치는 감성의 물줄기를 식히기 위함.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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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되풀이되는 무더운 여름이지만, 이번 여름 독서가들의 서재는 시원해질 것 같다. 바로 장쾌하고 속시원한 혁명영웅들의 일대기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마르크스 평전’)과 정치(‘호치민 평전’,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 문화(‘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방면에서 실패한 혁명가의 장엄한 죽음(‘트로츠키 자서전 나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한국 출판계에서 흥행에 성공한 ‘체 게바라 동지’의 뒤를 이으려는 인물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출판사들은 먹구름이 덮인 장마철의 하늘과 역시 먹구름이 덮인 한국 독서시장을 헤치고 나갈 ‘영웅’들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이 ‘영웅’들의 위대한 삶은 한 권의 책에 담기는 순간 ‘영웅소설’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위인전과 전기류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겠지만, 더이상 이 ‘영웅’들의 삶과 같은 투쟁방식과 해법이 통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안정성’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히 구조적․총체적으로 불안정하고 뒤틀려 있는 한국사회지만 이제는 아무도 “에라, 다 망해버려라”하고 외치지는 못한다. 불꽃같은 혁명의 꿈은 ‘경쟁력을 키워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 논리 앞에 무력해진 가운데, 다른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산다. 한때 세상을 바꾸었던 이들의 삶을 사서 소비한다. 이제 이들이 읽는 것은 ‘혁명의 지침서’가 아니라 ‘영웅소설’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비록 혁명의 껍데기이고 한 권의 영웅소설이라 할지라도, 꿈은 꾸지 않는 것보다 꾸는 것이 낫고 책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좋은 법. 기왕 혁명가들의 삶을 소비할 바에는 재미있게 읽어주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이리라. 그러면, ‘영웅소설’화된 영웅들의 삶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가장 정통적인 방법은 역시 영웅들의 삶에 몰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서자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자가 되고, 활동 중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빠뜨렸다가 불사조처럼 살아나 다시 활약한,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미국을 이겨낸 ‘호 아저씨’(호치민)의 삶을 함께 호흡할 수 있다. 아니면 “자본을 써 봤자 그것을 쓰느라고 피운 시가 값도 안 나올” 가난과 몰이해 속에 시달리면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상적 도약을 감행한 마르크스의 삶을 가슴을 조이며 읽을 수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주자파’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 마침내 중국에 개혁개방 정책을 펼친 등소평의 일대기는 ‘삼국지’나 ‘수호지’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둘째, 한 걸음 물러나 이들의 삶을 인간적 시각에서 살피는 것이다. 큐비즘과 멕시코 민중의 생활을 결합시킨 혁명적 벽화를 그려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작품보다,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댔던 디에고 리베라 때문에 나이차가 훨씬 나는 세 번째 부인 프리다 칼로가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느껴보는 것이다. 술을 마시고 난장판을 피우는 젊은 마르크스의 모습, “귀족과 결혼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하녀를 임신시키고, 공산주의 하에서는 누가 구두를 닦느냐는 물음에 “당신이 닦으쇼!”하고 쏘아붙이는 열혈 혁명가의 모순된 삶에는 나름의 ‘인간적’인 재미가 있다. 등소평이 하방되었을 때의 독서목록을 들여다보거나, 감방 안에서 독서를 하며 “정말 기분이 좋아. 나는 여기에 앉아 일하고 있고, 그래서 아무도 나를 체포할 수 없다는 확신이 완벽하게 들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트로츠키의 여유를 바라보는 것은, 감옥에 들어가면서 “공부하러 간다”고 말하던 7,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세째, ‘관계의 맥락적 재구성’을 통해 책을 읽는 재미. ‘호치민 평전’을 쓴 찰스 펜은 미 정보국(CIA)의 전신인 OSS에 근무하면서 호치민 주석과 직접 접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베트남의 지도자가 미국인 정보부원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바라보는 것, 또한 등소평의 세째딸 등용이 철저히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은 어떠한지, 제국주의 국가였던 프랑스의 문호 르 클레지오가 식민지의 예술가였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에 대해 느끼고 쓰는 방식은 무엇일지를 관찰하는 것은 또다른 방식의 재미이다. 폭풍같은 변화와 혁명의 시대에 저명인물들은 어떻게 얽혀있었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호치민과 프랑스․소련의 공산주의자들, 트로츠키와 리베라-칼로 부부의 아슬아슬한 삼각관계 같은 것들은 그들을 둘러싼 신비로운 아우라를 벗겨내기도 하고 더 강화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나라 ‘운동권 정서’를 짚어보는 씁쓸한 재미가 있을 수 있다. 이제 무턱대고 ‘타도하라’고 외칠 수 없는 시기, 운동은 세계혁명의 위대한 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자본은 생활 구석구석 침투해 있고 전복의 꿈은 대안이 없고 파괴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지금, 갈 데 없는 희망은 과거의 위대한 성공들의 순간에 돌아가 침잠한다. “고독하고, 도전적이며, 공격적이고,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었던 디에고의 혁명과 같은 예술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꿈을 꾸어볼 수 있다. 사실, ‘영웅소설’로서의 평전들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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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 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 있다. 우리 눈을 못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결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바로 여기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번역) 44쪽 각주에서 인용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 빠진 옷과 비뚤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 속을 새들 무리처럼 빙빙 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각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품위 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곳,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일방통행로> (조형준 번역) 33쪽 ‘알리는 말씀 : 우리 모두 삼림을 보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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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is 2010-05-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일방통행로> (최성만, 김영옥, 윤미애 번역) p80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모든사이 2010-05-03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시의 '서정적인' 번역과 조형준의 '서투른'(?) 번역과 최성만 등의 '건조한' 번역. 그래도 김남시 번역이 어쨌거나(!) 울림은 더 큰 것 같구만요..

alanis 2010-05-0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구나 어떤 물건을 떠올릴 때면, 그 모양보다는 그와 연관된 기억,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삐삐"을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른 느낌이 있다. 보통은 음악을 녹음해 두었던 삐삐 인사말에, 어느 춥고 바람 불던 날 술먹고 귀가하다가 쓸쓸한 마음에 음악 대신 진짜 인사말을 녹음하고선 다시 전화 걸어 들었을 때 전혀 낯설은 내 목소리가 주던 그 어색함, 부끄러움, 당혹감, 약간의 공포...

내 귀로 들어가는 내 목소리는 입안에서의 울림과 더해져 달리 들린다는 과학적인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인식되는 나를 사실은 나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당혹감.... 그 시절 유명한(?) 소설 제목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고 당당히 외칠 수 없는 상황.... 내 자신이 온전히 나를 통제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약간의 편집증, 강박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가뜩이나 평소 대인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는 나로서는 또하나의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인식조차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해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어찌 소화를 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벤야민의 글을 곱씹어 읽어보다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이란 구절에서 불현듯 삐삐의 공포를 떠올렸다.

결국은 그 공포감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였을까? 그 목소리가 말하는 뜻은 같으나 전혀 다른 내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것 또한 내 감정)과 내가 그 말을 할 때의 감정간의 불일치감에서 오는 공포감. 일종의 라캉이 얘기하는 상징계로 넘어가지 못한 감정에 대한 상상계적 혼란이 아닐까?

감정이 실재하며 진실된 순간임을 알지만, 불쑥 떠오르는 감정은 그때 그 전화기속 내 목소리처럼 낯설고, 부끄러우며, 당혹스럽고, 공포스럽긴 여전하다.

모든사이 2010-05-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감각은 실존하는 것이다. 이 봄날, 미치도록 환장한 꽃 내음 속에서 잠시 우리는 감각의 실존에 몸을 가누고 거기 도취하는 것이다. 순간, 무엇이 있어 이 현전하는 감각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취한 채 그저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흔들리거니. 더 흔들리고 흔들려 제 몸이 따라 흔들릴 때 그 때, 우리는 알게 되리라. 바람의 근원은 결국 제 몸뚱아리인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 없는 이 육체성의 현현 앞에 우리는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할지니. 그건 공포라기보다 차라리 넉넉한 긍정이려니. 긍휼스러워 말지어다, 그대여. 언젠가 간직하고 잃어버렸던 맑고 투명한 여의주 앞에, 잠시 엎드려 경배하기를. 라일락 향기가 너무 짙어 그 그늘아래 취했거늘, 관능을 열어 가쁘게 숨쉴 밖에 다른 그 무엇을 탓하겠는가. 주름살이 아름답게 보이는 자, 이제 비로소 지극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으려나.

april 2010-05-0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둘이 사귀나봐...여기 분위기 왜 이래요?ㅎㅎ

모든사이 2010-05-0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에 홀려 한잔 한 탓이겠져. 오마르 카이얌의 옷자락 한올 잡았달까? ㅎㅎ

술은 액체로 된 루비, 술잔은 나의 현현
술잔은 육체이며, 그 안의 술은 영혼
술로 흡족해 하고 있는 그 맑은 술잔은
눈물,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의 피이네
- 오마르 캬이얌, <루바이야트> 중
 

 

3월 셋째주 구입 도서 목록. 요즘 가끔 방문하는 효자동 헌책방 가가린에 산 헌책, 그리고 교보문고와 알라딘에서 산 새 책들. 우선 새 책, 한강이 오랜만에 펴낸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지성사)과 그녀의 에세이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 그녀의 소설은 여전히, 아직도, 고통과 절망과 바닥을 알 수 없는 삶의 얼룩과 비의를 말하고 있을까. 또 예술가를 등장시켜 어둡고 우울한, 어쩌면 칙칙한 세계를 말하고 있을까. 개인의 내면으로, 비극적 가족사로 환원되는 고통의 내력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에세이집은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경험을 쓴 것인데, 눈밝고 부지런한 작가들은 어떻게 이 프로그램만 갔다오면 죄다 에세이 한 권 씩을 쏟아내는지 신기한 노릇이다.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한강의 재능들을 발견하는 재미. 그녀는 시와 소설에 이어 작곡과 연주를 하더니만, 이 책에서는 프로수준의 크로키까지 선보인다. 소설가는 글쓰는 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야 명작이 나온다는데, 이 친구는 왜 이리 재주가 많은지.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민음사)는 이 작자의 본격 작품은 처음이라서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샀다. 브르통의 ‘작품’은 별로 번역이 안된 것 같은데, 대중성이 떨어져서인가, 아님 지나치게 전위적이어서인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문학과 지성사)는  내가 좋아하는 스펙트럼 시리즈로 나왔는데, 루소에 대한 토도로프의 주석쯤 될 것 같다. 이제 껏 문학이론가, 서사학자로만 알고 있던 토도로프였는데, 정치철학도 나름 섭렵했던 모양이다. 유럽의 변방 불가리아 출신들이 이렇게 잘나가는 거 보면, 그들이 평지돌출이어서가 아니라, 나름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적 후광이 그만큼 커서 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토도로프에 이어 또하나의 잘 난 불가리아 출신 작가. 헌책방에서 산 <비잔틴 살인사건>(소담)도 유럽 변방 불가리아 출신 비평가 크리스테바의 작품. 남편 필립 솔레르스도 소설 깨나 썼는데, 마누라인 이 여자의 소설만도 <사무라이들>(솔), <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민음사)에 이어 이 책이 세 번째로 번역된 모양이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인데, 추리/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될 이런 소설을 크리스테바가 썼다니, 의외의 수확이었다. 비코의 <새로운 학문>(동문선)은 헌책방에서 보이길래 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그저 소장용으로 샀다. 대학원 시절, 교수가 계속 비코의 중요성을 떠들어 댔었는데, 그는 과연 책을 읽기나 하고 떠들었을까. <한국의 민화> 역시 소장용으로 샀다. 한때 조갑제가 편집장으로 있던 80년대 잡지의 양대산맥인 ‘마당’에서 나온 책. 요즘 헌책방에 가면 이런 ‘그림책’들에 눈이 간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아무 때나 펼쳐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 민화/민속품 하면 야나기 무네요시일텐데, 민화가 재발견된 것은 그의 유산인지, 아니면 60년대 이래의 민족주의 문화연구의 영향 탓인지.

2월과 3월에 걸쳐 펼쳐 놓고 일부 혹은 절반, 혹은 거의 읽었으나 아직 끝마치지 못한 책들. <창작과 비평>(2010년 봄호),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문학동네),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나무와 숲), <스토리텔링>(크리스티앙 살몽, 현실문화연구), <여론>(월터 리프만, 현대사상사),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오카모토 다카시, 소와당),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안병길, 동녘), <사회계약론>(루소, 박영사). 리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책은 김종대의 책과 오카모토의 책. 김종대의 책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써낸 책중 가장 중요한, 그리고 노무현의 ‘진실’을 가장 잘 증언하고 있는 책일 것이다. 잠들기 전 책을 읽고 있는데, 책장을 넘길때 마다 탄식과 분노, 아쉬움과 허무함을 떨칠 수 없다. 다 끝내지 못하고 다시 내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는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엄청난 부채감을 느낀다.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이거늘, 이 마음의 소리는 왜 이리 강박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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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2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승자 시인도 아이오와 갔다 와서 에세이집 냈죠
세계사에서 '어떤 나무들은' 이라고.
서울서나 아이오와에서나 생활은 똑같았다는 시인의 말에
외국만 나가면 뭐도 보고 뭐도 해야만 하는 부류와
'참 많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죠.
뭐, 사실 외국 나간다는 게 장소 바꿔가며 술 먹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이 책 보다 들게 됐고.

노이에자이트 2010-04-0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터 리프만<여론>은 헌책입니까? 현대사상사 판이 지금도 서점에 나오나요?

모든사이 2010-04-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리프만의 책은 당연히 헌책이지요. 오래전에 구한 책인데, 이제야 읽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현대사상사라는 출판사가 꽤 좋은 책이 많습니다. 사회학자 루이스 코저의 <지성사의 전개>나 신학자 하비 콕스의 <바보제> 같은 책들 말입니다. 현대사상사판 리프만 책을 아시는 것을 보니, 노이에자이트님의 연세도 조금 되시는 모양입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0-04-05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한 10년 전 광주 헌책방에 현대사상사 책이 열권 정도 무더기로 나왔길래 그때 알게 되었어요.제가 보는 책으로만 나이를 짐작하시면 70세가 넘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걸요.헌책방에서 구한 60~70년대 세로줄의 국한문 혼용체 책도 꽤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요.현대사상사 책들은 10년 전까지 기독교 서점에도 있었구요.새 책은 거의 안 삽니다.

모든사이 2010-04-0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본의아니게 실수를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 60년대 대학생 쯤 되는데 말입니다. 너그러이..

노이에자이트 2010-04-0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헌책을 많이 읽으면 그럴 수 있지요.
 

계절이 바뀌는 건 몸으로 체득하는 일이지만, 책을 사고 읽는 일로 깨닫기도 한다. 내게는 <창작과 비평>가 바로 그런 ‘환절기’의 필수 도서목록. 점심 시간에 교보에 가서 사다. 이명박 시대를 ‘3대 위기’로 규정하고 있는 특집이 우선 눈길을 끌고, 20대 ‘아해’들의 좌담과 백낙청 선생의 ‘포용정책2.0을 향하여’도 들춰보게 된다. 김철과 황종연의 문학적 민족주의 비판에 대한 ‘원로’ 김흥규 선생의 글도 눈에 띤다. 연세가 꽤 되셨을 것인데, 자신의 문학연구의 출발점이자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는지, 이론적 반격의 서슬이 꽤나 단단하다. 어서 읽고 리뷰를 쓸 것. <문학과 사회> 봄호에는 한강의 신작 소설에 대한 작가대담이 실려서 교보에 서서 들춰봤는데, '비평가' 강계숙과 '소설가' 한강이라는, 나에게는 두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두 사람 모두 예전보다 훌쩍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준구 교수의 홈피에서 눈에 익은 안병길 박사의 책. 역시 이준구 교수의 서평에 힘입어 사다. 참여정부 초기 임혁백 교수와 정치개혁연구실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참여정부의 지향했던 정치개혁의 방향을 우회적으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 짐작이 됐다. 첫 머리의 추천사에는 이준구, 임혁백, 정준표 등 무려 세명이나 동원됐다. 저자가 뒷표지의 짤막한 ‘주례사’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 누군가의 평가처럼 내가 ‘도저한 리버럴리스트’라면 ‘자유민주주의’ 라는 언어에 육친적 친화력을 느낄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자유민주’를 자처한 자들이 남긴 트라우마일까. 하여간,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알기”라는 부제를 보니 MB 비판을 바닥에 깔고 있을테고, 문득, 참여정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간들은 왜 이리 책 내고 담론을 개발하는 것을 좋아하나.(3월 9일, 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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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6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0-05-06 20:11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리뷰 이메일로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헌책방 순례는 세가지 욕망에서 비롯한다. 그 첫째는 ‘의외의 발견’에 대한 기대다. 사고 싶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을 발견한다거나 오래 전에 나온 책 가운데 이런 책도 있었네 하는 경우다. 이미 품절된 지 오래고 다시 나올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이는 아도르노의 <신음악의 철학>(까치) 같은 경우가 전자일 것이고, 60년대 졸부들의 거실을 채웠던 전집류 중의 하나인 <세계의 대사상> 시리즈에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제4인터내셔널의 이론가였던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평전>을 발견하는 경우가 후자다. 반공주의가 극성이던 시대에 극좌라 할 수 있는 도이처의 책이 소개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빨갱이 저자의 책이 나올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스탈린 비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핑계로 서슬퍼런 ‘간윤’의 ‘필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물론 여기에는 지금도 그렇듯이 공안담당자들의 무식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진보당의 조봉암이 사법살인을 당하던 시대에 전집에 이런 책을 슬쩍 끼워 넣을 줄 안, “심장이 왼쪽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편집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돈이 없어 포기했던 책을 싸게 대량구매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경우 카드를 남발하게 되고, 책에 대한 어떤 예의도 없이 그저 노끈으로 책을 묶어 사들고 오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워낙 많은 책을 샀으므로 살 때의 욕망과 달리 읽기도 거의 포기하거나 한두권에 그친다. 이런 책 사재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리즈 같은 것들에 ‘삘’이 꽂힐 때 감행된다. 처음으로 헌책방에서 대량 사재기를 한 것은 1980년대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구술 민중자서전> 20여권을 샀을 때다. 서울역 주변의 헌책방에서 샀다. 내가 만난 우리나라 최고의 '읽기 매니어'와 함께였다. 평범한 민중을 불러내어 지역의 토박이 언어로 살아온 내력을 구술케 한 이 시리즈는 90년대 이후 널리 확산된 ‘구술사적 역사방법론'의 선구적 사례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세 번째는 초판본이나 고서와 같은 오래된 책에 대한 욕망이다. 한문해득에 능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고서’의 진가를 알아볼 리도 만무하고, 더구나 그같은 책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내가 감히 꿈도 못꿀 터이니, 겨우 살 수 있었던 책의 연대기는 60년대 어름까지가 한계다. 인사동 고서점인 통문관을 그닥 좋아하지 않은 까닭도 그것이다. 이런 서점은 일반인 헌책방 순례객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에 출간된, 그만큼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는 책을 구경만 하다 입맛만 다시며 발길을 돌려야 했던 기억은 조금 씁쓸하다. 창비의 편집위원인 최원식 선생이 한 평론에서 1948년에 나온 레닌의 <제국주의론> 번역서를 인용한 것을 읽었을 때, 그 시절 그 책을 번역한 한국의 볼세비키 추종자의 열정을 생각했었다. 왜 나는 비평을 보면서도 각주에 인용된 책의 ‘연대’에 눈길이 가는 것일까. 이런 스노비즘도 병이라면 병이다.

바로 그 세 번째 경우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리고 조금은 후회되는 기억이 있다. 1990년 여름, 전주의 구시가지를 산책하다 그 주변에 즐비했던 헌책방을 들어갔을 때, 일제 시대 나온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책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제목에 마르크스라는 일본어가 박혀 있고, 출간일이 쇼오와(昭和) 00년 식으로 찍힌 이 책들에는 세월에 바랜 만년필 메모나 밑줄도 있었다. 낡은 나무 책장 서너 칸 쯤을 차지하고 있던 이 책들을 보면서 이게 동경에 유학했던 호남의 ‘마르크스 뽀이’들이 탐독했던 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이 ‘동무’들과 읽었음직한 책들, ‘소년 빨치산’이었던 박현채 선생이 유년기에 읽었음직한 책들 말이다. 그들은 이런 책들을 독파한 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거나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을 터였다. 대구가 좌파들이 득시글대는 ‘동방의 모스크바’였다지만, 전주니 광주도 그에 못지 않은 좌파 지식인들의 집단서식지였으니 이런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일어를 못해 비록 읽지는 못할 지라도 한 두권쯤 살 수 있었을 텐데, 가난한 대학생이니 책장만 쓸어본 채 나오고 말았다. 때로 책은 내용보다 '아우라'로 감동을 전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전주를 방문했을 때 그 많던 헌책방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고, 당연히 이 책들도 폐지수집상의 수레로 쓸려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제법 큰 돈을 주고 샀던 '오래된 책'은 고 임종국 선생이 편집한 <이상전집>(1956, 고대출판부) 초판본이었다. 이상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아마 이 전집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하드커버라기엔 너무 소프트한 표지, 낡은 갱지에 인쇄된 본문, 지금의 북한식처럼 보이는 명조체 활자, 세로 조판의 두권 짜리 전집의 가격은 15만원. 그 후 이어령의 전집(1977-1978, 갑인출판사), 김윤식․이승훈의 문학사상사판 전집(1989-1993), 가장 최근에는 김주현의 전집(2009)이 나왔으나 모두 출발은 임종국의 이 전집일 것이다. (임종국 선생의 이상연구와 친일문학연구 사이, 곧 모더니즘과 민족주의(혹은 실증주의)의 간극과 길항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임종국 선생의 이 <이상전집>은 한 지인이 서대문에 ‘어제의 책’이라는 헌책방을 열었을 때 3만원을 받고 팔아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이 좋아 헌책방을 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돋보였고, 사라져 없어진 서점 ‘오늘의 책’의 역사를 잇겠다는 옥호(屋號)에 감명받은 바 있어 “헌책방이라면 이런 정도 책 한 두권은 구비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미련없이 판 것이다. 내게는 문학사상사판 전집도 있으니 판본비교 같은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을 바에야 기부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책을 산 어느 호사가에게 복이 있을 진저.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역에서 남영역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는 헌책방이 가로로 죽 늘어서 있었다. 대개의 책들은 참고서거나 허접한 삼류 소설들이었으나 그 사이에 가끔 보물이 끼어 있었다. 또한, 이광수, 김동인 류의 근대소설가들의 초간본 책들도 안전한 카운터 뒷자리에 꽂혀 있었다. 이광수의 <무정> 초간본이라든가(초간본이긴 해도 표지는 심하게 닳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같은 책들. 대개의 책들이 당시 가격으로 10만원이 넘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책들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금액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윌리엄 모리스가 만든 초서의 책 

 

책의 ‘내구성’을 구성하는 한 측면이 내용의 지속가능성이라면, 다른 측면은 물리적인 것으로서  제책의 견고함일 것이다. 분명 전후 미국원조를 통해 들어왔을 질나쁜 종이에 인쇄된 50~60년대의 책은 그런 측면의 내구성이 무척이나 허약하다. 식민지 시대에 나온 근대간행물들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다. 한지로 만들어진 옛책의 견고함과 내구성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전후에 나온 책들을 보면 마구잡이로 지어진 판잣집 같다는 인상이다. 여태까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산책 중 60-70년대 책 중에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면서도 장정이나 제책 면에서 점수를 줄만한 것은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전후문제작품집>(1964) 시리즈다..(미국의 비트세대 소설가들이나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같은 소설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아마 이 전집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 책의 명장 윌리엄 모리스가 없다는 것은, 아니 명장이전에 한지로 만들어진 옛책이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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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 임종국 이상전집 나한테 한 권 기증한 거 기억 안 나우?
근데 나한테 준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유?

이진성 2010-03-0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헌책방에서 고른 책중에 내가 점수를 준다면 정음사판 셰익스피어전집!
번역도 장정도 최고!
게다가 가격까지. 헤이리 헌책방에서 권당 500원에 샀다면 믿겠수?

모든사이 2010-03-0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한권을 따로 구했던 거 같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건 묶음으로 산 온전한 전집 한질이라..ㅎㅎ 정음사판 세익스피어 전집은 아직도 여기저기 많아. 근데 그건 사고 싶지도 않고 읽고 싶지도 않아.

미국사람 2011-08-2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책방 순례에 미친 양반이 또 있군요.

근데 그 책을 어디에다 쌓아두지요....
한20년 모으면 집이 좁아져서....
마누라 등쌀에 견디기 힘들게 되지요...

어쨌건 동업자를 만난 것같아 흐믓합니다. 다만 저와은 독서 취향이 달라 이 블로그에서는 건질 것이 별로 없군요. 하지만 건질 것이 있는지 천천히 다시 보아야 할 것 같군요. 꾸뻑

모든사이 2011-08-2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할때마다 한 짐씩 정리하지요.ㅋㅋ 재작년 이사때는 책장 두개 분량의 책을 후배에게 '분양'해 주었지요. 아, 그리고 우리나라 만화방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중 책장이라고 있습니다. 책장이 앞에 하나 있고, 바로 뒤에 책장이 하나 더 있는...말하자면 좁은 공간에 책을 두기가 아주 좋습니다. 앞쪽 책장에 바퀴가 달려서 이리저리 밀수도 있고.. 고걸로 그나마 조금 해결하고 있지요.. 마누라 등쌀은 애진작에 흘려버리고 있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