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과 최근 나온 <엘제아씨>(문학과 지성사) 두 책 모두에 실린 슈니츨러의 단편 <내가 만났던 중국인>은 총살 당하기 직전에도 책을 읽고 있는 중국인이 등장한다. 이 중국인은 의화단의 난에 연루된 인물로 3시간 뒤면 총살당할 처지다.  독일군 장교인 주인공은 그를 기이하게 바라본다. 도대체 죽음을 앞두고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태평스럽게 책이나 읽고 있다니, 저런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그에게 왜 책을 읽고 있냐고 묻자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니 그저 책이나 보는 수밖에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중국인에게 감동한 독일군 장교는 상관에게 부탁해 그가 석방되도록 한다.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어디서 흘러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법 아니겠는가.

말기암 환자 김현의 병상을 오고 갔던 이인성은 ‘죽음 앞에서 낙타다리 씹기’를 회고하고 있는데, 그런 죽음 직전의 ‘몽상’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과연, 세상일이란 알 수 없으며,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느닷없이 축복과 벼락이 동시에 들이 닥치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의 망명지로서 책은 차라리 안전하고 오히려 쾌적하다. 거기가 환멸의 거처이며 패배의 귀착지일지언정, 마음을 고문할 주리와 형틀은 없으리니. 새된 목소리로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 지저귀는 소리들은 제껴두고, 그저 책이나 보자.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알려는 시도도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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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qui 2010-12-1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한 태도는 존 그레이식의 관상주의라고 불릴 수도 있을것 같군요...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달린 리뷰를 보고 와봤는데 내공이 장난아니십니다 감탄하고 갑니다. 게다가 사라 워터스를 보는 남자분은 별로 못봤거든요ㅎ 혹시 언론사에 몸담그고 계시나요?

모든사이 2010-12-1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저는 조금 무료한(?)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입니다. 최근에야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라워터스는 누군가의 소개로 알게 되어 읽었는데, 제 19세기 감성과 잘 맞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님 아이디는 예의 그 '블랑키'이겠네요?

Blanqui 2010-12-17 15:0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예의 그 블랑키가 맞습니다ㅎ 저는 사실 사라 워터스를 영드로 먼저 접했지요. 영국 시대물 드라마가 또 참 재미있어요. 특히 빅토리아 시기의 문학작품을 드라마로 많이 제작하는데 디킨즈의 리틀 도릿이나 황폐한 집, 엘리자베스 개스캘의 '남과 북' 등 많은 작품들이 이미 영상물로 재탄생되었더라구요 이미 보셨을 것 같지만ㅎ

모든사이 2010-12-1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도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영드로 보고 나서, 나중에야 <벨벳 애무하기>를 읽었는데, 책 읽고 나서 다시 그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작가가 사라워터스라는 걸 그때에야 알게 됐지요. 사라 워터스 열성팬 한명이 추천하는 바람에 읽고 알게 됐다는... 블랑키가 맞다면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도 좋아하시겠군요.. ㅎㅎ
 

 

#1. 지난 토요일 아침 부스스한 눈으로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들어보니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해왔으니 부고기사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와 인연은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집안의 먼 친척 한분이 돌아가신 듯한 느낌이었다. 한겨레에 연재되던 칼럼을 꼬박꼬박 챙겨 읽었고, <사회와 사상>에 실린 논문을 밑줄 쳐가며 읽었으니 내 과거의 한 때 그는 내 일상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 한길사에서 나온 <리영희 저작집>을 검색해보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이후 그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리영희, 임헌영 두 분이 함께 나눈 <대화>는 물론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책은 <분단을 넘어서>였던 것 같다. 대학 학보사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이던 이 책을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환시대의 논리>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책이지만, <우상과 이성>을 읽은 뒤에야 펼쳐봤던 듯 싶다. 그 다음에 <역정>, <자유인>으로 넘어갔고, 어느 순간 리영희 선생의 글이 재미없어졌다.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그가 엮은 <중국백서>나 <베트남 전쟁>류의 책들도 읽을만한 부분만 발췌해서 봤던 것 같다.

#3. 그와 그의 책에 대해서 떠오르는 몇 가지 사념들.  

 

그러니까, 오늘 아침 그의 부고기사를 읽은 뒤에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창밖 풍경을 보며 떠올렸던 기억들이다.  


#4. 버스의 라디오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대북 삐라를 살포하라는 '권고'를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읽고 있었다는 에드워드 기번의 영어본 <로마제국쇠망사>.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서 당시로서는 희귀한 재능이었을 영어 독해력으로, 두터운 기번의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 전쟁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다급해졌을 법한 데, 천년 전에 망한 한 제국의 역사를 탐독하는 모습은 기이한 열정으로 비춰졌다.

#5. 버스가 수색을 지나 모래내를 지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어디선가 그는 한글본과 영어본, 불어본으로 세 번 읽었다고 고백하는데, 불어본을 본 것은 감옥에서였다. 영어와 중국어, 일어, 프랑스어까지도 능통했으니 빅토르 위고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한 에세이에서 그는 장발장의 생애를 읽어가면서 한국의 검사들이 가진 기본적 소양의 부족과 더불어 그다운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이었는데, “체포영장”이 없어서 못했다는 것. 19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영장을 통한 체포와 구속이라는 최소한의 사법적 절차가 지켜졌는데, 20세기 후반의 한국에서는 그조차도 없었다는 것.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던 탄식을 나는 영화 <타인의 삶>을 보면서 느꼈는데, 이 영화는 동독 비밀경찰조차도 ‘영장’이 없어 용의자를 체포하지 못하고, 그들이 남긴 도청과 감시의 기록도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산당 지배에서조차 사법적 절차에 대한 준수와 기록물의 보존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6. 연세대에서 하차.  

 

1991년 1월 연세대 장기원 기념관. 거기서 리영희 선생은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폐기선언’이라고 기사를 썼다. 굴곡진 얼굴로 발표문을 읽다가 가끔 청중을 보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으되,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보존되어야할 담론이라는 것. 알뛰세가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불렀던 전기와 후기의 마르크스 중 전자만이 가치있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선언이었다. 좁은 공간에는 젊은 열정들이 눈을 초롱초롱 밝히고 있었다. 지금은 연세대 교수가 된 박명림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메를로 퐁티와 사르트르의 결별’을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당신의 선언은 메를로 퐁티의 전향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의 질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을 둘러싼 프랑스 지식인들의 논쟁과 <휴머니즘과 폭력>을 썼을 당시의 메를로 퐁티를 거론했을 것이다. 그의 책들로 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이성적 합리주의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마르크스주의의 폐기라니, 언제 그가 마르크시스트였던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주 일요일에 가깝게 지내던 서울대 법대를 나온 선배 하나가 리영희 선생의 선언에 충격을 받았다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던 것.  


#7. 환승 버스를 기다리며.  

 

1976년 당산 대지진. 미 국무부가 수집정리한 중국 관련 정보를 모은 <중국 백서>를 편역할 만큼 중국 전문가였던 리영희 선생은 당산 대지진과 그해 일어난 뉴욕의 정전사태를 비교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비교했었다. 당산에서는 약탈과 방화 같은 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에 비해 뉴욕은 잠깐 동안의 정전 사태에 가게 유리창이 부서지고 온갖 약탈이 자행되었던 것.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이 된 이후 당산을 다녀온 신경림 선생은 당산에서도 마찬가지로 약탈 사태가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공식정보’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그의 글쓰기에도 오점은 있었던 것.

#8. 버스가 독립문 고가를 지난다.  

 

저 건너 시사인이 있던 자리에 출판사 까치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대학시절 정운영 선생의 책을 얻기 위해 이 출판사에 갔었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일본에 갔다가 발견해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이다. 일종의 섹스와 그것을 둘러싼 풍속의 변천이라할 이 책은 소재와 달리 유물론적 사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발터 벤야민은 푹스에 대해서 에세이 하나를 쓰기도 했다. 섹스의 풍속사와 리영희 선생은 어째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술과 욕망에 대해 솔직하리만큼 충실했던 분으로 회고한다. 엄격하고 치밀한 글쓰기 저 편에 그런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차라리 위안이다.  


#9. 버스 왼편으로 보이는 서대문형무소.  

 

열화당에서 나온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때 세워진 서울 도심 부근의 이 형무소가 이사하던 것을 계기로 사진과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리 선생은 1964년 이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이 책의 한 에세이에서 풀어 놓고 있다.  이 책을 보고 나서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다. 지금은 메이저 언론의 사진기자가 된 친구와 함께 형무소 담벼락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어두컴컴한 옥사 복도 안으로 햇볕이 비치는 것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내가 찍은 사진은 형편없었으나 친구가 찍은 사진은 전문가답게(?) 매우 훌륭했다. 건축 관련 사진을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한국건축사’ 수업에 친구의 사진을 제출해 A+를 받았다.  


#10.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에서 남대문 방향을 보면 조선일보 코리아나 호텔이 정면으로 보인다. 광화문 광장의 시야는 저 흉물스러운 빌딩 하나가 망쳐 놓고 있다.  

 

조선일보 남재희-리영희 충돌사건.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외신부장 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은 신경전을 넘어서 물리적 폭력이 동원된 사건인데, 어째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 나오는 회고와 다른 지인들의 회고는 정반대다. 단순히 간부급 기자들의 충돌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을 지배하던 두 지적 논객의 충돌이자 서로 다른 사상적 패러다임의 충돌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은 이들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지주의 아들이자 천하의 바람둥이 소설가였던 이병주와의 교류와 친밀함에 있어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할 정도로 긴밀했다는 점이다. 이병주는 출옥한 뒤 세상물정을 공부한답시고 당시 신문을 샅샅이 뒤져 읽었는데, 그중 조선의 외신면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고 부장인 리영희와 교유를 텄고 둘은 아주 친해졌다. 리영희는 해고 뒤 이병주가 차린 출판사 ‘아폴로’(이 社名은 촌스럽기 그지 없으나 당대의 분위기에서는 아주 지적으로 보였나 보다.)의 외판사원 노릇을 잠시 했다. 남재희 선생은 이병주의 박람강기와 술, 여자에 대한 탐닉을 즐거워했다.(<언론정치 풍속사>, 민음사) 그런데, <지리산>의 이병주는 일급의 소설가라기보다 사실 삼류에 가깝다.

11. 어느새 버스가 회사 앞에 도착했다. 삼가, 내 한 시절의 지적 스승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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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2-12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요일은 아니고 월요일이었지 않나요.
-19일까지 통화 불갑니다. 출장이 좀 길어서요.
-예산안 날치기 보니 돌아가고싶은 맘 싹 가시네요.
그런다고 뭐 뾰족한 수 있는 건 아니고...
-남아공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이영희 선생 글에 붙은 댓글을 보고 여기까지 타고 왔네요.

88년에 미국에 왔지만 이영희 선생책은 대충 다 찾아 읽었는데 박명림과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남재희와 이병주의 일도 그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유신 말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중에 이영희 선생을 자신의 거울로 삼은 사람이 꽤 될겁니다. 영어로 하면 role model 이라고 하나요.

요즘 한국소식은 참 우울한데 이 시대에는 이영희가 왜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민주화의 이익을 어떤 이상한 사람들이 전부 해먹었다하는 생각은 왜일까요.

이영희 선생 생각에 한마디 해 보았읍니다.
 

선과 악이라는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행복이거나 불행, 둘 중 하나다. 사람도 그러해서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될 뿐이다.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악할 수밖에 없으며, 선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어떤 비참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국은 그의 본성이 드러나 사회적 배려와 축복을 받게 마련이다. 주말 동안 디킨즈의 오래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윤혜준 옮김, 창비)를 읽으며 이 놀랍도록 단순해서 차라리 행복해지는 세계에 젖었다. 불운한 결혼으로 잉태되어 구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착한 소년’ 올리버와 그를 둘러싼 선인과 악인들의 이야기. 세상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선한의지와 자선과 배려에 의해서, 그리고 심성이 ‘원래’ 착한 사람들에 의해서 구원되리라는 소박한 전언은, 복잡한 이해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착하게 살아라”라는 ‘크리스마스 철학’을 설파하는 이 19세기 작가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

이런 소박한 철학은 사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지배하는 ‘사상’일 것이다. 불운한 출발, 험난한 역경과 의지로 이뤄낸 극복, 예기치 않은 도움과 구원의 손길,  그제서야 풀리는 오해와 인연, 지옥에 떨어지는 악한, 결국 사랑과 행복에 이르는 선한 사람들, 이런 멜로드라마는 브로드웨이와 피카딜리를 지배하는 삶의 철학 아니던가.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디킨즈는 절대로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지 않고, 행복한 결합과 화해로 이끄는 뮤지컬 장르의 문법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미국 중산층과 여피의 철학을 현대적 대중예술로 이끌어 올린 미국식 뮤지컬이, 왜 우리사회에,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유행하는지를 별로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멜로드라마의 선명한 이분법의 세계는, 소파에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워 ‘즘생’처럼 퍼져있고 싶은 주말에 딱 어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ps 1. <올리버 트위스트>는 하도 많이 나와 어지러울 정도다. 검색해보니 아동용으로 각색된 다이제스트본도 있는 것 같고, 수십 년 전에 나왔던 것을 표지와 활자만 바꿔 다시 펴낸 것도 있는 것 같다. 창비판에는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추천한 ‘최고의 번역본’이라는 레테르가 붙어 있는데,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세기 런던 뒷골목의 지저분하고 음습한 분위기는 번역자의 뛰어난 문장 덕에 아주 실감나게 복원돼 있다.


ps 2. 디킨즈 소설을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아놀드 하우저를 뒤져 봤다. 기억할 만한 대목이 있어 인용해 둔다. 오늘은 12월 1일. 지금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국가의 제도적 의지와 사회안전망이 아니라, 개인의 선의지와 자선에 기대어 풀어보려는 빨간색 자선냄비가 등장할 시간인데, 하우저의 디킨즈에 대한 지적은 이 ‘크리스마스 철학’이 은폐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디킨즈는 처음부터 예술적으로 및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의 새로운 타입을 대변했다. 호감을 사지 않는 곳에서도 그는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사회적 주장이 전혀 마음에 안들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서 재미를 느꼈다. 그의 예술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은 서로 분리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의 여러 죄악, 부자들의 냉혹과 거만, 법의 가혹성과 몰이해성, 어린이에 대한 잔인한 취급, 감옥과 공장과 학교의 비인간적 조건들, 한마디로 모든 제도적 조직체의 속성인 개인적 고려의 결핍에 대해서 불꽃 튀는 어휘로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고발은 모든 사람들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고, 사회 전체에 부정의 책임이 있다는 불안한 느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고난의 외침과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만족감을 뭔가 보다 확실한 것으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작가의 사회적 메시지는 정치적으로 결실이 없었으며, 그의 박애주의 역시 예술적으로 매우 고르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그것은 인물들의 심리학에 대한 작가의 공감을 깊게 했으나, 동시에 그의 눈초리를 흐리기 만들기 쉬운 하나의 감상주의를 낳았다. 그의 무비판적 인정주의, cheeryblism(막연한 온정주의), 소유계급의 사사로운 선의와 선행이 사회적 결함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본다면 그의 애매한 사회의식에서, 계급들 사이에서의 그의 소시민적인 미결정적 위치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 그는 과거 부르주아지의 건강하고 비감성적인 이기주의를, 텐느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크리스마스 철학’으로 변질시켰다. “착하고 서로 사랑해라. 가슴의 느낌이 유일한 진짜 기쁨인 것이다. 학문은 학자에게, 자존심은 점잖은 사람들에게, 사치는 부자들에게 맡겨두어라.” 디킨즈는 이 사랑의 복음의 알맹이가 정말 어떤 것인지, 그리고 거기에 약속된 평화가 사회의 약자들에게 얼마나 비싼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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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더글러스의 ‘오염’에 관한 설명은 흥미롭다. 그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쓰레기가 쓰레기장이나 휴지통에 있을 때는 더럽지 않다. 하지만, 쓰레기가 식탁 위에 놓여 있거나 침대 위에 있다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 된다. 물론, 그녀의 관심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가르는 분류체계에 있을 것이다. 오염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좀더 확대하자면 맥락을 떠난 말, 궤도를 이탈한 채 진행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그것은 많은 경우 ‘자기만의 방’에 갇혀 몰입해 있을 순간에 벌어진다. 몰입은 상황과 조건, 맥락과 역사를 배제한 곳에서 시작된다.

나는 땅에 몸이 닿는 부분이 가장 적을 때 몰입의 강도가 가장 세진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을 근 20여 년째 믿고 있다. 이런 근거 없는 얘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는 데, 그게 어느 책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것은 시인 천상병이 두꺼운 ‘서양문화사’의 책장을 넘기면서 마산거리를 걸어갔다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천상병은 예의 그 속설을 믿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안락한 책상을 떠나 ‘걸어가면서’ 책을 읽었을 것이고, 읽고 난 뒤에도 생생한 기억력으로 르네상스와 빙켈만을 줄줄이 떠들어 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걷는 것보다야 뛰는 게 땅에 닿는 몸의 부위와 시간이 가장 적고 짧겠지만, 인간이 아직 뛰면서 책을 읽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읽으며 걷기가 아직은 최선이다.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제이 파리니, 솔)을 버스 정류장에 서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키들거리며 읽었다. 퇴근 시간의 버스는 복잡하기 마련인데, 내 두 발바닥의 면적만큼 땅에 닿았으므로, 그것은 낮 동안 두 발바닥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보다야 훨씬 적게 땅에 닿은 것이므로, 당연 몰입의 강도는 더 세질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벤야민의 전기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의 절친이었던 게르숌 솔렘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한 우정의 역사>(게르숌 솔렘, 한길사)에서 그가 보여준 벤야민에 대한 애정과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탄식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시오니스트이긴 하나 벤야민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기억과 기록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의 기억을 빌어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벤야민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우유부단함”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가령 그것은 식당에 가서도 몇 번이나 주문을 번복하다가 결국은 처음 주문한 생선을 먹거나, 음식이 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음식을 부럽게 쳐다보는 버릇에서 절정을 이룬다. 결국 보다 못해 “좋아, 발터 나랑 음식을 바꾸세. 내 접시를 자네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선 식사를 못하겠어”하고 음식을 바꾸자마자, 벤야민은 한숨을 쉬며 “내가 주문을 잘 한거야. 그렇지? 자네 음식은 맛이 없군”이라고 말한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한대 쥐어박았을 우유부단과 머뭇거림의 극치다.

숄렘은 벤야민이 여자문제에 관해서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보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벤야민은 상대여성이 다른 남자와 살고 있거나 그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경우에만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 아샤 라시스에 대한 찌질한 구애의 맥락도 그의 본성에 비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극히 벤야민스럽다. 그 대목에 밑줄을 긋는 데 버스가 흔들리면서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으며 혼자서 킬킬대는 내 모습을 옆자리의 여학생이 힐끗 봤던 것도 같다. 이런 벤야민이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어찌할 수 없는 비극성이 간직되어 있었고, 종내에는 국경수비대가 온다는 낭설에 괴로워하다 자살을 했을 것이다. 나치의 예고된 공격으로 불안해진 파리를 빨리 떠나야 하는데도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차마 떠나지 못하고, 빨리 파리를 떠나라고 재촉하면서도 ‘수표’를 보내오지 않는 미국의 호르크하이머를 원망하고 있는 벤야민. 이 자가 가진 구제불능의 우유부단함과 섬약함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갑작스럽게 솟아나는 벤야민에 대한 애정, 이것은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퇴근 버스 안에서 이런 대목과 조우하는 순간은 유쾌한 경험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안의 맥락 안에서의 움직임일 뿐이다. 책과 책속의 인물과 그것이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읽기의 역사적 맥락은 다른 자리에 놓이게 되면, 애초에 간직한 ‘말끔한 유쾌’를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유쾌함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은 다른 맥락과 자리에서는 추악한 것이 되거나, 때로는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책의 맥락과 현실의 맥락을 혼동하고, 아니 때로는 전자가 후자를 구축하는 만용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기 몰입이 빚어내는 비극이자 몰입이 결과할 것을 망각한 자리에서 벌어지는 추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더글러스가 말한 대로 식탁위에 놓인 쓰레기다. 몰입을 경계할 일, 타자를 배제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집중은 질병 수준이다.

베르그송은 ‘웃음’에 관한 그의 책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순간은 적절한 기대를 배반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은 멀쩡하게 잘 걸어가던 사람이 휘청거리며 꽈당 넘어질 때 같은 경우다. 정상적인 맥락과 기대를 벗어나 의외의 순간이 연출될 때 웃음이 터진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읽을 때 웃음이 가진 폭력성을 떠올렸었다. 푸코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웃음은 정상적 맥락을 단일한 회로로 가진 자들의 폭력적 감정이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회로가 공존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동일성이 타자에 대해 낳는 폭력적 결과가 웃음인 것이다. 그것이 폭력화되지 않으려면, 몽상의 거처는 자기안의 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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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보다. 조선일보 뒤편에 있는 조그만 극장 스폰지하우스는 퇴근 이후 홀로 영화를 보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다. 홍상수의 영화라서 그런지(?) 좌석은 반쯤도 차지 않았다.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위악에 키들거리면서, 그 위선과 위악이 내 안에도 겹겹이 쌓여 있음을 확인하면서 봤다. 80분 동안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나서 든 생각은 ‘삶으로서의 텍스트’라는 말이었다. 3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그녀의 삶으로 이뤄진 두 개의 텍스트를 병치시켜 보여준다. 그녀가 만나고 연애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와의 짧은 아차산행 산책.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은 그녀의 삶에서 동일한 것의 반복이면서 변주이기도 하다. 반복인 까닭은 연애하는 남자와 동일한 코스의 산책을 했다는 것이고, 변주인 것은 그때그때의 대사와 행위, 그녀가 느낀 순간의 감정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두 개의 텍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지만 다른 두 주인공들인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는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 조우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남녀가 벌이는 사소하고도 진지한 해프닝과 돌연 격렬해지는 주인공들의 감정적 굴곡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라고 발랄하게 내뱉는 옥희. 이 영화는 ‘약’에 취한 사내들이 젊은 영화학도 옥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연애담이다. 옥희는 그런 두 남자와의 연애를 ‘영화’로 텍스트화하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반복이고 무엇이 변주인가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약에 취한 사내들이 편재해 있는 세상에서 그녀는 기꺼이 ‘약먹은 사내’들에게로 몸을 내던진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는 반복과 사소한 변주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텍스트가 별다른 서사적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다. 약먹은 사내들의 애정공세에 기꺼이 기투하는 옥희의 운명이 만들어낸 유사-텍스트인 셈이다.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줄게>(푸른숲)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삶으로서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녀의 독서편력으로 이뤄진 텍스트와 그에 관한 그녀의 나직한 독백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때로 시를 온몸으로 살아가듯이, 누군가는 삶으로서 자신이 보여줄 ‘텍스트’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텍스트’로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런던에 관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런던행을 빙자한 그녀의 독서일기이자 책에서 책으로 이어진 그녀의 몽상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공간으로서의 영국 런던이 아니라 그녀의 독서목록과 그 책들의 귀한 구절들과 거기서 그녀가 느꼈던 사념들을 따라가며 책장을 넘겼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질투와 시샘이었다. (이 나이에, 이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그녀가 보여주는 편력의 내력과 넓이가 질투가 났고, 잘 쓰여진 문장과 그 문장들이 실어 나르는 축축한 감성들에 시샘이 났다. 요컨대, 그녀는 ‘가짜’가 아니다.

유종호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게 유종호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미국 신비평가 클린스 브룩스의 말인지, 다른 누군가의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부실한 기억, 그리고 그걸 굳이 찾지 않는 불성실이 문제다. 아마 저자 정혜윤이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으리라.) 나는 정혜윤의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을 약간 비틀어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것은 순전히 추후의 ‘인용’을 염두에 둔 극히 실용주의적인 독서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는 텍스트와 내밀하게 교유하며 그 텍스트를 기억의 갈피에 꼭꼭 접어 두고 적절히 그것을 끄집어낸다.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인위적 독서가’들은 대영박물관을 두고 존 키츠와 쉼보르스카, 마르크스, 헤로도투스, 길가메쉬 서사시를 나란히 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미여인의 키스>와 <황금가지>, <마담 보바리>, <인간등정의 발자취>와 릴케, D.H. 로렌스를 동시에 떠올리지 못한다.

책을 읽어주는 일을 직업으로 한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책 제목은 밝히지 말자. 다만 레몽 장의 <책읽어주는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일은 ‘사장’이 책에 쓰인 교양을 필요로 할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 그에 관한 적절한 책을 생각해 내고 그 책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하며, 책을 읽는 행위가 ‘돈벌이’의 수단도 되지 않을까 라는 가상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정혜윤은 그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無償)의 독서가다. 기실 독서가 주는 쾌락 외에 다른 것을 전제로 한 책읽기는 가짜들의 독서다. 이 기준에 비춰 나는 대부분의 경우 실용적 필요에 이끌려 책을 읽었으니 분명 ‘가짜’의 반열에 들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책읽기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직업이니(내가 아는 대개의 피디들은 책이 아니라 술에 탐닉하더라.) 그녀가 보여주는 무상의 책읽기는 온전히 ‘순정한 의미에서의 독서’다. 우리나라에 이런 순정한 독서가, 참으로 흔치 않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였던가, 한겨레21 쯤 되는 잡지에서였던가. 저자의 책읽기를 보여주는 몇편의 글을 읽었던 듯한데, 온전히 이 여자의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영국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건네준 사람 또한 무상의 쾌락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눈밝은 자들은 자기류의 사람에게 눈을 반짝이게 마련인 모양이다. 저자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을 문학전집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거나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첫째 권부터 차곡차곡 읽어 내려간 적이 있나 보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편력으로 그리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야 스탕달을 읽고 몇권 건너 뛰어 세익스피어를 읽다 말고, 에드가 알란 포우에 빠졌다가 모비딕을 반쯤 읽다가 세르반테스에 낄낄대다 제 풀에 지쳐 무협지로 건너갔으니 이건 질투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일 것인가. 그런데, 반가운 것은 세상에는 비록 소수나마 이런 전업독서가(?)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누추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진 누구에게나 그런 욕망은 직접적으로, 혹은 변형된 채로 존재한다. 물론 전업은 생계를 위한 시간 외의 시간을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책의 경중을 잴 줄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이문열의 소설과 <해리포터>와 동일한 반열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침대에 누워 읽다가 소설에 감명해 다시 정장을 하고 책상에 정좌한 채 책을 읽었다는 러시아 비평가의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본>을 소설책 읽듯 읽어치우는 자들은 마르크스가 애용한 대영박물관에서 아동노동에 관한 노동감독관의 보고서를 읽거나 연상해내지 못한다. 정혜윤이 가진 독서가로서의 장점은 이런 ‘기우뚱한 균형감각’이다. 그녀의 책읽기에 일단의 신뢰를 보내는 이유다. 바흐의 파르티타의 존재를 가르쳐준 시인 김갑수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고 청승을 떨었다. 나는 도대체 왜 책을 읽는가. 정혜윤의 책읽기를 훔쳐보면서도 그랬다. 왜 책을 읽는가. 그것 역시 이 지상의 삶이 괴로워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일상과는 다른 회로, 다른 자전축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낸 것, 기꺼이 그 속으로 망명하고자 했던, 잠깐의 허깨비일지라도, 우리는 결국 '바다로 향해 날아간 나비'처럼 그렇게 책에 머리를 콕 박고 망명을 꿈꾸는 것이 아닐 것인가.   

 

 

By homely gift and hindered Words
The human heart is told
Of Nothing —
"Nothing" is the force
That renovates the World — 
 - Emily Dik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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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1-0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37년, 방바닥 이불 신세로 살아왔는데
정혜윤 이 양반 '침대와 책'보면서
침대 생활이 부러워진 적 있소.
사실 침대는 섹스의 보조 도구인 줄로만 알았다오.
요즘 정혜윤을 김경과 겹쳐읽고 있는데
둘 덕분에 그나마 우울을 달래고 있는 중.

모든사이 2010-11-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김경이 패션지 기자였던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좀 '가짜'에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저널적 잡식을 버무려 비틀린 글쓰기를 해댄다고 해서 내공이 깊은 것은 아닐 테니 말야.

이진성 2010-11-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짜면 또 어떻수? 대통령도 해먹는 세상인데...

트레바리 2011-07-1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최근에 이분이 <제인 에어>에 대해 쓴 짤막한 글을 어디서 봤는데, 개성은 강해 보여도 썩 명쾌하고 조리있단 인상은 받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말씀하신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은 좀 떨어지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뭔가 직업상의 餘技라는 느낌도 짙었는데, 그렇기에 점수를 더 받는지도 모르지요. 호평하셨는데 속단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자리에 놓인 말'은 아마도, 조나단 스위프트의 "Proper words in proper places make the true definition of a style"이라는 명제에서 온 것 같습니다. 아울러, 마지막에 덧붙이신 에밀리 딕킨슨 시의 明譯을 한번 부탁드리고 싶군요..^^

모든사이 2011-07-16 17:02   좋아요 0 | URL
스위프트라니, 인용의 전거를 찾아내시는 내공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제인에어>에 관한 글은 한겨레인가에 실린 에세이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정혜윤의 책읽기를 대체로 신뢰하는 편이라서요.. ^^ 그리고, 피디라는 직업과 전업독서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문학전공자로, 문학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직업상의 '여기'일 수밖에 없겠지요. 저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고요. 가끔 그 '여기'만으로 먹고 살수는 없나 하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ㅎㅎ 디킨슨의 시는 강은교 선생이 번역한 민음사판 세계시인선에 실린 시입니다. 강은교의 번역은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인간의 가슴은 듣고 있지/허무에 대해 - /세계를 새롭헤 하는/힘인 허무-" -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라고 되어 있군요.

트레바리 2011-07-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라는 말을 제가 좀 폄하하는 의미로 쓴 것 같은데, 비전문가가 써도 '여기'같지 않은 글을 염두에 둔 뜻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전문 분야인 만큼, 좀 더 신중과 성의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뭐 이런 얘깁니다..^^ 적어도 이 서재의 리뷰들은 '여기'라는 인상은 주지 않거든요. 암튼 한겨레21의 <제인 에어> 소설평 딱 하나만 읽고 딴지 걸 순 없지만, 글이 참신하고 재밌는 건 사실인데, 글 풀어나가는 방식이 좀 따라가기 힘든 데가 있다는 저의 까탈스러운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이런 건데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타인으로부터 오는 격려와 신뢰, 다정한 마음이 한 사람이 무사히 뒤틀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노력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제인 에어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에서, 물론 앞뒤 문맥을 보면 무슨 얘긴지는 알겠는데, 이 자체로 세 문장을 각각 또 서로 이어서 읽어보면 다소 모호하고 비약이 있지 않나 합니다..(이런 부분은 예를 더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전문가 중심의 잣대로 판단하는건 아니지만, '여기'라도 '여기' 같지 않은 철저함이 더 귀감이 되잖을까 싶네요..^^ 디킨슨 시는 조금 전에 저도 민음사판에서 우연찮게 확인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적어두신게 오히려 낫군요..^^ 조나선 스위프트는 예이츠, 조이스,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씽 등과 함께 아일랜드 작가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혜윤씨 글은 앞으로 더 읽어보겠습니다. 기독방송 피디로서 독서의 달인이라면 과히 드물고 그러니 소홀히 볼 분은 분명 아니겠지요.. 답글, 감사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07-16 20:48   좋아요 0 | URL
아일랜드 작가 중에 사무엘 베케트가 빠지면 섭섭하겠지요.. 더블린에서 파는 티셔츠를 보니 베케트와 예이츠, 조이스 세명을 앞자락에 넣은 게 있더군요. 정혜윤은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널리 확산시킨 공로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