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딱 절반이 끝났다. 이 세월은, 책으로 요약하자면, 빅토르 위고와 괴테,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에서 봄 사이는 다섯권 짜리 민음사판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두 번째 기간에는 괴테의 <친화력>과 그에 관한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을 읽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6월의 마지막 이틀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읽으며 이른 더위를 삭혔다. 위고를 읽는 와중에 로베스피에르 평전과 그의 연설문집,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과 같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읽었고, 김형경의 <외출> 같은 소소한 소설들과 업무용 참고도서들과 리포트들을 읽기도 했다. 지금은 어제 책장을 덮은 츠바이크 소설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시간이다.

 

<레미제라블>은 스케일과 문장, 스토리와 교양이 백과사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라서 짤막한 리뷰 정도로 마무리하기 어려운 대작이다. 누군가는 1권의 첫 부분에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오는 미리엘 주교에 관한 부분을 보다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말한다. 이 대하소설을 읽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그 대목인 셈이다. 가난한 자의 친구이자 기독교적 성인의 경지에 오른 그의 삶은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 하더라도, 도덕적 설교로 범벅된 소설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장발장의 삶을 예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장발장의 남은 삶의 규제적 원리로 작용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를 모델로 삼은 한 사내의 속죄와 자기구원의 드라마다.

 

나로서는 이 소설의 기본줄거리(미리엘-장발장-팡틴-코제트-마리우스로 이어지는 주인공들이 엮어내는 사랑과 헌신의 드라마)외에 주변적인 삽화들이 더 관심이 갔다. 18326월 봉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바리케이트의 구조와 역사,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혁명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길고 장황하게 묘사를 한다. 그중 가장 압권은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파리의 하수도에 대한 설명이다. 중세 때부터 건설이 시작된 파리의 지하 하수도에 대한 위고의 묘사와 설명은 그 자체로 도시사회학, 도시건설사에 대한 한편의 작품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런 대목들을 보면서 왜 이 소설은 유독 다이제스트판이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장발장은 기구한 운명 속에서 저지른 사소한 죄 때문에 평생을 속죄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그는 초기자본주의 시기에 등장하는 공장제 수공업 시대의 자본가이기도 하다. 그가 공장경영주로서 재산을 모으는 과정이나(자본가로서 그는 구시대의 수공업적인 기술을 대공장제 기술로 대체하는 혁신가다), 자신의 재산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모습에서 그의 자본가적 면모는 아주 두드러진다. 영화에서처럼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을 예찬하고 고무하는 혁명의 서사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 인간의 속죄와 구원의 드라마,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이야기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을 것 같다. 동시에 그것은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가 가진 비윤리성에 대한 사회사적 고발이기도 할 것이다.

 

괴테의 <친화력>이 던진 소설적 충격(?)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괴테는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근대 화학의 발상법을 빌어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 끝은 고전주의자괴테와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파국이다. 그러니까 화학 성분 사이의 친화작용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인위적으로 적용시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실험자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자연의 질서(과학법칙)와 인간 세계의 차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의외성과 배반에 이르기까지 괴테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와 달리 냉정하고 가차 없는 비극의 연주자가 되고 있다. 이는 지상의 질서는 괴테식의 진정한 사랑과 불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랑은 저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벤야민의 괴테 해석은 이 소설속 이미지와 상징, 그것의 신화적 의미를 벗겨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가 뛰어난 비평가인 이유는 그의 해석이 표피적인 데 그치지 않고, 그 심층적 의미와 신화적 의미를 끄집어 내어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암시적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여전히 버겁고 머리 아픈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가령, ‘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 : “삶의 카오스적인 요소로서의 물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몰락을 가져다 주는 성난 파도의 모습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수수께끼같은 정적속에서 위협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한 사랑하는 연인들은 파멸한다. 단단한 땅의 축복을 스스로 물리치는 곳에서 그들은 정체된 물에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의 에두아르트와 오필리에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신화적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가차없는 비극적 인식이 차라리 지상의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은 문지의 대산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그의 소설과 평전들은 꽤 오래전부터 애독목록이었는데, 과연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아들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2차대전 중에 유럽 인문주의의 몰락을 비관하여 자살한 그의 드라마틱한 삶만큼이나 <낯선 여인의 편지>이래 그의 소설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과 같은 평전들은 언제나 매혹이었다. 프로이드와 아인슈타인도 그의 애독자였고, 2차대전 이전에 유럽에서 6천만권이 팔린 소설가였으니, 하물며 나같은 삼류 소설애호가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작품인 <어제의 세계>는 일년 이상 2장에서 머물러 있으니, 게으름이 책읽기의 마력을 압도하는구나!)

 

<초조한 마음>연민에 관한 이야기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츠바이크가 작중 인물인 콘도어 박사의 말을 빌어 정리한 연민은 두 가지다 :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밀러 소위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마비된 여성,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그녀의 집을 계속해서 방문한다. 그녀가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을 청하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생기발랄하던 소녀였던 에디트는 이 사고로 인해 신경질적인 환자로 변해버렸고, 백만장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치료하느라 혼신을 다한다. 호프밀러에게는 점점 강렬해지는 연민, 에디트에게는 그에 대한 사랑이 점차 싹트게 된다. 연민과 온전히 양립할 수 없는 사랑은 이 두 사람과 두사람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심리 드라마가 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절친이자 프로이드가 애독한 책의 저자답게 츠바이크는 이러한 심리를 대단히 탁월하게 묘파해낸다.

 

연민-사랑 사이의 비대칭 속에서 호프밀러는 오락가락한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나아가 그 연민에 대한 책임앞에서도 그는 무기력하고 혼돈스러워한다. 에디트의 주치의인 콘도어의 말을 빌자면, 그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채 자신의 몰락과 한 여인의 죽음, 그리고 그 여인의 가족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에디트는 호프밀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서 환희와 자학, 냉소와 신경증, 독기와 애절함 사이를 숨가쁘게 오간다. 어린아이-환자-성숙한 여인이라는 세 층위를 오가는 여성의 심리를 츠바이크는 매우 섬세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은 1차대전이라는 전화속에서 파국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민이 타자로 향할 때 그것은 소박한 동정에서 그칠 수도, 숭고한 헌신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루카치가 <감정교육>을 분석하면서 말한 환멸의 낭만주의이래, 근대적 개인의 정조를 지배하는 한 정서는 멜랑콜리일 것이다. 그 멜랑콜리는 연민이 타자가 아닌 자신으로 향할 때 발생한다. 그러니까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발생사적 기원은 자기연민이고, 멜랑콜리는 그것의 심리적 표현일 것이다. 연민이 초래하는 이 사랑과 환멸의 막장 드라마, 내게는 자기연민의 내력과 표정들을 성찰하는 텍스트였다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였던 그림자

남미판 386세대의 후일담 소설. 혁명은 가고 남은 자는 먹고 살아야 한다. 후미진 뒷골목 주택에서 집단으로 서식하는 이 왕년의 투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찌질하다. 피노체트 이후 30여년, 이들의 그림자는 길고 우울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실패한 혁명 이후의 풍경을 보고자 했으나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

 

 

 

 

일단 웃고 나서 혁명

오르한 파묵 때문에 들추게 된 터키 소설. 우디 앨런 소설 이후에 이렇게 유쾌하게 본 소설이 있을까. 풍자는 예리하고 유머는 도를 넘지 않는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동경한 유신의 주역들이 떠오르는 장면들. 군인과 정치가, 언론과 혁명가들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터키판 돈 카밀로와 페포네? 정치풍자 유머 소설로는 최고수준이다.

 

 

 

비틀거리는 여인

이 우익 파시스트에게 이런 정도의 타자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니. 연하의 남성-유부녀 사이의 내밀한 감정을 얇고 여린 꽃잎 들춰내듯 묘사해내는 미시마 유키오의 감각. ‘도덕에서 관능으로, 내부의 격렬한 들끓음이 차분차분한 외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본적 사랑의 존재론. 다른 우주에 대한 이해, 컴컴한 우물을 들여다보는 기이한 각성의 순간들. 인물의 위치를 반대로, 거꾸로 베껴쓰고 싶은 욕망.

 

 

 

 

 

위풍당당

유쾌한 성석제의 귀환, 그는 B급 정서를 가진 동네 양아치를 그리는데 가장 탁월하다. 거기에 맞서는 우직하고 순박한 자들의 원시적 매력까지도.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는 잡것들이 가족 아닌 가족을 이루고 몸을 부려 하루를 먹고 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자리/포옹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설가다. <탐닉><단순한 열정>의 이 여자는 자기를 팔아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은 한 젊은이를 매혹시키고, 그 놈은 33살 연상의 이 소설가와 연애를 하고, 그 이야기를 팔아 소설가가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지갑에서 툭 떨어지는 동구권 외교관의 그 사진. 넘어설 수 없는 절망의 절벽.

 

 

 

 

어머니의 연인

처음 읽은 스위스 소설. 미약한 처음부터 창대한 내일에 이르기까지의 헌신과 배반. 이탈리아 북부에서 겪은 무솔리니 군대. 실제와 허구가 교차하는, 부성에 대한 애증,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

 

 

 

 

 

 

소셜 정치혁명 세대의 탄생

그가 한국 출신의 정치학자라는 게 이런 책을 쓰게 했을 터. 언제나 부분에 대한 확대해석은 전망의 과잉으로 나타난다. 징후적 이해로서는 동의할 만하나, 대안적 질서의 창출로는 난망. 언제나 과잉대표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끝없이 경계할 일.

 

 

 

 

 

디지털 시민의 진화

디지털 시민은 격자 속에 갇혀 있다. 광장은 사라지고, 장벽으로 가로막힌 골목에서 애들이 놀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시민들을 호명해내었으나, 그 진화는 현재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로막혔다. 디지털 생태계의 변동에 대한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현장밀착적이다. 인터넷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이면서 섬세한 애정이 아니라면 쓰여지지 못했을 것.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글쓰기가 혁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글읽기과 글쓰기에서 혁명은 시작된다는 전언. 과연 혁명은 펜과 종이쪼가리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인식 이전에 구체적 삶이 있었다는 유물론에 대한 공박? 또 한명의 재기발랄한 아사다 아키라를 보는 느낌. 그런데, 왜 일본 젊은 지식인들의 책에서는 사기성이 그리 진하게 느껴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기억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출판사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이건 대학시절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긴 버릇인데, 그래서인지 집에 있는 책도 출판사별로 정리를 해 놓고 있다. 이건 사실 미학적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 별로 총서류를 내놓고 있고, 이 시리즈물들은 대개 디자인도 훌륭하고 가지런히 꽂아 놓을 때 보기도 좋기 때문이다. 이사를 한 뒤 출판사 별로 책을 정리하고 나서 훑어보니 내가 선호하는 출판사들이 한눈에 정리가 되었다.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후마니타스, 돌베개, 새물결 등 대개가 인문사회과학 책을 내는 곳들이었다. 흰색 바탕에 빨간 띠를 두른 문학과지성사는 책을 한데 모아 꽂으면 방안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디자인이나 책 장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책들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더 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읽고 밑줄을 긋고 책장에 꽂아놓은 책들은 문지도 창비도 아닌 민음사의 책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중 가장 많은 책들도 바로 이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민주주의가 창비, 문지, 민음사, 한길사 등의 출판사에 큰 빚을 졌다는 철학자 박구용의 말을 빌자면, 내 생각과 세계관은 이 출판사로부터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아마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젊은날의 초상> 읽기에서 시작되었을 민음사 책에 대한 선호는 지금도 여전하다. 오늘의 작가총서, 오늘의시인총서, 세계시인선, 벤야민과 아우에르바흐가 들어가 있는 이데아총서, 김우창·유종호·고은·김춘수 전집, 수많은 단행본들, 그리고 모던클래식과 세계문학전집. 심지어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셜록 홈즈 전집을 낸 황금가지와 칼 세이건이 포함된 사이언스북스. 비룡소의 어린이 책까지 민음사와 그 방계 출판사는 오랜 세월 내 외로움과 고독의 동반자이자 지식과 안목의 밑거름이었다.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자서전 <>을 읽은 것도 이런 저간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 그에 관해서는 김현과 고은, 김병익 등의 책에서 간헐적으로 읽은 바 있으나 그의 육필로 그의 생애와 민음사의 뒷이야기를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 자서전에 싣고 있는 소설 자유풍속을 오래 전 선배의 서가에 꽂힌 50년대 서울대 문리대 문학회지에서 읽은 기억도 난다. 맥파로라는 인상적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썼던 문청출신의 사장이라니 과연 이 출판사의 책들이 왜 문학과 인문학에 집중되었는지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의 품성과 인간적 교유, 가치관과 행태마저도 고스란히 이 굴지의 출판사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하룻동안 후딱 읽어냈는데, 그만큼 흥미롭기도 했고, 내가 가진 특유의 호사취미에 들어맞는 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일본의 이와나미 쇼뗑이나 프랑스의 갈리마르 같은 출판사들은 나름의 고집스런 자기 원칙과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에도 나름의 인문사회과학의 에콜을 형성하고 있는 창비나 문지같은 출판사가 있다. 그러나, 민음사는 김우창과 유종호, 이남호가 편집위원으로 있던 <세계의 문학>이 잘 보여주듯이 민음사는 특정한 에콜과 상관없이 폭넓은 의미에서 인문주의적 시각을 표방하고 있었으며, 좌와 우(라기 보다 자유주의적?)를 아우르는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어느 출판사보다 기민하게, 그리고 때로는 더 선도적으로 트렌드를 읽고 유행을 만들어내는 책을 내놓았은 곳일 터이다, 나쁘게 말해 상업주의적 감각에서는 우직한 창비나 문지보다 훨씬 윗길이었고, 책을 펴내는 감각도 탁월했다. 여기에는 김승옥, 정병규, 박상순으로 이어지는 탁월한 북디자이너들의 기여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사회의 문학(인문) 세대의 어떤 부침같은 것이 엿보이기도 한다. 박맹호 곁에는 신동문과 고은, 김현, 김우창, 유종호 등이 있었다.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6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문학의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가장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주역들이다. 고은의 감성, 김현의 문학적 감식안, 김우창의 인문주의, 유종호의 탁월한 비평이 없었더라면, 이 출판사의 오늘도 없었으리라. 김현이 쓴,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늘의 시인총서 발간사는, 개인적으로 20세기 한국문학이 산출해낸 가장 탁월한 문장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헌책방 순례를 취미삼아 다닐 때, 눈에 잘 띄이지는 않지만 보는 족족 샀던 책들이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정현종의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가 끼어있는 오늘의 산문정신 시리즈였다. 나온 지 오래되었어도 장정이나 편집, 필자와 글도 결코 낡지 않은 책들이었다. 헌책방에 쌓인 저 수많은 책들 가운데 90%는 다시 읽히지도, 읽을 필요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일본어 중역의 날림 번역본 소설들, 디자인이라 할 수 없는 장정, 몽롱하고 애매하며 순응주의적인 긍정의 철학을 설파하는 에세이들 가운데 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오롯하게 그 현재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책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풍화작용과 패러다임의 변혁을 겪고 나서도 남는 것, 사상과 콘텐츠로서만이 아니라 물질로서의 책도 남을 수 있어야 하는 것,

 

박맹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우리시대의 한 탁월한 출판편집자가 그런 책을 낸 사람중의 하나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자아버지를 두었으나 그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인문출판의 커다란 산실을 만들었다. 그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지만 대개 저자를 만나고 책을 만드는 것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수천그루의 나무를 희생하여 출판시장에 상품을 내놓는 일일지라도, 지금 세상에서는 가장 를 짓지 않고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거나, 남의 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강탈하거나, 현혹과 요설과 악문으로 살아가는 일이 대부분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일진대,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 그게 가장 행복한 직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을 통해 본 박맹호의 삶은, 아주 부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뒤늦게 대선 이후 힐링용영화라는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퇴근 후 집에 가다 문득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신촌의 한 극장 뒷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앤 해서웨이의 표정연기에 감탄했고, 휴 잭맨의 부실한 노래실력에 실망했지만, ‘Do you hear people sing’, 이 노래가 합창으로 흘러나올 때 나도 눈물 몇방울 흘렸다. 어떤 집단적 열망의 표현을 감성적으로 극대화시키는 것은 뮤지컬/오페라 같은 장르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승리의 기억보다는 패배의 쓰라림이 정서적 울림이 더 컸다. 언제나 현재의 성취는 좌절되고, 미래는 유보된 채로 남는 것.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프랑스 혁명은 종종 성공하기도 했지만, 기실 끝없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흔히 근대 프랑스의 혁명이라면 1789년의 대혁명과 1830년의 7월혁명, 그리고 1848년의 혁명을 꼽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1832년의 6월봉기는 1789년 혁명의 시작에서 1875년 공화국 헌법 채택에 이르기까지 80여년 혁명 역사의 소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민중들의 봉기는 파리콤뮌의 비극이 잘 보여주듯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시체와 무덤으로 쌓아올린 비극의 역사가 근대 프랑스의 공화정이다. 공화정, 총재정, 왕정, 입헌군주제 등 혁명 이후의 정치체제 변동도 현란하다. 그러니, 18세기 말 ~ 19세기의 프랑스는 영화로도, 소설로도 그만한 소재가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영화를 보면서 빅토르 위고가 왜 소설 <레미제라블>의 첫 대목에서 성인의 경지에 오른 미리엘 주교와 늙은 국민의회 의원을 등장시켰는지 깨달았다. 소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을 회개와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일흔 다섯 살의 주교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된다. 장발장의 이후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이 소설의 주제를 삶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위고는 이 소설의 1부 앞 부분에서 그와 늙은 국민의회 의원과의 만남을 꽤 길고 상세하게 풀어놓는다.

 

국민의회는 구체제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귀족과 성직자에 맞서 제3신분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공화주의 의회다. 주권이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음을 천명한 국민의회는 바로 그 자체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1812년 이후의 상황은 국민의회도 국민공회도 붕괴되고 나폴레옹도 물러간 왕정복고 시기로, 루이 왕가인 부르봉 왕조(1814-1830), 그리고 오를레앙 왕정(1830-1848)이 지배하던 시기다. 그러니, 옛 국민의회 의원은 몰락한 혁명가요,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일종의 후일담인 셈이다. 그는 혁명이 가져온 혼란과 분노에 대해 지적하는 미리엘 주교에게 이렇게 말한다.

 

루이 16세로 말하자면, 난 반대했소. 나는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내게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러나 악을 절멸시킬 의무는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소.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는 매음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 상태의 종말, 아동에게는 암흑의 종말이오. 나는 공화제에 찬성함으로써 이와 같은 것에 찬성한 거요. 우애와 화합, 여명에 찬성한 거요. 편견과 오류의 붕괴를 도운 거요. 오류와 편견의 붕괴는 광명을 가져오지. 우리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렸소. 그리하여 비참의 도나기였던 낡은 세계는 인류 위에 나동그러짐으로써 기쁨의 항아리가 된 거요.”

 

프랑스 혁명은 이유가 있었소. 그 분노는 미래에 용서를 받을 것이오. 그 결과는 더 나은 세계요, 그 가장 무시무시한 타격으로부터 인류에 대한 책무가 나오는 거요. (...) 그렇소. 진보에 대한 난폭함을 혁명이라 부르오. 혁명이 끝나면 사람들은 인정하오. 인류는 곤욕을 치렀으나 진보했음을.”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단말마처럼 내뱉은 웅변이다. 보수적인 프랑스 시골의 농부들에게조차 악당 G’라는 이름으로 외면받은 이 늙은 혁명 투사의 말을 듣고 미리엘 주교는 공감과 경탄의 감정을 느낀다. 주교-장발장, 프랑스 혁명-마리우스가 연관되는 방식은 그러할 것이다. 장발장은 혁명의 동참자이자 열혈 투사는 아니지만, 혁명을 통해 인간애와 자기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역시 왕정에 반대하다 추방당한 공화주의자였고, 1848년 국민의회 의원이자 자유와 진보의 신봉자였다. 망명지에서 대작을 써냈던 자신의 심정은 시골에 홀로 쳐박힌 이 늙은 국민의회 의원에게 투영되어 있었던 것.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하면서 사막의 열기에 시달리고, 밤의 추위에 떨며 사기가 땅에 떨어진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4천년의 역사가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연설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폴레옹의 연설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위의 국민의회 의원처럼, 당시의 프랑스 인들에게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를 인류와 역사의 움직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제왕정의 타도는 인류를 지배하는 앙시앙 레짐의 타도인 것이고, 그들의 혁명은 일국 혁명이 아닌 인류사적 혁명이었다는 인식 말이다. Viva Franc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농성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경찰특공대원의 진술이다. 검사가 “이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동료 한명이 불에 타 죽고, 화염병 불꽃이 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서 있던 그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화염병을 든 ‘농성자’였을 것이다. 그 너머를 보기란 그에게 아주 지난한 일이었을 터.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적대자’(이 표현은 경찰이 쓴 표현이다.) 앞에서 자신과 타자의 행위의 근거를 찾는 일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전근대적이고 폭력적인 개발 행위, 그것도 빠른 속도로 도심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자본의 욕망이 산출하는 ‘파시스트적 속도’, 도시주거의 최하부에 위치한 세입자들의 요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과 자본은 보이지 않는다.



1심 판결의 판사가 “공무집행중이던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많은 경찰관이 다치게 한 행위는 국가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하는 행동으로 법치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피고인들에게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할 때, 나는 웃고 말았다. 그에겐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양상에 대한 인식만이 있을 뿐, 그 사건의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 양상에 있어서도 경찰관의 죽음이라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만이 보일뿐, 화염병을 들고 망루위에 올라간 사람들의 행위가 갖는 의미는 보여질 않는다. “이건 재판이 아니야”라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판사에게, 진압 특공대에게 본질을 보라고 외쳐본들 이들의 인식의 피상성 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주말 늦은 밤, 혼자서 광화문 인디영화관에서 <두개의 문>을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권력의 비가시성’이라는 푸코의 주제가 줄곧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실제적인 결과를 산출해내는 ‘권력’은 보이질 않고, 권력주변의 이런저런 판단과 우연들이 합쳐지면서 어떤 내부의 컨센서스가 도출되고, 그 컨센서스는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더 잔인하게 현실의 변화를 추동해낸다.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내리게 되는 결론이다. 최초의 근원이 될,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당중앙’은 원작자를 찾기 어려운 문서거나 책임자가 불분명한 ‘의견의 집합’으로 존재한다. 영화는 용산참사가 일어나게 된 먼 원인을 이 정부 초기의 강력한 공권력 발동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변죽을 울리고 마는데, 권력의 작동방식이 보이질 않으니 그저 변죽일 수밖에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 MB는 파업과 농성, 시위와 같은 ‘떼법’이 사라지고 법치가 확립되면 GDP가 올라가고 경제성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사회의 보수적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이 믿음의 근거없음은 한국경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력한 공권력 행사와 그를 통한 ‘법치’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증적 자료도 근거도 없다. 노동유연성의 강화가 실제로 국민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실제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권력은 오히려 이런 보이지 않는 믿음의 집합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 허황한 믿음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대체로 자명하다. 언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와 강단의 추상적 이론들에서 연역되었던 논리들, 그 암묵적 믿음을 줄곧 확대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 이 모든 것의 결과들이다. 참으로 견고하여 도무지 깨지지 않는 이 비가시적 권력장치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재는재로 2012-07-0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도 개봉못할번 하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개봉했다고 하죠 이런 다큐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근처에는 개봉하는영화관이 없어 dvd나올때까지 기다려여 겠네요 강대국에 음모론이 활개치는 이유가 결국 투명하지 않는 정치정책들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을 숨기므로 인해 권력유지의 도구로 쓰는 북한의 경우 전면적인 정보 통제로 인해 국민을 통제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