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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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호크쉴드의 책은 이것이 두번째인데, 전에 읽은 <레오폴드의 유령> 만큼이나 그의 솜씨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그는 역사가도, 언론인도 아닌 저술가다.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와 주제를 택해 역사가만큼이나 치밀하게 자료를 모으고 해석하고, 언론인 만큼이나 현장감있게 기술한다. 우리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저술의 유형인 셈이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 자체에 대한 탐구라기 보다는, 이 국제화된 전쟁에 기꺼이 몸을 내던졌던  (주로) 미국인 국제여단 참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주 오래 전에 일본인 좌파 학자들의 논문을 모은 <스페인 내전연구>(형성사) 정도가 그동안 이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앤터니 비버)에 대해 내가 읽은 거의 전부였다. 그 책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약칭 POUM으로 불렸던 집단의 정통성을 주장했던 듯 하다. 그건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반복된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감동스러운 점은, 그리고 아주 읽을 만한 책이라는 점은, 스페인 내전이 전세계 좌파 지식인들이 반파시즘에 대한 신념에 찬 헌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감동스러운 대목은, 스페인 내전이 패전으로 돌아간 이후 국제여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살았던 '그 이후'의 삶이다. 버클리의 교수, 하버드의 대학생, 노조원, 미국 공산당 당원, 부자집 도련님, 헤밍웨이에서 마사 겔혼과 같은 언론인/소설가, 루이스 피셔와 같은 기자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총을 들고 스페인으로 가서 싸웠다. 그리고, 이들은 내전에서 패배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영역에서 인종주의와 싸우고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진보적 삶을 살았다. 프랑코의 국가주의자들에게는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군수물자를 보내주고, 전투기 부대와 지원부대를 파견했던 강력한 지원자들이 있었다.(히틀러에게는 2차대전을 위한 사전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실전경험을 제공했다.) 공화파에게는 소련이 있었으나 그들의 지원은 관료적인 무능에 겹쳐 무기도 형편없었고, 눈앞의 전투보다는 소련내의 숙청과 숙청의 국제화(트로츠키 암살과 스페인 내전 참여자들에 대한 숙청)에 더 관심이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이념적으로는 파시즘과 반파시즘, 반파시즘 내부에서는 혁명과 전쟁을 둘러싼 입장과 이념에 따른 분파주의적 갈등, 지역적으로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주의와 단일한 국가를 옹호하는 국가주의의 대립 등이 중첩된 전쟁이었다. 거기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고, 국가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묵인하거나 오히려 조장함으로써 공화파를 궁지에 넣은 영국과 미국(루스벨트), 프랑스가 있었다. 파시즘 세력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거대한 지원에 힘입어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반면, 공화파는 이념적 갈등과 내분에 시달리면서, 국제여단이라는 는 '인적 자원'외에는 별다른 지원이 없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했던 것이다. 공산당의 패권주의, POUM의 분파주의, 아나키스트들의 비현실적 헉명노선 등 그 무엇도 공화파의 승리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설사 공화파가 이겼다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아나키스트들과 공산당 간에 또다른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주책없이 가끔 눈물을 훔치기도 했는데,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이 보여주는 국제주의적 헌신이 눈물겨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해 목숨을 내건 자들의 운명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이런 가치에 대한 헌신은 탈레반이나 극우 테러리스트들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국제여단 참여자들이 보여준 가치가 파시즘이나 종교적 이념에 대한 경사와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국제여단 참여자들이 보여준 가치는 민주와 공화, 민중의 편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중의 하나인 전직 버클리대 강사이자 링컨 연대 중대장인 로버트 메리언의 아내는 이렇게 묻는다. "그 시대는 어디로 간 걸까요?" 파시즘에 맞서 자신의 조국을 떠나 보편의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야말로,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주 희미하게 존재했었던 국제주의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일깨워준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몇가지 기억할만한 사실들 .텍사코는 프랑코의 목숨줄이었다. 그들의 외상으로 준 석유 덕분에 프랑코는 승리할 수 있었고, 루즈벨트의 미국은 그렇게 국가주의자를 도와주었다. 빌리 브란트, 생텍쥐페리도 국제여단에서 싸웠다. POUM의 정통성은 공산당과 아니키스트들의 상대적 후진성 또는 반동성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노선이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정당하거나 온당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쟁은 삶과 죽음, 그리고 많은 민중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소련의 비밀경찰은 스페인 내전에 지원군으로 보냈던 거의 대부분의 장교들을 암살하거나 숙청했다. 영국군에 합류하여 독일의 루프트바페 공습을 막아내고 괴링의 공중전을 무력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던 폴란드 공군조종사들이 2차 대전 후 귀국했을 때, 감옥에 갇히거나 숙청당한 것과 비슷하다. 베리야의 NKVD는 역사의 야수같은 집단이었다. 폴란드의 카틴숲 학살, 유대인을 구출한 영웅 발렌베리의 죽음도 모두 그들의 작품이었다. 


"노 파사란"(No passaran, 그들은 통과할 수 없다)을 외친 광부의 딸이자 아내이자 재봉사였던 스페인 공산당 의원 돌로레스 이바루리(라 파시오나리아 La Pasionaria 예명)의 국제여단 해체 고별 연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취재'나 하고 겔혼과 '염문'이나 뿌리고 다닌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실제 전투에도 참여했다), 조지 오웰은 POUM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나 국제여단으로 옮길 찰나에 공산당의 반동이 시작되었다는 것("POUM의 혁명적 순수성에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었지만 내게는 무의미해보였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5월 2일, 공산당이 품과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공화파 내부의 내전(무정부주의자 교환수가 공화국 대통령의 전화를 제지하면서 시작된 어처구니 없는 사건), 국제여단의 통제본부나 지휘부는 소련이 이 장악하거나 스탈린주의자들이 '관료적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 그리고 스페인의 가톨릭은 반동의 극치이자 종교적 가치를 스스로 부정했던 극단적 파시즘 세력이었다는 것. '오염된 서구사회'에서 유일한 정통 가톨릭임을 스스로 자임하여 프랑코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었다는 것. 이런 등등도 두루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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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대학도시 루뱅’(Leuven)의 시청광장 한 구석에는 청동으로 된 한 사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실물보다 작은 크기의 이 동상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골목 앞에 있어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제복을 입고 천상의 고고한 이상을 동경하듯,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남긴 흔적은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 거의 전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중세 최대의 인문주의자로 불리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EU가 주관하는 대규모 교환학생 및 장학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프로그램도 바로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태어난 고향의 이름을 붙여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1466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한 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가 살던 15~16세기는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마젤란의 세계 일주가 이뤄졌던 시대, 기사도의 몰락과 도시의 발전, 종교개혁의 서막이 올랐던 대격변의 시대였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에 수도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수도사 생활을 하다 25살에 카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사제는 교구에 매여 있어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는 캉브레(Cambrai) 지역 주교의 비서가 되면서 수도원 밖에서 생활을 하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유럽 최대의 인문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삶은 에라스무스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것이기도 했다. 1495년에는 파리에 머물면서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공부를 했고, 영국으로 건너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를 비롯해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깊은 교류를 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도 대학을 다녔고, 베네치아의 한 출판사에서는 책을 쓰며 지냈으며, 벨기에 루뱅에서도 글을 쓰며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학자로서 명성을 얻자 수많은 대학들이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그는 차라리 베네치아의 인쇄소 교정원을 택하거나 영국 귀족의 가정교사나 부자집 식객으로 살기를 원했다. 만년에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 정착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초상은 이 시기 당대 유럽 최대의 초상화가였던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이다.


<사진 : 루뱅시 광장 귀퉁이에 있는 동상>


그가 세계주의적 정신,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이같은 자유로운 정신과 다양한 곳에서의 학문연구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에도 정주하지 않았고, 머무는 곳은 모두 고향으로 알고 지낸,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이었던 그는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어느 한나라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와 인종, 계층으로부터 선별한 고결한 사람들을 커다란 교양인의 동맹체로 불러 모으는 것, 이 숭고한 시도를 그는 자기 삶의 본래 목표로 받아들였다.”(스테판 츠바이크) 유럽지역의 대학생들에게 지역과 대학의 범위를 넘어 자유로운 학문연구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종교개혁과 우신예찬’, 루터와의 갈등


에라스무스가 인문주의자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라틴어 인용문을 모은 <격언집 Adagia>를 출간하면서부터. 이 책은 식자라면 라틴어 문구 하나쯤은 인용해야 대접받던 당시의 지적 속물근성과 맞아 떨어져 전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자는 단순한 인용문 모음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해석과 논평이 덧붙여진 것이었는데, 르네상스가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참고서가 되어 중세의 지적 세계를 허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격언집>을 출간한 이후 에라스무스는 1511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 집에 머물며 일주일 만에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을 써냈고, 이어 <기독교 전사의 소책자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를 펴내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한 복판으로 들어서게 된다. <우신예찬>은 당대 교회에 대한 비판 때문에 금서로 취급받아 상당부분이 삭제된 채로 유통되었고 저자의 이름도 가려져 있었다.


사진 :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은 헤라클레스의 업적들이라는 제목의 책에 손을 얹고 있는 그림인데, 에라스무스의 업적이 헤라클레스 만큼이나 위대하다는 존경의 표시를 그렇게 표현했다.


이 책은 우매함이라는 부인을 내세워 풍자적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비판한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바보들'의 목록은 수사학자, 법률가, 철학자, 귀족들, 금전착취자, 신부, 군주, 추기경 등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우매함이라는 부인은 가톨릭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명함이 이 분들의 정신을 단 한번이라도 점령한다면 이 성스러운 신부님들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물을 잃게 될까요. 그 엄청난 부, 하나님의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직의 분배, 셀 수도 없는 사면, 그토록 다양한 세금, 향락, 쾌락의 자리에 불면의 여러 날 밤, 단식,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예배와 수천가지의 다른 힘겨움이 대신 들어서게 되겠지요.” 당대의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적 비판인 셈이다. 당시 교황을 피를 빨아먹는 거대한 거미로 묘사한 그림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우신예찬>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을 당기고, <기독교 전사의 소책자>를 통해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성서만이, 인간적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적 방법으로 교황중심의 교회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바로 1517년 비텐베르크의 대학 교회 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내걸며 개혁을 외친 마르틴 루터다. 그는 학생시절 눈 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신다면 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한 뒤 실제로 수사가 된 인물로, 가톨릭 교회에 대해 그들은 돈 통에서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간다고 가르쳤다고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다.

초기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친분을 유지하며 종교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고, 에라스무스는 교황에게 루터를 파문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질만큼이나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달랐다. 루터가 가톨릭 교회와 전면적인 전쟁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혁명가이자 선동가라면, 에라스무스는 관용과 타협, 공존과 화해를 역설한 온건주의자이자 대화를 통한 해법을 찾는 외교관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강경론과 비타협적 자세가 교회 내 보수 강경세력의 입지만을 강화할 것이라 우려했다.


(사진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가 그린 30년 전쟁의 모습)



탄핵당한 평화, 종교전쟁과 에라스무스


두 사람 사이의 불화와 논쟁은 종교개혁을 둘러싼 방법과 교리상의 논쟁이지만, 동시에 종교전쟁이 임박할 정도로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루터는 교회에 대한 공격을 선동하며 더 과격한 개혁으로 나아가면서 에라스무스를 그리스도의 가장 지독한 적이라 증오하며 결별하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루터파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며, 이후 닥쳐올 종교전쟁의 서막에 대한 두려움을 담아 루터에게 편지를 쓴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분별 있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교만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리고 폭도와 같은 그 태도가 온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오. 당신의 의지로 인해 이 폭풍이, 내가 그토록 이루고자 싸워왔던 그 화해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나를 분노케 하고 있소.”


에라스무스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에게만 전쟁은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하며, 1517유럽의 모든 국가와 민족들에게서 비난받고 쫒겨나며 죽임당한 평화의 탄핵을 말하는 <평화의 탄핵 Querela pacis>을 출간한 바 있었다.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평화와 화해를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루터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장 철회 요구를 거부하면서 결국 파문을 당했다. 1530년 에라스무스의 관용과 타협의 정신에 입각해 신구교간의 화해를 시도했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도 무위로 끝나면서 유럽사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긴 살육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의 역사를 상기해보면 현실에서의 에라스무스주의는 결국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급진적인 루터파와 기성 교회의 보수적 입장 사이에서 그의 평화와 인문주의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를 황제가 자문위원회 자리를 제공하고, 영국의 헨리 8세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가 초청장을 보내고, 유럽의 다섯 개의 대학이 교수직을 수여하고, 세 명의 교황이 존경의 편지를 보내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국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교도 지도자 토마스 뮌처는 루터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농민군이 수도원과 교회를 약탈하도록 부추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톨릭 도시 루뱅의 시민들은 에라스무스를 루터의 페스트균이라 비난을 퍼부었고, 대학생들은 그가 강의하던 강단을 뒤집어 버렸다. 신교도의 도시인 바젤에서도 그는 쫓겨나야 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혀 고전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인문주의를 통해 초국가적 이성’,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대립과 갈등의 와중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에라스무스의 패배는 한 명민한 지성의 실패라기보다는, 대립과 증오, 폭력과 반폭력이 맞서는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일 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 사후 유럽 신구교 국가 내부에서, 또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은 대략 8백만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것으로 추산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이 전쟁이 종결되면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라는 근대적 이념이 수립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오랜 고통과 희생 위에서야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 에라스무스의 후예들


에라스무스 평전을 쓴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그를 평화사상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의 제자 몽테뉴가 통찰과 관용을 계속해서 전파한다. 스피노자는 맹목적 정열 대신 정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디드로, 볼테르, 레싱, 그리고 회의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 그들이 동시에 모두를 이해하는 관용을 위해 편협에 맞서 싸운다. 실러의 문학에서는 세계 시민의 정신이 활기차게 일어나고,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요구한다. 톨스토이와 간디, 롤랑에 이르기까지 타협의 정신은 논리적 힘으로 폭력의 자위권 앞에서 자신의 도덕적 권리를 요구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 로망 롤랑의 반전주의와 같은 근대적 평화주의는 바로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통합의 선구자인 장 모네는 2차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 유럽이 다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별국가를 넘어선 국가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유럽통합운동을 불을 지폈다. 로베르 쉬망, 콘라트 아데나워 등의 정치지도자들이 유럽통합 운동에 앞장 선 것도 이런 배경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유럽연합(EU)의 출범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유럽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왔던 에라스무스적인 것에 기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화합과 평화야말로 에라스무스가 평생의 삶을 통해 추구한 가치였던 것이다. 과거 그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했던 루뱅의 시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운 것도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이 갖는 현재성 때문일 것이다.


(사진 :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화, 여기서 그는 한손에 잉크를, 다른 손에 펜을 쥐고 있다. 유럽 인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림)


그가 남긴 유산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서 더 뚜렷하다. 1987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2013년까지 300만 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누렸고, 후속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에는 2018년의 경우, 85만 명/95천 개의 기관이 참여해 235백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유럽 전역의 대학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던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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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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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작가였다. 뒤틀린 욕망과 서늘한 반전을 보여주었던 영화 <어톤먼트>와 젊은 날의 실수로 평생의 사랑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청춘들의 이야기 <체실 비치에서>.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는 외모에서부터 심리적 복합성을 드러내는 시얼샤 로넌이 작가의 퍼소나처럼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묘사보다는 서술이 도드라지는데, 이 서사적 기술은 치밀하고도 정교하며, 차가울 정도로 가차없다. ‘하드 보일드의 원조쯤 되는 토마스 하디의 계보를 잇는 영국 소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하여간, 뒤늦게 발견한 이 현대 영국작가의 작품을 내리 읽기로 하고 첫 장편으로 <이노센트>를 골랐다. 영화로 만들어진 <속죄><체실 비치>는 다음에 읽을 참이다.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베를린 터널’, 작전명 골드는 CIAM16의 합동작전으로, 19564월까지 일년이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CIA 지국장이었던 윌리엄 하비가 책임자였다. 19554월부터 플라타넨 길 26번지에 거주하도 있던 조지 블레이크는 작전 기획위원회 서기로 일하던 1953년에 이미 작전을 누설했다고 추정된다.” 이 냉전 하의 조그만 사건, ‘베를린 터널사건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베를린이 마악 동과 서로 나뉜 시기, 서방 연합군측인 영국과 미국은 동쪽의 소련 점령 지역 아래로 터널을 뚫어 동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통신을 도청하려 한다. 이언 매큐언은 이 에피소드에 로맨스와 살인, 배신과 회한을 버무려 한편의 잘 빚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냉전 시대의 스파이 소설이면서, 로맨스 소설이면서, 치정과 살인에 얽힌 엽기적 스토리이면서, ‘순진한 한 영국인의 뼈아픈 회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 소설은 영화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에 따른 흥행요소를 두루 갖춘 소설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계속 영화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성공을 가져다준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단단하게 서술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이 가진 극적인 재미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러내는 장치들, “두꺼운 타탄체크 스커트와 빨간 미제 캐시미어 스웨터 차림과 같은 정확한(아니 차라리 사실의 나열과 같은) 문장들. 이언 매큐언은 이름 모를 꽃들이라거나 따스해보이는 자켓따위의 두루뭉수리한 서술을 하지 않는다.

 

나이든 탓인가. 주인공 레너드 마넘과 마리아가 약혼을 하던 날 밤, 우연히 저지르게 된 마리아 전 남편 오토의 살해와 시체 유기장면은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우연한 충돌과 그에 따른 구두주걱으로의 살인,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토막을 내고 그걸 베를린 터널로 운반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언 매큐언의 서술은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다. 토막내기라는 행위의 급박함과 심리적 요동은 무정한 서술과 병치되어 효과가 배가되는데, 이를 이끌어나가는 솜씨는 과연, 대가의 그것이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의 다급한 심리와는 정반대로 그의 서술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일상의 베를린을 서술하고 묘사한다.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소설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노센트는 사실 역설적이다. 레너드 마넘이 순진하게냉전적 대결의 한복판에 서게 되고, 로맨스와 배신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순정을 배반당한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의 비극은 연인 마리아가 배신했다고 믿는 또 한번의 순진함에 있다. 그녀의 진실은 배반이 아니었고, 정작 배반은 그의 순진한 오해가 낳은 참사였던 것. 이언 매큐언은 마치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처럼 극적인 사건들의 시간이 지난 뒤, 먼 시간이 지난 뒤의 에필로그에서 사태의 진상을 후술한다. 심리적 시간의 지속과 그것을 급격하게 단절시키며 과거를 정반대로 재생하는 현재. 이 작가가 뒤늦은 후회와 가련한 회상에 능한 작가라는 사실을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줄리안 반즈, 가즈오 이시구로 이후 가장 즐겨찾게 될 것 같은 영국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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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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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것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두 책 모두 2차 대전과 그 전쟁을 몸으로 겪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장에서 죽어간 것은 주로 전투병인 '남자'들이었지만, 그 전쟁의 후과를 가장 잔인하게 겪은 존재들은 여자들이었다. 특히 '패전국'의 여자들이 그러했다. 아마도 고대의 전쟁 이후로 모든 전쟁의 양상은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어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의 여성들은 제국-식민 체제하의 최말단 '내부식민지'로서 이중적 억압과 폭력 속에 놓여 있었다. 스베틀라나의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주로 '민중'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지식인 여성이다. 그녀는 독일의 패전과 전후의 상황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예민한 자의식으로 러시아 병사들에게 '그짓'을 당한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드러낸다. 


"별안간 국민이 아닌 개인이 되었다."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포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쓰여진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진술이다. 국가라는 보호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에 결속되어 있는 '국민'도 사라졌다. 어제까지 독일의 승리를 떠들던 나치 지도부와 미디어도 없어지고, 쓰라린 패배를 온 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은 그저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의 집을 뒤지거나, 추위를 막기 위해 시체에서 신발과 옷을 벗기고, 감자 한알을 두고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것은 이제 낱낱의 개별자들이다. 여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자신의 몸까지 내줘야 한다. 아니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빵과 거래해야 한다. 함락직전에도 "구원이 가까워졌으며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그분'은 그리스도 만큼이나 믿을만하다고 장담"하는 나치 광신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베를린 시민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러시아군에 겁탈을 당한 뒤에야 '패전의 현실'을 깨닫는다. 


"나약한 성이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던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에서 남자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전쟁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담대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와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p.58)


그러니,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군대와 국가의 패배이자 남성성의 패배이기도 하다. 저자의 '애인'이었던 게르타가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애인이 쓴 이 일기를 읽고 나서 '겁탈'이라는 말을 듣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더니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나중에서야 스위스와 독일에서 출간된 것도 이해가 된다. 한국 남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흥분하고 분노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패배한 남성성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한 대목. "러시아 병사가 그녀를 끌어내려 하자 함께 지내던 어떤 남자가 이렇게 외쳤단다. '제발 빨리 따라가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잖아요'" 이를 두고 저자는 "서구 몰락에 대한 간략한 주석"이라고 덧붙인다. 그 몰락한 서구는 '남성성으로서의 서구'다. 러시아 병사들은 동물적 강간을 일삼다가 더 나아가 독일 여성들에게 순정함과 자발적 애정까지 요구한다. "그들은 정복한 향락의 대상에게서 단정함과 순박함과 고귀한 성품까지를 요구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몰락한 남성성 만이 아니라 폭력의 주체인 남성적 시각 저변의 무의식이 이러하다. 


이 내밀한 일기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익명으로 묻혀 있다가 나중에야 기자출신의 마르타 힐러스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녀는 유럽 10개국을 여행했으며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공산주의자로 러시아에 머물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전쟁을 맞았다. 그녀는 러시아군의 강제에 의해, 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준다.(아니 강제당한다) 그녀 주변의 독일 여성들은 나이가 들거나 어리거나 간에 만나면 서로 "너도?"라고 물을 만큼, 러시아군에 의한 집단강간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당시 270만명의 베를린 주민중 200만명이 여성이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베를린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선택.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마리 늑대를 불러들여야 해, 장교를. 가능한 계급이 높아야 겠지. 지휘관이든 장성이든, 내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전후의 혼란기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인 야만의 세월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한 사망자와 학살자 수를 러시아의 그것과 단순비교했을 때, 베를린의 집단 강간사태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은 러시아 민간인과 군인, 독일의 전격전, 나치친위대가 자행한 동유럽 유대인과 러시아인 학살과 강간은 훨씬 더 광범위했고 피해자도 많았다. 패전 당시 베를린 주민들도 자신들의 겪는 고통이 '인과응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독일인 집에 거칠게 침입한 러시아 병사들은 '아기'를 보자 갑자기 온순해지며 폭력을 멈춘다. 그리곤 독일군이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의 머리를 벽에 내리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군인들도 그곳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독일인들은 그들이 저 '농민'의 자식들인 러시아 병사들보다 더 문화적이며 문명화된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실상 독일 군대(그리고 히틀러를 지지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그들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 독일인들)의 폭력은 그들의 문화가 추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히틀러의 '대중독재'를 탄생시킨 독일적 특수성, 독일인의 기질들을 드러내는 대목들을 문득문득 보여준다. 스스로 낯설게 하기, 또는 자기 객관화할까. 내가 밑줄을 그은 대목들도 대개 파시즘을 가능케한 독일인의 심성구조를 보여주는 부분들이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질서의 원칙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 있으며, 우리는 따를 뿐이다." "어떤 남자도 여자-자기부인이든 이웃의 부인이든 상관없이-를 정복자에게 내준다고 해서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자를 거역해 화나게 만든다고 못마땅해할 것이다." "독일 민족에게는 빨치산 기질이 없다. 우리는 영도와 명령을 필요로 한다.""한 여자를 마주쳤는데, 안마당 구석에서 치마를 까 뒤집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보았다. 베를린에서, 독일 여자가 드러내놓고 이런 행동을 하다니." 


"베를린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은 거의 언제나 뉴스와 비화, 피비린내나는 사건, 시신발굴, 잔학행위들을 보도했다. 동부지역에 있는 대형 강제수용소들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불태워졌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신을 태운 재로 비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든 것이 두꺼운 장부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마저 꼼꼼히 기록하다니, 그야말로 착실한 민족이다. 밤늦게 베토벤의 곡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나는 방송을 꺼버렸다.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p.275) 


저자는 스스로 유럽 여러 곳을 가보았고, 공산주의, 의회주의, 파시즘을 바로 가까이에서 경험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나찌즘'은 그녀에게조차 내면화되어 있다. 파리 여행 중 뤽상부르 공원에서 만난 한 네덜란드 남자와 로맨스가 펼쳐지려는 순간, 그녀는 그와 함께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군인들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순간 남자는 "아, 총통의 딸이군!"이라 말한다. 자신은 네덜란드인이자 유대인이었던 것. 결국 그들은 다음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이 에피소드를 두고두고 곱씹는다. 그녀는 나치체제에 대한 찬성여부와 상관없이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비록 원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물들였던 공기를 들이 마셨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그녀의 이 도저한 자기고백과 성찰들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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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과 선군정치 - ‘미지의 나라 북한’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
헤이즐 스미스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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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마당과 선군정치>의 원래 제목은 'North Korea : Market and Military rule'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북한 : 시장과 군사정책' 정도가 될 것인데, 이 영어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된 '장마당'과 '선군정치'라는 단어의 뉘앙스와 전혀 다르다. 장마당=market, 선군정치=military rule인가? 알려져있다시피, 장마당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소규모 개인(또는 집단, 기업소) 간의 거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적 의미의 '시장'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시장의 초기적 형태, 원초적 형태에 더 가깝다. 선군정치 또한 북한의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채택된 '군사력 우선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독특한 배경을 가진 '북한식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에서 더 적절한 대체어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 제목, 장마당과 선군정치는 이 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북한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위협이면서 화해와 협력, 나아가 통일의 당사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부여받아 왔다. '햇볕정책' 10년이 지나 지난 두 정부의 '달빛 정책'이 이뤄지는 동안 북한은 화해와 협력의 대상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위협이라는 지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력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이자 그동안의 변화된 남북관계라면, 북한이 스스로 '최대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은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에까지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이라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 않다. 악의 축, 비정상국가, 악마적 제국, 인권유린의 나라, 사악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무자비한 독재국가 등 북한에 대한 수사학은 바뀌었으되 기본적인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에게 북한은 언제된 붕괴될 가능성이 내재한 국가였다. 서구의 시각에서는 지속불가능한, 이해불가능한 국가로서 여기에는 저자에 따르면 북한을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에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헤이즐 스미스는 북한에서 2년여 체류를 하고, 이 지역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온 사람이다. 최근 북한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서 이 책은 가장 신뢰할 만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서구인(미국)이 가진 북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한 '현장연구'와 실제적인 자료를 가지고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석이 취했던 내재적 시각과 한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외재적 분석틀을 활용하여 북한의 '실상'과 '변모', '평가와 비판'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이 크게 의지하고 있던 비정상국가론과 북한붕괴론에서 벗어나 북한사회가 가진 상대적 내구성, 밑바닥으로부터의 변화와 북한 체제 중심 세력의 정치적 군사적 선택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년 동안 읽은 북한 관련 서적 중 얻는 바가 아주 컸다.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만났던 한 북한전문가는 "김정은이 왜 지금 회담에 나선 거냐"라는 질문에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사태의 추이를 보면 그의 진단은 아주 정확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상황"은 '인민경제'가 바닥으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하여 경제성장에의 욕구가 비등점에 달하고 있고, 이제 활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경제제재에서 벗어나야 하는 형국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비핵화와 체제보장, 경제제재 해제를 둘러싼 '빅딜'은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타개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같은 북한의 선택 배후에 깔린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아주 적절한 참고서였다. 


그는 지금의 북한의 변화를 한마디로 '시장화'라고 규정한다. 북한에서 시장에 해당하는 장마당은 현재 전국적으로 500여개에 이르고, 이는 보다 광범위하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위기 시기인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개인의 사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당과 관료제에 의한 광범위한 국가통제가 이뤄졌다. 그러나 국가가 인민에게 '고통'을 감내할 것을 요구했던 '고난의 행군'은 역설적이게도 인민에 대한 국가통제가 완화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적영역'을 만들어 냈다. 국영 상점은 더이상 물품을 제공하지 못하며, 국가로부터 받은 배급표는 유명무실하고, 국영기업소는 가동되지 못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북한 인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야 했고,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거래'에 나섰으며, 자생적인 장마당이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굶주림과 같은 극한적 상태에서 가족의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성의 몫이었다. 장마당의 주역 또한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북한식 시장주의는 싹이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적부문의 팽창과 장마당 경제의 부상으로 북한은 불가피하게 2002년 경제관리개선조치라는 시장 질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시장화'는 이제 불가역적인 상황이 되었다. 김정은의 선택 역시 북한 내부의 자생적 시장화를 수락하고, 이를 활성화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인식한데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북한 사회의 내구성, 지배체제의 견고함을 말할 때 '시민사회의 부재'를 꼽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을 고려하자면 북한에 없는 것은 '정치적 시민사회'이지 이미 '경제적 시민사회'는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제 북한은 '제국주의에 맞선 애국심'에만 기댈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특히,  "청년을 시장화라는 사회적 역학으로부터 격리하려는 선군정책의 노력에도 벼락부자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역할모델을 제공했다."(p.319)


이런 점에서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비핵화 협상에 나선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들은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리비아 정권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고, 재래식 군사력에서도 남한에 한참 못미친다는 점(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연간 총 GDP에 해당한다)을 알기에 핵무장에 착수했던 것. "선군의 논리는 재래식 군사력과 외교수완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정권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대처방안은 '핵무장'이었다."(P.338) 그러니, 오로지 핵 하나로 체제보장과 경제제재 해제, 경제지원과 국교정상화까지 거의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하는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그리고 한국과 끊임없이 '쪼개기식 주고받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장사치'의 논리인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시장화, 위로부터의 핵무장과 비핵화 협상. 지금의 북한을 이해하는 두가지 키워드다. 


"냉전 기간 동안의 엄격한 명령경제에서 오늘날 시장화된 사회로 변모한 북한의 모습은 계획되거나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아니라 주민들이 외부적 내부적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수백만명의 소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하고, 거래하고, 판매하면서 민간경제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자기주도적 활동이 아래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부터 사회를 변모시켰다. 북한 사회의 변화는 외부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북한 주민은 생존하기 위해,그리고 드물게는 번창하기 위해 정부의 통제를 피해가야 했다. 북한 정권이 생명과 생계유지에서 시장화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공식 발표와 실제 생활 사이의 괴리는 심화되었다. 정권은 경제적 고난을 종식시키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은 중국과 남한의 더 나은 생활수준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선군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를 맞았다. 남한을 향한 북한 당국의 공격적인 수사는 북한이 남한보다 부유하지 않지만 더 정당성있는 한국임을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측면도 있었다. 오래전 디즈레일리가 언급했듯이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수단이었다."(p.355-356)


이 책의 초반부는 북한에 대한 서구의 일반화된 편견을 꼬집고 있는데, 이 부분은 또다른 의미의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한 지점이다. 1)우선 서구언론(그리고 한국의 보수언론 포함)의 보도와 달리 북한의 외교관들은 마약밀매와 위조지폐 혐의로 사법적 판결을 받거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2)북한의 핵탄두는 8개 내외로 추정되지만 미국은 2200개의 핵을 가지고 있어 비교불가능한 수준이다. 3)벼랑끝 전술은 북한의 특이한 외교행태라고 평가되지만, 세상의 모든 외교는 벼랑 끝 외교다. 4)미국은 북한의 무기수입을 금지시켰고 엄격히 통제했는데, 2013년 북한이 수입하려던 쿠바산 무기가 압류되었을 때, 그 안에는 '카스트로가 혁명을 시도했던 때'에나 쓰던 무기들이 담겨 있었다. 5)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정부가 인민을 굶겨 죽인 것은 아니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사자는 속출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북한의 출산율은 동남아 국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6) 어린이들의 보건상태가 고난의 행군 시기 최고조에 이르긴 했어도(체력저하율 15.6%) 곧 5%로 줄었고, 이는 동아시아 평균 4%보다 높은 것이다. 7) 북한의 기대수명은 보도와 달리 69세 정도로 식량부족으로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니다. 등등 


이같은 서구의 언론이 만들어낸 북한에 대한 '악담'은 끝이 없는데, 대체로 김정은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당과 국가의 통제가 이뤄지고 있기는 해도, '범죄국가'로서 '세뇌된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한 저자의 기술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가 남한의 친북한 학자이거나 서구 정부의 일원으로 북한에 머무른 외교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영국의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일차적 독자들은 '무식하면서도 용감하기 그지 없는 NYT, WP, CNN의 소위 북한 관련 기자들'과 군수산업체로부터 자금을 수혈받는 미국 싱크탱크의 소위 동아시아 전문가들이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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