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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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56)은 요즘 그의 애마 ‘풍륜’을 끌고 한강변에 나간다. 그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바라본 한강 하구의 풍광은 드넓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풍륜’은 그의 몸을 싣고 전국을 누볐던 자전거다. 그는 이 자전거를 끌고 한반도 남단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거기에 스민 삶의 사연들을 모아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두어 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에는 한강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취재수첩을 들고 거리에 서 있었던 현장기자였다. 3년 전에는 틈 날 때마다 아산 현충사에 가서 이순신 장군의 칼을 들여다봤다.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준 ‘칼의 노래’는 그렇게 탄생했다. 지난해에는 예술의 전당 악기박물관에서 하루종일 악기를 들여다보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최근 출간된 장편 ‘현의 노래’는 “악기들 내면의 맹렬한 적막에 관하여” 쓴 작품이다. 오랜 발품 끝에 작품을 얻어내는 그의 버릇대로라면 아마도 그의 다음 작품은 ‘한강’에 관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

김훈은 요즘 소설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는 최근 처음 쓴 단편소설 ‘화장’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1995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미문을 자랑하는 에세이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한국일보’ 기자, ‘시사저널’ 편집국장, ‘한겨레’ 부국장급 현장기자 등 30여년 동안 여러 언론사를 전전했던 그는 문장력에서 당대 제일 가는 산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자생활을 접고 마흔을 훌쩍 넘어 소설가의 길로 나선 지금 그는 단 네 편의 작품으로 최고의 작가 자리에 올라 있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김훈은 장편과 단편의 첫 두 편으로, 당대의 가장 으뜸가는 두 문학상을 석권한 최초의 작가이며, 어쩌면 앞으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을 오래 보유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그의 장편 ‘현의 노래’는 2001년 발표된 ‘칼의 노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후자가 임진왜란 당시의 무장(武將) 이순신을 다룬 것이라면, 전자는 가야의 악사(樂師) 우륵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의 사유는 3년여 세월 동안 ‘무기’에서 ‘악기’로 이동한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전쟁과 살육이라는 공통된 배경 위에 서 있다. 이순신은 전쟁영웅이었고 우륵은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무참한 살육전쟁을 치렀던 시대의 인물이다. 김훈은 말한다.

“무기가 추악한 것이고 악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 둘은 세계를 이루는 거대한 두 축이다. 살인의 도구와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도구가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통념을 뒤집어 ‘무기’가 가진 현실적 힘을 긍정한다. 동시에 ‘악기’ 역시 이전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본다. “잠든 악기 앞에서 그 악기가 통과해온 살육과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일은 참담했다.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었다.”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가야의 악사 우륵은 ‘배신자’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허물어져가는 조국 가야를 배반하고 가야금과 자신의 제자 니문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한 인물이다. 그를 두고 김훈은 ‘찬란한 배반’이라고 말한다. “소리는 인간이 살아서 귀로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죽으면 음악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조국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다.”

김훈은 대학시절 ‘삼국사기’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도망갔다는 대목을 읽는 순간 서늘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이순신은 정사(正史)에서 말하듯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살육을 감행해야 했던 ‘고독한 무사’다. 김훈은 이순신이나 우륵처럼 한가지 목표를 위해 삶의 모든 것을 내건 ‘순결한’ 인물들을 동경한다. 그는 자신이 ‘완벽한 테러리스트’라고 평가하는 안중근을 좋아한다.

그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화장’은 화장품 회사의 간부로 있는 중년 사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의 아내는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있고, 그가 연정을 품고 있는 여성은 자기 회사의 젊은 부하 여직원이다. 병에 걸려 밤낮으로 똥과 오줌을 싸는 아내는 그가 처한 비극적 현실이고, 싱싱한 육체와 젊음을 자랑하는 여성은 그가 실현하고픈 욕망의 대상을 뜻한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주인공은 전립선염으로 고통받고 있다. 삶은 비극적인 것이지만 욕망의 실현은 더더욱 어렵다는 김훈식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는 작품이다.

삶에 대한 그의 허무주의는 전작 ‘칼의 노래’와 이번 ‘현의 노래’에서도 줄곧 관통하는 주제다. 비극적 현실과 추악한 욕망 사이에서 ‘전립선염’을 앓으며 견디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한 생애다. 김훈은 자신이 ‘심한 마초’이며 ‘실패한 기자’고 ‘지독한 보수주의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시사저널 편집국장 재직시 한 대담 자리에서 ‘반페미니즘 발언’을 했다가 부하 기자들의 항의를 받자 서슴없이 직장을 때려치웠다.

군사독재 시절 자신이 독재자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썼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그저 공차는 것일 뿐인 월드컵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축구공’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절감해 대선 직후 스스로 ‘한겨레’에 사표를 냈다. 김훈은 조만간 자신이 기자로서 살아왔던 시대를 작품으로 쓸 계획이다. 그는 기자로서의 자신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내가 기자생활을 했던 그 시대 전체가 실패작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기자였던 나 역시 완전히 실패한 삶이 아닌가.” 그 스스로 다음 작품은 실패한 자의 ‘후일담’이라고 예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방송의 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와 김훈의 장편 ‘칼의 노래’를 추천하며 “뭐라 할 말이 없다. 놀랍다”는 평가를 내렸다. 노대통령은 ‘놀라움’의 근거를 제시하진 못했으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삶에 대한 김훈의 시선은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다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배설물의 냄새를 풍기며 추악하게 죽어간다. 김훈은 우륵의 죽음을 “오줌이 흘러 두 다리를 적셨다”고 묘사한다.

이런 비루한 죽음의 묘사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의과대 교수와 수련의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해 얻어낸 것들이다. 지독한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 일정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실’에 대한 집요한 탐구 때문이다. 일산에 있는 그의 집에는 ‘현의 노래’의 배경이 되는 경남 창녕·고령 일대의 상세지도가 벽에 걸려 있다.

그는 자전거를 끌고 가야의 흔적을 찾아 그 지역을 일일이 답사했다. 가야의 냄새는 찾을 길 없었으나 우륵이 바라봤던 신라 시대의 ‘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김훈은 자신을 실패한 기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가진 냉정한 정직성이라는 미덕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던 기자생활이 남긴 유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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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
에티엔 바랄 지음, 송지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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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로 주일 특파원을 지낸 에티엔 바랄은 현대 일본 사회의 독특한 특성을 해명하기 위해 ‘오타쿠’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 안목과 지식을 가진 열혈 매니어를 뜻한다.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문화산업 분야에서 일본이 보여준 성취는 바로 이들의 존재 덕분이다. 에티엔 바랄이 서울에 부임한다면 그는 ‘사이버 폐인’을 탐구대상으로 삼을 지도 모른다. 초고속 인터넷 가입률 세계 1위의 한국에서 사이버 폐인들은 전세대와는 전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며, 한국의 문화를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바꿔 나가고 있다.

‘폐인’은 “병이나 못된 버릇으로 몸을 망친 사람”을 뜻하는 부정적 뉘앙스의 말이다. 거기에 ‘사이버’라는 말이 붙었으니 ‘사이버 폐인’은 인터넷 중독으로 몸을 망친 사람을 뜻할 것이다. 이들은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디지털 노마드 등으로 불리다 최근에는 블로그족·디카족 등 활동유형에 따라 새로운 종족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이버 폐인’을 일컬어 ‘대한민국 신인류’라고 부른다. 이 말속에 스민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거기서 기성세대와는 다른 세대적 정체성을 찾고 있다. 황교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해부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머지않아 우리 사회의 주류집단으로 등장할 것”이다.

저자는 최근 몇년 동안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를 지속해 왔다. 한국인의 행동특성과 생활양식을 규명해온 그에게 이 공간은 오늘날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한국은 인터넷이 대통령을 뽑은 나라가 아니던가. 저자는 사이버 폐인들을 네버랜드를 찾아가는 동화 피터팬 속의 웬디에 비유한다. 이 ‘웬디들’이 만드는 세상에 대해 그는 낙관한다. “사이버 신인류가 새로운 주류집단으로 등장하면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더욱 더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그런 한국사회라면 세대 전환이라는 자연현상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겠지요.” 최근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사이버 공간을 통제하고 검열하기 위해 내놓은 ‘인터넷 실명제’는 이들의 문화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심리분석과 생태연구는 상세하고도 흥미롭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을 우려하고, ‘인터넷 중독증’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상당한 계몽의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삶에 중독됐다’라는 말이 없듯이 인터넷이 삶인 이들에게 ‘인터넷 중독증’이란 말은 애시당초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사이버 폐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책일 지도 모른다. 인류학자가 펴낸 책이 정작 연구 주제가 된 부족들에게는 읽히지 않듯이 말이다. 게다가 사이버 폐인들이 만드는 문화는 끝없이 변동중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들과 학자들이 따라잡기에는 이들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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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사 서남동양학술총서 25
김한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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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사’라는 제목은 낯설기 그지없다. 우리에게 요동(遼東)은 만주 일대의 옛 고구려 영토를 가리키는 지역 명칭일 뿐이었다. 고구려와 여진·거란·만주족 등이 거주했던 지역일 뿐 거기에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어떤 역사를 상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중간에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요동사’라는 저자의 주장은 자못 논쟁적이다. 이 책은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학계와 과잉 애국주의로 소수민족의 역사까지도 자신들의 역사로 아우르려는 중국 사학계 양편을 겨냥한다. 동아시아사에 관한 일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인 셈이다.

저자인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한국 혹은 중국이라는 ‘국가’의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7백4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통해 요동 지역의 역사에 드리워진 ‘민족국가적 관점’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려 한다. “고구려라는 국가는 바로 이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였다. 즉 고구려는 한국의 국가나 중국의 국가가 아닌, 요동의 국가로 역사상에 출현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같은 주장에 내포된 폭발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벌써부터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저자의 시각은 한국 사학자들의 비판목록에 올라 있다.

이 책의 출간은 중국 사학계 입장에서도 불편한 일일 것이다. ‘역사상의 요동’이라는 개념을 담은 저자의 발표문은 한·중 국제 학술대회에서 “한·중 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발표를 거부당했다. 저자의 또다른 저작 ‘한중관계사’는 중국어 번역을 마치고도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 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한 설법”으로 평가돼 중국에서 출간할 수 없었다. 역사학이 현실정치에 상당한 정도로 복속돼 있는 중국 사학계의 현실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쪽 사정도 비슷하지만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고구려사를 포함한 요동 지역의 역사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새로운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사료로 직접 사실을 전달하는 서술양식”을 택했다는 게 김교수의 말이다. 말하자면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라는 역사가 랑케식 실증주의인 셈이다. 한·중 양측에 현존하는 1차 사료들을 토대로 요하(遼河) 유역에 예맥계의 조선·부여·고구려,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명멸했다는 것을 논증해 내고 있다. 그는 고구려의 경우 요동국가로 출현했다가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요동과 한국을 아우른 통합국가로 발전했다고 본다.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해 한·중 역사학계가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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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8-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제목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까 만주 몽골의 역사군요. 김한규의 견해는 소수의견 이긴 하지만 아주 새로운 의견은 아닙니다.

유명한 것은 것은 프랑스 사학자인 르네 그루세가 쓴 유라시아 유목제국사』(L'Empire des Steppes, 1939.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서울, 사계절, 1998.) 인데 출판연도가 1939년이라는게 놀랍죠. 고유명사가 많아서 읽기가 괴롭긴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청사를 지배자인 만주 민족의 입장에서 보는 움직임이 있는데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블린 S. 로스키, 구범진 옮김, 최후의 황제들 – 청 황실의 사회사 가 있읍니다

지금까지의 중국역사 기술이 중국 한민족 중심이었다면 북방민족을 하나의 큰 변수로 보고 다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아주 바람직하다고 보고 흥미진진하기도 합니다. 중국사에 대한 큰 시각 교정효과가 있고 한국사도 다시 보입니다.

번역 안된 것으론 Peter Perdue 의 China March West 가 있는데 강희제의 신강지역 점령이 주제입니다.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이 뿌리가 어디 있나 알 수 있는 책이죠.

다만 너무 전문적이어서 청사나 중국사에 관심이 없으면 읽기 힘든 점이라는 게 단점입니다. 님께서 두꺼운 책을 힘들게 읽었을 것 같군요. 흥미있어 보이는 책인데 미국에서 이 책을 구하는 건을 그림의 떡일것 같군요.

모든사이 2011-08-21 09:44   좋아요 0 | URL
이 책이 나온지 벌써 꽤 됐으니 이제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새롭다는 것은 아마 이런 시각이 '국내 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외국의 학자들은 더 '보편적' 시각에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라스트 댄스
귄터 그라스 지음, 이수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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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중반을 넘어선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리 와, 나와 춤춰 주오, 내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 이리 와 내 곁에 누워주오, 나의 하나이자 전부인 그것이 일어서는 한”, 그리고 “이리 와 나를 지켜봐주오. 내가 물구나무 설 수 있는 지”라는 것이다. 춤과 섹스는 생의 열정을 가장 생동적으로 보여주는 몸짓, 그는 이 행위에 열광하고 있다. ‘물구나무 서기’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웠던 것처럼,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좌파적인 사유를 지속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책은 귄터 그라스가 시와 그림을 통해 생의 열정과 환희를 노래하는 시화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양철북’이나 ‘나의 세기’ 등 그의 대표작들은 번역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에는 그의 소설작품만이 소개됐지만 그는 미술대학에서 동판화와 석판화를 배운 조각가이자, 판화가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쓰고 그린 36편의 시와 32점의 그림을 싣고 있다.

연필과 목탄·색연필을 사용해 그린 그림들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격정과 열망이 흘러 넘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통의 표정을 짓거나 열락에 빠져 있다. 혹은 집단적 윤무를 하거나 바닥에 쓰러져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이 그림들에 담긴 것은 진한 에로스적 욕망이다. 탱고나 왈츠처럼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그의 시도 남녀의 몸짓을 따라간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두 그루 너도밤나무/부드럽게 움직인다. 춤추는 그들 주위로/내가 원을 그리며 돌자마자//미끈미끈한 줄기들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때마침 한줄기 바람 불어와/살갗을 어루만진다”(‘짝짓기하다’). 쓰러질 듯 격렬하게 춤추던 남녀는 이윽고 스스럼없이 성적 환희로 치닫는다. “먼저 유리잔들이, 다음에는 우리가/듀엣으로 쨍그랑거렸다/그러나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격렬한 부딪침’). 하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던 철학자 바타이유가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끈적이는 에로스 뒤에는 죽음에의 욕망인 타나토스가 엄습한다. “고통은 다만 가면일 뿐, 분장한 채로 우리는/미끄러진다, 가없는 평면 위를/발꿈치까지 따라온 죽음 위를.”

그렇다고 이 책이 말년을 앞둔 노작가의 쾌락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눈먼 폭탄은/숨쉬는 모든 것을 좋아하지”나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장군들은 이제/스크린 위에서 명성을 떨치는구나/그건 너무도 힘겨웠지/검둥이로서 자신의 역할을 기어코 흰색보다 더 희게 만드는 일이란/(…중략)/정복자 보스들의 글로벌 비즈니스를 위하여”(‘밀리터리 블루스’)같은 구절에서 파월 미 국무장관과 이라크전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거장에게 춤은 삶의 굴곡과 환희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그 열락 속에서도 ‘전쟁의 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깨어 있는 사유는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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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박천홍 지음 / 산처럼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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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차의 화륜이 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 4백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좌우에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함으로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려웠다.” 1876년 일본 수신사로 요코하마(橫濱) 열차에 탑승했던 김기수에게 기차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은둔의 왕국’ 조선에서 살아온 대다수의 조선인들처럼 그에게도 ‘근대’는 무엇보다 기차와 같은 신문물의 도래로 받아들여졌다. ‘근대’는 사학자들의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민중들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생활의 문제였을 것이다.

이 책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온 근대의 역사를 조명한다. 20세기 초 근대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문물이 어떤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생활상의 변화를 가져 왔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타계한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 선생이 평생 수집해온 3백90여장의 근대사 관련 희귀사진과 도판, 그리고 당대의 풍속을 그린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백여년 전 조선인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일제의 침략과 민족해방투쟁의 점화라는 시각으로 해석하는 단선적 접근을 거부한다. 근대사를 책상머리에서 끌어내 당대 민중들이 거닐던 거리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인 저자는 철도·전기·통신·도로·상가·탈것에 주목한다. 매천 황현은 당시 “10년만에 다시 한양성에 다다르니/오로지 남산만이 옛 푸름 여전하구나/길가 유리창엔 전등불 휘황하고/허공을 가로지른 전깃줄 아래 전차 경적이 울린다/수륙만리 어느 곳에나 신문물뿐이구나”하고 읊조렸다. 이들 신문물은 일본이 강요한 서구식 근대화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오랫동안 지속돼온 조선인의 일상을 변화시킨 것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들을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2부는 각 지역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근대 문물이 조선 팔도를 어떻게 뒤바꿔 놓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함경도는 공업화 기지가 됐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철도의 종착점에 식량 수탈 항구가 건설됐다. 훗날 미국의 도시학자 마이어가 “인류 역사에서 서울만큼 빠르고 압축적인 성장을 경험한 도시는 없었다”고 말할 만큼 당시 경성은 혁명적 변화의 와중에 놓여 있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봉건에서 근대를 지나 다시 탈근대(postmodern)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 책 속에는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활보했던 근대의 거리가 되살아나 있다. 불과 1백년 저쪽의 삶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탈근대적 삶의 뿌리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 재야사학자의 집요한 수집벽과 남다른 역사의식을 지닌 기자의 성실함이 우리를 근대적 삶의 기원으로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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