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 한미동맹과 전시작전권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김종대 지음 / 나무와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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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선의 대외관계를 좌우하는 키워드는 ‘사대교린’(事大交鄰)이었다. 중국과의 관계는 ‘사대’ 이고, 일본과의 관계는 ‘교린’이었다. 하지만 사대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 정치경제적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건 이슬람권에서 ‘메카’가 있는 사우디와 다른 이슬람국가와의 관계와 유사한 지도 모르겠다. 물론, 관계의 강도는 한중관계가 더 높았겠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유교의 종주국에 대한 존중의 표현에 가깝지 국가적 독립을 실질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웃 나라와의 친교를 뜻하는 교린은 다분히 해당 국가를 중국보다 한 수 아래에 두는 수평적 관계를 지칭했다. 사대교린은 필연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속국자주’라는 모순적인 대외관계를 만들어냈다. 속국이면서 자주권을 가진 관계라니,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바로 그것.  

 

문명개화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대정봉환을 거치면서 막부권력이 붕괴하고, 천황제가 근대적으로 부활되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외교문서에는 ‘천황’이 등장했다.  일본이 생각하는 국제관계는 ‘만국공법적 세계’, 곧 주권국가가 동등한 지위에서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이었다. (설사 만국공법적 세계가 실제의 세력관계를 반영하지 않은 허구의 세계라 할지라도) 일본은 만국공법적 체계를 근대적 외교패러다임으로 인식하고 이를 조선에 강요했다. 바로 이 지점이 한중일의 근세가 침략과 전쟁, 불평등 조약과 저항으로 얼룩지는 대목이다. 조선에 대해 속국이면서 자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중국, 중국을 ‘사대’하는 국가인 조선은 중국의 ‘천자’와 양립하는 ‘천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늘의 아들이 두명이나 있겠는가. 거기에 만국공법적 세계에서 조선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마당에 청나라가 왜 개입하는가라는 일본의 대외인식이 개입되면서 한반도의 이들 두 국가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청일전쟁이 필연적으로 예비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중국과 조선의 대외관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서 ‘사대교린/속국자주’가 근대적으로 재편되지 않는 한 조선의 근대적 대외관계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오카모토 다카시가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에서 펼치고 있는 논리다.

이 책과 거의 동시에 김종대의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를 읽었기 때문일까. 두 책에서 내가 얻은 문제의식은 하나의 주제로 관통된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사대교린/속국자주라는 모순적 패러다임에 안주하며 근대개혁을 소홀히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후 한미관계는 한미동맹/주한미군의 우산 속에서 전개되며 한국의 외교안보는 정체되어 왔다. 조선이 사대교린을 넘어 근대적 외교관계, 근대적 국가주권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듯이, 지금의 한국사회는 ‘한미동맹’을 재편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노무현은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권의 운명을 걸고 도전했던 대통령이었다. 노무현이 “시대의 문턱”을 넘었다는 김종대의 평가는 바로 이 점을 의미한 것이다. 이라크 파병, 한미동맹 재조정, 전시작전권 전환, 주한미군의 감축과 전략적 유연성, (협력적) 자주국방, 동북아 균형자론, 남북정상회담 등 노무현 시대 내내 논쟁과 이슈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과제를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뼈대만 간추려 보자. 노무현 정부는 북핵위기와 이라크 파병이라는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출범했다. 이 책에도 잘 나오지만 이라크 파병은 북핵으로 야기된 한반도 전쟁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지렛대였다. 네오콘의 강경책이 지배하는 미국은 공공연히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언급하는 상황. 이라크 파병은 미국의 대북공세를 누그러뜨리고 한반도내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한국 외교안보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범위’를 절감케 하는 대목이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을 두고 뼈저리게 후회했으나, 어찌보면 '미국이라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한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 평화의 대안으로 “동아시아 지식인과 민중의 연대”니 하고 떠드는 일부 진보의 담론은 ‘농담’에도 이르지 못한 한심한 얘기다. 그러나, 과연 노무현의 이런 전략은(사실은 이종석의 전략은) 성공했을까. 미국의 강경책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북핵문제의 해결도 북미관계의 질적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 아닌가. 부시의 대북강경책은 결국 이라크전이 수렁에 빠져들면서 제기된 비판 속에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노무현의 외교안보 전략은 ‘한반도 문제의 한국 주도권 확보’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 국가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주권국가가 아니다. 노무현은 박정희 이후 사라져버린 ‘자주국방’을 공론화하면서 한미동맹을 재조정하려 했다. 자주국방은 국방을 중시하는 보수적 담론과 자주를 중시하는 진보적 담론이 뒤섞인 이차방정식의 구조. 이것은 보수언론이 쏟아낸 것처럼 한미관계의 파탄, 안보위기가 아니라 50년이 넘은 한미동맹을 변화하는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맞게 갱신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불가피했다. 미군이 전세계의 미군을 재배치하고 신속기동군화(GPR:Global Posture Review)하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에게는 조만간 주한미군 감축으로 현실화될 터였다. 언제까지 주한미군에 국가의 존립과 방어를 의지할 것인가.

 

네오콘의 강경파 롤리스가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해온 다음부터 벌어지는 청와대와 국방부, 군 내부의 논쟁과 미묘한 갈등이 이 책의 전반부를 이룬다. 전략적 유연성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미래의 한중관계를 포함하여 동북아의 평화와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했다.  중국 원바자오와 일본의 고이즈미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은 앞으로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 "나는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가진 군대로 전환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있는 한 그러한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유연성을 둘러싼 청와대 내부의 극심한 논란과 갈등은 노무현의 청와대가 대통령의 인식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사례일 것이다. 

 

 

 한미동맹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국방개혁2020이었다. 전쟁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하는 나라는 주권국가가 아니다. 미군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국방은 이제 한국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국방체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고민과 모색의 산물이 국방개혁2020이다. “국방개혁은 본질적으로 국방력을 더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군의 ‘자주적 방위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미 북한을 압도한 한국의 국력이 주변국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시대를 여는 국가적 역량이 바로 ‘자주적 방위역량’이다. 자주가 없는 국방개혁은 목표와 방향성이 상실된 맹목적 개혁 지상주의가 되고 만다. 또한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자주란 만용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군사적 감상주의다.”(p. 562) 국가주권의 핵심적 조건으로서 군사적 자주와 그것을 위한 개혁, 노무현이 넘은 시대의 문턱은 바로 이것이다.

임기 후반기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공부’에 천착하면서 점점 역사철학자가 되어 갔다. 그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라기 보다는 자신이 딛고선 위치가 어디인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어디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도자였 다. 임기 후반기의 그가 쏟아낸 말들은 그 자체로 정치학 개론이자 한국정치사, 언론학 개론이자 한국언론의 정치경제학, 국제관계론이자 동북아 평화 안정론이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선가 그가 펼치는 담론을 두어시간 동안 들으면서 가장 생생한 역사철학과 정치학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 ‘석학적 대통령’이라는 찬사 아닌 비아냥을 했던 것이 기억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펼쳐 보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이게 한 국가의 대통령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이자 역량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 없이도 대통령 하는 사람 참, 많지 않은가. 이 책에서 김종대는 ‘대연정론’을 이런 역사철학적 고민의 소산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그의 이해방식이 부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는다. 현실정치에서 그것이 발휘했던 효과와 역풍을 빼자면 말이다. 어쨌거나 역사철학자로서 노무현이 끝까지 고민하고 넘어서고자 했던 것은 외교안보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그것의 핵심 중 하나는 자주국방이었고.  


그러나, 겨우 문턱을 넘은 이 새로운 자주국방의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본인 입으로 전작권을 환수하겠다는 이상희 합참의장은 나중에 이를 번복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서 국방장관이 되어서는 전작권 환수 연기를 외친다. 노무현 국방개혁의 핵심인 국방개혁2020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보수언론은 입을 모아 전작권 환수 연기를 떠들어 대고, 국방개혁에 대한 담론은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제껏 한국군 자주화를 지지해 왔던 예비역 장성들은 한 때 그들이 금과옥조로 신봉했던 ‘자주국방’이라는 말 자체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작권 전환을 목청 높여 반대하는 지도급 예비역 장성들은 과거에 국방개혁을 반대했고, 군정과 냉전의 영속을 바라마지 않았던 인물들이 다수다.”

이 책에서 가장 추악한 것은 바로 이같은 한국군의 모습이다.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분석하라는 노무현의 주문에 국방연구원은 육해공군의 엄청난 압력과 로비에 시달린다. 이미 수십년 간 북한의 10배가 넘는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북한보다 전력이 뒤진다고 써달라는 한국의 군대. 그래서 나온 결론은 육군은 열세, 해공군은 대등 혹은 다소 우위. 주한미군이 감축되면 금세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군대. 그러면서도 2차대전 이후의 온갖 재래식 무기부터 최첨단 무기까지 거느리고, 수많은 재래식 전력 중심 부대를 운용하면서 ‘승진할 자리’를 만들어내는 군대. 군인으로서의 소신은커녕 자존심도 찾아볼 수 없는 저 숱한 ‘똥별’들, 이 책에는 이 똥별들이 만들어내는 추악한 냄새가 진동한다.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냉전에 사로잡혀 있는 인식의 불구자들, 백령도 천안함 침몰도 이런 후진적인 군대의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외교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보이는 외교부의 면모는 조직이기주의와 관료주의, 게다가 국익보다는 주재국 혹은 자신이 주재했던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때로는 대통령까지도 기망하기를 서슴지 않는 모습이다. 정부의 모든 업무평가에서 꼴찌를 도맡아 하면서도 자신들이야말로 최고의 인재집단이라는 착각이 매우 심한 사회. 이종헌 외교부 조약과장의 평가는 기억할 만하다 : “우리는 대통령이 정책을 결정하면 절대 복종한다. 그러나 외교부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기준대로 움직이고 거짓말하고 나중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외교부의 습관이다. 외교부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p. 254) 주한미군 감축과 이전비용에 대해 노무현을 속이려 들던 반기문 장관은 노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하자 “외교부 역량이 미치지 못할 때 대통령께서 명쾌한 지침을 주셔서 앞길을 가르쳐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한다. 반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은 절대로 그의 역량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 덕분이다.

이 책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외교부와 NSC가 국정상황실과 벌인 청와대 내부의 ‘전쟁’이다. 노무현을 기망하고 한미간의 쟁점을 은폐하려 했던 외교부와 NSC. 그리고 이 암투의 과정에서 환멸을 느끼고 정부를 떠난 권계현. 전언에 의하면 외교부 출신인 그는 지금 삼성 상무로 재직하고 있고, 자주파로 불린 이종헌도 시련을 겪다가 좌천되고 말았다. 이 문제를 취재했던 후배기자가 특종기사를 들고 왔을 때, 나는 ‘대통령 기망’이 뭔지 이해를 못했다. 이제 보니 그 후배는 국정상황실에 ‘빨대’를 두고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청와대 내부의 전쟁과 그 전쟁의 와중에 언론은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위해 ‘활용’되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청와대가 가진 조정과 통합의 능력이 대단히 취약했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참여정부의 외교안보 상의 혼란과 논쟁은 소수자 정부가 넘어설 수 없었던 한계로 평가하고 싶다.  정작 외교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군과 외교부는 저항하고, 보수언론은 연일 폭탄을 터트리고, 미국은 딴지를 걸며, 대통령은 외롭게 몇몇의 행정관들과 함께 상처입은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상황.

나는 곳곳에서 탄식하고 분노했다. 참여정부 시절, 저자는 함께 술을 마실 때마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 놓고는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술자리 방담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고, 하나의 줄거리로 완성되었다. 아, 그래서 김선배는 그런 얘기를 했었구나,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는 뒤늦은 자각. 그가 술자리에서 전해준 말들은 이제 보니 하나같이 ‘특종감’이었으나 둔한 내 머리로는 도무지 맥락이 그려지지 않았다. 네오콘의 한반도 담당 행동대장 쯤 되는 롤리스가 한번 한국에 왔다가면 조중동은 ‘한미동맹’이 파산 직전이라며 대서특필을 해댔다. 노무현은 외교 아마추어였으며, 한반도에 안보공백을 만들어내는 얼치기였다. 참여정부 시절, 조중동의 한미관계 보도는 한마디로 그악스러울 정도로 심했다. 이들이 매일이다시피 쏟아낸 저주와 폭론들은 가뜩이나 취약했던 한국의 대미협상력을 위태로울 정도로 약화시켰다. 반노무현이라는 ‘맹목’으로 인해 그들은 아예 언론이기를 포기했다. 조중동이 참여정부 시절 독극물이었던 것은 맞다.

사건이 터지고, 암투가 벌어져도 누군가는 그것을 기록한다. 그래서 역사는 무서운 법이다. 참여정부 외교안보 현장에서 벌어진 중요한 일들은 김종대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고 분석되었다. 외교안보의 대전환기에 터진 숱한 이슈와 쟁점들은 격렬한 토론속에서 좌초되기도 했으며, 조금씩 진전되기도 했다. 김종대는 그것을 차갑게 혹은 뜨겁게 기록하고 있다. 참여정부 청와대의 유일한 민간인 출신 국방전문가로서 이제 그는 뛰어난 글쟁이로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외교안보라는 재미없는 주제의 책을 그는 무협지처럼 재밌고,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 놓는다.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같다. 누군가 참여정부가 외교안보에 대해 어떤 일을 했던가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서슴없이 이 책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내게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상당수 사람들이 자신들은 전작권 전환을 반대했다고 써달라고 사정하더라고 전했다. 정권이 바뀌면 소신도 바뀌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모양이다. 놀라워라, 그런 그들 대부분이 ‘장성’들이다. 그래, 기록의 목적은 기억하기 위함이다. 이제 사람들을 기억하자. 시대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고민했던 노무현, 군기득권 구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진전을 만들어갔던 윤광웅, 안광찬. ‘가짜 자주’를 넘어서려 했던 자주파 외교관리 이종헌과 권계현. 소신과 논리를 갖춘 보수 김희상. 그리고 반대편에 선 숱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야할 것은 조중동,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김정안 기자 같은 사람이다.

동아는 2004년 미국기업연구소(AEI) 같은 네오콘 싱크탱크의 입을 빌려 특집 시리즈로 노무현을 공격해댄다. 김정안 기자는 이 시리즈 말미에서 “문제는 (AEI 같은) 창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데 청와대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외교안보전략을 구상하는데 네오콘 싱크탱크를 활용해라? 대북 강경파이자 군사모험주의자들인 그들의 논리를 가져다 쓰라? 노태우때의 작전권 환수에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이들이 노무현의 전작권 환수에는 저주와 비아냥을 퍼붓는다. 이런 그들이니 부시가 일방주의를 포기하고 다자주의로 회귀하려 했을 때 ‘배신감’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반노에 눈이 멀어 국익도, 안보도 팽개치는 이들. 김정안 기자는 자신이 노무현 시대에 썼던 기사들이 부끄럽지 않을까. 아니, 그를 포함해 숱한 저주의 기사를 썼던 기자들, 외교안보가 파탄이라고 네오콘의 입을 빌어 썼던 기자 아닌 기자들은 또 어떤가. 이제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만들어 냈던 ‘거대한 기만의 세계’, 그게 지난 정부 5년 동안의 한국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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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0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선 외교안보 관련 글을 찾기가 힘든데,매우 상세하게 쓰셨군요.2006년 2007년 역사비평에서 노무현 정부의 대미관계에 대한 글이 몇 편 나와 있던데 정독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한국전쟁 전후한 미국 국무성,국방성 그리고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의 암투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관련부서들의 암투는 어떤지 궁금하군요.
요즘도 전작권 환수연기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매일경제 같은 보수적인 경제지도 '우리가 그 문제를 먼저 꺼내면 약점을 잡히는 것'이라는 기사가 있더라구요.

모든사이 2010-04-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이 책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지난 정부 5년간의 국방, 외교, 남북관계 등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책이 없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에 대한 신뢰가 크다는 탓도 있겠지요. 그가 국방문제에 정통한 민간인이자 실제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진보적이되 합리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신뢰 말입니다.
보수지식인들의 친미적 남북대결적 태도도 문제지만, 우리가 한미동맹의 현실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진보지식인들의 인식도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이 국방문제에 대해서 떠드는 것을 보면, 평화운동 단체의 담론 수준을 못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진보진영의 취약분야가 군사나 국방이죠.그런 건 보수파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하지만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그 분야에서 주도권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니 문제죠.운동권 기질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것에서 아직 탈피를 못하고 있으니까요.
 
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탈리즘>(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를 읽으며 고대생 김예슬의 선언을 떠올렸다. 이 고대 자퇴녀의 선언은 최근 몇 년 동안 읽은 글 가운데 최고다. 잔대가리 굴려 쓴 글이 아니라 온 몸으로 쓴 글이다. 그녀의 글을 읽고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야,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청춘도 있구나. 인터넷에 서식하는 저 무수한 키보드워리어니 하는 인간들보다 수백 배 낫지 않은가.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저 당당한 선언, 무슨 밀교적 제의처럼 블로그를 쏘다니며 저들만의 담론을 만드는 아해들보다 얼마나 싱싱한가. 우리사회의 주류적 질서가 강요하는 질서를 이탈하여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일, 기투(企投)의 삶이란 저런 것이다.

김예슬의 선언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80년대의 대학인들은 자본주의와 파쇼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대항담론을 만들어냈으나 거기에는 ‘개인의 실존’은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해방이후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논리로 무장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자본주의에 가장 잘 적응했다. 그들은 운동권에서 나오자마자 벤처기업가로, 펀드매니저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판대상의 논리를 쉽사리 실존적으로 내면화했던 것이다. 이념과 삶의 괴리는 이미 발생론적으로 예비되어 있던 것이다. 박노자가 어느 글에선가 썼듯이, 군사파쇼를 비판하던 이들은 아무런 내면의 고통없이 군대를 갔고, 군대의 질서를 회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예슬은 다르다. 그녀는 ‘자기에의 배려’를 알고, 그것을 실천할 줄 알며, 동시에 그것이 지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 역시 통찰할 줄 안다. 부디, 이 친구가 잘 버티고, 잘 살아내기를!

김예슬의 선언은 리처드 세넷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서사를 벗어나 ‘개인의 서사’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른바 ‘경제경영 실용서’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실용서들은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으며, 당신이 어떻게 해야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왜 우리가 자신의 ‘삶의 서사’를 회복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미국의 이른바 ‘컨설턴트’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멍청한지, 그들의 컨설팅이 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세넷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에 의하면, 제도와 시스템의 신봉자들인 그들은 그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스펙’을 쌓고, 퇴출의 공포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근원적 불안’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한때 상사로 모셨던 김영희 대기자는 자신은 세 종류의 책을 늘 펼쳐 놓고 읽는다고 했다. 하나는 세계관과 가치에 관한 것으로 그에게는 헤겔철학서가 대표적이다. 또하나는 보다 중범위적 정치사회적 전망을 할 수 있는 책으로, 토플러나 프리드먼의 책이 그런 경우다. 마지막은 순수하게 ‘정보’를 얻기 위한 책. 리처드 세넷의 이 책은 그중 두 번째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정처없이 표류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매커니즘을 규명하면서 탈주의 길을 모색한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자본주의는 지속되기 어렵다. “장기보다는 단기를 선호하고, 잠재력만을 중시하며, 과거의 경험을 기꺼이 내 팽개칠 수 있는 개인의 자질이란 아무리 어려움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지금 여기서의 내 삶을 아프게 찌른다. “유동적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삶”, 유동성은 끝없이 증대되어 왔으되, 삶은 정처를 잃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질서 속에서 불안하게 견뎌 내는 것. 왜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고 떨치지 못하는가. 종횡으로 얽힌 구조의 사슬 속에서 개인은 주류적 질서와 과감히 결별하지 못하고(혹은 안하고) 내 것이 아닌 열망으로 살아간다. 이보다는 차라리 포디즘 시대, 산업시대의 삶이 더 낫지 않았을까. 자본주의의 관료제적 질서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을 서사화할 수 있었다. 9 to 5의 삶속에서, 직장의 엄격한 상하관계 속에서, 기계적인 노동속에서도 인간은 내년이면 월급이 얼마나 오를지, 언제 집을 살 수 있을지를 설계할 수 있었다. 노동은 팍팍하고, 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라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쪼개어 삶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산업시대의 상대적 안온함)

그러나,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구성원이 자신의 조직을 믿지도 못하고(언제 짤릴지 모르니), 사람들 간의 관계도 붕괴되었다.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죽었다.” 유동하는 근대화(지그문트 바우만)가 만들어내는 삶은 끝없이 유동하는 불안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노마드’는 국내적으로는 비정규직의 확대요, 글로벌 차원에서는 노동이주민의 급증을 은유한다. 디지털 노마드족? 88만원 세대에게 그런 소리 하다 돌 맞는다.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해 보여줬던 절제의 미덕도 절약의 노동윤리도 사라졌다. 오로지 오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끝없이 이동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을 던질 뿐.

리처드 세넷은 미국의 68세대 신좌파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에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이런 진술, “지난 10년간 내가 만난 미국인 중산층은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을 체념한 채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훼손되고 학교가 민간기업처럼 경영되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여기는 분위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누구라도 손을 놓고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비정규직 증가속도가 전세계 최고 수준이고, 학교는 학원화되고(아, 쓰벌 대체 교육의 ‘출구’는 없는 것일까?) 모오든 것이 시장화 하는 곳이다. 소수의 비판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너무나 소수이고, 그래서 변화의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출구로서의 정치는? 세넷은 대안을 말하지 않고 현실을 말한다.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다섯가지 이유. 1) 정치의 플랫폼화 : 폭스바겐이 공통의 플랫폼을 갖고 고급세단과 보급형 차량을 만들어내듯이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유사한 표준 플랫폼을 공유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중도주의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그 속성은 노동유연화, 세계화, 능력사회로의 전환이다. 2) 정치적 금박 입히기 : 플랫폼이 유사하니 사소한 차이밖에 없고, 이 사소한 차이를 갖고 죽자 사자 싸운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무슨 플랫폼의 차이가 있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금박’을 입히지만, 이건 쉽게 벗겨지게 마련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 ‘협력’해 비정규직법을 통과시킨다.

3) 인간성이란 휘어진 목재 :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펴지만 그로 인해 완전한 목표달성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제도의 불완전성을 말하면서 ‘인간성이라는 휘어진 목재’를 거론한다.) 사람들의 일상을 배제한 채 만들어지는 정책이란 얼마나 허약한가. 친서민 정책이라고 자랑하고 떠들어대지만, 실제 서민의 일상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4) 사용자 중심의 정치에 대한 신뢰 강요 : 시민들이 소비자처럼 행동하게 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소비자로서 시민은 나태해지거나 첨예한 현안은 눈길을 돌린다. 5)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치신제품들 : 첨단제품들은 존재론적 불안을 야기한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는 노동당에 대한 신뢰는 경향적으로 떨어진다. (소비자로서의 시민) 새로운 제품을 사기 위해 타올랐던 욕구는 사자마자 사그러든다.(소멸하는 열정, 한국으로 치자면 롤러코스터 민주주의, 열망과 절망의 사이클)

우석훈과 박권일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선동했지만, 세넷은 보다 실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시간과 경험의 축적(경험많은 노동자를 함부로 자르면 안된다), 개인 유용성의 발휘, 장인정신의 세 가지. 이런 대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개인의 서사화’다. 개인의 자기 삶의 주제로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살아) 가는 것. 이건 들뢰즈 용어로 개인의 재영토화, 혹은 생활세계의 회복쯤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리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20대의 어린 대학 자퇴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결론, “나는 하나의 역설, 즉 새로운 권력구조가 대단히 천박한 문화를 통해 생겨났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제대로 해내려 노력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삶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의 천박함이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고 분명히, 지금의 새로운 질서 그 다음 단계의 역사의 첫 페이지는 이처럼 깨지기 쉬운 문화에 대한 반란이 장식하게 될 것이다.”

ps. 한 ‘영국 애호가’(?)가 빌려준 책인데, 그녀가 이 책을 빌려준 이유는 네 실존을 곱씹어 봐라는 오묘한 의미에서인지, 저자에 대한 애정이 넘쳐 빵처럼 나눠먹기를 바라는 마음에선지, 잘 모르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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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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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넷 보수신문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사무실이자 편집국인 한 오피스텔에서 동료 ‘기자’ (그들도 언론이며 기자를 자처한다.) 한명과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는 김치 쪼가리를 삼키며 자신이 DJ정권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며칠째 감지 않아 냄새가 나는 머리와 눈꼽이 채 떨어지지 않은 몰골로 라면 국물을 튀겨가며 계속 지껄였다. 과연 그는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오랫동안 수배생활을 한 반정부 인사의 면모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천박한 말들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의 신문이 아직도 광고 탄압을 받아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나 한 월간지 대표와 같은 ‘뜻있는’ 동지들이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그분들과 함께 얼마 후에 있을 3.1 구국궐기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의 개명천지에 독립군을 자처하고 있었다.   

  

가끔 모자를 쓴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억거렸다. 그들은 몇몇 시민단체와 개인들에게 “빨갱이”라고 했다가 소송을 당했고, 결국 법원으로부터 벌금형을 받았다. 한 시간여 그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다 나오는데, "야 이 또라이 새끼야"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는 저런 ‘존마니들’이 보수와 우익을 자처하다니, 참으로 추하고 비루하다고 느꼈다. 장정일이 우익청년 일대기를 쓴다고 했을 때 그의 선배는 “우익은 무조건 멋있어야 해”라고 말했단다. 현실의 비루한 우익과 존재하지 않는 멋있는 우익 사이의 이 아득한 ‘거리’. 그래서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익에 대한 위악적인 풍자다. 위악은 장정일의 특기가 아닌가.  


장정일이 10년 만에 냈다는 이 소설을 주말 동안 슬렁슬렁 읽었다. 그는 광주 출신의 ‘금’과 부산 출신의 ‘은’을 내세워 올드라이트, 뉴라이트와 대비되는 ‘퓨어 라이트'(pure light)를 그리겠다고 했다. 이 시대를 달리하는 ‘라이트’들은 동성애 코드로 연결돼 있다. 올드 라이트 ‘거북선생’과 퓨어 라이트 ‘은’은 비역질로 연결된 변태성욕자들이다. 동성애 자체가 변태성욕인 것이 아니라, 도덕을 내세웠던 네오콘 대부 앨런 블룸이 동성애자로 에이즈로 죽었듯이, 그리고 장정일이 그를 두고 “손가락질 받아야할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그의 위선이다”라고 썼듯이, 이념과 섹스의 그 추악한 모순적 병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올드’에서 ‘뉴’, 그리고 ‘퓨어’로 갈수록 변태성욕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올드’의 외설성과 변태성욕은 가장 강도가 높다. 실제로도 그들은 막무가내의 가스통 무리가 아니던가.

가령 그것은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빨갱이’와 같은 인장을 찍어대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논리가 없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저 인장들은 그들과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들이지.(…) 그래, 그거야.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놈들을 향해 다짜고짜 ‘빨갱이’라는 인장부터 찍고 보는 거야. 그건 상대방과 대화를 더하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고귀한 거절의사고, 결기에 찬 그 침묵은 우리들의 패배이지만, 그 행위는 더 이상 논리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힘이야. 그래서 이기는 거야” 와 같은 변태성욕이다.

거북선생은 국립대 윤리교육과 교수이고 뉴라이트인 ‘은’의 작은 아버지는 법대 교수다. 또 은이 가입한 우익청년단체 ‘자유의 나무’의 회원의 이름은 ‘변지갑’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누구를 빗대고 있는지 알 만하다. (장정일의 장난질이다. 거북선생은 조선일보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윤리교육과 교수를 닮았고, 뉴라이트인 작은 아버지 이름은 ‘상호’로, 가운데 이름자 슬쩍 바꿨다. 변지갑은 굳이 첨언이 필요없다.)  광주의 시민단체 지도자로 있다 노무현 청와대의 비서관으로 등장하는 금의 아버지 역시 여러모로 누군가를 닮아 있다. 물론 대강의 이력과 인상만 빌려왔을 뿐 장정일식으로 비틀었겠지만 말이다. 장정일은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로 은을 꼽으며, 구우익과 뉴라이트의 영향아래 있지만 사상투쟁을 거쳐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으로 단련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은이 유일하게 앞세대의 우익과 다른 면모가 있다면 그는 최소한 구우익의 ‘위선’을 볼 줄 안다는 점이다. 마태수난곡을 들으며 자신이 빨갱이들한테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하며 당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거북선생에게 그의 젊은 동성애 파트너 은은 “이 미친 늙은이, 노망도 단단히 났네. 도끼로 정수리를 꽉 찍어버릴까 보다. 이런 늙은이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려는 것일까”라며 속으로 비아냥댄다. 은은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강자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신념으로 무장한 우익청년. 장정일은 이런 순정한 우익이 이 땅에서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을까. 이 소설로 보자면 장정일은 희미한 가능태만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태는 변태성욕자이자 ‘또라이’다. 순정한 우익이야말로, 순수한 또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소설은 장정일의 위악이자 우익에 대한 조롱인 것이다.

장정일의 ‘변태성욕’은 참으로 내력이 깊은데, 이 자의 첫 번째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에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이 소설은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다. 나는 1988년 열음사에서 나온 이 문고판 작품을 알고 있거나 읽어본 사람은 이제껏 두 명 밖에 못 봤다. 흔히 장정일의 첫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이 작품이 시인이었던 장정일이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 장정일은 어쩐 일인지 책날개에 소개된 작품목록에 이 작품을 계속 빼놓고 있다.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건가?) 소년원에 처박힌 10대들의 ‘비역질’을 소재로 한, 이 소설도 논픽션도 아닌 것 같은 작품에서 변태성욕은 장정일의 자기모멸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의 자기모멸은 <아담이 눈뜰 때>의 몇몇 단편을 거쳐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이어진다.

그의 소설을 이제까지 거의 다 읽어왔지만 이제는 이런 변태성욕이 구질구질하고 지겹다. 게다가 장관 청문회식 어법으로 따지자면, 그의 ‘자기표절’도 지겹다. 뒷 소설에서 앞 소설을 인용하고 까대는 방식의 자기표절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빙빙 동심원을 그린다. 그의 전작들은 후작들에서 줄줄이 불려 나와 조롱하고 조롱당한다. <구월의 이틀>에서는 전작인 <보트하우스>를 소환해 작가인 자신을 “3류 작가”라고 폄하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특전사 캠프에 대한 주인공들의 독백조차도 그의 독서에세이 <공부>의 한 대목을 빌렸다. 이런 장난질에 무슨 미학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거기에 토를 달 필요도 없으나, 이제는 좀 짜증이 난다. 내가 꼽는 장정일의 가장 좋은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와 장정일 <삼국지>의 출발점이 된 <북경에서 온 편지>다. 아니 차라리 그의 <독서일기>나 <공부>가 장정일 식의 교양과 해석을 담고 있어 더 읽을 만하다.

장정일은 후기에서 부도덕한 우파가 득세한 나라에서는 우익청년 일대기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이 줄창 ‘좌익 청년 일대기’만 쏟아낸 까닭도 그 때문이란다. “건전한 상식과 철학을 갖춘” 나라에서 나온 우익청년 일대기의 대표작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일 것이다. 예술적 방랑이라는 ‘수업시대’를 거쳐 보편적 가치에 대한 긍정에 이르는 여정은, 현실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수락이라는 점에서 ‘우파적 인식’의 획득과정이다.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괴테와 장정일이 공유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과정이자 매개로서의 예술이라는 경로다. 괴테의 빌헬름은 연극이라는 예술을 경유하여 ‘아름다운 영혼’에 눈을 뜨고, 장정일의 ‘은’은 시와 세계문학사 60권을 거친다. 은이 우익으로 전향했을 때, 문학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고 정치에서 문학으로 나아간 ‘금’의 몫이 된다.

괴테가 살았던 바이마르 시대의 문화와 가치는 그같은 긍정과 수락을 가능케 하는 전통과 힘,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전통과 기성의 가치는 부정과 파괴의 대상이었다. 조화와 균형, 감성과 절제와 같은 미덕들은 한국의 우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다. 앞서 김기협 선생이 조선 망국에서 단절된 것은 ‘전통’이라고 했을 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유교적 교양의 정치가 단절되지 않았더라면(유교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좀더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오늘날의 보수우익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행위를 조회하고 심문할 수 있는 규제적 원리로서 전통이 있었다면, 적어도 추하고 비루한 모습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전통이 없으므로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조선일보와 낙성대 연구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승만과 건국을, 박정희와 경제발전을 ‘발명’하고, 새로운 전통으로 수립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충만하다. 장정일의 위악은 이런 전통의 발명 ‘이후’를 내다본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의 비루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일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탈자는 대략 6-7개 내외가 되는 것 같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노무현의 고향마을을 ‘봉화’마을이라고 쓴 것이다.(245p) 노무현의 고향은 ‘봉하마을’이 맞다. 이것이 편집자의 실수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장정일의 실수라면 치명적이다. 이 소설에서 노무현은 다큐멘터리를 상기시킬 정도로 세밀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실수라? 그렇다면 장정일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던 것이고, 정교하지 못한 시사교양을 버무려 써낸 것이다. 이건 정운찬과 정운천을 헷갈려 “저번엔 쇠고기 갖고 지랄이더니 이번엔 세종시 갖고 지랄이냐”고 반응하는 멍청한 네티즌과 같은 수준인 것. 이로써 보건대, 장정일의 노무현에 대한 교양수준은 믿을게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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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1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구 영남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음. 90년대 중반 읽었음

이진성 2010-03-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리고 '봉화마을'에 대해 굳이 장정일을 변명하자면
마을 이름은 '봉하'마을 투신한 산은 '봉화'산
마을은 '봉화'산 아래 있다고 해서 '봉하' 마을임

모든사이 2010-03-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그래, 누가 도서관에도 책이 없다던?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장정일 독자가 자기가 밝힌대로 5만은 된다면 그 책을 언급하는 사람이 좀 나올 수 있을 텐데, 거의 없어서 하는 얘기지.

봉하/봉화 얘기를 꺼낸 건, 이 책 앞부분에 장정일이 언어/문장에 대한 자의식을 도드라지게 떠들어서 하는 말이다. 주인공 부모의 말을 전하면서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구사한다" 운운하며 예민하게 써놨길래 하는 소리다. 셜록홈즈를 말하면서 베이커가(baker street) 221B를 베이크가(bake street)이라고 쓰면 얼마나 우스울까.
 
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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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선생은 사학자로서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공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사학과 대학원을 가서 동양사를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됐다. 마흔 무렵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 끝에 잘 나가던 대학교수직을 때려 쳤다. 그는 38살 무렵에 처음 읽은 아버지의 ‘일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풀어놓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부친은 6.25 전란의 와중에 유명을 달리한 김성칠 전 서울대 교수. <역사 앞에서>라는 표제로 공간된 그의 일기는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기록과 관찰’이라는 지적 노동을 성실하고 세밀하게 실천한 전범적 사례다. 김 선생은 그후 중앙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이 신문의 대표적 연재칼럼인 ‘분수대’를 다년간 집필했고, 출판기획자 등을 거쳐 재야(?) 사학자가 됐다. 중국의 고대역법으로 석사학위를, 마테오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블로그(http://orunkim.tistory.com/)에 따르면 프랑스와 일본, 미국, 중국 등에 ‘지적 방랑’을 하며 ‘외부자의 시선’을 기른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김선생의 <밖에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건, 기존 역사서에 배어있는 ‘분노와 격정’이 싹 가신 문체가 주는 편안함이었다. 간난신고의 한국사를 읽다가/쓰다가 보면 누구나 열정적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던가. 임지현처럼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것을 서너 발자국 떨어져서 요모조모를 살피며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신적 국외자만이 확보할 수 있는 ‘거리’이리라. 그가 한국사학자가 아니라 동양사학자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실린 김선생의 많은 글들은 이른바 춘추필법의 준엄한 평가이거나 역사적 교훈을 결론으로 도출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태의 옆에서, 뒤에서 이런 해석과 저런 평가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서술하는 양상이다. 선생이 말한 중층적 시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중정체성의 존재로서 ‘조선족’의 시각을 채택하는 것) 나로서는 그것을 좌충우돌(左衝右突) 전략, 성동격서 전략쯤이라고 말하고 싶다. 민족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목청 높은 언설에는 중국과 일본의 영향과 상호작용을 말하고, 한국사의 위대한 인물을 치켜세울 때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상황을 서술하는 식의 거품빼기 전략 말이다. 


한국사에 대한 서술은 과잉 민족주의거나 뉴라이트 쯤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다.(아마추어인 나로서는 ‘같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과잉민족주의 언설에 대한 해체적 비판은 엉뚱하게 우파적 역사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가령,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들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론적 진보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의 귀결은 보수담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윤해동 선생이 어느 글에선가 “포스트주의와 보수의 부적절한 만남”이라고 썼던 것이 어설프게 기억난다. 가장 급진적인 이론적 논리가 보수담론으로 귀결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 <재인식>의 집필에 동원된 상당수의 필자들은 이론적 좌파이자 ‘전향’은커녕 생래적으로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김선생의 <밖에서 본 한국사>는 이 둘 어딘가의 중간쯤, 혹은 두 담론이 대립되어 있는 지점 바깥의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내게 일정한 ‘계몽’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로 이런 ‘좌’에 부딪치고, ‘우’를 깨는 좌충우돌식 접근이 주는 해체와 재구성의 역사서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최근 김선생이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망국 100년’(http://www.pressian.com/의 모티브인 것으로 보인다. 근세사에 대한 서술의 일부는 망국 100년의 초기 글들과 겹쳐 있기도 하다. 그는 조선의 멸망은 1910년의 한일병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에 있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것은 국가라는 실체이거나 민족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조선의 오랜 ‘화이부동’의 전통, 조선의 문화적 역량의 힘이 훼손되거나 단절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재적 발전의 과정이 일제의 침략으로 가로막혔다는 진술과 다르다. 농본주의 체제를 고수한 조선은 뒤이은 상공업 발전을 효과적으로 견인해내지 못했다. 조공체제의 대외관계는 근대적으로 혁신되지 못했다. 성리학은 소중화를 자처한 채(김선생의 말을 빌면, 차라리 眞중화), 근대적 삶을 해명하고 이끌어내는 사상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러한 단절의 과정을 가속화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에는 기억할만한 대목들이 많다. 내 연필은 개개의 사실을 말할 때보다 그의 해석과 평가에 더 많은 밑줄을 그어댔다. 일본과 중국의 근대사를 관심있게 읽어온 처지에서 그중 주목이 갔던 것 중의 하나는 일본에는 존왕이라는 제3의 길이 존재했던 반면, 한국은 쇄국과 개항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대목. 일본의 근대화는 천황제의 근대적 발명과정이기도 했다. 천황-막부로 이어진 이중권력의 상태에서 일본의 근대는 천황과 막부를 떼어내는 것과 양이에서 문명개화로의 극적인 변화가 어울려 가능했다. 존왕은 봉건제로의 복귀가 아니라 근대적 입헌군주국가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 김기협 선생은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일제에의 저항이 국가를 수호하려는 것인지, 왕권을 수호하려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쓰고 있다. 나로서는 그건 왕권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피살에 놀라 피신한 아관파천만 봐도 그렇다. 왕권의 회복=근대화였던 일본과 한국이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중 하나일 것이다. 역시 한국사를 읽는 건 재미보다는 우울함을 배가시키는 경험이다.

기억해야할 서술들(메모 혹은 요약) : 중국의 천하체제는 천자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구조로, 춘추시대에 형성되어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한민족은 ‘화이부동’의 태도로 독자적인 생존을 이어왔으며, 그것의 본령은 군사적 힘이 아닌 문화적 힘이다. 낙랑은 점령군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송유관 역할을 했다. 임나일본부설을 가야-왜 복합체로 해석하는 것. 한국과 중국은 고구려의 공동상속자였다. 신라의 당 원조(김춘추) 요청은 통일의 야망이 아니라 생존술 이었고, 통일전쟁의 핵심적 역할도 당나라 군대가 했다는 것. 신라의 진정한 통일은 당나라와의 저강도 전쟁으로 한반도를 민족정체성의 구성공간으로 지키고 만들어낸 것이다. 한민족의 공간은 고려의 천리장성 축조로 반도화되었다.

몽골에 대한 고려의 항복조건은 평등조약에 가까운 것(?)으로 항쟁의 성과라는 것. 공민왕은 비록 좌절했지만 고려중흥을 위한 개혁군주였다. 변방무장(이성계)과 정예문신집단의 접점이 조선의 출발점이었다. 고려말 개혁의 좌절은 개혁주체가 집권 이후 기득권에 집착했기 때문인데, 주체만 달리한 채 개혁을 반복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사대는 춘추시대 이후 천하질서의 원리로서, 사대와 사대주의는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와 같다. 사대는 명나라와의 대외관계 속에서 조선이 만들어낸 존재방식이다. ("임진왜란 때 외에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사대관계는 지금 남한의 미국에 대한 종속관계보다 독립성이 강한 것이다." p. 180) 일본이 들고 나온 만국공법 체제는 허구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으로, 작고 약한 나라를 보호할 필요를 부정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한국이 독립을 지켜온 것은 화이부동의 문화노선을 견지해온 덕분이며, 이 노선을 안정시킨 것이 세종의 업적이다. 성종 이후의 사화는 성리학적 통치의 주체로서 사림이 자리잡는 과정의 진통이었다. 광해군은 폭정이 아니라 정치투쟁의 와중에 폐위된 것으로 그것은 그의 정치력이 가진 한계다. 청은 입관 후에 합리적 조공관계로서 중-조 관계를 재조정했다. 정조의 서학에 대한 태도 : 정학의 쇠퇴가 가져온 그림자일 뿐, 그림자를 주물러 현실을 바꿀수 없다는 실용주의. 서학은 보유론으로서 중국에 적응하려 했는데, 학문적 실천으로서의 보유론과 신앙적 실천의 두 갈래에서 탄압의 와중에 근본주의로서의 신앙적 실천만이 살아남았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는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성향을 보였고, 이는 정조의 탕평책에서 세도정치로 넘어가는 전환점의 소용돌이에 서학이 말려든데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독교의 신앙적 순수주의, 이후 한국기독교의 ‘전통’인 보수반공 기독교의 형성과도 연관이 될 듯하다.)

조선은 농본국가체제의 근본틀을 바꾸지 못했고, 임란이후 형성된 상공업 체제 역시 정경유착을 부채질해 체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으며, 조선은 이런 과정을 통해 기울어져 갔다. 일본에게는 서세동점의 현실속에서 존왕이라는 제3의 돌파구가 있었으나, 조선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조선 은 중국의 천하체제에서 벗어난 일단계의 망국을 거쳐, 일본의 지배아래 떨어진 2단계로 마무리됐다. 고종이 수호하려던 것이 재위 40년의 행적으로 볼 때, 국권인지, 왕권이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임정이나 해외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나오지 못한 것은 조선이 정치의 전통을 제대로 남겨주지 않은데 큰 이유가 있다. 이승만의 퇴임자리에 있었던 것은 송요찬 국방장관, 허정 외무장관(대통령 유고시 대리인), 그리고 미국 대사 매카너기였다.(최후의 보루인 군부와 미국) 이승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여실해 보여주는 세 사건 : 반민특위 탄압, 보도연맹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재벌체제는 권력중독증이 경제계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독재와 재벌의 쌍생아적 구조) 과거처럼 특권의 주재자가 아닌 두 대통령 아래 남한 상당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가진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는 김대중 - 노무현의 노선에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대목으로, 김선생의 정치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얕은 층위의 가치훼손과 깊은 층위의 가치관 훼손이라는 두 층위가 존재한다. 애국자임을 자부하는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일본의 관점을 내면화한 것들이 많은데, 이는 거울에 비친 오리엔탈리즘이다. 일본의 한국통치의 유산 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눈에는 모든 공무원이 권력자였고, 순사와 군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심성구조에 자리잡은 불신과 저항의 내력은 이러하다.)

남북관계에서의 변화는 평형상태를 벗어나는 데 있는데, 평형에 집착하는 상호주의로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보수의 상호주의에 대한 이색적이고도 발본적인 비판이다.) “인구의 안정을 설명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을 인간에 대한 태도가 한 차례 정리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산업화는 자연을 타자로만 보는 공격적인 태도로 출발했다. 이제 더 이상의 공격은 인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인간과 자연을 묶어서 보는 생태론을 이제 아무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 인구의 평형상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공격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평형’을 깨는 것은 인간의 삶에 불가피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후보들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4년 후 선거에서는 아마 극우파 후보들만이 그런 공약을 들고 나올 것이다. (이런 예측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예측대로라면, 진보가 요즘 주장하는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성장친화형 진보’는 어떻게 가능할까? 과연 그건 진보일까, 성장일까?) 과거에는 근공원교였지만, 이제는 근교원공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벌거벗은 이기심을 지역차원에서 정제, 순환하지 않고는 세계차원에서 효과적 화합을 바라볼 수 없다.”  “동아시아 지역은 19세기 이전에 위대한 문명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린 후 한 세기 반동안 이 전통의 가치를 잘 살리지 못했다. 유대감도 전통도 별로 요긴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팽창의 시대는 앞만 보고 달릴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시대였다. .. 균일한 가치의 획득을 위해 만인이 경쟁하는 동이불화의 세계는 자원의 벽앞에 파국을 면할 수 없다. 다양한 가치관이 병행하는 화이부동이 인류의 존속, 인류다운 인류의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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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1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무개혁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고종을 근대개명군주로 해석하려고 하던데, 사실 일본의 존황양이파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눈에 뜨이는군요.

모든사이 2010-03-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종이 과연 근대개명군주이자 망해가는 조선을 일으켜세우려던 근대적 개혁가인지 도대체 모르겠더라구여. 서울대 이태진 교수님이시던가요? 일제에 의한 패망이 주는 비극성과 안타까움의 한 표현이라는 '이해'는 들어도, 대체 동의는 할수 없더라구여. 그게 다 제가 문외한인 탓이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3-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영우와 이태진이 대표적이지요.한영우는 더 보수적입니다.건국60주년 기념사업 때 그런 특징이 더 드러났지요.이태진은 민비나 대원군까지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고종황제 역사청문회>는 고종시대를 둘러싼 논쟁을 담은 책인데 특히 김재호와 이태진의 논전이 볼만합니다.김재호는 전문적인 경제사학자의 시각에서 고종시대의 근대화가 별볼일 없다고 주장하지요.

강준만<한국근대사 산책>에서 고종시대에 대한 각주의 인용문헌에도 읽어볼 만한 책(신문,잡지 포함)이 많이 나오니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모든사이 2010-03-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한겨레를 보니 김용섭 교수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 사학계의 논쟁이 재연된 모양이더군요. 김재호 교수도 거기 가세한 것 같은데.. 의견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보수성'은 결국 과잉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군요. 강준만의 '한국사 산책' 시리즈는 그 특유의 저널적 글쓰기라고 생각돼 개인적으로 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기회되면 한번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해동의 논문이 촉발했더군요.자본주의 맹아론은 진작 비판대상이지만 윤해동은 김용섭 학설을 직접 분석한 상당분량의 논문이더군요.<역사학의 세기>에 실린 다른 논문도 주목할 만하니 정독하려고 합니다.김재호를 비롯한 낙성대 학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뉴라이트 운동하는 집단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많은데 내재적 발전로-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고 봅니다.

강준만의 산책 시리즈 밑의 참고문헌을 보면 중요한 연구성과는 단행본이나 논문은 물론 정기간행물에 실린 글까지 거의 다 망라되어 있어서 그 책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것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기협이 김성칠 선생의 아들이라는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요 정말....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조제프 푸셰’의 이름을 떠올리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2007년 대선 무렵일 것이다. 17대 대선이 한나라당의 경선으로 ‘사실상’ 끝이 나고 정권교체가 명백해지던 무렵, 나는 푸셰와 그의 정치적 삶을 떠올렸다. 권력변동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는 베버적 의미의 ‘영혼부재의 관료론’이 언론의 비아냥 속에 오르내리면서 실존적으로 떠올리게 된 질문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책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한길사, 1998)을 찾게 된 내력도 그러하다. 푸셰의 삶을 뒤따라간다는 것은 권력교체기에 불가피하게 ‘정치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운명들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시골교사에서 급진 자코뱅 당원으로, 다시 왕당파로, 나폴레옹의 최측근으로, 복귀한 루이 18세의 경무대신으로, 실로 현기증 나는 배반과 변신을 보여준 이 정치적 인간의 한 생애는, 5년 주기로 사람 하나 바뀌는 것일 뿐(?)인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정치적 운명’에 대해 던지는 의미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츠바이크의 푸셰 평전에 손이 가질 않았다. 왜 그랬을까. 200여 년 전에 등장하고 사라진 한 인물의 삶을 읽어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일 것인가. 이게 무슨 자본론도 아니고, 읽기 버거운 요즘의 철학서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서구 인문주의의 적자이자 그 세례를 듬뿍 받은 츠바이크의 저작이라면 책장을 넘기는 재미도 만만치 않을 것인데, 왜 나는 이 책을 선뜻 펼치지 못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당대의 내 삶과 일을 스스로 정당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류적 지배질서와 오랫동안 섞이지 못했던 개인적 이력도 그렇거니와 지금의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퇴행성에 생래적 거부감을 느끼고 있음에도 이미 스스로 퇴행의 일원이 되어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자기모순. 박권일의 말을 빌어 ‘먹고사니즘’으로 손쉽게 합리화하기에는 내 안의 ‘정치사회적 우울증’이 이미 중증이었다.


Joseph Fouche(1759-1820)
조제프 푸셰는 1759년 5월 30일 프랑스의 낭트에서 선원이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20년 12월 26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죽었다. 그의 60여년 생애는 프랑스 혁명과 그에 뒤이은 국민의회, 자코뱅 독재, 나폴레옹의 출현과 유럽의 전쟁, 나폴레옹의 몰락과 왕정복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는 “세기 전환기의 한복판에서 모든 당파를 이끌었고, 이 세계 전환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 남자”였다. 그의 혁명 동지들인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라마르틴도 죽고, 바라스 탈레랑 등의 재상들도 가고, 나폴레옹마저도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에서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쳤지만, 오직 한 사람, 푸셰만이 “배신자, 음모가, 파충류, 변절자, 비열한 경찰근성, 배덕한”의 정신과 기질로 살아남았다. 


그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했다. 창백한 표정의 이 과묵한 사내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를 퀴퀴한 수도원에서 라틴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사제로 보냈다.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수도원의 담을 넘어오자 그는 정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수도복을 벗어버리고 ‘거리의 정치가’로 변모했다. 그런 노력으로 32세 때인 1792년 국민의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그의 외모를 묘사하는 츠바이크의 필치는 눈에 잡힐 듯 생생하다 ; “거의 망령과 같이 뼈뿐인 말라붙은 육체, 모가 난 가느다란 얼굴, 그것은 흉하고 불쾌했다. 코는 날카롭고 언제나 다물고 있는 입도 날카롭고 좁다. 졸고 있는 듯한 무거운 두 눈은 생선 눈과 같이 차가왔다. 고양이 같은 회색의 동공은 유리알 같았다. 막 질병으로부터 벗어난 회복기의 환자 같다.”  외모로서 보자면, 그는 만화와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음모가와 사술(邪術) 전문가의 전형적 유형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푸셰는 대세의 흐름을 주도면밀하게 읽어내는데 능숙했다.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기술이다. 루이 16세에 대한 국민의회의 평결에서 그는 ‘대세’를 따라 국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대열에 줄을 섰다. 이념적 자코뱅이 아니라 처세로서의 자코뱅. 그에게는 “언제나 승리자 편에 있고, 결코 패배자 밑에는 남아 있지 않는 일”이 중요했다. 외적으로는 온건주의였지만 자신이 자코뱅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리옹에 국민의회의 파견의원이 되어 귀족과 왕당파를 처단하고, 교회와 신성을 파괴하는데 앞장선다. 부자의 재산을 박탈하고, 모든 시민은 전시에 애용되는 똑같은 빵을 먹어야 하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강요한다. 심지어는 수백 명의 인간을 모아 놓고 대포로 쏘아 죽이는 제노사이드도 서슴지 않았다. 푸셰가 파견된 이후 몇 주 동안 소도시 리옹에서 1천6백명이 학살된다. 그의 목표는 자신이 자코뱅에 충성하고 있는 혁명의 충실한 주체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츠바이크는 그를 세계 최초의 볼세비키이자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보다 1백여년 앞선  ‘공산당 선언’의 기초자로 묘사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살의 책임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돌연 태도를 바꿔 모든 책임을 함께 부임한 콜로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살아 남는다. 뱀처럼 교활하게.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두 번의 걸쳐 반복된 푸셰 자신의 운명을 건 정치적 대결이다. 그 첫째 상대자는 로베스피에르이고, 두번째는 나폴레옹이다. 물론 두 번 모두 최후의 승자는 푸셰다. 푸셰를 탄핵하는 로베스피에르의 격정적 연설 : “이 세상에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민중에게 가르칠 사명을 누가 그대에게 부여하였는가. 우리들에게 공개하라. 모든 맹목적인 힘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때로는 미덕을, 때로는 악덕을 아주 우연히 두들겨 부수고 인간의 영혼은 무덤의 입구에서 소멸하는 연한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고 민중에게 믿게 하는 선동에서 그대는 어떠한 이득이 있다고 보는가. 무고한 자들에게서 이성의 왕홀을 탈취해서 악한의 손에 넘겨주는 일을 그대는 어떠한 권리로 감히 행했던가. 그대는 자연의 모습에 수의를 걸어주고, 불행한 자들을 더욱더 절망케 하였다. 범죄자의 죄를 가볍게 해주고, 미덕을 암담하게 하고, 인류를 비천하게 했을 뿐이다. … 자연이 우리들에게 무 이외에 어떠한 아름다운 것도 보낼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을 경멸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범죄자일 따름이다.”(91p) 이 추상같은 연설이 주는 준엄함! 피가 튀고 살점이 난무하는 혁명의 와중에도, 인간의 목숨을 단두대가 선 형장으로 내보내는 무시무사한 탄핵연설에 동원되는 ‘정치담론의 수사학’은 이토록 우아하다.

급진 자코뱅 로베스피에르에게 푸셰는 하잘 것 없는 존재였으나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치면서 죽은 것은 오히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충실한 심복 생쥐스트였다. 로베스피에르의 격정적 단죄에도 불구하고, 푸셰는 온갖 음모와 술수로 로베스피에르의 친위대이자 혁명의 사령부인 ‘자코뱅 클럽’의 영수로 선출된다. (로베스피에르의 분노에 찬 토로, “푸셰, 네놈이 감히!”) 그 뒤 ‘청교도적 공화파’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짓눌려 있던 국민의회 온건파의 반란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이게 테르미도르(프랑스 혁명력 제11월, 7월19일 ~ 8월 18일, 프랑스 혁명력은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 같은데서 다시 쓰여지고 있는데, 이 희한한 달력의 울림은,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나에게조차도 시적으로 느껴진다.) 9일에 벌어진 인류사적인 반동이다. 후일의 역사는 로베스피에르를 굵은 고딕체로 기록하지만, 현실의 역사에서 주인공은 그가 아닌 푸셰다.

역사에서 간주곡은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승승장구할 것 같던 푸셰는 리옹의 학살 책임이 뒤늦게 문제되어 회색의 망명객으로, 화려한 국민의회 의원에서 가난한 평민으로 전락한다. 가난한 시골의 다락방에 살며 ‘돼지먹이’ 일로 겨우겨우 살아가던 푸셰는 당시의 권력자 바라스의 ‘밀정’이 되어 남이 하는 말을 엿듣고, 뒤를 캐는 일로 그의 신임을 얻는다. 그의 기질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이 스파이 짓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의 특기와 장점을 살리게 된다. 그 ‘실력’으로 당대의 권력자 바라스의 눈에 들어 하루아침에 맨 밑바닥에서 5인 집정내각하의 프랑스 공화국 경무대신으로 등극한다. 한국사회로 치자면 ‘경찰총장’이 된 그는 과거 자신에게 해꼬지를 한 자코뱅파를 처단하고, 해고하고, 감옥에 가두는 일에 혈안이 된다. 여기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 그를 바깥세상으로 끌어내어 출세를 시킨 바라스 역시 후일 푸셰에 의해 ‘추방’된다는 것. 츠바이크에 의하면 이는 “배은망덕에 대한 세계사적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초라한 포병장교에서 쿠데타를 통해 일약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푸셰의 과거와 음모가적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몰락시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주지도 않는 방식으로 푸셰의 목줄을 쥐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경무대신직에서 면직되고, 한직인 원로원 의원이 되어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지만, 대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건 바로 ‘돈’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사업수완으로 백만장자가 된다. 하지만 돈보다 더 달콤한 것은 권력이었다. 말하자면 권력중독자인 푸셰에게 돈의 세계보다 더 달콤한 것은 권력이었다 : “권력은 메두사의 눈을 갖고 있다. 한번 그 놈의 얼굴을 본 자는 그 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고, 언제까지나 정신이 홀려 사로잡혀 있게 된다. 한번 지배하고 명령하는 도취감을 맞본 사람은 결코 그 도취감을 단념할 수 없다. 세계 역사를 훑어보면 권력을 자진해서 단념한 실례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181p)

종신집정관에서 황제를 꿈꾸던 나폴레옹과 다시 권력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푸셰의 욕망은 맞아 떨어졌다. “카이사르가 되려는 자는 안토니우스와 같은 자를 필요로 하는 법”. 푸셰는 나폴레옹에 의해 경무대신으로 다시 복귀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 둘 사이의 스파이질과 반대 스파이질은 교활해지고 추악해진다. 나폴레옹은 푸셰를 믿지 못하면서도 그에게 ‘오트란트 공작’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이 공작가문의 문장은 황금의 기둥 둘레를 뱀이 휘감고 있는 모습, 나폴레옹의 재치가 빛나는 대목이다. 푸셰가 나폴레옹과 싸워 이기는 순간은 푸셰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초기 프랑스를 구한 영웅에서 ‘황제가 된 이후’ 나폴레옹이 숙명처럼 안고 있던 전쟁광 기질이 빚은 참극이기도 하다. 엘바섬에 유배됐다 탈출한 나폴레옹에 의해 세 번째로 경무대신에 임명된 푸셰는 영국과 메테르니히 등 적대국가들과 은밀하게 거래를 벌였고, 결국 100일 천하를 이끌다 워털루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 타격을 안긴다. 재기를 꿈꿨던 나폴레옹은 루이18세를 옹립하여 왕정을 복고하려는 푸셰의 계획에 따라 서서히 침몰하다가 결국 반동의 물결에 의해 처단된 것. 최종 승자는 역시 푸셰였던 것. 그는 왕정복고를 위한 준비기간 동안에는 5인의 집정내각중 두명을 매수하여 5일동안 프랑스의 절대군주가 되기도 했다. 가난한 시골교사에서 경무대신, 오트란트 공작, 임시정부 의장으로 최고권력까지.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은 이렇게 외친다 : “나는 오직 한 사람, 참으로 완전무결한 배반자를 알았다. 그 사람은 푸셰다.”

츠바이크의 탁월한 점은 한 인물이 가진 복잡다단한 성격과 기질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하면서도 역사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적절히 통찰하고 배합할 줄 안다는 점이다. 푸셰의 몰락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다. 모든 사람들이 푸셰의 추악한 과거를 잊거나 잊으려 했지만, 단 한사람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의 딸 앙굴렘 공작부인. 그녀는 푸셰가 자기 아버지 루이 16세에게 사형을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으며, 푸셰를 포함한 자코뱅들이 어머니와 부모의 친척, 친구들에게 한 짓을 아주 끔찍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 다시 재개된 왕정에서 루이 18세는 앙굴렘 공작부인이 가진 푸셰에 대한 미움을 핑계로 그를 외국으로 추방해 버린다. 이제 절대권력자에서 몰락한 푸셰는 한 때 친한 사이였던 유럽의 모든 실력자들에게 거부당하고, 오스트리아의 시골과 프라하를 거쳐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죽었다.

츠바이크는 푸셰가 마지막이자 최초로 범한 우매한 짓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말한다. 그게 몰락의 시작이었던 것. 다시 말해, “배반해야할 주군도 없는 푸셰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배반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배신과 배신의 배신, 배신의 배신의 배신으로 점철된 생애가 결국 마지막에 배신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츠바이크가 말하는 ‘정치적 인간’의 가장 깊은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정치적 삶의 숙명이 살아 움직이는 권력의 생리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라면 ‘배반’은 불가피하다. 영속적인 권력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 배반의 귀착지는 결국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온 자신의 역사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인간에게 ‘자기 성찰의 회로’가 존재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인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찰은 반성을 부르고, 반성은 정치적 생존과 비약을 위한 선택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을 반복하는 회의주의자는 정치적 성공을 하기 어려운 법이다. 물론 이는 정치의 영역을 좁은 의미의 정치사회, 적어도 권력자와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국한했을 경우다.

성찰의 결여와 더불어 푸셰가 진짜배기 ‘정치적 인간’이라는 점은 그가 가진 모든 음모의 기록, 공개되면 피바람이 불 모든 문서들과 편지들을 불태웠다는 점이다. “그토록 완고하게 과묵했던 사람은 무덤속에서조차 진실을 누설하지 않았다.” 행복한 망각을 선택함으로써 후대의 재평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재기’ 할 기회를 노렸던 것일까. 츠바이크는 “정치적 인간의 유형학”을 수립하려 했다지만, 이것은 유형학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치적 인간의 ‘생태학’이거나 ‘인류학’에 가깝다. 그것이 생태학이자 인류학인 까닭은 정치적 인간의 속성은 규모와 크기를 달리하여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배반’은 ‘변화의 수용’으로, ‘역사적 퇴행’은 ‘시대정신’으로, ‘존재에 대한 성찰’은 ‘(불가피한) 숙명에의 너그러운 수락’으로 치부되는 수사학만이 조금씩 달리 구사될 뿐. 그러니, 어찌 푸셰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2007년 말,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의 제목은 “우리는 모두 조제프 푸셰의 후예다”라는 것이었다. 
 

* ps.  정치적 ‘거물’들의 세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간들의 생존법을 일러주는 한 에피소드 :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 당시는 시간이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이 규탄하고 있는 동안에 조용히 있기만 하면 사람들은 묵인할 것이다. 공포정치 수년동안 줄곧 의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한번도 입을 열지 않다가 후일에 그 전체 기간중 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살고 있었습니다”라고 천재적인 대답을 한 시에예스의 그 유명한 처방대로 마치 많은 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음을 가장하듯이 푸셰는 죽은체 하고 있었다.”
 - 이게 많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쓸모있는 지혜일 것이다. 근데, 이 재밌는 책이 왜 품절일까. 변절의 시대에 매우 유용한 참고서이자 교과서인 이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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