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의 美 - 일본미술의 혼
고바야시 다다시 지음, 이세경 옮김 / 이다미디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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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근대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의 열광적 매니어였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모네·드가·로트레크 등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도 모두 우키요에에 흠뻑 빠져 있던 사람들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일본 도자기를 감싼 싸구려 포장지로 쓰였던 우키요에가 모네에 의해 발견되면서 유럽에는 ‘자포니즘’(Japonism·일본주의)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우키요에가 한창 제작됐던 에도(江戶)시대(1603∼1867)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도를 방문했지만 이 그림이 그들을 통해 한국에 건너오지는 못했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고바야시 다다시는 “이국의 풍속화인 우키요에가 그 무렵 한국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 6월과 8월 국내에서 열린 대규모 우키요에 전시회가 성황을 이뤘던 것을 보면 우키요에는 한국인들에게도 충분히 매혹적인 모양이다.

‘우키요에의 미’는 자포니즘을 이끌었던 이 일본 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안내서다. 우키요에 연구의 대가인 저자 고바야시는 하시카와 모로노부·기타가와 우타마로·우타가와 히로시게 등 대표적인 우키요에 거장 12명의 작품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을 도판으로 소개해 놓고 있는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우키요에를 “에도라는 특정한 도시에서 초닌(町人·도시의 상인과 중인층) 문화의 하나로 발전된 서민적 회화”라고 말하고 있다.

‘우키요’는 이 세상, ‘에’는 그림을 뜻하는 말로 우키요에는 한마디로 ‘현재의 세태와 풍속’을 그리는 그림을 의미한다. 에도시대에는 현재를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우키요에에 유곽이나 기녀·가부키·스모 등 현세적인 쾌락과 향락주의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목판화로 제작돼 대량생산되었던 우키요에는 당시 에도 서민들의 애호품이자 특산물이었다.

우키요에가 ‘왜색’을 짙게 풍긴다고 해서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그림들의 간결하되 강렬한 묘사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한세기 전의 서양화가들이 이 작품들에 끌렸던 것은 그들의 이국 취향과 동양적인 것에 대한 편견인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겠지만 그것은 또한 우키요에가 가진 힘이기도 했다.

이 그림들에 나타난 근대 일본의 풍경은 대단히 활력있고 생동감있다. 그림을 넘어 한 시대의 역동적 실상을 실사로 보여주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개혁에 성공한 일본의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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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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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넘은 노작가는 ‘지옥불 같은 열정’을 숨기며 살았던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왔다. 대가(大家)라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됨이 없는 소설가 박완서(73)씨의 열다섯번째 장편 ‘그 남자네 집’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발밑의 언땅이 고무공처럼 온몸에 탄력을 주었던” 첫사랑의 순간을 회억한다. 그녀의 많은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6·25 전란이 흑백사진처럼 배경 처리돼 있다. 박씨의 장기인 정겹고 곡진한 ‘수다’는 이 작품에서도 장관을 이루며,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소설은 중년의 여주인공이 첫사랑의 상대였던 ‘그 남자’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그 남자가 어머니와 함께 그녀가 살던 돈암동 안감내의 홍예문이 달린 기와집으로 이사왔다. 그 남자와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전란의 와중에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두 사람은 우연히 퇴근길 전차 안에서 만나 길고 긴 인연의 끈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남자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백수에다 ‘마마보이’였다.

소설은 박씨 자신이 밟아 왔던 행로와 엇비슷하게 전개된다. 박완서씨가 6·25의 와중에서 오빠를 잃어야 했고, 미군 부대 PX에서 일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데뷔작인 ‘나목’에서부터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그녀의 상당수 소설들은 그 시절의 궁핍과 고통을 실감나게 그려낸 바 있다. 이 때문에 한 문학평론가는 박씨의 소설을 두고 ‘기억의 서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도 1950년대의 삶은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그려진다. 첫사랑의 열정과 그것이 사그라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여자가 무능한 남자 대신 은행원을 선택하면서 끝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주지도 않았고, 사랑의 묘미도 없었다. 우연히 그 남자를 다시 만나 함께 밀월 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나 남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여자는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열패감에 빠진다. 그 후 남자가 뇌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지만 이미 그는 시력을 잃었고, 그녀는 귀여움을 잃은 채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만 담담하게 포옹을 나누며 결별한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50년대라는 남루한 시절에 “문학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나면 피가 맑아진 느낌이 들곤 했다”며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다”고 고백한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그 시절의 ‘그 남자’를 회고하듯이 작가는 척박한 시대에 그녀를 매료시켰던 문학을 추억한다. 그 때문에 첫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작가가 젊은날의 문학에 바치는 헌사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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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지음 / 산처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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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서에 ‘민족’(民族)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근대 역사가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민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역사’니, ‘전통의 발명’이니 하는 말들이 떠오르는 맥락도 비슷하다. 현재의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역사가 동원되거나 없던 전통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례는 최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돼버렸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킨다거나 북한이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복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역사 만들기’ 작업인 셈이다.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치열한 쟁점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단군과 고조선’ 문제다. ‘단군, 만들어진 신화’를 쓴 고대사학자 송호정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부의 역사 인식에 영합하는 보수우익 집단이 대거 등장하면서 웅대한 한민족사와 고조선사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며 “역사와 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의식으로 인해 한국사의 유구함과 영토의 광대함을 밝히고자 하는 의욕만이 앞서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논란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료와 유물에 대한 엄정한 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구성해야 하는 그에게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이다.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볼 때 단군이 민족의 시조이자 실존인물이라는 일반인들의 믿음은 허황된 것이다.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 이런 얘기를 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숱한 ‘재야사학자’들과 사이비 민족주의자들이 신화를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다. 북한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고구려 귀족의 무덤을 단군릉이라며 대동강 문명권을 주장하는 북한은 ‘만들어진 신화’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정당화하려 한다.

저자가 일차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단군에 대한 탈신화화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 단군의 실존 여부, 기자조선 문제, 강역 문제 등 한국 고대사의 가장 예민한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반만년 대륙 민족의 영광사를 되찾아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식의 과잉 민족주의 언설들이 가진 위험성을 비판한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환단고기’와 같은 재야사학자들의 저서들도 비판의 목록이다. 저자에 따르면, 붉은 악마의 상징인 치우가 실존인물이며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허구다. 국사교과서 역시 신화에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하다.

한국인들에게 단군은 민족 정체성의 구심이면서 민족적 위기 시 민족을 통합하는 기제로 작용해왔다. 저자는 단군신화가 가진 긍정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화를 역사로 인식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저자는 고대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 작업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은·주의 신화시대조차 실제 역사라 말하는 중국의 ‘저급한 논리’는 역사학적으로 극복돼야지 항의집회나 민족주의에 호소한다고 해결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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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일제 침략사
임종국 지음 / 한빛문화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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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 2일, 일제의 초대 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부임했을 때 그의 수행원 가운데는 4명의 화류계 여자가 섞여 있었다. 이토는 군대와 함께 일본의 ‘기생’을 한국에 들여왔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시 일본군은 한국에 진주하면서 서울 묵정동에 70여평의 공창가를 조성했다. 이곳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신마치’(新町)로 불리면서 8천3백여평 규모의 ‘인육시장’으로 발전했다. 일제는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이 아니라 대포와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던 것”이다.

친일문제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고(故) 임종국씨의 ‘밤의 일제 침략사’는 일제에 의해 시작된 한국 ‘밤문화’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한·일 병탄을 추진하고 군대를 진주시켜 대륙 침략의 야욕을 불태웠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한낮’의 얼굴이라면, 요정과 게이샤가 동원된 유흥문화의 잠식은 일제의 ‘밤의 얼굴’인 셈이다. 이 당시 형성된 근대적인 밤문화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 6·25를 거치면서 현대의 환락가로 이어졌다. 최근 정부가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있는 집창촌 역시 일제시대에 비로소 근대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던 용산에는 1908년 무렵부터 공창가가 형성됐다. 현재에도 건재한 용산의 사창가 역사는 이즈음부터 시작된 셈이다. 요정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임씨는 1887년 일본에서 건너온 이몽이 개업한 정문루가 한국 최초의 고급 요정이라고 쓰고 있다. 당시 조선은 돈벌이에 좋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여성들이 대거 건너왔다고 한다. 정식 게이샤는 극히 드물었고 무허가 작부들이 단신으로 건너온 경우가 많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일본 요정에 정식 게이샤가 대거 들어왔고, 이때부터 ‘요정 전성시대’가 개막된다.

신마치 묵정동이 공창가였다면 소공동 일대, 태평로와 을지로, 청파동, 명동 일대에도 일본 매춘부들이 들끓었다. 일본 기생들이 많아지면서 일종의 게이샤 조합인 ‘권번’이 출범한다. 1920∼30년대에는 본권번·신권번·남권번 등 세개의 게이샤 권번이 3백50여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이샤 권번의 출현으로 한국 기생들도 조합을 결성하게 되는데, 일제의 3개 권번에 대해 한국 기생들은 대정·한성·한남·대동의 네개 권번으로 재편된다. 조선인 창녀들은 1908년 경성창기조합을 결성하면서 조직화를 시도하게 된다. 임종국씨는 1930년대 무렵 일본인 1천4백34명에 1명꼴로 일본인 게이샤가 있었다면, 조선인은 4만3천여명에 1명꼴로 기생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본인 통감들은 저마다 게이샤 취향이 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관저는 언제나 게이샤와 건달패들로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화대로 쌀 2백가마에 해당하는 1천원을 선뜻 지불할 만큼 통큰 사내였지만, 기실 이토의 유흥비는 한국 침략으로 일제가 빨아들인 돈이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수장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파의 거두들도 일제가 조성한 유흥가의 단골이었다. 송병준이 일본인 애첩 오카스를 시켜 차린 청화정은 일제 통감부 문관들 전용인 화월, 무관들이 자주 드나들던 국취루와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으로 친일파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전통시대 한국 유흥가의 주역이었던 기생들은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곧 노래는 팔지언정 몸은 팔지 않는다라는 명예로운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밤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한국 기생들의 법도도 사라져 갔다. 가령, 조선의 기생들은 손님 옆에서 술을 따라주는 관습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일본 요정에서 조선 지배층을 접대하면서 기생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이 조선 기생의 법도를 깨뜨리고 새로운 관습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창·가무 등 예인의 자질과 시·서·화에 능한 기생은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기생과 창녀의 구별도 모호해졌다. “전답 좋은 것은 철로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는 당시의 속요처럼 일제가 조성한 유흥가 속으로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빨려들어 갔다.

일제 말기 들어 식민지 조선 전체가 전시체제로 변하면서 조선의 유흥가는 대륙 진출을 꾀하게 된다. 국내에서 폐업한 포주·접대부·요정업자들이 대륙 곳곳의 ‘전선’으로 진출해 ‘황군’의 사기를 북돋워주는 애국적 영업으로 각광을 받았다. 일본군이 직영하는 매춘업소들도 등장했고, 조선인 포주들도 해외에 사창가를 건설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면서 조선인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여자사냥’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한국에 최초의 공창가를 만들었던 일제는 일본군이 진주한 전역에 걸쳐 또다른 매춘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임씨의 책은 이같은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당대 하류문화의 풍속도로서는 모자람이 없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등 한국에 진주한 일본인 최고 권력자들이 누린 사치와 향락, 최고의 요정 중 하나인 화월의 게이샤 유키코나 한국인 기생 초옥 등 당대 밤문화 주역들이 보여주는 드라마들은 이 풍속사의 두께를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고 있다. 일본이 36년간이나 한국을 지배한 것은 결코 무력의 우위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이 책은 생생히 증거한다. 오래 전 ‘한국사회풍속야사’란 제목으로 출간됐던 이 책이 별다른 자료의 보강없이 그대로 출간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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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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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무함마드 깐수’ 교수가 북한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그는 당국에 체포돼 자신은 북한에서 온 ‘정수일’이라고 순순히 밝혔다. 한국인이었던 그의 아내조차도 신분을 몰랐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감추었다. 5년여의 감옥생활 끝에 2000년 석방됐을 때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석방 직후 그는 초인적인 집필력으로 ‘실크로드학’·‘고대문명교류사’ 등의 역저와 ‘이븐 바투타 여행기’·‘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 난해한 고전을 잇따라 펴냈기 때문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정수일씨의 파란많은 인생을 담고 있는 에세이다. 감옥 밖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모은 이 책은 사적인 내용의 서한집이 아니다. 정씨는 분단시대의 비극이 그대로 농축돼 있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민족주의자이자 이슬람 학자로서의 공부 내력과 포부를 담담히 서술한다. 남한 사회에 그는 ‘간첩 깐수 교수’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치열한 학자로서의 면모다.

그는 한국어·일본어·중국어·아랍어·페르시아어·말레이어·타갈로그어 등 동양어 7종과 러시아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 12개 언어에 능통한 인물이다.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그의 학문적 궤적과 성취는 학계에서 세계 일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다른 이력만큼이나 그가 풀어놓는 에피소드들도 눈길을 끈다.

그는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해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 중국 내 젊은 조선족 엘리트들이 ‘잔류파’와 ‘환국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다 자신은 조국의 건설을 위해 북한행을 택한 과정, 압수당한 ‘고대문명교류사’ 원고를 사형을 구형한 검사한테 돌려받은 일화 등 불우했던 천재학자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중국 외교부에서 일할 때 저우언라이 가문의 한 여성으로부터 구애를 받았으나 이미 북한행을 결심한 그는 구애를 거절했다. 이 ‘러브스토리’는 그의 법정 신문에서도 화제가 됐다.

중국 잔류파로 중국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씨와 그의 삶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같은 중국 내 조선족 엘리트였던 조남기씨가 남한 언론으로부터 ‘조선족 영웅’ 대접을 받았던 반면 ‘조국’인 북한을 택한 그는 영어의 몸이 됐던 것이다. 그는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두루 섭렵하고 ‘실크로드학’이라는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 그에게 ‘간첩’이라는 수식과 감옥생활은 삽화에 불과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정수일씨는 세계적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강단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이만한 학자를 대접하는 데 한국 사회는 너무나 인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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