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 금지된 소설들에 대한 회고
아자르 나피시 지음, 이소영.정정호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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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중년 남자와 열두살짜리 여자아이의 ‘불온한 사랑’ 이야기다. 1955년 발간 당시부터 외설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출판금지를 당한 책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책이 됐지만 1990년대의 이란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정치적 모험’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란의 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던 아자르 나피시는 마치 비밀결사를 만들듯이 금서를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이 탐독한 책들은 마르크스주의 관련 책들이거나 반이슬람 서적이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나보코프의 ‘롤리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헨리 제임스의 ‘워싱턴 광장’,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바로 그 금서목록이었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는 세계문학전집에나 속할 이같은 작품들을 금서로 낙인찍은 이란의 정치적 야만성을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 나피시 교수는 서구에서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모국인 이란에서 1979년부터 1997년까지 영문학을 가르친 여성 지식인이다. 이 책은 그녀가 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아침 일곱명의 이란 여성과 함께 책을 읽었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말하자면, 70년대 말의 이슬람 혁명과 호메이니 정부 등장, 이란-이라크전 등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 책읽기라는 정치적 모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던 이슬람 여성들의 운명에 관한 책이다.

나피시 교수는 테헤란대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다 정권이 강요하는 베일 착용을 거부해 해직됐다. 당시 이란은 종교적 원리주의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가 지배했던 국가. 나피시 교수와 일곱 여제자의 독서행위는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질곡과 책읽기마저 금기시되는 부자유 속에서 감행했던 자유의 실천이다.

각기 다른 경험과 배경을 가진 일곱명의 개인사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이슬람 여성들의 내면기록이기도 하다. 교수와 여제자들은 그들 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고민을 나누면서 여성적 연대감을 확인한다. 이슬람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각기 다른 개인사들이 살아나면서 억압을 넘어서는 꿈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저자는 “혁명 후의 이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혐오하는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롤리타’는 “더러운 늙은이가 열두살 소녀를 강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을 다른 사람이 몰수하는 것”으로 읽는다. 이란 혁명으로 몰수당한 자신들의 삶이 롤리타의 운명과 겹쳐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책읽기는 자기 발견의 과정이면서 자유에 대한 갈구이기도 했다. 한국 역시 어렵사리 ‘책읽기의 자유’를 얻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금서목록’이 존재했던 우리에게 이 책은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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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천자문 -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
김성동 쓰고 지음 / 청년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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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다섯살 난 손자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며 충청도 사투리로 이런 말을 남겼다. “문즉인(文則人)이라…, 문즉인이요 문긔서심(文氣書心)이라… 글은 곧 사람이라. 글은 곧 긔요 글씨는 곧 마음이니, 다다 그 긔를 똑고르게 모으구 그 마음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넌 사람만이 글을 짓구 또 글씨를 쓸 수 있너니…” 소설가 김성동은 조부 앞에 정좌하여 천자문을 배우던 자신의 다섯살 시절을 떠올리며 1천자의 글씨를 하나하나 써내려 갔다. 한구절 한구절 스민 뜻을 새기고 거기에 ‘군말’을 붙여 자신만의 ‘김성동 천자문’을 펴냈다.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문인 주흥사(周興嗣)가 펴낸 것이라고 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주흥사에게 왕이 “하룻밤 안에 1천자로 사언절구의 문장을 만들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명령했고, 주흥사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천자문을 지어냈다고 한다. 하룻밤새 그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후 ‘천자문’은 한자에 입문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재가 됐다. 우리나라에는 백제 때 전래됐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석봉천자문’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김성동은 ‘만다라’로 이름난 소설가이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그는 이 책의 글씨 1천자를 손수 쓰고 거기에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자문’에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천문과 지리, 제왕학과 정치가의 도리, 인간 사이의 예의범절 등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매체의 발달로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1천개의 글자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숭상하던 봉건시대의 ‘숭문주의’에나 어울릴 법하다. 그래서인지 ‘천자문’은 필수교육에서 빠진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저자 김성동은 지나치리 만큼 진지하다. 그가 정성들여 쓴 1천자도 그러하고, 거기에 붙인 자신의 ‘군말’도 그렇다. ‘일월영측 진수열장’(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고르게 펼쳐져 있다) 여덟 글자를 써놓고, 굶주리던 어린 시절 자신이 동경에 찬 얼굴로 올려다보던 하늘의 별을 떠올리면서 “별무리가 총총 박혀 있는 저 밤하늘이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일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하는 헝가리 문학평론가 루카치를 상기하는 식이다. 한 글자를 ‘화두’삼아 오랜 시간 곱씹고 묵힌 사유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김성동의 ‘천자문’이 주는 미덕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말의 경건성’을 그는 자신의 글씨와 사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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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과 뉴 휴머니즘
임석재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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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과 스페인의 빌바오는 둘 다 탄광도시였다. 죽어가던 두 도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은 정선을 살리기 위해 카지노를 지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빌바오를 살리기 위해 세계적인 건축가 프랑크 게리에게 의뢰,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다. 결과는 어땠을까. 정선에는 돈과 도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도박꾼들로 넘쳐났다. 반면 빌바오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보기 위해 찾아들었다. 정선에는 몸과 마음이 피폐한 자들과 죽은 돈들이 넘치지만, 빌바오에는 건축예술을 감상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건강한 돈이 모여드는 곳이 됐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서양건축사와 전통건축에 관한 다수의 역저를 펴낸 바 있는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는 건축을 그저 돈으로만 바라보는 한국의 ‘문화적 불모성’이 정선을 죽은 자들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가 새로 펴낸 ‘현대 건축과 뉴휴머니즘’은 한국의 반문화적인 건축 현실을 예리하게 진단하는 건축비평서다. 빌바오의 성공은 임교수가 말하는 ‘건축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정선의 카지노를 짓는데는 2천3백억원이 들어갔지만 빌바오의 미술관은 그보다 훨씬 적은 1천7백억원밖에 들지 않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건축을 문화예술로 바라보지 못하는 인식이 문제인 것이다.

건축을 문화예술로 되살리는 것은 “성장과 효율과 경제성이라는 한가지 기준”에 의해 폐기됐던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다. 임교수는 이를 “기계 물질문명과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을 되찾는 일”이자 ‘뉴휴머니즘’을 세우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의 아파트 수명은 1백30년, 미국은 1백년이지만 한국의 그것은 20년이다. 저자가 말하는 건축의 뉴휴머니즘은 끝없는 파괴의 악순환을 끊는 작업이다. 동시에 건축을 투기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싼값에 빨리’ 짓는 압축근대화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한옥 등 전통건축이 가진 미덕을 재해석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대학교수인 저자는 방학 때마다 한두달씩 세계의 도시를 누비고 다닌다. 유명 건축물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서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서다. 이 책은 건축에세이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기실은 발냄새가 밴 현장 르포집이기도 하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코엑스몰과 신촌의 대학가뿐 아니라 유럽의 도시들과 맨해튼의 빌딩숲, 캘리포니아의 현대 건축에까지 가 닿는다.

인간의 자리가 사라진 건축은 그저 싸늘한 콘크리트 더미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후에 맞게 경상도는 ‘ㄷ’자형, 전라도는 ‘ㅡ’자형 집을 짓고 살았다. 전국의 모든 집이 아파트로 표준화된 지금 그런 지방적 차이는 사라졌다. 똑같은 집은 집이 아니다. 이 책은 사람이 살아가는 집을 되찾기 위한 건축학자의 고투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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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다 고코의 요리와 인생 이야기 - 세계 6대륙 30개국의 맛을 찾아 떠난
시노다 고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이마고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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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문화다. 이 ‘진부한’ 문장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곽재구의 시는 어떨까. “김치찌개 하나 둘러 앉아/저녁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속에는/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김치찌개 평화론’)

한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김치찌개’보다 더 실감나는 한국의 서민문화가 있을까. 일본 여성 시노다 고코는 이를테면 세계 각지의 ‘김치찌개’를 맛보며 다니는 이색적인 여행가다. ‘시노다 고코의 요리와 인생이야기’는 세계 6대륙 30개국을 떠돌며 그 지역의 풍토와 음식에 대해 풀어놓는 독특한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식가의 한가한 음식기행이거나 요리를 테마로 한 여행가이드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유명한 음식을 먹기 위해 여행하는 식도락가가 아니라 그곳의 소박한 밥상을 통해 삶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일 뿐이다. “세계를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음식을 통해 세계를 음미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믿음이다. 홍콩에서 자란 일본인으로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던 저자는 유명 여행지가 아닌 곳을 음식기행지로 택했다. 아일랜드의 땅끝에서부터 모스크바의 서민가정, 아프리카 사막과 베이징의 거리를 두루 쏘다녔다.

그녀가 알려주는 맛과 인생의 목록은 참으로 다양하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저자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의 네덜란드 소스를 맛봤다. 하지만 그 요리를 알려준 독일 아가씨는 교통사고로 죽고 그녀의 아버지와 저자만이 남아 다시 그 요리를 만들지만 거기에 스민 그리움의 맛은 좀처럼 느낄 수 없었다. 영국신사의 집에 초대된 저자는 화려한 성찬이 아닌 귀족의 어린 딸이 사온 크럼펫을 맛보며 무너져 가는 귀족사회의 모습을 실감한다.

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족에게 대접받은 연록색의 박하차 맛은 신기루 같았다. 그 부족의 천막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이미 사막 저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비즈니스맨이 득시글거리는 뉴욕은 어떤가. 뉴욕의 점심시간에 그녀는 “마치 수류탄처럼 보이는 베이글”을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마우스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뉴요커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본다.

그녀가 한국에 온다면 어떤 반응일까. 한국인들은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손에 손에 자판기 커피잔을 들고 일터로 향한다. 아프리카나 유럽보다는 뉴욕의 비즈니스맨에 가까운 풍경이다. 물론 저녁시간에 김치찌개 앞에 둘러앉아 온기를 나누는 가족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직업의 다른 말은 밥벌이다. 저자가 음식을 통해 말하려는 것도 그것일 터다. 세계인들이 한그릇 밥을 마련하기 위해 들이는 땀과 눈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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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 먹다 - 전희식의 귀농일기
전희식 지음 / 역사넷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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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수입 개방으로 위기에 몰린 농민들의 처지는 절박하기 그지없다. 농민들은 정든 고향과 논밭을 등지고 있지만 도시의 한 켠에서는 조용한 귀농행렬이 이어진다. 8년 전 처자식을 이끌고 전북 완주에 내려간 전희식 씨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땅과 자연에 가까이 가는 생활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귀농해 고추를 심고 감자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웃들과 품앗이 노동을 통해 손수 집을 짓기도 했다. 그가 펴낸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는 틈틈이 써왔던 귀농일기를 모은 것이다.

도시인의 귀농행렬은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느림의 미학’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도시의 숨막히는 공기를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귀농을 꿈꿔보지 않은 도시인들이 과연 있으랴. 퇴직 후 시골에 내려가 손수 농사를 짓는 조용한 전원생활을 생각해보지 않은 도시인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전씨의 귀농일기를 펼쳐보면 ‘낭만적 전원생활’은 허무맹랑한 몽상이다. 낭만을 안고 귀농하는 사람들은 “농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골을 망쳐놓는 사람들”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이다. 그에게 귀농이란 ‘업종 전환’이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전씨는 부인과 실상사의 작은 학교에 다니는 큰 딸 새날이, 초등생인 아들 새들이와 함께 살고 있다. 전씨 부부의 삶도 유별나지만 두 자녀도 그렇다. 새날이는 교사의 일상적인 폭력이 싫어 스스로 대안학교를 택했다. 두 자녀는 부모를 도와 일을 하면서 공부한다. ‘조화로운 삶’의 저자로 잘 알려진 스콧 니어링·헬렌 니어링 부부가 메인주의 시골마을에 정착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듯이 전씨 가족은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그것이 귀농인으로서 그가 추구하는 삶이다. 자동차와 최신 사양의 컴퓨터, 비어 있는 때가 더 많은 아파트를 갖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게 전씨 가족의 결심이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전씨 가족이 손수 지은 황토집 이야기다. 준비에서부터 자연친화적인 재료 모으기, 이웃들과의 품앗이, 온가족이 집짓기에 참여하는 과정 등이 애틋하면서도 감동적이다. 그들의 집은 거대한 기계로 지은 도시의 아파트보다 훨씬 포근해 보인다. 전씨 가족들의 ‘노동’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갔던 옛 조상들의 삶을 일깨워준다. 도시의 인공적 삶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시대에도 인간적 노동을 통한 조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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