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 신지역주의 선언
와다 하루끼 지음, 이원덕 옮김 / 일조각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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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현대사는 전쟁의 역사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임진왜란·청일전쟁·2차대전 등 숱한 전쟁이 벌어졌다. 현재도 중동지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전쟁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한·중·일 3국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 영구적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유토피아적 상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이다.

와다 교수가 제시하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구상’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일종의 지역주의 선언이다. 그는 1990년 ‘21세기와 한·일관계’라는 심포지엄에서 처음 이 구상을 제기한 이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이의 실현을 위해 애써 왔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제창했던 ‘대동아 공영권’의 망령을 잊지 않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 구상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니 ‘동아협동체’ 등의 구호로 표면화됐던 이 논리는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다 교수의 주장은 일제의 논리와는 정반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그의 주장에서 이채로운 것은 동북아 공동체의 창설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중간지대다. 게다가 동북아 협력을 위해서는 군사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남북한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이 벌어졌던 전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특히 재일·재미 한국인과 같은 ‘재외 코리안’의 적극적인 역할에 기대를 건다.

동북아에 새로운 긴장을 조성하고 있는 북핵 문제로 인해 저자의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동북아의 움직임은 저자의 견해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저자는 2001년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3 정상회의에 제출된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하여’라는 보고서와 2002년 9월 이뤄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평화공동체’ 정책 구상에 주목한다.

그의 주장은 국내외에서도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재일 한국인 학자인 강상중 도쿄대 교수와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에서도 일찌감치 그의 견해에 주목한 바 있다.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이 지역에서 가능한 대안은 화해와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의 경험을 교류하며, 토론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협력하며 변화해간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그것을 향한 노력은 끊임없이 추구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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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다시 읽기 - 독립신문 사설선집, 백년 전 거울로 오늘을 본다
서울대 정치학과 독립신문강독회 지음, 김홍우 감수, 전인권 편집 / 푸른역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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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전국 인민의 의복과 음식이 넉넉히 될꼬 궁구하는 것이 정부의 본래 직책이거늘, 근일 동양 제국은 이 본의를 잊어버리고 인민의 의복과 음식을 넉넉하게 하도록 주선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잔약한 백성의 쌀줌 돈냥을 무리하게 뺏는 일이 종종 있음이라….” 경제 불황으로 연금을 내지 못해 국민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재산을 가압류당한 시민이라면 이런 분통을 터뜨릴 만하다. 한국 최초의 순한글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 1898년 4월 9일자에 실린 사설의 일부다. 정부의 중요 기능 중 하나가 국민 생활의 경제적 안정에 있음을 따끔하게 지적한 글이다. 1백년 전에 나온 정부 비판이지만 여전히 생동감있는 주장이다.

‘독립신문 다시 읽기’는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생들이 만든 ‘독립신문 강독회’에서 펴낸 책이다. 지난 1996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매주 한차례씩 모여 희미한 활자를 더듬으며 읽어내려간 결실이 바로 이 책으로 묶였다. 독립신문의 사설과 내용을 크게 세부분으로 분류하고 당대의 문장을 현대어로 고쳐 새롭게 펴냈다. 이들이 ‘독립신문’을 다시 읽은 것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실천들이 어떻게 제기·수용·형성·전파·성장·좌절되었는가”를 살피는 아카데믹한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일반 독자의 눈으로도 이 신문의 내용은 흥미롭다.

독립신문은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신문이었다. 19세기 말의 조선은 근대사회로 진입하려는 마당이었고 당시 시민들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목말라 했기 때문이다. 이 신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지금 동서양 각국이 바야흐로 틈을 엿보고 있는지라. 대한이 조금만 실수하여 일이 있을 지경이면, 내가 그 나라 이름을 말하지 아니 하더라도 다 짐작들 하시려니와, 필경 그 두나라가 의론하고 대한을 보호국으로 만들 터이라”와 같은 위기의식이다. 서세동점의 현실과 문명 개화의 실상, 조선의 악습과 폐단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며 민중계몽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독립신문의 사설은 당시의 조선사회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어떻게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한국 근대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과 같다. 가령 ‘서울의 더러운 길’과 같은 사설에서는 개화파 지식인들이 가진 서구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이 “조선의 독립을 원하고 도와줄 것”이라는 데 이르러서는 이들이 얼마나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지를 실감하게 된다. 사설의 형식도 오늘날의 신문과 다르게 우화나 대화체·기사 등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다. 이 책을 엮은이들은 독립신문이 주도한 만민공동회를 ‘직접민주주의의 시원’으로 평가한다. 만민공동회가 연 근대 민주주의의 지평이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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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계화 -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월든 벨로 지음, 김공회 옮김 / 잉걸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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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1999년까지 개발도상국의 연간 1인당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1.5%(세계은행 2001년 보고서)였다. 이 수치는 그 이전 시기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세계화’가 급진전되는 동안 선진국은 승승장구했던 반면(같은 시기 평균 2.2% 성장), 개도국은 성장이 더딜 뿐만 아니라 유례없는 빈곤상황에 부닥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세계화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경고한다. 전세계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대다수 세계인들의 삶이 황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번역된 그의 저작 ‘탈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오늘날 기업 주도의 세계화는 독재적이고 광신적이며 권위적인 대중추수 세력들의 사육장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당시(20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안과 분노, 그리고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화는 자신의 약속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 넣고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을 당시 국제 금융계의 큰 손 조지 소로스는 “WTO는 하나의 이정표”라며 세계 최강의 경제국 미국을 굴복시킬 유일한 초국가적 기구라며 낙관론을 폈지만 저자는 그것을 악몽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위기는 세가지 기원에서 비롯됐다. 그 하나는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로, 이는 금융자본과 투기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자본자유화가 초래한 사태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1999년 결국 무산된 시애틀 WTO 2차 각료회의. 시애틀에 모인 반세계화 시위는 그 이후 계속된 반세계화 국제시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던 것이다. 세번째는 미국의 클린턴 집권기 장기 호황이 끝나고 주식시장이 붕괴된 것. 정보기술(IT) 산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미국의 ‘신경제’(New Economy)는 거품으로 판명났고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과잉생산의 말로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미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교·군사만이 아니라 경제 부문에서도 강경노선을 걷고 있는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는 곳곳에서 역풍에 휘말리고 있다고 본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통치체제의 세 기둥인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WTO는 일방주의적 세계화의 첨병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재의 세계화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탈세계화’는 “시장논리 및 비용 효율성 추구를 안전·평등·사회연대라는 가치에 의식적으로 종속시키는 접근”이다. 세계 각지의 지역경제들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실질적 국제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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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독재 - 강제와 동의의 사이에서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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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상 유례없는 독재자였으면서도 대학생들로부터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꼽힌다. 서민경제가 불안할수록 ‘박정희 신드롬’은 불쑥불쑥 고개를 들곤 한다. 왜 한국의 대중들은 민주화 시대가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욕망의 뿌리에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국내외 학자 18명이 참여한 ‘대중독재-강제와 동의사이에서’는 ‘대중독재’라는 낯선 개념으로 이런 질문에 답하고 있는 논쟁적인 책이다.

이 책은 ‘독재체제’를 독재자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성격에서 찾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독재체제를 허용하고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대중’들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다. 나치즘과 같은 우파독재이건, 스탈린체제와 같은 좌파독재이건 대중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동의’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은 독재자의 강압에 의해, 혹은 자발적인 동의를 통해 독재체제를 정당화한다. 독재 권력은 박정희 시대에서처럼 중앙정보부 같은 억압적 국가 기구를 통해 대중을 순응하도록 강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의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열광적 지지를 얻어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욕망과 의지를 지닌 ‘다중’(多衆)은 단일한 속성을 지닌 ‘국민’으로 재탄생한다.

‘대중독재’의 사례는 의외로 풍부하다. 1930년대 이탈리아인들은 경제적 안정을 제공해줬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했다. 독일 노동자들은 나치 시대를 실업 감소, 경제 호황의 좋았던 시절로 회고한다. 그 ‘동의’의 기반 아래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이뤄지고 2차대전의 악몽이 시작됐음에도 말이다. 1930∼40년대 일본의 전시 총동원체제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본 국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 등 정치·경제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책에서 독일·일본·러시아·한국의 학자들은 20세기의 전세계에서 등장한 ‘대중독재’의 사례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다.

한국의 지적 전통에서 민중은 언제나 이상화된 존재였다. 그들은 한없이 순결하고 도덕적이며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들은 그런 ‘민중의 신화’를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민중은 독재자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독재체제의 충실한 구성원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나치 하의 독일인들처럼 민족주의적 수사에 도취된 채 인종주의자가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파시즘은 서서히 고개를 들고 급기야는 권력을 찬탈해 버린다. 이 책은 사악한 소수와 선량한 다수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독재체제와 파시즘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지난 세기 한국과 전세계에서 벌어진 정치적 억압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파시즘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지를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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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
신경림.조오현 지음 / 아름다운인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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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말뜻을 풀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언어[言]의 사원[寺]으로 부른다. 그만큼 시와 종교는 닮아 있다는 것일까. 시가 언어의 근원을 지향하듯이 종교는 인간 속에 내재한 영성과 맞닿아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시인 원호문은 이렇게 말한다. “시가 선승을 만나면 비단을 덮어주고(詩爲禪客添錦化), 선은 시인에게 옥칼을 준다(禪是詩家切玉刀).” 그러니 한 선승과 시의 대가가 만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대표적 시인 신경림과 내설악 백담사 무금선원에 기거하고 있는 선승 오현 스님의 만남도 그러하다. 두 대가는 열흘 동안 만나 속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한권의 책을 펴냈다.

이들의 대화는 ‘여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을 통해 시상과 삶에 대한 통찰을 얻어온 시인과 구도의 길 위에 서 있는 선승의 인생행보로 볼 때 그럴 듯한 첫 화두다. 강연차 급행열차를 타고 지방에 내려 가다가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하지”라는 생각에 기차에서 무작정 내려 홀로 느긋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 시인.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천천히 가는 미덕”을 가르쳐주는 여행 속에서 두 사람은 ‘느림’의 미학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한다. 시인은 삶이란 여행의 끝인 죽음에 이르러서도 육신이 “일부는 꽃이 될 것이고, 일부는 나무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물도 되고 바람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는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혜안과 지혜로 빛난다. 여행과 사랑, 환경과 통일, 전쟁과 문학을 화두로 삼은 이들의 ‘말의 향연’에는 시와 게송들이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 쓸데없는 제자랑 따위”는 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리”만을 나누기로 한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다. 그들이 겪어 왔던 개인사와 짝사랑, 치기어린 젊은 날을 회고할 때는 이순(耳順)을 훌쩍 넘어 고희(古稀)에 이른 자만이 풀어낼 수 있는 곰삭은 인생이야기가 된다. 욕망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충돌이 빚어낸 전쟁, 남북간의 공생을 말할 즈음이면 소박한 대로 ‘문명비평’이 되기도 한다.

대화의 끝은 결국 깨달음의 의미로 귀착된다. “우리는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오랜 시간 걸어온 셈입니다. 돌아보면 허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는 것은 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 두 사람의 대화는 한편의 시로 끝난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신경림, ‘갈대’) 이 책을 읽는 것은 고즈넉한 선방,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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