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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1951년 어느날, 서울 현저동 판자촌 비탈길에 서서 또랑또랑한 눈을 밝히고,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과 잔학함을 기어이 증언하리라고 다짐하던, 

어린 소녀의 결기를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온 생애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으로 생을 다하신,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도 '대지모신의 글쓰기'가 현전함을 보여주신 분.  

문학이, 소설이, 위안과 위무의 양식임을 일깨워준 분.  

6.25도, 전후 미군 PX도, 거기서 그림을 그리던 박수근도, 개성의 인삼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개인사가 곧 역사였던 시대를 알지 못하는 부박한 자들이 소설을 쓰는 시대에,  

어디서 누구의 소설을 읽으며 한 밤의 불을 밝힐 것인가.  

문학의 그믐, 소설의 장렬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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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추운 날에는 만화를 봐야 한다. 이런 날은 일찍 집에 들어가 거실 소파에 다리 뻗고 누워 만화를 봐야 한다. 몸은 피곤하고, 온갖 잡사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혼곤할 때,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세월을 보내야 한다. 동네 골목마다 즐비하던 만화가게들이 없어졌으니, 이젠 ‘대여’가 아니라 사서 봐야 한다. 만화책의 지질이 갱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새 만화책 값은 엄청 올랐다. 그래도 사야 한다. 한줌의 위안이 그리울 때, 만화는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불편도 투정도 않고, 딱 본 만큼의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날은 저물고 집에는 가야 하는데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던 어제, 아무 생각 없이 교보에 갔다.

가서 보니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6권이 나와 있었다.  한권 보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만화책의 더딘 출간 속도는 참으로 감질 맛 난다. 히로카네 겐지의 ‘시마’ 시리즈도 그러한데, 70년대 과장을 거쳐 80년대 부장이 되더니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를 맞아 이사가 되더니, 거품 붕괴 이후의 시대에는 드디어 ‘사장’이 되었다. 시마 시리즈에 비하자면, <심야식당>은 에피소드 중심이라 그나마 감질맛이 덜 하다. 어쨌건 이번에 나온 6권도 전편들과 비스무리한 스토리들이 개성적이고 간결한 그림과 더불어 보고 읽을 만 했다. 아쉬운 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봤는데, 내릴 때 되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는 것. 한 시간도 못돼 이렇게 끝나다니, 허무하여라.

그러니까, 야밤에 문을 여는 식당, 누구든 먹고 싶은 것을 주문만 하면 뚝딱 만들어 주는 눈가에 흉터자국이 있는 빼빼 마른 아저씨가 하는 식당. 간단한 요기꺼리에서부터 한끼 식사, 그리고 술까지 파는 집. 이 만화는 음식에 대한 개인의 취향과 그 개인적 취향의 형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양해서 술집 호스티스와 게이샤부터, 트랜스 젠더, 직장인, 만화가, 할머니와 엄마와 딸, 바람난 남자와 여자들까지, 한밤의 동경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작 만화라는 시트콤 드라마 형식을 빌었기 때문일 것인데, 나로서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심야식당이라는 ‘소우주’가 매우 일본스러워 보였다. 일본스럽다함은 사회학적 상상력보다는 개인의 미세한 일상사를 소소한 드라마로 그려 보이는 ‘사소설적’ 전통이 만화에서도 어김없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마주하고는 누구나 그 소박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할 것이다. 가령, 한국 사람이라면 곽재구의 ‘김치찌개 평화론’이 주는 가족주의적 아우라를 절절하게 체험한 바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퍼준 김나는 밥을 한 술 떠 먹을 때의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말이다.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김치찌개 평화론, 곽재구)

그도 아니라면, 김선우가 말한 대로, 여럿 둘러 앉아 삼겹살(물론 그녀의 시는 삼겹살이 아니라 돼지고기 소금구이지만,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지)을 상추에 싸 먹을 때의 그 생의 환희 같은 것.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시간은 왁자하게 떠들며 삼겹살을 먹을 때가 아닐 것인가. 그런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채식주의자들의 염결성을 나는 무척이나 싫어한다.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 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 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훤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그런데, <심야식당>이 지극히 일본스럽다함은, 삼겹살이나 김치찌개에서 보이는 그 ‘비릿한 질감의 연대감’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은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으며, 주인장 또한 그들에게 별로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전국 어딜 가든 꼭 한 군데는 있게 마련인 ‘욕쟁이 할머니’ 같은 가족주의적 아우라가 없는 것이다. 그게 싫은가. 아니다, 그래서 편하고 부담 없다. 만약 한국의 <심야식당>이라면, 그리고 그곳의 주인장이라면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개인사와 일상에 틈입하여 쓸데없는 카운슬러를 자청했을 것이다. 심야식당이 한밤 동경 뒷골목에서 형성된 느슨한 공동체일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감정적으로 묶어내는 질펀한 연대가 없어서 차라리 쿨한 것이다. 물론,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은 가볍기도 하고, 가끔 눈물 찔끔 나기도 하며, 키들거리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이 만화는 주인장의 째진 얼굴처럼 쿨하다.

아베 야로의 이 만화는 일드로도 만들어진 모양인데, 케이블에서 한 두번 보다 말았다. 어째 일본의 걸작만화가 영화화되었을 때는 왜 그리 우스꽝스러운 스토리로 변하는 지 모르겠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들>도 그렇고... 어제 교보에서 산 아베 야로의 또 다른 만화는 <야마모토 귀파주는 가게>다. 야마모토에 귀를 파주는 가게가 있는데, 아주 예쁜 여자가 귀를 파주는 ‘서비스’를 하고, 한번 거기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광적인 귀파기 매니어가 되어 버린다. 유쾌하고 재밌는 발상인데, 물론 에로틱하기도 하다. 여자들을 기형적으로 그리는 아베 야로의 그림체가 오히려 섹슈얼하게 느껴진다. 무릎을 대주고 귀파주는 여자라서 그런가. 아무튼, 이 만화가 한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둘째권이 나올 때까지 또 감질맛 나게 기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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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qui 2011-01-20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파주는 가게라니~ 저는 어머니가 파주는 것도 왠지 공포스러워서 못맡기겠던데 말이죠 ㅡ.ㅡ;ㅎㅎ 만화가 영화화될때 그 원작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되는건 어쩔수 없는듯; 재현에 무리가 있다는 점은 둘째로 치고-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그토록 상상력이 후진지 모르겠어요-일본인들 특유의 제스처가 익숙치않아서 그런지 저는 안보게 되더라구요;대표적으로 노다메 칸타빌레가 그랬다지요..

모든사이 2011-01-20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그런 거 같습니다. 좀더 덧붙이자면, 저는 일본 문화 특유의 어떤 폐쇄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1억2천만명이라는 인구가 창출하는 일본의 자족적 내수시장과 불가피하게 대외의존형 개방경제(박정희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발전경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우리와의 차이 같은 것이랄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폐쇄적으로 고집해도 되는 조건 속에서 대중문화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오타쿠스러운 문화, 그리고 매니어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화가 창출되었다는 것. 그것이 가진 보편성은 우리의 개방적(그것이 헐리우드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든 어떻든) 문화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비단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일본 영화의 저변에 폭넓게 퍼져 있는 B급스러운 취향은 그런 폐쇄성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아니, 어쩌면 제가 가진 문화적 감식안이 협애한 것이어서일수도..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사이님 안녕하세요. 글을 읽어보니 너무 좋네요. 실례지만, 제 블로그에 옮겨 게재해도 될까요? 마침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었는데, 모든 사이님의 리뷰를 보니 꼭 옮겨놓고 싶어서요. 괜찮을지 의견 여쭤봅니다. 부탁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10-06 08:26   좋아요 1 | URL
네 괜찮습니다. 출처만 밝혀주시면 어디에 써도 무방합니다. 근데, 이게 쓴 지 좀 된 리뷰인데, 심야식당은 벌써 7권이 나오지 않았나요?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9: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보다. 조선일보 뒤편에 있는 조그만 극장 스폰지하우스는 퇴근 이후 홀로 영화를 보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다. 홍상수의 영화라서 그런지(?) 좌석은 반쯤도 차지 않았다.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위악에 키들거리면서, 그 위선과 위악이 내 안에도 겹겹이 쌓여 있음을 확인하면서 봤다. 80분 동안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나서 든 생각은 ‘삶으로서의 텍스트’라는 말이었다. 3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그녀의 삶으로 이뤄진 두 개의 텍스트를 병치시켜 보여준다. 그녀가 만나고 연애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와의 짧은 아차산행 산책.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은 그녀의 삶에서 동일한 것의 반복이면서 변주이기도 하다. 반복인 까닭은 연애하는 남자와 동일한 코스의 산책을 했다는 것이고, 변주인 것은 그때그때의 대사와 행위, 그녀가 느낀 순간의 감정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두 개의 텍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지만 다른 두 주인공들인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는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 조우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남녀가 벌이는 사소하고도 진지한 해프닝과 돌연 격렬해지는 주인공들의 감정적 굴곡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라고 발랄하게 내뱉는 옥희. 이 영화는 ‘약’에 취한 사내들이 젊은 영화학도 옥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연애담이다. 옥희는 그런 두 남자와의 연애를 ‘영화’로 텍스트화하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반복이고 무엇이 변주인가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약에 취한 사내들이 편재해 있는 세상에서 그녀는 기꺼이 ‘약먹은 사내’들에게로 몸을 내던진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는 반복과 사소한 변주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텍스트가 별다른 서사적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다. 약먹은 사내들의 애정공세에 기꺼이 기투하는 옥희의 운명이 만들어낸 유사-텍스트인 셈이다.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줄게>(푸른숲)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삶으로서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녀의 독서편력으로 이뤄진 텍스트와 그에 관한 그녀의 나직한 독백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때로 시를 온몸으로 살아가듯이, 누군가는 삶으로서 자신이 보여줄 ‘텍스트’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텍스트’로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런던에 관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런던행을 빙자한 그녀의 독서일기이자 책에서 책으로 이어진 그녀의 몽상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공간으로서의 영국 런던이 아니라 그녀의 독서목록과 그 책들의 귀한 구절들과 거기서 그녀가 느꼈던 사념들을 따라가며 책장을 넘겼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질투와 시샘이었다. (이 나이에, 이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그녀가 보여주는 편력의 내력과 넓이가 질투가 났고, 잘 쓰여진 문장과 그 문장들이 실어 나르는 축축한 감성들에 시샘이 났다. 요컨대, 그녀는 ‘가짜’가 아니다.

유종호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게 유종호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미국 신비평가 클린스 브룩스의 말인지, 다른 누군가의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부실한 기억, 그리고 그걸 굳이 찾지 않는 불성실이 문제다. 아마 저자 정혜윤이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으리라.) 나는 정혜윤의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을 약간 비틀어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것은 순전히 추후의 ‘인용’을 염두에 둔 극히 실용주의적인 독서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는 텍스트와 내밀하게 교유하며 그 텍스트를 기억의 갈피에 꼭꼭 접어 두고 적절히 그것을 끄집어낸다.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인위적 독서가’들은 대영박물관을 두고 존 키츠와 쉼보르스카, 마르크스, 헤로도투스, 길가메쉬 서사시를 나란히 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미여인의 키스>와 <황금가지>, <마담 보바리>, <인간등정의 발자취>와 릴케, D.H. 로렌스를 동시에 떠올리지 못한다.

책을 읽어주는 일을 직업으로 한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책 제목은 밝히지 말자. 다만 레몽 장의 <책읽어주는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일은 ‘사장’이 책에 쓰인 교양을 필요로 할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 그에 관한 적절한 책을 생각해 내고 그 책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하며, 책을 읽는 행위가 ‘돈벌이’의 수단도 되지 않을까 라는 가상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정혜윤은 그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無償)의 독서가다. 기실 독서가 주는 쾌락 외에 다른 것을 전제로 한 책읽기는 가짜들의 독서다. 이 기준에 비춰 나는 대부분의 경우 실용적 필요에 이끌려 책을 읽었으니 분명 ‘가짜’의 반열에 들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책읽기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직업이니(내가 아는 대개의 피디들은 책이 아니라 술에 탐닉하더라.) 그녀가 보여주는 무상의 책읽기는 온전히 ‘순정한 의미에서의 독서’다. 우리나라에 이런 순정한 독서가, 참으로 흔치 않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였던가, 한겨레21 쯤 되는 잡지에서였던가. 저자의 책읽기를 보여주는 몇편의 글을 읽었던 듯한데, 온전히 이 여자의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영국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건네준 사람 또한 무상의 쾌락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눈밝은 자들은 자기류의 사람에게 눈을 반짝이게 마련인 모양이다. 저자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을 문학전집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거나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첫째 권부터 차곡차곡 읽어 내려간 적이 있나 보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편력으로 그리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야 스탕달을 읽고 몇권 건너 뛰어 세익스피어를 읽다 말고, 에드가 알란 포우에 빠졌다가 모비딕을 반쯤 읽다가 세르반테스에 낄낄대다 제 풀에 지쳐 무협지로 건너갔으니 이건 질투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일 것인가. 그런데, 반가운 것은 세상에는 비록 소수나마 이런 전업독서가(?)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누추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진 누구에게나 그런 욕망은 직접적으로, 혹은 변형된 채로 존재한다. 물론 전업은 생계를 위한 시간 외의 시간을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책의 경중을 잴 줄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이문열의 소설과 <해리포터>와 동일한 반열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침대에 누워 읽다가 소설에 감명해 다시 정장을 하고 책상에 정좌한 채 책을 읽었다는 러시아 비평가의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본>을 소설책 읽듯 읽어치우는 자들은 마르크스가 애용한 대영박물관에서 아동노동에 관한 노동감독관의 보고서를 읽거나 연상해내지 못한다. 정혜윤이 가진 독서가로서의 장점은 이런 ‘기우뚱한 균형감각’이다. 그녀의 책읽기에 일단의 신뢰를 보내는 이유다. 바흐의 파르티타의 존재를 가르쳐준 시인 김갑수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고 청승을 떨었다. 나는 도대체 왜 책을 읽는가. 정혜윤의 책읽기를 훔쳐보면서도 그랬다. 왜 책을 읽는가. 그것 역시 이 지상의 삶이 괴로워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일상과는 다른 회로, 다른 자전축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낸 것, 기꺼이 그 속으로 망명하고자 했던, 잠깐의 허깨비일지라도, 우리는 결국 '바다로 향해 날아간 나비'처럼 그렇게 책에 머리를 콕 박고 망명을 꿈꾸는 것이 아닐 것인가.   

 

 

By homely gift and hindered Words
The human heart is told
Of Nothing —
"Nothing" is the force
That renovates the World — 
 - Emily Dik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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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1-0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37년, 방바닥 이불 신세로 살아왔는데
정혜윤 이 양반 '침대와 책'보면서
침대 생활이 부러워진 적 있소.
사실 침대는 섹스의 보조 도구인 줄로만 알았다오.
요즘 정혜윤을 김경과 겹쳐읽고 있는데
둘 덕분에 그나마 우울을 달래고 있는 중.

모든사이 2010-11-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김경이 패션지 기자였던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좀 '가짜'에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저널적 잡식을 버무려 비틀린 글쓰기를 해댄다고 해서 내공이 깊은 것은 아닐 테니 말야.

이진성 2010-11-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짜면 또 어떻수? 대통령도 해먹는 세상인데...

트레바리 2011-07-1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최근에 이분이 <제인 에어>에 대해 쓴 짤막한 글을 어디서 봤는데, 개성은 강해 보여도 썩 명쾌하고 조리있단 인상은 받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말씀하신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은 좀 떨어지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뭔가 직업상의 餘技라는 느낌도 짙었는데, 그렇기에 점수를 더 받는지도 모르지요. 호평하셨는데 속단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자리에 놓인 말'은 아마도, 조나단 스위프트의 "Proper words in proper places make the true definition of a style"이라는 명제에서 온 것 같습니다. 아울러, 마지막에 덧붙이신 에밀리 딕킨슨 시의 明譯을 한번 부탁드리고 싶군요..^^

모든사이 2011-07-16 17:02   좋아요 0 | URL
스위프트라니, 인용의 전거를 찾아내시는 내공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제인에어>에 관한 글은 한겨레인가에 실린 에세이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정혜윤의 책읽기를 대체로 신뢰하는 편이라서요.. ^^ 그리고, 피디라는 직업과 전업독서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문학전공자로, 문학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직업상의 '여기'일 수밖에 없겠지요. 저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고요. 가끔 그 '여기'만으로 먹고 살수는 없나 하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ㅎㅎ 디킨슨의 시는 강은교 선생이 번역한 민음사판 세계시인선에 실린 시입니다. 강은교의 번역은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인간의 가슴은 듣고 있지/허무에 대해 - /세계를 새롭헤 하는/힘인 허무-" -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라고 되어 있군요.

트레바리 2011-07-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라는 말을 제가 좀 폄하하는 의미로 쓴 것 같은데, 비전문가가 써도 '여기'같지 않은 글을 염두에 둔 뜻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전문 분야인 만큼, 좀 더 신중과 성의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뭐 이런 얘깁니다..^^ 적어도 이 서재의 리뷰들은 '여기'라는 인상은 주지 않거든요. 암튼 한겨레21의 <제인 에어> 소설평 딱 하나만 읽고 딴지 걸 순 없지만, 글이 참신하고 재밌는 건 사실인데, 글 풀어나가는 방식이 좀 따라가기 힘든 데가 있다는 저의 까탈스러운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이런 건데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타인으로부터 오는 격려와 신뢰, 다정한 마음이 한 사람이 무사히 뒤틀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노력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제인 에어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에서, 물론 앞뒤 문맥을 보면 무슨 얘긴지는 알겠는데, 이 자체로 세 문장을 각각 또 서로 이어서 읽어보면 다소 모호하고 비약이 있지 않나 합니다..(이런 부분은 예를 더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전문가 중심의 잣대로 판단하는건 아니지만, '여기'라도 '여기' 같지 않은 철저함이 더 귀감이 되잖을까 싶네요..^^ 디킨슨 시는 조금 전에 저도 민음사판에서 우연찮게 확인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적어두신게 오히려 낫군요..^^ 조나선 스위프트는 예이츠, 조이스,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씽 등과 함께 아일랜드 작가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혜윤씨 글은 앞으로 더 읽어보겠습니다. 기독방송 피디로서 독서의 달인이라면 과히 드물고 그러니 소홀히 볼 분은 분명 아니겠지요.. 답글, 감사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07-16 20:48   좋아요 0 | URL
아일랜드 작가 중에 사무엘 베케트가 빠지면 섭섭하겠지요.. 더블린에서 파는 티셔츠를 보니 베케트와 예이츠, 조이스 세명을 앞자락에 넣은 게 있더군요. 정혜윤은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널리 확산시킨 공로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봅니다..^^
 

<맥베드>(신정옥 옮김, 전예원)를 읽다. 세익스피어 작품 치고는 출퇴근 시간에 하루면 뚝딱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희곡. 세익스피어의 한문장을 찾기 위해 펼쳐든 것이지만, 그 문장은 맥베드에 없었다. 대신 권력에 취해 운명을 기꺼이 수락하는 사내의 장중한 독백들이 눈에 띄었다 : “어제라는 날들은 모두 우매한 인간에게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 준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5막)

세익스피어를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찰스 램이 쓴 <세익스피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동용으로 윤색돼 희곡 아닌 소설로 뒤바뀐 것. 성경 역시 찰스 램이 풀어 쓴 것으로 읽었을 것이다. 초등학생때의 일이니 <햄릿>의 작가를 찰스 램으로 오랫동안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대로 읽은 것은 빨간색 천으로 싸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오화섭 선생 번역의 세익스피어였을 것. 깨알같은 글씨의 위 아래 두단 세로조판의 이 전집은 스탕달도 플로베르도 가르쳐준 고마운 전집이다. 세익스피어 작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은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바람둥이 페트루키오의 장광설이 재밌어 몇 번이나 읽었을 것이다.

국내에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그의 연극을 제대로 소개한 것은 오화섭 선생이 아니었을까. 이대 교수이자 남로당 비밀 조직책이었던 아내를 우파의 총에 의해 잃은 뒤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세익스피어 번역이었던 것. 전후 극우반동의 시대에 자신의 정치적 이력과 성향을 숨긴 채, 고전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그의 아들인 오세철 교수가 경영학 교수에서 점차 완강한 좌파로 변신해가는 과정은 어찌할 수 없는 핏줄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오세철이 <다시혁명을 말한다>(빛나는전망, 2009)에서 고백하는 이 집안의 내력을 나는 아프게 읽었다.

<맥베드>는 마녀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한다. 맥베드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의 아들은 왕위를 잇지 못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 운명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본성의 인격화인 것처럼, 맥베드의 마녀는 그의 본성에 내재한 권력 욕망의 현현(epiphany)이었을 것. 비극은 우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맥베드는 운명과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이 운명을 수락하고 스스로 패배한다. 그리스 비극과 이 작품이 갈라지는 지점. 운명이란 불가해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내재한 ‘기질’의 다른 표현일 것. 백석이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 중얼댄 것은 그의 착하고 여린 심성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다.

맥베드는 고뇌의 표정을 보여주지만 그의 아내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 “자, 어서 오너라. 눈을 가리는 밤의 어둠이여. 연민의 정이 고인 낮의 부드러운 눈을 가려다오. 그리하여 너의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나에게 겁주고 있는 저자의 목숨의 증서를 갈기갈기 찢어다오. 어둠발이 내리는 구나, 까마귀는 서둘러 숲속 보금자리로 가고 있다. 낮의 세계의 선량한 것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졸기 시작하고, 밤의 사악한 앞잡이들은 먹이를 찾아 눈을 붉힌다.” (3막, 맥베드의 독백) 그러나, 확실히 여자는 욕망 앞에 더 강하다 : “무서운 음모에 끼어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날 채워다오. 나의 피를 응결시켜 연민의 정으로 통하는 길목을 끊어, 그래서 동정이라는 자연의 정이 동하여 나의 흉악한 계획을 좀먹지 않게 해다오. ... 어두운 밤아, 깃을 펼쳐 지옥의 시커먼 연기로 널 뒤덮어라. 나의 날카로운 단도가 찌르는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늘이 암흑의 장막을 헤치고 얼굴을 내밀면서 ‘안된다, 안된다’하고 외치지 않도록(맥베드의 아내, 1막)” 
 

신정옥의 번역은 운문 번역이 아니다. 최종철의 번역이 세익스피어 문장의 리듬을 살린 운문번역이라는데, 그냥 읽기에는 신정옥의 번역이 더 낫다. 게다가 싸고 얇다. 그런데, 전예원의 이 세익스피어 시리즈가 절판인지 검색이 되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나머지도 헌책방에서나 찾아야할 모양이다.  

  

* P.S. 마녀의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들(4막), 요컨대 절대적인 악을 구성하는 혐오와 금기, 더러움의 목록들인 셈. 메리 더글러스의 ‘오염과 순수’의 분류체계를 원용해 세익스피어 시대 영국의 문화적 금기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 흥미로운 것은 독사의 살점와 늑대이빨과 나란히 유태인과 터키인, 타르타르인(중앙아시아)이 들어가 있다는 것. 이를 두고 세익스피어를 반유대주의자이자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오버일까?  


“늪에서 자란 독사의 살점아, 끓어라 익어라 가마솥 속에서. 도롱뇽의 눈알과 개구리 발가락, 박쥐의 깃털과 개 혓바닥, 독사의 갈라진 혀와 맹사의 독침, 도마뱀의 다리와 올빼미의 날개, 이 주문으로 무서운 재앙을 일으켜 지옥의 국물처럼 펄펄 끓어라. (...) 용의 비늘과 늑대의 이빨, 마녀의 미이라 탐욕스런 상어의 위와 창자, 신을 모독하는 유태인의 간장, 산양의 쓸개와 월식의 밤에 꺾은 주목의 가지들, 터키인의 코, 타르타르인의 입술, 창녀가 낳아서 목을 졸라 죽여 시궁창에 버린 갓난애의 손가락, 죄다 집어넣어 진국으로 끓여라. 호랑이 내장을 더 넣어서 가마솥 국을 끓여라”(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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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2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화섭 선생 그러면 따님인 오혜령 씨가 먼저 생각납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그이의 암 투병 에세이 '일어나 비추어라'를 본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유명한 집안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중 대학 들어가고 나서 오화섭 박노경 오세철 오혜령...이런 이름을
다시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충정로 문화일보 앞을 지날 때마다 옛 동양극장 사진이 떠오르는데
오화섭 선생의 집은 아마 그 동양극장 자리 길 건너편에 있었을 겁니다.
북아현동 어디 였다는 기록 본 적 있는데 가물가물...

모든사이 2010-05-2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네 쓸모없는지식에 대한 탐닉도 어지간하다. 이 잡식성 호사가야. 집 자리가 뭘 그리 중요하냐. ㅎㅎ

이진성 2010-05-25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함다.

'서울의 오래된 극장은 서대문 네거리 못 미처의 동양극장이다(...)
바로 건너편에 돌로 지은 우람한 집 2층에 '여인소극장'이 있었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박노경의 자연장(紫煙莊)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효선(아동문학가)의 '헐려버린 극장' 중에서

모든사이 2010-05-2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네가 이 서재에 거의 유일하게 댓글을 주르르 다는 열혈독자이니 딴 건 둘째치고 그거 때문에라도 눈물나게 고맙다. 대체 어효선이라니, 언제적 이름이더냐. 초딩때 보고 수십년만에 듣는 이름이로구나. ㅋㅋ
 

이번주에 읽은 두권의 책. 김기협 선생의 <페리스코프>(서해문집)와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개). 두권 모두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프게 읽었다. 김기협-유시민-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고리’가 애석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김기협과 유시민의 기이한 인연도 그러하거니와 김기협의 책이 거의 노무현에 대한 나름의 추념을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세속의 시각으로 경기고-서울대의 주류 엘리트의 길을 걷다 스스로 마이너리티가 된 김기협은 자연스럽게 노무현과 조우한다. 이게 역사적 필연인지, 혹은 정치적 사회적 마이너리티였던 노무현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정치공학으로 안되는 어떤 진정성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은 눈 밝은 자들의 눈에는 아주 명확한 눈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공학을 거부했고(아니, 생래적으로 그에 맞지 않았고) 김기협의 눈은 그걸 꿰뚫어 보고 기꺼이 ‘노빠’를 자임했다.  

사유의 깊이가 어떤 지극한 경지에 달할 때 언어는 지시대상을 넘어 보이되 보이지 않는 진리에 육박한다. 나는 노무현의 ‘유서’가 그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偈頌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어느 해 인가, 조계사 앞 불가 서점들을 돌아다니다가 샀던 ‘선시’ 앤솔로지에서 얼핏 읽었던 김달진 선생이 모은 禪詩集 의 풍경은 그러했다. 그가 죽었던 지난해 어느 시사지에서 그의 비문을 응모했을 때, 나는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도 후보로 인정받지 못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전직 대통령이 되어서도 전직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내용의 비문을 보낸 적이 있다. 간결 완미해야할 비문으로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그 잡지에 오롯이 실려 내심 반갑기도 했다. 이 완강한 기득권 동맹의 철저한 배제의 논리 앞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적이다. 그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불편했다. 출근버스 안에서 가끔씩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느라 힘겨웠다. 그만큼 그의 삶이 내게 ‘객관화’되지 않은 탓이다.

유시민은 노무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성찰적 지식인’이었다고 부르고 싶다. 성찰의 과잉은 때로 과도한 부끄러움과 명분론을 낳기도 한다. 위선과 위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성찰’하며 사는 것은 스스로의 쪽팔림을 인식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는 생전의 그를 다섯 번 만났다. 민주당 경선후보 시절 금강빌딩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실에서, 그리고 정몽준과의 단일화 직전에, 그리고 그 후에 두 번.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점점 역사의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다. 마흔이 넘은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눈빛은 더 형형해졌고, 자신감과 에너지는 점점 더 흘러 넘쳤다. 저렇게 한 개인은 역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정몽준의 사진을 두 번에 걸쳐 두시간 동안 찍었던 한 선배는 “아무리 눈에 초점을 맞춰도 도대체 눈빛이 맑게 찍히질 않아”하고 투덜거렸다. 그는 작가의 반열에 드는 뛰어난 사진작가였다. 눈에서 광채가 나지 않는 정치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노무현-정몽준의 후보단일화는 노무현이 이길 것이라 직감했다. 결단을 앞둔 사람의 눈이 그렇게 정직하다는 것을 나는 사진기자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기협과 노무현의 책이 아프고 쓰린 것은 그런 눈을 가진 정치인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공과와는 별개로 그나마 당대와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을 잃어버렸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이성적 토론과 합리적 접근, 요컨대 그는 토론이 가능한 대통령이었다. 천안함 사태를 맞은 청와대에서 전직이랍시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전두환과 김영삼 둘 뿐이라는 것은 정말 희극적이다. 노무현의 책이 아주아주 많이 팔려 조중동에 가려워졌던 그의 진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노무현과 그의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된 회고와 평가를 할 수 있기를.  

노무현의 신화를 넘어서는 작업은 조만간 어디에서든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고한 보수기득권 동맹에 에워싸였던, 그래서 개혁의 폭이 대단히 제한되었던 어떤 정치세력의 운명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불가피한 '제한성'을 애써 외면하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서 정치적 리얼리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노무현 시대의 좌절>(창비)과 같은 전시대에 대한 평가서가 가진 한계도 그것이다. 지난해 출간된 이 책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하나의 규범적 비판논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이성과 지향이 한국사회라는 현실을 경유하여 만들어내는 복합성과 중층성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레디앙같은 진보인터넷 신문이나 과거 진보누리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이들의 인식과 논리가 참으로 앙상하고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알아도 헤게모니적 실천과는 영 동떨어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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