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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보다. 조선일보 뒤편에 있는 조그만 극장 스폰지하우스는 퇴근 이후 홀로 영화를 보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다. 홍상수의 영화라서 그런지(?) 좌석은 반쯤도 차지 않았다.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위악에 키들거리면서, 그 위선과 위악이 내 안에도 겹겹이 쌓여 있음을 확인하면서 봤다. 80분 동안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나서 든 생각은 ‘삶으로서의 텍스트’라는 말이었다. 3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그녀의 삶으로 이뤄진 두 개의 텍스트를 병치시켜 보여준다. 그녀가 만나고 연애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와의 짧은 아차산행 산책.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은 그녀의 삶에서 동일한 것의 반복이면서 변주이기도 하다. 반복인 까닭은 연애하는 남자와 동일한 코스의 산책을 했다는 것이고, 변주인 것은 그때그때의 대사와 행위, 그녀가 느낀 순간의 감정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두 개의 텍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지만 다른 두 주인공들인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는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 조우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남녀가 벌이는 사소하고도 진지한 해프닝과 돌연 격렬해지는 주인공들의 감정적 굴곡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라고 발랄하게 내뱉는 옥희. 이 영화는 ‘약’에 취한 사내들이 젊은 영화학도 옥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연애담이다. 옥희는 그런 두 남자와의 연애를 ‘영화’로 텍스트화하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반복이고 무엇이 변주인가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약에 취한 사내들이 편재해 있는 세상에서 그녀는 기꺼이 ‘약먹은 사내’들에게로 몸을 내던진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는 반복과 사소한 변주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텍스트가 별다른 서사적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다. 약먹은 사내들의 애정공세에 기꺼이 기투하는 옥희의 운명이 만들어낸 유사-텍스트인 셈이다.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줄게>(푸른숲)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삶으로서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녀의 독서편력으로 이뤄진 텍스트와 그에 관한 그녀의 나직한 독백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때로 시를 온몸으로 살아가듯이, 누군가는 삶으로서 자신이 보여줄 ‘텍스트’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텍스트’로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런던에 관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런던행을 빙자한 그녀의 독서일기이자 책에서 책으로 이어진 그녀의 몽상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공간으로서의 영국 런던이 아니라 그녀의 독서목록과 그 책들의 귀한 구절들과 거기서 그녀가 느꼈던 사념들을 따라가며 책장을 넘겼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질투와 시샘이었다. (이 나이에, 이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그녀가 보여주는 편력의 내력과 넓이가 질투가 났고, 잘 쓰여진 문장과 그 문장들이 실어 나르는 축축한 감성들에 시샘이 났다. 요컨대, 그녀는 ‘가짜’가 아니다.

유종호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게 유종호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미국 신비평가 클린스 브룩스의 말인지, 다른 누군가의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부실한 기억, 그리고 그걸 굳이 찾지 않는 불성실이 문제다. 아마 저자 정혜윤이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으리라.) 나는 정혜윤의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을 약간 비틀어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것은 순전히 추후의 ‘인용’을 염두에 둔 극히 실용주의적인 독서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는 텍스트와 내밀하게 교유하며 그 텍스트를 기억의 갈피에 꼭꼭 접어 두고 적절히 그것을 끄집어낸다.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인위적 독서가’들은 대영박물관을 두고 존 키츠와 쉼보르스카, 마르크스, 헤로도투스, 길가메쉬 서사시를 나란히 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미여인의 키스>와 <황금가지>, <마담 보바리>, <인간등정의 발자취>와 릴케, D.H. 로렌스를 동시에 떠올리지 못한다.

책을 읽어주는 일을 직업으로 한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책 제목은 밝히지 말자. 다만 레몽 장의 <책읽어주는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일은 ‘사장’이 책에 쓰인 교양을 필요로 할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 그에 관한 적절한 책을 생각해 내고 그 책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하며, 책을 읽는 행위가 ‘돈벌이’의 수단도 되지 않을까 라는 가상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정혜윤은 그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無償)의 독서가다. 기실 독서가 주는 쾌락 외에 다른 것을 전제로 한 책읽기는 가짜들의 독서다. 이 기준에 비춰 나는 대부분의 경우 실용적 필요에 이끌려 책을 읽었으니 분명 ‘가짜’의 반열에 들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책읽기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직업이니(내가 아는 대개의 피디들은 책이 아니라 술에 탐닉하더라.) 그녀가 보여주는 무상의 책읽기는 온전히 ‘순정한 의미에서의 독서’다. 우리나라에 이런 순정한 독서가, 참으로 흔치 않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였던가, 한겨레21 쯤 되는 잡지에서였던가. 저자의 책읽기를 보여주는 몇편의 글을 읽었던 듯한데, 온전히 이 여자의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영국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건네준 사람 또한 무상의 쾌락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눈밝은 자들은 자기류의 사람에게 눈을 반짝이게 마련인 모양이다. 저자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을 문학전집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거나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첫째 권부터 차곡차곡 읽어 내려간 적이 있나 보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편력으로 그리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야 스탕달을 읽고 몇권 건너 뛰어 세익스피어를 읽다 말고, 에드가 알란 포우에 빠졌다가 모비딕을 반쯤 읽다가 세르반테스에 낄낄대다 제 풀에 지쳐 무협지로 건너갔으니 이건 질투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일 것인가. 그런데, 반가운 것은 세상에는 비록 소수나마 이런 전업독서가(?)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누추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진 누구에게나 그런 욕망은 직접적으로, 혹은 변형된 채로 존재한다. 물론 전업은 생계를 위한 시간 외의 시간을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책의 경중을 잴 줄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이문열의 소설과 <해리포터>와 동일한 반열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침대에 누워 읽다가 소설에 감명해 다시 정장을 하고 책상에 정좌한 채 책을 읽었다는 러시아 비평가의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본>을 소설책 읽듯 읽어치우는 자들은 마르크스가 애용한 대영박물관에서 아동노동에 관한 노동감독관의 보고서를 읽거나 연상해내지 못한다. 정혜윤이 가진 독서가로서의 장점은 이런 ‘기우뚱한 균형감각’이다. 그녀의 책읽기에 일단의 신뢰를 보내는 이유다. 바흐의 파르티타의 존재를 가르쳐준 시인 김갑수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고 청승을 떨었다. 나는 도대체 왜 책을 읽는가. 정혜윤의 책읽기를 훔쳐보면서도 그랬다. 왜 책을 읽는가. 그것 역시 이 지상의 삶이 괴로워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일상과는 다른 회로, 다른 자전축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낸 것, 기꺼이 그 속으로 망명하고자 했던, 잠깐의 허깨비일지라도, 우리는 결국 '바다로 향해 날아간 나비'처럼 그렇게 책에 머리를 콕 박고 망명을 꿈꾸는 것이 아닐 것인가.   

 

 

By homely gift and hindered Words
The human heart is told
Of Nothing —
"Nothing" is the force
That renovates the World — 
 - Emily Dik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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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1-0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37년, 방바닥 이불 신세로 살아왔는데
정혜윤 이 양반 '침대와 책'보면서
침대 생활이 부러워진 적 있소.
사실 침대는 섹스의 보조 도구인 줄로만 알았다오.
요즘 정혜윤을 김경과 겹쳐읽고 있는데
둘 덕분에 그나마 우울을 달래고 있는 중.

모든사이 2010-11-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김경이 패션지 기자였던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좀 '가짜'에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저널적 잡식을 버무려 비틀린 글쓰기를 해댄다고 해서 내공이 깊은 것은 아닐 테니 말야.

이진성 2010-11-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짜면 또 어떻수? 대통령도 해먹는 세상인데...

트레바리 2011-07-1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최근에 이분이 <제인 에어>에 대해 쓴 짤막한 글을 어디서 봤는데, 개성은 강해 보여도 썩 명쾌하고 조리있단 인상은 받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말씀하신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은 좀 떨어지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뭔가 직업상의 餘技라는 느낌도 짙었는데, 그렇기에 점수를 더 받는지도 모르지요. 호평하셨는데 속단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자리에 놓인 말'은 아마도, 조나단 스위프트의 "Proper words in proper places make the true definition of a style"이라는 명제에서 온 것 같습니다. 아울러, 마지막에 덧붙이신 에밀리 딕킨슨 시의 明譯을 한번 부탁드리고 싶군요..^^

모든사이 2011-07-16 17:02   좋아요 0 | URL
스위프트라니, 인용의 전거를 찾아내시는 내공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제인에어>에 관한 글은 한겨레인가에 실린 에세이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정혜윤의 책읽기를 대체로 신뢰하는 편이라서요.. ^^ 그리고, 피디라는 직업과 전업독서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문학전공자로, 문학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직업상의 '여기'일 수밖에 없겠지요. 저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고요. 가끔 그 '여기'만으로 먹고 살수는 없나 하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ㅎㅎ 디킨슨의 시는 강은교 선생이 번역한 민음사판 세계시인선에 실린 시입니다. 강은교의 번역은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인간의 가슴은 듣고 있지/허무에 대해 - /세계를 새롭헤 하는/힘인 허무-" -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라고 되어 있군요.

트레바리 2011-07-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라는 말을 제가 좀 폄하하는 의미로 쓴 것 같은데, 비전문가가 써도 '여기'같지 않은 글을 염두에 둔 뜻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전문 분야인 만큼, 좀 더 신중과 성의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뭐 이런 얘깁니다..^^ 적어도 이 서재의 리뷰들은 '여기'라는 인상은 주지 않거든요. 암튼 한겨레21의 <제인 에어> 소설평 딱 하나만 읽고 딴지 걸 순 없지만, 글이 참신하고 재밌는 건 사실인데, 글 풀어나가는 방식이 좀 따라가기 힘든 데가 있다는 저의 까탈스러운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이런 건데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타인으로부터 오는 격려와 신뢰, 다정한 마음이 한 사람이 무사히 뒤틀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제인 에어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노력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제인 에어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에서, 물론 앞뒤 문맥을 보면 무슨 얘긴지는 알겠는데, 이 자체로 세 문장을 각각 또 서로 이어서 읽어보면 다소 모호하고 비약이 있지 않나 합니다..(이런 부분은 예를 더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전문가 중심의 잣대로 판단하는건 아니지만, '여기'라도 '여기' 같지 않은 철저함이 더 귀감이 되잖을까 싶네요..^^ 디킨슨 시는 조금 전에 저도 민음사판에서 우연찮게 확인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적어두신게 오히려 낫군요..^^ 조나선 스위프트는 예이츠, 조이스,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씽 등과 함께 아일랜드 작가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혜윤씨 글은 앞으로 더 읽어보겠습니다. 기독방송 피디로서 독서의 달인이라면 과히 드물고 그러니 소홀히 볼 분은 분명 아니겠지요.. 답글, 감사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07-16 20:48   좋아요 0 | URL
아일랜드 작가 중에 사무엘 베케트가 빠지면 섭섭하겠지요.. 더블린에서 파는 티셔츠를 보니 베케트와 예이츠, 조이스 세명을 앞자락에 넣은 게 있더군요. 정혜윤은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널리 확산시킨 공로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봅니다..^^
 

<맥베드>(신정옥 옮김, 전예원)를 읽다. 세익스피어 작품 치고는 출퇴근 시간에 하루면 뚝딱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희곡. 세익스피어의 한문장을 찾기 위해 펼쳐든 것이지만, 그 문장은 맥베드에 없었다. 대신 권력에 취해 운명을 기꺼이 수락하는 사내의 장중한 독백들이 눈에 띄었다 : “어제라는 날들은 모두 우매한 인간에게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횃불처럼 밝혀 준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위에서 흥이 나서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이다. ...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5막)

세익스피어를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찰스 램이 쓴 <세익스피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동용으로 윤색돼 희곡 아닌 소설로 뒤바뀐 것. 성경 역시 찰스 램이 풀어 쓴 것으로 읽었을 것이다. 초등학생때의 일이니 <햄릿>의 작가를 찰스 램으로 오랫동안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대로 읽은 것은 빨간색 천으로 싸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오화섭 선생 번역의 세익스피어였을 것. 깨알같은 글씨의 위 아래 두단 세로조판의 이 전집은 스탕달도 플로베르도 가르쳐준 고마운 전집이다. 세익스피어 작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은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바람둥이 페트루키오의 장광설이 재밌어 몇 번이나 읽었을 것이다.

국내에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그의 연극을 제대로 소개한 것은 오화섭 선생이 아니었을까. 이대 교수이자 남로당 비밀 조직책이었던 아내를 우파의 총에 의해 잃은 뒤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세익스피어 번역이었던 것. 전후 극우반동의 시대에 자신의 정치적 이력과 성향을 숨긴 채, 고전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그의 아들인 오세철 교수가 경영학 교수에서 점차 완강한 좌파로 변신해가는 과정은 어찌할 수 없는 핏줄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오세철이 <다시혁명을 말한다>(빛나는전망, 2009)에서 고백하는 이 집안의 내력을 나는 아프게 읽었다.

<맥베드>는 마녀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한다. 맥베드가 왕위에 오르지만 그의 아들은 왕위를 잇지 못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 운명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본성의 인격화인 것처럼, 맥베드의 마녀는 그의 본성에 내재한 권력 욕망의 현현(epiphany)이었을 것. 비극은 우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맥베드는 운명과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이 운명을 수락하고 스스로 패배한다. 그리스 비극과 이 작품이 갈라지는 지점. 운명이란 불가해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내재한 ‘기질’의 다른 표현일 것. 백석이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 중얼댄 것은 그의 착하고 여린 심성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다.

맥베드는 고뇌의 표정을 보여주지만 그의 아내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 “자, 어서 오너라. 눈을 가리는 밤의 어둠이여. 연민의 정이 고인 낮의 부드러운 눈을 가려다오. 그리하여 너의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나에게 겁주고 있는 저자의 목숨의 증서를 갈기갈기 찢어다오. 어둠발이 내리는 구나, 까마귀는 서둘러 숲속 보금자리로 가고 있다. 낮의 세계의 선량한 것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졸기 시작하고, 밤의 사악한 앞잡이들은 먹이를 찾아 눈을 붉힌다.” (3막, 맥베드의 독백) 그러나, 확실히 여자는 욕망 앞에 더 강하다 : “무서운 음모에 끼어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날 채워다오. 나의 피를 응결시켜 연민의 정으로 통하는 길목을 끊어, 그래서 동정이라는 자연의 정이 동하여 나의 흉악한 계획을 좀먹지 않게 해다오. ... 어두운 밤아, 깃을 펼쳐 지옥의 시커먼 연기로 널 뒤덮어라. 나의 날카로운 단도가 찌르는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늘이 암흑의 장막을 헤치고 얼굴을 내밀면서 ‘안된다, 안된다’하고 외치지 않도록(맥베드의 아내, 1막)” 
 

신정옥의 번역은 운문 번역이 아니다. 최종철의 번역이 세익스피어 문장의 리듬을 살린 운문번역이라는데, 그냥 읽기에는 신정옥의 번역이 더 낫다. 게다가 싸고 얇다. 그런데, 전예원의 이 세익스피어 시리즈가 절판인지 검색이 되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나머지도 헌책방에서나 찾아야할 모양이다.  

  

* P.S. 마녀의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들(4막), 요컨대 절대적인 악을 구성하는 혐오와 금기, 더러움의 목록들인 셈. 메리 더글러스의 ‘오염과 순수’의 분류체계를 원용해 세익스피어 시대 영국의 문화적 금기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 흥미로운 것은 독사의 살점와 늑대이빨과 나란히 유태인과 터키인, 타르타르인(중앙아시아)이 들어가 있다는 것. 이를 두고 세익스피어를 반유대주의자이자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오버일까?  


“늪에서 자란 독사의 살점아, 끓어라 익어라 가마솥 속에서. 도롱뇽의 눈알과 개구리 발가락, 박쥐의 깃털과 개 혓바닥, 독사의 갈라진 혀와 맹사의 독침, 도마뱀의 다리와 올빼미의 날개, 이 주문으로 무서운 재앙을 일으켜 지옥의 국물처럼 펄펄 끓어라. (...) 용의 비늘과 늑대의 이빨, 마녀의 미이라 탐욕스런 상어의 위와 창자, 신을 모독하는 유태인의 간장, 산양의 쓸개와 월식의 밤에 꺾은 주목의 가지들, 터키인의 코, 타르타르인의 입술, 창녀가 낳아서 목을 졸라 죽여 시궁창에 버린 갓난애의 손가락, 죄다 집어넣어 진국으로 끓여라. 호랑이 내장을 더 넣어서 가마솥 국을 끓여라”(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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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2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화섭 선생 그러면 따님인 오혜령 씨가 먼저 생각납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그이의 암 투병 에세이 '일어나 비추어라'를 본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유명한 집안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중 대학 들어가고 나서 오화섭 박노경 오세철 오혜령...이런 이름을
다시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충정로 문화일보 앞을 지날 때마다 옛 동양극장 사진이 떠오르는데
오화섭 선생의 집은 아마 그 동양극장 자리 길 건너편에 있었을 겁니다.
북아현동 어디 였다는 기록 본 적 있는데 가물가물...

모든사이 2010-05-2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네 쓸모없는지식에 대한 탐닉도 어지간하다. 이 잡식성 호사가야. 집 자리가 뭘 그리 중요하냐. ㅎㅎ

이진성 2010-05-25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함다.

'서울의 오래된 극장은 서대문 네거리 못 미처의 동양극장이다(...)
바로 건너편에 돌로 지은 우람한 집 2층에 '여인소극장'이 있었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박노경의 자연장(紫煙莊)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효선(아동문학가)의 '헐려버린 극장' 중에서

모든사이 2010-05-2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네가 이 서재에 거의 유일하게 댓글을 주르르 다는 열혈독자이니 딴 건 둘째치고 그거 때문에라도 눈물나게 고맙다. 대체 어효선이라니, 언제적 이름이더냐. 초딩때 보고 수십년만에 듣는 이름이로구나. ㅋㅋ
 

이번주에 읽은 두권의 책. 김기협 선생의 <페리스코프>(서해문집)와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개). 두권 모두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프게 읽었다. 김기협-유시민-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고리’가 애석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김기협과 유시민의 기이한 인연도 그러하거니와 김기협의 책이 거의 노무현에 대한 나름의 추념을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세속의 시각으로 경기고-서울대의 주류 엘리트의 길을 걷다 스스로 마이너리티가 된 김기협은 자연스럽게 노무현과 조우한다. 이게 역사적 필연인지, 혹은 정치적 사회적 마이너리티였던 노무현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정치공학으로 안되는 어떤 진정성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은 눈 밝은 자들의 눈에는 아주 명확한 눈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공학을 거부했고(아니, 생래적으로 그에 맞지 않았고) 김기협의 눈은 그걸 꿰뚫어 보고 기꺼이 ‘노빠’를 자임했다.  

사유의 깊이가 어떤 지극한 경지에 달할 때 언어는 지시대상을 넘어 보이되 보이지 않는 진리에 육박한다. 나는 노무현의 ‘유서’가 그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偈頌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어느 해 인가, 조계사 앞 불가 서점들을 돌아다니다가 샀던 ‘선시’ 앤솔로지에서 얼핏 읽었던 김달진 선생이 모은 禪詩集 의 풍경은 그러했다. 그가 죽었던 지난해 어느 시사지에서 그의 비문을 응모했을 때, 나는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도 후보로 인정받지 못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전직 대통령이 되어서도 전직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내용의 비문을 보낸 적이 있다. 간결 완미해야할 비문으로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그 잡지에 오롯이 실려 내심 반갑기도 했다. 이 완강한 기득권 동맹의 철저한 배제의 논리 앞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적이다. 그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불편했다. 출근버스 안에서 가끔씩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느라 힘겨웠다. 그만큼 그의 삶이 내게 ‘객관화’되지 않은 탓이다.

유시민은 노무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성찰적 지식인’이었다고 부르고 싶다. 성찰의 과잉은 때로 과도한 부끄러움과 명분론을 낳기도 한다. 위선과 위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성찰’하며 사는 것은 스스로의 쪽팔림을 인식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는 생전의 그를 다섯 번 만났다. 민주당 경선후보 시절 금강빌딩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실에서, 그리고 정몽준과의 단일화 직전에, 그리고 그 후에 두 번.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점점 역사의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다. 마흔이 넘은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2년 대선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눈빛은 더 형형해졌고, 자신감과 에너지는 점점 더 흘러 넘쳤다. 저렇게 한 개인은 역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정몽준의 사진을 두 번에 걸쳐 두시간 동안 찍었던 한 선배는 “아무리 눈에 초점을 맞춰도 도대체 눈빛이 맑게 찍히질 않아”하고 투덜거렸다. 그는 작가의 반열에 드는 뛰어난 사진작가였다. 눈에서 광채가 나지 않는 정치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노무현-정몽준의 후보단일화는 노무현이 이길 것이라 직감했다. 결단을 앞둔 사람의 눈이 그렇게 정직하다는 것을 나는 사진기자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기협과 노무현의 책이 아프고 쓰린 것은 그런 눈을 가진 정치인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공과와는 별개로 그나마 당대와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을 잃어버렸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이성적 토론과 합리적 접근, 요컨대 그는 토론이 가능한 대통령이었다. 천안함 사태를 맞은 청와대에서 전직이랍시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전두환과 김영삼 둘 뿐이라는 것은 정말 희극적이다. 노무현의 책이 아주아주 많이 팔려 조중동에 가려워졌던 그의 진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노무현과 그의 정책에 대해서 제대로된 회고와 평가를 할 수 있기를.  

노무현의 신화를 넘어서는 작업은 조만간 어디에서든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고한 보수기득권 동맹에 에워싸였던, 그래서 개혁의 폭이 대단히 제한되었던 어떤 정치세력의 운명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불가피한 '제한성'을 애써 외면하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서 정치적 리얼리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노무현 시대의 좌절>(창비)과 같은 전시대에 대한 평가서가 가진 한계도 그것이다. 지난해 출간된 이 책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하나의 규범적 비판논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이성과 지향이 한국사회라는 현실을 경유하여 만들어내는 복합성과 중층성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레디앙같은 진보인터넷 신문이나 과거 진보누리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에서 받게 되는 인상은 이들의 인식과 논리가 참으로 앙상하고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알아도 헤게모니적 실천과는 영 동떨어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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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 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 있다. 우리 눈을 못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결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바로 여기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번역) 44쪽 각주에서 인용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 빠진 옷과 비뚤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 속을 새들 무리처럼 빙빙 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각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품위 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곳,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일방통행로> (조형준 번역) 33쪽 ‘알리는 말씀 : 우리 모두 삼림을 보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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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is 2010-05-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일방통행로> (최성만, 김영옥, 윤미애 번역) p80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모든사이 2010-05-03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시의 '서정적인' 번역과 조형준의 '서투른'(?) 번역과 최성만 등의 '건조한' 번역. 그래도 김남시 번역이 어쨌거나(!) 울림은 더 큰 것 같구만요..

alanis 2010-05-0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구나 어떤 물건을 떠올릴 때면, 그 모양보다는 그와 연관된 기억,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삐삐"을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른 느낌이 있다. 보통은 음악을 녹음해 두었던 삐삐 인사말에, 어느 춥고 바람 불던 날 술먹고 귀가하다가 쓸쓸한 마음에 음악 대신 진짜 인사말을 녹음하고선 다시 전화 걸어 들었을 때 전혀 낯설은 내 목소리가 주던 그 어색함, 부끄러움, 당혹감, 약간의 공포...

내 귀로 들어가는 내 목소리는 입안에서의 울림과 더해져 달리 들린다는 과학적인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인식되는 나를 사실은 나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당혹감.... 그 시절 유명한(?) 소설 제목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고 당당히 외칠 수 없는 상황.... 내 자신이 온전히 나를 통제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약간의 편집증, 강박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가뜩이나 평소 대인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는 나로서는 또하나의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인식조차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해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어찌 소화를 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벤야민의 글을 곱씹어 읽어보다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이란 구절에서 불현듯 삐삐의 공포를 떠올렸다.

결국은 그 공포감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였을까? 그 목소리가 말하는 뜻은 같으나 전혀 다른 내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것 또한 내 감정)과 내가 그 말을 할 때의 감정간의 불일치감에서 오는 공포감. 일종의 라캉이 얘기하는 상징계로 넘어가지 못한 감정에 대한 상상계적 혼란이 아닐까?

감정이 실재하며 진실된 순간임을 알지만, 불쑥 떠오르는 감정은 그때 그 전화기속 내 목소리처럼 낯설고, 부끄러우며, 당혹스럽고, 공포스럽긴 여전하다.

모든사이 2010-05-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감각은 실존하는 것이다. 이 봄날, 미치도록 환장한 꽃 내음 속에서 잠시 우리는 감각의 실존에 몸을 가누고 거기 도취하는 것이다. 순간, 무엇이 있어 이 현전하는 감각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취한 채 그저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흔들리거니. 더 흔들리고 흔들려 제 몸이 따라 흔들릴 때 그 때, 우리는 알게 되리라. 바람의 근원은 결국 제 몸뚱아리인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 없는 이 육체성의 현현 앞에 우리는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할지니. 그건 공포라기보다 차라리 넉넉한 긍정이려니. 긍휼스러워 말지어다, 그대여. 언젠가 간직하고 잃어버렸던 맑고 투명한 여의주 앞에, 잠시 엎드려 경배하기를. 라일락 향기가 너무 짙어 그 그늘아래 취했거늘, 관능을 열어 가쁘게 숨쉴 밖에 다른 그 무엇을 탓하겠는가. 주름살이 아름답게 보이는 자, 이제 비로소 지극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으려나.

april 2010-05-0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둘이 사귀나봐...여기 분위기 왜 이래요?ㅎㅎ

모든사이 2010-05-0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에 홀려 한잔 한 탓이겠져. 오마르 카이얌의 옷자락 한올 잡았달까? ㅎㅎ

술은 액체로 된 루비, 술잔은 나의 현현
술잔은 육체이며, 그 안의 술은 영혼
술로 흡족해 하고 있는 그 맑은 술잔은
눈물,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의 피이네
- 오마르 캬이얌, <루바이야트> 중
 

 

3월 셋째주 구입 도서 목록. 요즘 가끔 방문하는 효자동 헌책방 가가린에 산 헌책, 그리고 교보문고와 알라딘에서 산 새 책들. 우선 새 책, 한강이 오랜만에 펴낸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지성사)과 그녀의 에세이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 그녀의 소설은 여전히, 아직도, 고통과 절망과 바닥을 알 수 없는 삶의 얼룩과 비의를 말하고 있을까. 또 예술가를 등장시켜 어둡고 우울한, 어쩌면 칙칙한 세계를 말하고 있을까. 개인의 내면으로, 비극적 가족사로 환원되는 고통의 내력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에세이집은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경험을 쓴 것인데, 눈밝고 부지런한 작가들은 어떻게 이 프로그램만 갔다오면 죄다 에세이 한 권 씩을 쏟아내는지 신기한 노릇이다.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한강의 재능들을 발견하는 재미. 그녀는 시와 소설에 이어 작곡과 연주를 하더니만, 이 책에서는 프로수준의 크로키까지 선보인다. 소설가는 글쓰는 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야 명작이 나온다는데, 이 친구는 왜 이리 재주가 많은지.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민음사)는 이 작자의 본격 작품은 처음이라서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샀다. 브르통의 ‘작품’은 별로 번역이 안된 것 같은데, 대중성이 떨어져서인가, 아님 지나치게 전위적이어서인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문학과 지성사)는  내가 좋아하는 스펙트럼 시리즈로 나왔는데, 루소에 대한 토도로프의 주석쯤 될 것 같다. 이제 껏 문학이론가, 서사학자로만 알고 있던 토도로프였는데, 정치철학도 나름 섭렵했던 모양이다. 유럽의 변방 불가리아 출신들이 이렇게 잘나가는 거 보면, 그들이 평지돌출이어서가 아니라, 나름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적 후광이 그만큼 커서 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토도로프에 이어 또하나의 잘 난 불가리아 출신 작가. 헌책방에서 산 <비잔틴 살인사건>(소담)도 유럽 변방 불가리아 출신 비평가 크리스테바의 작품. 남편 필립 솔레르스도 소설 깨나 썼는데, 마누라인 이 여자의 소설만도 <사무라이들>(솔), <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민음사)에 이어 이 책이 세 번째로 번역된 모양이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인데, 추리/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될 이런 소설을 크리스테바가 썼다니, 의외의 수확이었다. 비코의 <새로운 학문>(동문선)은 헌책방에서 보이길래 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그저 소장용으로 샀다. 대학원 시절, 교수가 계속 비코의 중요성을 떠들어 댔었는데, 그는 과연 책을 읽기나 하고 떠들었을까. <한국의 민화> 역시 소장용으로 샀다. 한때 조갑제가 편집장으로 있던 80년대 잡지의 양대산맥인 ‘마당’에서 나온 책. 요즘 헌책방에 가면 이런 ‘그림책’들에 눈이 간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아무 때나 펼쳐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 민화/민속품 하면 야나기 무네요시일텐데, 민화가 재발견된 것은 그의 유산인지, 아니면 60년대 이래의 민족주의 문화연구의 영향 탓인지.

2월과 3월에 걸쳐 펼쳐 놓고 일부 혹은 절반, 혹은 거의 읽었으나 아직 끝마치지 못한 책들. <창작과 비평>(2010년 봄호),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문학동네),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나무와 숲), <스토리텔링>(크리스티앙 살몽, 현실문화연구), <여론>(월터 리프만, 현대사상사),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오카모토 다카시, 소와당),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안병길, 동녘), <사회계약론>(루소, 박영사). 리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책은 김종대의 책과 오카모토의 책. 김종대의 책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써낸 책중 가장 중요한, 그리고 노무현의 ‘진실’을 가장 잘 증언하고 있는 책일 것이다. 잠들기 전 책을 읽고 있는데, 책장을 넘길때 마다 탄식과 분노, 아쉬움과 허무함을 떨칠 수 없다. 다 끝내지 못하고 다시 내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는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엄청난 부채감을 느낀다.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이거늘, 이 마음의 소리는 왜 이리 강박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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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2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승자 시인도 아이오와 갔다 와서 에세이집 냈죠
세계사에서 '어떤 나무들은' 이라고.
서울서나 아이오와에서나 생활은 똑같았다는 시인의 말에
외국만 나가면 뭐도 보고 뭐도 해야만 하는 부류와
'참 많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죠.
뭐, 사실 외국 나간다는 게 장소 바꿔가며 술 먹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이 책 보다 들게 됐고.

노이에자이트 2010-04-0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터 리프만<여론>은 헌책입니까? 현대사상사 판이 지금도 서점에 나오나요?

모든사이 2010-04-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리프만의 책은 당연히 헌책이지요. 오래전에 구한 책인데, 이제야 읽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현대사상사라는 출판사가 꽤 좋은 책이 많습니다. 사회학자 루이스 코저의 <지성사의 전개>나 신학자 하비 콕스의 <바보제> 같은 책들 말입니다. 현대사상사판 리프만 책을 아시는 것을 보니, 노이에자이트님의 연세도 조금 되시는 모양입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0-04-05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한 10년 전 광주 헌책방에 현대사상사 책이 열권 정도 무더기로 나왔길래 그때 알게 되었어요.제가 보는 책으로만 나이를 짐작하시면 70세가 넘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걸요.헌책방에서 구한 60~70년대 세로줄의 국한문 혼용체 책도 꽤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요.현대사상사 책들은 10년 전까지 기독교 서점에도 있었구요.새 책은 거의 안 삽니다.

모든사이 2010-04-0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본의아니게 실수를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 60년대 대학생 쯤 되는데 말입니다. 너그러이..

노이에자이트 2010-04-0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헌책을 많이 읽으면 그럴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