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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가족을 통한 복지공급 체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가족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유럽형 복지체제인 보편적 복지구조를 도입하면, 복지에 대한 가족의 역할은 점차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 복지제도는 가급적 자발적으로 형성된 가족을 통한 복지제공을 기반으로 하되, 가족을 통한 복지 영역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정부의 복지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전통적으로 축적된 가족이라는 복지체제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만큼 우리 환경에서는 북유럽식 복지제도를 반드시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며칠 전 누군가 책 한권을 건네주었다. 아마 사무실에 주욱 돌린 모양인데, <복지 논쟁 :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제목이다. 저자는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현진권 아주대 교수이고, 펴낸 곳은 ‘자유기업원’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한국의 보수층이 복지에 대한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게 ‘가족’이라니. 노후 보장은 아들 딸이 하고, 병에 걸리면 사돈에 팔촌이 도와주고, 가장이 실직을 하면 마누라가 밖에 가서 돈 벌어야 한다는 얘기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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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는 언제나 술렁거린다. 아직은 한기가 남아 있는 엊그제 밤에도 그랬다. 까르르 웃으며 지나는 10대들 사이를 지나며 아침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며 읽던 한겨레를 떠올렸다. 문화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한 연극에 대한 리뷰 기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71318.html)기사는 홍세화는 “충격적이다. 2시간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연극에 감동 먹은 ‘좌파 교수’ 오세철은 “카메오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단다. 그는 얼마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문제를 다룬 ‘반도체 소녀’에 출연한 바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 명실상부한 전방위 문화게릴라 김상수 선생의 연극 <TAXI TAXI>. 신문에는 작은 키에 매서운 눈빛의 김선생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가겠다’는 약속만 해 놓고 여태 극장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미안했다. 연극표는 이미 한 달여 전에 구매했다.


kimsangsoo.com
공연이 시작되기 20분 전에 대학로 KFC 지하의 극장 아울로 갔다. 김선생은 어둑한 공연장 위쪽 구석에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고집스럽게 다문 입과 형형한 눈빛, 하지만 그는 아주 지쳐 보였다. 객석이 170여개나 되지만 오늘은 20명이 채 안되는 듯 했다. 객석이 썰렁하면 아무리 좋은 연극도 썰렁하게 마련이다. 연극에서 출발해 시나리오, 드라마, 설치미술, 사진, 문화정책으로까지 나아간 그의 예술편력은 참으로 다채롭다. 이제는 그런 ‘편력시대’를 끝낼 법도 한데, 시사 칼럼에 이어 아예 프리랜서 기자로까지 나서는 걸 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10여년 저쪽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예리한 식견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당시에도 야인이었고 지금도 야인이다. 그 야인(野人)이 주류 질서에 대한 편입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장자연 사건’과 삼성반도체의 백혈병 노동자 사건을 다룬 이 연극은 코미디와 벗기기가 지배하는 대학로 연극씬에서 사뭇 이채로운 공연이다. 한국 연극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창작연극’이라는 점도 눈에 띤다. 이런 연극이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라는 게 김선생의 평소 지론인데, 그 시대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려는 관객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다. 연극이 우리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비될 뿐인 ‘타임킬링용’ 쾌락의 소재가 되고 있는 셈이다. 문화정책의 수장에까지 오른 한 대표적 연극인은 자신의 대표작을 ‘햄릿’과 ‘파우스트’라고 했다. 이거 참 우스운 일이다. 영국의 로얄씨어터 배우가 저 변방 ‘코리아’의 대표 배우가 자국의 연극을 대표작이라고 하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한국 연극은 100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저 베끼기와 흉내내기에 그치고 있다.

막이 오르기 이분 전 기자 후배가 또다른 여자 후배를 데리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블로그와 트위터계를 주름잡는 그가 이 연극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화적 감식안에 대한 신뢰도 그러려니와 그의 트위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수만명의 팔로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잠시 정치부 기자로 ‘외도’아닌 외도를 했지만 그의 본령은 역시 문화다. 넘치는 재기로 트위터계를 평정하다가도 가끔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 모양인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는 그의 ‘멘션' 탓이다. 나로서는 그의 멘션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의 비판자들이 가진 지나친 엄숙주의가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여간, 나가서 이 연극 볼만하다고 와장창 트윗을 날려주라, 제발 부탁이다!!

무대는 단출했다. 한 가운데에 본네트가 열린 택시가 덩그마니 놓여 있고, 그 주위로 반타원형으로 철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조명이 켜지고 택시기사가 나와 “웰컴, 이럇사이마세, 환인꽝린, 어서오세요”를 번갈아가며 외친다. 그의 딸은 ‘샴숑전자’(아예 대놓고 모 기업을 거론하는 대신 이런 우스꽝스런 작명을 택한 모양)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택시에는 대책없는 연예인 지망생, 구사대, 선글라스를 낀 사내(선글라스는 5.16 이후의 박정희, 곧 70년대를 상징한다.)등이 번갈아가며 승차한다. 택시와 택시기사를 둘러싼 사연과 더불어, 다른 한편에서는 연예인지망생이 ‘스타’로 등극하기 위해 마담-실장과 만나고 접대하고 절망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김선생이 극을 풀어가는 방식은 정공법이다. 이렇다 할 ‘변화구’도 없이 오로지 ‘직구’로 2시간 10분을 압도해 나간다. 이렇게 힘이 넘치는 연극도 보기 드물 것이다. 객석은 긴장된 채로 숨 죽인채 감정의 파고가 흘러넘치는 무대를 내내 주시한다. 오디션을 통해 모집했다는, 경력이 많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은 감정의 파고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연극에 곧잘 등장하게 마련인 ‘피에로’와 같은 극의 이완을 돕는 캐릭터도 거의 없다. 홍세화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연극은 재벌과 권력이라는 억압의 구조를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그 문법은 80년대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김선생 자신이 80년대 민중극/노동극의 전통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동시에 이른바 민중미학의 유력한 코드 중의 하나였던 ‘전망’(perspective)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전망’이란 많은 경우 문화운동 진영의 독단적 계몽주의가 반영된 것일 뿐이었다. 공허한 단결론이거나 허황한 대결의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사연 하는 평론가들은 곧잘 ‘전망부재’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댔다. 그런데, 김선생의 연극은 한층 더 복합적이었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백혈병으로 결국 딸을 잃은 택시기사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웰컴, 이럇사이마세, 환인꽝린, 어서오세요”를 외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TV에서 성공하려 했던 소녀의 욕망은, 코드가 뽑힌 채 ‘내장’을 다 드러낸 텔레비전 수상기처럼, 산산히 부서져 버린다. (미디어의,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향한 욕망. 그러니, 그건 주체의 욕망이기는 커녕, 타자의 욕망이다.)

막힌 출구, 닫힌 전망. 그러나, 그것이 유발하는 ‘불편함’의 정도는 강렬하다. 전망 찾기에 골몰하는 대신 김선생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고통과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다. 구조의 혁파가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고통이다. 그가 도드라지게 보여주려는 한국사회의 사회적 위기는, 구조적 위기라기보다는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과 그로 인한 고통인 셈이다. 관객들은 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구조’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 연극판을 떠난지 10여년 만에 다시 대학로로 돌아온 김상수 선생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고통의 연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에서 ‘당신은 안녕한가’라는 고통스런 질문. 우리가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회복. (한 시민단체 의하면, 국내 대표적 반도체 기업에서 현재까지 46명이 백혈병으로 죽었다. 유족들은 현재 산재를 인정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백혈병 소녀의 마지막 독백 : 나는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그걸 알기에는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세상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는 겁니까?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께서도 나에게 나를, 나를 믿어주셔야 되잖아요? 나를, 나를 이 고통에서, 여기서, 벗어나게, 떠나게, 도와주세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세상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를 믿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럼 좋습니다. 내게 아픔을 주시겠다면, 더 가까이, 더 심하게 주세요. 언제든지 상대하겠습니다. 고통이 나를 꺾든지, 내가 고통을 꺾든지, 와! 이리 와! 모두 와!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모두 아무말 없이 서둘러 극장을 떠났다. 더 이상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학로의 한 술집에 모인 기자와 연출자, 여대생, 그리고 한 관객은 시시콜콜한 연극 뒷담화를 했다. 나는 이 연극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연극준비를 위해 저당 잡힌 집이 그대로 온전하기를 바랬다. 술 몇 잔 들이키고 집에 가면서 트위터를 열어 보니 기자 후배가 이런 트윗을 날렸다. “연극 'TAXI TAXI' 봤어요. 일단 무엇보다 여배우들이 예쁘구요. 삼숑 열라 씹구요. 조선일보 열라 까구요. MB 열라 비웃어요. 근데 진지하게 씹고 까고 비웃어요.” 역시, 이 친구는 예쁜 여배우가 먼저 눈에 보이는구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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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창작과 비평> 봄 호를 읽다. 시 코너에 맨 처음 나오는 김선우의 시를 보다. 도정일은 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의미를 궁구하고, 진지하게 사색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시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캐내기에는 너무나 적은 정보를 담고 있다. 독자는 그 짧은 정보를 실마리 삼아 시의 의미를 풀어내야 한다. 정보의 조각들을 이리 꿰고 저리 기워 하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것은 독서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 요즘의 나같은 사람에게는 딱 어울리는 일이다. 길을 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그 정보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꿰매는 ‘사유의 노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텅 비어가는 정신을 메꾸기 위해 김선우 시를 따라가면서 해보는 사유의 도상연습.  

"비가 내린다 오늘은(죽은 門이 피를 흘리듯)/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핏대를 세운 발뒤꿈치를 들며 비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총기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목 없는 마케팅에 입혀진 화려한 씰크 드레스/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당신의 드레스/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당신이나 나나 참)//비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정거장엔 빈 무덤들/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이봐, 나 본 적 있지?/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젠장, 빗소리를 왜 이리 질긴 거야./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 김선우, 비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창작과 비평 

이 시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1) 비오는 날 박물관에 갔다. 2) 박물관에서 식기, 갑옷, 총칼 등을 들여다 보았다. 3) 마네킹에 입혀진 실크 드레스도 봤다. 4) 박물관에는 100년 단위로 방이 도열해 있는데, 거기도 드레스들이 있다. 5) 박물관을 나오니 지붕으로 빗줄기가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친다. 6) 박물관 밖에서 (드레스를 본 탓인지) 투명하고 슬픈 몸이 지나간다. 이렇게 찢어발기고 나면 앙상한 내러티브만 남게 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내러티브적 재구성을 해야 온전히 내 식대로의 독법이 가능해진다. 
 

1연. 김선우(시인 자신이 곧 화자일 터이니)는 비오는 날 집을 나서 박물관으로 향한다. 빗물은 건물 벽을 타고 흐르는데, 그 모습은 마치 문에 피가 흐르는 듯한 풍경이다. 문은, 죽은 문이니 오래된 문이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는 문일 터이다. 비에 젖은 풍경을 두고, 낯설기 그지없는 이미지, 곧 문에 흐르는 생피를 상상해내는 능력, 그게 시인의 발상법일 것이다. 그런 돌출적인 이미지로 인해 비는 섬뜩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둘째 줄의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이 시구는 원래 달빛이 유적을 비추고 있다, 라는 평범한 진술을 비틀어 표현한 것이리라. 주체와 객체를 도치해 달빛이 문장을 읽고 있다, 라고 진술한 것. 빗줄기는 말랐는데, 빗소리는 비만하다? 다시 말해, 빗줄기는 가늘게 내리고 있으나 내리는 소리를 요란하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리가 크다, 라는 것을 ‘비만’이라는 가시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내기.

2연. 김선우는 정거장에 서 있다. ‘핏대를 세운 발꿈치’로 보건대,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아 내심 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박물관에 가서는 식기들과 총칼, 갑옷 따위를 들여다 본다. 식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과연 그럴 것이다. 박물관의 식기들은, 그 언젠가 누군가 거기에 밥을 담아 식구들과 더불어 먹었을 것인데, 그런 내력을 가진 식기가 원래의 주인과 제자리였던 밥상을 잃어버리고, 박물관에 와서 조명을 받으며 전시돼 있는 일. 이런 박물관의 ‘식기’들이 제 나름 지녔을 기구한 내력을 생각해보는 일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일이다. (이런 대목은 20세기 초 고향 북극에서 미국으로 ‘잡혀온’ 에스키모 미닉이 미국 전역을 돌며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죽은 뒤 뼈마저도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비극적 내력을 생각나게 한다.)

3연. 마네킹에 실크 드레스가 입혀져 있다. 여기서 드레스는 정거장의 이미지와 겹친다. 정거장은 ‘정주’의 이미지가 아니라 ‘노마드’의 이미지이다. 정거장은 다만 거기 있을 뿐,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잠시 머물고 떠날 뿐이다. 박물관의 드레스도 마찬가지. 원래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으나 드레스는 마네킹에 입혀져 전시돼 있다. 주인이 권력자에서 마네킹으로, 그리고 그 마네킹은 또다른 마네킹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 게 드레스다. 주인과 마네킹은 사라질 것이나 드레스는 남는 것이자 “질긴” 것이다. 이쯤되면, 쉼보르스카의 시, ‘박물관’을 떠올릴 수 있겠다. 김선우의 질김과 쉼보르스카의 “고집이 센”의 의미와 이미지는 아주 닮아 있다. 그러면, 김선우의 박물관과 드레스에 대한 발상은 쉼보르스카에게서 훔쳐온 것인가.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결혼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최소한 삼백년 전부터//부채가 있어요-홍안은 어디 있나요?/검들이 있어요-노여움은 어디 있나요?/어둑어둑해질 무렵엔 루트는 현조차 튕기지 않아요.//영원의 결핍 때문에/만 개의 낡은 물건이 모였어요/진열장 위에 콧수염을 매달고/이끼 낀 문지기가 낮잠을 쿨쿨 자고 있어요./금속, 점토, 새의 깃털이 조용히 시간한테 이기고 있어요./고대 이집트의 해죽거리던 처녀의 머리핀만이 킬킬대고 있어요.//왕관은 머리보다 오래 남았어요./손바닥은 장갑에게 졌어요./오른쪽 구두는 발에게 이겼어요.//나에 관한 한, 나는 살아 있어요, 믿어 주세요./내 드레스와의 경주는 계속되고 있어요./그것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살아남고 싶겠어요!”(박물관, 쉼보르스카)

4연. 그런데, 정거장=드레스의 이미지는 박물관 전체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박물관은 원래의 주인,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물건들이 모인 곳. 거기 가는 사람들도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100년의 연대기별로 구분되어 있는 정거장 같은 박물관. 사람들은 거기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윙크하며 사진을 찍는다. 5연. 이것은 드레스의 독백이다. 의인화된 드레스는, 자신의 두 생애에 걸친 ‘전시노동’의 급료를 받지도 못한 채, 자신의 질긴 목숨과 유사하게 질기게 내리는 빗소리를 탓한다. 어쩌면, 그것은 박물관의 방문객 김선우가 빗소리에 대해 퍼붓는 신경증적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의 3연에서 김선우가 드레스에 대해 털어놓는 고백, "당신이나 나나 참"이라는 진술과 연결된다. 자기투영인 셈이다.

6연. 그러니, 차라리 의인화된 드레스라기 보다는 김선우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박물관을 나오니 여전히 밖은 밤이고(헤드라이트 불빛), 지붕에는 빗줄기가 내리고,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두말할 나위없이 이것은 박물관에서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를 본 탓에 떠올린 환영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텅 비어 질겨진, 오로지 거죽(옷)으로만 남아 투명하고도, 슬프게 떠다니는 모습으로 겹쳐 보이기도 할 것이다. 비오는 날에 정거장에 옹송거리며 서 있거나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화사해 보이나 그 안은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처럼(강시처럼?) 떠다니며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주하지 못한 채 떠도는 저 투명하고 두터운 슬픈 몸들은, 죄다 박물관의 드레스와 유사한 운명이거나 히치하이커들이 아닐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목민 인 것처럼, 붙박이가 아닌 삶들은 모두 히치하이커가 아닐 것인가.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그도 아니라면 읽을 만한 시인가? 별로 읽을 만한 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정서적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읽을 때 주는 리듬감도 느껴지질 않다. 시로서 기억촉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미지를 제시하는 시인의 역량,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연결하고, 충돌시키면서 만들어내는 시적 효과를 고려할 때 평균 점수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써내려간 잡설들은 이 시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한, 약간의 정신노동을 수반하는 작업일 따름이다. 잘못 읽은 것인가? 아무려나, 소설이든 시이든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내적인) 일 대 다 커뮤니케이션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독자의 일방적 독해만이 남게 마련이다. 발신자인 작가가 항변해 봤자 소용없다. 불교경전의 첫 대목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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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1951년 어느날, 서울 현저동 판자촌 비탈길에 서서 또랑또랑한 눈을 밝히고,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과 잔학함을 기어이 증언하리라고 다짐하던, 

어린 소녀의 결기를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온 생애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으로 생을 다하신,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도 '대지모신의 글쓰기'가 현전함을 보여주신 분.  

문학이, 소설이, 위안과 위무의 양식임을 일깨워준 분.  

6.25도, 전후 미군 PX도, 거기서 그림을 그리던 박수근도, 개성의 인삼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개인사가 곧 역사였던 시대를 알지 못하는 부박한 자들이 소설을 쓰는 시대에,  

어디서 누구의 소설을 읽으며 한 밤의 불을 밝힐 것인가.  

문학의 그믐, 소설의 장렬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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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추운 날에는 만화를 봐야 한다. 이런 날은 일찍 집에 들어가 거실 소파에 다리 뻗고 누워 만화를 봐야 한다. 몸은 피곤하고, 온갖 잡사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혼곤할 때,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세월을 보내야 한다. 동네 골목마다 즐비하던 만화가게들이 없어졌으니, 이젠 ‘대여’가 아니라 사서 봐야 한다. 만화책의 지질이 갱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새 만화책 값은 엄청 올랐다. 그래도 사야 한다. 한줌의 위안이 그리울 때, 만화는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불편도 투정도 않고, 딱 본 만큼의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날은 저물고 집에는 가야 하는데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던 어제, 아무 생각 없이 교보에 갔다.

가서 보니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6권이 나와 있었다.  한권 보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만화책의 더딘 출간 속도는 참으로 감질 맛 난다. 히로카네 겐지의 ‘시마’ 시리즈도 그러한데, 70년대 과장을 거쳐 80년대 부장이 되더니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를 맞아 이사가 되더니, 거품 붕괴 이후의 시대에는 드디어 ‘사장’이 되었다. 시마 시리즈에 비하자면, <심야식당>은 에피소드 중심이라 그나마 감질맛이 덜 하다. 어쨌건 이번에 나온 6권도 전편들과 비스무리한 스토리들이 개성적이고 간결한 그림과 더불어 보고 읽을 만 했다. 아쉬운 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봤는데, 내릴 때 되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는 것. 한 시간도 못돼 이렇게 끝나다니, 허무하여라.

그러니까, 야밤에 문을 여는 식당, 누구든 먹고 싶은 것을 주문만 하면 뚝딱 만들어 주는 눈가에 흉터자국이 있는 빼빼 마른 아저씨가 하는 식당. 간단한 요기꺼리에서부터 한끼 식사, 그리고 술까지 파는 집. 이 만화는 음식에 대한 개인의 취향과 그 개인적 취향의 형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양해서 술집 호스티스와 게이샤부터, 트랜스 젠더, 직장인, 만화가, 할머니와 엄마와 딸, 바람난 남자와 여자들까지, 한밤의 동경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작 만화라는 시트콤 드라마 형식을 빌었기 때문일 것인데, 나로서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심야식당이라는 ‘소우주’가 매우 일본스러워 보였다. 일본스럽다함은 사회학적 상상력보다는 개인의 미세한 일상사를 소소한 드라마로 그려 보이는 ‘사소설적’ 전통이 만화에서도 어김없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마주하고는 누구나 그 소박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할 것이다. 가령, 한국 사람이라면 곽재구의 ‘김치찌개 평화론’이 주는 가족주의적 아우라를 절절하게 체험한 바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퍼준 김나는 밥을 한 술 떠 먹을 때의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말이다.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김치찌개 평화론, 곽재구)

그도 아니라면, 김선우가 말한 대로, 여럿 둘러 앉아 삼겹살(물론 그녀의 시는 삼겹살이 아니라 돼지고기 소금구이지만,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지)을 상추에 싸 먹을 때의 그 생의 환희 같은 것.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시간은 왁자하게 떠들며 삼겹살을 먹을 때가 아닐 것인가. 그런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채식주의자들의 염결성을 나는 무척이나 싫어한다.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 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 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훤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그런데, <심야식당>이 지극히 일본스럽다함은, 삼겹살이나 김치찌개에서 보이는 그 ‘비릿한 질감의 연대감’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은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으며, 주인장 또한 그들에게 별로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전국 어딜 가든 꼭 한 군데는 있게 마련인 ‘욕쟁이 할머니’ 같은 가족주의적 아우라가 없는 것이다. 그게 싫은가. 아니다, 그래서 편하고 부담 없다. 만약 한국의 <심야식당>이라면, 그리고 그곳의 주인장이라면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개인사와 일상에 틈입하여 쓸데없는 카운슬러를 자청했을 것이다. 심야식당이 한밤 동경 뒷골목에서 형성된 느슨한 공동체일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감정적으로 묶어내는 질펀한 연대가 없어서 차라리 쿨한 것이다. 물론,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은 가볍기도 하고, 가끔 눈물 찔끔 나기도 하며, 키들거리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이 만화는 주인장의 째진 얼굴처럼 쿨하다.

아베 야로의 이 만화는 일드로도 만들어진 모양인데, 케이블에서 한 두번 보다 말았다. 어째 일본의 걸작만화가 영화화되었을 때는 왜 그리 우스꽝스러운 스토리로 변하는 지 모르겠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들>도 그렇고... 어제 교보에서 산 아베 야로의 또 다른 만화는 <야마모토 귀파주는 가게>다. 야마모토에 귀를 파주는 가게가 있는데, 아주 예쁜 여자가 귀를 파주는 ‘서비스’를 하고, 한번 거기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광적인 귀파기 매니어가 되어 버린다. 유쾌하고 재밌는 발상인데, 물론 에로틱하기도 하다. 여자들을 기형적으로 그리는 아베 야로의 그림체가 오히려 섹슈얼하게 느껴진다. 무릎을 대주고 귀파주는 여자라서 그런가. 아무튼, 이 만화가 한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둘째권이 나올 때까지 또 감질맛 나게 기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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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qui 2011-01-20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파주는 가게라니~ 저는 어머니가 파주는 것도 왠지 공포스러워서 못맡기겠던데 말이죠 ㅡ.ㅡ;ㅎㅎ 만화가 영화화될때 그 원작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되는건 어쩔수 없는듯; 재현에 무리가 있다는 점은 둘째로 치고-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그토록 상상력이 후진지 모르겠어요-일본인들 특유의 제스처가 익숙치않아서 그런지 저는 안보게 되더라구요;대표적으로 노다메 칸타빌레가 그랬다지요..

모든사이 2011-01-20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그런 거 같습니다. 좀더 덧붙이자면, 저는 일본 문화 특유의 어떤 폐쇄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1억2천만명이라는 인구가 창출하는 일본의 자족적 내수시장과 불가피하게 대외의존형 개방경제(박정희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발전경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우리와의 차이 같은 것이랄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폐쇄적으로 고집해도 되는 조건 속에서 대중문화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오타쿠스러운 문화, 그리고 매니어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화가 창출되었다는 것. 그것이 가진 보편성은 우리의 개방적(그것이 헐리우드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든 어떻든) 문화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비단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일본 영화의 저변에 폭넓게 퍼져 있는 B급스러운 취향은 그런 폐쇄성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아니, 어쩌면 제가 가진 문화적 감식안이 협애한 것이어서일수도..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사이님 안녕하세요. 글을 읽어보니 너무 좋네요. 실례지만, 제 블로그에 옮겨 게재해도 될까요? 마침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었는데, 모든 사이님의 리뷰를 보니 꼭 옮겨놓고 싶어서요. 괜찮을지 의견 여쭤봅니다. 부탁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10-06 08:26   좋아요 1 | URL
네 괜찮습니다. 출처만 밝혀주시면 어디에 써도 무방합니다. 근데, 이게 쓴 지 좀 된 리뷰인데, 심야식당은 벌써 7권이 나오지 않았나요?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9: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