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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가스 요사의 <나쁜 소녀의 짖궂음>은 유쾌하다. 남미 작가들의 글은 비극이면서 희극이고, 신화적이면서 현세적이다. 신화적이라는 것은 합리성을 훌쩍 넘어서는 비의적인 것이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현세적이라는 것은 욕망의 질서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매혹의 대상이었던 여인을 평생 사랑했던 한 남자와 그 남자를 둘러싼 여인의 행장기. 여자는 기다리는 존재이고, 남자는 방랑자라는 롤랑 바르트의 고전적 정의를 뒤집어 여자는 끊임없이 방랑하면서 남자 주변을 맴돌고 남자는 평생 그 여자를 흠모하며 떠나지 못한다. 요사는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되, 지리멸렬으로 사랑했던 소설가임이 분명하다. 하기야, 남미 소설가 놈들치고 그렇지 않은 놈들이 어디 있으랴. 창녀촌 다락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던 마르께스부터가 그런 놈이었으니. 때로 우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돈다. 그 세계 밖은 없다.

아사다 지로의 <저녁놀 천사>는 그의 다른 단편들과 유사한 에피소드들로 묶인 소설집이다. 그의 소설은 사람 사는 꼬락서니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죄다 비스무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프면 아프고, 즐거우면 즐겁고, 눈물나면 눈물나고, 사랑하면 사랑스럽다. 우울한 날이면 나는 만화책을 보듯이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읽는다. 한때의 박완서가 나에게 그러했고, 한때는 스탕달이 그러했다. 그래서 가끔은 한국 출판사들이 아사다 지로 소설을 앞다투어 번역출간해 내는 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사다 지로 때문에 나는 일본어를 배울 생각을 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나는 만화책 수준의 아사다 지로에 그냥 만족하련다.

민음사의 만화책 브랜드 자회사인 세미콜론 출판사의 책을 가끔 산다. 이 동네는 주로 유럽에서 나온 만화책들을 펴내는데, 가끔 마음에 꽂히는 책들이 있다. <마담 보베리>도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KTX에서의 한때를 즐겁게 해준 만화-소설책.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은 줄리안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부터 여럿 패러디 소설이 존재했는데, 만화버전은 이게 처음이 아닐까 한다. 물론, 보봐리 부인이 아니라 보베리 부인이고, 스토리도 다르다. 고전의 무게와 감동은 덜하나 비교적 장거리 여행의 경우 가방에 넣어갈 만한 책이다. 보봐리 부인의 욕망과 성격이 입체적인데 비해 보베리의 그것은 얕고 천박하다.

박정대의 <삶이라는 직업>,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 박형준의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최승자의 <물위에 씌어진>, 김민정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최근 한달 동안 사고 읽은 시집들이다. 다 읽은 것도 있고, 아직 다 못 읽은 것도 있다. 시집은 그것을 읽을 마음의 준비와 배경, 언어에 대한 매혹이 준비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읽을 수도 있으나, 그럴 경우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아직 이 시집들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눈과 머리로는 읽어 내려가고 의미를 궁구하지만, 말해야할 무엇은 아직 없다. 다만 한 가지, 이쯤되니 모든 시집들이 제 몫의 경험을 뒤섞고 버무리는, 제 경험의 넓이와 깊이만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다. 일상의 모든 것이 오로지 한 점으로만 회귀하는 것, 텍스트를 텍스트로 놔두자는 것은 비평가의 몫이고, 나는 그렇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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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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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간체로 쓴 사랑의 경건주의 

아마 범우사에서 나온 사루비아 문고가 아니었을까. 사춘기 즈음에 읽으면 딱 어울릴 이 책을 20여년이 훨씬 넘어 다시 읽으면서 가끔 낯간지러웠고, 더 자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름부터가 지극히 사춘기스러운 ‘제롬과 알리사’. 사랑하면서도 ‘더 높은 사랑’을 위해 상대를 내치는 알리사의 선택은 ‘어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은 뒷부분의 알리사의 일기 부분인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간체로 쓴 사랑의 경건주의’라는 말을 떠올렸다. 내간체는 규방 여인들이 구사하던 문체, 그 문체로 알리사는 경건한 사랑, 사랑의 성스러움, 그것도 따라야할 의무로서의 성스러운 사랑을 말한다. 이런 사랑은 지상에 존재할 리 없다. 그런데, 100여년이 지난 뒤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바다의 기별>, 생각의 나무) 실현될 수 없는, 가망 없는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라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관료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최장집의 말을 빌자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더 나빠졌다. 그의 제자 정상호 박사는 더 나아가 민주화 이후에 ‘관료지배’가 더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관료는 국민에 의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세력. 민주화 이후에는 관료만 힘이 세진 게 아니라 똑같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법부"도 힘이 세졌다. 정치가 문제해결을 못하니 헌재와 법원의 사법적 판결에 모든 것이 좌우되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비일비재해진 것. 정상호의 이 책은 관료지배의 연원과 해소방법에 대해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체계화된 정책이념, 민간 싱크탱크 등의 정책네트워크, 정치적 기획가로서의 정치 리더십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갖춘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성공했고, 그렇지 못한 노무현의 동반성장 전략은 실패했다. 이 책에서 정상호가 제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익을 수렴하고 대변하는 제도로서의 정당의 존재’다. 정당은 이해관계 집단의 이익을 정치적으로 수렴하고, 이를 의회라는 제도적 공간 안에서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다. 정당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신화’다. 한국정치와 정당에 대해 상당한 통찰을 제공해준 책.   

 

죽음에 이르는 사랑, 죽음으로 가는 사랑

몽파르나스의 마르그리트 뒤라스 묘지에는 그저 ‘M. D'라는 두 이니셜만 있을 뿐이었다. 뒤라스의 이 소설은 그녀의 묘지명만큼이나 간결하되 시적이다.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피아노 교습을 받으러 간 여인이 카페에서 한 여자의 죽음을 목격한다. 피흘리고 죽어 있는 여자의 곁에는 “내 사랑, 내 사랑”하며 울부짖는 한 남성이 있었다. 두 연인은 지상에서의 사랑을 절대적인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 사랑의 어떤 지극한 경지를 죽음이라고 말하면 어불성설일 것인가. 다음날부터 여인은 이 카페를 찾아 두 남녀의 사랑의 흔적과 내면의 고투를 더듬어 나간다. 카페에 단골로 와 있는 낯선 사내와의 대화를 통해 두 연인이 도달했던 경지를 추체험한다. 타자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 침잠되어 있는 욕망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것. 결국 여인과 카페의 사내는 두 연인에 대한 대화를 통해 바로 그 두사람이 도달했던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되었어요.” 뒤라스의 문장은 대단히 밀도가 높고, 중층적이며 그래서 암시적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지만, 암시적으로 보여지는 여인과 사내의 내면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다. 들끓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연인들의 죽음과 낯선 자와의 대화, 극도로 절제된 대사로 풀어낸다. 고급소설이다. 
 

 

무지와 부재의 고통 

파리에 정주한 체코 망명객 여인이 사회주의 정권이 망한 뒤 고향을 방문한다. 쿤데라 자신의 내력인 듯, 이런 스토리에는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고향으로 돌아갔던 다수의 체코 망명객들의 집단무의식이 반영돼 있는 듯 하다. 인상적인 대목은 앞 부분의 ‘향수’(nostalgia)의 어원을 기록한 부분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체코인들도 그리스어에서 취한 ‘노스탈지’nostalgie란 단어 이외에 ‘스테스크’stesk라는 그들만의 명사와 동사를 갖고 있다.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인데,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 어원상으로 볼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그리하여, 무지는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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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가족을 통한 복지공급 체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가족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체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유럽형 복지체제인 보편적 복지구조를 도입하면, 복지에 대한 가족의 역할은 점차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 복지제도는 가급적 자발적으로 형성된 가족을 통한 복지제공을 기반으로 하되, 가족을 통한 복지 영역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정부의 복지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전통적으로 축적된 가족이라는 복지체제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만큼 우리 환경에서는 북유럽식 복지제도를 반드시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며칠 전 누군가 책 한권을 건네주었다. 아마 사무실에 주욱 돌린 모양인데, <복지 논쟁 :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제목이다. 저자는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현진권 아주대 교수이고, 펴낸 곳은 ‘자유기업원’이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한국의 보수층이 복지에 대한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게 ‘가족’이라니. 노후 보장은 아들 딸이 하고, 병에 걸리면 사돈에 팔촌이 도와주고, 가장이 실직을 하면 마누라가 밖에 가서 돈 벌어야 한다는 얘기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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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는 언제나 술렁거린다. 아직은 한기가 남아 있는 엊그제 밤에도 그랬다. 까르르 웃으며 지나는 10대들 사이를 지나며 아침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며 읽던 한겨레를 떠올렸다. 문화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한 연극에 대한 리뷰 기사.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71318.html)기사는 홍세화는 “충격적이다. 2시간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연극에 감동 먹은 ‘좌파 교수’ 오세철은 “카메오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단다. 그는 얼마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문제를 다룬 ‘반도체 소녀’에 출연한 바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 명실상부한 전방위 문화게릴라 김상수 선생의 연극 <TAXI TAXI>. 신문에는 작은 키에 매서운 눈빛의 김선생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가겠다’는 약속만 해 놓고 여태 극장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미안했다. 연극표는 이미 한 달여 전에 구매했다.


kimsangsoo.com
공연이 시작되기 20분 전에 대학로 KFC 지하의 극장 아울로 갔다. 김선생은 어둑한 공연장 위쪽 구석에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고집스럽게 다문 입과 형형한 눈빛, 하지만 그는 아주 지쳐 보였다. 객석이 170여개나 되지만 오늘은 20명이 채 안되는 듯 했다. 객석이 썰렁하면 아무리 좋은 연극도 썰렁하게 마련이다. 연극에서 출발해 시나리오, 드라마, 설치미술, 사진, 문화정책으로까지 나아간 그의 예술편력은 참으로 다채롭다. 이제는 그런 ‘편력시대’를 끝낼 법도 한데, 시사 칼럼에 이어 아예 프리랜서 기자로까지 나서는 걸 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10여년 저쪽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예리한 식견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당시에도 야인이었고 지금도 야인이다. 그 야인(野人)이 주류 질서에 대한 편입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장자연 사건’과 삼성반도체의 백혈병 노동자 사건을 다룬 이 연극은 코미디와 벗기기가 지배하는 대학로 연극씬에서 사뭇 이채로운 공연이다. 한국 연극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창작연극’이라는 점도 눈에 띤다. 이런 연극이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라는 게 김선생의 평소 지론인데, 그 시대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려는 관객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다. 연극이 우리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비될 뿐인 ‘타임킬링용’ 쾌락의 소재가 되고 있는 셈이다. 문화정책의 수장에까지 오른 한 대표적 연극인은 자신의 대표작을 ‘햄릿’과 ‘파우스트’라고 했다. 이거 참 우스운 일이다. 영국의 로얄씨어터 배우가 저 변방 ‘코리아’의 대표 배우가 자국의 연극을 대표작이라고 하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한국 연극은 100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저 베끼기와 흉내내기에 그치고 있다.

막이 오르기 이분 전 기자 후배가 또다른 여자 후배를 데리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블로그와 트위터계를 주름잡는 그가 이 연극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화적 감식안에 대한 신뢰도 그러려니와 그의 트위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수만명의 팔로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잠시 정치부 기자로 ‘외도’아닌 외도를 했지만 그의 본령은 역시 문화다. 넘치는 재기로 트위터계를 평정하다가도 가끔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 모양인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는 그의 ‘멘션' 탓이다. 나로서는 그의 멘션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의 비판자들이 가진 지나친 엄숙주의가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여간, 나가서 이 연극 볼만하다고 와장창 트윗을 날려주라, 제발 부탁이다!!

무대는 단출했다. 한 가운데에 본네트가 열린 택시가 덩그마니 놓여 있고, 그 주위로 반타원형으로 철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조명이 켜지고 택시기사가 나와 “웰컴, 이럇사이마세, 환인꽝린, 어서오세요”를 번갈아가며 외친다. 그의 딸은 ‘샴숑전자’(아예 대놓고 모 기업을 거론하는 대신 이런 우스꽝스런 작명을 택한 모양)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택시에는 대책없는 연예인 지망생, 구사대, 선글라스를 낀 사내(선글라스는 5.16 이후의 박정희, 곧 70년대를 상징한다.)등이 번갈아가며 승차한다. 택시와 택시기사를 둘러싼 사연과 더불어, 다른 한편에서는 연예인지망생이 ‘스타’로 등극하기 위해 마담-실장과 만나고 접대하고 절망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김선생이 극을 풀어가는 방식은 정공법이다. 이렇다 할 ‘변화구’도 없이 오로지 ‘직구’로 2시간 10분을 압도해 나간다. 이렇게 힘이 넘치는 연극도 보기 드물 것이다. 객석은 긴장된 채로 숨 죽인채 감정의 파고가 흘러넘치는 무대를 내내 주시한다. 오디션을 통해 모집했다는, 경력이 많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높은 감정의 파고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연극에 곧잘 등장하게 마련인 ‘피에로’와 같은 극의 이완을 돕는 캐릭터도 거의 없다. 홍세화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연극은 재벌과 권력이라는 억압의 구조를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그 문법은 80년대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김선생 자신이 80년대 민중극/노동극의 전통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동시에 이른바 민중미학의 유력한 코드 중의 하나였던 ‘전망’(perspective)에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전망’이란 많은 경우 문화운동 진영의 독단적 계몽주의가 반영된 것일 뿐이었다. 공허한 단결론이거나 허황한 대결의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사연 하는 평론가들은 곧잘 ‘전망부재’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댔다. 그런데, 김선생의 연극은 한층 더 복합적이었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백혈병으로 결국 딸을 잃은 택시기사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웰컴, 이럇사이마세, 환인꽝린, 어서오세요”를 외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TV에서 성공하려 했던 소녀의 욕망은, 코드가 뽑힌 채 ‘내장’을 다 드러낸 텔레비전 수상기처럼, 산산히 부서져 버린다. (미디어의,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향한 욕망. 그러니, 그건 주체의 욕망이기는 커녕, 타자의 욕망이다.)

막힌 출구, 닫힌 전망. 그러나, 그것이 유발하는 ‘불편함’의 정도는 강렬하다. 전망 찾기에 골몰하는 대신 김선생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고통과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다. 구조의 혁파가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고통이다. 그가 도드라지게 보여주려는 한국사회의 사회적 위기는, 구조적 위기라기보다는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과 그로 인한 고통인 셈이다. 관객들은 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구조’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 연극판을 떠난지 10여년 만에 다시 대학로로 돌아온 김상수 선생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고통의 연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에서 ‘당신은 안녕한가’라는 고통스런 질문. 우리가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회복. (한 시민단체 의하면, 국내 대표적 반도체 기업에서 현재까지 46명이 백혈병으로 죽었다. 유족들은 현재 산재를 인정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백혈병 소녀의 마지막 독백 : 나는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그걸 알기에는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세상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는 겁니까? 하느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께서도 나에게 나를, 나를 믿어주셔야 되잖아요? 나를, 나를 이 고통에서, 여기서, 벗어나게, 떠나게, 도와주세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세상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를 믿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럼 좋습니다. 내게 아픔을 주시겠다면, 더 가까이, 더 심하게 주세요. 언제든지 상대하겠습니다. 고통이 나를 꺾든지, 내가 고통을 꺾든지, 와! 이리 와! 모두 와!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모두 아무말 없이 서둘러 극장을 떠났다. 더 이상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학로의 한 술집에 모인 기자와 연출자, 여대생, 그리고 한 관객은 시시콜콜한 연극 뒷담화를 했다. 나는 이 연극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연극준비를 위해 저당 잡힌 집이 그대로 온전하기를 바랬다. 술 몇 잔 들이키고 집에 가면서 트위터를 열어 보니 기자 후배가 이런 트윗을 날렸다. “연극 'TAXI TAXI' 봤어요. 일단 무엇보다 여배우들이 예쁘구요. 삼숑 열라 씹구요. 조선일보 열라 까구요. MB 열라 비웃어요. 근데 진지하게 씹고 까고 비웃어요.” 역시, 이 친구는 예쁜 여배우가 먼저 눈에 보이는구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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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창작과 비평> 봄 호를 읽다. 시 코너에 맨 처음 나오는 김선우의 시를 보다. 도정일은 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의미를 궁구하고, 진지하게 사색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시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캐내기에는 너무나 적은 정보를 담고 있다. 독자는 그 짧은 정보를 실마리 삼아 시의 의미를 풀어내야 한다. 정보의 조각들을 이리 꿰고 저리 기워 하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것은 독서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 요즘의 나같은 사람에게는 딱 어울리는 일이다. 길을 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그 정보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꿰매는 ‘사유의 노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텅 비어가는 정신을 메꾸기 위해 김선우 시를 따라가면서 해보는 사유의 도상연습.  

"비가 내린다 오늘은(죽은 門이 피를 흘리듯)/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핏대를 세운 발뒤꿈치를 들며 비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총기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목 없는 마케팅에 입혀진 화려한 씰크 드레스/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당신의 드레스/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당신이나 나나 참)//비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정거장엔 빈 무덤들/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이봐, 나 본 적 있지?/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젠장, 빗소리를 왜 이리 질긴 거야./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 김선우, 비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창작과 비평 

이 시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1) 비오는 날 박물관에 갔다. 2) 박물관에서 식기, 갑옷, 총칼 등을 들여다 보았다. 3) 마네킹에 입혀진 실크 드레스도 봤다. 4) 박물관에는 100년 단위로 방이 도열해 있는데, 거기도 드레스들이 있다. 5) 박물관을 나오니 지붕으로 빗줄기가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친다. 6) 박물관 밖에서 (드레스를 본 탓인지) 투명하고 슬픈 몸이 지나간다. 이렇게 찢어발기고 나면 앙상한 내러티브만 남게 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내러티브적 재구성을 해야 온전히 내 식대로의 독법이 가능해진다. 
 

1연. 김선우(시인 자신이 곧 화자일 터이니)는 비오는 날 집을 나서 박물관으로 향한다. 빗물은 건물 벽을 타고 흐르는데, 그 모습은 마치 문에 피가 흐르는 듯한 풍경이다. 문은, 죽은 문이니 오래된 문이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는 문일 터이다. 비에 젖은 풍경을 두고, 낯설기 그지없는 이미지, 곧 문에 흐르는 생피를 상상해내는 능력, 그게 시인의 발상법일 것이다. 그런 돌출적인 이미지로 인해 비는 섬뜩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둘째 줄의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이 시구는 원래 달빛이 유적을 비추고 있다, 라는 평범한 진술을 비틀어 표현한 것이리라. 주체와 객체를 도치해 달빛이 문장을 읽고 있다, 라고 진술한 것. 빗줄기는 말랐는데, 빗소리는 비만하다? 다시 말해, 빗줄기는 가늘게 내리고 있으나 내리는 소리를 요란하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리가 크다, 라는 것을 ‘비만’이라는 가시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내기.

2연. 김선우는 정거장에 서 있다. ‘핏대를 세운 발꿈치’로 보건대,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아 내심 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박물관에 가서는 식기들과 총칼, 갑옷 따위를 들여다 본다. 식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과연 그럴 것이다. 박물관의 식기들은, 그 언젠가 누군가 거기에 밥을 담아 식구들과 더불어 먹었을 것인데, 그런 내력을 가진 식기가 원래의 주인과 제자리였던 밥상을 잃어버리고, 박물관에 와서 조명을 받으며 전시돼 있는 일. 이런 박물관의 ‘식기’들이 제 나름 지녔을 기구한 내력을 생각해보는 일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일이다. (이런 대목은 20세기 초 고향 북극에서 미국으로 ‘잡혀온’ 에스키모 미닉이 미국 전역을 돌며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죽은 뒤 뼈마저도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비극적 내력을 생각나게 한다.)

3연. 마네킹에 실크 드레스가 입혀져 있다. 여기서 드레스는 정거장의 이미지와 겹친다. 정거장은 ‘정주’의 이미지가 아니라 ‘노마드’의 이미지이다. 정거장은 다만 거기 있을 뿐,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잠시 머물고 떠날 뿐이다. 박물관의 드레스도 마찬가지. 원래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으나 드레스는 마네킹에 입혀져 전시돼 있다. 주인이 권력자에서 마네킹으로, 그리고 그 마네킹은 또다른 마네킹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 게 드레스다. 주인과 마네킹은 사라질 것이나 드레스는 남는 것이자 “질긴” 것이다. 이쯤되면, 쉼보르스카의 시, ‘박물관’을 떠올릴 수 있겠다. 김선우의 질김과 쉼보르스카의 “고집이 센”의 의미와 이미지는 아주 닮아 있다. 그러면, 김선우의 박물관과 드레스에 대한 발상은 쉼보르스카에게서 훔쳐온 것인가.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결혼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최소한 삼백년 전부터//부채가 있어요-홍안은 어디 있나요?/검들이 있어요-노여움은 어디 있나요?/어둑어둑해질 무렵엔 루트는 현조차 튕기지 않아요.//영원의 결핍 때문에/만 개의 낡은 물건이 모였어요/진열장 위에 콧수염을 매달고/이끼 낀 문지기가 낮잠을 쿨쿨 자고 있어요./금속, 점토, 새의 깃털이 조용히 시간한테 이기고 있어요./고대 이집트의 해죽거리던 처녀의 머리핀만이 킬킬대고 있어요.//왕관은 머리보다 오래 남았어요./손바닥은 장갑에게 졌어요./오른쪽 구두는 발에게 이겼어요.//나에 관한 한, 나는 살아 있어요, 믿어 주세요./내 드레스와의 경주는 계속되고 있어요./그것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살아남고 싶겠어요!”(박물관, 쉼보르스카)

4연. 그런데, 정거장=드레스의 이미지는 박물관 전체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박물관은 원래의 주인,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물건들이 모인 곳. 거기 가는 사람들도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100년의 연대기별로 구분되어 있는 정거장 같은 박물관. 사람들은 거기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윙크하며 사진을 찍는다. 5연. 이것은 드레스의 독백이다. 의인화된 드레스는, 자신의 두 생애에 걸친 ‘전시노동’의 급료를 받지도 못한 채, 자신의 질긴 목숨과 유사하게 질기게 내리는 빗소리를 탓한다. 어쩌면, 그것은 박물관의 방문객 김선우가 빗소리에 대해 퍼붓는 신경증적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의 3연에서 김선우가 드레스에 대해 털어놓는 고백, "당신이나 나나 참"이라는 진술과 연결된다. 자기투영인 셈이다.

6연. 그러니, 차라리 의인화된 드레스라기 보다는 김선우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박물관을 나오니 여전히 밖은 밤이고(헤드라이트 불빛), 지붕에는 빗줄기가 내리고,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두말할 나위없이 이것은 박물관에서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를 본 탓에 떠올린 환영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텅 비어 질겨진, 오로지 거죽(옷)으로만 남아 투명하고도, 슬프게 떠다니는 모습으로 겹쳐 보이기도 할 것이다. 비오는 날에 정거장에 옹송거리며 서 있거나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화사해 보이나 그 안은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처럼(강시처럼?) 떠다니며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주하지 못한 채 떠도는 저 투명하고 두터운 슬픈 몸들은, 죄다 박물관의 드레스와 유사한 운명이거나 히치하이커들이 아닐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목민 인 것처럼, 붙박이가 아닌 삶들은 모두 히치하이커가 아닐 것인가.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그도 아니라면 읽을 만한 시인가? 별로 읽을 만한 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정서적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읽을 때 주는 리듬감도 느껴지질 않다. 시로서 기억촉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미지를 제시하는 시인의 역량,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연결하고, 충돌시키면서 만들어내는 시적 효과를 고려할 때 평균 점수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써내려간 잡설들은 이 시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한, 약간의 정신노동을 수반하는 작업일 따름이다. 잘못 읽은 것인가? 아무려나, 소설이든 시이든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내적인) 일 대 다 커뮤니케이션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독자의 일방적 독해만이 남게 마련이다. 발신자인 작가가 항변해 봤자 소용없다. 불교경전의 첫 대목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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