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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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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쓸하고 얼어붙은 오래된 정원에서

  두 유령이 흘러간 과거를 찾고 있네". 


츠바이크는 프랑스 시인 베를렌과 오랫동안 교유를 하고 지냈다. 로맹 롤랑과 더불어 츠바이크의 가장 가까운 프랑스 문인이 바로 이 괴팍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가 가장 정점에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츠바이크의 다른 작품들처럼, 안타까움과 쓸쓸함, 삶의 비극성과 아이러니를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인다. 중편 또는 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진하다.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중간을 오가는 츠바이크의 작품들은, 대중소설로서의 매력과 본격문학으로서의 통찰을 두루 갖춘, 보기드문 사례일 것 같다. 내가 책을 읽는 재미가 떨어졌을 때마다 그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일산의 '버티고 서점'에서 샀는데, 소설에 특화되어 있는 이 서점의 '구색'은 높이 살 만하다. 중요한 작가의 덜 알려진 소설, 출간 사실 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어느 소규모 출판사의 책이라도 여기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점 주인의 안목이 그만큼 뛰어나다. 대형 쇼핑몰의 한 구석에 마련된 이 서점의 서가는, 백화점의 서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책이 일상의 기호식품처럼 취급되는 비문화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일시적 즉자적 소비의 현장에서 그나마 '숨통'과 '사유'의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쯤 되면 한때의 철학도였던 서점 주인장에게 고마움 마저 느끼게 된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운동권 수배자였던 남자가 출감한 뒤 과거의 연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거기서 '오래된 정원'은 수배와 도피의 와중에 마련된 사랑의 공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츠바이크의 그것은 사랑의 내구성이 지속불가능함을, 그것은 이미 '쓸쓸하고 얼어붙은' 것임을 자각하는 장소/시간이다. 실체는 모두 빠져 나가 '유령'이 되어 있고, 시간은 저 너머의 세계에 가 있다. 사랑스럽던 여인은 이제 흰 머리칼이 무성한 중년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전쟁은 두 사람의 가족과 삶을 날카롭게 찢어 놓았다. 


이들의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것이었으나 관계의 재생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고 만다. 그게 이 소설속 삶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이별 여행의 행선지가 하필이면 하이델베르크였을까. 그 곳의 언덕 위에 솟은 낡은 성이야 그럭저럭 여행의 목적지가 될만하다 치더라도, 네카어 강변의 이 소도시는 독일의 철학과 정신, 아카데미의 흔적이 너무 강하지 않은가. 츠바이크의 낭만적 상상력과 하이델베르크는 내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는데, 이 도시의 인상이 내게 지나치게 강렬한 탓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게르만 문화권 내부에서 존재하는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에 함께 실린 '미친 개'에 대한 단편, <당연한 의심>도 아주 재미있다. 집착이 낳은 배제와 복수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 소설 뒷부분의 츠바이크의 삶에 대한 소개는 간결하고 소상한 대로 읽을만한 글이다. 아마도 국내에 소개된 츠바이크의 삶에 대한 글로는 가장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츠바이크의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이 글을 통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자살은 갑작스런 선택과 결단이 아니라 오래 준비되고 계획된 사건이었다는 것. 일본의 2차 대전 참전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가 절망과 자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는 것. 그의 우울증과 첫번째 아내와의 이혼, 비서와의 결혼, 영국 바스에 보관된 그의 유품들 등. 츠바이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유럽 인문주의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은 유럽의 '문명' 반대편에 파시즘이라는 정치적 야만과 아시아라는 인종적 야만을 두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이 짧은 글에서 새롭게 얻은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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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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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를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14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청목 출판사에서 나온 독문학자 강두식의 번역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3분의 1 쯤 참고 견디며 읽다가 집어던졌다. 원문 번역이 아니라 독일어 중역인 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지만, 지명과 이름이 틀렸고, 문장도 엉망이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독일어나 영어 좀 하는 초보자들이 나눠 번역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위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몇몇 출판사들은 80년대쯤 이 따위 번역으로 ‘전집’들을 내놓고 아직도 팔고 있다.) 그 뒤 세르비아어 전공자에 의한 제대로 된 번역이 문지에서 나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올 초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문지의 대산세계문학전집은 이런 점에서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전공자에 의한 원문 번역에 충실한 데다 대산재단이라는 ‘자본’에 힘입은 탓이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번역이되 국내에 아직 소개가 안된 작품들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지난 1월 크로아티아를 건너 사라예보를 거쳐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 언저리의 동네 비셰그라드를 찾은 것도 사실은 이 소설과 이보 안드리치 때문이었다. 발칸의 험준한 산맥으로 이뤄진 옛 유고슬라비아의 세 나라를 거치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사정이 좀 나은 크로아티아를 지나 보스니아로 들어서는 순간 혼자만의 자동차 여행이 주는 호젓함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도로가에 면한 마을마다 불에 타고 무너지고 폭파된 집들이 즐비했다. 이 나라를 할퀴고 간 전쟁의 상흔은 여전한 현재성으로 생생했던 것이다. 가톨릭 성당이 우뚝 선 마을을 지나면 무슬림 사원이 세워진 마을이 나타나고, 그 곳을 지나면 다시 기독교 교회가 보였다. 발칸의 마을들이 산맥을 등줄기로 하여 중첩된 계곡들로 이뤄져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지형의 독특함이 이런 계곡마다의 종교적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과 종교적 다양성은 이 지역에 고유한 ‘종족적 민족주의’(이 말을 나는 오승은의 <동유럽 근현대사>에서 배웠다)와 결합하여 끔찍한 살육과 전쟁을 낳았다. 바로 이러한 종족과 인종과 종교의 교차점에 ‘드리나 강의 다리’와 그 다리가 세워진 도시 비세그라드가 있다. 몬테네그로에서 발원한 드리나 강은 비세그라드에서 르자브 강과 만나 사바강으로 향하고, 다시 사바강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과 합쳐져 흑해로 흐른다. 드리나 강은 동로마와 서로마의 자연적 국경이었고, 따라서 정교회와 가톨릭의 경계이기도 했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으로 무슬림이 진출했으며 상당수 유대인들도 디아스포라의 오랜 역사를 거쳐 드리나 강 인근에 정착했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세르비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400여년 역사를 가진 마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드리나 강 다리의 원래 이름)가 파괴되었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시작한다. 네 개의 종교가 겹쳐지고, 서너 개의 민족이 ‘다리’를 건너며 서로 어울리고 살았던 비세그라드의 역사와 전설, 흥망과 성쇠의 과정이 소설을 큰 줄기를 이룬다. 다리가 세워져 파괴되기까지의 장구한 세월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이나 길이에서 모두 대하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 지역 특유의 민족적 설화와 에피소드들이 점점이 박혀져 소설은 아주 풍부한 이야깃 거리로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마르케스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문장의 유장함, 설화적 풍부함, 전설과 판타지의 결합 등 소설적 웅장함과 세부를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특정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인물들이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아, 인종과 종교의 전쟁으로 얼룩진 이 동네에도 이만한 작가가 있구나 하는 것이 책을 펼치며 든 생각이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에피소드는 비세그라드의 아름다운 여인 파타의 죽음 이야기. 이 도시의 반대편 끝에 벨리 루그와 네주케라는 마을이 있다. 벨리 루그에는 이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파타가 살고, 네주케는 함지치 형제들이 산다. 파타는 함지치 형제들의 무스타이베그에게 구혼을 받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그녀의 아버지 아브다가가 무스타이베그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게 되고, 그 보답으로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파타가 시집가는 날, 말을 타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 도중 그녀는 드리나 강의 녹색 물결 위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슬기로워라. 어여뻐라, 아브다가의 아름다운 파타여!”라는 전설같은 노래) 사라예보에서 해발 1500미터 고지 가파른 벼량을 옆에 둔 도로를 따라 운전하면서 이 슬픈 죽음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가끔씩 차를 세워 녹색의 드리나강을 바라보기도 했다.


드리나 강의 다리 중앙 교각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리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던 요정을 달래기 위해 쌍둥이 아이들인 스토야, 오스토야가 산채로 매장되어 있고, 그 구멍으로 쌍둥이를 잃은 어머니가 젖을 주었다는 이야기. 다리 건설을 방해하던 농부가 터키 지배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산채로 묶여 죽어가는 이야기. 비세그라드에서 처음으로 호텔을 열어 전성기를 구가했던 유대인 여인 로티카의 이야기. 어느 밤 ‘타짜 도박사’에게 홀려 전 재산을 탕진하는 이야기. 이런 판타지적인 스토리는 흥미로우면서도 발칸 사람들의 어떤 은밀한 믿음과 사유방식을 엿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국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스토리들. 이 책의 전반부는 터키 지배의 시대를, 후반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후반부의 오스트리아적 근대성보다는 전반부의 전근대성이 오히려 발칸 고유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이 가진 다채로움. 터키와 유대, 슬라브, 독일, 헝가리 식 이름들의 기묘한 공존)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상인 알리호좌가 오스트리아군과 세르비아 군의 포격전이 벌어지는 날, 모든 주민들이 사라진 마을에서 부서진 다리를 보며 죽어가는 순간이다. 피난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가게에 홀로 숨어 전쟁이 포성속에서 “고요한 감미로움”을 맛보는 순간, 그의 집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무너진 다리처럼 그도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한가지는 불가능하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영원한 건축물을 세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영원이 이 세상 어디에서든 자취를 감춰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취를 감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설을 보니 이보 안드리치는 1941년 독일의 유고 침공 직전까지 베를린의 유고 대사를 지냈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구속의 기간동안 이 소설과 보스니아 3부작을 써냈다고 한다. 무슬림의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가톨릭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대학을 보내고, ‘제국’의 수도인 빈에서 공부했으며, 정교회의 세르비아에 정착했던 그의 삶은 이 옛 유고연방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채롭다. 안드리치는 1975년에 죽었으니 티토의 유고 연방이 아직 해체되기 전이고, 1990년대 초반 세르비아가 벌인 인종학살을 보지 못했으니 다양한 종교와 민족들의 공존과 조화를 꿈꾸었던 그의 희망은 그때까지 살아있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리호좌가 소망했던 바는 그의 바램이기도 했을 것이다.

 

드리나강의 다리가 있는 도시 비세그라드(Visegrad)는 ‘높은 언덕의 요새’라는 뜻이다. 몽골과 터키 등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동유럽에는 높은 곳에 요새를 많이 만들었는지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여럿이다. 체코의 비세그라드는 이 나라의 민족주의 음악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 첫 번째 곡의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헝가리의 비세그라드는 14세기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국왕이 모여 세계 최초로 평화회담을 연 곳이다.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비세그라드가 바로 이 소설의 발원지다. 이 도시의 ‘카피야’는 아예 이보 안드리치 타운이라는 소설가 이름을 딴 동네가 있다. 이 소설가의 동상이 또다른 이 동네의 유명인 테슬라와 함께 서 있고, 다리를 만든 메흐메드 파샤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2018년 1월 말, 동양인은 아무도 없는 이 다리 위에서 “머니, 머니”를 외치며 따라붙은 이 동네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이보 안드리치의, 이보 안드리치를 위한 이 도시를 떠났다. 

드리나 강의 다리와 그 위에 놀고 있는 보스니아의 아이들, 다리를 만든 메흐메드 파샤, 거리의 벽에 그려진 이보 안드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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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병 2019-04-1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길 다녀오셨군요.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세계 곳곳에 고통과 한이 서려 있지만, 특히 드리나 강의 산하에는 그 고통과 한의 시공간이 첩첩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이름만 들어도 신음소리가 들려 올듯한 보스니아니 세르비아니 발칸이니 하는 장소입니다.신음하며 죽어간 생명이 뼈를 묻었으니 세게는 그 질량 이상으로 무겁게 슬픕니다.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기 시작하면서, 다리의 전경 사진을 보고싶어 찾다가 이 글을 읽었습니다. 고맙고, 부러워하며 읽었습니다.
머니, 머니하며 따라붙는 아이들이 슬프군요.
감사합니다.

모든사이 2019-04-13 16:27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의외로 안드리치의 소설은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더군요. 노벨상 수상자의 후광 덕분인지는 몰라도. 발칸을 여행하는 것은 즐겁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이고, 수백년 동안 유럽의 변방/아시아의 변방/투르크 세계와 서구 사이의 경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 충돌을 모두 감당해야 했던 서글픈 동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조차도 오리엔탈리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나는 대로 최근에 읽은 책들읽었다는 사실을 까먹지 않기 위해리뷰쓰기에 게을러진 영혼을 위해

정리하자면, <낭만의 길야만의 길>(이종헌),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안나 가발다), <차우세스쿠>(에드워드 베르), <맑스로 가는 길>(루카치), <베토벤의 생애>(로망 롤랑), <팔 거리의 아이들> (몰나르 페렌츠), <아시아가 世界였을때>(스튜어트 고든), <헝가리 문학사>(한경민), <스페인 내전연구>,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헝가리 부다페스트로>(초모 모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제국의 종말>, <어제>(아고타 크리스토프),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여자없는 남자들> (하루키),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위기의 장군들>(김종대), 그리고, <전복과 반전의 순간> (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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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7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8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년의 딱 절반이 끝났다. 이 세월은, 책으로 요약하자면, 빅토르 위고와 괴테,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에서 봄 사이는 다섯권 짜리 민음사판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두 번째 기간에는 괴테의 <친화력>과 그에 관한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을 읽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6월의 마지막 이틀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읽으며 이른 더위를 삭혔다. 위고를 읽는 와중에 로베스피에르 평전과 그의 연설문집,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과 같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읽었고, 김형경의 <외출> 같은 소소한 소설들과 업무용 참고도서들과 리포트들을 읽기도 했다. 지금은 어제 책장을 덮은 츠바이크 소설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시간이다.

 

<레미제라블>은 스케일과 문장, 스토리와 교양이 백과사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라서 짤막한 리뷰 정도로 마무리하기 어려운 대작이다. 누군가는 1권의 첫 부분에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오는 미리엘 주교에 관한 부분을 보다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말한다. 이 대하소설을 읽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그 대목인 셈이다. 가난한 자의 친구이자 기독교적 성인의 경지에 오른 그의 삶은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 하더라도, 도덕적 설교로 범벅된 소설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장발장의 삶을 예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장발장의 남은 삶의 규제적 원리로 작용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를 모델로 삼은 한 사내의 속죄와 자기구원의 드라마다.

 

나로서는 이 소설의 기본줄거리(미리엘-장발장-팡틴-코제트-마리우스로 이어지는 주인공들이 엮어내는 사랑과 헌신의 드라마)외에 주변적인 삽화들이 더 관심이 갔다. 18326월 봉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바리케이트의 구조와 역사,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혁명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길고 장황하게 묘사를 한다. 그중 가장 압권은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파리의 하수도에 대한 설명이다. 중세 때부터 건설이 시작된 파리의 지하 하수도에 대한 위고의 묘사와 설명은 그 자체로 도시사회학, 도시건설사에 대한 한편의 작품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런 대목들을 보면서 왜 이 소설은 유독 다이제스트판이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장발장은 기구한 운명 속에서 저지른 사소한 죄 때문에 평생을 속죄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그는 초기자본주의 시기에 등장하는 공장제 수공업 시대의 자본가이기도 하다. 그가 공장경영주로서 재산을 모으는 과정이나(자본가로서 그는 구시대의 수공업적인 기술을 대공장제 기술로 대체하는 혁신가다), 자신의 재산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모습에서 그의 자본가적 면모는 아주 두드러진다. 영화에서처럼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을 예찬하고 고무하는 혁명의 서사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 인간의 속죄와 구원의 드라마,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이야기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을 것 같다. 동시에 그것은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가 가진 비윤리성에 대한 사회사적 고발이기도 할 것이다.

 

괴테의 <친화력>이 던진 소설적 충격(?)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괴테는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근대 화학의 발상법을 빌어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 끝은 고전주의자괴테와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파국이다. 그러니까 화학 성분 사이의 친화작용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인위적으로 적용시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실험자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자연의 질서(과학법칙)와 인간 세계의 차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의외성과 배반에 이르기까지 괴테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와 달리 냉정하고 가차 없는 비극의 연주자가 되고 있다. 이는 지상의 질서는 괴테식의 진정한 사랑과 불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랑은 저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벤야민의 괴테 해석은 이 소설속 이미지와 상징, 그것의 신화적 의미를 벗겨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가 뛰어난 비평가인 이유는 그의 해석이 표피적인 데 그치지 않고, 그 심층적 의미와 신화적 의미를 끄집어 내어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암시적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여전히 버겁고 머리 아픈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가령, ‘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 : “삶의 카오스적인 요소로서의 물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몰락을 가져다 주는 성난 파도의 모습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수수께끼같은 정적속에서 위협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한 사랑하는 연인들은 파멸한다. 단단한 땅의 축복을 스스로 물리치는 곳에서 그들은 정체된 물에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의 에두아르트와 오필리에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신화적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가차없는 비극적 인식이 차라리 지상의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은 문지의 대산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그의 소설과 평전들은 꽤 오래전부터 애독목록이었는데, 과연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아들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2차대전 중에 유럽 인문주의의 몰락을 비관하여 자살한 그의 드라마틱한 삶만큼이나 <낯선 여인의 편지>이래 그의 소설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과 같은 평전들은 언제나 매혹이었다. 프로이드와 아인슈타인도 그의 애독자였고, 2차대전 이전에 유럽에서 6천만권이 팔린 소설가였으니, 하물며 나같은 삼류 소설애호가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작품인 <어제의 세계>는 일년 이상 2장에서 머물러 있으니, 게으름이 책읽기의 마력을 압도하는구나!)

 

<초조한 마음>연민에 관한 이야기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츠바이크가 작중 인물인 콘도어 박사의 말을 빌어 정리한 연민은 두 가지다 :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밀러 소위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마비된 여성,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그녀의 집을 계속해서 방문한다. 그녀가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을 청하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생기발랄하던 소녀였던 에디트는 이 사고로 인해 신경질적인 환자로 변해버렸고, 백만장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치료하느라 혼신을 다한다. 호프밀러에게는 점점 강렬해지는 연민, 에디트에게는 그에 대한 사랑이 점차 싹트게 된다. 연민과 온전히 양립할 수 없는 사랑은 이 두 사람과 두사람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심리 드라마가 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절친이자 프로이드가 애독한 책의 저자답게 츠바이크는 이러한 심리를 대단히 탁월하게 묘파해낸다.

 

연민-사랑 사이의 비대칭 속에서 호프밀러는 오락가락한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나아가 그 연민에 대한 책임앞에서도 그는 무기력하고 혼돈스러워한다. 에디트의 주치의인 콘도어의 말을 빌자면, 그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채 자신의 몰락과 한 여인의 죽음, 그리고 그 여인의 가족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에디트는 호프밀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서 환희와 자학, 냉소와 신경증, 독기와 애절함 사이를 숨가쁘게 오간다. 어린아이-환자-성숙한 여인이라는 세 층위를 오가는 여성의 심리를 츠바이크는 매우 섬세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은 1차대전이라는 전화속에서 파국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민이 타자로 향할 때 그것은 소박한 동정에서 그칠 수도, 숭고한 헌신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루카치가 <감정교육>을 분석하면서 말한 환멸의 낭만주의이래, 근대적 개인의 정조를 지배하는 한 정서는 멜랑콜리일 것이다. 그 멜랑콜리는 연민이 타자가 아닌 자신으로 향할 때 발생한다. 그러니까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발생사적 기원은 자기연민이고, 멜랑콜리는 그것의 심리적 표현일 것이다. 연민이 초래하는 이 사랑과 환멸의 막장 드라마, 내게는 자기연민의 내력과 표정들을 성찰하는 텍스트였다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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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였던 그림자

남미판 386세대의 후일담 소설. 혁명은 가고 남은 자는 먹고 살아야 한다. 후미진 뒷골목 주택에서 집단으로 서식하는 이 왕년의 투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찌질하다. 피노체트 이후 30여년, 이들의 그림자는 길고 우울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실패한 혁명 이후의 풍경을 보고자 했으나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

 

 

 

 

일단 웃고 나서 혁명

오르한 파묵 때문에 들추게 된 터키 소설. 우디 앨런 소설 이후에 이렇게 유쾌하게 본 소설이 있을까. 풍자는 예리하고 유머는 도를 넘지 않는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동경한 유신의 주역들이 떠오르는 장면들. 군인과 정치가, 언론과 혁명가들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터키판 돈 카밀로와 페포네? 정치풍자 유머 소설로는 최고수준이다.

 

 

 

비틀거리는 여인

이 우익 파시스트에게 이런 정도의 타자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니. 연하의 남성-유부녀 사이의 내밀한 감정을 얇고 여린 꽃잎 들춰내듯 묘사해내는 미시마 유키오의 감각. ‘도덕에서 관능으로, 내부의 격렬한 들끓음이 차분차분한 외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본적 사랑의 존재론. 다른 우주에 대한 이해, 컴컴한 우물을 들여다보는 기이한 각성의 순간들. 인물의 위치를 반대로, 거꾸로 베껴쓰고 싶은 욕망.

 

 

 

 

 

위풍당당

유쾌한 성석제의 귀환, 그는 B급 정서를 가진 동네 양아치를 그리는데 가장 탁월하다. 거기에 맞서는 우직하고 순박한 자들의 원시적 매력까지도.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는 잡것들이 가족 아닌 가족을 이루고 몸을 부려 하루를 먹고 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자리/포옹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설가다. <탐닉><단순한 열정>의 이 여자는 자기를 팔아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은 한 젊은이를 매혹시키고, 그 놈은 33살 연상의 이 소설가와 연애를 하고, 그 이야기를 팔아 소설가가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지갑에서 툭 떨어지는 동구권 외교관의 그 사진. 넘어설 수 없는 절망의 절벽.

 

 

 

 

어머니의 연인

처음 읽은 스위스 소설. 미약한 처음부터 창대한 내일에 이르기까지의 헌신과 배반. 이탈리아 북부에서 겪은 무솔리니 군대. 실제와 허구가 교차하는, 부성에 대한 애증,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

 

 

 

 

 

 

소셜 정치혁명 세대의 탄생

그가 한국 출신의 정치학자라는 게 이런 책을 쓰게 했을 터. 언제나 부분에 대한 확대해석은 전망의 과잉으로 나타난다. 징후적 이해로서는 동의할 만하나, 대안적 질서의 창출로는 난망. 언제나 과잉대표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끝없이 경계할 일.

 

 

 

 

 

디지털 시민의 진화

디지털 시민은 격자 속에 갇혀 있다. 광장은 사라지고, 장벽으로 가로막힌 골목에서 애들이 놀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시민들을 호명해내었으나, 그 진화는 현재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로막혔다. 디지털 생태계의 변동에 대한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현장밀착적이다. 인터넷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이면서 섬세한 애정이 아니라면 쓰여지지 못했을 것.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글쓰기가 혁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글읽기과 글쓰기에서 혁명은 시작된다는 전언. 과연 혁명은 펜과 종이쪼가리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인식 이전에 구체적 삶이 있었다는 유물론에 대한 공박? 또 한명의 재기발랄한 아사다 아키라를 보는 느낌. 그런데, 왜 일본 젊은 지식인들의 책에서는 사기성이 그리 진하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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