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 죽어야 고치는 습관, 살아서 바꾸자!
사사키 후미오 지음, 드로잉메리 그림, 정지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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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NS로 네이버 블로그만 사용한다. 이웃들의 포스팅을 훑다 보면 좋은 습관을 가지거나 형성 중인 분들이 꽤 많다. 새벽 기상을 기록하시는 분, 감사 일기를 매일 쓰시는 분, 가계부를 공유하시는 분, 규칙적으로 달리시는 분 등등. 그분들의 성실함과 공개적으로 올리는 용기에 랜선 밖에서 감탄하곤 한다. 아마 이미 습관이 되어서 작성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분도 계실 것이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분도 있으리라.

 

그런 게시물들을 보면서 새로운 습관에 대해 자극받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면 더 피로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즉각적인 보상을 주는 기존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좋아서 들였던 몇몇 습관을 빼면 나는 예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러다 도서관 독서회 4번째 책으로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일단 뭐라도 해보기를 결심했다.

 

실패한 습관

 

블로그 게시물 중 가장 본받고 싶었던 습관은 새벽 기상이었다. 평소에도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긴 했다. 자정쯤 잠들어 오전 7~8시에 깨어났으니까. 나쁜 습관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시간 활용이 아쉬웠다. 일어나자마자 씻고 밥 먹는 행위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또 독서심리상담 수업을 가는 날이면 바빠지는 몸과 마음도 불편했다. 그래서 과감히 기상 시간을 앞당겨 알람을 맞췄다. 슬프게도 그 시간에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고, 설혹 일어났다손 쳐도 다시 잠들기 일쑤였다.

 

아침에 늦잠을 자는 이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눈을 뜨지도 못한 상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 p.148

 

내가 실패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첫 번째는 진입장벽이었다. 평소 자정쯤 잠들던 습관은 진입장벽이 낮았고, 바로 설정한 새벽 기상은 진입장벽이 높았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려고 했으니 눈이 떠질 리 만무했다. 두 번째 걸림돌은 내 자신을 과신한 탓이었다. 그동안 자존감이 급상승하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기상 후 계획이 없었다.

 

찰스 두히그에 따르면 습관은 신호-반복행동-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나의 새벽 기상은 여기에 하나도 해당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다시 새벽 기상

 

실패한 새벽 기상은 이 책을 읽기 전이었다. 자정 취침, 7~8시 기상을 유지하면서도 새벽 기상의 꿈은 계속 간직했다. 그러던 중 만난 한 문장이 마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몇 번이나 그 습관을 반복하면 어차피 5분 후에는 눈이 번쩍 떠질 테니까.’라는 기분이 들어서 으싸!”하고 일어날 수 있다. - p.123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만으로도 어떤 일을 하는 태도가 변한다. 나는 진입장벽을 낮췄다. 일단 눈이 떠지면 꾸물거리지 말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게 시간이 어찌 되었든 말이다. 그렇게 결심한 새벽 기상의 시작은 묘했다. 자기 전 독서를 하면서 뜨거운 물을 마셨는데, 그로 인해 새벽 4, 소변이 마려워 깨어났다. 순간 뇌리에 메시지가 번뜩였다. 이것은 습관의 시작인 신호이자 환경설정이다. 곧 정신 차려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잠자리가 아닌 의자로 향했다. 그리고 첫 시작의 보상을 줬다. 데일리 리포트의 기록과 새벽 독서.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내적으로 굉장히 보람찼다.

 

다시 시작한 새벽 기상 덕분에 취침 시간도 당길 수 있었다. 오후 10~11시 사이에 잠들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나흘 동안 성공하면서 반복행동에 돌입했다. 작은 성공만으로도 동기가 충만해지는데 확 앞당겨 큰 성공을 거뒀으니 자기효능감이 어마무시하게 상승했다. 자기 과신도 고려해 목표를 잘게 쪼갰다. 희망 기상 시간은 5, 기본 기상 시간은 6시로 알람을 설정했다. 미리 정해두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기 때문에 자책감이나 자기부정감이 생기지 않는다.(p.161) 정리하면, 어쩌다 새벽녘에 눈이 떠지는 것과 알람은 신호이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반복행동’, 그것을 기록하고 내가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은 보상인 것이다. 요즘은 새벽 기상에 어울리는 행동을 찾아 습관화하려고 탐색 중에 있다. 시작하기에 가장 빠른 시간은 지금이다.(p.165)

 

습관 만들기의 중요한 점

 

책의 3장에는 습관 만드는 방법 50단계가 있다.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라 분리하기란 어렵지만, 내가 생각하는 우선순위 세 가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1). STEP 45 자기효능감은 성공할수록 높아진다

 

자기효능감은 간단히 말해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자신이 바뀌고, 성장하고, 배우고, 새로운 난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 p.245

 

45단계를 처음 소개하는 이유는 작은 성공의 중요성 때문이다. 어떤 습관 만들기에 성공한다면 다음 습관을 만드는데 수월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자기효능감이 상승하는 습관은 데일리 리포트(DR)’이다. 이전 서평에서도 자주 언급했는데, DR은 내 행동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기록이면서 쉬운 행동이다. 나는 기상 후 1시간을 주기로 내 행동들을 적고 있다. 최대한 가감 없이 적는다. 내가 지양하는 행동을 했어도 적는 것이다. 가령, 유튜브의 유혹에 넘어가 1시간을 유튜브로 보냈다면 유튜브 시청이라고 적으면 된다.

 

DR은 솔직해야 효과가 좋다. 왜냐하면 하루를 마감할 때 일과를 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간혹 TV에서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넋을 놓고 볼 때가 있다. 그것을 기록한 다음, 여백에 반성한 내용을 적는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심하게 된다. 이렇게 하루를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반성이 끝나면 스스로를 칭찬한다. 끊이지 않고 쓰면서 습관이 되면 이보다 더 어려운 습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을 습관화했으니 다음 습관을 관찰하고 반성하기도 쉬워졌을 테니까.

 

좋은 습관 하나를 몸에 붙이면 다른 습관도 익히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자기효능감이 커지기 때문에, 다른 좋은 습관도 더욱 만들기 쉬워진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 p.247

 

(2) STEP 09 - ‘핵심습관을 먼저 공략한다.

 

핵심습관은 다른 습관에 도미노 같이 좋은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습관을 말한다. - p.120

 

나의 핵심습관은 역시 DR이다. 새벽 기상, 독서, 일기, 식사, 샤워 등 나의 모든 행동은 DR을 벗어날 수 없다. 좀 더 확장하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습관화하고 싶은 것들을 죄다 기록한다. 예를 들면, 읽은 책을 플래너에 기록하기, 습작한 날을 캘린더에 동그라미 표시하고 분량 기록하기, 독서 하고 서평 쓰기, 그날의 행동과 감정, 생각을 일기에 쓰기가 있다. 지금 쓴 것 중 서평과 습작 빼고는 전부 습관이 되었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간헐적으로 하는 것들은 습관이 되기 어렵다. 그러니 핵심습관은 매일 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

 

(3) STEP 49 언젠가 무너질 수도 있다

 

언젠가 무너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너진 습관을 계속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 p.257

 

미끄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이후의 대처이다. 저자는 그래서 습관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정성껏 기록해두라고 한다. 기록은 다시 습관 리듬을 찾을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도 DR을 강조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사고방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융통성을 갖춰야 한다. 만약 습관 만드는 방법이 나랑 맞지 않는다면 경로를 틀면 된다. 어떤 일로 인해 중단했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바꿔서 안 된다면 또 바꾸면 된다. 습관을 지속한다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습관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일과는 다르다.(p.259) 일관성은 소신으로 두고 습관은 유연하게 만들자. 습관을 만드는 게 목적이니까.

 

습관을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썼지만, 결국 핵심은 꾸준히이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그 챌린지가 끝난 31일째에도 스쾃을 지속하는 것이다.(p.234) 습관은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행동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무의식적으로 좋은 습관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일단 뭐라도 해볼 요량이다.

 

P.S - 참신하거나 색다른 내용이 담긴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가의 경험과 일상을 바탕에 두고 근거를 제시하며 썼기에 무리 없이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용기와 계기를 심어주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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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죽음 1~2 세트 - 전2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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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은 지 얼마 안 지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죽음을 읽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공교롭게도 둘 다 죽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전자가 죽음이라는 현상을 다룬 다소 무거운 느낌의 에세이라면, 후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죽음을 심각하지 않게 풀어낸 소설이다. 원제는 DEPUIS L’AU-DELÀ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지만검색을 해보니 대략 저세상으로쯤 되는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죽은 후에 이러면 어떨까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고정관념 내려놓기

 

앞서 말했듯이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 신도, 귀신도, 천국, 지옥, 극락, 영혼 등등. 아주 강력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책을 접하니, 처음 읽을 때는 몰입이 잘 안 됐다. 신선하긴 한데 뭔가 내 취향이 아닌 느낌? 찝찝한 마음에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도입부의 글을 다시 만나 밑줄을 긋고 나서야 , 내가 너무 실용서처럼 읽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상상하고, 꿈꾸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멋진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 1권 도입부

 

소설은 일단 상상력의 산물이고,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소설로써 즐길 수 없다. 현실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소설의 허구성을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와 사후 세계관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부분을 놓쳤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작가의 도입부 글은 길잃은 나의 집중력에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이후의 독서는 몰입하여 아주 신나게 읽어내렸다.

 

누가 날 죽였지?

 

누가 날 죽였지?- p.15, 1

 

강렬한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대중에게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인 가브리엘 웰즈는 새 소설의 시작으로 쓸 첫 문장을 얻었다는 즐거움에 눈을 뜬다. 그러나 즐거움은 여기까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자신의 주치의에게로 향한다. 그 병원에서 만난 뤼시 필리피니라는 영매에게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첫 문장은 죽은 추리소설 작가가 풀어낼 사건으로 변한다. 가브리엘은 뤼시에게 자신의 사인을 파헤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수사 도중 큰일을 겪은 뤼시가 포기를 선언하자, 가브리엘은 하나를 제안한다. 뤼시의 잃어버린 연인을 죽은 자신이 찾아줄 테니 수사를 중단하지 말아달라고. 둘은 모종의 계약 관계로 서로가 맡은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여러 인물을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만나면서 가브리엘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진실에 닿게 되는데…….

 

스포일러는 예의가 아니므로 여기까지가 줄거리로 적당할 듯 싶다.

 

작가의 문학관

 

책이라면 으레 따분한 줄 알았는데 글자와 단어, 문장의 경계를 뛰어넘자 머릿속에 영화 스크린이 펼쳐지더니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했어요. 평행 세계로 들어간 기분이었죠. 등장인물의 목소리, 바람 소리, 차 소리, 총소리, 천둥소리가 귀에 들렸어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냄새가 맡아졌어요.당신의 이야기에 써진 그대로 느껴졌어요. 문 닫을 시간이라며 교도관이 다가오길래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더군요. 그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었던 것예요. 배가 난파되고 나서 널빤지에 매달려 바다에 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당신이 창조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부여잡고 있었던 거죠. - p.98, 1by 뤼시 필리피니

 

소설을 보는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작가의 가치관을 엿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주장은 작가가 가지고 있거나 반박하거나 신경 쓰는 부분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이 작가인 만큼 글쓰기나 독서, 문학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가브리엘 웰즈는 글쓰기를 이렇게 바라본다.

 

그에게 소설은 문인들의 직업어로 <인시피트>라 불리는 첫 문장과, 이것이 닦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마지막 문장인 <엑스플리시트>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가지가 결정되면 플롯을 작동시키는 시계 장치를 구상하는 일만 남는다. 독자들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서서히 자신의 삶을 잊고 주인공의 삶에 몰입하게 만드는 그런 장치. - p.17, 1

 

누가 되었든 글을 쓴다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첫 문장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둘 명분이므로 중요하고, 마지막 문장은 글에 대한 여운과 완성도를 결정하므로 중요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소설의 중심축이 되고, 중간 내용은 그 안에서 얽혀든다. , 내용이 산으로 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서평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내 경험으로는그리 길지 않지만시작과 결말을 미리 떠올려두면 작성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반대로 일단 써보자식으로 쓰면 먼 길 돌아가는 느낌이다. 나의 능력 부족이겠지만, 어쨌든 처음과 결말이라는 중심축을 정해두고 쓰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또 다른 작가의 가치관은 문학성이다.

 

()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바로 문학의 다양성이에요. 그 자체로 나쁜 문학 장르가 있는 게 아니라, 장르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 따로 있을 뿐이에요.- p.40, 2

 

나는 장르문학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판타지나 추리, 라이트 노벨 등 내가 한때 좋아했던 것들을 멀리하면서부터 생긴 편견이었다. 단순하게 내가 안 본다고, 내가 싫다고 안 좋게 바라본 것이다. 언제나 고전만 옳으며 고전만 읽어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지만, 문제는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는 점. 이해력 미달의 고전독서로 오히려 자가당착에 빠져 독서의 재미를 내려놓기까지 했었다.

 

「〈이해는 각자의 몫이라는 게 제 철학이에요.- p.299, 2

 

웰즈의 말처럼 좋은 책이 나오려면 일단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요,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까. 도입부에서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상할 수 있고, 꿈꿀 수 있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면 장르불문 나쁜 책은 아니지 않을까. 아마도 작가는 나처럼 문학으로 편 가르는 사람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나의 편협한 문학관이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계속 고민하게 되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 좋은 문학, 나쁜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면 독서 역시 좋은 독서, 나쁜 독서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작가로서는 문학성의 다양성을, 독자로서는 독서의 다양성을 지키는 게 일단은 정도(正道)인 듯싶다.

 

살아 있는 자의 삶은 소중한 것

 

지난 서평 중 정유정의 진이, 지니에서 나는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야 누구든 만날 기회가 있고, 무엇이든 할 기회가 있고, 어디든 갈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나오는 사후 세계관으로 상상한다면 역시 살아 있을 때 행복할 기회가 많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영혼 상태는 물질세계에 존재하지만 관여할 수는 없고, 환생하자니 원했던 삶이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이므로 큰 의미가 생기기 않는다. 특별한 영매를 만나 죽은 후에도 가브리엘처럼 생전의 삶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니…… 죽고 나서 심심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을 때 많이 즐겁고 행복해야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독서가 자리하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인정했지만 소설은 거의 안 읽었다. 가지고 있던 편견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역시 살아 있음으로 인해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게 만드는 그의 소설을 접할 수 있었다. 다작가의 소설을 접할 때마다 하는 다짐인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를 또 다짐해본다. (내가 살아 있고, 계속 다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읽겠지.) 동시에 마지막 문장도 되새긴다.

 

나는 왜 태어났지?- p.313, 2

 

P.S 물론 삶도 죽음도 케바케이니 각자의 가치관으로 살고 죽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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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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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삶을 피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자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만큼이나 죽음에 대해 사색한다. 대상은 다양하다. 자신, 부모형제, 배우자, 자녀, 반려동물. 내용 또한 다양하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언제 죽고 싶은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죽은 후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대부분 그 사색의 종착역은 그렇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을 뭉뚱그리면 죽음의 정의에 대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철학인 이상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이 된다. 개인에게 머물 뿐 절대적일 수는 없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p.77) 그렇기에 이 글은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으며 고찰한 나만의 죽음 철학이다.

 

왜 죽느냐는 원초적 의문을 탐색하는 과정은 종교나 과학,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설사 만족할 만한 답을 찾더라도 대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탐색 과정을 뭐라고 부르든, 죽음의 이유에 대한 탐색은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타인의 임종 자리에서 강요해선 안 된다. 세상의 풍파는 함께 겪을지라도 빠져나가는 길은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 p.135

 

죽음을 오독(誤讀)하다

 

나에게 있어 죽음은 숨이 멎는 순간이다. 더 이상 산 사람에게 관여할 수 없고 몸의 처리만 남은 상태. 육신도 정신도 소멸하며 무()로 변환되는 상태. ‘좋은 죽음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지나온 인생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아서는 안 된다. 남더라도 스스로 털어내야 한다. 삶에 대한 집착을 주변 사람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겠지만 해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도리이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나와 연관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면 좋겠고, 나 역시 죽음이 도래했을 때 이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잘못 읽고 있었다. 오로지 철학적 측면에서만 바라봤다. 생각 내에서만 맴돌았으며 현상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괴로워 보이고 겪기 싫고 안쓰럽게 여겨졌다. 건방지게도 전생(全生)으로써의 죽음이 아니라 일면으로써의 죽음으로 판단했다.

 

죽어감

 

좋은 죽음을 규정하기보다는 죽음을 둘러싼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낫다. - p.64

 

이 책의 부제는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이다. 나에게는 정말 실질적 조언으로 다가왔다. 단 한시도 깊이 떠올리지 않았던 죽어감에 대해 관점을 돌리도록 도와주었다.

 

생애는 두 가지 선이 평행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선’. 다른 하나는 우리와 같은 속도로 그어지는 죽음의 선’. 인간은 삶과 죽음을 나란히 두고 살아간다.

  

 

언젠가 삶의 선이나 죽음의 선이 기울어 교점이 생기면 죽음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기울어진 선을 나는 죽어감의 선이라고 이름 지었다. 각도가 넓어질수록, 길이가 길어질수록 죽어가는 시간은 늘어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은 이가 급격히 쇠약해지며 보호자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누가 되었든 힘든 시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 힘겨운 과정을 견뎌내려면 현상을 바라보는 확실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죽음과 죽어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 부정적으로 바라보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치관의 문제는 언제나 실상을 빗나가기 쉽다. 인생의 앞날을 모르듯 그 끝의 앞날 또한 모르는 법이다.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p.96) 하지만 현상으로서 죽음과 죽어감은 다르다. 실질적인 공부를 한다면 당사자도 보호자도 조금이라도 더 후회 없는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에게 배려를

 

우리는 그날을 가능한 한 늦추고 싶어 한다. 엄마나 아빠가 기계에 의지한 채살아 있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다들 우리에게 얼른 결정하라고 다그치지만 우리는 결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전혀 없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 p.175

 

죽음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지만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가능성이 없는데도 가능성을 요구하거나 가능성이 있는데도 가능성을 거절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 빠졌다면 대혼란이 올 것만 같다. 코로 튜브를 꽂아 영양분을 계속 주입하며 강제로 생이 연장되면서 죽어가는 이는 갈증을 호소하고 불편함을 호소하고 괴로움을 호소한다. 바라보는 보호자도 그 모습에 괴로워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저자의 의견에 백번 동의했다. 당사자를 존중하라. 보호자는 중용과 프라이버시, 침묵과 웃음 등 일상생활에서 놓칠 수 있는 온갖 일들의 옹호자요,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p.98) 죽어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이야기를 경청하고 처리하기 힘들어하는 일들을 해줘야 한다. 혼자 있고 싶다면 때론 혼자만의 시간을, 함께 있고 싶다면 같이 잠드는 일도 좋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므로 가능한 한 당사자가 괴롭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보호자가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죽어가는 사람의 갈증 호소일 듯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친할머니께서도 임종 직전 매 순간 갈증을 호소하셨다. 그때마다 고모들은 요양원 간호사를 불러 물을 마시게 해도 되냐 물었지만, 그들은 솜에 적셔 입술에 축여줄 뿐이었다. 나는 단순히 일반인처럼 마실 수 없어 그렇게 하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양원 간호사들은 죽어가는 이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방했던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오히려 더 편안하다. 그들도 때로는 갈증을 느끼지만, 물이나 음료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한다.(p.167) 알면서도 물 적신 솜을 할머니의 입술에 묻혔던 까닭은 보호자들에 대한 배려였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히려 물을 마시지 않아야 더 편안해 질 수 있다. 수분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나의 반성, 그리고 결심

 

독서 후, 나는 한 가지 후회가 생겼다, 친할머니의 죽음과 관련해서. 당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교회와 관련된 일은 빼놓지 않고 다니셨다. 언제나 독서대에 성경을 펼쳐 놓으시고 읽으시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어나셨을 때, 잠드시기 전, 매 식사 전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셨다. 그러나 나는 종교를 싫어해서 당신의 신실함에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따라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종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내가 진정으로 후회하는 행동은 언제나 침상에 누워만 계신 할머니께 성경을 읽어드리지 못한 부분이다. 부끄럽게도 당신을 찾아뵈어 옛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하는 몸을 배배 꼬며 억지로 듣는 척했다. 그 잠깐의 시간을 같이 있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할머니의 죽어감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공부해볼 겸 성경을 낭독해볼 텐데,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할머니의 견해도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이고, 내 지식의 지평도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런 후회를 안고 다른 죽어감을 마주하게 된다면, 또는 내가 죽어감의 선에 올라서게 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탐색하고 내 요구 또한 명징하게 드러낼 것이다. 죽어가는 동안만큼 시간이 소중해질 수 있을까. 나의 직감은 없으리라 단정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대로,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대로 온 에너지를 쏟아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다. 죽어감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그들 모두가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그 죽어감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될 때,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무슨 말이 필요치 않다. 환자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p.204)

 

죽음을 숙고하는 것은 실제로 저항을 숙고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을 준비가 될까? 우리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 두려움을 오래, 아주 오래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 즉 우리 모두 미래의 시신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 p.60

 

죽음을 정독하려면 죽음에만 매몰되어선 안 된다. 죽어감 역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육신이 영원히 멈추는 그 순간까지 사색은 멈출 수 없다. 삶에 대한 고민을 살아있을 때 한다고 죽음과 죽어감의 고민을 죽었을 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을 여기저기 권하려고 한다. 철학적인 고민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현상에 관한 고찰은 보편적인 영역이니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언제 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맞이할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누구나 예약된 시신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시신이 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 행운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내가 감동한 문학적인 문장들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 p.160

 

일본어 조오지(じょうじ)’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p.176

 

애통(grief)은 바로 ,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 p.267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 p.292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 p.160

일본어 ‘조오지(じょうじ)’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p.176

애통(grief)은 바로 ‘어,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 p.267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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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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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흔히 베일에 싸였다라고 표현한다. 비밀스러움에 대한 비유이다.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의 원제는 The Painted Veil, 퍼시 비시 셀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 첫 구절에서 따왔다.

 

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 일러두기

 

책 도입부에는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 오색 역시 많은 색에 대한 비유로, 인생의 비밀스러운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님을 말한다. 우리는 painted veil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 베일을 통해서 세상을 판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베일은 인생을 가리는 베일이 무엇인지 찾는 여정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여성인 키티는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상대 홍콩 총독부 차관보 찰스와 불륜을 저지르다 자신의 남편 월터에게 들키고, 그 대가로 콜레라로 인한 죽음의 도시 메이탄푸로 함께 간다. 그곳에서 세관원 워딩턴과 그의 만주족 여인, 위험을 무릅쓰고 진심으로 봉사하는 수녀원장과 수녀들, 경이로운 자연경관, 자신이 임신한 사실, 그리고 월터의 환자를 향한 헌신과 그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다. 메이탄푸에서 홍콩으로 돌아와 찰스의 유혹에 한 번 더 넘어가지만, 그에 대한 성찰을 통해 내면을 더 공고히 다진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동생을 가엾게 여긴다. 더 이상 외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키티의 베일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서 가치관을 형성한다. 가치관은 베일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결정한다. 키티의 베일은 메이탄푸 가기 전과 메이탄푸 도착 후, 그리고 돌아온 후로 나뉜다.

 

메이탄푸 가기 전

 

그래서 앞으로 일이 년 후면 딸의 아름다움도 빛바랠 것이며 젊은 여자들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딸에게 상기시켰다. 가스틴 부인은 집안에서 말을 에둘러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곧 결혼 시장에서 값이 떨어질 거라고 딸에게 일침을 가했다. - p.39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남편을 닦달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 한 어머니와 그 채근에 지쳐 무기력하게 돈만 벌어오는 역할의 아버지였다. 못생긴 동생 도리스와 비교해 어머니의 후원을 듬뿍 받은 키티는 이기심과 허영심이 가득하게 자랐다. 동생의 결혼 들러리가 되기 싫어 자신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월터와 황급히 결혼해 조급함을 회피하긴 했지만, 허영심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그녀는 월터와의 결혼 생활에 금세 질렸다. 월터는 세균학자로, 사회적 명망이 거의 없는 직업이었고 게다가 내향적인 성격이라 키티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행동에도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찰스는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키티에게 있어 남자의 위신은 곧 자신의 체면이었고, 결혼은 그것을 이룰 수단이었다. 월터는 그에 부합하지 못했고, 찰스는 딱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월터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끔 그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그녀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어떤 모욕이라도 감내할 각오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찰스를 향해 느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쭐함이 전율처럼 그녀의 몸에 퍼지는 동시에 그렇게 굴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희미한 혐오감 또한 솟아났다. - p.82

 

이기심에서 발로한 가치관은 모든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기 마련이다. 키티와 찰스의 불륜을 알게 된 월터는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에게 메이탄푸로 같이 가기를 제안한다. 그곳은 콜레라로 인해 죽음이 만연한 도시였다. 키티가 당연히 거절하자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단다. 키티가 찰스의 이혼 서류를 가져오면 자신도 그녀와 이혼하고 메이탄푸에는 혼자 가겠다는 것이다. 자살 행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키티는 찰스에게 급히 달려가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감이었다. 키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찰스는 이혼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의 아내 도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키티는 체념하고 월터와 메이탄푸로 떠난다. 그러면서도 찰스에 대한 애정은 접히지 않았다.

 

메이탄푸 도착 후

 

메이탄푸에서 키티는 해 뜨기 직전의 경관으로부터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처음으로 시체를 보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예컨대 세관원으로 있는 워딩턴과 가문을 뒤로하고 수녀가 되어 자발적으로 죽음의 땅에 온 수녀원장과 그녀를 따르는 수녀들, 역시 가문을 버리고 워딩턴에게 헌신하는 만주족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월터의 환자를 향한 헌신을 극찬하면서 키티의 가치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 p.205

 

경이로운 자연과 목격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그들의 감정싸움이 덧없게 느껴졌다. 월터와 화해하고 싶었지만, 그가 받아들이리라고 생각이 들지 않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임신에 대해 월터가 자신의 아이냐고 물었을 때, 키티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모르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의 이기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월터에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를 이해했다. 그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p.183) 월터가 콜레라로 인해 숨을 거두자 워딩턴과 수녀원장의 제안으로 메이탄푸를 떠난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 p.282

 

메이탄푸 떠난 후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 p.329

 

홍콩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키티는 찰스의 아내 도로시 타운센드를 만난다. 불편한 마음에 도로시의 호의를 거절하려 하지만,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 마지못해 도로시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키티와 찰스는 재회한다. 그녀는 찰스를 멀리 대하려 하지만 그의 집요함에 또다시 굴복한 자신을 책망한다. 스스로를 돼지라고 하면서. 다음 날 키티는 홍콩을 떠날 채비를 하며 찰스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당신은 정말이지 허영 덩어리에다가 바보천치, 내 인생에 닥친 커다란 불운이에요.”(p.312) 영국으로 가는 도중 키티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집에 도착해 바라본 죽은 어머니에게서 그녀는 깊은 애정은 느끼지 못하고 무가치한 것에 집착한 당신을 불쌍하게 여긴다. 자신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을 못생겼다는 이유로 등한시한 과거를 미안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어머니에게서 해방된 아버지의 체념 어린 태도에서 가슴 시림을 느낀다. 그녀는 지방 법관으로 발령된 아버지와 동행하기를 희망한다.

 

그녀는 딸이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딸이 저지르지 않도록 키우고 싶어 한다. 그저 어떤 남자의 연인으로서의 여자가 아닌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여인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키티는 과거를 묻고 희망과 용기로 나아가기를 결심한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p.329)이기 때문이다.

 

키티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이 가진 베일을 걸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선은 사상이 될 수도, 편견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걷어내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베일의 종류를 바꿀 수는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내면을 살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성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언제나 누구든 실수하고 잘못하고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반성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다시 그렇게 행동하는 베일이 될 것이고, 반성한다면 그런 행동을 지양하는 베일이 생길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나의 내면에 베일을 씌우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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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공부법 - 모든 공부의 최고의 지침서
고영성.신영준 지음 / 로크미디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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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책이 있다.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해준 책 말이다. 디테일한 개념은 각자 다르겠지만, 대부분 그 책으로 인해 지나온 나날과 살아가는 나날, 그리고 남은 나날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치거나 힘들면 인생책을 펼쳐보게 된다. 나에게는 그런 책이 두 권 있다. 문학에서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이고, 비문학에서는 단연 완벽한 공부법(이하 완공)이다. 전자가 꿈에 대한 희망을 심어줬다면, 후자는 그 희망에 대한 믿음과 실천 방법을 알려줬다.

 

완공을 처음 접한 건 올해 2월 초였다. 신박사의 영상을 보고 게임을 접었다. 그 후 독서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잘못된 독서를 했다는 신박사의 말과 6개월(빡겜)간 책을 멀리했던 두려움 때문에 손대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방황하던 중 영상에서 완공을 언급했다. 바로 중고서점에서 구매해 와 읽었다. 일독 후 두려움이 서서히 가셨다. 더딘 속도로 조금씩 독서량을 늘려갔다. 3월부터 게임 시간이 독서 시간으로 바뀌었다. 내가 스스로 구멍 내던 삶은 완공으로 짜깁기를 시작했다.

 

이 책은 공부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를 묶은 공부 개론서이다. 체계적인 자신만의 공부법이 없다면 참고서로 탁월하다. 14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내 변화의 계기가 된 챕터 몇 가지만 써보고자 한다. 전부 다루면 좋겠지만, 나에게 가장 많이 도움 된 세 챕터를 골랐다. 지극히 주관적인 선택으로, 이 부분부터 공략하면 나머지를 익히는데 수월하리라 믿는다세 챕터는 <믿음>, <메타인지>, <환경>이다.

 

믿음: 자신(自身)을 자신(自信)으로

 

완공을 만나기 전,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비관적이었고, 모두를 불신했으며, 내게 재능이 없음을 한탄했다. 마음은 해야지하면서도 몸은 해봤자 뭐 되겠냐하며 노는 쪽을 택했다. 중학교 3학년부터 소설가를 꿈꿨지만, 언제나 조금 쓰고 지쳐 포기했다. 잦은 포기는 무기력으로 학습되었다. 대학 1학년, 동화 창작 과제를 했으나 돌아온 것은 이건 글이 아니다라는 교수의 혹평이었다. 그 한마디에 우울증까지 겪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로 간신히 회복한 후, 펑크난 학점을 메우기 위해 1년을 더2년제를 3다녔다.

 

재수강 기간에 만난 시학 교수가 내 시를 응원해주었다. 나는 잠시 시로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입대를 하면서 그 교수와 연락이 끊겼다. 제대 후 2년간 도전해봤지만 터무니없는 실력으로는 결과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나름 심혈을 기울였던 터라 자체 번아웃(burnout)으로 또다시 포기를 선언했다. 18년도 상반기는 집안 사정으로 바빴고, 후반기는 게임으로 보냈다. 여기까지가 부끄러운 나의 과거다.

 

정리하면, 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었고, 고정형 사고방식에 자기효능감도 바닥이었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전복시켰을까. 먼저 미래에 대한 기대는 유튜브 채널 <뼈아대><완공 특강>으로 고쳤다. 교수의 한마디는 나를 절망시켰지만, 고작가의 한마디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18시간 동안 게임 하는 거 쉽지 않다.” 나 역시 하루 평균 16시간 동안 게임 했다. 기대는 강점을 먹고 자란다.(p.25) 장시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나의 강점이었다. 이 시간을 독서에 투자한다면 뭐가 달라도 달라질 것이었다. 기대할 만한 미래가 생겼다.

 

사고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내 사고방식이었던 고정형 사고방식은 지능, 성격, 재능 등은 타고나는 요소라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반대로 성장형 사고방식은 노력만 한다면 모든 요소가 변한다고 믿는다. 전자는 실패, 비판, 고난, 시련 등을 한계로 받아들이는 반면, 후자는 성장의 자양분으로 여긴다. 모든 면에서 고정형 사고방식과 성장형 사고방식은 대척점에 있다. 고정형에서 성장형으로 넘어가는 것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다. 동시에 가장 희망차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뀌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성장형 사고방식의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책에서 제시한 성장형 사고방식 형성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뇌의 가소성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뇌는 부지런히 쓰면 쓸수록 신경 간의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내며 성장한다.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고 한다.(p.32) 나는 과학적 근거는 잘 믿는 편이라 , 이런 게 있었어?’하며 쉽게 믿었다. 실패에 대한 개념은 사실 힘들었다. 자기방어기제(회피, 포기, 합리화)가 쉴 새 없이 발현했다. 아마 장시간 고정형 사고방식이었던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가장 힘들어하지 않을까. 나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단 인정했다. 그 후 그럴 수도 있지”, “할 수 있다”, “개선해보자등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항상 성장두 음절을 되뇌었다. 아직 완전한 성장형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많이 완화돼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짧아졌다. 요즘은 성장대신 졸꾸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기효능감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승했다. 성장형 사고방식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500여 쪽의 완공을 읽고, 목숨 걸었던 게임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하찮았던 내 자신이 쓸모 있다고 느껴졌다. ‘나도 가능하잖아?’ 성장하겠다는 다짐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 나를 그 방향으로 이끌었다.

 

메타인지: 모르는 것을 모름을 알다

 

메타는 about(~에 대하여)의 그리스어 표현으로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 과정에 관한 인지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낼 것인지에 대해 아는 능력인 셈이다. - p.57

 

이 책에서 하이라이트이자 충격적인 챕터는 단연 <메타인지>이다. 메타인지가 낮으면 공부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들다. 나의 메타인지는 인생의 바닥에 닿은 것도 모자라 구멍 뚫는 중이었다. 여기서 안다는 어떠한 개념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영역과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영역이고, ‘모른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어설피 아는, 이른바 까지 포함하는 영역이다. 나는 모른다안다로 과신했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의 낮은 메타인지가 벌인 일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아는 척을 정말 열심히 했다. 예를 들면, 책의 저자 소개를 읽고 마치 그에 대해서 다 아는 듯이 말하기, 책의 내용 그대로 인용하면서 내 생각인 양 말하기, 상대방 의견 묵살하기 등등. 내가 모르는 부분은 철저히 배제하며 말꼬리를 잡으려 애썼다. 당연히 모르기 때문에 논리에서 개박살났고 그 사람과는 연을 끊었다. <목표> 챕터에 증명목표라는 것이 나온다. 보여주기식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고정형 사고방식과 낮은 메타인지가 콜라보하면 발생한다. 증명목표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애쓰게 되고, 포장지가 떨어졌을 때 조급함과 불안함을 느낀다. 점점 자기파괴적 스트레스에 갇혀 현상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둘째, 현상 회피에 집중하니 공부와 독서의 개념이 이상해졌다. 나는 수학과 영어의 기초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중고딩 때, 영어는 진즉 포기했다. 모르는 단어를 익히기보다 뉴스에서 비판하는 영어 사교육에 매몰되어 더러운 세상! 어차피 나는 해도 안 된다, 때려치자!’ 생각하며 쳐다도 안 봤다. 수학은 자존심만 남아 각 학년에 맞는 문제집을 선택했다. 있어 보이려고 수학의 정석도 샀다. 그러나 중딩 때는 집합만, 고딩 때는 지수와 로그만 펼치다 그만뒀다. 독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설가가 꿈인 고정형 사고방식 소년은 창작론이나 작문법 따윈 필요 없다며 소설, 그것도 판타지장르만 깨작깨작 봤다. 대학생 때도 읽는 게 아니라 보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책을 읽잖아?’하는 안도감에 도취된 까닭이다.

 

마지막 셋째, 시간의 경중이 뒤집혔다. 시험 기간, 3, 과제, 연애, 그리고 게임. 앞의 4가지와 뒤 1가지 중 어떤 게 중요할까. 학창 시절, 시험 기간은 나에게 있어 자유 시간이었다. 시험공부 대신 게임공부를 했다. 당시 <서든 어택>이라는 게임이 유행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라이플 점사를 잘할지, 클랜전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다(어휴, 나새끼……). 3 때는 수능 100일 전까지 RPG 게임에 몰두했다. 과제는 마음에 드는 강의만 골라서 하고, 나머지는 게임에. 1년 연애 중 데이트 시간보다 게임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최근의 게임 중독까지. 아무튼, 일련의 사건들이 전부 낮은 메타인지 덕분이었다.

 

알았음에도 방치하는 것도 낮은 메타인지가 하는 일이다. 나는 메타인지를 높이고 싶었고, 이 녀석이 더 많은 구멍을 내기 전에 막아야 했다. 내 마음가짐이나 의지력은 믿지 않았다. 고정형 사고방식에 고마운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이 부분이다. 무엇이든 의지력으로 해결하려 한 덕분에 더는 내 의지를 믿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높일 수 있을지 고심하던 차에, <믿음><메타인지>와 함께 티키타카를 한 스트라이커는 <환경> 챕터였다.

 

환경: 강제성과 의지의 선순환

 

결심보다 강력한 것은 바로 환경이다. - p.323, 신박사의 통찰

 

나는 게임보다 독서가 하고 싶었고, 글을 쓰고 싶었고, 궁극적으로 메타인지를 높이고 싶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데일리 리포트(이하 DR)’였다. 일단 내가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지 알아야 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내 의지를 불신했다. 쓰자는 마음으론 안 쓸 게 분명했다. 그래서 핸드폰 알람을 기상 시간부터 취침 전까지 1시간마다 울리도록 맞췄다. 몇 시간 안 쓰더라도 머릿속에 ‘DR을 써야 해가 맴돌게끔 설정했다.

 

그리고 초강수를 둬서 게임의 아이템을 싹 정리했다. 내가 빠져있던 게임은 RPG 장르였기 때문에 장비가 없으면 실질적 플레이가 어려웠다. 모든 아이템을 팔고 생긴 돈으로 <체인지 그라운드> 추천도서를 구매했다. DR 기록을 위해 의식적으로 독서 했다. 다독 콤플렉스를 가지고 읽은 책을 기록했다. 기록 수가 하나씩 늘어가니 더 늘리기 위해 책을 읽었다.

 

자신 스스로 데드라인을 만들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기한 내에 성공하면 자신에게 보상을 주거나 실패하면 벌금을 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친구끼리 약속을 해도 좋고 주변에 공표해도 좋다. 만약 스스로 데드라인을 정하고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공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 p.313

 

4월부터는 서평도 쓰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최소 서평 한 편이라는 자체 데드라인을 두었다. 책상 앞에 결심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매일 봤다. 내 오랜 꿈을 위한 소설 쓰기는 습작 시작할 때 하루 A4 1쪽 쓰기로 설정했다. 만약 1쪽 쓸 시간이 없었다면 유연하게 조정해 5줄을 최소로 잡았다. 어떻게든 안 쓰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쓴 날은 달력에 표시했다. 작은 성공을 위한 환경설정이었다. 집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져 도서관으로 습작 장소를 옮겼다. 동시에 내가 서평과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렸다. 지금 서평에 개인사를 밝히는 이유도 환경설정의 일부이다.

 

그렇게 해서 25, 314, 412, 513, 44권을 읽었고, 서평은 4, 5월 합해서 12, 단편소설은 2편을 썼다. 아직 멀었지만, 작은 목표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환경설정을 통해 나는 강제하는 환경이 의지를 만들고, 의지가 다시 환경을 설정하는 선순환을 느꼈다. 요즘은 디지털 미니멀리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디지털 미니멀리즘을 위한 환경을 조성 중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는 SNS 앱과 웹툰 앱을 삭제했고, 유튜브는 책 읽기 어려운 상황에서만 보는 것으로 한정했다. 글 쓸 때는 노트북을 비행기모드로 바꾼다. 이제 스마트폰도 멀리 두는 습관도 형성해야겠다.

 

쓰고 보니 내용이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공부가 단순히 지식 학습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공부를 지속적인 성장이라고 정의하면, 나는 완벽한 공부법을 익히는 중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며칠 전, 완공이 짜깁기 책이라는 소리를 듣고 재독했다. 다시 읽어보니 짜깁기가 맞았다. 다만 그 대상은 책 내용이 아니라 구멍 숭숭 난 내 넝마주이 인생이었다. 이 책은 내 구멍투성이 믿음, 메타인지, 목표, 동기 등등 모든 부분에 걸맞은 지식을 짜서 기워줬다. 아마 완공으로부터 도움받지 못했다면 두 가지 부류가 아닐까 섣부른 일반화를 해본다. 하나는 구멍 없는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에 구멍이 난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 전자라면 축복이고, 후자라면……그저 응원한다.

 

언제까지나 내 삶은 완벽한 공부법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이제야 살아있음이 즐겁다. 직업을 갖기 전에 새로운 몸가짐 마음가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새로운 분야의 공부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 독서심리상담에 도전했다. 만약 공부에 의문이 든다면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쳐보리라 감히 예단한다. 나의 업을 찾을 때까지 목숨 걸고 독서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로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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