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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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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가엾게 여긴다. 제일 안타깝고, 제일 불쌍하고, 제일 억울하다. 또 나는 나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게 여긴다. 제일 멍청하고, 제일 무능하고, 제일 답답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태도로 문학을 읽는다. 문학은 대체로 이런 이중적인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 있으니 읽는 책마다 내 얘기 같아 주인공과 상황에 나 자신을 곧잘 투영한다. 주인공은 인간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니 여기에 공감하는 내 모습은 가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지하 인간처럼.

 

소설 속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하 인간은 젊은 시절 속세에 질려 지하로 물러난 인물이다. 그는 지하에서 일명 모두 까기를 시전하며 여러분은 멍청하고 자신은 합리적이라고 합리화하며 지낸다. 전면에 나서면 비웃음당할 것이 뻔하니 그곳에서 글로써 세상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1부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하에서 쓴 이야기이고, 2부는 그가 어째서 지하생활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풀어낸다.

 

내가 그와 동일시한 부분은 상당히 찌질하다는 점이다. 아싸의 특징은 다 가지고 있다. 자기만 잘났고 다른 사람은 무시해도 그만인 수준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무시하는 타인에게 멸시당한다. 그는 속으로 복수를 생각한다. ‘이런이런 상황에서 나는 저런저런 행동을 할 거야!’ 생각은 아주 논리정연하고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문제는 생각에서 그친다는 것뿐.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겁도 나고 걱정도 된다. 그래서 그는 다시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너희가 가여우니 이번만 참아 준다. 다음부터는 내가 어울리나 봐라.’ 그 후 그는 타인들과 어떻게든 어울리고 싶어하고 이 생각의 고리는 반복된다. 전형적인 아싸가 인싸와 어울리고 싶어하는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태도는 젊을 적 모습일 뿐이다. 지하생활자가 된 후, 여전히 젊은 시절의 분노와 열등감을 지니고는 있지만, 사상은 진화했다. 그는 세상을 복잡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여러분2x2=4라는 사실에 집중하고, 세상은 수학적이라며 단언할지 모르지만, 지하 인간이 보기에 인간이란 족속은 일관성이 없어서 2x2=4와 같은 답을 항상 가져오지 못한다. 그렇기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므로, 2x2=4처럼 답이 있는 공식화는 살아가는 게 아닌 죽어가는 일이 된다.

 

「그리고 누가 알겠느냐마는 (장담할 순 없으니까.) 인류가 지향하는 지상의 모든 목적은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한 이 끊임없는 과정에, 달리 말해 삶 자체에 있는 것이지, 어차피 2x2=4가 될 수밖에 없는 목적 자체에, 즉 공식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2x2=4는 이미 삶이 아니라, 여러분, 죽음의 시작이 아닌가. - p.56」

 

그의 찌질한 젊은 시절과 복잡계적 시선이 무슨 상관인가. 갖다 붙이기 나름이겠으나 젊은 시절 그의 찌질함은 표면적인 부분이고, 그의 모습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지 않다. 생각이나 감정이 마음대로 조종이 되던가? ‘변덕이 죽 끓듯 한다거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인간 속내의 알 수 없음을 비하하는 표현이지만, 지금은 정답으로 여겨지는 말들이다.

 

젊은 시절 그는 인간의 본성 그대로 표현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관성과 정답을 지향하는 세계에서 그의 변덕은 수치스러운 행위였기에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거나 내뱉은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괴로워했고 외로워졌다. 보편적인 시선에 어긋난 그가 대화할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친구 잡으러 갔던 유곽에서 리자를 만났다. 처음에 그는 그녀를 골려줄(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배려였던) 작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쏟아냈다. 아무도 그를 의지하거나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으나 리자는 예외였다. 그는 신이 나서 그녀를 자신의 집까지 초대했다. 다음날 자신의 섣부른 결정에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하인과 싸운 도중에 리자가 찾아왔고,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와 그녀를 속였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이번에는 몹쓸 말을 내뱉어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 리자는 슬픔에 잠긴 채 그의 집을 떠나고, 그는 뒤늦게 후회하며 쫓아가지만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이 또한 공식화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불러온 결과였다.

 

적어도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인 듯하다. 생각으로는 굉장히 이성적이지만, 감정에 휘둘려 당치도 않은 말로 기회를 날려버린다. 혹은 자존심으로 인해 기회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변덕이나 갈등이 없다면 성장하기란 불가능하다. 변덕을 부정하고 일관성을 옹호하기보다, 차라리 변덕을 인정하고 반성해 변덕의 폭을 좁히는 게 더욱 살아있는 결정이리라.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 모두 삶으로부터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할 것 없이 다 절뚝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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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데미안을 읽으면서 느낀 점인데, 읽는 문학마다 현재 나의 감정을 대변해준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문학을 읽는 것일까. 한때는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등한시했다. 지금은 도피 차원에서 문학을 읽고 있다. 뭐로 보나 진지하게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세상 살아감에 있어 기술만으로 살 수 없고, 이성만으로 살 수 없으니 정신에 지지대를 세워주기에는 문학이 가장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게 아닌가. 물론 이 생각도 지하 인간의 말처럼 언제 또 변해 문학을 등한시할지 모르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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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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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음식이 갑자기 생각날 때는 그것이 함유한 영양분을 우리 몸이 필요로 한다는 설이 있다. 어느 날 평소에는 찾지 않던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지면 그 음식 속 영양분이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내가 데미안을 손에 집었을 때가 꼭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꽤 오랜 시간 멀리했다가 다시 친해지고자 집에 쟁여둔 세계문학전집(민음사)을 하나씩 읽기로 마음먹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그 첫 번째였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제목을 하도 들어서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 TV 프로그램에서도 소개되어 더욱 익숙했다. 친숙하지만 전혀 모르는 이 책은 독서 구미를 당겼다. 그리고 뒤늦게 읽은 나 자신이 조금 안타까웠다. 딱 나에게 필요한 내용이었으므로.

 

간략한 줄거리로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단면만을 가르치는 반쪽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인식하면서 세상의 격정을 버티고 사랑을 배우며 주체적인 자아가 되는 성장소설이다. 그의 모든 각성은 데미안으로 시작되어 데미안으로 지속하며 데미안으로 마감한다.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 p.83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대체로 이분법적으로 학생을 구분했다.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 모범생과 문제아, 인싸와 아싸 등등. 중간지대가 없었다. 이런 구분은 어릴 적 나를 가르친 말들에서도 존재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착한 짓과 나쁜 짓, 깨끗함과 더러움, 말을 잘 듣느냐 안 듣느냐……. 어린 싱클레어가 어렴풋이 느낀 환한 세계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두 세계는 경계가 맞닿아 있으면서도 경계가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다른 한쪽을 말살하려 든다. ‘환한 세계에 있지 않으면 다른 세계의 존재이며, ‘환한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반대도 마찬가지.

 

나에게 있어 세계의 구분은 나 자신을 규정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현실을 영어 가능영어 불가능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고 치자. 나는 영어를 바라지만 불가능에 있으므로 항상 가능을 보며 절망하고 괴로워한다. 발버둥은 쳐보지만 이내 지쳐버리고 심화된 불가능으로 나를 몰아댄다. 결국, ‘영어 가능세계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우스꽝스럽지만, 이런 예는 내 삶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세상이 요구하는 삶을 따르지 못해 여태껏 나를 망치며 지내왔다.

 

그러나 데미안의 말대로 세계를 구분이 아닌 온전한 하나로 인식하면 나의 삶에서 잘못된 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달이 앞면만 보인다고 뒷면을 부정할 수 없듯이, 내가 보는 세계의 앞면만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p.85)’기에 내가 따를 수 없는 세계를 떠올리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 p.116

 

무가치함에서 벗어나 보다 온전한 자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건재한다. 산다는 것은 행동의 문제이고, 가능성은 행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행동반경에는 세계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다. 방황 속에서 목표를 이룩하기 마련이고, 이룩한 결과는 다시 방황의 씨앗이 된다. 이는 합일의 단계이기도 하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정신일도 하사불성(情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환한 세계다른 세계를 하나로 합하여 인식해야 비로소 자아는 굳건해질 준비를 마치게 된다.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꿈틀대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p.123

 

알에서 나오지 않은 새는 새가 아니다. 알 속에서 아무리 새의 형상을 갖추었다 한들 날아오르지 못한다면 과연 새라고 할 수 있을까. 상식이 아니라 본질에서 말이다. 알은 새를 규정한다. 진정한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나와 훨훨 날아가야 한다. 신에게로, 압락사스에게로.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를 규정하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싱클레어는 이렇게 정의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 p.172

 

압락사스는 세계를 구분 짓는 신이 아니다. 세계 그 자체인 신이고, 어떠한 가능성도 받아들이는 신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자신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주는 신이다. 한마디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앞서 근거 없는 설을 언급한 까닭이 여기 있다.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필요했다. 실리적 목표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신적 버팀목이랄까. 그동안 나는 구분된 세계에 맞춰서 나를 재단하고 조립하려고 했다. 맞지 않는 퍼즐에 억지로 끼워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살아가는 일이라고들 하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가 알 속의 새로 사는 세계에서는, 하나하나가 구분 지어지는 세계에서는 규정된 채로 사는 게 맞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고독도, 고통도 감내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해요. 그러면 길은 쉬워지지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 p.191

 

마지막으로 에바 부인이 과정의 고됨을 하소연하는 싱클레어에게 말했듯이, 지향하는 꿈이 전부라고 집착하거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알을 둘러싸는 일이다. 새 꿈이 생기면 다시 둘러싸려는 알을 깨부수고 날아가야 한다. 결국, 살아가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기 위해 끊임없는 세계와의 투쟁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함의 속성이 빠른 망각임을 감안하면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핵심이다.

 

아직 나는 알 속의 새다. 그리고 어제까지 나는 알 속이 안전하다고 여겼다. 깨부술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알이,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내 괴로움의 근간이었다. 아마도 내 괴로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부서질 알이라면 애초에 둘러싸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는 사소하나마 깨뜨리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싱클레어처럼 내가 새로 태어나려는 일은 어렵겠지만, 에바 부인 말대로 내가 충실할 꿈을 찾는다면 길은 쉬워지리라. 그 여정의 첫걸음을 떼었다고 감히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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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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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르소설에 대한 편견이 있다. 중고딩 시절의 전부를 만화, 애니메이션, 판타지 소설로 가득 채웠으면서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단순히 취미와 쾌락을 채우는 장난감쯤으로 치부했다.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 요네스 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에서 내가 뭘 배우거나 깨달은 것 따윈 없었다. '그냥 심심함을 달래줘서 좋았고 재밌었다' 정도만 느꼈을 뿐이다. 사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집도 그런 이유에서 구매한 책이었다. 작년인가, 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기대평을 남기는 것을 보고 혹한 것도 있었다. 얼마나 재밌길래? 그러나 중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기에 남는 시간에 깔짝대며 읽기로 했다.

 

바빌론의 탑

 

첫 번째 소설인 바빌론의 탑까지만 해도 내 생각은 변함없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국이었던 바빌론에서 쌓았던 탑을 주제로,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닌 신에 대한 만남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하늘까지 닿은 탑은 천장 바닥을 뚫고 신의 세계로 도달하려 한다. 탑과 천장 사이의 공간을 뚫던 도중, 홍수와도 같은 물을 만나게 되고 탑이 문을 닫는 바람에 주인공 힐라룸은 탑과 천상 사이에 갇히고 만다. 캄캄한 어둠을 더듬거려 결국 그 공간을 탈출한 그의 눈에 밝은 빛이 비친다. 신의 세계인가. 아니, 돌아온 시각에는 그가 고대하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상인에게 힐라룸은 여기가 어딘지 묻고, 바빌론으로 향하는 길임을 듣게 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반전 요소라 말해줄 순 없다.

 

아무튼, 발상이 새롭고 재밌긴 했지만 매력적이진 않았다. 이미 편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봤기 때문이다. 심심풀이로 읽기 부담 없겠다 싶어 다른 책 읽으면서 휴식용 책으로 빼놓았다. 시간이 남으면 읽기로. 예상했겠지만, 이 생각은 어김없이 박살 났다.

 

이해

 

적어도 책의 두 번째 소설인 이해는 읽고 판단했어야 했다. 나는 지적 욕심이 많고, 뇌과학도 좋아한다. 가끔 완전한 이성을 가지고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해는 그런 나의 관심사를 한 번에 휘어잡았을뿐더러 최고의 몰입감까지 선사했다.

 

''는 뇌를 다쳐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였지만, 특수 호르몬제로 인해 손상된 뇌가 회복되면서 깨어난다. 어느 날, 통화와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뇌가 비상식적으로 발달했음을 안 것이다. 그 원인은 호르몬제에 있었다. ''는 병원의 실험에 응하는 척하면서 호르몬제를 추가로 맞는다. 뇌가 더 고효율을 보이자 ''는 병원을 따돌려 단독 행동에 돌입한다. FBI가 그를 추적하지만, 그는 그들을 훨씬 상회하는 지적 능력으로 떼어내는데 성공한다. 이제 오로지 자신의 지적 능력 강화에 힘을 쏟는다. 그러던 중 자신의 증권 계좌가 인위적으로 공격받는다. 자신처럼 뇌가 강화된 존재가 하나 더 있음을 인지하고, 차차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처지임을 알게 되어 ''는 그 녀석을 없애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는 ''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였다. 도리어 그에게 공격받고 ''의 정신이 붕괴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나의 글쓰기 능력이 한참 모자라 줄거리로는 내가 겪은 몰입감을 전달할 수 없다. 양해 바란다. 내가 이 책을 잘못 판단했음은 한밤중에 읽으며 깨달았다. 졸렸음에도 책을 덮기 싫어 조금만 더 참자, 되뇌며 읽었다. 다음 소설의 제목에 도착해서야 홀가분하게 책을 덮었다. 다음 날부터 이 책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다. 한 번 펼치면 쉽게 덮을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

 

네 인생의 이야기

 

헵타포드라 명명한 외계인으로부터 언어학자인 ''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딸을 위한 문장을 헵타포드 식으로 서술하는 이야기다. 언어를 배우는 현실과 딸을 위한 문장이 교차로 나오다, 마지막에는 현실 속에서 사고하는 과정으로 합쳐지며 헵타포드 식 문장이 현실과 별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현실 속에 묻어있는 미래임을 암시한다.

 

네 번째 소설이자 표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표제도 ''로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의 대접받고 싶은 심리를 반영해서 인지 '당신'으로 존칭해줬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닌데, '당신'을 보고 들어와 ''로 지칭되니 어색한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재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니까 넘어가자.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문화에 따라 사고방식이 다르다. 같은 사진을 영어권과 한자권의 사람에게 보여줬을 때, 전자는 부분에 집중하고, 후자는 전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실험이 생각났다. ''가 딸을 위한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헵타포드 식 언어를 익히면서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저자는 물리학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역시 모든 학문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SF 소설

 

이 외에도 5편의 소설이 있다. 전부 재밌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몰입해서 읽은 두 편을 가져왔다. (첫 번째는 나를 까기 위해서였다.)

 

SF라고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뿌슝빠슝하는 종류의 액션 영화와 소설들이다. 간혹 인터스텔라마션같은 것도 있지만, 주로 액션 쪽이 자주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SF라는 장르에 편견이 있었는지도. 공상 과학(Science Fiction)은 말 그대로 과학적 상상력을 풀어낸 작품을 말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테드 창이 아닐까 한다. SF 끈이 짧아서 확신은 못하지만.

 

이 책 하나 읽었다고 모든 장르소설을 받아들일 만큼 나의 그릇은 크지 않다. 아니, SF마저도 팍팍 읽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넘쳐나지 않고. 여전히 휴식의 용도로 읽을 테지. 다만, 무작정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할 것 같다. 적어도 테드 창 소설은 가리지 않고 볼 예정이다. 조만간 도 사서 읽어야겠다. 올여름이 오기 전에 먼저 시원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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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 2020-03-30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편 제목은 네(딸) 인생 이야기(Story of your life)이지만, 책 제목은 Stories of your life로 단편 제목과는 달라서, 딸이 아니라 ‘당신(독자)의 이야기들‘이라네요. 작품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다름아닌 당신의 이야기라는 깊은 뜻...

찐새 2020-03-30 21:1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영어를 잘 몰라서 오해했네요, 제가 ㅎㅎ;;
올바른 정보 감사합니다!
 
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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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나의 몇 안 되는 절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친한 사이끼리는 으레 그렇듯이 우리도 만날 때마다 속에 담은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그러나 늘 친구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보지 못한 기간 동안 바뀐 친구의 생각이나 전혀 들려주지 않았던 과거사까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속에 담긴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한 예가 아닐까 한다.

 

사람 속을 모르는 것은 비단 타인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 듯하다. 나조차도 내 속마음을 모를 때가 참 많다. 마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난 뒤 곱씹지 않고서야 순간순간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특히 낯선 사람들을 이제 막 만나는 나이대라면 더 그럴 것이다. 작중 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인물조차도 어리숙했던 때에 다잡지 못한 마음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소설은 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생님(1)과 부모님(2)의 이야기와 선생님이 에게 보내는 유서(3)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선생님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생기는 의 마음, 그리고 숨겨두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편지로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순수함, 혹은 어리석음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금에야 비로소 그걸 깨달았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이따금 내게 보여준 쌀쌀맞은 인사나 냉담해 보이는 행동은 나를 멀리하려는 불쾌감의 표현이 아니었다.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 같다. - p.24~25

 

많은 나쁜 행동이 있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아무래도 의도성이 없는 나쁨이리라. 예를 들면, 5살짜리 동생이 내가 아끼는 책에 낙서하고 찢어 놓았다면 내 속은 끓겠지만 그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그 녀석에게는 나를 화나게 만들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는 선생님의 초연한 태도에 호기심을 느꼈고 자주 왕래함에 따라 간혹 질문을 던졌다. 그중에서 선생님을 당황하게 한 것은 그의 뒤를 쫓은 일이었다.

 

선생님은 매달 친구의 묘를 찾아갔다. ‘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 행동은 선생님이 가진 죄의식을 건드는 행위였다. 그의 초연함은 과거사로부터 용서를 구하며 마주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마주하는 순간,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에게는 의도성이 전혀 없었지만 선생님에게 극단적 결심의 단초를 제공했다. 선생님이 에게 털어놓으려 했을 때 는 아버지가 위독해 고향에 있었고, 그 사이 선생님은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선생님의 죄책감

 

나는 남한테 속았다네. 그것도 피를 나눈 친척한테 속았지. 나는 결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네.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착한 사람인 것 같았던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한으로 변했거든. 난 그들한테서 받은 굴욕과 손해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네. 아마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겠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복수하지 않고 있네. 생각하면 나는 실제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들만 증오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증오하고 있거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 p.88

 

마지막 편지에는 선생님이 당한 두 번의 배신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배신은 숙부로부터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던 선생님은 자신의 재산관리를 숙부에게 맡겼다. 부모님 살아생전부터 돌아가신 후까지 선생님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으므로, 선생님은 숙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 숙부가 자신의 딸을 선생님과 결혼시키려 하면서 선생님은 한 치의 의심이 생겨났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숙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을 만나지 않았던 게 새로 보였다. 전에는 정말 일하느라 바쁘게 생각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피하기 위해 바쁜 척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선생님은 숙부와 싸우고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의 일부만 되찾은 채 고향을 떠나왔다.

 

숙부에게 속았던 당시의 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뼈저리게 느꼈지만,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했을 뿐이지 그래도 자신은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네. 세상 사람들이 어떻든 나만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신념이 어딘가 있었던 거지. 그런데 K 때문에 그 신념이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도 숙부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자각을 하자 갑자기 아찔한 느낌이 돌더군. 사람들에게 질린 나는 자신에게도 질려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네. - p.265

 

두 번째 배신은 도시에서 겪었다. 선생님은 지낼 곳을 찾다 어느 하숙 치는 집에 들어간다. 주인아주머니와 따님인 아가씨만 사는 집이었다. 그는 그들과 친해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아가씨 좋아하게 된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새로운 하숙인을 구하자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 K를 소개해 하숙을 들였다. 자신처럼 K도 마음의 안정을 얻기를 바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면서 선생님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K가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보이고, 아가씨와 K가 어울리는 것이 자신보다 더 친근해 보였다. 선생님은 아가씨를 얻기 위해 K를 비난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말해 K 몰래 따님을 주십사 요구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K는 스스로 경동맥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고, 그것이 선생님의 죄의식이 되었다.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배신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온 배신과 내부로부터 외부로 발현된 배신을 모두 겪은 선생님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멀리했다. 자신을 믿는 행위는 세상을 버티는 근간이다. 이것이 튼튼하지 못한 사람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다름없다. 언젠가 사사로운 충격만 들어와도 금세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가 보기에 선생님은 지식인이며 세상을 통달한 듯한 초연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 마음은 항상 무너질 것을 염려해 충격을 피하는 성향이 겉으로는 그렇게 비추어진 것뿐이었다.

 

내가 그 감옥 안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또 그 감옥을 도저히 부술 수 없게 되었을 때 결국 내가 가장 손쉬운 노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자살밖에 없다고 생각했네. 자네는 왜냐며 눈을 동그랗게 뜰지도 모르겠지만 늘 내 마음을 죄어오는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그 힘은 내 활동을 모든 방면에서 막아내면서 나를 위해 죽음의 길만을 자유롭게 열어두고 있네. 움직이지 않고 있으려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한다면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는 거지. - p.270

 

선생님이 편지를 보낸 이유

 

선생님은 굉장히 약한 사람이었지만, 헛된 지식인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드러내지 않은 고민 끝에 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기로 결정하면서도 가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었다.

 

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기탄없이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되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 안에서 자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붙잡게. - p.151

 

그가 자신의 부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심정을 에게 밝힐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젊은 날과는 다르게 의 태도가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자신의 약한 부분을 찔렀더라도 선생님은 가 자신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극단적 선택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짊어지지 못한 탓에 이뤄진 결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선생님은 지식인으로서 갖춰야 할 면모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솔직한 인정, 동정심을 요구하는 게 아닌 배울 점을 알려주는 자세, 그리고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물론 선생님의 자살은 부인을 홀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라 무책임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 이야기이다. 자살자가 겪은 무게는 누군가가 평가할 만큼 하찮지 않다.

 

이렇게 용기 내서 편지를 쓸 정도였다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선생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사람에 대한 믿음은 딱 에게 보낸 편지까지였다. 자신을 비롯한 타인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태도는 세상을 대하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이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고,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기에. 선생님은 친구도 만나고 부인도 있고 까지 만났지만 정작 삶은 고립된 채였다.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변한다. 겉으로는 일관성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시시각각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오가고 때에 따라서는 평소 사소하게 여기던 일도 크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나 어떤 것보다도 삶을 복잡미묘하게 만드는 것 또한 마음이다.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부에서는 의 아버지가 병세로 인해 몸져누워 있다. 육체에 병이 든 것이다. 이것은 선생님의 상황과 비교된다. 육체의 병은 눈에 보이기에 때에 맞춰 대응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미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편지를 받은 의 충격은 아버지의 병세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도시행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마음을 컨트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더 자주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상처를 마주하기란 굉장히 두렵고 무섭고 힘겨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놔두거나 회피하기만 한다면 더욱 곯으면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아마도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싶다. 일종의 마음 챙김이다.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 길 속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일면이라도 표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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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죽음 1~2 세트 - 전2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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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은 지 얼마 안 지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죽음을 읽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공교롭게도 둘 다 죽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전자가 죽음이라는 현상을 다룬 다소 무거운 느낌의 에세이라면, 후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죽음을 심각하지 않게 풀어낸 소설이다. 원제는 DEPUIS L’AU-DELÀ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지만검색을 해보니 대략 저세상으로쯤 되는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죽은 후에 이러면 어떨까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고정관념 내려놓기

 

앞서 말했듯이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 신도, 귀신도, 천국, 지옥, 극락, 영혼 등등. 아주 강력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책을 접하니, 처음 읽을 때는 몰입이 잘 안 됐다. 신선하긴 한데 뭔가 내 취향이 아닌 느낌? 찝찝한 마음에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도입부의 글을 다시 만나 밑줄을 긋고 나서야 , 내가 너무 실용서처럼 읽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상상하고, 꿈꾸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멋진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 1권 도입부

 

소설은 일단 상상력의 산물이고,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소설로써 즐길 수 없다. 현실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소설의 허구성을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와 사후 세계관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부분을 놓쳤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작가의 도입부 글은 길잃은 나의 집중력에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이후의 독서는 몰입하여 아주 신나게 읽어내렸다.

 

누가 날 죽였지?

 

누가 날 죽였지?- p.15, 1

 

강렬한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대중에게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인 가브리엘 웰즈는 새 소설의 시작으로 쓸 첫 문장을 얻었다는 즐거움에 눈을 뜬다. 그러나 즐거움은 여기까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자신의 주치의에게로 향한다. 그 병원에서 만난 뤼시 필리피니라는 영매에게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첫 문장은 죽은 추리소설 작가가 풀어낼 사건으로 변한다. 가브리엘은 뤼시에게 자신의 사인을 파헤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수사 도중 큰일을 겪은 뤼시가 포기를 선언하자, 가브리엘은 하나를 제안한다. 뤼시의 잃어버린 연인을 죽은 자신이 찾아줄 테니 수사를 중단하지 말아달라고. 둘은 모종의 계약 관계로 서로가 맡은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여러 인물을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만나면서 가브리엘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진실에 닿게 되는데…….

 

스포일러는 예의가 아니므로 여기까지가 줄거리로 적당할 듯 싶다.

 

작가의 문학관

 

책이라면 으레 따분한 줄 알았는데 글자와 단어, 문장의 경계를 뛰어넘자 머릿속에 영화 스크린이 펼쳐지더니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했어요. 평행 세계로 들어간 기분이었죠. 등장인물의 목소리, 바람 소리, 차 소리, 총소리, 천둥소리가 귀에 들렸어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냄새가 맡아졌어요.당신의 이야기에 써진 그대로 느껴졌어요. 문 닫을 시간이라며 교도관이 다가오길래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더군요. 그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었던 것예요. 배가 난파되고 나서 널빤지에 매달려 바다에 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당신이 창조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부여잡고 있었던 거죠. - p.98, 1by 뤼시 필리피니

 

소설을 보는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작가의 가치관을 엿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주장은 작가가 가지고 있거나 반박하거나 신경 쓰는 부분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이 작가인 만큼 글쓰기나 독서, 문학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가브리엘 웰즈는 글쓰기를 이렇게 바라본다.

 

그에게 소설은 문인들의 직업어로 <인시피트>라 불리는 첫 문장과, 이것이 닦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마지막 문장인 <엑스플리시트>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가지가 결정되면 플롯을 작동시키는 시계 장치를 구상하는 일만 남는다. 독자들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서서히 자신의 삶을 잊고 주인공의 삶에 몰입하게 만드는 그런 장치. - p.17, 1

 

누가 되었든 글을 쓴다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첫 문장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둘 명분이므로 중요하고, 마지막 문장은 글에 대한 여운과 완성도를 결정하므로 중요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소설의 중심축이 되고, 중간 내용은 그 안에서 얽혀든다. , 내용이 산으로 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서평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내 경험으로는그리 길지 않지만시작과 결말을 미리 떠올려두면 작성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반대로 일단 써보자식으로 쓰면 먼 길 돌아가는 느낌이다. 나의 능력 부족이겠지만, 어쨌든 처음과 결말이라는 중심축을 정해두고 쓰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또 다른 작가의 가치관은 문학성이다.

 

()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바로 문학의 다양성이에요. 그 자체로 나쁜 문학 장르가 있는 게 아니라, 장르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이 따로 있을 뿐이에요.- p.40, 2

 

나는 장르문학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판타지나 추리, 라이트 노벨 등 내가 한때 좋아했던 것들을 멀리하면서부터 생긴 편견이었다. 단순하게 내가 안 본다고, 내가 싫다고 안 좋게 바라본 것이다. 언제나 고전만 옳으며 고전만 읽어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지만, 문제는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는 점. 이해력 미달의 고전독서로 오히려 자가당착에 빠져 독서의 재미를 내려놓기까지 했었다.

 

「〈이해는 각자의 몫이라는 게 제 철학이에요.- p.299, 2

 

웰즈의 말처럼 좋은 책이 나오려면 일단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요,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까. 도입부에서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상할 수 있고, 꿈꿀 수 있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면 장르불문 나쁜 책은 아니지 않을까. 아마도 작가는 나처럼 문학으로 편 가르는 사람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나의 편협한 문학관이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계속 고민하게 되는 부분으로 남아 있다. 좋은 문학, 나쁜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면 독서 역시 좋은 독서, 나쁜 독서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작가로서는 문학성의 다양성을, 독자로서는 독서의 다양성을 지키는 게 일단은 정도(正道)인 듯싶다.

 

살아 있는 자의 삶은 소중한 것

 

지난 서평 중 정유정의 진이, 지니에서 나는 일단 살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야 누구든 만날 기회가 있고, 무엇이든 할 기회가 있고, 어디든 갈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나오는 사후 세계관으로 상상한다면 역시 살아 있을 때 행복할 기회가 많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영혼 상태는 물질세계에 존재하지만 관여할 수는 없고, 환생하자니 원했던 삶이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이므로 큰 의미가 생기기 않는다. 특별한 영매를 만나 죽은 후에도 가브리엘처럼 생전의 삶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니…… 죽고 나서 심심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을 때 많이 즐겁고 행복해야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독서가 자리하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인정했지만 소설은 거의 안 읽었다. 가지고 있던 편견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역시 살아 있음으로 인해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게 만드는 그의 소설을 접할 수 있었다. 다작가의 소설을 접할 때마다 하는 다짐인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를 또 다짐해본다. (내가 살아 있고, 계속 다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읽겠지.) 동시에 마지막 문장도 되새긴다.

 

나는 왜 태어났지?- p.313, 2

 

P.S 물론 삶도 죽음도 케바케이니 각자의 가치관으로 살고 죽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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