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ilda (Paperback, 미국판) - 뮤지컬 <마틸다> 원서 Roald Dahl 대표작시리즈 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 Puffin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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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기 시작해서 절반 읽고 멈췄다. 컴활 공부를 이유로 독서를 미루고 미루면서 책장에 꽂아만 뒀다가 올해 3월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워낙 영어 독해 실력이 구려서 한글 책처럼 장시간 붙잡고 있지는 못했다. 대신 한 챕터 혹은 반 챕터를 목표로 잡고 매일 읽는 쪽으로 진행했다. 드디어 오늘 1년여 간의 마주함에 마침표를 찍었다.

 

로알드 달의 소설들은 재밌고 쉬워서 영어 독학하는 사람에게 자주 추천되는 책들이다. 나는 그 덕을 여실히 보고 있다. 느려 터지고 모르는 단어 찾아가며 천천히 해석하는 게 여간 피로한 일이 아니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해 독서를 지속하게 된다.

 

Matilda는 비범하고 선량한 '마틸다 웜우드'의 성장기다. 카센터에서 고객을 속이며 버는 돈을 자랑하는 'Mr. Wormwood'씨와 가사는 내팽겨둔 채 매일 저녁까지 사교 모임에 나가 빙고 게임을 하는 'Mrs. wormwood'씨 사이에서 남매가 태어났다. 첫째는 Mike로 평범하며 공부에 관심이 없는 남자아이다.

 

반면, 동생인 Matilda는 비범한 여자아이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눈을 떴고 말을 하며 걸어다녔다. 호기심이 너무나 왕성했지만 집에는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책 따위가 없었다. Matilda는 엄마의 잡지를 보면서 글자를 익혔고, 네 살에는 스스로 도서관까지 걸어가 책들을 섭렵했다. 사서가 소개해준 유아 도서를 모두 읽은 후에는 두꺼운 어른 도서로 눈을 돌렸다. 아이의 똑똑함에 놀란 사서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소개해주고 Matilda는 매일 도서관을 다니면서 독서에 흠뻑 빠졌다. 그러다 사서가 대여 방법을 알려주자 그녀는 집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빠는 딸의 그런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아빠는 멍청한 아들에게 가업(차를 속여 파는 일)을 물려주려고 하면서 계산법을 알려주지만, 대답은 딸이 한다. 우연이라고 생각해 여러 복잡한 계산을 요구해도 우리의 Matilda는 척척 대답해냈다. 그는 딸의 방에서 도서관 책을 발견하고는 내다버리면서 두 번 다시 책을 못 보게 만들었다.

 

화가난 Matilda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잔꾀를 써서 아빠를 골렸다. 그가 아끼는 모자에 몰래 초강력 본드를 칠해둔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빠는 여느 때처럼 모자를 쓰고 나갔고, 하루종일 벗지 못해 애를 먹었다. 집에 와서 엄마의 도움으로 벗어보려 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붙은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모자를 가위로 잘라냈다. 후에 친구의 앵무새를 빌려 유령인 듯 속여 가족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아빠의 샴푸에 염색약을 넣어두는 일화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Matilda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의 여교장은 Trunchbull이라는 사람으로, 덩치가 거대하고 녹색 반바지에 거대한 셔츠를 입고 그 위에 벨트를 차고 있었다. 학교의 위압적인 독재자였다. 그녀는 아이들을 혐오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Amanda의 양갈래로 땋은 머리는 Miss Trunchbull이 싫어하는 머리였다. 여교장은 Amanda의 양갈래 머리를 잡고 투포환 하듯 빙글빙글 돌려 공중에 날려보냈다. 다행이 부드러운 잔디 위에 착지하여 다치지는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행동이었다. Bruce라는 뚱뚱한 소년에게는 자기 케이크 조각을 훔쳐 먹었다는 혐의를 씌우면서 거대한 초콜릿 케이크를 혼자서 다 먹도록 강요했다. 이 역시 다행히도 아이들의 응원 덕에 Bruce가 모든 케이크를 모두 먹어치웠다. 이런 까닭에 모든 학생들은 그녀를 혐오했다.

 

반대로 Matilda의 담임 선생인 Miss Honey는 자상하고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쉽게 읽힐 수 있도록 구구단과 단어를 가르쳤다. 한 명 한 명 이해하려고 했고, 특히 Matilda의 비범함을 알아채 여교장에게 상급 수업으로 옮기기를 희망했다. 물론 Trunchbull이 믿을 리는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는 Trunchbull이 참관해 학생들을 테스트하는 관례가 있었다. Matilda의 절친 Lavender는 도룡뇽을 몰래 여교장의 물주전자에 담궈 놀래키려 했다. 여교장이 학생들을 테스트하며 괴롭히다가 물을 따를 때 괴생명체가 주전자에서 튀어나와 물잔에 퐁당 빠졌다. 처음 보는 생물에 놀란 Trunchbull은 범임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사기꾼을 아빠로 둔 Matilda를 의심했다. 소녀가 격하게 항의하는 순간 초능력이 발현됐다. Matilda가 물잔을 노려보자 물잔이 스스로 쏟아지면서 도룡뇽이 Trunchbull에게 쏟아진 것이다. 교실 전체가 혼비백산했고 질린 여교장은 참관 수업을 그만 끝내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Matilda는 자신의 초능력에 놀랐다. 대체 무슨 힘이었을까? 소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상담하기로 결정했고, Miss Honey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둘은 함께 여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어떤 느낌인지 대화를 나눴으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이 도착한 여선생의 집은 충격적이었다. 숲 속에 있는 오래된 작은 집이었고, 안에는 가구가 없었으며, 벽 마저 석회로 대충 바른 상태였다. 거기서 MatildaMiss Honey의 과거사를 듣게 된다. 그녀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의사인 아버지는 바쁜 탓에 그녀를 제대로 돌볼 수 없어서 이모를 집에 들였다. 얼마 후 아버지는 의문사했다.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해 자살로 결론 났지만, Miss Honey는 이모가 집을 빼앗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결국 집은 이모에게 넘어갔고, 그 아래에서 Miss Honey는 노예처럼 살았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공부한 끝에 교사가 되었지만, 이모는 그녀에게 조금의 돈을 제외한 채 모든 봉급을 자신에게 보낼 것을 강요했다. 그런 와중에 Honey는 지금의 집을 발견해 계약했고, 큰 용기를 내어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급은 거의 이모에게 돌아갔으므로 Honey는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모는 충격적이게도…….

 

이후의 내용은 소설의 마무리 단계여서 반전도 나오고, Matilda의 획기적인 능력 사용도 나오므로 개별적으로 찾아보길 희망한다. 평소라면 오늘도 한 챕터만 읽고 넘겼을 테지만, Matilda의 계획이 재밌어서 끝까지 읽었다. 아마 모두에게 재밌는 내용이리라.

 

사실 줄거리를 쭈욱 읊었지만, 영어 독해 능력이 워낙 부족해서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맥락은 이해한 거 같은데, 아마 세세한 문장은 잘못 해석한 부분이 많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래도 가끔 아는 단어들과 구조로 나오는 문장은 두 번 읽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자동 해석된다. 몇 번을 겪어도 신기한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영어는 듣기, 말하기, 쓰기, 읽기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읽기'이다. 공부는 필요성을 느껴야 더욱 능동적으로 하게 되고, 읽기는 당장 나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대체로 필요한 정보는 영어로 된 글이 많으니까. 나머지 셋은 당장 사용할 일이 없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봐도 금세 질리고 유지되질 않는다. 영어 읽기부터 연습하면서 문장 낭독과 친숙해진다면 다른 부분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원서 읽기가 가장 마음 편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지만.

 

아무튼, 이렇게 한 권을 읽었으니 자신감이 붙는다. 내일부터는 또 다른 원서를 읽어야지. 참으로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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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리커버 특별판)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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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이라 작년에 사놓고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 원래는 모모를 읽으려고 했는데, 어디 갔는지 없어져서 끝없는 이야기로 손을 옮겼다. 아무래도 청소년 소설이니 유치할 것으로 여겼다. 후딱 읽어 치워버리자는 마음이 독서 동기의 90퍼센트는 차지했으리라. 그러나 내 생각은 역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도대체 무슨 책들을 읽었던 것일까. 왜 도서관을 뒤지지 않았을까. 어째서 상상을 몽상과 망상으로 구분해야 하는 지금의 나이에 이 책을 만난 것일까!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었다. 왠지 어린 시절을 날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상으로만 맛보던 내용이 이렇게 소설로 존재했었다니. 예전 나니아 연대기이후 다시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환상 세계의 아이 아트레유가 어린 여왕의 병환을 치유하기 위한 여행을 하는 이야기이고, 2부는 바스티안이 환상 세계에 들어가 자아를 찾는 여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주인공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는 책과 이야기 짓기를 좋아했다. 현실이 싫기 때문이었다. 학교 아이들과 교사는 통통한 외모와 소심한 성격인 그를 괴롭혔고, 아빠는 엄마를 잃은 후 자신에게 별로 관심 없어 보였다. 비 오는 어느 날, 그는 학교를 가다 말고 고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훔쳐 도망쳤다. 제목은 끝없는 이야기, 두 마리의 흰 뱀과 검은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문양이 그려진 책이었다. 바스티안이 선택했다기보다 책에 선택받은 느낌이었다. 서점으로부터 도망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이미 지각한 김에 바스티안은 교실 대신 인적이 드문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바스티안은 학교 일과, 아빠를 잊은 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환상 세계의 여왕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그녀의 세계가 위협당하고 있었다. ‘()’가 퍼지면서 세계 곳곳을 존재하지 않았던 곳으로 만들었다. 온갖 종족의 의사들이 그녀를 치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측근 카이론에게 명령했다, 풀의 바다에 사는 초록 피부 일족 아트레유가 병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을 것이니 아우린(여왕의 권한)’을 건네주라고. 아트레유는 바스티안과 비슷한 나이의 어린 소년이었다. 카이론은 어린 아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염려했다. “() 여왕은 아무도 모르는 어떤 것을 찾아오라고 미지의 세계로 널 보내는 거다. 누구도 너를 도와줄 수 없고, 누구도 너에게 충고해 줄 수 없으며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넌 임무를 받아들일 건지 아닌지 당장 결정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p.68)”

 

위대한 사냥꾼을 꿈꾸던 아트레유는 생각보다 큰 모험임을 깨닫고 용감하게 대탐험을 나섰다. 아끼는 말 아르탁스를 슬픔의 늪에서 잃었어도, 늙고도늙은 모를라를 마주했어도, 행운의 용 푸후르를 구하고 끔찍한 위그라물에게 물렸어도, ‘우유랄라를 만나는 과정이 험난했어도, 불량배의 마을에서 그를 죽이려는 그모르크가 다리를 물어 놓지 않았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푸후르와 함께 여정을 마쳤다. 여왕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여왕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인물이 필요했다. 구원자는 환상 세계 사람이 아닌 현실 세계 사람이었고, 그가 환상 세계로 넘어와야만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였다. 그가 여왕의 새 이름을 부르면 넘어올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린 여왕은 방랑산의 노인의 도움을 받아 바스티안이 부름에 응하도록 만들었다. 바스티안은 어린 여왕에게 달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 이름을 외치자 바스티안은 환상 세계로 이동했다. 어린 여왕은 그에게 환상 세계 주인의 권한인 아우린을 넘겨주며 소원을 빌도록 했다. 그의 소원이 곧 환상 세계의 재탄생이었다. 달아이는 바스티안에게 환상 세계를 맡긴 후 종적을 감췄다. 그는 이제 혼자서 세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소원을 빌어 통통하던 외모는 매끈하고 잘생긴 모습으로 변했다. 용감하고 강한 힘을 원하자 그렇게 되었다. 대가로 현실 세계의 기억을 잃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바스티안은 밤의 숲 페를린과 다채로운 죽음 그라오그라만이 있는 일곱 빛깔의 사막을 시작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라오그라만의 존재 이유를 알려준 감사의 표시로 받은 마법의 검 지칸다를 받았다. 마법의 검은 스스로 뽑히면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그를 지켜주지만, 억지로 뽑으면 큰 재앙을 불러온다고 했다. 천 개의 문을 지나 아마르간트에 도착한 바스티안은 도시에서 아트레유를 만났다. 아트레유는 아마르간트에서 대회를 열어 구원자를 찾을 용사를 뽑는 중이었다. 신분을 숨긴 바스티안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뒀고, 아트레유는 본능적으로 그가 구원자임을 알았다. 둘은 실제로 처음 봤지만 깊은 우정을 나누며 친구가 되었다.

 

훤칠한 외모와 강한 힘, 두려움 없는 용기를 가진 바스티안은 이제 환상 세계에 명예로운 자로 불리고 싶었다. 그는 소원을 사용하여 음유시인인 아마르간트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가득 담긴 도서관을 만들어주었고, 대회에서 바스티안에게 당해 좌절한 휜레크를 위해 용을 만들어 공주를 구하게 해주었으며, 못생긴 외모로 항상 흐느끼는 아하라이 족을 항상 웃는 슐라무펜으로 바꿔주었다. 모든 결과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바스티안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럴수록 그는 현실 세계의 기억을 잃어갔다. 그것을 눈치챈 이들은 아트레유와 푸후르뿐이었다.

 

바스티안의 소원은 마녀 크사이데를 만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크사이데는 그에게 속삭여 환상 세계의 황제로 자리할 것을 유혹했다. 아트레유는 바스티안에게 진실된 말을 하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바스티안은 아트레유를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생각하며 함부로 말했다. 결국 아트레유와 푸후르는 떠났고, 바스티안은 자신을 따르는 환상 세계 종족들을 이끌고 세계의 중심인 상아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황제가 되려는 대관식을 치르려는데, 아트레유가 여러 환상 세계 종족을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깊은 우정을 나눴던 둘은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 억지로 빼든 지칸다는 아트레유를 찔러 부상을 입혔다. 푸후르가 재빨리 아트레유를 데리고 도망치자 분노에 휩싸인 바스티안은 그들을 추적했다.

 

추적하던 도중 맞닥뜨린 마을에서 바스티안은 진실을 깨달았다. 마을의 이름은 늙은 황제들의 도시, 과거 환상 세계에 왔으나 마구잡이로 소원을 빌다 자아를 잃어버린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멍청한 행동을 하며 살아갔다. 아트레유는 이런 미래로부터 바스티안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소원을 빌어 마을을 빠져나오긴 했으나 그는 또다시 기억을 대가로 지불했다.

 

바스티안은 여러 날을 걸었다. 조화롭긴 하지만 사랑이 없는 도시 위스칼을 지나 변화하는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아이우올라 부인이 살았다. 그녀는 바스티안을 기쁘게 맞이하면서 조급하지 않도록 다독였다. 기억을 잊어버려 걱정하는 바스티안에게 아이우올라 부인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그저 변하는 거(p.628)”라며 위로했다.

 

바스티안은 마지막 소원을 사용해 (대가로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었다.) 변화의 집을 벗어나 그림들의 광산에 도착했다. ‘요르라는 광부가 지키는 광산에서 바스티안은 생명의 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생명의 물은 현실 세계로 향하는 길이며 스스로 찾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려줄 수 없는 곳이다. 바스티안은 다양한 기억들이 묻혀 있는 광산에서 요르를 도와 자신이 찾는 그림을 캐냈다. 가운을 입은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음에 갇혀 있었다. 남자는 바스티안의 꿈속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바스티안은 그 그림이 자신을 생명의 물로 이끌어줄 열쇠임을 깨닫고 광산을 떠났다.

 

소중한 그림을 조심히 들고 이동했다. 그러나 자신이 존재를 바꿔주었던 슐라무펜이 등장해 장난치는 바람에 바스티안의 희망은 산산조각나버렸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때, 아트레유가 행운의 용 푸후르를 타고 나타났다. 바스티안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우린을 풀어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우린의 빛이 너무 눈부셔 그들 모두 눈을 감았다. 다시 떴더니 그들은 이미 거대한 공간에 서 있었다. 서로의 꼬리를 문 흰 뱀과 검은 뱀이 지키는 생명의 물이었다.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와 푸후르의 도움으로 무사히 생명의 물을 통과했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바스티안은 사실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역시 아빠를 사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코레안더 씨에게 훔친 책을 사과하러 갔을 때 그 책은 서점의 소유물이 아닌 바스티안에게만 주어진 이야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스티안이라면 많은 사람들을 환상 세계로 이끌 수 있을 거라는 사실까지도.

 

줄이고 줄인 줄거리지만, 거의 700쪽에 달하는 소설이어서 굉장히 길어졌다. 긴 이야기인 만큼 미하엘 엔데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수히 많다. 가령, 환상 세계 여행자가 등장해 어린 여왕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어야만 환상 세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가 상상력을 거부한 채 정해진 답을 강요했기에 여행자는 나타나질 않았다. 동시에 환상 세계가 파괴의 제물이 되면 될수록 인간 세상으로 퍼지는 거짓의 물결은 점점 커지고 바로 그 때문에 사람이 환상 세계로 올 가능성은 매 순간 점점 희박해졌다(p.232).’ 상상력이 죽은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을 지루하게 여기며 절망에 휩싸인 채 우울하게 살아간다. 미하엘 엔데는 그런 인간들에게 자유로운 상상과 이야기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환상 세계는 모든 것이 말이 안 되며 모든 것이 타당하다. 상상에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내 어린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더 즐거웠을까. 지금의 나이에도 즐거운 독서였지만, 나도 모르게 논리와 합리성을 따지려고 들었다. 상상력에 늦은 나이는 없어도 이미 판단하는 기준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더 늦기 전에 좋은 소설을 접했으니 아직 어린 시절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추천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교육적인 상징성에서도 빛을 발한다. 바스티안은 평범한 것보다는 한 계단 아래에 있는 소년이다. 자기 앞가림에 의욕이 없고, 행동에 책임도 없다. 그가 환상 세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교훈을 얻는데,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몇몇 인물의 상징을 따져볼 수 있다. ‘아트레유책임감’, ‘푸후르행운’, ‘크사이데욕망’, ‘아이우올라 부인시간’, ‘요르무의식으로 볼 수 있다. 바스티안이 책임감과 행운을 만났을 때는 승승장구했으나 함부로 대했을 때는 쇠락했다. 쇠락의 길에는 한없이 커진 욕망이 자리했다. 다친 아트레유와 푸후르를 쫓으면서 욕망과 멀어지자 곧 바스티안은 공허해졌다. 공허한 마음은 변화의 집에서 시간이 치유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바스티안의 소중한 기억은 무의식의 광산에 묻혀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무의식을 건들자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곁들이면 소설은 재미를 잃는다. 학교 다닐 때 많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어디까지나 감상문을 쓰는 입장에서 책의 장점을 어필하기 위한 해석일 따름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면 위의 요소 함양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완독한다면 독서에 대한 자신감도 뿜뿜 샘솟을 것이 분명하다. 일단 내 사촌 동생에게 추천해봐야겠다.

 

읽을 책이 넘쳐도 다음 읽을 책은 기약해야 한다. 언젠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도 읽어볼 예정이다. 집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서 중고로 구매했다. 과연 이 책만큼 임팩트가 있을지 궁금하다. 추천은 여기저기서 많이 받기는 했었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끝없는 이야기의 구성은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비슷하다. 하나를 재밌게 읽었다면 다른 하나도 취향에 맞으리라고 감히 확신한다. 후자는 1000쪽이 넘으니 독서 자신감을 위해서라면 도전해보자. 츄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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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는 동안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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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은 후, 조금씩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접하려는 시도 중이다. 지난 언젠가 중고서점을 들렀을 때 구매해 온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1권을 얼마 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너무 감명 깊게 본 탓일까? 내가 기대한 느낌은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야!’라는 감탄이었다. 그러나 유작 소설집인 빛이 있는 동안은 약간 실망스럽게 다가왔다. 9편의 단편 소설 중 추리 장르는 3편밖에 되질 않았다. 그마저도 추리 냄새가 물씬 풍겼던 작품은 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하나였다.

 

물론 개인적인 감상일 따름이다. 내가 워낙 단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이고 기대를 너무 부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모순적이지만 원래 책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을 강렬하게 끈 문장 하나만 얻어도 인생 책이 되기 마련일진대,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소설이 있었다면 후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한 번 더 모순적이게도 내가 선택한 소설은 기대와 다르게 추리 장르가 아니었다. 로맨스라고 해야 하나? 9편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외로운 신이 가장 완벽한 소설이라고 느껴졌다.

 

외로움과 우연한 만남과 순애보

 

동양의 작은 신상(神像)은 오랜 시간 다른 중요한 신상에 떠밀려 외롭게 지냈다. ‘잿빛 돌로 거칠게 깎인 이목구비가 세월과 비바람에 거의 마모된 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얼굴을 두 손 안에 묻은 채 외롭게 앉아 있었다(p.116P.’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숭배하지 않았다.

 

어느 날, 40대가 된 프랭크 올리버라는 남자가 강한 외로움을 느끼며 박물관을 찾았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고국을 오래 떠나있던 탓에 시대에 적응을 못 했다. 친구의 아내가 멋진 여자들을 소개해 줬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한마디로 소심하고 지질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외로운 신상을 봤으니 동질감이 드는 것도 이해된다. 그는 매일 박물관을 들르면서 독점하듯 신상을 숭배했다.

 

그러다 우연한 만남이 일어났다. 신상에게 두 번째 숭배자가 생긴 것이다. 20대 즈음의 앳된 여자로, 외모는 아름다웠지만 행색이 초라했다. 그는 그녀 역시 외로운 존재라고 단정 지었다. 한 동안 그녀를 관찰하던 프랭크는 외로운 신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느낌에 힘입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새 손수건을 하나 구해서 떨어뜨린 뒤 우연을 가장해 그녀의 것인지 물으면서 말꼬를 틔었다. 여자는 즉각 아니라며 떠날 궁리를 했으나 프랭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로운 신을 주제로 말을 이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침묵이 둘 사이에 자리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여자였다. 예의상 인사를 하고 그녀는 박물관을 떠났다.

 

한동안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랭크는 꾸준히 박물관에 들러 그녀를 기다렸다. 전시실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 정도로 말이다. 고된 인내 끝에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는 용기를 내어 친구가 되어달라고 고백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만나 작은 외로운 신상에 대한 주제로 시작해 점점 서로를 알아갔다. 여자는 어느 집안의 보모 겸 가정교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아라고, 이 세상에서 혼자뿐이라고 그에게 말했다(p.125).’ 그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삶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림 그리는 게 취미지만, 아직 미숙하다고. 하지만 언젠가 근사한 뭔가를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둘은 서로를 알아가면서 이내 사랑이 싹텄다. 여자는 손수건 사건에 대해 프랭크에게 고마워하고, 그는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했다. “언제나처럼 열 시에 만납시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과 지나온 얘기를 나눕시다. 아주 실제적이고 산문적이 되는 거요(p.131)” 그러나 둘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여자는 어린 소년을 시켜 편지 한 장만 전한 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날이 지났다. 프랭크는 취미가 아닌 업으로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성공적으로 명성을 가져다줬고 예술원에 전시되기까지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잡지에서 어느 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영감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을 그려냈다. 모두가 공주를 위하지만 그녀는 지독히도 외로운 자태였다. 그 그림은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그는 완전히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친구의 아내가 아가씨를 소개해준다고 했지만, 프랭크는 거절했다. 그에게는 오직 외로운 숙녀뿐이었다.

 

경마 대회 날, 박물관에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이 외로운 신상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신상에게 프랭크가 나타나길 빌었다. 그 순간 프랭크가 등장했고 그녀를 얼싸안았다. 알고 보니 공주 이야기는 그녀가 쓴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부유했지만 외로운 여자였다.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며 애처로운 여자 연기를 했다. 프랭크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녀는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그것이 도망친 이유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자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는 남자가 바로 프랭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진실한 사랑을 얻고 손을 잡은 뒤 박물관을 나섰다.

 

그로써 외로운 작은 신은 두 숭배자를 잃었지만, 그 역시 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프랭크와 숙녀의 소망을 이뤄주었으니 말이다. 외로운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낯선 땅에 표류한 외롭디외로운 작은 신이 아니겠는가?(p.137)’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언뜻 보면 우연과 운명으로 점철된 단순한 러브 스토리 같지만, 내게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소설로 보였다. 외로운 신으로 시작해 외로운 신으로 끝나는 수미쌍관 형식은 작은 신이 외로움의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번개의 신에게 번개가 없다면 번개의 신이 아니듯이, 작은 신에게 외로움이 없다면 그는 신이 될 수 없다. 반면, 인간은 인연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외로움의 신에게 외로움을 달래려는 숭배자가 생긴다면, 인간이 외로운 신에 의지해 영원토록 외롭다면 서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숭배자를 그들만의 천국으로 인도했다. 각자의 존재가 온전해진 것이다.

 

여운이 길게 남아 나의 사족을 덧붙였다. 9편의 작품 중 하나만 다뤄 수준 낮은 감상문이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내 마음을 울린 소설은 이것 하나뿐인 것을. 이 작품 하나만 봐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시길. 대가의 작품집인 만큼 다른 소설도 훌륭하다. 아마 어느 독자에겐 이 소설이 별로고 다른 소설이 취향에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니 책은 본인이 읽고 판단하는 게 옳다. 별로 두껍지도 않으니까 누구든 금방 읽을 것이다.

 

기대에 크게 미치지는 못했지만, 쓰면서 복기하니 딱히 실망할 이유도 없는 듯하다. 감상문을 쓰느라 다시 읽었는데 역시 울림이 상당했다. 그렇더라도 유작 소설집은 여기까지만 감탄하고, 다음에는 정말 추리 소설을 읽어야겠다. 함께 사 온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나를 기다리는 중이다. 대작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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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걸 조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74
존스턴 매컬리 지음, 김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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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이런저런 영웅에 대해 자랑하면 엄마는 조로같은 거냐고 하셨다. 엄마 세대에게는 조로가 최고의 영웅 캐릭터였다고. 나는 초능력자나 공상과학 영역의 인물들을 좋아했으니, 가끔 TV 프로그램에서 클립으로 보여준 조로는 영 별로였다. 그냥 사람이 눈만 가리는 가면을 썼는데 왜 못 알아보는 건지 의문이었다. 액션 또한 칼싸움밖에 없어서 빔 쏘고 총 쏘고 대포 쏘는 현대 영웅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다. 그 후로 이 영웅은 내 머릿속에서 싹 잊혀졌다.

 

다시 이런 기억이 떠오른 것은 최근 중고서점에서 구매해 읽었기 때문이다. 한 번 서점에 들어가면 빈손으로 나올 수 없어서 어떻게든 책을 고르는데,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모르는 쾌걸 조로가 눈에 들어왔다. 뒷면 소개글에는 친숙한 영웅들인 슈퍼맨, 베트맨, 스파이더맨 등 이중 정체성 영웅의 원형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 어릴적 우상의 원형이라니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비록 현대 영웅물보다 재미는 떨어질지언정 원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읽을 가치가 충분했다.

 

돈 디에고 베가는 서부 지역에서 세력이 강한 베가가문의 아들이다. 이 청년은 잘생긴 외모와 든든한 뒷배경을 가졌지만, 항상 무기력하고 지친 행색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가세가 무서워 앞에서는 아첨을 떨고 뒤에서는 비아냥댄다. 군인 곤잘레스 페드로 상사와 라몬 대위는 대놓고 무시하는 수준이다.

 

무기력한 청년 디에고는 몰락한 폴리도 가문의 딸 롤리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이유가 단순하다. 나이가 되었으니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으로서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고, 가문의 평판은 맞춰야 하기에 가장 적당한 집안이 폴리도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접근을 가주인 돈 카를로스 폴리도와 그의 부인은 재기의 기회로 생각하고 환영 하지만, 롤리타 폴리도는 전혀 아니다. 인생의 한 번뿐인 청혼을 열정과 사랑의 노래 없이 허락하는 것은 처녀의 특권을 내다 버리는 짓이었다. 롤리타는 수치심을 느끼며 디에고를 거절한다. 하지만 디에고는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 자신의 부유함을 보여주면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반면,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이라 불리는 조로는 디에고와 다르게 온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 억울하게 매 맞은 이들을 대신해 복수하고, 부당한 권력 행위를 징벌한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치안 담장이자 현상금에 눈이 먼 페드로 상사는 발에 불이 나도록 조로를 추적한다. 역시 진급이 걸려 있는 라몬 대위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조로 추적에 더욱 열을 올리는 이유는 각각 수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허풍 떨던 페드로 상사는 부하들 앞에서 조로에게 장난감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매번 추격에 실패한다. 라몬 대위는 롤리타에게 반해 두 번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첫 번째 거절에서는 조로에게 부상당하고, 두 번째 거절에서는 강제로 키스하려다 등장한 조로에 의해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쫓겨난다. 이로 인해 라몬 대위는 조로에 대한 복수에 이를 갈고 폴리도 가문까지 엮는다.

 

롤리타는 다른 의미로 마음에 불이 붙었다. 돈 디에고 베가가 떠난 후 그가 더 열정적이기를 바라며 조는 사이,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옆에 조로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바라마지않던 열정적인 언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범죄자로 쫓기는 사내지만, 그의 행동에는 비겁함이 없고 당당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 게다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라몬 대위로부터 구해주기까지 했다. 라몬 대위와 지사의 합작으로 폴리도 일가가 일반 범죄자 감방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으나, 그마저도 조로가 구해낸다.

 

조로가 롤리타를 구해내기 전, 그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한다. 이번에는 자신을 쫓던 신사들의 마음에 열정을 지핀 것이다. 불의를 참지 않는 진정한 신사 정신을. 그들은 조로를 도와 폴리도 가문 구출에 일조한다. 최후의 장면에서 조로와 롤리타가 술집에 갇혀 차라리 함께 죽기를 바랄 때도 신사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해 지사와 군인들을 저지한다. 이들의 열정에 반한 디에고의 아버지, 돈 알레한드로 베가도 공식적으로 합류해 조로 지지를 선언한다. 덕분에 조로와 롤리타는 죽음 앞에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고 목숨까지 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로가 마스크를 벗으면서 일대의 모든 이들에게 환호성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적이고 당당하며 칼 솜씨가 뛰어난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이 바로 무기력하고 소심하며 항상 지쳐있던 돈 디에고 베가였던 것이다! 디에고는 열다섯 살 때, 자신과 친하던 인디언과 수도사가 핍박 당하는 것을 보고 조로가 되기로 결심했고, 모두를 속이기 위해 디에고일 때는 무기력한 모습을 꾸며냈다. 진실이 밝혀지자 아들의 의욕 없음을 걱정하던 돈 알레한드로 베가도, 외모와 가세만큼 열정적이기를 바랐던 롤리타도, 그를 무시했던 곤잘레스 페드로 상사도, 조로를 따르던 신사들도 모두 기뻐해 마지않았다.

 

지금은 클리셰로 치부되는 내용이다. 물론 여전히 인기는 있지만, 흥미롭지는 않다고나 할까. 디에고와 조로가 동일 인물인 점이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났어도 읽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니 읽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에는 엄청난 반전이었으리라 생각하면 원형을 읽는 것에는 시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원형의 변주가 널리 퍼지고 퍼져서 클리셰가 되면 분명 읽은 적이 없음에도 이미 읽었던 느낌이다. 내가 가장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웅 캐릭터에 영감을 준 아버지 격의 서사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쾌걸 조로가 쓰이지 않았다면 베트맨도 슈퍼맨도 스파이더맨도 없었을지 모른다. 있었어도 이중 정체성이 가져다주는 스릴 없이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더욱 진부한 내용으로 전개되었을지도. 아니면 등장 시기가 매우 늦어졌을까. If의 세계는 뭐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쾌걸 조로가 등장했기에 나의 추억이 풍성해졌다는 점은 명확한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진부해도 좋게 평가되는 원형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영웅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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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
앙리 샤리에르 지음, 문신원 옮김 / 황소자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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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 권은 나온다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책을 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아마 극히 드물 것이다. 시간, 의지, 기술적 문제는 물론, 무엇보다 막상 풀어보면 재미가 없을 게 분명하다. 평범한 사건이라면 극적 요소와 갈등을 집어넣어야 하고, 특별한 사건이라면 적당한 긴장감과 완급 조절이 필요한데, 웬만한 이야기꾼이 아니고서야 일대기를 그렇게 조성하기란 쉽지 않다. 말로 하기도 어려운데 글로 쓰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저자 앙리 샤리에르는 해냈다. 31년 프랑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받아 들어간 도형지에서 탈출해 자유인 신분이 되기까지 장장 13, 길고 지난한 과정을 한시도 지루할 틈 없이 풀어낸 소설이 빠삐용이다. 앙리 샤리에르는 웬만한 이야기꾼을 넘어 대단한 달변가였다. 게다가 책머리에 있는 초고 편집자의 글을 보면 구두점과 오탈자 빼곤 손댄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천부적인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을 담은 소설은 다양한 탈출 시도를 담고 있다. 첫 번째 탈출은 생로랑 도형지의 병원에서, 두 번째는 리오 아샤,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는 콜롬비아 감옥, 일곱 번째는 루아얄 섬에서, 여덟 번째는 생 조제프, 그리고 마지막 아홉 번째 디아블 섬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영국령 기아나의 조지타운을 걸쳐 베네수엘라로 이동한 빠삐용은 얼마간의 수용소 생활을 거친 후 베네수엘라 시민증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자유인이 된 것이다.

 

자유인의 신분을 얻는 과정에서 빠삐용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첫 번째 탈출에서 미리 매수한 브로커 지저스라는 인물은 받은 돈에 비해 너무 낡은 배를 주어 빠삐용 일행을 곤경에 빠뜨릴 뻔했지만, 브르통과 나병 환자들 덕분에 멀쩡한 배를 구해 지장 없는 항해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탈출 후에 만난 과지라 부족은 빠삐용에게 두 번 다시 없을 행복한 시간을 선사했다. 그들과 동화되어 지낸 몇 개월의 기억은 빠삐용이 독방에서 격리 수감 생활을 할 때 버팀목이 되었다. 특히 과지라 부족 아내인 랄리와 조라이마는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드가의 형인 조제프의 도움을 받아 여러 번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자신의 생계(그는 포주였다.)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조제프는 빠삐용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루아얄에서는 마튜 카르보니에리, 부르세, 나릭, 케니에의 도움을 받아 탈출용 땟목을 거의 완성할 뻔했다. 베베르 셀리에가 밀고하지만 않았다면. 빠삐용은 그를 죽일까 고민했지만, 스스로 그를 죽일 권리가 없다고 결론 내려 놔둔 것이 화근이었다. 생 조제프로 이송되기 전에 빠삐용은 셀리에를 죽였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인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생 조제프에서는 미친 사람인 척하여 요양원에 들어가 탈출을 꾀했다. 의무병으로 지원한 실뱅과 함께 기름통과 물통으로 만든 뗏을 이용했으나 파도를 계산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뗏목은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빠삐용은 푹 젖은 채 간신히 살아남았다. 실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박살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빠삐용은 무기력에 빠져 미친 척을 관두고 다시 정상인 수용소로 돌아갔다. 그는 군의관에게 말해 디아블로 수용소를 옮겼다. 끝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디아블은 상대적으로 육지가 가까운 작은 섬이어서 탈출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에서 창이라는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실뱅과 함께 코코넛 부대로 만든 뗏목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 바다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육지에 도착하지만, 실뱅은 유사를 조심하지 않아 빠져 죽고 말았다. 빠삐용은 그런 친구를 둔 채 살고자 떠나는 자신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아얄의 육지에서는 흑인 장의 도움을 받아 창의 동생이 있는 이니니 수용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창의 동생인 치치와 다른 중국인 반 위와 함께 배를 구해 조지타운으로 완전히 탈출했다. 평화롭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은 탈주자여서 빠삐용은 다른 프랑스인 탈주자와 함께 조지타운을 벗어났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 도착해 영원한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했다.

 

벽 앞면은 문명사회가 허울 좋게 그려져 있고, 뒷면은 거칠거칠한 콘크리트의 질감 그대로다. 자유는 벽 너머에 있고, 그 벽을 넘기 위해서는 예쁘게 그려진 문명사회를 밟고 올라가 더렵혀야 한다. 그렇기에 제도는 넘어오지 못하게 막을 따름이다. 빠삐용의 탈출은 제도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게다가 프랑스가 아닌 베네수엘라에 정착함으로써 열강이 곧 발전된 문명사회라는 허울을 벗겨버렸다.

 

빠삐용이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나비 외에 경박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또 그의 가슴팍에는 나비 문신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하게 보면 앙리의 별명일 따름이다. 하지만 나비가 자유로움의 상징임을 생각해보면 탈출하는 과정에서 애벌레에서 번데기까지의 위험을 느낄 수 있다. 번데기가 갈라지고 화려한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나비의 모습과 드디어 자유인이 된 앙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빠삐용이 단순한 소설이었다면 감동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앙리 샤리에르의 실제 탈출 경험담이 바탕이어서 나에게 다가오는 감동도 커다랬다. 코로나와 취업 준비로 나는 나름대로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할 입장은 아니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1:1로 비교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근성과 집념은 시대를 막론하는 역량이기에 나의 나비를 날리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빠삐용은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할까. 나에게 당면한 과제다.

"그놈의 우리 아름다운 조국에는 아름다운 정의감은 없는 것 같아요, 드가. 우리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더 인간적으로 다루는 나라는 많을걸요." - P77

과지라 부족은 백인들이나 다른 부족들이 몹시 두려워하는 부족이지만 내게만큼은 잠시 숨을 돌릴 정박항이었고, 문명세계 인간들의 사악함에 비교도 할 수 없는 피신처였다. - P260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만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나의 유일한 종교이다. -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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