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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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잖아요! 라고 말하던 앤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앤 덕분에 세상을 한톤 쯤 밝게 볼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았구요. 그때의 분홍빛 도는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던 책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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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포토스의 배 - 제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쓰무라 기쿠코 지음, 김선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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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사는 여자들의 모습은 참 많이 비슷한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대학을 다니느라 바쁘고, 중반이 되면 취업하느라 정신이 없고,

20대 후반이 되면 한 곳에 일을 꽤 한 상태가 되면서 일 자체가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찌됐건 학자금을 다 갚고 조금이나마 목돈을 모을 때까진 여기 있도록 하자, 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첫 회사에서 에게 적의를 느끼는 사람 때문에 1년을 채우기 힘든 상황까지 비슷한 걸 보면 이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사회에서 찍어내는 '경험의 붕어빵'의 대상이 된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똑같이 다 겪어야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걸까?   

 

 

여행 항로를 보며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아우트리거 카누를 탈 생각에 목표가 생긴 것 같아진 나가세.

 

p.14

아마도 나는 지난주, 걷잡을 수 없이 일하기 싫었던 것이리라. 남 일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공장 월급날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며 늘 마찬가지인 박봉 명세서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그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 눈 똑바로 보면서 미움 받는 게 얼마나 독인데.

  

     

공장에서 일하며 친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토요일은 상공회의소에서 노인을 상대로 컴퓨터 강사 일을 하면서 이따금 집에서 데이터 입력 부업도 하는나가세는 아르바이트로 버는 것을 생활비로 쓰고 월급은 통째로 저축을 하기로 한다.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소설은 그 배경이 10년 전이다. 2000년대 초반, 우리가 IMF를 힘겹게 넘기고 있는 동안이었다. 일본의 경제상황은 우리와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일본의 경제가 몰락한 게 그렇다면 20년 전쯤이고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으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당시 젊은이였던 일본사람들은 20년 전부터 느끼며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은 하지만, 나 자신의 비루한 삶을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기분. 한번 사는 삶인데, 미디어속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우리의 삶은. 이라는 기분이 안 들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죽었다 생각하고 번 돈 모아서 1년 동안은 내 맘대로하고 싶은 소망이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 같다.

 

지인 중에 한 명은 올 추석에 여름휴가를 보태 2주간 영국에 셰익스피어 투어를 갈 거라고 했다. 일에 쪼들리지 않는 대신, 떠날 자유는 없는 나는 사진 많이 찍어 와서 보여달라고 했고, 지인은 셰익스피어의 정기를 듬뿍 나누어주겠다고 했다.

 

나가세는 생각지도 못했던 보너스를 받고 163만엔을 채우게 된다. 목표 금액을 모은 그녀의 기분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직장 동료에게 홍차와 스콘을 대접하고, 에나에게는 딸기 모종을 사줄 생각을 한다. 그리고 떠날 크루즈 여행의 포스터를 보며 인사한다.

또 만나. 하고.

 

 두 번째로 실린 <12월의 창가>는 또 다른 느낌이다.

 

<12월의 창가>를 읽으면서, 그 시기를 겪는 동안 작가는 아마 몸을 떨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첫 직장을 다니면서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에 이르러 집에만 오면 신경질이었다

 

 

학교는 돈을 내고 다니지만, 직장은 돈을 받고 다닌다. 그래서 쉽게 안 나갈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도 없다. 실수가 하나 생기면 바들바들 떨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찾고, 알고 보니 내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함부로 혼낸 것에 대한 사과를 받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첫직장에서 내가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OO, 이제 애 아니에요

. OO, 애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일 제대로 못 해요, 라는 애와 비교하는 말이었다.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핀잔을 듣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한 일이라 조기 취업을 하고 학교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나는 학교를 간다는 핑계로(좀 더 배워야겠다고) 1년을 못 채우고 퇴사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아르바이트 같은 것을 하며 취업전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진 않았다. 직장 생활의 무시무시함을 떨쳐 내지 못한 것이랄까. 좀더 사회인이 되는 걸 미루고 싶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그 분의 말처럼, 난 애처럼 굴고 있었다. 그럼 뭐 어떠냐 싶었다. 어차피 그만큼 못 번 것은 나중에 오래 일해서 벌든가, 뭘 안 사서 지출을 줄이던가, 내가 알아서 할 몫이었다.

    

 

쓰가와의 상사인 계장은 업무에 관한 트집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재능을 보여준다.

거래처에 출고할 봉투를 만드는 게 늦었다느니 하청업체 시간제 직원과 전화로 담소를 나누었다느니

자기가 말을 거는데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느니 하는 이유로 V계장은 쓰가와를 질타한다.

 

죄송하다고 하면 단 줄 알아? 하고 따지면

죄송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하고

그렇게 일할 거면 그만 두라고 하고 그러곤, 그래도 그만둘 건 아니지?

니가 그만둬봤자 네가 갈 곳은 없어, 라는 말을 하고.


 

견디다 못한 쓰가와가 사표를 내자 계장은 매일 같이 그녀를 붙잡고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아? 이제부터 바빠지는데 넌 사람도 아니야, 난파하려는 배를 버리는 망할 년이야,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매일같이 자신의 고통+ 넋두리를 들어주던 친구 나가토는 상사의 신임을 받는데

어느날 상사가 무차별 폭행범에게 폭행당해 입원을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근처에 출몰한다던 무차별 폭행범으로 변장해 상사를 폭행했다.

신임도 얻고, 진급도 남들보다 빨리 하게 됐지만 그건 아무런 보상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퇴사를 전하는 쓰가와에게 축하한다며 나가토는 말한다.

고립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일할 수가 없었어.

언젠가 해치울 거라고 스스로에게 증명하지 않고서는.

아마도 나가토에게 그건 숨 쉴 구멍을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둘 수는 없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으니까.


 


쓰가와는 속으로 사과한다.


-미안해요. 당신은 그래도 나보다 나을 줄 알았어요. 분명 그렇지 않았던 거죠.


 

 

퇴사를 한 쓰가와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채 일을 계속 하는 나가토도,

크루즈 여행을 계획한 나가세도

다시 서른을 넘기고 일이라는, 친구인 듯 적인 듯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삶 속으로 다시 한 발 내디뎌야 한다.


 

솔직히 읽을 땐 이렇게까지 내가 공감을 하고 있는 줄 몰랐는데

인물들에 대해 쓰다 보니 몰입이 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작가가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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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26살이 되면서 나는 사회인이 되었다. 바쁘게 살았다. 열심히, 최선을 다 해서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는.

 

한동안은, 그 시기에 더 더 열심히 살 걸, 뭐라도 더 많이 배울 걸, 이라는 후회를 얹어 생각한 적도 있지만, 어쨌든 그 시기 나는 9시 반에 출근해서 8시 혹은 9시까지 일을 하고 일을 마치고 나면 지쳐 잠들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다. 학자금을 갚아야 하기도 했고, 갖고 싶은 걸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사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27살에 만난 남자친구와는 28살에 헤어졌다. 웬만하면, 이 정도면 결혼해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만큼 관대해지려고 했는데, 보수적인 남자였고 그걸 고칠 생각이 없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하게 느꼈다. ‘ 여자는 결혼하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고, 자신이 들어오면 기쁜 얼굴로 맞이해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나는 일이 좋았다. 무슨 일이 되었든 사회에서 내 위치를 갖고 일을 하는 것이 좋았고, 그 관계 속에서 인정받는 것이 즐거웠다. 비록 일이 주는 스트레스가 클지라도.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의 '내 여자'이고 싶지 않다고.

나한테는 남편만을 기다리며 집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고 외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32, 지금 내 주변에는 28살에 결혼하는 여자 지인들이 꽤 된다. 오래 만나서 이 사람만한 사람이 없어서라는 생각에 결혼을 하는 동생도 있고, 남자친구가 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다 가끔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아직은 결혼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혼자라서 드는 안도감이 더 크다.

 

큰 단점이 없어서.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결혼을 쉽게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멀어지는 것도 분명 있었다. 함께 영화 얘기, 책 얘기를 나누던 여자 지인들이 이제 거의 없다.

결혼을 한 친구들에게는 책과 영화 이야기보다는 결혼해서 만들어가는 자신들의 세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항상 먼저 문득 인사를 건네던 내가 이제 더 이상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안부 인사나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면 언제부턴가(정확힌 내가 29살이 되면서부터) 넌 결혼 안 해?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안 하다 보니 점점 더 연락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카카오톡에서 그 사람의 일상이 궁금하고 말을 걸고 싶지만 이제는 서로의 관심사가 너무 달라졌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어지고 만 것이다.

 

결혼이 나쁜 것도 아니고 혼자가 나쁜 것도 아닌데, 어떤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쪽을 선택한 것 같아진 기분이다. 언젠가 만나질 수도 있고, 다시 만나질 수 없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

 

그래도, 아직은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혼자 무거운 걸 들고 올 생각을 하면 팔이 아플까 걱정되고, 이러다 결혼 안 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친구도 있고 남자친구도 곁에 있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러니까 혹시나 결혼한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생활이 충분히 행복하다고 해도 결혼 안 한 사람들에게 결혼 안 하냐고 너무 묻지 말자. 그냥 지금 사는 거 재밌어? 어때? 정도로만 묻자. 그럼 대부분, , 충분히 괜찮아.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 라고 대답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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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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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바

 

 

어렸을 때부터 노력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가진 소년이 살았다.

 

경제력 있고 믿음직한 아버지, 배우처럼 예쁜 엄마, 누구나 뒤돌아볼 귀여운 외모, 비록 희한한 정신세계를 가진 누나 때문에 엄마와 누나 사이 묘한 긴장감이 흐르긴 하지만, 소년 아유무는 나쁘지 않게 성장한다. 무언가 사건이 생기면 모르는 척하고 눈치를 보며 살지만 불행이랄 것까진 없는 삶이다.

집은 부유하고 친구들은 나를 좋아해주는 삶.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소년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그 처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가족을 떠난다 어머니와 이혼하긴 했지만 생활비와 집의 소유는 어머니 것으로 해둔 채. 그리고 어머니는 그 아버지가 대주는 생활비로 끊임없이 남자를 만난다.

 

대학생이지만 딱히 직업을 구할 생각은 없는 아유무.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몇 년간 돈걱정 없이 살 수 있기에. 아유무의 여자친구 아키라는 원하던 분야 회사의 직원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는 동안 아유무는 빈둥거리러 영화동아리에 들게 된다. 그곳에서 고가미라는 여자 후배를 만나게 된다. 원래 있던 멤버 중엔 여자가 없던 동아리라 딱히 예쁠 것도 없는 아이였지만 술만 마시면 유혹해 관계를 갖는 헤픈 여자애, 라는 걸 알게 되고 경멸하게 된다.


어느날 다가와 자신을 경멸하냐고 가볍게 묻는 고가미. 아유무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묻는 고가미에게 놀라지만 정작 고가미는 아무렇지도 않다. 경멸받는 건 편해요, 라며.

 

어제 저녁의 성관계 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고가미와 친해지는 아유무.

어쩌면 이 아이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일까? 너 부끄럽거나 하는 일이 있어? 라고 묻는 아유무에게 고가미는 사실 부끄러운 일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물건을 꼭 가져야 하는 습관 때문에 물건이 늘어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방이 지저분해서 부끄러울 것 같다고 말하는 아유무에게 고가미는 고개를 젓는다. 지저분한 것은 부끄럽지 않아요.

고가미는 방이 어지럽고 지저분해서가 아니라 언니가 죽고 나서도 끊임없이 살아가고, 사는 동안 자신의 취향을 갖고, 그 취향을 늘려나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지저분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생각하는 아유무의 기준이다.

그러는 동안 아키라는 몇 번의 고배를 마신 후 어느 영상업체에서 일을 하게 된다. 비록 아르바이트할 때보다 벌이도 적고 훨씬 더 많이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인데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아키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키라가 안쓰러워 아유무는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키라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어느 정돈 무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여 말한다.

 

넌 언제나 분발하는 사람을 무시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선택받는다고 생각하지? 언제나 수동적인 자세로,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냐?

 

라고. 아유무는 그동안 자신이 수동적으로 있었던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무어라 말하고 싶지만 같은 수준이 되기 싫어 입을 다물고 만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 많은 시간 동안 아유무가 그토록 수동적이었던 이유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으니까. 그리고 조용히 아키라와 헤어진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결혼을 한다고 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피어싱을 하고 8살 어린 남자와.

아유무는 그렇게까지 지독스럽게 자신의 행복에 매달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이기적인 엄마를 뒷바라지하고 받아들이는 아빠 역시 이해할 수 없고, 무언가 믿을 만한 것을 찾아 고둥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퍼포먼스를 하는 누나를 이해할 수 없다.

 

아유무는 무료로 나눠주는 레코드샵의 잡지에 글을 쓰다 잡지 편집자로부터 일을 의뢰받게 된다. 유명인도 인터뷰하지만 소소한, 정말 소소한 예능인들도 인터뷰하는 그런 일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인기 많고 지적이었던 친구 스구를 만나게 된다. 티라미스 분장을 하고 다니는 예능인 티라미스가 스구였던 것.


대지진 이후 밝음을 잃어버린 스구. 이어 미국의 9.11사건을 보고 난 스구는 왜 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자신은 왜 죽지 않은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지고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살아갈 의미를 잃고 만다.

그러다 후지산을 보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떠난다. 그냥 걷기만 한다. 걷는 도중에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후지산을 보고 난 직후 스구는 엄청나게 허기를 느끼고 만다. 그리고 수중에 있던 돈과 꼭 맞아떨어지는 티라미스를 먹고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에 살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준 티라미스를 위해'티라미스'분장을 하고 티라미스를 외치고 다닌다.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아름답다는 느낌은 안 드는, 어찌 보면 이해하기 힘든 그런 일이다.


서른셋밖에 안 되었지만 예전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이성들이 먼저 다가오던 매력적인 외모를 잃은 아유무. 언제부턴가 빠진 머리카락은 이제 모자로 가려야하는 처지가 됐고 살도 점점 찐다.

 

퇴직 후 출가를 한 아빠를 찾아가는 아유무. 그리고 아빠가 고행 같은 삶을 사는 이유도, 엄마가 기를 쓰고 행복해지려고 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아빠와 엄마는 원래 사랑하면 안 되는 사이였다. 그래서 상처를 준 사람에게 약속한다. 아빠는 뭐라도 할게라는 약속을, 엄마는 선배에게 가혹한 짓을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살게요라는 약속을.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자신을 믿고 있던 선배에게 배신을 한 두 사람.그리고 약속을 한 두 사람. 아빠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엄마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

그 댓가로 아버지는 행복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엄마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그모든 것을 놓고 행복해져버렸고, 엄마는 불행해져버린다.

어렸을 적 이집트에서 알게 된 친구 야곱을 떠올리는 아유무. 야곱과 아유무가 나누는 인삿말이 있다. 사라바! 원래는 안녕이라는 뜻의 맛살라마 라고 했던 것을 아유무가 처음으로 아무 의미 없이 붙인 이름이었다. 맛사라바, 라고 하던 것을 야곱이 사라바라고 인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라바는 어느순간부터 많은 의미를 담게 된다. 내일도 만나자, 잘 있어, 약속이야, 굿럭, 갓 블레스 유.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는 아유무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하며 왼발을 내딛으면서 소설이 끝이 났다. 

처음엔 이 책이 왜 이렇게 인기가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왜 인기가 있지, 라기보다 왜 이 책이 시점대상 2위인 거지? 라고 생각한 게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점대상은 서점 직원들이 독자들에게 추천을 한 것을 순위로 매긴 것이니까. 그러다 이 책이 꿈꾸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위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십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만큼 물질은 풍족해졌고, 따뜻한 집에서 손쉽게 정보를 얻고,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꿈꾸는 일만큼은 게으른 요즘 젊은이들. 이렇게 많은 걸 누려보고 많은 걸 배운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고 싶은 게 없는 시대라니.

아유무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걸 잃게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했으니까. 비록 주목받고 싶어 안달나 밥도 안 먹고 깡마른 난해한 정신세계의 누나는 골칫덩이지만 누나만 빼면 자신의 삶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날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누나는 알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빡빡 밀었던 머리는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자라있고, 그래도 마른 편이지만 예전에 비하면 살도 조금 올라있다. 동양적인 미, 라고 할 만한 외모를 갖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옆에는 금빛 속눈썹을 가진 남편과 함께. 그리고 이제 자신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아유무는 외모도 잃고 이젠 여자친구마저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밖에 만날 수가 없는 이때에.

아유무 생각엔 누나가 가진 위치가 원래 자신의 위치여야 맞을 것 같다. 보기 좋은 몸, 아름다운 배우자.

 

하지만 아유무는 알지 못한다. 누나가 얼마나 전력을 다해 자신의 삶이란 것을 이해하기 위해 싸워왔는지. 아니 싸운 것은 물론 누나 다카코 뿐만이 아니다. 아빠도, 엄마도 전력을 다해 싸웠다. 스구도. 고가미도, 아키라도, 비록 자신을 이용해 인터뷰를 따낸 사치코까지.

 

 

 

비록 남들이 이해못할지라도. 아유무는 그저 흘러왔을 뿐, 자기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에만 매달려 왔을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유무가 보기엔 비정상 같아보이고, 헤프고,

이기적이고, 속물이었던 모든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상처를 잊지 위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계속해서 한발짝을 내딛었던 사람들이었다. 너무 쉽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모든 선물들을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입장에 놓이고 나서야 아유무는 제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마음의 심지를 가지고 말이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살긴 사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이 계속 드는 것이다. [사라바]를 읽고 나서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 역시 비록 원하는 위치에 오르지 못한 아키라 같고, 미치광이 같은 스구처럼 다른 사람에겐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만큼은 행복하니까, 그거면 나쁘지 않은 거구나 하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 같다.


혹시나 무얼 해야 하는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은 순간을 지나고 있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 혹은 동생에게 꼭 읽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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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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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들어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책을 잘 못만났다. 고전을 좋아하지만 장르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일 때문에 피곤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책들조차 요새는 재미가 없었었다. 추리물들조차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흡입력이 좋지 않아 끝까지 읽지 못하고 흐음, 하고 덮어버리던 때가 많았는데 그믐,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시금 책읽기의 기쁨을 준 책이었다.

밝은 기운이라고는 없지만, 심지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신선했다. 신선했다는 말이 조금 이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울한 느낌은 그늘이 진 느낌이고 그늘이 진 느낌은 신선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니까.
각자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신기해서 신선한 것라고 느끼는 걸 수도 있겠다. 어떤 평론가는 이 소설을 죄와 속죄에 관한 이야기라고 썼던데 뭐 그렇게 보는 수도 있겠지만 난 그냥 한 남자를 두고 한 여자는 사랑을 향해 한 여자는 복수를 향해 가는 이야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남자와 여자가 끝과 결말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다.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이런 점이 참 안 좋아. 왜냐하면 어떤 만남이 어떻게 끝이 날지 뻔히 보이거든.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안 좋게 끝나? 여자가 물었다.
너는 어떤 게 좋아? A, 약간 짧지만 완벽하게 기승전결이 되고 아련한 마음으로 헤어지는 인연. B, A하고 똑같은 기간을 보낸 다음에 조금 더 시간이 추가되는데 끝날 때 굉장히 안 좋게 끝나는 관계.
시간이 얼마나 추가되는데?
글쎄. 하루 정도라면?
그렇다면 A지. 하루 차이가 뭐 중요한가. 다 끝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게 중요하지.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결말에 나와있다. 남자가 항상 짐작하던 방식으로 결말이 나는데 그가 짐작한 것을 여자도 짐작했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결국 공유되지 못한 부분이라는 게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보기엔 어렴풋이 짐작은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결말의 순간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남자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자신의 삶을 갉아먹어나가는 가해자를 이해하는 방식을, 여자가 완전히 이해했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여자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자 곁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네가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여자가 고양이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집에 들어갔으면 정말 미쳐 버렸을 거야.
진짜 웃기는 게, 내가 이제 아빠 심정을 알 거 같아. 아빠가 왜 그렇게 엄마를 지긋지긋해했는지.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한상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하루종일 심심했던 거야. 누구랑 말을 하고 싶은데 계속 참았던 거지. 내가 집에 들어가면 현관에서부터 나를 졸졸 쫓아와. 옷 갈아입고 있는데 옆에서 막 얘기를 해. 오늘 자기가 어디 마트를 갔는데 집 앞 마트에서는 한 봉지에 오백원하는 콩나물을 거기서는 사백오십원 하더라, 그런 얘기. 나는 마감 끝나고 집에 가면 정말 사람이 파김치가 돼서, 그냥 불끄고 자고 싶거든. 누구하고도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야. 그냥 지갑에서 천원짜리 한장 꺼내서 던져주면서 그걸로 콩나물 마음껏 사시라고, 대신 그런 이야기 나한테 하지 말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엄마가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해. 나는 오줌 누고 있는데 화장실 문밖에서 이모가 이번에 대만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렇게좋았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해. 자기도 보내달라는 얘기지. 그리고 우리 엄마는 맨날 어디가 아파. 병원 가보면 별것도 아닌데 내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엊그제는 나한테 자기 눈알이 튀어나온 거 같지 않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어. 눈이 아프대. 내가 보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 볼살이 빠져서 그런 건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니까 몸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신경이 쓰이나봐. 그런 이야기를 나 잠들 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해. 우리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거든. 거실이랑 침실. 잘 때 요 깔고 누워 있으면 누워서도 그런 얘기를 해. 듣다보면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내가 자기 얘기를 안 들어주면 엄마가 너한테 그 돈을 왜 들였나 모르겠다, 돈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말해. 여자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아빠 심정이 이해가 가. 엄마를 막 때리고 가구도 다 때려부수고 싶어. 그 입 좀 닥치라고.

좀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결말에 다다르고 말 것 같다. 굳이 반전이 있는 소설이 아니라도 내가 스스로 이야기를 따라가며 결말을 맞이하는 게 소설과 만나는 가장 행복한 방법 같다. 내가 아직 어떤 책을 읽지 못한 독자라면 분명 그럴 것 같다. 이야기의 손을 잡고 조금씩 걸어가다가 어떤 장면과 확 마주쳐야 하지, 누군가 그 장면에 대해 '이랬대!' 하는 외침을 들은 후에 그 장면을 마주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느껴지는 울림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여자 곁을 떠나고 여자가 혼잣말처럼 묻는다. 단어들의 순서를 바꿔가며.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소설 속에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그 '남자'는 정말로 누구였을까. 그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 걸까.

책을 덮어도, 다른 소설들 속 어떤 특이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들보다 더 오래 기억이 날 것 같다, 이 이름 없는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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