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이름도 잊히지 않게 - 여성 미스터리 소설집
서미애 외 지음 / 에오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 개의 소설 하나하나 다 재미있다.

영상화되기에도 완벽한 설정이다.
캐릭터 성격이나 인물 묘사, 도입부 흠잡을 데가 없다.

개인적으로 <까마귀 장례식>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사고사로 위장되어 죽은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같은 동네 절친한 사이였던 베트남 여인이 집요하게 추적해서 범인을 밝혀내는 이야기인데 뭔가 <와이 우먼 킬>의 판권을 사서 한국 버젼으로 새롭게 리메이크한다면 에피소드로 들어가도 좋을 정도다. 한국적인 느낌+ 농촌이 배경인데, 희한하게도 개연성이 풍부하면서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세련되어서 읽는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농촌이 배경인데 이렇게 서사가 안 촌스럽다고?’

이러면서. 한여름밤에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소설이면서, 중간중간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많아 너무 좋았던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숙한 과부들을 위한 발칙한 야설 클럽
발리 카우르 자스월 지음, 작은미미 외 옮김 / 들녘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
제목을 보고 엄청 야한 걸 기대하신 분도 있을 거고,(저요!! 저요!!) 그러라고 작가도 이런 제목으로 지은 거 같은데 만약 제목 때문에 책을 고른다면 여러분은 낚이게 된다. 그렇다고 안 야하다는 건 아니고, 그런데 또 이 책에 흐르는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야한 건 또 아니다(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마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같은 야한 장면들이 끊임없이 폭발하는 그런 소설은 아니지만 이 소설 속 야한 장면들은, 그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만든 야한 이야기’여서 그녀들의 못 다 이룬, 차마 해보지 못한 섹스 판타지가 들어가 있다.

여기서 그녀들, 이란 과부들이다. 사회적 금기 때문에 정숙하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이런 야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재능 있는 여자들’. 웹소설 시장이 두 손 들고 환영할 ‘재능’일 텐데 아깝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야설클럽을 통해,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폭발할 것 같은 욕구’를 이야기로서 분출하던 여성들이, 그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이후에 어떤 살해범을 찾아내고 잡아낸다는 것이다(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아무것도 스포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자살로 마무리했고, 그래서 자살로 묻힐 뻔 했지만,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던 여자의 생을, 야설 쓰던 여자들이 찾아낸다.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이야기 초반, 주인공이자 20대인 법과대학 중퇴생 니키가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부분과 동생 역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짐을 분담해주길 바라는 언니의 목소리를 그린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 사실 예전 같으면 ‘다들 가족끼리 싸우고 사는구나. 가족은 왜 이리 힘든 걸까.’ 하며 무겁게 읽혔을 텐데 ‘그래, 사실 각자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드러내다 보면 충돌 지점이 생기고, 그렇다면 감정이 겪해지는 게 당연한 거지.’로 읽힌다.

각자의 상황을 말하는 건 격한 감정이 표출된다고 해서 싸우는 건 아니다. 그냥 일시적으로 감정이 겪해지는 것이지.

참고로, 니키 속마음은 ‘사실 정확히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음. 뭘 목표로 해야하지? 어쨌든 지금 들어간 법대는 아닌 거 같아.’인데 어쨌든 장녀인 언니 민디의 목표는 ‘괜찮은 남자와의 결혼!’ 이라는 ‘전통적으로 어른들이 바라는 목표’와 부합하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엔딩이 무척 상큼하게 끝나는데 마치 영화관에서 기분 좋은 가족영화 또는 산뜻한 여름 로맨스 영화의 싱그러운 엔딩씬을 보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빨리 읽히고, 재미있고, 중간중간 야하고, 무엇보다 기분좋게 책을 덮게 만들어주었던 책.

*출간 전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이나 매우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gimsieun20
인스타에서 좀더 자세하게 썼습니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반쪽
브릿 베넷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오래전 꽤 유명한 시나리오 창작 수업을 듣던 때가 있었다. 그 수업의 종강 뒤풀이 때 강사님이 갑자기 자유 질문할 거 있으면 아무거나 하라고 한 적이 있다. 시나리오 쓰다가 막히는 부분 궁금한 거든 인생 상담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변해주겠다고.

누군가가 수업 끝나고 한동안 쉬실 텐데 뭐하시고 싶냐고 물었다. 심오한 질문도, 공부 커리큘럼과도 무관한 질문인데 강사님이 생각보다 머뭇거리면서 솔직하게 말해도 되요? 하고는 다들 그렇다고 하자 대답했다.

-여러분들 글 거지 같은데, 그걸 어떻게든 읽고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고 나아지게 하는 게 제 일이긴 한데, 그런 글 읽으면 너무 스트레스예요. 본인이 생각해도 진짜 엉망진창인 글 쓴 사람 있잖아요. 그런 쓰레기 같은 글 말고, 진짜 잘 쓴 글, 플롯 탄탄한 좋은 이야기 그런 걸 제대로 읽는 시간을 좀 주고 싶네요.

<사라진 반쪽>이 어쩌면 그 강사님 취향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진짜 잘 쓴 글’, ‘플롯 탄탄한 좋은 이야기’.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조를 잘 세워서 만든 건축물 같은 이야기.

📚
백인으로서의 베네핏을 항상 부러워하다가, 백인으로 살기로 한 하얀 흑인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의 쌍둥이 자매.

‘한 여자’가 사라지고 그녀의 진실을 찾기 위한 스토리는 오래 전부터 스토리텔링의 인기 있는 소재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화차>가 있고, 최근 방송중인 <안나>도 주인공이 부유한 사람인 척을 해서 겪게 되는 사건들과 그 인물의 심리묘사를 그린다는 점에서 <사라진 반쪽>과 같은 계열로 볼 수 있겠다. 원하는 삶을 갖기 위해 끊임 없이 죄책감 없이 거짓말하는 여자 이야기로는 <애나 만들기>도 떠오른다.

📒
책에는 데지레와 스텔라 두 자매가 나온다. 학생인 둘에게 엄마는 어느날, 고등학교는 그만두고 이제 일을 하라고 명령한다. 그동안 혼자서 세 식구를 먹여살려야 했던 엄마로서는 더이상 생계라는 가혹한 짐을 혼자 지고 있을 수 없어서 한 명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꿈 많은 소녀였던 둘은 엄마가 명령한 삶에 승복할 수 없었고 이곳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며 어느날 함께 가출한다.

스텔라는 함께 도망친 그곳에서 얼마 안 있어 완벽하게 백인이 되기 위해 언니인 데지레를 떠나고 만다.

그리고 백인인 척을 하여 취업도 하고, 결과적으로 부유한 백인남자와 결혼도 성공한다. ‘백인인 척을 한 덕분에’ 부유하고 다정한 백인남편, 좋은 집, 예쁜 딸, 대학교수지위(이건 그녀의 노력이지만 그녀가 검은 흑인이었다면, 백인으로 보이는 지금과 똑같은 루트로 교수직이 주어졌을 것인가)를 갖게 된 스텔라. 백인의 베네핏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 스텔라. 그러면서 죄책감과 불안을 느끼는 스텔라.

14년 후, 데지레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딸과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그에 비해 (잘 살고 있는) 스텔라는 흔적을 알 수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없던 스텔라를 20년이 훌쩍 흐른 뒤에 데지레는 뜻밖의 상황으로 만나지만, 이제 스텔라는 자신의 자매였던 예전의 스텔라가 아닌,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백인으로서의 스텔라가 되어 있었다. 백인이기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로서 말이다.

📔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분은 데지레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좀더 공감이 가고 피부색을 바꾼 선택을 한 스텔라에게는 거리감이 든다고 하면서 독자에 따라서 두 사람에 대해 반대의 감정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역자의 추측처럼 스텔라에게 좀더 공감이 되는 부류였다.

우리는 문학작품이나 실제 뉴스들을 통해 ‘옳은 선택이나 훌륭한 선택을 하고’ 그 댓가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경우를 본다. 예를 들자면 흑인들이 백인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기를 바랐을 때, 흑인들이 흘려야 했던 수많은 피의 역사를 알고 있고 그래서 의문이 든다. 옳은 선택은, 그 자신의 몸에게도 옳은 선택일까 하는.

데지레의 삶이 훨씬 더 굴곡이 많았고 스텔라는 끊임없는 거짓말 덕분에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스텔라의 삶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다면 인생은 그걸로 된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브 (양장) 소설Y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장과 치유의 서사, 라는 수식어는 아직 다 성장하지 않았으며 다친 상태를 극복하고 싶다, 는 욕구로 읽힌다.

2057년, 멀지 않은 미래. 서울은 물에 잠기고 산에서 사는 아이들과 어른. 선율은 잠수용구 덕분에 기억을 담은 채 기계인간이 된 ‘수호’를 물속에서 건지고, 또 깨우게 된다.

인간과 ‘인간에 가까운 기계인간’의 우정은 최근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의 태양을 떠올리게 했다.

sf 소설이라는 설정 치고 서정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여운이 많이 남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작가 지망생들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주는 매혹 때문이었다. 


글을 쓰고 싶어하고, 그래서 노력해본 작가 지망생이었던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글 쓰는 것,만으로 그것을 생계 수단인 직업으로 삼기에는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그리고 나면 현실로 돌아와 밥벌이가 될 법한 일을 갖는다. 


그렇지 않고 무모하게도 글로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눈물겨운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글로써 정확하게, 혹은 섬세하게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게 팔릴 만한 것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글을 쓰는 일' 이다.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 자신 혼자 써서는 절대 알 수가 없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끊임없는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합평,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피드백

주인공인 '나'가 처음으로 빌리를 인지하게 된 것은 대학의 순수예술 석사과정 프로그램의 합평 시간이었다. 모두들 '나'의 소설을 읽고 잔인한 피드백을 준다. 진부하다, 모호한 예가 많다, 중상위층 징징이 같다. 하지만, 빌리만은 자신은 생각은 다르다며, 장점을 담은 피드백을 주고 이렇게 덧붙인다.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이 소설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p.22


마치 스트릿우먼파이터에서 1:1 대결에서 지고, 섹시하지 않다는 평까지 들은 팀원에게 격려를 해주는 훅의 리더 아이키 같기도 했다. "저, 할 말 있는데요. 제가 본 모습 중에 오늘 제일 섹시했습니다."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과 대고모의 배려로 살인적인 물가의 뉴욕에서 집세와 학비, 생활비 걱정 없이 창작 수업을 듣고 있는 '나'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빌리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그의 삶이, 진짜 작가의 삶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빌리가 일주일에 3-4번의 식사 준비와 청소를 해주는 조건으로 집세를 대신하기로 하고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입주하게 한다. 


-두려움에 대하여

비싼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 샤워 시설도 없는, 아르바이트하는 바의 지하 창고에 거주하며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버티며 창작 수업을 듣고 있던 빌리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나' 역시 그와 함께 해서 만족스럽다. 어느 날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려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을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빌리는 자신의 두려움은, 결국 혼자 남게 되거나, 혼자 남지 않더라도 고독하게 살 것 같다는 생각이라고 털어놓는다. 

둘은 같은 공간을 함께 쓰지만 그 이외의 많은 상황들도 함께 한다. 결정적인 사건은, 빌리의 친척 결혼식에 함께 가게 된 '나'가 술과 마약에 취해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여성인 줄 알고, 빌리에게 키스를 하게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이 사실은 실수였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빌리는 모든 일을 사사건건 자신과 함께 하려는 '나'가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그리고 새로운 소설에 피드백을 달라는 '나'의 부탁에 빌리는 이제껏 다른 학생들이 자신에게 했던 피드백과 비슷한 피드백을 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는 일이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상처에서 딱지를 떼어내는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한테서 뭔가가 빠져 있다고?"

"...너의 어떤 부분이 네 소설에서는 빠져 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 네 글에는 네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항상 드러나지는 않잖아. (...) 약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느낌이라는 거야.


(여기서부터 스포가 살짝 포함되어 있다.)


쇠락한 중서부 지역의 출신, 숨길 수 없던 가난이 묻어나던 빌리는 '나'의 도움으로 집세 걱정을 하지 않게 되면서 세련되어지고, 단 몇 개월만에 뉴요커처럼 보이게 된다. 그 전에도 이미 여자들에게 쉽게 어필 가능한 외모에, 아직은 데뷔 전이지만 '작가의 재능'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이미 두드러지는 동거인, 빌리.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으로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훼손해버린 후, 그 일을 자신이 한 일이 아닌 것처럼 꾸미지만, 의도치 않게 그 일에 경찰이 개입하면서 모든 것이 탄로나고 만다. 


-파국, 그리고 각자 삶의 완성

이 일 이후, '나'는 아버지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대학을 휴학하고 예전에 일하던 잡지의 교열 편집 아르바이트를 다시 하게 된다. 둘의 동거는 끝이 나고, 20대 중반의 일부를 함께 했던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우선 당장의 집세를 벌기 위해 잡지사에서 일하던 '나'는 어느덧 정식 직원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가 1년 가량 버틸 만한 돈을 모았지만 문득 자신이 작가가 될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곳에서 편집 일을 계속 한다.  


세월이 흘러 40대 후반이 된 '나'는 빌리가 눈부신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학 때 썼던 글을 장편으로 완성해서 발표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엿한 대학 교수가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현재 남들이 보기에 혼자 남게 된, 고독한 중년 남성이 되었다. 고독한 인간.

빌리가 가장 두려워하던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살다 보니 고독이라는 것이 그리 두려워할 일이 아니고 받아들일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빌리는 '나'가 가장 두려워하던, '아무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는 것'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덧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 역시 10대 중반부터 작가의 꿈을 꿨고 19살에 부산에 있는 대학교의 어느 창작 학과를 입학한 후 20대 중반, 졸업 후에도 계속 그 꿈을 위해 노력했었다. 몇 년 전,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성과 없고 오래된 그 꿈을 포기했다. 

어린 시절의 오래된 꿈이었기에 이 꿈을 포기하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 이 일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는데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담담하게 받아 들여졌다. 


나 역시 합평을 하면 동료 수강생들의 피드백으로 흠씬 두드려 맞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당시 드물게 내 글에 칭찬을 해주던 동료 수강생으로부터 얼마 전 밤늦게 연락이 왔다. 


다 같이 데뷔를 못 한 처지라도, 그 안에서조차 탁월하게 잘 쓰는 사람은 티가 났고, 그런 사람들 중 몇 명은, 몇 달 뒤 혹은 1-2년 뒤 수강생 커뮤니티를 통해 데뷔 소식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는 친절했지만, 재능 있어 보이지 않았고, 그에 걸맞게 아무런 특징 없는 글을 쓰던 동료였다. 그 역시 나처럼 데뷔를 못 했을 것이다.  


잘 지내니? 라는 그의 첫번째 질문에 네, 라고만 대답한 뒤 그 이후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 더 말을 걸었고, 그 이상 연락하지는 않았다. 


깨져버린,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나눌 만한 대화란 쓰디 쓰고, 무엇보다 진부한 징징거림 의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때까지 우리는 여러 재미난 일을 함께 겪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밤 한가운데 고요하고 외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순간은 조금 더 짜릿하게 느껴졌고, 나는 빌리에게 우리 아버지가 내 수업료를 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느낀 것과 똑같이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충동은, 빌리는 평생 동안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대해온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라는 느낌이었다. - P157

그들은 어른의 삶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나는 내 삶에 의미가 있다는 희미한 분위기라도 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단편이라는 용어가 하찮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단편소설 몇 편을 쓰고 있고, 합평에서 다소 고생을 했지만 내 성장에는 도움이 됐으며, 진지한 관계는 없었지만 하룻밤 보낼 기회는 몇 번 있었다고 말이다. - P2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