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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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도서협찬

#마이셰발 #페르발뢰

그는 피곤해 보였다. 햇볕에 그은 피부는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누르스름해 보였다. 얼굴은 야윈 편이었고 이마가 넓고 턱이 각졌다. 짧고 곧은 코 아래의 입술은 얇고 길었으며 입가 양쪽에 깊게 주름이 팼다. 웃을 때면 건강하고 흰 치아가 드러났다. 고른 이마 선 위로 검은 머리카락을 똑바로 빗어 넘겼고 흰머리는 아직 나지 않았다. 연푸른색 눈동자는 맑고 차분했다. 마른 체격에 키는 딱히 큰 편이 아니었고, 어깨는 구부정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를 잘 생겼다고 평할 여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로 볼 것이다. _39p.

_

걱정은 두 가지뿐이었다. 살인자가 자신보다 석 달 앞서 부정 출발을 했다는 점과 자신이 이제부터 어느 방향으로 뛰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불안한 전망과 올바른지 장담할 수 없는 추리를 갖고 있을 뿐이지만, 경찰관 다운 그의 두뇌는 벌써 향후 마흔여덟 시간 동안 어떤 순서로 정례적인 수사를 진행할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중략) 진정한 수사가 시작되는 순간. 그간은 흡사 칠흑 같은 어둠에 휘감긴 채 늪을 빠져나가려 버둥대는 신세였다면, 이제는 처음으로 발밑에 단단한 땅을 디딘 기분이었다. 다음 단계도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다. _103p.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이자 경찰 소설의 모범이라 물려온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7년에 걸쳐 10권의 시리즈로 완성된 소설이라고 한다. 최근 세련된 표지로 출간된 '마르틴 베크'시리즈의 첫 번째 <로재나>는 스웨덴의 유명한 관관 명소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며 시작된다. 지독한 성폭행과 교살로 살해된 여성, 그러나 여성의 신원을 밝혀줄 만한 단서나 사건의 흔적이 없어 수사는 자칫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다. 나라를 넘나드는 수사자료 확인과 검증, 그렇게 좁혀든 수사망에 걸려든 인물이 너무 뜻밖이었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의 행동이 평범하고 전혀 범인 같지 않아 보여서 의심의 의심을 하게 되고 마지막 장을 향해 달리는 페이지를 덮을 수 없게 하고,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기도 하고 촘촘하게 좁혀가는 수사망을 함께 추리해 보는 과정이 흥미롭기도 했다. 사건 해결을 위해 스톡홀름에서 파견된 수사 전문가 마르틴 베크, 그는 경찰관으로서의 삶과 개인의 삶 사이를 고뇌하는 인물로 현실 경찰이라면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현실적인 경찰 수사물로 그려지고 있다.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이 1960년대라는 시기를 생각하면 조금 놀랍다고 느껴진달까?

최근 읽는 추리, 범죄소설들이 잔인하고 잔혹한 묘사들이 많이 불편했다면 아날로그 듯한, 형사와 함께 추리하는듯한 지적 유희를 느껴볼 수 있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랜만에 읽는 맛을 알게 해준 마르틴 베크 시리즈 <로재나> 다음에 읽게 될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책이다.

딸이 태어나고 일 년이 지나자 그가 사랑에 빠졌던 밝고 발랄한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결혼 생활은 지루하다고 해야 할 일상으로 안착했다. _38p.

마르틴 베크는 몸을 곧추세웠다. '경찰관에게 필요한 세 가지 중요한 덕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는 속다짐을 했다. '나는 끈질기고, 논리적이고, 완벽하게 냉정하다. 평정을 잃지 않으며, 어떤 사건에서든 전문가답게 행동한다. 역겹다, 끔찍하다, 야만적이다, 이런 단어들은 신문기사에나 쓰일 뿐 내 머릿속에는 없다. 살인범도 인간이다. 남들보다 좀 더 불운하고 좀 더 부적응적인 인간일 뿐이다.' _88p.

#마르틴베크 #마르틴베크시리즈 #엘릭시르 #문학동네 #김명남 옮김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소설추천 #도서추천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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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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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a>는 내 계정 이름이다.

29년 전부터 나는 열반에 들어갔다. 성장기에 미처 자라지 못한 근육으로 인해 심폐기능도 정상치의 산소 포화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동네 중학교 2학년 2반 교실 창가에서 몽롱하니 의식을 잃었을 때부터 줄곧.

길바닥을 내 발로 걷지 못한지도 이제 곧 30년째가 된다. _17p.

_

돈이 있고 건강이 없으면 매우 정결한 인생이 됩니다.

(중략) 정결한 인생을 자학하는 대신 쏟아낸, 얼핏 떠오른 희망 사항이 마음에 들어서 고정 트윗으로 쓰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_50~51p.

중증 척추 장애인으로 하루 종일 침대와 책상을 오가며 살아가는 샤카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막대한 유산이 있음에도 성인 소설과 광고 기사들을 써서 돈을 벌어 전액 기부하는 삶을 살아간다. 동시에 트위터에 익명 계정으로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비장애 여성처럼 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등의 말들을 쏟아내기도 하는데, 어느 날 남성 간병인이 샤카의 익명 계정을 언급하며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고 돈과 욕망에 솔직해진 이들은 계약을 맺게 된다. 살기 위해 파괴되어가는 몸이지만, 욕망하는 나 샤카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온몸으로 부딪히며 혼란스럽고 아프지만 이상하게 매력적인 이야기다.

강렬한 책표지와 부제에 이끌려 구입해두고 2024년이 되어 읽었던 <헌치백>, hunchback 은 곱사등이, 척추장애인이라는 뜻인데 실제 이 책을 집필한 작가도 선천성 근세관성 근병증의 중증 장애인으로 인공호흡기와 전동휠체어등에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태블릿으로 집필을 했다고 한다. 삐딱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쩌면 직접 경험하고 생각해왔던 일이기에 생생하게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이야기는 쉽게 읽히지만 장애가 있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게 된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지만,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만큼 가독성 있게 읽히며 문장 또한 간결하면서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짚어가고 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중증 장애를 가진 작가는 비장애 여성처럼 임신과 중절을 꼭 해보고 싶다는 주인공의 고백 앞에 서성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중증 장애인'을 일상에서 마주치기란 쉽지 않은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이야기들이 조금 더 많이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색하지 않고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께가 3,4센티미터나 되는 책을 양손으로 잡고 집중해야 하는 독서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등뼈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일이다.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_27~38p.

잘못 인쇄된 설계도밖에 참조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 해야 그 친구들처럼 될 수 있을까. 그 친구들 정도의 수준이면 된다. 아기가 생기고, 지우고, 헤어지고, 다시 합체하고, 생기고, 낳고, 헤어지고, 다시 합체하고, 낳고·····그런 인생의 흉내만이라도 좋다. 나는 그 친구들의 등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낳는 건 못하더라도 지우는 것이나마 따라가고 싶었다. _39p.

간병인이 옆에서 책장을 넘겨주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종이책의 불편함을 그녀는 열심히 호소했다. '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왼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 페이지의 긴장감이'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비치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_46p.

살아갈수록 내 몸은 비뚤어지고 파괴되어간다. 죽음을 향해 파괴되어 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그런 점이 비장애인이 걸리는 위중한 불치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고, 다소의 시간 차가 있을 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파괴되어 가는 비장애인의 노화와도 다르다. _61p.

나와 비슷한 근 질환으로 자리보전 중인 옆방 여성은 침대 위 이동식 변기에 볼일을 보면 주방 근처에서 대기 중인 간병인에게 손뼉으로 신호를 보내 뒤처리를 부탁한다.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할 것이다.

"나라면 절대 못 견뎌. 나라면 죽음을 선택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이다. 옆방의 그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에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_94p.

#헌치백 #이치가와사오 #허블 #소설 #추천소설 #Hunchback #book #아쿠타가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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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고명재 산문집
고명재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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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죽음은 뭘까요. 이런 질문들은 '여름이 왜 오는지' 묻거나 '겨울 전나무가 왜 아름다운지'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는 답이 없고 반복만 있어요. 그러나 이 반복은 집요해서 아름다워요. 묻고 또 묻고 되묻고 묻고 다시 또 묻고 그렇게 묻다 보니 거대한 능과 총이 서겠죠. 저는 지금 다시 되묻습니다. 사랑이 뭘까요. 시가 뭘까요. 당신은 뭐예요.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_55~56p.

겨울에 읽으려 아껴두었던 고명재 시인의 산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새해가 시작하고 한 달 여간 조금씩 아껴 읽었다. 깊어가는 새벽, 일하는 중간, 자다 깨 멍하게 있던 시간... 몇 페이지씩 읽다가 다시 잠들기도 하고 일상으로 금방 돌아가기도 했던 시간들에 스며들었던 문장들. 왜 '사랑'이라고 했는지 글을 읽으며 마음이 먼저 알게 된 것만 같았던 시간들. 어쩌면 언제고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날 다시 꺼내어 읽어야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아직 난 잘 모르겠다. 다만 이때의 주어가 '우리'라는 것은 마음에 든다. _35p.

병간 病看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하지 않고서 사각사각 사과 깎는 소리를 듣는다. 사락사락 눈이 또 내릴 때까지 지속하리라. 마음만 쥐고 용감하리라. 그러다 가끔 바늘에 찔린 듯 눈이 아파서 그렇게 병간은 병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솔잎 같은 한 사람의 끝을 눈에 담는 일. _109p.

오랫동안 다도를 배운 친구가 말했다. 차를 우릴 땐 끓였던 물을 식혀서 써야 해. 사람도 시도 두 번째 읽을 때 진실이 열린다.

_110p.

이 수건은 하도 오래 썼더니 물방울이 제대로 닦이지 않네. 한 여름 아빠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참 신기하지 않니, 살에 섬유가 닳는다는 게. 오래 쓰면 수건도 지친다는 게. _148p.

여자는 안개를 내 손에 건네주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 중에서 네가 가장 많은 수의 꽃송이를 받길 바랐어. 한번은 이런 걸 나도 너에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안개꽃만 한가득 담아." 눈앞이 안개 낀 듯 뿌예졌고 나는 꽃송이와 꽃송이 속에 파묻혀버렸다. _157p.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잠든 엄마를 옆에서 꼭 끌어안을 때 그 부피, 그 형상, 엄마의 골격. 그 순간 나는 출렁이는 물의 마음이 되어 엄마를 위해 쏴쏴 나를 버릴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부피와 질량 너머에 있다. _173p.

사랑이 뭘까. 그건 존재가 위태로울 때

등대처럼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것.

#너무보고플땐눈이온다 #고명재 #난다 #에세이 #에세이추천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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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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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도서협찬 #정보라 연작소설집

문어였다.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아니 "문어가 말했다"라는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 당시 나는 문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어가 말하는 걸 듣다니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애초에 대학교 건물 안에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서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 내 평생에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_27p. #문어

행진하며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노화와 고통과 돌봄과 상실의 미래에 이제는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질병과 장애의 두려움이 추가되었다. 나는 건강하지 않은 몸, 손상된 몸, 질병을 가진 몸, 죽어가는 몸으로 계속 저항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중략) 애초에 '정상인'이란 환상 속의 존재일 뿐이다. 현실의 인간은 다들 어딘가 손상되고 어딘가 완벽하지 못한 물리적 실체를 끌어안고 자기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존엄하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 뭔가 요령이나 방식이 있을 것이다. _243~244p.

정보라 작가의 첫 소설로 읽게 된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해양생물을 주제로 한 첫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연작소설들의 제목들은 책장을 덮으며 그 연관성이 뒤늦게 조금 더 큰 연결고리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강사법 제정으로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나고, 열받은 선생님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하게 되지만 변화는 미미했다. 모 대학교가 이런 협약을 완전히 무시하고 멋대로 강사 임용 규정을 제정해 노조가 대학 본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게 되는데... 시간강사인 나, 반년째 농성장에서 홀러 버티던 위원장(남편) 이 학교 한복판에서 문어를 보게 되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고 풀려나고, 또다시 새로운 해양생물을 만나게 되고 또다시 검은 정장이 나타나고 그럴수록 해양생물들과의 교감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면서 장애, 노동, 기후와 생태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이 모든 문제와 대결을 위한 해결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면 실제의 생활에 어쩌면 실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덧씌워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되는 SF 소설의 매력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다. 이미 학교 복도에서 마주하게된 문어의 등장에 빵터지고, 스토리의 진행이 유쾌하고 코믹스럽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데도 페이지는 쉼 없이 넘어간다. 망가지고 있는 세상, 어쩌면 망가진 세상에 맞서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진심의 사랑을 생각해 보게 될 소설. 이 뛰어난 이야기꾼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지게 될 작품이다.

"그러니까 싸워야죠."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중략)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남편이 돌아누우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도망칠 데가 항상 있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럼 오빠는 왜 싸우는데요?"

세상을 바꾸려고,라고 그는 말했었다. 학생 시절에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조직에 속해서 가장 험한 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이야기를 그는 자주 들려주었고 그래서 내가 언젠가 물어보았다. 세상을 바꾸려고. 그래서 그렇게 싸운 끝에 세상이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그가 현장에서 30년을 보낸 지금,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이 지나서,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손목과 어깨가 허리가 수시로 아프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싸워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런 것이다. 주로 허리와 어깨가 아픈 작업이다. _66~67p.

(노동하는 존재의 권리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요. 위치 추적 장치를 떼고 도망가요, 예브게니.)

말하면서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권력기관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생명조차 존중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생물도 똑같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예브게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 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_83~84p.

죽음과 삶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인간의 소멸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게는 진정 자유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_2-8p.

#래빗홀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SF소설 #소설추천 #추천소설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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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시대 창비시선 495
장이지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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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시대 #도서협찬

#장이지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내장을 담지, 하고 가르쳐 준다 라플란드 할머니가 핀란드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낼 때 생선의 내장을 긁어내고 그 죽음에 편지를 쌌듯이, 만지면 아픈 시를 쓸어안는다 무슨 말이든 잘 믿는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꿈틀대는 내장을 담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보다도 하얗게 하얗게 쓸어안는 게 중요하다고 눈 오는 밤의 봉인이 중요하다고 속삭여본다 속아주려느냐 조카야, 이것은 너만 속이려는 게 아니란다 _ #라플란드

편지를 태우기 전 거듭 읽는다 당신이 부탁한 대로 거듭 읽어 외운다 편지는 부라고 재와 연기가 난무한다 매캐한 위치에서 홀로 나는 당신을 이해해 보려 하지만 당신은 내 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_ #외워버린편지

한 번도 편지를 불태워보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새까만 어둠으로 앉은 남자가 방금 몸살을 하며 빠져나온 추문의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자기의 허물을 몰래 불태우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_ #허물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창비 #창비시선495 #창비시선 #추천도서 #시집 #한국시

오랜만에 무엇인가 진득하니 쓰고 싶어졌던 <편지의 시대>

마음에 드는 문장, 시는 노트에 따로 필사를...

시 한 편 한 편도 좋았지만 시를 다 읽고 읽어보는 '해설'부분도 좋았다.

시집의 책표지 또한 작품 같아서 자꾸 꺼내보고 싶어지는 시집,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선물하기에도 좋을 듯.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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