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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하세요?
야마다 유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집 구하세요?" ...라고?
얼핏 친절한 부동산 가이드북 같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순정"만화다. 굳이 "순정"에다 큰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책이 작가(야마다 유기)의 "첫·순정·코믹스"이기 때문. 이건 띠지에도 대문짝 만하게 써 넣어 광고를 하고 있을 만큼 만화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이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수많은 순정만화 중 왜 이 만화만 유독 "순정"에 방점을 찍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야마다 유기는 원래 순정 만화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BL계 작가로,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도 수많은 팬을 거느린 인기 만화가인데, 최근 순정에도 슬쩍 손을 대신 모양. 책 뒤에 실린 출판 정보와 짤막한 후기에 따르면 2004년경 가볍게 시작한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1년에 1~2편 꼴로 느긋하게 그린 시리즈를 모아 단행본을 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말은 순정만화라고 하지만 표지에서는 왠지 BL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왕년에 주먹깨나 썼을 듯한 인상으로 담배를 물고 있는 미중년 남자와, 그 뒤로 눈웃음 한방이면 웬만한 여자는 물론 남자도 다 녹여버릴 것 같은 남자, 스마트하고 깔끔해 보이는 인상 좋은 안경남과, 태닝한 피부에 눈 꼬리와 입 위의 점만으로 색기가 줄줄 흐르는 남자까지. 아무리 봐도 이건 순정 만화 표지가 아니다. 만약 이 남자들 사이에, 저 커다란 괴나리봇짐을 목에 둘러메어 마치 최첨단 패션인 양 코디한; 단발머리 아가씨가 없었다면, 누가 이 표지를 보고 이걸 보고 순정만화라고 생각하겠는가. 혹시 출판사에서도 그렇게 오해하는 독자가 있을까봐 일부러 "순정"이라는 글자를 띠지에 적어넣은 게 아닐까. 훗. (농담이고...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야마다 유기의 '첫 순정만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광고효과가 높을 게다. 호기심 많은 팬들은 싫든 좋든 야마다 유기의 "외도"를 궁금해하기 마련이거든!)
설정은 간단하다. 하쿠센 역 앞에 "카미야마 상사"라고 부동산 중개업소가 있는데, 그 곳에는 왠지 호스트 클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분위기를 가진 4명의 남자들이 업무를 본다. 집을 알아보러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다간 그 묘한 분위기에 당황해 뛰쳐나가기 십상. 카리스마 사장(통칭 보스)과 늘 웃고 있지만 가끔은 살벌한 모습도 보이는 입사 3년차 타케이(통칭 스마일리), 실제로 호스트 클럽 출신인 시바타(통칭 섹시)와, 입사 6개월차 막내이자 사장의 조카인 카미야마(통칭 안경)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카미야마 상사에 (표지에도 보이는) 단발머리 아가씨가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볍게 시작한 에피소드에서 파생된 시리즈답게 이야기는 당연히 옴니버스식.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1화 보고 살짝 실망했(아니 할 뻔) 했다.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시간도 없고 해서 1화보고 며칠 덮어뒀음;) 어우, 인물들은 상큼한데 이야기가 생각보다 전형적으로 흘러서 어째 좀 진부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기대감이 거의 밑바닥인 상태로 (며칠 후) 2화를 읽었는데, 다행히도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슬슬 제 궤도를 찾아 매력이 흘러나오더라. 총 6화와 번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옴니버스가 늘 그렇듯 때로는 길게 혹은 짧게 각 멤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화마다 바뀌는 메인 이야기 언저리에 간간히 나오는 짜투리 이야기와 인물들의 올망졸망한 단순컷, 가령 복실복실한 털복숭이 여자아이의 맹한 얼굴이라든지, 꼭 참새 주둥이마냥 입술을 부-하고 내미는 단발머리 아가씨의 모습이 꽤나 귀엽다. 개인적으로 1화 빼고는 다 나름대로 재미있었는데, 특히 맨 마지막 이야기인 보스의 에피소드는 보면서 내내 히죽히죽 웃었을 만큼 맘에 들었다. (중간에 웃음이 빵- 터지기도. 큽큽-) 과연 미중년의 과거는 흥미롭구나, 이런 느낌? 호호. 미중년에 혹하는 만화 속 흑발 미녀 언니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니까. >_<
그러나 아무래도 작가의 순정만화 첫 도전이어서 그런지 조금 서투르다고 해야할까, 이야기를 무척 조심스럽게 진행시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기존 만화(그래봤자 내가 본 건 "마지막 문을 닫아라!" 하나밖에 없다;)에서 보여준 재기발랄함이나 폭소 개그컷 및 대사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팬들은 조금 심심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뒤로 갈 수록 안정감을 찾고, 특유의 매력이 나오니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또 이 정도 분량으로 끝내기엔 어쩐지 아쉽기도 한데, 왜냐면 이제야 인물들의 관계가 좀 발전하고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아멸차게도 거기서 그만 THE END. (ㅠ_ㅠ) 2~3권 정도 뒷 이야기들이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책은 한 권짜리 단편 만화처럼 디자인되어 있어, 후속 권이 나올지 안 나올지 미지수. 야마다 선생, 좀 더 그려주지 않으려나...; 앗,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이 작품, 부정기 연재물이니 2권이 나올 가능성이 그리 희박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나와라, 나와라!) 후속 권에 따라 작품에 대한 완성도나 애정도가 조금 더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내려갈 일은 별로 없을 듯) 개인적으로 그림도 참 마음에 든다. 아기자기한 게 예쁜 것이 예전에 본 그림들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 짤막 후기에서도 밝히지만 여자를 그리는 게 익숙치 않아 매번 고전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꽤나 공들인 게 엿보인다. 그러니 이 정도면 (대박은 아니라도) 순정만화계에 무난하게 첫 발을 내딛었다고 토닥토닥해 줄 수 있을 듯. 앞으로가 기대가 되는 바이다. ...그런데 만화 다 읽고 웹서핑을 하다보니 나와는 달리, 야마다 유기를 좋아하는 팬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자, 이제 순정도 그려봤으니, 다시 본래의 분야로 돌아와주세요!"라는 의견이 많다. 호오~ 이게 팬과 일반 독자의 차이?
잠시 딴 얘기 좀 하자면,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읽은 야마다 유기의 만화라고는 "마지막 문을 닫아라!"밖에 없다. 늘상 말하지만, BL을 남들보다 훨씬 늦게 접했고, 접하고 나서도 한창 불타오를 때 빼고는 그다지 찾아보지 않는 편이라 야마다 유기의 만화가 아니라도 실제로 본 작품은 몇 개 없다.(요시나가 후미나 이마 이치코 정도가 전부다;) 그래도 주위 친구들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 건네 받거나 들은 정보는 많아서 대충 작가명이라든지 작품 이름, 스타일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야마다 유기의 "마지막 문을 닫아라!"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어서 예전에 친구에게 빌려본 기억이 난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무척 유쾌하고 쌈박했던 것 같다. 그림체도 깔끔하고 개그컷이 제법 취향에 맞아서 꽤나 웃으면서 읽었더랬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여러 작품을 본 독자야 아무래도 이 만화에 생소함을 느끼거나 이전 작품에 더 안정감을 느끼겠지만, 난 본 게 하나 밖에 없으니 이 작품에 대해서도 크게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작가 스타일에 익숙해지기 전, 그러니까 완전 백지는 아니라도 그에 가까운 상태로 작품을 접했다는 건데, 아마 그래서 읽고난 뒤 어색함보다는 다음 순정만화에 대한 기대감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일 게다. 그러니 이 만화, 야마다 유기의 만화를 별로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이라면 무난하게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야마다 유기의 BL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금 낯설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두 장르 사이에서 괴리감 없이 만화가로서의 매력을 보여주는 건 작가의 몫. 앞으로도 계속 "순정"에 도전하여 영역을 넓혀갈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켜봐도 좋을 듯 하다. 그러니까 2권 Please~ ♥
덧 1, 원제인 "おひっこし?"를 "이사하세요?"가 아니라 "집 구하세요?"라고 번역한 거 맘에 든다.
덧 2, 아무리봐도 야마다 유기의 그림체... 순간순간 이마 이치코가 생각난단 말야.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건지도 몰라. >_<
덧 3, 이 만화 사면서 동(同)작가의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수 없어"도 덩달아 구입.; 몰랐는데,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본편보다 더 인상깊었던 단편 만화가 후속 이야기를 덧붙여 따로 단행본 발매 돼 있더라.(과연 난 이 쪽으로는 정보력이 약해;) 두께도 제법 두툼한 것이 꽤 마음에 들어 망설임 없이 구입, 재밌었다. 그에 관한 리뷰도 조만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