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 2007-06-09 00:17   댓글달기 삭제 URL
저...마태가 그러는데요 김훈의 <남한산성> 어떠냐고 하네요.... 마음에 안드시면 서승의 <옥중19년>은 어떠냐고 하더이다.

마태우스님의 대변자가 올린 댓글을 못 보신 분이 있을까봐.

제 독단으로 남한산성으로 확정하겠습니다.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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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장을 보여주다.
    from 비우고 채우기 2007-07-02 17:01 
    핑크빛 표지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산뜻하니 고왔으며 작품의 분위기를 망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김훈 자신이 이 작품을 쓰면서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2. 봄농사를 시작하기 늦지 않았음에 희망 있음을
    from 비평가의 서재 2007-07-02 17:08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 두 번째다. 『칼의 노래』가 그 처음이었다. 사실 김훈이란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이 『칼의 노래』덕분이다. 아니 정확히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었고, 더 정확...
  3. 그의 소설이 날 전율시키는 이유
    from 처음처럼이 있는 서재 2007-07-02 18:08 
      중국의 패권자로 부상한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며 명을 섬기던 조선은 결국 청의 공격을 받아 두 차례의 전쟁을 겪는데, 전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일방적 패배를 당하...
  4. 비루한 책
    from 조선인과 마로, 그리고 해람 2007-09-01 19:52 
    마초 김훈을 싫어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그의 책을 사보는 독자로서 그의 책에 별 하나를 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말이다. 늘 임금의 편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의 편이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김훈은 이 책에서 결국 '아무 편도 아니다'라는 비겁함을 보였다. 밥벌이가 지겹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밥벌이를 위해 비루해질 필요는 없다. 제 아무리 현생이, 혹은 이 세상이 지겹다 하더라도 한 시대를 싸잡아 폄하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사스페셜 식의 자화자찬도 옳은
 
 
 
 전출처 : 멜기세덱 > 우리 아직 굶주려야 하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학교 후문가에 장미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어버이날도 지났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 아직 뭐가 남았길래 꽃타령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하긴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은 카네이션으로 불이 났을 것인데, 오늘은 장미 한 송이 송이들이 어여쁘게 포장되어 거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직도 꽃 줄 날이 남았는가보다 했다. 그러고보니 이 꽃 주는 5월에 어느 누군가에게도 꽃을 줘 본 기억이 없다. 멀리 계시는 부모님께 자못 송구스럽다.

왠 꽃일까 했던 의문은 이내, 오늘이 5월의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물어 듣고야 해결되었다. "만 20세가 된 젊은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을 부여하는 날"로 문화관광부까지 나서서 주관하는 날이란다. 기실은 장미꽃 상인들이 주관에 후원에, 북치고 장구치는 것도 모자라 꽹과리까지 요란스레 쳐 대는 날인 줄 알았다. 내가 성년이 되던 날, 후배들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받은 기억도 나고, 더불어 백석의 시집을 받은 감회로 잠깐은 즐겁기도 하였다. 세월은 훌쩍 지나고 나는 낼모레 서른을 바라보는 서른 즈음,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고인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지금이다. 그런데, 이 땅의 젊은 동량(棟梁)들은 오늘 성인이 되었다. 기쁜 일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땅의 성인이 된 그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축하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일까? 어제 나는 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은 탓으려니 했다. 이 땅의 이 젊은이들은 오늘 성년이 되었지만,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아니 세상에 태어나 울음 울고, 제 어미 아비에게 재롱도 부리기 전에, 굶주리어 죽어간 그들이 생각난 이유는. 브라질 세아라 주의 크라테우스라는 곳엔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아 배고픔과 쇠약, 설사, 탈수 등으로 숨진 이름 없는 아기들의 무덤", 곧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가 있다는데, 그들은 오늘 이 기쁜 성년의 날을 맞아 보지도 못하고 참혹한 굶주림에 그렇게 이름도 없이 죽어갔단다. "1분에 250명의 아기가 이 지구상에 새로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불리는 122개 나라에서 태어난단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곧 이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는 운명을 맞는 거야." 이것은 그 무슨 아이러니일까? 우리 이 땅의 아이들이 성년을 맞은 오늘은 그들, 그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아이들의 죽음의 또다른 비극은 아닐까? 갑자기 마음 한 켠이 답답하고 울울(鬱鬱)하다.

왜 하필 어제 나는 이 책을 읽었고, 또한 왜 하필 오늘은 '성년의 날'이어서, 붉게 활짝핀 장미꽃 한 송이 받아보지 못하고 굶어 죽어간 저 절반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적해지는가? 오늘 이 땅의 성년을 맞은 이들에게 살갑게 축하의 말을 전하지 못하며 하루 종일을 힘없게 지내야 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그리고 그 절반은 굶주리지 않으며, 또한 그 절반은 배불리 먹으며, 또 그 절반은 배가 불러터져 남겨 버리는가? 무엇인가 불합리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또한 그래서는 더더욱 안 될 것만 같다.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되어야 한다.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그 원인들이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로 인해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구호조직의 활동과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굷는 현실, 사막화와 삼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 특히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과두지배",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차별적인 정책 등을 들고 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자들의 죄가 아니라는 것, 그들이 게으르고 무능력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원죄, 죄앗을 씨앗을 품어서도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것은 저 저열(低劣)한 이 세계의 돈의 지배자들의 탐욕과 그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갖혀서 절반의 굶주리어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한 우리들에게 그들의 굶어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니, 그것은 큰 벌 받아 마땅할 죄악이다.

'비참(悲慘)'하다는 말은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에 두고 말해야만 타당할 것이다.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직"한 현실이 이것 말고 그 무엇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저 브라질의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젖먹이 아이들의 분유에도 세계의 자본과 금융과두지배자들의 돈놀이가 존재하고, 쌀 한 톨, 밀 한 알 가지지 못해 굶주리 배를 부여잡을 힘도 없는 아프리카의 참혹한 민중들 뒤로 몇몇 금융자본가들의 베팅게임에 남아돌아 썩아가고 있는 이 불합리한 현실 말고 그 어디에 '비참'이란 말을 붙일 수 있으랴? 나는 다른 것을 찾는 것을 포기하겠다.

저자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다. 부록으로 주경복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잘 신자유주의를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신자유주의가 그 무엇이더라도, 이 세상을 어떤 놈들이 좌지우지하며 주물러 대더라도, 저 죽어가는 이들을 밟고 내가 살아간다는 현실은 정말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굶어 죽어가는 절반을 두고, 우리 절반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그 절반이 굶어 죽어 사라진 후, 우리 절반의 절반이 또 그 꼴을 당하고야 말 것이라는 자명한 예측을 나의 이 멍청한 머리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말하나 마나, 세상의 절반이 굶어 죽어가는 이 현실은 불합리와 비참함과 죄악이라는 것을, 나는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겠다.

몇몇 매체들에서 오지를 탐험하고, 기아와 전쟁의 현장을 탐방하고, 구호의 손길을 사뿐히 뻗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때 몇 번의 전화다이얼을 돌려본 기억으로 오늘 나는 생색이라도 낼 수 있는 그런 인종이 못된다. 가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찔끔했었다고, 어떻게 저런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느냐고 분노의 혈기를 머리끝까지 솟아올렸다고, '쯧쯧쯧' 세치 혀로 세상의 현실을 한탄했었던 적 있었노라고 자랑스레 떠버릴 수 있는 그런 인종 또한 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오늘 이 성년의 날이 마냥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 이 못난 인간아! 아 우리 못난 인간들아! 오늘 우리는 울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글러의 말에 난 겸허히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내가 그런 생명체이긴 할 걸까? 오늘 내가 하루 종일 우울했었던 것에서 내가 그런 생명체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을 뿐이다. 누가 그랬을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그런데 '빵'도 없이는 더더욱 살 수 없고, 어느 꽃 피는 봄날 화창한 5월의 셋째 주 월요일에 붉은 장미 한 송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저 성년의 장미 한 송이 받아든 그 젊은이는 알고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했다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픈 맘도 전혀 없이 배부른 우리들은, '배부른 돼지'가 못내 부러울 저 굶어죽어가는 세상의 절반의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가 이런 글쓰기의 여유나마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어, 너무나 굶주리어 배고픔의 울음 한 번 크게 울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들의 영령들에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또 답답해진다. 그냥 희망만을 부여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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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2007년 5월에 읽은 책들

 

29.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런 책이 필요했다.
기아선상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쉽게 현재의 이 야만적인 상황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인 일인지를 쉽게 가르쳐 주는 책. 
아이들과 꼭 같이 읽고싶은 책이다.


30.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현대미술의 장난에 대해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 책.
현대미술이 난해하다는 착각을 여전히 버릴 수 없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시원한 배설구같은 느낌을....
그러나 통쾌한 풍자라기에는 2% 부족해서 독설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맞을 것 같다.

31.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 작가에게 감정이입이 되는건 참 드문 경험이다.
근데 서경식씨의 책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아픔과 역사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안타깝다.
권력이니 돈이니 하여튼 뭐 그런것과는 쥐뿔도 관계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진 권력이란게 있더라. 모어를 당연한 듯이 모국어로 사용하며 우리라는 개념에 대해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아도 되는 내부인이라는 것. 그 바깥에 있는 경계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또 달라진다는 것을 절감한다.

32. 진 메릴의 <손수레 전쟁>  
아이들에게 전쟁이 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썼다는데 핀트가 약간 어긋난 책이다. 오히려 진정한 평화란 약자의 자기방어를 위한 전쟁에서 올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의라는 것을 얘기해주는게 더 나을듯....



33. 오가와 요코의 <약지의 표본>
 빨간 표지가 무지하게 예뻐서 끌린것 맞다.
근데 내용은 뭔가 미스테릭하며 으스스한 느낌이다.
인간이 가지는 소속에의 열망이 만들어내는 두가지의 이야기.




34. 김현준의 <사찰 그속에 깃든 의미>

  사찰을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것들 - 일주문 부터 금당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건축물들과 사물들을 불교교리의 면에서 풀어낸 책으로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것 같다.
동시에 불교문화재들의 역사와 특징들 그리고 의미 역시 제법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35. 이경화의 <장건우한테 미안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어떤 이유로는 어떤 아이가 그 관심에서 배제될 이유는 없다는 것. 
어려운 문제지만 어른들이 잊지 말아야 할 문제임을 다시 깨닫게 해준 책.




36. 오쿠다 히데오의 <면장선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엽기 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더 강력해져서 돌아왔다.





37. 언니네 사람들의 <언니네 방> 
많은 문제들은 얘기를 함으로써 위로받고 구제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이 대한민국에 사는 언니들은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 얘기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건 최소한의 숨구멍이 있다는걸게다.
책속의 글들에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같이 분노하고 하면서 읽었다.
이런 책이 필요하다는 게 어쩌면 우리 사회의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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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미국산 쇠고기의 방문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왔다. 뼛조각이 발견되는 상자만 반송하겠다는 조건이었는데, 1차 검사 결과 전량 통과한 모양이다. 신문에서 발표한 대로라면 다음주 중에는 시중에 'Made in USA' 도장이 박힌 붉은 쇠고기가 동네 마트까지 진출해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식품관련 업체에서 대형 트럭 몇 대분으로 공장 창고에 비축하는 일이 시행되겠다. 내가 친구와 절교 직전까지 관계를 악화하면서 반대한 한미 FTA는 솔직히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친구가 주장한 것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다시 한 번 제2의 도약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내 주장은 다르다. 도약의 기회, 국민 소득 증대, 경제 발전 다 좋은데,


1)왜 이리 서둘러서 공청회 한 번 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2) 식량을 내주고 자동차를 얻어서 소득은 증대할지 몰라도 식량전쟁이 집문을 부수고 쳐들어오면 어떡할거냐, 그 땐 자동차의 엔진이나 문짝을 뜯어 찌개를 끓이고 삶아 먹어야 하는가?

3)그런고로 식량은 곧 주권이며 생존이다


라는 내 의견에 친구는 중상류층답게 이젠 한 국가의 고유 먹거리를 찬양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로 일관했다. 말이 안되는게 1차 생산자인 농촌의 몰락을 눈앞에 두면서 수출로 먹고 사는 국가, 자동차 산업과 IT산업을 키워야 힘을 얻을 수 있는 세상, 식량은 이제 다국적 혼합체일 뿐이다. 라는 논리로 1차 생산자를 절망의 늪에 밀어 넣은 국가와 전형적인 도시 중상류층인 내 친구의 '메트로폴리탄의 경제 원칙'이다. 농촌의 사망을 매일 접하는 이 땅에서 '농촌 구조 조정' 하는 발언을 하던 노무현 대통령과 '식량의 다국적화'라는 무서운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외치는 내 친구는 모두 이 땅의 사람들이다.

 

 

 

 

책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아무렇지 않게 '식량의 불가피한 다국적화 사업'을 주장한 친구에게 위의 책들을 권했다. 읽을 것인지 안 읽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중, [굶주리는 세계]와 [쌀과 민주주의]는 직접 사줬다. 그 친구가 내가 준 책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해도 최소한 제목만은 기억할 것이다. 제목을 기억하면 한번쯤은 자신의 풍요로운 밥상이 세상의 모든 밥상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는 깨달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우리는 폭력의 세기에 여전히 살고 있다. 그것도 밥상을 차리는 과정에서 폭력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장악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는 물 부족으로 몇 년간 신음을 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초원위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드넓은 초원 위로 스프링클러 수천 개가 물을 뿜으며 돌아간다. 케냐정부는 '국가의 경제발전, 국민의 소득증대 향상'을 위하여 다국적 기업과 손을 잡았다. 결과는, 가뭄과 식수 고갈이며 농촌의 몰락과 도시 서민의 영세민화가 누떼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다국적 기업화의 폐단을 케냐까지 가서 찾지 않아도 내 집 앞을 지나가는 곡물사료트럭에서 확인한다. 미국의 곡물회사 카길사의 사료트럭은 하루에도 너댓번은 동네를 왕복한다. 축협에서 지원하는 지역자체 곡물사료 공장이 있지만 카길사는 최저가 공급으로 영세 축산농가를 공략하고 있다. 사료가격은 축산농가의 이윤과 직결되는 문제다. 밥상을 차리는 쌀값의 영향관계와 동일하다. 내가 염소 농장을 집어치운 이유는 한마디로 완전 '개털'식의 대차대조표에 절망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한 가지를 공개한다. 그러니까 2년 전인 2005년 아직 직장인이던 시절에 퇴직 후 염소농장을 계획한 것은 염소공급가격이 지금처럼 바닥이 아니었다. 다 큰 염소일 경우 보통 마리당 20만원이던 시절, 그 이전에는 비정상적인 가격인 50만원까지 호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20만원까진 아니었어도 15만원은 받았다. 큰 이익은 아니지만 손해 보는 장산 아니다. 그럭저럭 공과금 납부하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사 먹는 수준은 된다. 큰 욕심 없이 안빈낙도로 살겠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우리 집 염소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염소가격은 절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절벽으로 나뒹굴었다. 보통 6개월 정도 성장한 염소가 7만원이라는 '껌 값'이 되고 말았다.


7만원이면 중상류층의 내 친구가 하룻저녁에 별 다섯 개 호텔에서 사 먹는 스테이크 한조각과 프랑스산 30년짜리 와인 한 병 값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나는 7만원을 손에 쥐기 위해 6개월 동안 염소 사료와 볏단을 사 먹이고,  팔이 떨어져 나가라 축사를 청소하고, 기생충 약과 설사약을 먹여야 한다. 6개월 동안 내 노동의 대가와 염소 한 마리의 생명가치를 합한 것이 7만원이다. 식량의 다국적화, 오픈아이즈(열린 눈)으로 세상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 친구가 백화점에서 50% 할인 가격으로 구입했다는 샤넬 투피스 한 벌 값의 1/10에 불과한 7만원. 나는 맑스 신봉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좌파도 아니지만 인간의 삶은 '계급'으로 결정된다는 논리를 부정할 수 없다. 친구와 나는 '돈'으로 갈린 '계급'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내 친구의 사적인 영역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발표되고 난 이후 한우가격은 급락하고 있다. 300만원 하던 송아지가 지금 150만원으로 떨어졌다. 더 떨어진다. 송아지 값의 하락은 축산농가의 감소를 불러 올 것이다. 사료 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테니 거미줄에 매달린 배고픈 거미의 심정으로 얼마나 더 많은 축산농가의 대출이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우는 그동안 왜 고공행진을 했던가. 실질적으로 소득이 증가한 계층은 한우농가가 아닌 유통업자다. 그들이 1차 한우 생산자로부터 사들인 쇠고기를 최종 소비자의 시장바구니에 담길 때까지 중간에서 취한 엄청난 유통증가 비용은 200%에 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보다 적은 수치는 결코 아니다. 한우 농가는 축사에 소 숫자가 증가했지만 '6시 내 고향'에서 보여주는 잘살고 근심 걱정 없는 '박정희식의 농촌 쇼'에 유린당하고 있다. 농가의 어두운 얼굴은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할 수 없는 비인기종목이다. 그렇다면 왜 유통업자들은 중간에서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가. 그들의 이유를 들어보자. 유통관리비가 많이 든다. 는게 이유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몇 백%의 이윤을 취하면서 저 막연하고 모호한 설명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정부는 몰랐을까. 몰랐다면 귀먹고 눈 먼 정부이며, 알았다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자 범죄 방조죄가 성립된다. 국민의 목구멍에 밥숟가락 넘기는 일을 방해한 것이 범죄 아니면 무엇인가. 미국이 그토록 집요하게 쇠고기 문제에 집착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한우 가격이 비싸므로 싼 미국산 쇠고기로 공략하면 100% 시장 장악에 성공한다. 유통업자의 폭리와 정부의 무사 안일한 자세 앞에서 축산 농가의 미래는 더욱 장막이 짙어 보인다. 그동안 한우 유통가격을 조절하지 못하고 소비자에게 비싼 가격으로 공급했던 대가는 곧 한 폭의 잔인한 그림으로 펼쳐질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된다고 단세포 발언을 하던 일부 국민들도 시간이 흐르면 곧 미국산 쇠고기를 시장바구니에 집어넣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안전'문제다. 즉 미국산 쇠고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키워지고 생산되어 포장을 완벽하게 처리한 후 내 장바구니에 담겨진 것인가. 이 문제 제기는 지난번 MBC의 충격적인 미국 축산 산업 현장을 취재하면서 대중화로 불거졌다. 미국산 쇠고기가 먹는 사료와 약물, 환경과 도축과정을 충격으로 접한 후 다소간 시간이 흘렀다. 서민들은 '그것은 지옥의 풍경이었다'로 흥분했었지만 곧 그들의 밥상 위에는 바로 그 공포의 쇠고기가 오른다. 다시 방법을 찾는 통로로 들어가 보자. 애국심에, 민족의 단결심에 호소하는 일도 약발이 다 했다. 대안이 없을까.....농촌은 생계 걱정으로 밤마다 불면을 염병처럼 앓고 있다. 축협 같은 직접 연결 시스템이 '페어 트레이드'를 가동해서 유통업자의 막대한 이윤폭리를 차단하고, 소비자 단체에서는 지속적이고 현실적인 아이템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나와 네가 1차 생산자의 식량문제가 인간의 주권이자, 생존권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제발, 국익을 위해서 1차 생산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어리석은 말이나 삼가자. 뿌리 없이 열매 맺는다는 사기를 치지 말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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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emuko > 희망의 밥상 외

  이 책은 실론티님의 리뷰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책이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와 항상 함께 나오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탓에 환경 구호 활동에도 열심인 인물이란 건 처음 알았다. 
  '유기농' 이나 '웰빙' 혹은 '로하스' 라는 단어들이 요즘은 그래도 뜸하다. 광풍이 지나간 탓인지 아니면 이미 자리를 잡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좋은 줄 알지만 너무 비싸다' 던가 그런 이유로 '여지껏 괜찮았는데 뭘 새삼스럽게..' 였었다. 하지만 이 책은 왜 그런 '사소한' 이유로 우리가 '희망의 밥상'을 포기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일러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여지껏 먹고 괜찮았던' 음식들이 아니다. 농약 문제고, 유전자 변형 작물에 관한 문제고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닐거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게 문제였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가 그 속에 숨어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이 책의 가장 강점은 내게 '올바른 방식으로 재배하고 길러낸 먹거리'들을 찾아 먹어야 하는 이유가 오로지 내 몸과 내 가족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수요는 공급을 창출한다. 다국적 기업의 시장 논리를 이길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은 바로 소비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단순한 식량 증산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그 지역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제인 구달이 채식주의자라 채식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오고, 미국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등장하는 탓에 우리의 상황과 딱 맞춤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먹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이제는 시작할 이유가 생긴 것 같다.

  이 책을 더 먼저 읽었다. 아이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제자리에 없어서이다. 많은 곳에는 너무 많고, 없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고.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그것으로 먹고 살 수가 없단다. 열심히 지은 농작물은 다국적 기업에서 대량으로 지어 싸게 파는 농산물 보다는 턱없이 비싸서 팔리지 않고, 혹은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 팔려갈 기호품들(커피 같은)만 열심히 키우기 때문이란다.

 

  으음.... <스킵>이 너무 좋아서 기대가 컸던 탓인지. 아니면 역시나 전쟁에 관해서는 일본인의 심정을 공감하기가 쉽지 않아서일까 그저 그랬다. 아무리 그 시절 그 상황은 우리 모두 이상했었다고 한들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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