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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57분
허윤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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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승화된 비평. 문학비평이 아니라 문학=비평. 글 쓰기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비평가는 자신의 글 쓰기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책의 제목인 ˝5시 57분˝은 비평집에 실리지 않은 조연호 시집 해설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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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일이 지나고 오늘 문학과지성 시인선 440
이성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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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다만 죄를 고백할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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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화학파 b판시선 4
하종오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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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관한 시집, 위계 없는 공동체에 관한 시집, 무엇보다도 진실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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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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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홍승진 편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역, 니체 전집 1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257.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회의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 이와 같은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나 가치 차이의 긴 단계를 믿어왔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마치 혈육화된 신분 차이에서, 지배 계급이 예속자나 도구를 끊임없이 바라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그리고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에서 생겨나는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가 없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높고 점점 드물고 좀더 멀리 좀더 폭넓게 긴장시키는 좀더 광범위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인간이라는 유형의 향상이자 도덕적 형식을 초도덕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 극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귀족적 사회의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조건의—) 발생사에 대해서는 어떤 인도주의적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진리는 냉혹하다. 지금까지 모든 고도의 문화가 어떻게 지상에서 시작되었는지 가차없이 말해보자! 여전히 자연적 본성을 지닌 인간, 언어가 가지고 있는 온갖 섬뜩한 의미에서의 야만인, 아직 불굴의 의지력과 권력욕을 소유하고 있는 약탈의 인간들이 좀더 약하고 예의[272]바르고 좀더 평화로운, 아마 장사를 하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종족에, 또는 마지막 생명력이 정신과 퇴폐의 찬란한 불꽃 속에서 꺼져가고 있던 늙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문화에 엄습했던 것이다. 고귀한 계층은 처음에는 항상 야만인 계층이었다 : 그들의 우월함은 처음에는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정신적 힘에 있었던 것이다.—그들은 좀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이는 어떤 단계에서도 좀더 완전한 야수였음을 의미한다—).

 

258.

부패란 본능의 내부가 무정부 상태로 위협받으며, ‘생명이라 불리는 정동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부패는 그것이 나타나는 생명의 형태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귀족 체제가 혁명 초기의 프랑스처럼 숭고한 구토와 함께 그 특권을 던져버리고, 스스로를 그 과도한 도덕적 감정의 희생양으로 바친다면, 이것이 부패이다.—이것은 본래 저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된 부패의 종막일 따름이며, 그러한 부패 때문에 프랑스 귀족 체제는 서서히 자신의 지배 자격을 포기하고 스스로 왕권의 기능으로 (결국 완전히 장식물이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러나 훌륭하고 건강한 귀족 체제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귀족체제가 (왕권이든, 공동체든) 스스로 그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왕권이나 공동체의 의미나 최고의 변명으로 느낀다는 것이며,—그렇기 때문에 그 스스로를 위해 불완전한 인간이나 노예, 도구로까지 억압당하고 약해져야만 하는 무수히 많은 인간의 희생을 양심의 가책 없이 받아[273]들인다는 것이다. 이 제도의 근본 신념은 사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선택된 종류의 인간 존재를 좀더 차원이 높은 과제로, 대체로 보다 높은 존재로 고양될 수 있는 토대나 발판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그 덩굴로 참나무를 오랫동안 자주 휘감으면서 마침내 그것에 의지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햇빛 속에 그 화관을 펼치고 자신의 행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바섬에 있는 저 햇빛을 갈구하는 덩굴식물—이것은 시포 마타도르Sipo Matador라 불린다—과 비교할 수 있다.

 

259.

침해, 폭력, 착취를 서로 억제하고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것 : 이것은 만일 그 조건이 주어진다면 (말하자면 각 개인의 역량과 가치 척도가 실제로 유사하고, 그들이 같은 조직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어떤 개략적인 의미에서 각 개인 간의 선량한 풍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폭넓게 받아들여 혹시 사회의 근본 원리로까지 만들려고 하자마자, 바로 이것은 삶을 부정하는 의지로, 해체와 타락의 원리로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그 근거를 생각해서 감상적인 허약함을 배격해야만 한다 :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옛날부터 비방의 의도가 새겨져 있는 바로 그[274]와 같은 말을 언제나 사용해야만 하는가? 앞에서 가정한 것처럼, 내부에서 각 개인이 서로 동등하게 행동하고 있는 저 조직체 또한—이것은 모든 건강한 귀족 체제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이다—그것이 살아 있는 조직체이며 죽어가는 조직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각 개인이 그 안에서 서로 억제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조직체에 대해 스스로 행해야만 한다 : 그 조직체는 살아 있는 힘에의 의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성장하고 뻗어나가려 하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도덕성이나 비도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이야말로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인의 일반적인 의식은 다른 어떤 점에서보다도 이 점에서 그 가르침을 더욱 싫어한다 : 사람들은 오늘날 곳곳에서 심지어는 과학의 가면까지 쓰고 착취적 성격이 없어져야만 하는 장래의 사회 상태에 열광하고 있다 : —이것은 내 귀에는 마치 사람들이 유기적 기능을 멈추게 하는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들린다. ‘착취란 부패된 사회나 불완전한 원시적인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은 유기체의 근본 기능으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생명 의지이기도 한 본래의 힘에의 의지의 결과이다. —이것이 이론으로는 혁신이라 할지라도—현실로는 모든 역사의 근원적 사실이 : 그러나 이것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것이다!

 

[275]260.

지금까지 지상을 지배해왔고 또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좀더 세련되지만 거친 많은 도덕을 편력하면서, 나는 어떤 특질이 규칙적으로 서로 반복되거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결국 나는 두 가지 기본 유형이 드러났고,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났음을 알았다. 주인의 도덕노예의 도덕이 있다.—내가 여기에 바로 덧붙이려는 것은, 고도로 혼합된 모든 문화에서는 모두 이 두 가지 도덕을 조정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으며, 또 종종 그 두 가지가 뒤섞이거나 서로 오해하는 것도 보이며, 때로는—심지어는 같은 인간 안에서나, 하나의 영혼 안에서조차—그것들이 굳게 병존한다는 사실이다. 도덕적인 가치 차별은, 피지배 종족과 다르다는 것을 쾌감으로 의식하게 된 어떤 지배 종족 사이에서 생겨나거나, 아니면 여러 등급의 피지배자들, 노예들, 예속자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첫 번째의 경우 좋음gut’의 개념을 결정하는 것이 지배자들일 때, 탁월함과 위계질서를 결정하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영혼의 고양되고 자부심 있는 여러 상태이다. 고귀한 인간은 그와 같이 고양되고 자부심 있는 상태의 반대를 나타()는 인간들을 자신에게 분리시킨다. 그는 그러한 사람을 경멸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첫 번째 종류의 도덕에서 [‘좋음나쁨schlecht’의 대립은 고귀한경멸할 만한의 대립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 gut’böse의 대립의 유래는 다르다. 겁쟁이, 불안해하는 자, 소심한 자, 편협한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는 경멸 당한다.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시선으로 의심하는 자,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 학대할 수 있는 개 같은 인간, 구걸하는 아첨꾼, 그리고 무엇[276]보다 거짓말쟁이도 경멸 당한다.—비천한 서민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모든 귀족의 근본 신념이다. ‘우리 진실한 자들—고대 그리스에서 귀족들은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도덕적 가치 표시가 어디에서나 먼저 인간에게 붙여지고 그리고 비로소 파생되어서 후에 행위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 그 때문에 만일 도덕의 역사가가 왜 동정하는 행위는 칭찬받았는가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한다 : 이러한 도덕은 자기 예찬이다. 그 전경에는 충만한 감정과 넘쳐 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하는 부유함의 의식이 있다 : —고귀한 인간 역시 불행한 사람을 돕지만, 그러나 거의 동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힘이 낳은 충동에서 돕는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강자를 존경하며, 또한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이 있는 자,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아는 자, 기꺼이 자신에 대해 준엄하고 엄격하며 [모든 준엄하고 엄격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 자]를 존경한다. 고대 스칸디나비아 전설은 보탄Wotan은 내 가슴속에 가혹한 마음을 놓았다고 말한다 : 이것은 당연히 긍지가 있는 바이킹족의 영혼으로 창작된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인간은 동정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긍지를 지닌다 : 그 때문에 전설의 영웅은 젊어서 이미 엄격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결코 엄격해지[277]지 못할 것이다라는 경고의 말을 덧붙인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고귀한 사람이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다만 타인에 대한 동정이나 행위에서 또는 무관심 속에서만 도덕적인 것의 특징을 보는, 도덕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무아(無我)’ 등을 근본적으로 적대하고 조소하는 것은 공감(共感)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볍게 경멸하거나 경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고귀한 도덕에 속한다.—강한 자들은 존경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며, 이것이 그들의 기술이요, 발명 영역인 것이다. 나이든 사람과 혈통에 대한 깊은 외경—모든 법은 이 이중의 외경 위에 서 있다—, 조상에게는 유리하게 후손에게는 불리하게 대하는 믿음과 선입견은 강한 자들의 도덕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반대로 현대적 이념의 인간이 거의 본능적으로 진보미래를 믿고 나이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점점 더 잃어간다면,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이러한 이념의 유래가 고상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지배자의 도덕은 현대 취향에는 낯설고 적대적이다. 사람들이 오직 자신과 대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의무를 지니며 좀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행위해도 좋으며, 어떤 경우에든 선악의 저편에서행위해도 좋다는 그들의 원칙의 엄격성 때문이다— : 동정이나 그와 같은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오랫동안 감사하고 복수할 수 있는 능력과 의무—이 두 가지는 오직 그와 대등한 자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보복에서의 정교함, 우정에서의 세련된 생각, 적대자를 갖는 어떤 필연성 (말하자면 질투, 투쟁욕, [278]오만 등의 정동이 빠져나가기 위한 배수구로, 근본적으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 이 모든 것은 고귀한 도덕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 도덕은 이미 시사한 것처럼, ‘현대적 이념의 도덕이 아니며, 따라서 오늘날 그것을 그대로 느끼기 어려우며 또한 발굴해 드러내기도 어렵다.—도덕의 두 번째 유형인 노예의 도덕은 사정이 다르다. 만일 박해 받은 자, 억압 박은 자, 고통 받는 자, 자유롭지 못한 자,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는 자, 피로에 지친 자들이 도덕을 말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도덕적 가치 평가의 공통점은 무엇이 될 것인 것? 아마 인간의 전체 상황에 대한 염세주의적 의혹이 표출될 것이며 인간과 그의 상황에 유죄가 선고될 것이다. 노예의 시선은 강한 자의 덕에 증오를 품는다 : 그는 회의하고 불신하며, 거기서 존중되는 모든 정교하게 불신한다.—그는 행복 자체란 거기서는 참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어 한다. 그와 반대로 고통 받는 자들의 생존을 쉽게 하는 데 쓸모 있는 특성들이 이끌려 나와 조명 받게 된다 : 여기에는 동정, 도움을 주는 호의적인 손, 따뜻한 마음, 인내, 근면, 겸손, 친절이 칭송된다.—왜냐하면 이것들은 여기에서 생존의 압력을 견디기에 가장 유용한 특성이며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노예의 도덕은 본질적으로 유용성의 도덕이다. 여기에는 의 저 유명한 대립을 발생시키는 발생지가 있다 : —즉 힘과 위험, 경멸을 일으키지 않는 일종의 공포, 정교함, 강함이 악에 포함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노예의 도덕에 따르면 악인이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주인의 도덕에 따르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선인(善人)’이며, 반면 나쁜인간은 경멸할 만한 인간으로 [279]느끼게 된다. 노예의 도덕의 귀결에 따르면, 결국 이제 경멸을 머금은 기색이 또 이러한 도덕이 내세우는 선인에 결부된다면, 그 대립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이것은 가볍고 호의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왜냐하면 노예의 사유 방식에서 선인이란 어느 경우에도 위험하지 않은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 사람은 착하고 속기 쉽고 아마 약간은 어리석을 것이고 좋은 사람un bonhomme이다. 노예의 도덕이 우세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언어는 선함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서로 접근시키려는 경향을 나타낸다.—그 마지막 근본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외경하고 헌신하는 데는 기술과 열광이 귀족적 사고 방식과 가치 평가 방식의 한결 같은 징후인 것처럼, 자유를 향한 갈망, 행복에 대한 본능, 자유 감정의 예민함은 필연적으로 노예의 도덕과 노예의 덕성에 속한다.—이로부터 왜 열정으로서의 사랑이—이것은 우리 유럽의 특색이다—오로지 고귀한 유래를 가져야만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들을 발명한 것은 저 화려하고 창의적인 즐거운 지식의 인간들인 프로방스 지방의 기사(騎士)시인이며, 유럽은 많은 것을, 그리고 거의 유럽 그 자체까지도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다.

 

261.

고귀한 인간이 아마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허영심일 것이다 : 다른 부류의 인간이 그것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는 그것을 부인하고자 할 것이다. 그에게서 문제는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그리고 또한 그럴 만한 자격이’ [280]없는—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을 불러일으키려는 인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이러한 좋은 평판을 스스로 믿는 인간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는 이러한 일을 반 정도는 스스로에 대한 악취미나 불손한 것으로, 또한 반 정도는 기괴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허영심을 기꺼이 예외로 인식하고자 하며, 그것이 화제가 되는 대부분의 경우에도 이를 의심한다. 그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가치를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 가치를 내가 평가한 대로 타인에게서도 인정받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허영심이 아니다(오히려 자부심이거나 대개의 경우 겸허나 겸손으로 불리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나는 많은 이유에서 타인의 좋은 평판에 대해 기뻐할 수 있다. 아마 내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들의 어떤 즐거움에 대해 기뻐하기 때문이며, 아마도 또한 그들의 좋은 평판이 내가 지닌 나 자신의 좋은 평판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거나 강하게 해주기 때문이며, 아마 타인의 좋은 평판이 내가 그것을 나누지 않은 경우조차 나에게 유익하거나 이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영심이 아니다.” 고귀한 인간은, 특히 역사의 도움을 빌려, 즉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부터 어떤 식으로든 [종속적인 모든 하층계급에서의 평범한 인간이란 세상에서 통용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뿐임]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만 한다 : —그는 가치를 스스로 설정하는 데 전혀 익숙하지 못하며, 그들의 주인이 그에게 부여한 것 이상의 어떤 다른 가치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못했다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본래 주인의 권리이다.) 평범한 인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세[281]상의 평판을 기대하고, 그러고 나서 그와 같은 것에 본능적으로 굴복하는 것은 엄청난 격세유전의 결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완전히 좋은평판만이 아니라, 나쁘고 부당한 평판에도 굴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앙심 깊은 부인들이 그들의 고해신부에게서 배운, 그리고 일반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교회에서 배운 대부분의 자기 평가와 자기 멸시를 생각해보라.) 사실 이제, 사물(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주인과 노예의 피 섞임)의 민주적 질서가 서서히 나타남에 따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자신을 좋게 생각하는본래 고귀하고 희귀한 충동은 점점 더 고무되고 확대될 것이다 : 그러나 이 충동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반하는 더 오래되고 좀더 넓고 철저하게 동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허영심이라고 하는 현상에서는 좀더 오래된 이 경향이 최근의 경향을 지배하게 된다. 허영심 있는 인간은 자신에 대해 듣는 모든 좋은 평판에 기뻐하며(그것이 유익한가의 관점은 상관하지도 않고, 또 마찬가지로 참과 거짓도 도외시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나쁜 평판에 대해 괴로워한다 : 왜냐하면 그는 이 두 평판에 예속되어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복종이라는 본능]에 예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그것은 허영심 있는 사람의 피 속에 있는 노예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평판을 유도하려는 노예의 교활함의 잔재이다.—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노예가 오늘날에도 여성 안에 남아 있단 말인가!—나중에 이러한 세평 앞에서, 마치 그것을 불러낸 것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즉시 스스로 무릎을 꿇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노예이다.—다시 한번 말하자면, 허영심은 격세유전이다.

 

[282]262.

하나의 종족이 발생하고, 하나의 유형이 고정되고 강해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불리한 조건들과의 오랜 투쟁 아래서이다. 반대로 너무 풍부한 영양이 주어지고 대체로 지나치게 보호하고 신중한 종족들은 곧 강력한 방식으로 유형이 변형되는 경향이 있고, 기괴한 것이나 기형적인 것(또한 기형적인 악덕)도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양육자의 경험에서 알게 된다. 이제 의도된 시설이든 의도하지 않은 시설이든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로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나 베니스 같은 귀족적 공동체를 한번 생각해보자 : 거기에는 자신들의 종족을 지키려고 하는 인간들이 서로 믿고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뽑히는 무서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변종(變種)을 촉진하는 장점이나 과잉, 보호가 없다. 종족은 스스로가 종족으로 필요했고, 이웃 종족이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의 위협을 주는 피지배자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도, 바로 자신의 엄격함과 동일한 형태, 형태의 단순함에 의해 대체로 스스로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들이 모든 신과 인간에게 저항하여 여전히 거기에 생존하며 언제나 승리를 거두어온 것이, 특히 어떤 특성 덕분인지 그들은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다 : 이러한 특성을 그들은 미덕이라 부르고, 이러한 미덕만을 크게 육성했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엄격하게 육성했으며, 실로 그들은 엄격함을 원했다. 모든 귀족적 도덕은 청소년의 교육과 여성에 대한 처우에서, 결혼 풍습과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에서, (오로지 비정상인만을 주목하는) 형법에서 너그럽지 못하다 : —그들은 [283]비관용 자체를 정의라는 이름 아래 미덕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수는 적지만 매우 강한 특성을 가진 유형이, 준엄하고 전투적이며 현명하면서도 과목하고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종류의 인간이 (사교의 매력이나 뉘앙스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인간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세대의 교체를 넘어 확립된다. 이미 말했듯이, 언제나 똑같은 불리한 조건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은 한 유형이 고정되고 굳세어지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마침내 언젠가는 행복한 상황이 발생하고 엄청난 긴장이 풀리게 된다. 아마 이웃 사이에는 더 이상 적이 없어질 것이며 삶을 위한 수단, 삶을 즐기기 위한 수단마저도 넘칠 정도로 있게 된다. 한 순간 낡은 육성의 속박과 강제는 끊어지게 된다 : 그것은 더 이상 필연적인 것으로도 생존을 제약하는 것으로도 느끼지 않게 된다.—그것이 존속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치의 한 형식으로, 고풍스러운 취미로만 존속할 수 있을 뿐이다. (좀더 고귀한 것, 좀더 섬세한 것, 좀더 희귀한 것으로 변하는) 변질이든 퇴화나 기형이든 그 종족의 변화는 갑자기 가장 풍부하고 화려하게 무대 위에 나타나고, 개인은 감히 개체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며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역사의 전환기에는 장엄하고 다양한 원시림과 같이 성장하고 상승하려는 노력이, 성장의 경쟁심 속에 있는 일종의 열대의 템포와 엄청난 몰락이나 파멸이 서로 나란히, 때로는 서로 얽히고 짜여 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태양과 빛을 찾고자 서로 투쟁하고, 더 이상 지금까지의 도덕에서 어떤 한계나 제약도, 보호도 이끌어낼 줄 모르며 거칠게 서로 대립하는, 말하자면 폭발하는 듯한 이기주의 덕분이다. 이 도덕 자체는 그렇게 위험할 정도로 활을 당길 힘을 엄청나게 축적했던 것이다 : [284]지금 이것은 살아남아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좀더 크고 다양하며 광범위한 삶이 낡은 도덕을 초월하여 살아간다고 하는 위험하고 섬뜩한 시점에 이르렀다. ‘개인은 여기에 서서 자기 자신의 입법을, 자기 보존과 자기 향상, 자기 구원을 위해 스스로의 기교와 간지(奸智)를 필요로 하게 된다. 오직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방법이 있을 뿐, 공통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고 오해와 경멸이 서로 결합해 있으며, 몰락과 부패, 최고의 욕망이 소름 끼치게 얽혀 있고. 선과 악의 온갖 풍요의 뿔에서 종족의 천재가 넘쳐흐르며, 아직 다 퍼내지 못한 지치지 않은 젊은 퇴폐의 특징인 새로운 매력과 베일이 가득한 채, 봄과 가을이 숙명적으로 동시에 공존해 있다. 여기에 다시 도덕의 어머니인 위험이, 커다란 위험이 다가오는데, 이번에는 개인 안으로, 이웃과 친구 안으로, 골목 안으로, 자신의 아이 안으로, 자신의 마음 안으로, 소망과 의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유하고 가장 비밀스러운 모든 것 안으로 옮겨가게 된다 : 이러한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도덕 철학자들은 지금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 이 예리한 관찰자이며 방관자인 그들은 사태가 빠르게 끝나게 된다는 것을, 그들 주변의 모든 것이 부패하고 또한 부패시킨다는 것을, 한 부류의 인간, 즉 치유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모레까지 남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직 평범한 인간들만이 존속하고 번식할 전망을 갖게 된다.—그들은 미래의 인간들이며 유일하게 살아남는 자들이다 : 이제 그들처럼 되어라! 평범하게 되어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직도 의미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들을 귀를 찾고 있는 유일한 도덕이다.—그러나 이 평범함의 도덕을 설교하는 것은 어렵다!—이 도덕은 그 자신의 내용이 무엇[285]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고백할 수 없다! 그것은 절도와 품위, 의무와 이웃사랑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그것은 아이러니를 숨기는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263.

지위에 대한 본능이 있는데,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미 높은 지위에 있다는 표시이다. 고귀한 혈통과 습관을 가늠하게 하는 경외의 뉘앙스에 대한 즐거움이 있다. 제일의 지위에 있지만, 주제넘은 취급이나 졸렬함 앞에서 [권위의 전율에서 아직 보호되지 않은 그 어떤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발견되지 않고, 유혹하면서, 아마 제멋대로 몸을 숨기고 변장하면서, 살아 있는 시금석처럼 자신의 길만을 가는 그 어떤 것]이 곁을 지나갈 때, 어떤 영혼의 섬세함, 선량함, 높이는 위험한 시험을 겪게 된다 : 영혼을 탐색하는 일을 자신의 과제와 훈련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영혼의 궁극적 가치와 그 영혼이 속한 움직일 수 없는 생득적인 위계질서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식으로 바로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 즉 그는 경외의 본능을 목표로 이 영혼을 시험할 것이다. 차이는 증오를 낳는다 : 그 어떤 성스러운 기물(器物)이나 닫혀진 성골(聖骨) 상자에서 나온 귀중품이나 위대한 운명의 표시가 있는 어떤 책이 눈앞에 놓일 때, 많은 본성에 있는 비열함이 갑자기 더러운 물처럼 튀어 오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의 아니게 입을 다물고 시선을 머뭇거리고 모든 거동을 멈추는 일이 있는데, 이는 어떤 영혼이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286]체로 지금까지 유럽에서 성서에 대한 외경이 올바로 유지되어온 그 방식은 아마도 유럽이 기독교의 덕을 입은 풍습의 훈육과 순화 가운데 최고의 것이리라 : 깊이와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이러한 책들은 그 내용을 완전히 퍼내고 풀어내는 데 필요한 수천 년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에서 오는 전제적인 권위의 보호가 필요하다. 만일 대중에게 (온갖 종류의 천박하고 추잡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손대서는 안 되고 그 앞에서는 신발을 벗어야만 하거나 불결한 손을 멀리해야 하는 성스러운 경험이 있다고 하는, 저 감정이 마침내 육성되었다면, 많은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그것은 그들이 거의 인간성을 향해 최고로 상승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른바 교양인, ‘현대적 이념을 믿는 신봉자들에게는 아마 그들에게 수치심이 결여되었다는 것보다, 모든 것을 만져보고 핥아보고 쓰다듬는 그들의 눈과 손의 안일한 후안무치보다도 역겨움을 일으키는 것은 없으리라. 오늘날 민중 속에서, 하층 민중 속에서, 무엇보다 농민들 사이에서, 신문을 읽는 정신의 창녀 같은 인간, 즉 교양인의 경우보다 더욱 상대적으로 취미의 고귀함이나 외경의 조심스러움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264.

한 인간의 영혼에서 그의 선조들이 가장 애정을 들여 쉬지 않고 행해왔던 것을 완전히 씻어버릴 수는 없다 : 그의 선조들이 근면한 절약가였고 책상과 금고의 부속품이었으며 그 자신의 욕구에서는 겸손하고 시민적이며, 또한 덕성에서도 겸손했다 해도, 또는 그들[287]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명령하는 습관으로 살아왔고 거친 즐거움을 좋아했으며, 뿐만 아니라 더욱 거친 의무와 책임을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해도, 혹은 어떤 타협에도 낯을 붉히는 [가차없으면서도 섬세한 양심을 지닌] 인간으로 완전히 자신의 믿음에—자신의 에—따라 살기 위해, 언젠가 결국은 가문과 재산이라는 옛 특권을 희생한 일이 있었다 해도 말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부모와 조상의 특성이나 편애를 몸 안에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설령 그 겉모습이 반대를 말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것은 종족의 문제다. 만일 부모에 대해 몇 가지를 안다고 하면, 자식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장애가 되는 무절제와 음험한 질투, 볼품없는 자기 정당화—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어느 시대에나 본래의 천민 유형을 이루어왔던 것처럼—이와 같은 것들은 썩은 피처럼 자식에게 확실히 옮아가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이 최상의 교육과 교양의 도움을 받아 성취한 것은 단지 이러한 유전을 속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과 교양이 다른 것을 바라고 있단 말인가! 우리의 매우 민중적인, 즉 천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교육교양은 본질적으로 속이기 위한—혈통이나, 육체와 정신에 유전된 천민을 속이기 위한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성실함을 설교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진실하라! 자연스러워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라!”고 외치는 교육자가 있다면,—그러한 유덕하고 순진한 멍청이도 시간이 지나면 본성을 몰아내기 위해 호라티우스Horaz의 갈퀴를 잡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어떤 효과가 있겠는가? ‘천민은 언제나 되돌아온다.

 

[288]265.

순진한 사람의 귀를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이기주의란 고귀한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말하는 이기주의란 우리는 존재한다처럼 존재에 대해서 다른 존재는 자연히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되고 희생되어야 한다는 저 확고한 신념이다. 고귀한 영혼은 자신의 이기주의라는 이 사실을 어떤 의문도 없이, 거기에 가혹함이나 강제와 자의의 감정도 없이, 오히려 사물의 근본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처럼 받아들인다 : —그것에 대한 이름을 찾는다면, 이 영혼은 그것은 정의 그 자체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 사정이 처음에는 그를 망설이게 만들지만, 이 영혼은 자기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지위의 문제를 명백히 한 후 모든 별이 알고 있는 생득적인 천체의 역학에 따라서, 자기 자신과 관계할 때 갖는 것과 같은 확실한 수치심과 섬세한 존경심 속에서, 이들 동등한 인간이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게 된다. 자신과 동등한 자와 교류할 때의 이러한 섬세함과 자기 제한, 이것은 그의 이기주의의 단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모든 별은 이러한 이기주의자인 것이다— : 이 영혼은 이러한 사람들과 스스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는 권리 속에서 스스로를 존경하는 것이다. 이는 존경과 권리를 교환하는 것이 모든 교류의 본질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속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귀한 영혼은 그 근저에 놓인 열정적이고 민감한 보복의 본능에서, 그가 취한 만큼 주게 된다. ‘은혜라는 개념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도 향기도 갖지 못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선물을 거의 견[289]디어 받아들이고 빗방울처럼 갈증 내면서 마셔버리는 고상한 방법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고귀한 영혼은 이러한 기교나 몸짓에는 능숙하지 못하다. 여기에서 그의 이기주의가 그를 방해한다 : 이는 대체로 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수평으로 천천히 자기 을 보거나 아니면 내려다본다 : 그는 자신이 높은 곳에 있음을 알고 있다.

 

266.

자기 자신을 구하지 않는 사람만을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다.”—괴테가 고문관 슐로서Schlosser에게 한 말.

 

267.

중국인에게는 어머니들이 미리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격언이 있다 : 즉 소심(小心, siao-sin), “네 마음을 작게 가져라이다. 이것은 말기 문명에 나타나는 고유한 근본 경향이다 : 나는 고대 그리스인 역시 오늘날의 우리 유럽인들에게서 제일 먼저 자기 왜소화를 식별해내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이것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그리스인의 취미에 반하는것이다.

 

268.

비속함이란 결국 무엇인가?—말이란 개념에 대한 음향 부호다. [290]그러나 개념이란 자주 반복되며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감각이나 감각군들에 대한 다소 확정된 영상 기호다. 서로 이해하기 위해 똑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사람들은 같은 종류의 내적 체험을 위해서도 동일한 말을 사용해야 하며, 결국 체험을 서로 공동으로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일 지라도, 한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보다 서로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오랜 시간(기후, 토지, 위험, 욕구, 노동의) 유사한 조건 아래 함께 살아간다면, 거기에서 서로 이해하는어떤 것, 즉 한 민족이 생겨난다. 모든 영혼에서는 같은 횟수로 자주 반복되는 체험이 좀더 드물게 나타나는 체험에 대해 우위를 차지해왔다 :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빠르게, 더욱 빠르게 이해하게 된다.—언어의 역사는 단축 과정의 역사다—. 이와 같은 빠른 이해에 의해 사람들은 긴밀하게, 점점 더 긴밀하게 결합하게 된다. 위험이 크면 클수록, 긴급한 문제에 대해 신속하고 용이하게 의견 일치할 필요성도 더욱 커지게 된다. 위험에 처해 서로 오해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간이 교류하는 데 절대로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우정이나 연애에서도 사람들은 이러한 시험을 하게 된다 :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똑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상대방과 달리 느끼고 생각하고 추측하고 원하고 무서워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바로 그와 같은 관계는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오해에 대한 공포 : 이것은 서로 다른 성()을 가진 인간들이 실로 자주 관능과 심정이 권하듯 너무 조급하게 결합하지 못하게 해주는 호의적인 수호신이다—이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종의 수호신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한 영혼 안에서 어떤 감[291]각군이 가장 빨리 깨어나게 되고 발언하며 명령을 내리게 되는지가 그 영혼의 가치의 전체 위계질서를 결정하며, 이것이 결국 그 영혼의 재산 목록을 확정하게 된다. 한 인간의 가치 평가는 그의 영혼의 구조에 관해 어떤 것을 드러내며, 그 영혼이 어디에서 자신의 생명 조건과 본래의 어려움을 보고 있는지 드러내준다. 이제 가령 어려움이 옛날부터 유사한 기호로 유사한 욕구와 유사한 체험을 암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서로 접근시켰다고 한다면, 그 결론은 전체적으로 어려움을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오직 평균적이고 공동의 체험을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마음대로 해왔던 모든 폭력 가운데 가장 큰 폭력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좀더 유사하고 좀더 평범한 인간들은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좀더 선택된 자, 좀더 예민한 자, 좀더 희귀한 자, 좀더 이해하기 어려운 자들은 쉽게 고립되기 쉬우며,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 재난을 당하기도 쉽고 거의 번식하지도 못한다. 이 자연스러운 것, 너무 자연스럽게 유사한 것으로 진행하는 과정, 유사한 것, 일상적인 것, 평균적인 것, 무리적인 것으로—비속한 것으로!—인간을 다시 교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거대한 저항력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269.

어떤 심리학자—타고난, 피할 수 없는 심리학자이면서 영혼을 해명하는 자—가 공들여 골라낸 경우나 인간에게로 방향을 돌리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동정 때문에 질식하는 위험은 더 커지게 된[292] : 그에게는 다른 인간 이상의 냉혹함과 명랑함이 필요하다. 보다 높은 인간이나 이상한 기질을 가진 영혼이 타락하고 몰락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반적인 일이다 : 항상 이러한 일반적인 일을 주시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다. 이 몰락하는 과정을 발견했고, 보다 높은 인간의 이러한 내적인 치유 불능전체, 모든 의미에서 이와 같이 영원한 너무 늦었다!”는 말을 전 역사를 통해 우선 한번 발견하고, 거의 언제나 되풀이해 발견하고 있는 심리학자가 당하는 갖가지 고문의 고통은—아마 언젠가는 그가 분격하여 자신의 운명에 대항하며 자기 파괴를 시도하는, 그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원인이 될 수 있다. 거의 모든 심리학자의 경우에, 평범하며 잘 정돈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는 배신의 경향과 쾌락이 있음을 알게 된다 : 이 점에서 그에게는 항상 치료가 필요하며, 자신의 통찰과 절개(切開), 자신의 직업이 양심에 부과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종의 도피와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신의 기억에 대한 두려움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평가 앞에서 쉽게 침묵하게 된다 : 그는 자기가 보아왔던 곳에서 존경 받고 찬미되고 사랑 받고 미화되는 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또는 그는 앞에 드러나는 어떤 견해에 명확히 동의를 나타냄으로써 자신의 침묵을 숨기기도 한다. 아마도 그가 처한 상황의 역설은 그가 커다란 존경과 함께 커다란 존경을 배우게 된다는 끔찍한 사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즉 그것은 위대한 인간들이나 기인에 대한 존경이며, 그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국, 대지, 인간의 존엄성,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며, 이러[293]한 인간들을 목표로 청소년의 주의를 촉구하고 교육을 시킨다……지금까지 모든 중대한 사건의 경우에서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즉 대중이 하나의 신을 숭배했고, 은 단지 가련한 희생양에 불과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성과란 언제나 가장 위대한 거짓말쟁이였고.—그리고 작품그 자체는 하나의 성과였다. 위대한 정치가, 정복자, 발견자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모습을 위장했다. ‘작품’, 즉 예술가나 철학자의 작품은 그것을 창조했고 또 창조했다고 하는 자를 창작해낸다. 존경 받고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란 후에 이루어진 빈약하고 졸렬한 창작인 것이다. 역사적 가치의 세계에서는 화폐 위조가 지배한다. 예를 들어, 바이런, 뮈세L. C. A. de Musset, E. A. Poe, 레오파르디E. A. Leopardi, 클라이스트B. H. W. von Kleist, 고골리N. Gogol같은 위대한 시인들—그들은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순간을 사는 인간이며, 열광하고 관능적이고 어린아이 같고 불신과 신뢰에서 경솔하고 당돌하다. 그들은 보통 숨겨야 할 어떤 깨진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작품으로 내적인 오욕에 복수하며, 또 때로는 영혼을 비상시킴으로써 너무나 충실한 기억을 망각하려고 시도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진흙탕 속에 길을 잃고 헤매다 거의 그것에 탐닉하기까지 하고, 마침내는 늪 언저리를 떠도는 도깨비불처럼 되어 스스로를 별로 착각하게 된다.—이렇게 되면 민중은 그들을 이상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또 때때로 그들은 오랜 역겨움과 싸우면서 반복되는 불신의 유령과 싸우는데, 이러한 불신은 그들을 차갑게 만들며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갈구하게 하고, 도취된 아첨하는 자의 손에서 자기 자[294]신에 대한 믿음을 먹어 치우게 한다 : —이러한 위대한 예술가나 일반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들은 한번 그들의 정체를 간파한 자에게는 얼마나 고문이 될 것인가! 그들은 바로—고통의 세계에서는 투시력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 돕고자 하고 구원하려는—여성에게서 이렇게 쉽게 무제한적이고 헌신적인 연민이 분출되는 것을 체험하며, 이러한 분출을 대중, 무엇보다도 그들을 존경하고 있는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고, 호기심으로 제멋대로 해석을 쌓아 올린다는 것은 납득할 만한 사실이다. 이러한 연민은 한결같이 자신의 힘을 잘못 보고 있다. 여성은 사랑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이것은 여성의 고유한 믿음이기도 하다. , 마음을 아는 자는 가장 훌륭하고 깊이 있는 사랑마저도, 얼마나 빈약하고 어리석은지, 얼마나 무력하고 불손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구원하기보다는 파괴하기가 쉬운지를 알아챌 것이다!—예수의 생애에 관한 성스러운 우화나 미화 아래에는 사랑에 관한 지식의 순교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례 중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즉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열정적인 마음의 순교로, 이 마음은 일찍이 어떤 인간의 사랑에도 만족한 일이 없고, 가혹함으로 광기로 그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감정의 폭발로 사랑과 사랑 받기를 원하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랑에 싫증 내지 않고 만족할 줄 몰랐던 가련한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보내기 위해 지옥을 고안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가 마침내 인간의 사랑을 알게 되자, 완전한 사랑이자 완전한 사랑의 능력인 신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이 신은 인간의 사랑[295]이 가엾기조차 하며 무지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느끼고 이와 같이 사랑을 아는 자는—죽음을 찾는다.—그러나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에 매달리는가? 가령, 그럴 필요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270.

깊이 고통을 겪어본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적인 자부심과 구토감이—이것은 얼마나 깊이 인간이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가 하는 순위를 거의 결정한다—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자들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멀고도 무서운 많은 세계를 잘 알고 있고, 언젠가 그곳에 머문적이 있다는 전율할 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확신이 온몸에 젖어 들어 이로 채색해버린 것이다. 고통 받는 자의 이러한 정신적인 무언의 교만이나, 선택된 인식자, ‘정통한 자’, 거의 희생된 자의 이러한 긍지는 주제 넘은 동정의 손과 접촉하는 것에서, 그리고 대체로 그와 고통을 같이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형식의 변장이 필요하다. 깊은 고통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 이것은 사람을 구분시킨다. 가장 정교한 변장 형식의 하나가 에피쿠로스주의이며, 앞으로 확실히 드러내 보이게 될 취미의 대담성인데, 이는 고통을 가볍게 다루는 슬프고 심각한 모든 것에 저항하게 된다. 명랑하다고 오해 받기 때문에, 명랑함을 이용하는 좀더 명랑한 인간이 있다 : —그들은 오해 받기를 원한다. 과학이 유쾌한 외관을 주기 때[296]문에, 또한 과학성이 인간은 천박하다는 것을 추론하게 하기 때문에, 과학을 이용하는 과학적 인간들이 있다.—그들은 유혹하여 그릇된 추론을 이끌어내기를 원한다. 자신들이 깨져버린 긍지를 지닌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감추거나 부인하고 싶어하는, 자유로우면서 뻔뻔한 정신을 지닌 인간도 있다. 또 때때로 어리석음마저도 불길하고 너무나 확실한 지식을 감추는 가면이 된다.—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가면에 경외심을 갖고, 잘못된 자리에 심리학과 호기심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좀더 섬세한 인간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271.

두 인간을 가장 깊이 있게 구분하는 것은 청결에 관한 서로 다른 감각과 그 정도의 차이다. 아무리 용감하고 서로 쓸모가 있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고,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 결국 여기에 남게 되는 것은 그들이 서로 참을 수 없이 싫다!”는 것이다. 청결이라는 최고의 본능은 그것에 사로잡힌 자를 성자로, 가장 기이하고도 위험한 고독 속에 두는 것이다 :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성스러움이며—위에서 언급했듯이 본능을 최고로 정신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욕하는 행복 속에 담겨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충일감을 어떻게든지 안다는 것, 영혼을 끊임없이 밤에서 아침으로, 혼탁과 고뇌에서 밝고 찬란히 빛나고 깊이 있고 섬세한 것으로 몰아가는 어떤 욕정과 갈망과 같은 것— : 바로 그러한 경향은 사람을 뛰어나게 하며—그것은 어떤 고귀한 경[297]향이다—, 또한 사람을 구분시킨다. 성자의 동정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의 더러움에 대한 동정이다. 그리고 동정 그 자체도 성자가 부정이나 더러움으로 느끼게 되는 여러 가지 정도와 높이가 있는 것이다……

 

272

고귀함의 표시 : 우리의 의무를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로까지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의 책임을 양도하려고 하거나 분담하려고 하지 않는 것. 자신의 특권과 그것을 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들 가운데서 생각해보는 것.

 

273.

위대한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인간은 자신의 진로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거나 지연시키는 것 또는 장애물로 여긴다.—아니면 일시적인 휴식용 침대로 여긴다. 그의 고유한, 함께 사는 인간들에 대한 고귀한 성품의 자비는 그가 그 높이에 있으면서 지배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성급함과 그때까지는 언제나 희극을 연출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그의 의식은—왜냐하면 전쟁마저도 희극이며, 모든 수단이 목적을 숨기고 있듯이 그 목적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모든 교제를 망가뜨린다 : 이러한 종류의 인간은 고독을 알고 있으며 고독이 얼마나 강렬한 독 자체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298]274.

기다리는 자의 문제.—어떤 문제의 해결점이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보다 높은 인간이 그래도 적절한 시간에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말하자면 분출하기 위해서는행운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보통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구석에는 앉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며, 그러나 기다려도 헛되다는 사실을 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또한 그들을 깨우는 고함소리가,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저 우연이 너무 늦게 다가온다.—그때는 조용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행동하기 위한 최상의 청춘과 힘을 이미 다 써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가 벌떡 일어섰을, 사지가 마비되고 정신이 이미 너무 무거워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놀랐던 것일까! “너무 늦었다—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는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이제 영원히 쓸모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천재의 영역에서는 손 없는 라파엘이라는 말이, 이 용어를 가장 폭넓은 의미로 이해하는 한, 예외가 아니라 통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천재란 아마 결코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리라 : 그러나 드문 것은 적절한 때χαιεός—를 마음대로 지배하기 위해, 우연의 앞 머리털을 잡기 위해, 필요로 하는 5백 개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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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큰언니 책만드는집 시인선 1
정진규 지음 / 책만드는집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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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규 선생은 39년생이니, 나이 일흔을 넘어섰다. 비슷한 연배의 시 쓰는 사람들로는 이건청, 이승훈, 오탁번, 허만하 등이 있으나 그 연배의 시인으로는 정진규 선생의 시가 단연 으뜸이다. 특히 이 시집이 그렇다. 그 나이가 되도록 이토록 긴장감을 유지하는 시편들을 그토록 꾸준히 창작할 수 있다니! 그가 여적지 시 월간지 주간을 맡으며 부지런히 요즘 시와 호흡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의 놀라운 시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일까? 아무튼 이 시집은 이번 달 내가 읽은 시집들 가운데에서도 제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시집을 받아 들면 우선 눈에 띄는 점이 '율려(律呂)'라는 형식이다. 시집의 부제마저 '율려집(律呂集)'이며, 수록된 모든 시에는 각각 '律呂集 1'부터 '律呂集 52'까지의 연번이 붙어있다. 율려란 시인이 최근에 수립해놓은 일종의 시론 같은 것인데, 상당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어서 시 전편을 읽어 보아도 그 구체적 내용을 잘 알기 어렵다. 율려 시론에 입각하여 시를 쓴다 하였지만, 때로는 오히려 그 시론 때문에 시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질 때도 있다. 다만 이제는 시인이 생각한 대로 쓰는 그대로가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시론의 내용을 읽는 이가 이해하지 못해도 시 자체가 좋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새로 심은 배롱나무 두 그루」라는 시를 읽다 울컥, 하고 눈물을 쏟을 뻔했다. 

   같이 살자 해놓고서도 우후죽순이 아니라 우후 잡초로 솟아오르는 쇠뜨기 질경이 괭이눈들을 서둘러 뽑고 있는 나는 아직도 빗장이 많고, 좀 지나 땅이 말라 물기 가시면 풀들이 뽑히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방어는 이토록 훈련되어 있다 해마다 새 나무들을 심어서 먼저 심은 나무들의 자리와 허공을 갑갑하게 하는 것 또한 자유의 황홀을 탐한다 하면서 욕망의 황홀에 아직껏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야 비인 자리를 그냥 두고 볼 수 있을까 냅둘 수 있을까 지난봄 새로 심은 배롱나무 두 그루가 어제오늘 심상치 않다 놀라워라, 滿開로 나를 황홀케 한다 빗장을 열어젖힌 것인가 갑갑한 허공을 터뜨린 것인가 革命인 것인가 자유의 황홀을 내게 압도적으로 가르치는 것인가 내 안에 넘치도록 가둔, 곳간에 쟁이고 쟁여둔 욕망의 황홀인가 어느 쪽인가 또 한 手 눈치채고 있는 중이다 몸이 뜨겁다

   "자리와 허공을 갑갑하게 하는 것 또한 자유의 황홀을 탐한다 하면서 욕망의 황홀에 아직껏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읽다가 나는 황망히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몸을 바르게 해야만 했다. 자유라고 다 같은 자유가 아닌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이름뿐인 자유에 도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욕망의 해방에 도취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어들은 시에서 성공적으로 활용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유니, 욕망이니 하는 말들이 전혀 메마르거나 질척거리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시어로 쓰이고 있다. 화자의 행위, 화자를 둘러싼 상황, 그리고 그것들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사유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롱나무에 꽃 피는 것을 마침내 '혁명'이라 부르고 만다. 하기사 이 땅에서 그만한 혁명이 또 어디 있으랴. 

  맨 마지막 한 문장인 "몸이 뜨겁다"라는 구절은 과연 절창이다. 이런 게 진정 시인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나는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그리하여 결국엔 허를 한참 찔리고야 마는 그런 표현 말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만드는 게 바로 시인만의 어법이며 그 시의 개성이다. 앞서 언급한 '율려'의 시론이 무엇인지 나 스스로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은데, 그 시론의 특징 중 핵심적 요체가 "몸이 뜨겁다"는 구절을 낳았다고 헤아려본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반응이란 황홀한 감각 혹은 감정의 육체적 현상이다. 한 마디로 '몸'이 굉장히 중요하다. 세상을 다스리고 움직이는 이치나 원리 따위를 포착하여, 거기에 육체와 물질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창작 원리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에서는 "비 오는 날은 내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사물들과 유관하다 젖어서 그것도 아득히 유관하다 비안개 피어오른다 젖어서 이어진다"라는 구절이 시인의 눈에 밟힌 우주의 질서이다. 거기에 '콩잎', '들깻잎', 그리고 그 사이를 건너다니는 '빗줄기' 등의 실물들을 배치할 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된다. 실제로 비 오는 날에는 모든 게 젖지 않는가? 동물도 식물도 모두 젖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어느새 젖고 말고, 그 모든 것들을 적시는 빗줄기 역시도 원래부터 젖어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것은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의 실체를 대라고? 물증을 보여 달라고?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본 사람은 누구나 그 즉시 알게 된다. 그리고 정진규의 시를 읽는 게 그 경험과 동일하다. 

  「방죽에 대하여」에서는 느닷없이 '너'라는 발화 대상을 설정한 대목이 서늘하게 가슴을 치고 간다. "초록 金剛 연뿌리 햇빛 쟁이고 쟁여 초록으로 개었다 닫힌 너도 열 수 있겠다 (중략) 꽃대궁마저 일어서 올부턴 분홍빛 뾰족한 향기 주먹으로 닫힌 네 가슴 두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잘 있느냐 가시연꽃이다 아무나 덤벼들 수 없다 화알짝 향기로 개이는 날 너를 이 꽃방석에 앉힐 것이다 뿌리치겠느냐 그러면 죄받는다" 굉장한 공을 들여 다듬은 표현들과 너무도 평이한 표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오묘한 깊이를 자아낸다. 그렇지만 이 시는 화자가 돌연히 '너'를 호명할 때 비로소 빛을 뿜어낸다. 편지글도 아닌데, 처음부터 '너'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무작정 너를 부른다. 막무가내다. 그 무작정과 막무가내가 실은 너와 나를 하나로 이어준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墓舍를 뜯어 오다」라는 시다. "재활용이 어려운 것들은 귀하다 단번은 귀하다 한 번만 써야 하는 것들은 귀하다 순결은 귀한 것인가 아무나 못 하니 귀하다 삼백 년이나 묵은 기왓장들이 아니신가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다 사람을 못 만나서 그렇지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하늘의 별 따기 그런 기왓장을 만날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을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것들도 아귀가 맞아야 한다" 이런 구절은 좋다. 아무튼 나의 스승님께서 내게 이 시집을 추천해주시며 한 말씀. "시는 자고로 이렇게 쓰는 거야.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꾸준히 좋은 시를 쓰는 거야." 나도 오래 살고 싶다. 내 삶도 오래 살고 내 시도 오래 살고. 그리하여 시와 삶이 하나로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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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2011-08-31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사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담연 2011-08-31 21:23   좋아요 0 | URL
시집을 사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나이에 그렇게 쓸 수가 있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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