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행사들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라 불리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우선 3월부터 6월까지 영국에서 최초로 '스크랩북' 전시회가 열린다.



'스크랩북'은 그의 사진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브레송이 3년이나 포로로 잡힌 탓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그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작가유고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살아 돌아온 브레송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고 전시회에 기꺼이 도움을 주기로 한다. 1946년 평소에 자주 인화작업을 하지 않던 브레송은 직접 인화한 300장의 사진을 들고 뉴욕으로 갔고 스크랩북을 하나 산 뒤 직접 사진을 풀로 붙여 연대순으로 정리, 그 앨범을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에게 보냈다. 1932년부터 1946년까지 찍은 사진들로 당시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 많았다. 유고전으로 준비를 시작했으나 생환기념전이 된 전시회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이듬해인 1947년 2월 4일 막을 올렸는데 브레송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말년에 브레송은 이 스크랩북의 복원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작업을 마치지 못했고 2004년 그가 세상을 뜬 후 재단쪽에서 복원작업을 마무리하고 세상에 다시 공개되었다. 이 밖에 9월부터 11월 사이엔 브레송재단에서 '브레송-워크 에반스 공동기획전'이 열리며 11월 열리는 유럽최고의 사진축제 '파리포토' 기간엔 브레송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이 예정되어 있다. 브레송을 사랑하는 사진 애호가들에겐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행사가 될 것이다.

"사진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것"

브레송은 65년에 매그넘의 일선에서 물러났고 1973년에 공식적으로는 사진에서 손을 뗐다. 늘 그 이유가 궁금했던 기자는 재단 쪽 관계자에게 브레송의 변을 전해들었다. 그가 사진을 그만둔 이유에선 자존심이 넘쳐흐르고 까칠함과 동시에 솔직함도 풍겨난다. 브레송은 사진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카메라를 손에서 내리고 그가 최초로 열정을 기울였던 그림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후에도 그림을 위해서 개인적인 사진은 계속 찍었고 1990년대 후반까진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재단을 방문한 김에 대가의 가르침을 한 자락 전해 듣고 싶어 우문을 던졌다. "브레송처럼 잘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남긴 게 있을까?" 브레송이 말하길 "당신은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가 없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가슴에서, 눈에서 그리고 영혼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현답이 돌아왔다.

이미지의 세기라 불리는 20세기에서 브레송은 '시대의 눈'으로 불렸다. 파리에 있는 브레송재단뿐만이 아니라 그가 남긴 사진이 걸려 있는 전세계 곳곳에서, 시대의 눈은 꺼지지 않고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생 라자르역 뒷편  (ⓒ 브레송-매그넘)


 

무스타프거리 (ⓒ 브레송-매그넘)


금년 가을엔 더 많은 브레송의 사진이 재단에 걸릴 것이다.

사진/글  한겨레 곽윤섭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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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 재단 입구. 연간 약 5만명이 이곳을 찾는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8년 8월 프랑스 파리 근교 샹틀루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박스 브라우니' 같은 싸구려 카메라뿐만 아니라 뷰카메라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화가였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회화였다. 19살에는 입체파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앙드레 로트의 미술학교에 들어갔고 초현실주의 화풍에 빠져들었다. 그는 나중에 "나에게 로트는 카메라 없는 사진선생이었다"라고 회상하곤 했다. 20대 초반, 아프리카에 체류할 땐 사냥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는데 사냥을 통해 훗날 사진촬영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1931년 여전히 초현실주의를 탐닉하던 그는 한 장의 사진과 마주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헝가리 사진가 문카치의 작품 <탕가니카호수의 세 소년>과의 조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 문카치


"카메라로 그런 것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제기럴!'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로 나간 그때부터 진지하게 사진에 몰입하기 시작했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브레송은 "영원을 순간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진이란 사실을 벼락처럼 깨닫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50mm 렌즈가 달린 라이카 카메라를 구입하고 세계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라이카는 그의 사진 인생과 함께 했다.



전시실엔 브레송이 애용하던 라이카 카메라가 전시되어 있고 관람객들은 라이카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간다.

브레송이 '눈의 확장'이라고 일컫던 라이카는 작은 크기와 신속한 기동력이 장점이었다. 때문에 거리에서 피사체에게 들키지 않은채, 있는 그대로를 프레임에 담아낼 수 있었다. 당시 사진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으며 그림을 떠나 사진을 시작한 브레송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후 펼쳐진 브레송의 인생을 연대기처럼 따라가면 마치 멋진 장면이 계속 이어지는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후에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앙드레 프리드먼을 만나 "어이 친구! 초현실주의 사진가는 그만두고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기자가 되게. 머뭇거리면서 찍지 말고 자신있게 나가라고"라는 충고를 듣는다거나 좌파였던 그가 30년대 후반에 프랑스 공산당의 석간신문 사진기자로 근무한 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에 입대 참전했으나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세번째 탈옥 시도 끝에 겨우 자유의 몸이 된 일, 47년 봄 로버트 카파의 아이디어였던 매그넘 창설에 동참한 일 등은 이제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다.

그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2003년 파리 몽파르나스의 한 건물에 브레송재단이 들어섰다. 그 건물은 1913년 건축가상을 받았던 아름다운 아뜰리에로 "예술가들을 위한 집"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재단은 브레송과 그의 가족들이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것이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익성을 인정받았다.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 불릴 만한 브레송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세계 각국에서 오는 방문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주목적이며 브레송의 유지를 받들어 사진에 관한 강연과 세미나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연간 약 5만명이 이곳을 끊임없이 찾는다.



2007년 연말 재단을 방문하기 위해 파리 메트로 13호선을 타고 가다 괴테역에서 내렸다. 재단은 괴테역에서 멀지 않았고 몽파르나스 묘지에서도 가까운 편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2층과 3층은 사진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브레송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사진가들의 전시회도 해마다 세차례씩 진행한다. 브레송은 생전에 많은 사진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재단은 브레송의 뜻을 이어 그와 같은 방식, 즉 진실과 인간을 존중하는 폭넓은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을 선정해 한층 전체를 전시공간으로 할애하고 있다.

2년에 한번 새로운 사진가를 발굴해 재단이 브레송상(상금 30,000유로, 2007년 수상자는 짐 골드버그)을 시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브레송은 그가 남긴 재단을 통해 여전히 다른 사진가들과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재단에서 홍보-전시를 맡고 있는 폴린 베르마레씨는 설명한다. 2007년 12월까지 미국 사진가 헬렌 레빗의 작품들이 걸렸고 올해 1월 17일부터 사울 라이터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4층에선 브레송과 관련된 비디오와 디브이디가 상영되며 5층은 재단의 자료실 겸 도서관으로 이용된다. 브레송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재단에 따르면 전세계에 흩어진 브레송의 빈티지 프린트를 아직 모으고 있고 동시에 분류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탄생 100주년인 올해 안으로 정리가 일단락되면 훨씬 많은 사진들을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

한겨레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브레송은 살아있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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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지붕 자전거 타고 3만리 / 신상환 지음 / 금토 / 2000년 12월]

 

후배에게 빌려준 이 책을 돌려 받았다. 장가간다고 자취방 짐을 싸다 짐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었던지 오늘에서야 가져다 주었다.

저자가 선배인터라 출간된 책을 읽기도 전에 꾸질꾸질하던 대학시절 자취방에서 이미 그의 무용담(?)을 들어버렸는데, 그가 두번째로 중국에 들어갔을 때 인도에서 영국제 자전거 하나 달랑 사서 네팔과 티베트를 거쳐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 중국에 이르렀으니 무용담이라 할 만 하지 않은가.



그보다 앞선 1993년 여름, 학교건물 짓는 공사판에서 함께 잡부 노릇을 하다 개강과 함께 사라져버린 그는 그해 눈발 날리던 겨울이 되어서야 돌아왔었다. 그리고 은밀하게 티베트에 다녀왔는데, 고산병에 걸려 죽을 뻔 했다는 얘기와 함께, 티베트가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가보고서야 알았다며 역사공부 헛으로 했다며 자괴스럽게 얘기하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라싸, 포탈라궁과 같은 낯선 지명과 용어를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두번째 중국을 들어간 것도 티베트를 들어가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계의 지붕을 자전거를 타고 건너겠다는 무대뽀 같은 결심과 함께.

  

   



책을 건네받자마자 오늘의 티베트가 사반세기 전의 광주(光州)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폭력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상존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피 흘리는 싸움없이 얻을 것은 없다는 역사적 진리도 새삼스럽다.

미지의 순수함과 더불어 하늘 아래 태고의 깨끗함을 가졌던 그들에게, 부디 독립이라는 영광이 눈 앞에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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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3-2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합니다..
티베트의 독립을 기원합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탈당계를 내려 받았다. 8년 가까이 당비를 낸 진성당원으로서 일말의 안타까움이라도 있어야 정상일텐데, 그저 한순간에 써서 바로 팩스로 날리고 전화 한 통으로 끝냈다. 8년 전처럼 나는 다시 무당적이다.

오래된 시절에 경험했던 유사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간 쉽지않은 화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밤, 비대위 혁신안의 핵심사항이 부결되자 '와~'하고 환호하는 대의원들을 보면서 측은함마저 날려버렸다.

개인의 주변 잡기들이 과거로 유사하게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많아진 요즘, 씁쓸함과 반가움이 수도 없이 교차한다. 최선을 다했으니 미련없이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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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2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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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1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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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4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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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줌마 친구들을 만났다. 아주 큰 건으로 축하해야 할 일들이 벌어졌으니 축하연을 벌여 마땅하다 싶었다. 아기 둘을 키우는 아줌마는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당당히 한국 최고의 보안솔루션기업에 정규직 간부로 채용되었고, 아이 하나를 키우는 아줌마는 박사학위 논문이 그 유명하다는 Science紙에 게재되어 친절한 네이버를 비롯한 일간지, 방송매체에 얼굴이 떡~하니 실렸다.

그날 나는 술을 아껴 먹었으나, 역쉬 아줌마들은 들이부워댔다. 이런 상황은 '축하받는다' 보다는 '자축한다'고 표현함이 맞을 것 같았지만, 그저 삼십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룬 아줌마들의 쾌거가 자랑스러워 나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국에서 아줌마로 살아가는 것. 그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순수한 아줌마들이 세상사에 이리저리 치여사는 모습에, 아직도 마음은 이십대 꽃다운 청춘이건만 불과 몇 년만에 변해버린 거울 속 스스로의 모습에, 또 그렇게 억척스러운 자신을 돌이켜 눈물 겹겠지만, 오늘밤은 취한들 어떠한가?

전화 속 남편에게 날리던 한마디.
"내가 신데렐라냐? 유리구두도 없는 내가 12시까지 들어가게!"

처녀시절에 내가 찍어 준 사진을 떼어내던 남편에게 한사코 안된다고 우겼다던 아줌마라지만, 내가 만나고 수다떠는 것은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지금의 아줌마들이다. 그러나 오늘은 옛 사진으로 그 재밋었던 시절은 추억하고 싶다.

한수이북 문화답사 때 : 고인돌 앞에서 설명을 듣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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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9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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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0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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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wa 2008-02-0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운동을 그만둔 후 왜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었는지 오랫동안 힘들어했죠. 지금 내린 결론은 그 곳에 발을 들여놨을뿐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난 그들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고 도와줄 수 있다고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거죠. 그날 밤 아저씨를 보면서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더군요. 질펀한 아줌마들의 세상과는 분리된 고상한 아저씨. 맥주2병으로 새벽2시까지 아줌마들의 수다를 화사한 표정으로 들어주던 아저씨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합니다.아저씨 그날 너무 단아하셨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