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금(金)·원(元)나라에서 발행하여 사용하던 지폐로서  명(明)나라 때에는 보초(寶褻)라 하였다. 금나라는 송(宋)나라 때 사용하던 교자(交子)를 이어받아 12세기에 교초고(交褻庫)나 성고(省庫)에서 교초(交褻)를 발행하였고, 후에는 통용기간을 폐지하였다. 일정한 태환(兌換)준비금을 기초로 하여 많은 액수의 지폐를 발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동자원(銅資源)이 고갈상태에 있던 남송(南宋) 이후 점차 발행량이 증가하였다. 전란기(戰亂期)에는 통화가치가 하락하여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다. 금나라 말기에는 지폐의 가격유지를 위하여 여러 차례 신교초(新交褻)를 발행하여 교초의 전용을 강제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오히려 신용이 확실한 은(銀)을 사용하였다.

  몽골에서도 태종(太宗) 때 교초를 발행하였으며, 특히 원나라 세조(世祖)는 즉위하자 즉시 중통원보초(中統元寶褻) 10종류를 발행하여 초본(褻本)의 금·은을 축적하는 일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연경평준고(燕京平準庫)와 평준행용고(平準行用庫:뒤에 行用庫라고 하였다)를 설치하고 태환(兌換)의 사무를 관장시켰다. 그 결과 지폐가 주화폐(主貨幣)로서 유통되어 남송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에는 발행액이 4배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군사비 등 경비 증대로 발행이 남발되고 태환이 정지됨으로써 지폐가치는 폭락하였다.

  1287년 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褻)를 발행, 일시적 성공을 보았으나 세입부족을 충당하려고 다시 지폐를 증발하여 물가가 등귀하였다. 1302년 다시 지대초(至大褻)를 발행하여 동전 사용의 금지를 해제하였으며, 1311년 금·은의 유통을 인정하게 되었다. 1350년 중통교초(中統交褻)를 발행하였으나 심한 물가등귀로 파국을초래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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