委華
그의 책이라면 무조건 사고 본다. (장편만^^)
중국3세대 작가 어쩌구 하는 것은 다 접고
(우리나라 작가들 연보나 한국문학사도 제대로 모르는구만 --)
원래는 치과의사였는데 병원 근처에 있던 문화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부러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설가가 되었다는 프로필에 무척이나 기가 죽었었다.
프로필이 작가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준 것은 성석제 이후 처음.
성석제는 그 후 재밌었던 프로필만큼 소설은 재미나지 않아
관심이 식었는데 위화의 소설은 여전히 재미난 것을 보니 진짜 작가지 싶다.
대부분의 리뷰에서 그를 그로테스크하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그의 소설(일단 장편만)치고 피범벅 아닌 것이 없다.
피범벅 흙범벅 지리리도 못나고 궁상맞은 주인공들.
보거나 들은 것은 언제나 필름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마련이라 잔인한 것을 못보는 편인데,
그런대도 '피의 거북스럼'으로 점철된 그의 소설은 좋기만 하다.
<허삼관 매혈기>
이 표지가 아닌데... 다시 나왔나부다...
흐린 오후였는데,
깔깔대다 훌쩍이다 인상도 잠시 쓰면서
허삼관 매혈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대학입학후 책읽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탓에
숙제할 때 빼고는 책을 단숨에 읽은 적이 없었는데 허삼관은 오후 내내 소파에 앉았다 엎드렸다하면서 한자리에서 다 읽었다.
새삼 아빠에게 고마웠고,
중국 현대사에 놀랐고,
책 속에 낭자한 피에 한동안 주변이 끈적거렸다.
1년쯤 지나서 아빠에게 이 책을 빌려줬는데,
허삼관을 만난 후에야 아빠는 자신의 독서취향을 찾았다며 기뻐하셨다.
(딸래미가 문창과에 입학한 이후 베스트셀러를 한권씩 사던 아빠는 전경린이나 은희경이니 하던 당시 베스트셀러에 물려 당신 딸도 그런 이야기꾼이 되고싶어 하는겐가 한동안 의아해하셨다. 그래도 아빠는 꾸준히 책을 사셨고 내가 읽는 책을 빌려다 보셨다. 책읽는 지점장이라고나 할까 ㅋㅋ)
아마도 아빠는 삼관의 父情에 깊이 공감했던 듯 하다.
매일 오후 통화할때마다
'삼관이가 오늘도 또 피를 팔았어. 그래도 그 자식 안쓰러지대. 그게 바로 농사꾼 뚝심이고 아버지의 힘이야'
'일락이가 삼관이 아들이 아니래매? 삼관이 그 자식 고민될꺼야? 그래서 일락이랑 삼관이는 어떻게 되니? 아냐아냐.. 말하지마! 그럼 내가 책 읽는게 재미가 없잖아.'
사무실에서 틈틈히 몇주간 허삼관을 읽는동안 아빠는 힘이 나고 신이 난 듯 했다.
<홍어>(김주영)를 읽지 않는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아빠는 '당신이 삼관이를 알아?' 한마디로 물리쳤다^^
<살아간다는 것>
내가 갖고 있는 '살아간다는 것' 표지와는 다른 것 같은데,
이 책 역시 아빠가 갖고 있어서 확인불가!
생리통이 심해 선배의 생일파티에 가지 못했던 날 밤 읽다잠들 요량으로 들었다가 역시나 단숨에 다 읽었다.
삼관이 피를 팔아 연명했다면 복귀의 아들은 선생에게 피를 주다(수혈) 피가 모자라 죽게 된다. 역시나 흥건한 피..
장예모 감독의 '인생'의 원작이라는데,
두 사람 모두 거장이라서 그런지 소설과 영화가 사뭇 맛이 다르다.
원작만한 영화가 참 드문데 <인생>은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풍미를 풍긴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인민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는 재미도 있고
(중국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에 상상에는 한계가 있다)
좋긴 한데, 미스캐스팅이다.
구질구질하고 못난, 그래서 정이가는 위화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공리를 캐스팅하다니...
그래도 머 어쩔수 없지... 장예모-공리 >> 한때는 공식이었는걸!
<가랑비 속의 외침>
'가랑비 속의 외침'이 첫번째 장편이라는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탓에 가장 최근에 읽었다.
(우리나라에는 허삼관부터 소개된 듯..)
확실히 허삼관보다는 피가 덜 나오나
역시나 검붉은 피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
인간의 역사는 곧 피의 역사인가?
후레자식 손광재의 아들인 나는 5살때 팔려갔다가 아마도 열살때쯤? 양아버지 왕립강이 죽으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존재 자체가 어둠이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불이 나 집이 홀라당 다 타버리고 아버지 손광재는 불운의 원인을 그로 지목한다. 허긴.. 손광재는 나에게 '닭이 알을 낳듯 니어미가 너를 쑥 낳아버렸다'며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다. 게다가 그는 보름이나 출타해있던 손광재가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들에서 일을 하던 아내를 불러 미처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남의 집 평상에서 닭에게 발을 쪼여가며 욕정을 해소한 결과로 생겨난다.
주인공이 조근조근 회상하는 옛날얘기를 듣다보면, 기차길 따라 과거로 과거로 돌아가는 박하사탕의 설경구 생각도 나고, 메멘토 감독은 이처럼 간단한 과거회상을 괜히 꼬아서 어렵게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집안에서 철저히 따돌림당하는 존재, 수음의 부끄러운 기억 등등 음습하고 음습하다.
절대 소나기나 태풍은 될 수 없는,
확실히 '가랑비 속의 외침'일 수 밖에 없다.
한 개인의 역사.. 소소하고 눅눅한 역사..
질펀한 피범벅이어도 끝내 위화가 좋은 것은 섣부른 희망을 주지 않아서인가?
어쨌든 위화는 내가 동경하는, 되고 싶은 스타일의 작가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