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 Paj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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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네마 2관, 330석이 조금 안 되는 객석을 채운 건 열명이나 됐을까 말까

아무리 평일 낮이라고는 하지만, <질투는 나의 힘> 때와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 생경했다.

물론 그때도 처음엔 그랬다지만...

개봉 3주차라고는 하지만 집 근처 극장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CGV에선 처음부터 찾을 수 없었다.

<해피플라이트>나 <룸바>, <제노바>처럼 작지만 예쁜 외화를 상영하는 전용관을 갖고 있는

(압구정) CGV에서, 그런 멀티플렉스들이 아예 이 영화를 외면했다는 게 참...

이건 분명 나의 해석과잉 혹은 피해의식 또는 고착된 분노인지도 모르겠지만

<파주>가 고전하는 것이 이 정권과 전혀 상관없지는 않을 거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박찬옥 감독의 영화를 기다려온 사람이 적지 않다고 믿고 있는 나로선..

그러고보면 <질투는 나의 힘>도 상영 마지막날 중앙시네마에서 보긴 했다.

그땐 아직 중앙시네마가 인디영화 위주로 편성하기 전. 그래도 그때도 작지만 큰 영화들을 많이 예뻐라 해주었다.

 

영화는, 시종일관 깔리는 안개만큼이나 답답했다.

안개가 많은 동네는 다 그런가?

그래도 안성에서 그 시절 우리는 더러 신났고 때때로 행복했는데.

물론 머무는 동안은 늪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아님 개발 머시깽이 때문인가?

나에게 파주는 아빠가 한동안 혼자 지내셔야 했던 곳이고,

그때 파주 아빠방에선 MBC보다, KBS보다 북한방송이 훨씬 선명하게 잘 나왔고

여름이면 수해가 자주 생기는 곳이었고

가끔 부모님이 그때 파주에 땅을 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곳일 뿐.

동화경묘공원의 찬 바람과 자동차극장의 잘못된 주파수와 해이리 초가을 햇살의 따뜻한 위로, 그리고 두부가게.

그뿐 아무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본 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그 외 아무 것도 아닐 게다.

다만 동네 이름을 무겁게 기억하게 되겠지. 용산처럼.

 

"난 꼭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진실이야. 모두 다 진실이야."

그렇게 우직하게 진실을 만들어가고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사실과 진실은 꼭 같지 않은 건데 그래서 더 오해하기 쉽고 때론 나쁜 결과가 빚어진다는 게

아팠다. 날카로운 칼에 벤 듯 아픈 줄도 모르게 슥, 어딘가 베어진 후 뒤늦게 느끼는 아픔 같았다.

영화가 끝난 후 뒷좌석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박수를 쳤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천천히 빠져나갔고

엔딩 크레딧을 다 보고, 음악을 다 듣고 일어서자 아저씨가 청소를 하려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먹은 과자 봉지를 주워갖고 나온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독이, 그리고 영화사가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짬을 내어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보러가야겠다.

좀 웃는 영화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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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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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이렇게나 예쁘고 산뜻한 데 말이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정말이지...
원래 소설이나 영화를 보기 전에 컨셉 정도는 알고 시작해도 줄거리는 일부러 모른 채 읽으려고, 보려고 하지만
아마 미리 줄거리를 알았다면 이 소설, 보내달라 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았을 게다.
너무 힘든 이야기니까. 

서유진 그렇다치고,
연두, 유리, 민수 그리고 다른 아이들 그렇다치고,
서유진이 보낸 이메일에 의하면 그들은 잘 지낸다고 하니까,
얼굴에서 웃음이 배어나오기 시작했고, 저녁밥을 먹게 되니 키도 쑥쑥 자라고 있다고 했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에 계속 상처받고 일상이 고달퍼도
그들은 이미 작게나마 이긴 기억 혹은 경험이 있고 함께 있으니까, 홀더(홀로 더불어)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들은 괜찮다치고,

강인호 어쩔꺼나?
'자본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자본에 패배한 것도 모자라'
아내와 딸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고는 아지만 '야만에까지 패배당한' 그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는 어쩌나?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아내는 아마 평생 고마워할 지 모르지.
아님 자기 덕분에 다시 일상에 안착할 수 있었으니 고마워하랄지도 모르지(그런 캐릭터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농담으로라도).
딸 새미는 과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든 자기를 유복하게 키워준 아빠에게 언젠가 고마워하겠지.
하지만 소시민적임을 넘어서 패배당한, 도망친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갈
그의 외로움과 절망 아닌 절망, 그리고 소외감은 어쩔꺼나?
홀로이지도 못하고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한 그에게 서유진이 편지로 전한 그네들의 고마움과 행복 기원이 과연 액면 그대로 가닿을까?
아마도... 그는 또 담배만 태우겠지. 

언젠가 하이닉스 이전 반대때문에 이천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나서서 삭발하고
물대포 쏘거나 말거나 상경투쟁하고 할 때마다
슬그머니 빠져주신, 그리하여 이 가정을 안전하게 지키고 우리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신 아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강인호의 선택이 틀렸다거나 고귀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퉁박을 줄 수는 없지만,
그의 딸과 아내를 안전하게 품기로 한 것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선택이었겠지만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아빠로 기억되겠지만
그렇게 햇살이 화창한 날조차 와이셔츠 무리에서 안개를 떠올리는 그는 어쩌냔 말이다.

 




>

도가니
 

오랜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쁜 놈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들이 수갑을 찬다. 맹수는 다리를 다친 사슴 한마리를 잡을 때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법이다.    p. 149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생각해봐. 선생들 다 있는데, 애들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었겠어. 아무리 말이야. 그리고 교직자잖아. 그냥 좀 집적거린 거겠지. 사춘기 아이들이니까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고 말이야. 에잇! 사람들이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린것들한테......"
누군가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석 형제가 그렇고 그런 못난 남자들 중의 일부일 뿐이라고 얼른 판결을 내리고 싶어했다. 그러면 도시를 뒤흔든 사나운 소동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면서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시 온화해졌고 햇살은 다시 때뜻해진 것만 같아서, 다가오는 아이들의 대학입시와 김장과 물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거리며 할 수 있었다.   pp. 165-166 

서유진은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뺴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서유진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남에게 가하는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잔인했다. 원칙, 도덕, 양심의 소리 같은 것은 이 무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쓰레기통에서 분리수거되어 변칙, 이득, 그렇고 그런 세상의 이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pp. 246-247

사람들이 나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했죠. 안개도 오래 겪다보면 앞이 보입니다. 이 세상은 늘 투명하고 맑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안개는 장벽이겠지만, 원래 세상이 안개 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날들이 횡재인 거죠. 그러고 가만히 보면 안개 안 낀 날이 더 많잖아요?   ...
이렇게 차를 몰아도 법규 위반하는 놈들은 잘 잡아내죠. 지킬 거 다 지켜가면서 지키지 않는 놈들 잡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 어쨌든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너무 이상한 믿음을 가진 거 아니에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유명한 이유는 그게 천지창조 이래 한번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
그렇다면 당신은 무진시민 모두와 싸워야 할 거요.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서로서로를 눈감아주고 있어요. 시의원과 건설업자의 처남이, 운전면허시험장 직원과 병원장 사모님이, 룸쌀롱 마담과 경찰서장이, 밤무대 무명 가수와 외로운 사모님이, 유부녀와 목사가, 교수와 교재 출판업자가, 시교육청과 입시학원 원장이 서로를 봐준다며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해대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번만 눈감아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pp. 253-255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p. 257

가끔 그런 일이 있다. 해일이 바다 밑바닥을 뒤집어놓듯이. 존재 자체를 뒤집어내는 그런 일. 잊은 줄만 알았던 과거가 혼령처럼 불려나와 아무리 술을 마시고 취해 엎어져 있어도,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나온 자리마다 붉은 상처가 선연하고 돌보지 않은 상처들은 이제 악취를 풍기고 있다.  p. 258

알면서도 매번 스스로 속는 것이 인생일까. 언제나 공포는 상상할 때 더 크다는 것을 말이다.   p. 269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끝끝내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할 사람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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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 3주

찬바람이 불면...  

불쑥 더 외롭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또 한 살 나이가 든다는 것. 

사실 나 하나만 생각하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건만, 퇴직 앞둔 부모님을 떠올리면 

어서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손주 쑴풍 낳아 안겨드리는 것이 효도이련만... 

결혼은 커녕 연애도 못하는 딸에, 결혼하고 임신만 하면 필시 '노산' 산모가 될 딸래미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 모르는 바 아니건만 

그러실수록 나는 더 우울해지고 도망가고 싶고... 그럴 땐 그저 웃어야지요. 

    

자수성가해 어려움을 아는, 혹은 가진 자리에서 출발해 '가지지 못함'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더욱 많이 갖고 움켜쥐려고만 하는 정치인들 말고, 이런 정치인들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울 게다.  

로또를 사는 대통령이라니, 당선 돼 놓고 아까워하는 대통령이라니 그 소시민적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 장동건 같은 외모, 뭘 더 바랄까? 여성대통령, 정치에 성별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오는 것만으로도 진일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장진 아니던가.  

장외 웃음 하나 더. 이 영화, 조선일보 쪽 펀드의 투자를 받았다고 한다. 역시 장진은 대단하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다. 모든 짐작할 수 있는 것, 설마 이러겠어 했던 것들 다 나온단다. 혼자 보면 돈 아깝지만 서넛이 몰려가 코멘터리 날리며 보다 보면 원없이 웃을 수 있단다.  

 그냥 영화보다도, 영화를 빙자해 그간 소원했던 지인들과 만담 혹은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목적없이도 즐거운 그런 시간을 갖고 싶은 게지.

 그간 소원했던 것이 마음마저 소원했던 탓은 아니니, 아니 또 그럼 어떠랴. 소득도 없는 수다와 농담, 그리고 웃음이면 그 모든 것 다 풀려버리지 않나?  

이래서 연말엔 수다와 농담이 필요하다. 뿌듯한 한 해를 반추하지는 못할 지언정, 최소한 웃으며 마무리할 수는 있을 테니까.

 

  

위의 두 영화와 나란히 놓기 미안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참 웃겼다. 나와 그녀는 시종일관 키득대며 웃었다. 최근 봤던 스페인 영화(<너의 한마디>, 유럽영화제 개봉작)과는 달리 비주얼도 대사도 훌륭했다. 특히 백미는 마테오로 돌아가기 전의 해리가 디에고의 조수를 자처하며 둘이 판타지 섹시 무비를 구상할 때다. 그런 시나리오가 영화화된다면 나는 꼭!! 볼 테다.  

비주얼! 본 영화에 비하면 저 강렬한 포스터는 새 발의 피의 적혈구 하나만큼도 안 된다.   

특히 영화 속 영화 <여인과 가방들>의 세트와 극중 상황은 최고다. 토마토 하나, 토마토 껍질 위 물방울 한 방울, 도마와 칼 조차 모두 인화 표구해 벽에 걸어두고 싶을만큼 훌륭했다. 만져질 듯 선명했고, 전작보다 훨씬 명료했다. 대사들도 마찬가지. 거장은 역시 한 가지만 잘 하는 게 아니다. 마지막 대사. 거장은 배우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완성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녀에게>와 <브로큰 임브레이스> 사이,  <나쁜 교육>을 꼭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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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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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부르카를 입은 어미들의 방식

 

 

  누구나 해피엔딩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의 해피엔딩은 저마다 다르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엔딩은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리암과 라일라가 도망치려 했을 때, 그들이 무사히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고국을 등지고 난민이 된다고 해서 모진 삶에서 벗어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난민의 설움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 뿌리 내리지 못하고 끝끝내 부평초처럼 떠돌 삶 역시 맵고 쓰기는 마찬가지일텐데 ‘그 후로도’의 이야기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싶었다. 다만 지금껏 말없이 수긍해야 했던 폭력과 불합리한 삶에서 무사하게 벗어나기만을 바랐다. 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 그녀들의 삶이 문체와는 달리 너무도 신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와 뼈를 만들어 준 어미의 사랑을 따순 손길로 느끼지 못한 그녀들이 어미로서 자식들 앞에서 당당하고, 자식들에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주고자 용기를 냈을 때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가 한참을 고른 끝에 마침내 말을 건 한 사내를 선하디 선한 인상으로 그리는 동안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다. 마침내 버스 앞까지 당도한 그네들. 이제 버스에 타기만 하면 된다. 부르릉, 시동이 걸리고 출발하기만 하면 눈으로 읽는 것조차 맘 편하지 않았던 고단한 삶은 끝나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단한 삶은. 책의 두께로 보아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가 한참 더 많으니 아마도 탈출에 실패하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경계하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들이 믿었던 사내는 뼛속까지도 아프가니스탄 남성이었던 건지, 남달리 준법정신이 투철했던 건지 그녀들의 돈만 챙긴 채 마리암 일행을 경찰에 넘긴다. 그때의 배신감이란…. 사내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뭔 이야기가 이래? 책값이 아깝다.’라고 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의정처럼 달콤하고 매끈한 결말이길 바랐다. 본문을 읽기 전 뒷표지의 추천사를 먼저 읽었으니까, 히드로 공항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책장을 넘겼다는 이진숙 기자의 글을 이미 읽었으니까 그런 결말일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나른하리만치 편안한 엔딩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게 외롭게, 아프게, 서럽게 버티며 살아 온 마리암과 라일라에 대한 예의일 것만 같았다.

  늘 그렇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그녀들은 결국 돌아와 라시드에게 또 다시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여인도 아내도 아닌 삶을 살아갔다. 때로 하녀처럼 때로 창녀처럼, 하루에 절반쯤은 마음에 없는 일을 하며 보냈을 그녀들은 말로에 달콤한 보상은 없었다. 남편을 죽인 마리암은 살인자의 이름으로 사형을 당해야 했고, 라일라는 이제 막 하라미(사생아)에서 벗어난 딸과 낯선 사내의 품에서 하라미로 자라야 할 아들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보상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유쾌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한 독자의 성급한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월하향’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졌지만 결코 향기로웠다 할 수 없는 마리암의 삶은 감옥에 들어간 후 그 진가를 발휘한다. 살인자, 더욱이 남편을 죽였으니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푸대자루같은 부르카를 뒤집어쓰는 등 온갖 부당감을 감수하는 것이 합법적인 아프가니스탄 여인으로서는 대역죄를 지은 셈이다. 게다가 아들처럼, 손자처럼 아꼈던 잘마이의 아비를 빼앗은 셈이니 이쯤이면 패륜도 정말 악질의 패륜을 저지른 것 아니던가. 살려두어도 잘마이에게 아비를 빼앗았다는 것만으로 평생 스스로를 벌하며 살 마리암이지만 국가는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제대로 법을 적용한다. 곧 사형에 처해 질 마리암은 여성 죄수들만 모인 감옥에서는 영웅이었다. 음식조차 제공되지 않는 감옥, 스스로 면회를 사절한 마리암은 굶는 것이 마땅했지만 수많은 죄수들은 앞 다투어 그녀에게 음식을 바쳤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녀를 따르고, 자진해서 그녀에게 음식을 주었다.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기꺼이 헌납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감옥 안을 천지(天地)로 알고 웃음을 뿌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감옥 안에서 낳고 기르며 생을 이어가야 하는 한 많은 여인들에게 감히 남편의 부당한 폭력에 맞선 마리암은 영웅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후처를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아껴준 것도 부족해 후처와 그녀의 아이들을 도망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누구도 반기지 않았던 하라미로 태어나 하찮은 목숨을 부지하다 자녀에게는 평생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가 될 어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난 마리암은 어머니의 지위에 걸맞는 모습으로 죽는다.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향을 카불에 남기고 떠난 셈이다. 원한 것도 아니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합법이 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마리암이라는 이름은 기실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들에게 귀분(貴芬)이나 지덕(智德)이니 하는 이름이 삶과 아주 멀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리암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짙은 향기를 내뿜는 꽃이었다. 아버지 잘릴로부터, 라일라로부터 떠나는 순간부터. 단 한사람, 어머니 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마리암으로부터 버림받았다며 목을 멘 나나의 절망은 마리암을 거쳐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통해 생의 보람으로 환생한다. 유일한 핏줄이자 가족인 딸에게 “등신 같은 하라미 년아.”라며 모욕을 주기 일쑤였던 나나는 사실 모진 어미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늘 이용당했고, 버려졌다며 한을 품고 살던 나나에게 삶에 한껏 희망을 품고 있는 딸 마리암은 존재 자체로 버겁고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 희망이 유일한 생의 이유인 마리암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외로움으로 나부끼는 딸의 마음을 한 번도 다독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 모욕과 회한과 미안함으로 남은 나나의 절망은 마리암을 거쳐 라일라에게 전해지며 다시금 희망으로 바뀐다. 라일라가 마리암을 보호하기 위해 라시드의 매질을 마리암 대신 몸으로 받은 후부터, 어색한 대화의 물꼬가 오후의 즐거운 티타임으로 이어지면서부터 ‘함께’ 한다는 것이 피를 타고 흐른 ‘절망’을 몰아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충분한 사랑을 받았던 라일라의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아비로부터,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타리크로부터 한껏 사랑받으며 자란 라일라의 진심이 잠재됐던 마리암의 속내를 건드린 것이다. 자신이 아비에게 버림받은 하라미라는 것을 확인하게 만들었던 어린 날의 들뜬 희망이 아니라 사랑받고, 사랑하고, 가족의 이름으로 서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진실된 희망을 부추긴 것이다.

  물론 충분히 사랑받았던 라일라의 경험을 되살린 것은 마리암이었다. 폭격이 끊이지 않는 도시 카불을 떠나 드디어 연인 타리크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이 사지가 찢기고 부모네마저 잃은 절망으로 바뀐 순간, 그 순간에도 생의 끈을 놓치지 않은 미약한 생명을 위해 거짓으로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던 서글픔, 그렇게 한 여자를 아내의 자리에서 하녀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했던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라일라는 마리암의 투박한 보호에서 믿음을 보았고, 그 믿음이 희망을 잉태한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희망은 마지자와 잘마이와 함께 자라고, 성장하며 완전한 가족을 지향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일 뿐, 자신(마리암)이 혹은 자신의 아이(마지자)가 하라미라는 것은 사실상 이 어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남들의 시선은 다만 시선일 뿐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부르카로 온 몸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녀들의 시선도 제한되기는 하지만.

  어떤 어미는 절망으로 아이를 버리지만(마리암의 어미 나나, 라일라의 어미 파리바, 라일라조차 한때) 어떤 어미는 절망 속에서 자랄 아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다. 자신을 외면했던 어미의 절망 깊은 곳에는 사랑이 전제됐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미들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그리했던 것뿐. 그래서 그녀들은 모성마저 꺾어버렸던 모진 삶, 그조차 넘어서 다시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꾸린 가정은 어미들의 사랑은 차고 넘치지만 아비가 없는 가족이었다. 잘마이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마지자에게도 아마 크게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마리암과 라일라는 ‘아이들에게 온화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날 마리암이 목요일마다 기다렸던 잘릴처럼, 어린 날 라일라의 교육에 유난히 신경을 쓰던 바비처럼. 마리암의 희생을 딛고 라일라는 온전한, 완전한 가정 꾸리기를 시도한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잘마이가 타리크를 아빠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그 누구도 하라미가 아닌 완전한 가정을 갖게 된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각자를 반쪽짜리에 비유한다. 반쪽뿐인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하게 해 줄 반쪽을 찾는 과정에 사랑을 빗대곤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전한 반쪽은 나와 아귀가 딱 맞아야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움푹 패인 곳은 뾰족하게 튀어나와야 하고 내가 튀어나온 곳은 패여야 한다. 그런 반쪽들이 하나가 되려면 어지간히도 아플 것이다. 서로 다른 상대의 모습을 받아들인 채 아귀가 맞도록 끼워 맞춰야 하니 말이다. 받아들이는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알면서도 아프게 했던 마리암과 라일라 사이도, 잘마이와 타리크 사이도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며 그들은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완전한 사랑 혹은 완전한 가족이라는 데 핏줄은 의미 없었다. 우리네나 그네들이나 핏줄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진데, 그 기준으로 보자면 그네들이 꾸린 가정은 콩가루 집안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의 후처를 딸이라 부르는 마리암, 혐오하는 남편의 씨앗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까봐 낙태할 맘을 품었던 어미 라일라, 라일라가 몰래 품고 온 다른 사내의 아이인 마지자, 라일라가 한때 낳고 싶지 않아했던 아이인 잘마이, 아내들에게는 노동이든 성이든 착취만 해대는 남편 라시드. 혹은, 라일라과 타리크의 핏줄이지만 라시드의 딸로 자란 아지자, 라시드를 쏙 빼닮고 유난히 그를 따랐던 아들 잘마이, 그리고 라일라를 엄마라고 부르는 수많은 고아원 아이들. 라일라와 타리크의 온전한 핏줄은 이제 막 라일라의 뱃속에서 태동을 하는 작은 핏덩이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마리암과 라일라가, 라일라와 타리크가 이룬 가정은 어느 가정보다 완전하고 견고하며 크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아마도 마음으로 낳았을 아이들(고아)을 보살피는 ‘엄마’ 라일라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수많은 아이들, 그런 라일라의 엄마로 남은 마리암, 아이들이 머물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대는 아빠 타리크. 카불이 빛나는 도시라면 그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져 새롭지만 완전한 형태의 가족이 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그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전쟁과 빗발치던 폭격으로 찬란했던 유물은 파괴되고, 폭력과 앙금으로 뒤덮인 채 폐허가 된 도시 카불에서 완전한 가족이 뿌린 희망의 씨앗은 매일매일 천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떠오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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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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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없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 그것 때문이었다.
오래도록 내가 쓰고 싶었고,
오래도록 내 목을 메이게 했으나 구성할 수 없었던 이야기. 혹은 구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
내게 김훈의 장편은 낯선 것이지만, 뜻밖의 '작가의 말'인 그의 자기혐오나 좌절은 너무도 절실히 이해된다.
주제 넘게도 감히 나는 그렇다고 느낀다. 

나는 홍보 담당자였고, 그는 기자였다.
그때의 기억과 상처가 나를 사실과 진실, 또는 정보와 뉴스에 대해 고민하게 했듯 그도 그러했을 게다.
나는 종종 사실을 가공해 보도자료로 만들어 그것만이 진실인 양 매체를 설득해야 했고,
기자인 그는 떄로 그렇게 가공된 보도자료로 기사를 썼을 테다.
그리고 그가 쓴 기사의 최종고를 손 보는 건 그가 아니었을 게다.
내가 쓴 보도자료도, 그가 쓴 기사도 
사실이라는 미명 하에 마음과 다른 이야기가 활자화됐을 테고
그걸 접하는 이들은 그 이면에 숨은 무수한 이야기들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 활자화된 이야기는 나같은 아이나 그같은 이들의 고민이나 망설임 혹은 먹먹한데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감정 따위는 담지 않은 단호한 사실이 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됐을테니까. 
그러니 나는 감히 그를 이해한다 말한다. 
그리고 소설의 감동이나 공감과는 별개로 사실과 진실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묶은 그가 부럽다.  
내가 홍보를 한 것은 고작 4년, 더하기 드문드문한 시간이지만 그의 기자생활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나의 영역은 고작 의료와 공연 혹은 문화 였지만 그의 문화부와 사회부를 두루 거쳤다 했다.
그러니 그의 좌절은 나의 것보다 깊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상처는 나의 것보다 훨씬 크고 너덜거릴 것이다. 

그가 기자 출신이 아니라면,
이 소설이 사실과 진실 이야기라는 출판사 평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저자 후기를 '때때로 문인 혹은 문청에게 나타나는 염세적 허울 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염세와 허울, 이라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단어와
병이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주는 부조화가 웃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작명만큼 적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늘 저 병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나는 그의 자기혐오를 너무 절절이 이해한다.
우습지만, '고작 내깟게 어떻게...' 라고 나를 내려다보며 뇌까리다가도 그냥 한순간 확 이해되고 만다.
아마도, 나는 소설의 내용보다 작가의 말에 더 깊이 공감했는지 모른다.
가끔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그 공감의 폭과 정서는 여느 때와 다르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런 감정이나 마음은 보도자료에 담을 수 있는 확연한 사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이니까. 

이 초조한 와중에 놓지 않고 읽었건만...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다.
내가 종종 되새기는 '공무도하가'의 그 슬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의 공무도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간 너머로>라는 책처럼,
노목희가 그린 낙타 그림처럼
돌이킬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건너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의지와 상관없이, 계획과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어느새 그렇게 흘러와 버린 이들.
그렇다고 그들이 게으르거나 인생을 방치한 것도 아닌데
흘러와 보니 그렇게 넘어와 버린 이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은 나의 공무도하... 인지도 모른다. 슬프다.  

 

><공무도하> 김훈, 문학동네, 2009. 9  


그의 문체는 순했고, 정서의 골격을 이루는 사실의 바탕이 튼튼했고 먼 곳을 바라보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자의 시야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다. 그의 사유는 의문을 과장해서 극한으로 밀고 나가지 않았고 서둘러 의문에 답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의 정당성 여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칠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 가깝고 작은 것들 속에서 멀고 큰 것을 읽어내는 자의 투시력이 있었다.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아무것도 결론지으려 하지 않으면서 긍정이나 부정,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가 보여주는 모든 폐허 속의 빛은 언제나 현재의 빛이었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그 초로의 여행자는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였고 내부자인 동시에 외부자였으며, 인간이 겪은 시간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이었다.    26-27

노목희는 때때로 장철수의 옷소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 안쓰러움은 투항이나 탈출 혹은 생포되기를 예비하는 자의 조바심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것을 노목희는 장철수가 검거된 후에 알았다.   36

토요일 야외수업 때 노목희는 아이들을, 이제는 무너져버린 저수지 뚝방으로 데리고 나갔다. 저무는 해가 능선을 스치면서 내려앉는 저녁 무렵에, 수면에서 명멸하는 빛과 색들의 변화를 노목희는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기우는 해에 끌리는 쪽으로 빛들은 떼지어 소멸했고 소멸의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서 신생과 소멸을 잇대어가며 그것들은 어두워졌다. 물 위로 뛰어오른 작은 물고기들이 다시 물에 잠기는 그 짧은 동안에, 물고기 비늘과 눈알에서 밝은 색으로 태어났다. 시간이 빛과 색을 가장자리 산그늘 쪽으로 끌어당겼고, 빛이 저무는 시간과 합쳐지면서 푸른 저녁이 수면 위로 퍼졌고, 색들이 그 위에 실려서 흘렀다. 산그늘에 덮여서 빛이 물러서는 가장자리 수면에서 색들은 잠들었고, 바람은 수면을 스칠 때 물의 주름 사이에서 튕기는 빛이 잠든 색들을 흔들어 깨웠다. 우두운 수면에서 빛들은 무슨 색으로 잠드는 것인지 바람에 흔들려 다시 꺠어나는 색은 잠들기 전의 색이 아니었다. 부서져서 흩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그것들을 빛 또는 색이라고 노목희는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다시 부서지거나 새로 태어나서 말 너머에서 명멸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짧고, 정처없었다.    

미대 서양화과에서 노목희의 실기점수는 늘 B학점을 넘지 못했다. 붓으로 기름물감을 찍어서 캔버스에 바를 때, 붓 끝에서 손목으로 와 닿는 물감의 유성이 노목희는 낯설었다. 붓이 물감을 밀고 나갈 때, 몸과 물감 사이의 저항은 뻑뻑한 이물감으로 팔에 감겼다. 그 저항을 뚫고 나가면 한바탕 색의 세상을 펼쳐낼 수 있을 터인데, 다가오려는 것들 앞에서 노목희는 자주 망설이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목희의 화폭은 주저의 흔적으로 남루했다. 실패한 화가인, 늙은 지도교수는 말했다.
......넌 왜 덤벼들지를 못하니? 뭘 그렇게 쭈빗거려. 힘을 줘서 밀어내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노목희의 화폭은 주저의 흔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도청소재지에서 열리는 서양화 공모전에서 노목희는 낙선했다. 이 세상의 색들은 빨강, 파랑, 노랑으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빨강에서 파랑으로 파랑에서 노랑으로 검정에서 흰색으로 흰색에서 검정으로, 끝없이 전개되는 흐름의 진행태였고 거기에는 지나간 시간의 훈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팔레트를 열고 나이프로 색을 으깨서 섞을 때 노목희는 그 흐름에 실려서 흔들렸다. 나이프 끝에서 색들은 피어나서 들끓었다. 저무는 해가 능선 아래로 깊이 기울어서 수면에 아무런 색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노목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저수지 뚝방을 내려왔다. 거기가 창야였다.    41-43

조사단장의 브피핑이 끝나고 질의답변 자리가 마련되었다. <파이스턴 데일리 리뷰>지의 여기자가 물었다.
- 환경변이가 폭격훈련과 무고나하다는 결론인가?
조사단의 관계분석팀장이 답변했다.
- 여러 가지 변이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인과관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다.
한국매일신문의 문정수 기자가 물었다.
- 증명되지 않으면 부재하는 것인가?
분석팀장이 답변했다.
- 부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부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도 또한 아니다. 존재와 증명 사이에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다는 전제도 증명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증명되지 않는 것들의 실체를 긍정할 수 없는 것이 과학의 고충이다. 이해를 바란다.
기자석 뒷자리에서 <아시안 위클리> 기자가 발언권도 없이 말했다.
- 말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럼 조사는 왜 했나?
조사단장이 답변했다.
- 쉬운 말은 아니다. 오늘 회견은 여기까지다.    53-54

그에게서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의 체취와 비슷한, 몸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냄새가 풍겼다. 시간이 사람의 몸속에서 절여지면 이런 냄새가 날 것이라고 노목희는 생각했다. 그의 체격과 골상은 동양인이었지만 그는 어느 대륙이나 어느 나라 사람 같지는 않았고, 그의 나라는 몸에 깊이 절여진 그의 체취 속으로 펼쳐쳐 있는 것처럼 노목희는 느꼈다.    91

국물을 마셔, 튀김이 좀 딱딱해, 만든 지 오래된 것 같아, 라는 노목희의 말의 그 사소함과 명료함이 문정수는 문득 슬픔으로 느껴졌다. 슬픔은 난데없고 가늘고 날카로웠다. ...124-125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느 ㄴ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받가을 문정수는 때때로 노목희에게 말해주었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에, 혹은 자정이 지나서 날짜가 바뀐 새벽에, 그 이야기는 지체없이 전해야 할 전보처럼 다급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전하는 먼지와 불길과 냄새는 노목희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듯 싶었다.   125-126 

- 그게 더 아쌀해. 아는 놈이 한 놈도 없는 동네가 좋아. 그런 데서 살면 손바닥 악력이 금세 는다. 넌 그런 데로 가야 해.   

최형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철수는 손바닥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아무것도 거기까지 따라오지 않기를 장철수는 바랐다.     167

젓가락으로 김치를 마주 잡고 찢어 먹는 하찮음이 쌓여서 생활을 이루느 ㄴ것인가. 그 하찮음의 바탕 위에서만 생활은 영위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소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의의 들판으로 생활은 전개되는 것인가. 그 사소함이 견딜 수 벗이 안쓰럽고 그 적의가 두려워서 나는 생활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렇게 쭈빗거리고 있는 것일까......    218

문정수의 말은 듣는 사람이 없어도 무방할 듯 싶었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버린 세상에 관하여 문정수가 더듬거리며 말할 때 노목희는 가끔씩, 그랬겠구나...... 잘했어...... 내버려둬...... 괜찮아...... 괜찮을 거야..... 라고 응답해주었다. 노목희의 응답은 추인이거나 달램처럼 들렸다.
저 남자는 어째서 저런 하나 마나 한 말을 저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저런 말을 하려고, 이 밤중에 나를 찾아오는 것인가? 괜찮아..... 내버려둬..... 이런 대답이 필요해서 이밤중에 저렇게 힘들게 더듬거리고 있는 것인가.
노목희는 무릎을 두 팔로 싸안고 앉아서 문정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목희가 하푸을 하면서, 안 졸려? 라고 물어도 문정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문정수의 말은 듣는 사람이 없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듣고서 잘했어, 내버려둬...... 라고 응답해주지 않으면 울음으로 변해버릴 말처럼 들렸다. 문정수의 어조는 무력했으나, 그 무력감 속에 폭발 직전의 위태로움이 숨어 있었다.    218-219

- 불쌍하구나, 다들. 하지만 너하고 관련 없는 사람들 아냐?
-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해. 막막하고.
- 내버려둬. 그냥 내버려두는 게 가장 옳을 거야.
- 내버려두지 않을 수도 없어. 차장은 막 욕을 하더군.
- 누굴 욕해? 방천석을?
- 몰라. 그게 그 사람 버릇이야. 대상이 누군지도 모를 욕을 늘 해대지.
- 욕이 아닐 거야. 신음이겠지.    220-221

횟집마을로 넘어오는 비포장 오르막에서 장철수의 손수레는 뒤로 밀렸다. 장철수의 두 다리가 힘을 잃고 뒤로 끌렸다. 장철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두 다리가 힘을 잃는 순간, 장철수는 땅의 중력에서 풀려나 주저앉거나 바람에 불려갈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무력감은 가벼움이었다. 두 다리가 힘을 잃는 순간, 끌고 온 무게가 소멸했고, 뒤로 끌리는 몸이 소멸하는 무게 속으로 빨려들었다. 아마도 죽음의 질감이 이러할 것이라고 장철수는 생각했다.   239

 해망은 그들의 고향이며 객지였다. 공유수면이 매립되기 전, 펄에서 조개 잡고 어선들이 마을 앞 선착장까지 들어오던 시절은 몸은 고단했어도 마을은 화목하고 마음은 편했고 생활도 지금보다 넉넉했다고 그들은 사회조사원들이나 방송 기자들에게 말했다.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삶이 건강했고 평화롭고 충만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말의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더 큰 거짓이 작은 거짓을 눌렀다. 그들의 말 속에서 방조제 이전의 삶은 늘 평화롭고 충만했다. 그래서 매립으로 잃어버린 그 평화와 충만을 보상액수에 모두 포함시켜서, 그들은 펄에 코를 박고 살아온 해망의 갯가를 떠나려 하고 있었는데, 액수가 커질수록 소송은 지연되었고, 소송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이제 두어 마리 남은 철새처럼 해망의 갯가에서 서성거렸다. 횟집 주인들은 그 엉거주춤을 스스로 '보상병'이라고 불렀다. 보상병이 깊어지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하고 들떠서, 낮에는 뭍으로 밤에는 펄로 헤맨다고 그르은 술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횟집 주인들이 바다사자 주위에 모여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다사자는 뒤채고 부딪치고 뛰어올랐다.   241

- 고마워. 내가 다 갚을게. 잘 풀리고 있잖냐.
문정수가 너 신장 얼마 줬니? 라고 말하려던 순간, 박올출이 먼저 말했다.
- 야, 장기매매 같은 건 기사 쓰지 마. 내가 다 갚을게. 넌 쓴 기사보다 안 쓴 기사가 더 좋다. 그게 더 진실돼. 안 그래?
문정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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