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 6
신영철 지음, 이겸 사진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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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재단에서 일하면서도 나는 존 뮤어를 몰랐다. 환경 혹은 환경단체, 환경운동 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의 시간이 없었다. 핑계를 대자면, 그랬다. 면접과 동시에 인수인계, 출근과 동시에 실무를... 해가 질 무렵이면 열이 나던 시절. 그 시간 보낸 후, 정말 우연이었다. 다른 일을 더 할 생각은 없었다. 후배를 위한 통화였고, 그냥 재밌는 인터뷰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섰는데, 늦었다. 오랫만의 인터뷰, 처음 인사할 때부터 내공이 만만찮아 보여 솔직히 약간 긴장도 했더랬다. 그런데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공통점을 만나 풀려나갔다. 내게 환경영화제를 택하게 한 그 영화 <빛의 사진가, 안셀 아담스>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시에라클럽을 만든 사람, 그가 존 뮤어고 그가 찾아낸 길이 존 뮤어 트레일이었다. 존 뮤어 트레일은 수없이 많은 곳을 여행한 그가 최고의 숲으로 꼽는 곳이다.  

일순 빛이 튀던 순간도 있었다. 날카로웠던 순간도 있었고, 우문에 내가 괴로웠던 찰나도 있었다. 짧지만 내게 많은 것을 던진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그는 나즈막히 "큰 서점의 가셔서 시간이 나시거든 <걷는 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이란 책을 찾아서 캡션과 찍은 이의 글으 한 번 읽어봐 주세요." 그리고 사진을 배우러 오라고 했다. 나에게 대뜸 지인들과 계획 중이라는 일을 제안했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이 지척이건만 그냥 클릭해버렸다. 그리고 원고를 쓰기 전에 다 읽어야 한다는 핑계로(책이 아니더라도 원고꺼리는 넘쳤다. 인터뷰에서 들은 주옥같은 얘기들 중 활자화된 건 정말 한 조각뿐) 하루종일 읽었다. 그리곤 티켓을 끊어놓은 것 뿐, 아무런 준비도 않던 제주 여행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 지 알게 됐다. 뭘 하고 와야 하는 지 어렴풋이. 

그가 말한 등산가와 알피니스트의 차이(등산가는 산을 '정복'하지만 알피니스트는 산과 '함께' 걷는다. 그래서 평화롭고 풍요롭단다). 빛, 마음의 본질. 그런 것에 왜 그리도 힘을 주어 말했는지. 그 짧은 시간동안 왜 그리 나를 이해시키려 하고 나는 어떻게 그걸 이해했던 것인지. 인터뷰때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손등의 상처는 어떤 의미인지. 책이 다 말해주었다. 아니, 사진이. 캡션이. 그 인터뷰는 그를 위한 것도, <체어맨>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나를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 살짝 예비하셨는지도. 
 책장을 덮을 즈음엔, 나도 정말 존 뮤어 트레일을 완주한 것만 같았다. 한껏 산림욕을 한 듯, 충전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런 여유와 넉넉함을 내게 주었다. 감히 존 뮤어 트레일을 완자하고 싶다는 꿈은 안 품는데, 그 길의 고단함과 넉넉함은 책만으로도 참 좋다. 그러니 실제는 얼마나 더 좋을까?
역시나 티켓을 끊어놓은 것 외에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있는 7주간의 유럽 나들이. 아마 이 책이 다시 내게 힘이 될 꺼다.
존 뮤어는 '산을 오르는 것은 마음의 본질을 오르는 것'이라고 했단다. 그게 본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주의 어느 오름을 오를 때 난 비워지긴 했었다. 숨이 찼고, 사람이 반가웠고, 말이 신기했고, 말들 사이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외에는 일상의 잡생각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본질. 유럽의 오래되고 눅눅한 도시의 돌길도, 그리고 떼제도, 아마 그런 걸 내게 줄 거다. 

2010. 6

> 마음의 본질로 향하다
CHAIRMAN 2008 07+08/ THEME_숲

마음의 본질로 향하다
여행작가 이겸

[전문] 처음 그에게 궁금했던 것은 카메라 앞에 선 기분이었다. 거대한 자연을, 수많은 사람을 피사체로 만났을 그가 정작 누군가의 피사체가 되어서는 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모든 궁극은 통하는 것일까? 사진을, 걷기 여행을 업으로 하는 그가 펼쳐놓은 것은 뜻밖에도 존재에 관한 사유였다. 

수없이 많은 곳을 여행한 그에게 최고의 숲은 존 뮤어 트레일(이하 ‘JMT’)이다. 세계적인 환경단체인 시에라 클럽의 창시자인 존 뮤어는 ‘산을 오르는 것은 마음의 본질을 오르는 것’이라 말했다. 이겸에겐 카메라가 그렇다. 사진을 찍다 보면 사물의 본질을 보게 된단다.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은 아이였어요. 사진작가니까 잘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왜 찍어야 할까 궁금했죠. 그런데 눈에 보이는 표현이 전부라면 너무 허무하잖아요. 내가 찍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지는 거죠.”
본질을 보려면 빛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작업에는 공통되는 원리가 있는 법. 이야기가 재미 있으려면 구성이 좋아야 하고, 노래를 잘 하려면 발성이 좋아야 한다.
“상황과 배경에 따라 사진을 찍는 방법이 수백, 수천 가지라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통 원리가 바로 빛이에요. 거리도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40-50%가 불필요한 것인데, 남을 의식하지 말고, 피사체와의 거리를 좁혀보세요. 사진이 심플하고 아름다워지죠.”
다양한 피사체, 수많은 여행지를 두고 그는 왜 하필 숲으로 갔을까? 자연산 숭어를 낚아 먹고, 모기장 텐트에서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잠들고, 사막을 걷느라 열이 오른 몸은 호수에 풍덩 뛰어 들어 식히는 여정. 그저 이야기로 듣고 사진으로 보기엔 꿈결만 같다. 하긴 도시 거주민에겐 모든 여행은 꿈이고, 숲은 로망이다. 하지만 장장 358km(서울에서 대구 거리), 해발 3,000-4,000m를 넘나드는 JMT를 걷고 또 걷는 것은 현실이었다. 자야 했고, 먹어야 했고, 아프지 말아야 했고, 곰도 사슴도 다람쥐도 조심해야 했다. 그러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이고 지고 가야 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낯을 가리지 말고 볼 일도 잘 봐야 한다.
“숲에는 사람이 줄 수 없는 치유력이 있어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는 게 있고요. 작은 모래조차 거대한 바위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시나브로 존재가 없어지면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나무는 반대죠. 작은 떡잎에서 시작해 점차 존재를 쌓아가다가 가장 견고할 때 부러지면 결국 모래처럼 미약한 존재가 되어버려요. 거대한 존재의 집합인 숲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어리광일 뿐이에요.”
그렇게 숲을 걷다 보면 도시에선 들을 수 없는 소리도 들리고, 혼자 걸어도 외로운 게 아니라 풍요롭다고 느끼기도 한단다. 그래서 그는 차츰차츰 걸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완주하라고.
그를 만나고 온 날, 제주올레를 준비하며 쌓던 배낭의 짐을 계속 덜어냈다. 노트북도, 책도, 화장품도, 옷도 모두 덜어냈다. 한적한 숲길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낭만을 꿈꿨으나, 그저 숲과 바다와 함께 거닐다 오면 될 뿐일테니.






찍은 이가 사진에 덧붙인 글들
  걷는 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앞으로 걸어가느냐, 뒤로 돌아가느냐. 길 위에 선 자에게 쉼표는 있으나 마침표는 없다. 15
 나는 자연인가?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달팽이처럼 걷는 것이 첫 시작. 26
 홀로 가는 길이 풍요로운 것은 숲과 함께 걷기 때문이다. 36
 물은 산을 깎아 바위를 만들고, 그 산은 모래가 된다. 네바다 폭포의 야망은 쉼이 없다. 38
 홁이 되어가는 나무의 냄새가 참으로 평온하다. 58
 나무는 쓰러져 여행자의 길잡이가 되고, 숲의 거름이 되어간다. 67
 산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주어지는 생경한 풍경은 매우 달콤했다. 유혹에 순응하며 기꺼이 탐한다. 99
 길을 낼 때는 자연 스스로 복원 가능한 최소한의 상처만 남긴다. 이것이 빌려 쓰는 자의 예의. 101
 섀도 레이크의 빛과 향이 짙은 것은 나무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마지막 여정이 호수에서 시작되고 있다. 119
 살아있는 향기는 빛이 나고 언제나 생생하며 매순간 변한다. 다른 삶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향기로우며,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릅답고 풍요로운 향기로 남는다. 숲의 향기는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의 하모니로 하나가 된다. 성숙하고자 하는 죽음은 향기롭다. 121
 자연의 질서에는 관용이 없으며, 여타의 감정 개입도 없다. 하여 너무도 풍요롭고 때론 잔인하기까지 하다. 144
  걷기 여행의 매력은 무엇보다 소리를 만나는 것에 있다. 더욱이 이렇게 찬란하게 부서지는 소리는 한없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158
 꺽이고 부러진 채 만신창이가 된 모습도 숲의 얼굴.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몫도 그의 것이다.  188
 여행을 하다보면 영혼의 무게를 알게 된다. 맑고 가벼운 이를 만나는 반가움을 무엇에 비하랴! 바로 지금! 213
 지름길의 유혹에 빠지면 무릎과 허리를 비롯한 모든 관절이 통증을 호소할 것이다. 225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앞 날을 두려워 마라. 너는 충분히 풍요로움을 누릴 것이며, 네 부모처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아가야! 언제나 충실히 지금을 살아라! 삶이란 단 한 번으로 족하단다. 241
 길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든 제자리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45
 나도 태양도 하루씩 더 살았다. 그리고 그만큼 성숙한 모습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참으로 고운 빛이 내려온다. 259
  갈증이 침조차 태워버릴 무렵 샘물을 만난다. 보석보다도 귀한 물이 반짝인다. 260
 여행할 땐 감당할 수 없는 짐은 미련없이 버려야 한다. 263
 마지막까지 움켜쥔다면 얼마나 추한 것인가? 264 
 호수가 멈추자 시간도 멈춰 서고, 공간의 경계도 사라진다. 때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어느 것 하나 먼저 이동할 때 실체는 드러난다. 268
동행이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큰 행운이며,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현명한 이이다. 273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길을 걷는 동안 자신을 향한 격려와 용서를 구하는 기회를 만든다면 더없는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292
 종착지가 가까워 올 때 아쉬움이 크다면 그 여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그 날이 유일한 하루이다. 이미 사라진 별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것처럼 사라진 후에도 향기는 빛난다. 내일 만날 휘트니를 바라보며. 315
 커다란 돌덩어리 위에 집 한 채, 사방에 엎드린 낮은 산들, 그리고 오래 머물 수 없느 치열한 환경, 정상의 모습이다. 하여 정상을 끝끝내 유지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319



찍은 이의 에필로그

p.332-335
  또 다른 길을 꿈꾸는 자의 질문 

소중한 여행으 ㄹ함께 한 일원으로서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그것에 대한 짧은 글을 쓰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는 순간 이처럼 잠깐의 공간이 주어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걷는 동안 지니고 다니며 발전시키고자 했던 질문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떠세요?

동행
어느 순간이 되자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걷고 있더군요. 가끔씩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요. 저마다 은색 실을 이용해서 제 배낭을 들어 올려주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땐 가볍게 산을 넘을 수 있었지요. 함께 걷는 이들은 현재 살아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동행이란 물리적인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이와 동행하고 계신가요?

관계
상대방과의 관계는 어떤 상태와 조건이 되어야 끝이 날까요? 누구든 어떻게 하면 끝나는 것일까요? 필요에 의해서 또는 육체나 정신의 변화에 의해서 그리고 시간과 죽음에 의해서 관계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서로의 죽음에 관해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그때의 관계는 호기심으로 남겠군요. 관계는 일방의 의사나 행위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과 증오, 외면과 시샘의 관계 또는사랑과 연민, 존경과 배려의 관계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표현
웃음이 터져 나올 때처럼 그렇게 화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는 이 땅의 교육과 풍토는 개인과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웃음을 참는 것보다 화를 참는 것이 더욱 해롭습니다. 화를 내는 올바른 방법과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화는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언어를 잘 전달해야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화를 통해서도 소통할 수 있겠지요. 화를 내며 단절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낮은 단계의 언어입니다. 수위와 속도를 정하고 화를 낸다면 자신의 현재 상태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면, 이미 화를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다양하게 현재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몇 가지 감정과 몇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싶으신지요?

상실
무엇을 잃게 되면 당황하게 됩니다. 때론 그조차도 감지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게 되지요. 준비되지 않았거나, 예견되지 않은 경우 더욱 깊은 상처와 상실감이 남습니다. 영영 치유되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이때 애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기회와 기간을 가져야 합니다. 슬품에 바진 나머지 당사자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주위의 깊은 관심과 애정이 담긴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애도의 기회와 기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면 상실감은 언제든 마음의 병을 키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곤 몸의 아픔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애정이 있든 없든 슬픔을 빨리 벗어나라고 종용하는 것은 그의 기회를 뺏는 것입니다. 상실을어떻게 넘기고 계신가요?

성숙
첫 번째, 무엇이 되려 하는가?
두 번째, 삶의 목표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세 번째, 어디까지 가려 하는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단계를 거치며 나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숙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상태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가 궁금합니다. 저의 몸이 멈추게 되었을 때, 제가 어떤 상태까지 성숙되어 있을지 지켜보려 합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과정을 온전히 밟아 나간다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과정 자체가 성숙의 단게이닌까요. '성숙'에는 한계 지점이 없습니다. 끝없이 나아갈 수 있고,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순행할 수도 있고, 거꾸로 퇴보할 수도 있겠지요.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시겠습니까?





 01 해피아일스에서 머스드 갈림길까지

p. 55
 
이미 존 뮤어는 헤츠헤치 계곡을 보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했던 존 뮤어. 물질만능적 가치관으로는 결코 세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한 그는 야생의 자연이 갖고 있는 심미적인 효용성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알고 있었다.

헤츠헤치 댐 하나를 짓는 데 무려 50년이 걸렸다. 열린 공간에서 건설의 타당성에 대한 토론과 검증을 거친 게 반세기나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긴 세월을 거쳐 논의했음에도 결국 그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따르고 있다.

시에라 클럽의 국제담당 부회장인 미셜 페로는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일시적인 선동이나 분위기를 바탕으로 다수의 요구라는 미명하에 졸속으로 자연을 개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5년도 아니고 50년 동안 토론하자고 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알맞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헤츠헤치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미리 겪었던 이들의 사례를 살펴보고, 앞서 간 사람들의 실패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일단 저질러놓고 나서 후회하며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지 않은가?




04 투올룸 메도에서 도나휴 패스까지

p.96-97
  산다는 건 끊임없이 발을 놀려야 하는 일이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쉬면 넘어지고, 무너지는 게 자전거 아닌가. 이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던 끊임없이 페달을 밟는 것이 인생길.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날들을 잊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 떠나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도 매일매일 쫓기듯 바쁘게 움직여야 하다니! 그렇지만 그런 투덜거림은 속으로 삼킬 뿐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06 로살리 레이크에서 어퍼 크레이터 메도까지

p.141
  자연의 회복은 대단히 빠르다. 불탄 나무 등걸 아래느 이미 그 나무의 어린 싹이 자라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며 문득 불교가 주장하느 윤회의 개념이 떠오른다. 나무라는 개체는 소멸하지만 그 뒤를 잇는 어린 나무들을 본다. 몇 천 년을 반복해 왔으므로 그게 사실적 윤회 아닌가. 세코이아 나무의 단면을 잘라 살펴보면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산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세코이나 나무껍질이 두꺼워 불에 잘 견디기 때문에 거듭된 산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직격탄을 맞아 홀라당 타버리면 별 수 없겠지만, 꼿꼿하게 서서 불타 죽은 나무들이 흡사 어느 몰락한 신전의 음침한 기둥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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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김선주 세상 이야기
김선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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뺏어오고 싶은 문장으로 쓴 글이 있다면,
사족 달아 내 얘기를 하고 싶은 글이 있다.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이 그랬다.
개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되, 타인(세상 그리고 우주)에 대한 따뜻함을 지닌 글.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글.
그런 글 앞에서는 사족을 달아 내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 
 

> 사족1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가 아들이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어느 날 의사 아들은 동료들이 아버지의 엑스레이 사진을 놓고 토론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곤 충격을 받았다. 동료 의사들에겐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엑스레이 필름 한 장으로 존재하는 환자 아무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필름 안에 어린 자신을 목마 태우고 수염난 턱을 볼에 비비던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내 이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환자의 엑스레이 필름을 놓고 그렇게 했던 것처럼. 

김선주의 글은 아니고,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글이지만,
이런 경험은 한 사람의 일생에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지표를 남긴다.
성당 아저씨이자 엄마아빠 친구 비슷한 어떤 의사께서 엄마가 유방암인지도 모른다고 했던 날 오후,
새로운 내 고객께 엄마 진료를 의뢰하겠다고, 그런 민원을 넣고 싶다고 회사에 보고했을 때
상사들은 자연스럽게 초기 유방암의 예후를 물었고, 나는 줄줄 읊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첫 보도도 안 나간 고객을 위해 매일 그런 얘기를 하고 매일 유방암을 보도하기 위한 회의를 하면서 줄줄 읊었던 얘기였던지라
습관처럼 그냥 덤덤하게 입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찰나,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내 엄마 얘기를 보도자료를 위한 사례 하나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여지껏 날 애지중지하는 내 엄마 건강이고, 날 키우고 내가 물고 빨던 내 엄마 가슴이었는데.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 직업, 평생하지는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나마 생각했던 것은... 

> 사족 2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자 이것 또한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손녀를 태우고 논두렁길을 달리는 그의 평화로운 노년도 눈꼴시어서 보아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자살도 질투를 한다. 먹잇감이 없어졌으니까. 그의 화장과 작은 비석 하나도 질투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서 자기들이 못하는 짓이니까. 

 낙향마저, 심지어 자살마저 질투한 사람들.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의 상실감이나 나쁜 일마저도 질투하고 시샘하고 배아파 하는 사람들.
자신은 그렇게 못 하니까, 자신에겐 없는 거니까, 자신에게 더는 득이나 재미가 안 되니까.
우리 아빠 곁에도, 안타깝게도, 몸이 아픈 것마저 시기하는 핏줄이 있다-_-
 
 

참 안 좋아하던 장르인 에세이를 읽게 만든 것이 서경식이라면,
참 안 좋아하던, 어딘가에 발표했던 글을 묶어낸 것에 찬사를 보내게 한 게 바로 이 책이다.
그러니, 이 책 내라고 독려한 조선희 선생님이나 다른 이들께 감사해야 한다.
이런 책은 마땅히 나와줘야 한다. 두고두고, 널리 회자되어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
이런 책을 위해서라면 나무도 희생할만 하다.

휴가때 읽으라고 재단에서 나눠준 책이고,  우연찮게 난 말 잘 듣는 직원이 되어 정말로 휴가 때 읽었다.
'대한민국 평균'이라니... 여러가지 생각이 겹쳤다.
내 삶의 대세가 될까봐 두려워, 돌이킬 수 없을까봐 자신이 없어서 내색도 않고 말도 안 했지만
사실 <여럿이 함께>에 실린 박원순 변호사의 글 '시민운동이 블루오션이다' 읽으면서 솔직히 가슴 뛰었다.


> '시민운동이 블루오션이다' - 박원순
남들이 다 가는 데로 따라가면 차별성을 갖기 힘듭니다. 남들이 안 가는 곳 찾아가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신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이라면 길은 굉장히 축소됩니다. 그러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 공공 영역은 빈틈이 너무 많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다 보면 나중엔 분명히 자기가 먹고사는 길이 됩니다. 저는 우리가 이 거대한 블루오션을 내버려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제선) 사실 시민 단체 운동과 시민사회를 동일시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거죠. 시민운동이 척박하다고 했지만 이미 시민사회에 시민운동이 가장 늦게 진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동네에 가면 20~40개 정도 자생 단체, 관변 단체가 있습니다. 그 모임을 잘 관리하는 게 지역 동사무소 동장과 사무장의 주 업무입니다. 이렇게 촘촘하게 조직돼 있는 사민사회에 시민운동이 들어간 것이라고 봐야 됩니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저의 고민은 지나치게 우리 사회가 상품사회가 되어서 모든 것이 돈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출산하는 병원도 돈에 따라 다르고, 학교, 장례식 등 과거 상품으로 소비되지 않던 것들까지 상품화되며 사회적 약자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지역으로 돌아가면, 개발은 결국 지역에 혜택을 주지 않는데도 주민들은 자꾸 개발해야 건설 경기가 산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0억짜리 동네 도서관 80개를 만들자고 하면 그 지역의 업체들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 공사를 하면 지역 업체들이 하지 못합니다. ‘묻지마 개발’이 곧 지역 경제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이른바 불필요한 개발과 성장에 자발적 동원이 일반화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데, 이런 필요한 점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박 상임이사님이 보는 틈새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 돌파구를 만드는 틈새인지, 어떤 틈새를 지적한 건가요?

아름다운재단 같은 경우 참여연대와 성격이 다릅니다. 참여연대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100만 원 이상을 받지 않습니다. 정부로부터 일절 받지 않겠다는 등의 원칙을 지켰지만 재단의 경우는 다릅니다. 기업의 사회 공헌이란 것도 중요한 과제였고 그런 사례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단체들이 일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은퇴자인 제 친구들의 등산 모임이 있는데 요즘 부쩍 참여하려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은퇴한 이들도 뭔가를 해야 합니다. 내 주위에는 직장에서 이사나 전무를 맡았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이들이죠.
그래서 은퇴한 이들이 비영리 단체들에서 어떤 일이나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지 목록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 사실 이분들을 훈련시킬 프로그램이 필요하죠. 트레이닝 과정을 만들어서 기업에 팔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퇴직 5~6년 전에 있는 이들에게 이런 방법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도 “좋은 직장은 그만둔 이들의 삶까지 배려하는 직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젊은이들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그래서 외국에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직업을 정리해 ‘사전’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할머니가 관공서 영어가 너무 어렵다며 항의하다가 유명해졌습니다. 이제 관공서에서는 문장을 만들면 할머니에게 먼저 가져옵니다. 이를 ‘플레인 잉글리쉬’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할 일을 생각하면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 시작하면 할 수 있습니다.



환경재단에, 서울환경영화제에 들어가겠다 마음 먹고
지금껏 지녔던 그 어떤 명함보다 그 명함이 자랑스러웠던 데는
(명함 주고 받는 거 요식행위라고 생각하던 내가 그 명함만큼은 언제나 먼저 내밀었던 것 같다)
박원순 변호사의 글 영향이 컸다. 물론 그런 글이 마음에 들어오기까진 엄마 영향도 컸겠지만...
그러던 찰나에 동경하던 이(조선희 선생님)가 존경하는 선배(저자 김선주)가
평생 '대한민국 평균'을 고민하며 그 신념을 지키며 살았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이 마음 안에 들끓었다.

-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얘기했을 때 "의미있는 일인 거네요"라는 누군가의 응수에 나는 "의미와 수입은 정확하게 반비례하지요"라고 답했다(그는 그 전에, 좋은 직장인 그의 회사에선 윗선으로 올라가도 결국 일꾼일 뿐이라고 했다. 뿌듯한 직업을 동경하는 또 다른 1인인 듯).
- 나는 진정으로 돈을 잘 벌고 싶다. 하지만 내 스스로 뿌듯하고 당당한 일도 하고 싶다.
- 어느 선 자리에서, 내가 프리랜서라는 것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좋아하는 일, 뿌듯한 일도 좋지만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라면 내가 받는 건 보상은 고사하고 "상처"뿐이다. 정확히 '상처뿐인 영광'
- 나는 과연 NGO에서 버틸 수 있을까? 내가 못 견디는 게 시스템일까, 보상일까?
- 기타 등등 오만 잡생각.... 


그렇게 쿡! 찔린 듯했다.
책을 덮을 즈음엔 무언가 길이 보이길 바랐지만, 여전히 길은 오리무중이다.
내가 모르는 내 속을 책이 알려줄 리 있나.
그렇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내 안의 어떤 게 전경으로 드러났다는 것!
그리고 참 내 얘기를 못 하는 내가 모처럼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느 것.

그래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와 <소년의 눈물>과 같은 반열에 올린다. 이 책. 

 


추천글

‘아하! 김선주’ by 정혜신 p. 11, 11-12, 17
김선주는 “나에겐 세상 사람 모두가 특출하고 특별하고 특이한 존재이며 아무도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에 (혹은 어딘가에) 공감하고, 깔깔대고, 분노하고, 눈물 흘리는 김선주 세계관의 베이스캠프는 인간 존재의 개별성에 있다.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가 아들이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어느 날 의사 아들은 동료들이 아버지의 엑스레이 사진을 놓고 토론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곤 충격을 받았다. 동료 의사들에겐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엑스레이 필름 한 장으로 존재하는 환자 아무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필름 안에 어린 자신을 목마 태우고 수염난 턱을 볼에 비비던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내 이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환자의 엑스레이 필름을 놓고 그렇게 했던 것처럼. 적벽대전에서 백만 명이 몰살했다는 역사적 (혹은 역사소설의) 사실을 시차를 두고 원거리에서 인식할 땐 스펙터클한 쾌감이 앞설 수도 있지만, 그 백만 명 안에 내 아버지, 조카, 아들, 동생, 남편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죽음으 개별적이 된다. 백만 명의 몰살(沒殺)이 아니라 백만 개의 우주가 백만 개의 간절한 사연을 지닌 채 스러진 것이다. 김선주의 글은 늘 그런 인간의 개별성에 출발한다. 그래서 꽂히듯 심장에 와닿는 것이다.  

김선주는 기자보다 더 오랜 연륜을 가진 자신의 또 다른 직업이 남의 이야기 들어주기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스타일은 이렇단다. 왜 그랬는데, 그래서 어떡하지, 그렇구나, 그러니까, 흐흠, 아이고, 어쩌지……. 그런 추임새를 해 가며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격려하고 공감하고 맞장구치고 고개를 끄덕이고 혀를 차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황홀경에 이른다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꼭, 이런 식으로 글쓰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당신은 있는가.


당신 이웃의 캘커타 p.27
테레사 수녀에겐 세계 각국으로부터 캘커타에서 일하겠다는 자원봉사자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들에게 그는 간절하게 말한다. “여러분 모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 가족 가운데, 이웃 가운데서 캘커타를 찾으십시오.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배고픈 이웃에게 밥 한 그릇을 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봉사하기 위해 일부러 캘커타에 오지 마십시오. 같은 말,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에게 우선 말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캘커타에 오십시오.”

자발적이고 우아한 가난 p.73
방에 들어가니 몇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자발적 가난>이 눈에 들어왔다. 자발적 가난이라……. 참 이상도 하지.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 국경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890킬로미터를 걷기 위해 떠난 서명숙도 떠나기 전날까지 들고 있던 것이 <우아하게 가난하게 사는 법>이라는 책이었는데.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고, 누추하기 십상인 가난을 우아하게 누리고 사는 법이 무엇일까. 가능할까. 왜 못할까. 책을 들고 나왔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자발적으로 가난하고 우아하게, 자발적으로 가난하고 우아하게, 자발적으로 가난하고 우아하게, 매일 주문처럼 되뇌고 있다.

못다 쓴 유서를 쓰자 p.90-91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고졸 출신의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자 이것 또한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손녀를 태우고 논두렁길을 달리는 그의 평화로운 노년도 눈꼴시어서 보아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자살도 질투를 한다. 먹잇감이 없어졌으니까. 그의 화장과 작은 비석 하나도 질투를 한다. 가진 것이 많아서 자기들이 못하는 짓이니까. 그 정점에 수구 기득권 언론이 있다.

노무현 씨, 나와주세요 p.93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다. 영혼이 잠식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였던 거대 언론은 사회 각 계층의 기득권 세력들과 힘ㅇ르 합쳐 대통령을 신나게 왕따시켰다. 길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를 길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불안했기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 탓이다.

자기를 위한 잔칫상을 차려라 p.137, 138-139, 141
결혼 적령기는 당신이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기는 바로 그때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누군가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당신이 사랑할 상대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백마 탄 왕자가 다가와 손 내밀기를 기대할 시기는 지났다. 백마탄 왕자는 10대에도 20대에도 환상이고 서른에는 망상이다.

당신이 직업을 가졌다면, 서른 살에 전직과 평생 직업을 생각해야 한다. 20대까지의 삶은 대부분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 출신 학교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나 인생관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직업도 허겁지겁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인지 안 맞는 일인지 이제는 알 만큼 당신의 경력도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도 키워졌다. 장래성 있는 일과 없는 일, 내가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졌다.
당신이 다니는 직장이 보람도 있고 적성에도 맞고 평생 직업으로서 가질 만한 것이라면, 당신 위에 여자 상사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 벽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에 대한 투자를 하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이라면 수소문과 정보를 동원하고 그동안에 생긴 인간관계와 경험을 활용해 전직을 꾀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친구를 발견하고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기 위해 넓은 의미에서의 인맥 관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인맥 관리만으로 사람에게 접근하면 당장 들통 난다. 사람들은 그렇게 접근하면 경계한다. 당신이 주요한 포스트에서 밀리면 당장 그 인맥의 그물에서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가치관이 같고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가 같은, ‘아’ 하면 ‘어’ 하고 알아듣는 친구를 갖는 것은 평생 반려를 얻는 것보다 충족감이 크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라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얄팍하게 넓은 관계로 사교 생활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당신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언젠가는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 날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서른한 살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기혼이든 미혼이든 열렬히 사랑해라. 사랑할 수 있을 떄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권리다. 축복이다. 그러나 결코 눈을 사르르 감고 관능에 몸을 맡기거나 영혼이 떨리는 듯한 충일감에 젖어드는 사랑의 순간이 오더라도 한 쪽 눈은 분명히 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성취한 것, 당신이 가진 것과 맞바꾸기에는 사랑이란 너무나 불가해한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사랑은 맹목이지만 결혼은 눈을 뜨고 하는 것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결혼은 없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한 당신. 이제 서른한 살이다. 서른까지 남의 손에 의해 차려진 잔칫상만 받았다. 서른한 살, 이제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기 시작해야 한다.
사람에게 접근하면 당장 들통 난다. 사람들은 그렇게 접근하면 경계한다. 당신이 주요한 포스트에서 밀리면 당장 그 인맥의 그물에서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가치관이 같고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가 같은, ‘아’ 하면 ‘어’ 하고 알아듣는 친구를 갖는 것은 평생 반려를 얻는 것보다 충족감이 크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라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얄팍하게 넓은 관계로 사교 생활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당신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언젠가는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 날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서른한 살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기혼이든 미혼이든 열렬히 사랑해라. 사랑할 수 있을 떄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권리다. 축복이다. 그러나 결코 눈을 사르르 감고 관능에 몸을 맡기거나 영혼이 떨리는 듯한 충일감에 젖어드는 사랑의 순간이 오더라도 한 쪽 눈은 분명히 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성취한 것, 당신이 가진 것과 맞바꾸기에는 사랑이란 너무나 불가해한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사랑은 맹목이지만 결혼은 눈을 뜨고 하는 것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결혼은 없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한 당신. 이제 서른한 살이다. 서른까지 남의 손에 의해 차려진 잔칫상만 받았다. 서른한 살, 이제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외조남이 인기남! p.151
결혼은 침대를 같이 쓸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침대와 냉장고와 화장실도 같이 쓸 사람을 구하는 거다. 그러니까 같이 잠자고 같이 먹고 같이 배설할 짝을 구하는 것이다. 침대만 같이 쓰려면 굳이 결혼할 필요도 없다. 냉장고와 화장실은 생활의 인풋과 아웃풋을 상징한다. 지지고 볶는 생활을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조건이 그렇게도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집안과 학벌을 따져 남 보기에 번드르르한 결혼을 하기보다 뜻이 맞고, 그러니까 가치관을 갖고 이 모든 일을 유쾌하게 같이 해나갈 만한 평생 친구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현실적인 선택의 폭은 훨씬 넓어진다.

담론이 사라진 시대 p. 221-223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의 관계, 말과 글의 힘과 책임에 대해 깊게 파고든 20세기의 대표적 지성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진정한 시인이었다면 이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또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무책임하게 주고받는 말들, 그것은 대중을 오도하는 말이 되어 비참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독소가 되고 있다. 진정한 시인, 적어도 언어를 특별히 중시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시인은 언어로 파악 가능한 모든 일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지려는 의지를 갖춰야만 한다.”
모든 글쓰는 사람은 이런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시인이란 가장 먼저 울기 시작해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성인, 언론인 등 말과 글을 다루는 게 직업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시인, 언론인,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진정한 언론이 있다면 인류 최대의 재앙인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세계의 언론은, 시인은, 지성은, 언어를 특별히 중시하는 직업인으로서, 언어로 파악 가능한 모든 일에 끝까지 책임지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왜 글을 쓰고 글을 읽는가? 소통을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공감을 얻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사회 전체저긍로 담론을 형성하면서 개인과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글쓰기는 내편과 네 편을 정해놓고 자기 말만 한다. 피차 귀를 막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우리 편 잘한다, 우리 편 잘해라다. 소통이 필요 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온몸이 화끈거리게 부끄럽다. 내 편 네 편을 확실히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읽을 뿐 진정한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인터넷이 생기고 공중변소의 낙서가 사라졌다고 한다. 인터넷이란 일종의 배설 장소다. 댓글에선 오늘은 이 소리 하고 내일은 저 소리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은 나날의 역사를 쓰는 마당이다. 그런 곳까지 책임지지 못할 말과 안팎으로 전쟁을 부추기는 글이 난무한다. 그러다 보니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이 두려워 글쓰기를 포기한 사람도 생겼다.
어렸을 때 알제리에서, 베트남에서, 칠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세계 지식인들이 하나로 뭉쳐 발언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고 전율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인구가 많고 인터넷으로 소통이 원활한 시대에 소통이 안 되는 불행을 세계적으로 겪고 있다니 끔찍하다. 진정한 언론이 있다면 이라크 침공도 레바논 침공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지식이 내가 사는 오늘 이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고 불후의 역작으로만 남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담론이 사라진 시대가 더 절망적으로 불행하다.

너, 한겨레에 아직 있냐? p. 233-234
기자는 항상 자기검열을 하며 글을 써야 한다.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주눅 들 이유가 없다. 글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매 순간 엄격한 자기검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론인은 각종 권력에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직업윤리다 보니 자칫 잘못 판단하면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다. 또 10년 전에 쓴 글과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10년 뒤에도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내 주장이 사회의 정의와 민족의 이익, 또는 인류 보편의 가치관과 부합하는지를 점검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언론인의 본분이다. 권력이나 외부 압력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공기인 언론에 글을 쓰는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끝나지 않은 유신시대 p. 238
그동안 <조선일보> 편집국 간부 4명이 현직을 떠나자마자 곧 정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이번 봄, <조선일보>는 김영삼 정부와도 곧 밀월관계가 유지될 확신을 얻었음인지 3.6사태 해결을 흐지부지 미뤄버렸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신문사에서 편집국장을 하던 사람이 곧바로 ‘문민정부’의 정무수석이 되었으니 그 신문사로서도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조선투위 32명은 18년 자료집 출판기념회에 당신들을 초대한다. 한때 다정하게 소주잔을 나누었던 사주와 1975년 3월 얼싸안고 자유언론을 외치던 동료들을. 그리고 그 이름은 알지만 얼굴을 알 수 없는 후배 기자들을. 각자 생업에서 쫓겨나 비록 펜은 빼앗겼으나 고생 끝에 각 분야에서 웬만한 성공을 거둔 그대들의 선배들을 이제 한번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며느리와 손자를 볼 나이에 ‘자유언론의 깃발’ 아래 모여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유언론”을 외치는 선배들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능 350점 이하만 읽을 것 p. 254-255
언론은 또 어떤가. 수능 성적이 380-380점이 안 되면 열외로 치면서 수능이 변별력이 없어져서 온 국민이 불안해한다고 말한다.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에다 계급주의적인 발상이다. 290점짜리가 갈 대학이 없겠는가. 웬 걱정인가. 그들은 노른자위로만 골라 가야 할 특혜 받은 국민인가. 변별력이 없어서 가고 싶은 대학을 못 찾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박 터지게 출세하라고 하자.
비밀 괴와도 하지 않고 서류 조작도 하지 않고 과외비로 부모 허리를 휘게도 하지 않고 떳떳하게 얻은 성적이다. 자신의 점수에 자부심을 갖자. 380-390점짜리들이 올려다보는 1점과 2점을 다투는 좁은 세상보다 더 크고 더 넓은 사고방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350점 이하들이가고 자신감을 갖고 기를 펴고 살아야 할 일이다.

그만하면 대한민국 평균 수준 p.334-335
어느 날 신홍범 씨가 자신은 하루에 2백 원씩 용돈을 들고 나온다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월급으로 나 혼자 용돈 쓰기도 빠듯해 아침마다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던 처지라 “신홍범 씨, 이백 원 갖고 어떻게 살아요?”라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신홍범 씨가 “김선주 씨,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하루 이백 원이면 대한민국 평균 수준으로는 많은 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나를 세상모르는 천둥벌거숭이라고 비난하려는 뜻은 아니라는 듯 덧니가 드러나게 환하게 웃으며 이 말을 하던 신홍범 씨의 얼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 그렇구나, 어떤 사람은 삶의 기준을 대한민국의 평균 수준으로 놓고 보는구나. 그런 방법도 있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그것은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부모에게서도 학교에서도 배운 바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벼락을 맞았다. 벼락 맞고 사람이 천재가 되거나 이상하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변했다. 그전까지의 인생과는 다른, 전혀 다른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이 대한민국 평균 수준이면 만족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았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많은 월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돈으로 환산되어서는 안 되고 출세를 하는 것이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돈이 목적이라면 장사를 해야지 지식인이, 대학교수가, 정치인이, 언론인이, 공무원이, 그러니까 공적인 기관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평균 수준 이상의 것을 사회에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대한민국 평균 수준의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라는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른바 가방끈 긴 집단에서 가방끈 짧은 직종의 소득이 자신들보다 많은 것을 불평할 때마다 “그게 소원이면,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당신들 자녀는 그런 직업에 종사하도록 시켜라”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위험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자장면과 삼판주 p.354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며 세상풍파를 겪는 동안 이러한 꿈은 까맣게 잊었다. 철없는 시절의 부질없었던 꿈 대신에 어떤 노년을 맞을까가 숙제가 된 나이가 되고 말았다. 늙을수록 노욕이 심해진다는데 재수 엇ㅂ으면 백 살까지도 산다는 그 긴 노년에 어떻게 내 안의 노욕을 다스리며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코앞에 닥친 것이다. <자장면과 삼판주>를 읽고 이거다 싶었다.
청빈이 무능의 소치가 아니고, 검박한 삶이 누추하지 않은 그런 삶은 우리 시대엔 불가능한 것일 것. 그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허영이고 부질없는 짓일까. 젊은 날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니 노년의 꿈이라도 이루고 싶다. 후배들, 자장면과 삼판주 부탁해요.

후기 p.379
평생 한 번도 확고해본 적이 없었다. 신념도 없었다. 지금도 매일 매순간 흔들리고 자신이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지 매번 두려웠다. 죽을 때까지 이런 갈등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사람으로 태어나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예의, 안 되면 염치만은 차리자, 라는 생각으로 살고 글을 썼던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아직도 이렇게 흔들리는 사람의 글을 사랑해주었던 독자들과 긴 언론인생활 동안 격려와 질책, 그리고 취재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기분으로, 한 권씩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엮어낸 책이다. 쑥스럽지만 신문 독자 아닌 새로운 독자를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설레기도 한다.
비겁하게 살지언정 쪽팔리게는 살지 말자’를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이제 쪽까지 팔리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단언하거나 단정할 일은 아닌듯…… 다시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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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나
스티브 헬리 지음, 황소연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각성은 우연찮은 곳에서 시작된다.
소개팅 자리에서 글 쓰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허황된 꿈이라 했지만 어쩌면 나보다 더 진지한 지 모른다. 나보다 더 많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엔 일상에도, 자기 삶에도 꾸준히 성실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까.
예상밖의 진지함을 도도한 척, 당당한 척 넘겼지만 실은 폐부 깊숙히 찔렸다는 거.
그러니까 각성이랄 것도 없이 누구든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내 스스로 내 폐부를 찔렀을 지 모른다.
다만 그게, 전혀 생각지 못한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해맑은 표정이라서 그렇지.
 

아마 그래서 였을 거다.
아마도 그냥 휙 넘겼을 책 소개, 굳이 들어가서 보고 바로 산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대필 작가 출신 소설가의 흥망성쇠기,
그 리얼리티 때문에 더 피했을 지 모른다.   

아무튼 워크숍 오가는 기차 안에서 딱 적당한 내용인 것 같았고, 진로에 대한 혼란에 휩싸인 이 시기에 적절한 것 같았다. 

예상보다 책은 훨씬 재밌었다.
통쾌했고, 실용서 혹은 작문법 책보다 유용했으며, 짜릿하다가도 반성케했다.
소설 속 소설의 문장은 나무랄 데 없이 '서정적'이었다.
비록 번역투가 걸리긴 했어도.
 

하지만, 작가가 아무리 빼어나도 헐리우드, 방송작가 출신이라는 건 못 속이는 모양이다.
출신을 못 속이는 게 아니라, 습관을 못 속이는 거겠지.
통쾌한 이야기 후 안전한 봉합.
결국은 문학은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도발은 결국 미숙한 치기라는 것.
너무 안전하게 현실 속 문학권력, 출판권력의 정답 속으로 들어와 버린다.
그래서 실컷 신나게 읽고는 마지막에 힘빠졌다. 

그래도, 누군가 소설가가 되고 싶어 그 길을 찾는다면, 나는 아마 이 책 추천할 꺼다.
글을 쓰려고 작정하고 시간을 만들어도 쓰지 못하게 되는 현실적인 구차한 핑계들,
글로 도망치는 것조차 비루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현실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글쟁이가 누릴 달콤한 환상, 은근과 끈기로 써대기보다 그 환상의 단맛 먼저 즐기는 나약함
차마 남사스러워 일기에조차 담지 못하는 그 미끌거리는 마음들이 명랑하게, 가볍게 담겼으니까.
한 번이라도 '작가'라는 이름을, 그 타이틀이 주는 권위와 부와 우러름을 마음으로나마 탐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나약함, 비굴함, 허영 따위 모두모두 이해하고도 남을 테니.
그러니 때로 각성은 아프지만, 즐겁기도 한 일이다.  

그런데, 각성하면 뭘 해. 삶이 안 바뀌는 걸. 

 

2010. 7. 17~18 

 


> 피트 타슬로(나)의 <회오리바람 장례 클럽> 중에서 (p. 9)

"노래란 그런 거야." 그녀가 말했다. "마음속에서 파르르 떨리는 거, 그게 노래야. 작은 새의 날개처럼 떨리는 거."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그는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큼 보드라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란 그런 거야. 너의 심장을 한 마리 새로 변하게 만드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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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로미오와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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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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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전설이 되 , 소설이 되고, 영화가 되고. 현실이 영화처럼 유쾌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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