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모닝 홈트 10분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래봤자 오늘까지 딱 10일째지만! 저녁에는 집 앞 산책로를 걷거나 유산소 홈트를 하고 있다. 이것도 10일째 꾸준히! 어제는 미밴드 PAI 36, 최종 113이 되었다. 놀랍게도 피곤이 사라졌다. 1시간 이상씩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피곤해 죽을 거 같다는 생각만 하던 내가 사라졌다!!


몇 년 전 알라딘 12월 굿즈 무민 다이어리를 살 때 다이어리에 끼워져있던 스티커를 언제 쓰나 했는데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요일별 도트 스티커를 매일 운동한 날에 붙이고 있다. 매일 스티커를 붙이고, PAI 지수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피곤이 사라졌다는 것에 놀라서 아직까지는 매일 운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다. 고작 운동 10일째인데, 운동하기 전에 했던 여러 가지 어려운 생각들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오늘 하루라도 건강하게, 피곤하지 않게 보내자 하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전혀 보지 않았던 건강 관련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의사, 약사, 한의사 등의 유튜브를. 그전에 나는 저런 것들을 회피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병원 다니고 있으니까, 대학병원 교수는 딱히 해주는 말이 없었고, 내 병은 그냥 받아들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의사 친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 쓸 수 없는 말기에 알게 되고 몇 달 살다가 죽어. 너처럼 우울해할 기회조차 없어. 너는 걱정도 하고 대비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지 생각도 하잖아. 그럴 기회가 주어진 게 좋은 거야. 그리고 나처럼 위로해 주는 친구도 있고. 운이 엄청 좋은 거야."라고 했다. 

70대인 내 아버지는 매일 소고기나 돼지고기나 회를 먹는다. 매일 반주를 하고, 간식으로는 항상 과자(몽쉘 8개를 이틀간 먹기도 함)를 먹고, 요즘은 매일 비락 식혜를 2캔 이상 마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압 정상, 따로 먹는 약 없고, 매우 매우 건강하다. 키 179에 몸무게 74(지금이 인생 최대의 체중) 배는 좀 나왔지만 근육맨이다. 한마디로 나보다 건강하다. 집에서는 항상 쇼파에 앉거나 누워서 종편 뉴스(정치와 트롯만이 유일한 즐거움)를 본다. 내 아버지는 육체 노동자였고, 지금도 새벽에 노동을 하고 낮에는 좀 쉬다가 서늘해지면 오후부터 저녁까지 또 육체 노동을 한다. 다시 말해 야외(충분한 햇빛과 신선한 공기)에서 땀을 흘리며 계속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한다. 운동을 따로 하지 않지만 생활자체가 근력 운동인 것이다. 대신 육체 노동을 하지 않는 날은 간식 안 먹고, 고기도 안 먹고, 채소 위주의 한식을 함. 70대 임에도 불구하고 먹는 약이 없고, 각종 건강 수치가 정상이며, 허우대가 보기 좋다는 것에 엄청난 프라이드가 있는 사람이다. 또한 매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스트레스 안 받고, 엄청 잘 자는 사람이기도 하다. 담배는 평생 핀 적이 없고, 술은 60대가 되어서야 반주로 마시기 시작했고 과음은 절대 안 함. 맥주 1병도 다 안 마시니까. 

햇빛을 받으며 땀 흘려 움직이는 게 건강의 비결인지도!!

여러 가지 병들이 다 그렇겠지만, 대부분의 원인(유전 제외)은 불규칙한 생활습관, 수면부족, 스트레스, 나쁜 음식 과잉 섭취 정도 일 것이다. 건강관련 유튜브를 쭉 봤는데 나에게 해당되는 건강악화의 원인은 단 한 가지, (심각한) 운동부족이었다. 나의 유일한 나쁜 생활습관은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내 아버지와 나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70대 노인이 청소년처럼 아무거나 먹어도 건강하다니!! 심지어 날씬하기까지.

육체무용론을 주장하면서 몸을 하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나에게 있어서 몸은 의생활을 하기 위한 스탠딩 옷걸이 정도에 불과했다. 부친을 닮아 팔다리가 길고 날씬하니까. 뭘 입어도 나름 모델핏이었다. 하지만 내 뱃속의 장기들은 노화와 함께 병들어 가고 있었다. 병들어 가고 있는 지금도 증상은 없다. 이 병의 특징은 무증상(그래서 치료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는 사람이 다수다). 다만 나날이 수치가 나빠질 뿐이다. 

운동, 특히 공복 모닝 홈트는 정말 엄청나다. 10분 동안 몸을 움직이고 나면 예열이 된 것 마냥 활력이 생겼다. 움직이기 싫을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서 활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홈트 시작하고 나서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다던가 쇼파에 드러누워서 무력하게 넷플릭스를 본다던가 한 적이 없다(물론 고작 10일이지만). 

필라테스를 다닐 때의 나는 왜 전혀 운동 효과를 보지 못했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딘가에 가서 남들과 같이 하는 운동이 나에겐 맞지 않았던 건지도. 내 맘에 쏙 드는 운동 유튜버와 함께 혼자 집에서 하는 운동이 내 스타일이었던 건지도. 내 맘에 드는 운동 유튜버는 빅씨스인데, 4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체력을 소유하신 분.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나도 열심히 하면 빅씨스 나이가 되었을 때는 체력이 좋아질지도 몰라하는 식의 동기부여가 되어서 그런가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과거의 내가 뇌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지금부터의 나는 몸을 모시고 사는 사람.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행위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노화라는 불청객이 왔고 나는 그 손님을 대접해야만 한다. 그걸 외면한 대가가 현재 나의 각종 건강 수치. 

운동을 하면 피곤하지 않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10일간이었다. 

나의 온갖 수치들아, 부디 여기서 멈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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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재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잡동사니(공책, 책, 영수증 등등)도 다 정리하고 치웠다. 마지막으로 서재 책상에 앉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최소 3주 전? 그동안 나는 거실 테이블을 침실로 옮겨 그것을 좌식 책상으로 사용했다. 서재 책상에 있는 32인치 모니터를 외면하고 13인치 맥북(구매당시에는 레티나였으나 지금은 레티나라고 하면 응? 뭔 소리?) 화면에 의지해서 일기를 써 내려갔다. 공백을 걷는 기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일기 이후 나흘이 지난 오늘, 나는 내 마음의 구멍이 다 매워졌음을 알았다. 아니, 어제 알았다. 다이어리에 또박또박 썼다. '매우 매우 충만해짐!'이라고. 


지난 일요일 점심때 현재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 중 가장 오래된 지인에게서 커피한잔할까라는 띄어쓰기도 물음표도 없는 단 6글자의 톡이 왔다. 나는 25살 이전에 알던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이 지인은 26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편의상 이 지인을 공유라고 부르자. 턱선이 공유처럼 생겼다. 즉 선명하지 않고 흐리멍덩하다. 좋게 말하면 공유고 나쁘게 말하면 심슨? 내 집에서 가장 가까운(약 200미터, 도보 3분)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도착한 나는 도착했다고 톡을 보냈고, 공유는 4km 남았다고 했다. 10분 정도 더 걸릴 거 같아 먼저 주문을 했다. 그런데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공유 도착. 따로 주문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음료인 뜨거운 페퍼민트를 마시면서, 한 여름에도 아이스는 마시지 못하는 서로의 허약한 몸 사정을 위로했다. 30분 남짓 얘기를 하고 이제 가자 하면서 컵을 정리하는데 내가 "나 차 한 번 태워줘. 포르쉐 한 번도 안 타봤어. 타보고 싶어." 했더니 "그래."라고 했다. 천천히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 앞에 왔는데 "한 바퀴만 더 돌자."라고 하니 또 "응, 그래." 했다. 그렇게 마담 보바리의 마차처럼은 아니고 ㅋㅋㅋㅋ 돌고 돌고 돌았다. 


공유가 나를 보러 온 먼 길을 온 이유는 곧 있을 (나의 병에 관한) **검사 잘 받으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격려를 해 주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공유는 격려의 의미로 내가 해달라고 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줬다. 어떤 것은 내가 요구하기도 전에 "너 이거 좋아하지?" 하면서 해줬다. 


그렇게 일요일을 보낸 후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오늘 수요일을 보내는데, 최근 계속느꼈던,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내 마음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어떤 불쾌한 아픔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어떤 것을 볼 때마다 늘 찔려서 아팠는데, 그날 이후로 그것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음에 약간 허무하기까지 했다.


나는 혼자 공백을 걷는 것이 최선이고 유일한 비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유가 나타나서 공백만으로는 채우지 못한 1%를 채워주고 간 느낌이다. 공유는 영업 잘 되는 동네 의원 원장님이기도 해서 장돌뱅이 약장사같은 말빨로 나를 위로해 주는 면이 있기도 했다.


나에게 처음으로 독일차를 태워준 사람 공유, 그 차는 5시리즈. 나에게 처음으로 벤츠를 태워준 사람도 공유, 그 차는 e클래스. 나에게 처음으로 포르쉐 태워준 사람도 공유, 그 차는 카이엔. 그리고 나에게 티파니와 샤넬을 선물해 준 유일한 사람(나 자신 제외)이 공유였다. 



와놔. 마칸 사고 싶어!!!!!!!!!!!!!!!!!!!!!!!!!!

음... 마음의 구멍은 매워진 게 아니라 다른 구멍으로 이전한 것인지도.

월요일부터 마칸 앓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앗, 공백 속 걷기 해야 할 시각이다!! 저녁 산책이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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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나는 계속 듣고 있었다. 주로는 팟캐스트였다. 대략 2년 전부터는 스트리밍 음악까지 추가되었고, 작년 하반기부터는 k-pop을 줄곧 들었다. 집에서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들었고, 회사에서는 에어팟으로 들었다. 에어팟은 나의 신체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백상현 유튜브 라깡 강의 두 편을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는 부분을 계속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켜고 출근 준비를 한다. 

지난주에는 계속 백상현 유튜브. 이걸 계속 듣다가 생각했다, 결심했다. 

공백 속에서 지내겠다고. 다시 말해 아무런 정보값이 없는 생활 소음 속에서 지내겠다고(지금도 들리는 소리라면 에어컨 작동 소리뿐). 물론 그 공백이 이 공백은 아닐 테지만, 일단은 외부 사람(타인?)이 나의 청각을 자극하는 것을 차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소거 첫날, 월요일. 놀랍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평소의 나는 업무의 틈이 생기면 계속해서 듣거나 읽거나 했다. 자주 가는 블로그에 가거나(즐겨찾기도 하지 않음, 아예 블로그 주소를 외운다. 왜냐 혹시나 타인이 내 컴퓨터를 썼을 때 내 취향이 공개되는 게 싫어서, 로그인 안 함), 유튜브를 듣거나(보지 않음), 책 검색을 하고 미리 보기를 하거나 등등. 계속해서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하는데 그것을 전혀 하지 않고 멍 때리면서 하루를 보냈다. 틈이 생기면 의자에서 일어나 멍하기 창 밖의 나무를 봤다. '여름이라 초록이 무성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샤워, 설거지, 빨래 등의 집안일을 할 때도 언제나 팟캐스트를 듣던 나였으나,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물 흐르는 소리에 집중했다. 


서재에 일기 쓰는 것도 당분간은 쉬어야지 생각했다. 대신 아껴두었던, 수년 전 <올리브 키터리지>를 사면서 굿즈로 받은 양장노트(올리브 키터리지와 표지가 똑같고, 페이지마다 해당 소설의 구절이 적혀 있다. 애정템.)를 펼쳐 매일 들고 다니면서 내 기분이나 생각을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정돈된 글씨로 썼다. 내가 마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된 마냥, 이것은 쓰는 즉시 나의 소설이다라는 식으로.


그리고 무려 어제!!! 역사가 탄생했다!!!!

낭비되던 에너지가 없게 되자, 기적처럼 퇴근 후 홈트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지인에게 추천받은 유튜버 빅시스의 채널에 입문하게 된다. 일단은 체력이 부족해서 아침에도 저녁에도 계속 모닝 홈트만 하는 중. 모닝홈트 20분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1월 이후 하지 않았던 산책까지 하게 되었다. 산책 시간은 40분, 거리는 2.5km. 산책을 할 때 에어팟 없이 한 적이 없었는데 어제는 에어팟 없이 했다. 좀 과장하자면 공백을 걷는 기분이었다.


늘 저녁을 먹고 나면 병든 닭처럼 졸음이 밀려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내가 침대에 눕는 시간은 주로 9시 전후. 어제는 졸리지 않아서 올리브 키터리지 공책에 일기를 좀 끄적이다 보니 졸려서 10시 반에 자고 9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9시에 일어나서 내가 한 것은!!! 빅시스의 공복 모닝홈트 10분짜리 2회 반복!!!!!!!!! 


나는 내가 모닝 카페인 없이는 졸음과 피곤을 떨쳐 낼 수 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닝 홈트 20분을 하고 나니 엄청 상쾌하고 몸이 가볍고 에베레스트는 무리고 한라산 정도는 오를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운동을 해야 기운이 난다는 말이 이거였구나!!! 늘 이 말이 궤변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니!!! (내가 지난밤에 10시간 30분을 잤기에 상쾌한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10시간 30분을 잤더라도 피곤한 사람이 나 ㅜ)


세탁기를 돌리고, 손빨래를 하고. 아침을 먹고 난 후 내가 무얼 했냐면 무려 이마트에 간 것!! 나는 절대 주말, 휴일에는 마트를 가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붐비는 거 딱 질색. 그래서 늘 퇴근하면서 잠시 마트에 들러 장을 본다. 요즘은 붐비는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생겼는데, 그것은 늘 피곤하고 기력이 없어서 하루종일 집에만 있고 싶었기 때문. 그래서 휴일에는 웬만하면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주말 히키코모리가 되었달까...


마트에서 1시간 30분 동안 장을 보는 동안 약 2000걸음을 걸었다. 항상 마트에서 계산할 때 줄이 짧은 곳에 서거나 스피트 계산을 하는데, 오늘은 그냥 아무 데나 서서 내 앞사람이 장 본 것을 여유롭게 지켜봤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역시 긍정은 체력과 여유에서 나오는 건지도...  앞사람은 캠핑용 장을 본 것 같았다. 물건도 엄청 많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 와서 양배추 1통을 채 썰어 두고, 계란을 삶고, 할인하길래 한 번 사본 샐러드 채소에 양배추, 계란, 토마토, 견과류를 추가해서 점심으로 먹었다. 드레싱은 발사믹 올리브오일. 


필라테스를 다닐 때는 에어팟이 제 2의 고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꽂고 살았다. 그래서 운동 효과를 보지 못했던 걸까? 운동을 한다는 심리적 위안은 있었지만, 육체적인 활력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환불 받고 그만 둔 것이었다.


또한 나는 물리적으로는 혼자였지만, 팟캐스트 속에서 말하는 타자들과 계속 함께였는지도. 그들의 수다를, 그들의 지식을, 그들의 정보를 나는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었나 보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하루치 타인 용량, 정보 용량을 훨씬 초과해서 삼켰나 보다. 그래서 10시간을 자도 늘 피곤하고 졸렸던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다시 10분 모닝홈트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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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자의 불 탄 영토 : 권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세계


언어의 세계를 아이가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마치 불에 탄 영토처럼 아무것도 뜯어먹을 게 없는, 어떤 생명체도 살아나지 못하는 핍진한 사막과 같은 영토를 상징계라고 부르고 그곳을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냐하면 그렇게 핍진한 상태만 전부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핍진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쾌락을 오히려 더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이 성적인 충동의 세계가 핍진한 상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의 무의식이 그걸 인식하죠, 의식은 잘 모를 수 있어요. 의식은 행복해 할 수 있어요. "나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어,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어. 나는 굉장히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어. 우리는 멋진 커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만족스러운 어떤 의식적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순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성충동의 만족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럴 경우에 이들의 무의식은, 이 주체의 무의식은 다른 방식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보상의 요구에 부응해서 등장하는 것을 라캉이 증상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즉 성충동의 만족의 불가능성에 부응해서 우리에게 그렇다면 이걸 한번 탐닉해 봐라고 제시되는 것, 그게 바로 제3의 요소로서의 증상이라는 것이죠. 가장 그중에서 제3의 요소에서 합법적인 요소가 바로 팔루스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의 무의식은 팔루스 말고 더 많은 증상에 경도되거나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사로잡힘이 바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그 내담자를 상담실로 찾아오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왜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거기에 자꾸 빠져드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그 고통스러운 이미지 속에서 허우적대는지 모르겠어요. 난 그걸 원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나의 삶은 이리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증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거 같아요.라고 호소할 때 우리는 이렇게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정신분석이라면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의식적으로는 이 증상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사실상 이걸 탐닉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원인은 이 내담자의 세계는, 다른 많은 인간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쾌락이 없는 사막과 같은 핍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핍진한 사막에서 오아시스처럼 만난 증상을 놓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그 증상이 신체적인 고통이건, 어떤 도박과 같은 증상이건, 아니면 어떤 모순된 사랑이건, 모순된 사랑이 증오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건, 어떤 종류의 고착이든 간에, 결국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 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을 수 있는 그와 같은 사태가 바로 증상이라는 개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자 우리 그 증상을 포기하는 연습을 같이 한번 해봅시다.'라고 아무리 심리치료사가 내담자에게 의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대등한 관계에서 제안을 해도 내담자는 당연히  아 그러겠습니다. 연습해 보겠습니다. 그것을 술을, 담배를, 모순된 연애관계를 포기하는 삶을 연습해 보겠습니다라고 의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담자의 무의식은 결코 그 증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거라는 거예요. (중략) 이것이 정신분석이 증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태도라는 거예요.

<라캉 정신분석 입문 특강_ 상징계란 무엇인가? 증상의 해석학  1:00:26~1:04:36 / 백상현/ 라까니언 프렉시스 유튜브 강의 중>


나는 나에게 발생한 일에 의미를 부여=예쁘게 포장=꿈보다는 해몽=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일기를 쓰는 행위가 바로 그런한 의미 부여, 예쁜 포장의 의식이다. 납득이 된다면 설령 그것이 지옥이라고 해도 나는 그걸 견딜 수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겪어야 했던 지옥이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당하는 고통.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는 것. 나에게는 인생 그 자체가 그렇다. 도대체 왜 내가 태어나서 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요즘 나에게는 일기로 쓰고 싶은데 막상 쓰고 나면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는 이상한 글이 되고 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명품, 그중에서도 디올. 디올이 아니면 그 무엇도 몸에 걸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증상. 그래서 내가 디올에서 흥청망청 물건을 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욕계의 바틀비가 되었달까. 디올이 아니라면 나는 구매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디올을 몸에 걸치고자 하는 이유가 허영이나 허세는 아니다(아닌 것 같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도 관심 없다. 타인에게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 상상계 속에서 사는 나. 내가 보는 나 자신만 중요해. 거울단계. 특히 나는 외모에 관해서 그렇다. 내가 나에게 예뻐 보이는 게 진짜 중요함! 남이 어떻게 보든 말든 타인의 시각 즐거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디올은 내 무의식이 탐닉하고 있는 나의 증상인가? 그래 뭐 무의식이라도 행복하니 됐다 싶기도 하고.


둘째는 안락한데 너무 지겹다는 것. 좋은 집, 좋은 차, 나쁘지 않은 직업,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부모는 건강하고(넉넉한 노후를 갖춘 이 시대의 승자), 이촌들도 알아서 잘 사는 듯 보인다. 2016년 여름은 매우 더웠다. 그 여름을 에어컨 없이 버텼다. 그 시절의 내 욕망은 이집트의 파라오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였다. 그래서 그 무엇에도 돈을 쓰지 않고 나의 궁전(나의 무덤)을 지을 건축비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내 욕망은 평균적인 아파트 구조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내 취향의 집 구조였고, 그걸 설계하고 짓고 그 공간에서 내 영혼과 육체를 쉬며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돈 자체를 크게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아파트(주택) 투자에 별 관심이 없다. (10억도 없는 나이지만) 100억이 있다 한들 100억을 다 쓰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그냥 내가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라고 생각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타인이 나를 부자로 봐 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면야 100억이 필요하겠지만, 난 여전히 6개월생 아기처럼 내 상상계에서 꺄르르 대고 있는 중이라서 타인이 나를 뭘로 보든 말든 상관없다. 

=>욕망의 대상이 허상이기에 욕망은 남고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고 라캉은 말하는데 정말 그럴까? 내 욕망의 대상이었던 피라미드 겸 베르사유 궁전은 허상이었던 것이기에 내가 이렇게 지겹고 권태로운 걸까? 가지지 못했을 때는 가질 수만 있다면 굉장히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고 버텼는데, 대상을 가진 지금은 고작 이게 다야? 하는 기분. 하지만 라캉은 욕망이 있어야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하니 욕망은 절대 결단코 채워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셋째, 모순된 연애

얼마 전 전남친은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 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고." 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이유는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 전남친이 하는 말 대부분이 머리에 입력이 안 돼서 녹음을 한 것을 며칠이 흐른 뒤 천천히 다시 들어 봤다. 이런 말들을 했었구나. 그 당시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이래서 대화가 통할 수가 없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에. 내 머리에 쏙쏙 입력되는 말들은 대체로 그 새끼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말들이다. '저런 달달한 말도 했었구나. 이건 16부작 한국로맨틱 코메디 14부쯤에 있을 법한 대사인데.'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나는 전남친의 옷들(슈트들)을 돌려주지 않고 있고, 전남친은 그걸 돌려달라고 하고 있다. 전남친은 옷이 엄청 많기 때문에 그 옷들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무슨 옷이 내 집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굳이 그 옷들을 돌려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오히려 내 덕에 옷장이 좀 비워졌으니 더 좋을지도. 나는 "니 기억 속에 없는 옷인데 꼭 돌려받아야겠어? 무슨 옷인지도 모르잖아. 어떤 옷인지 맞추면 돌려줄게" 라고 했더니 전남친은 "내 옷인데 왜 안 돌려줘. 장난쳐? 꼭 돌려받고 끝내고 싶다. 더 이상은 너한테 휘둘리기 싫고 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싶다." 라고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때의 대화들도 녹음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왜 안 돌려주는지 몰랐는데, 위에 언급한 강의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핍진한 사막 같은 상징계를 살아가는 나(혹은 나의 무의식)는의 전남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행위에서 어떤 쾌락을 느끼고 있었던 것. 그래, 무의식 너라도 행복해라. 나는 옷을 돌려주지 않는 또라이 전여친 역할을 수행할 테니.


여기서 더 나아가 전남친의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 밖에 없고." 라는 말을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니 무의식이 나를 부여잡고 있는 거라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넷째. 라캉

25살 전후의 시기에 라캉을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자주 가던 철학 블로그가 있었는데 그 블로거가 라캉에 관한 글을 많이 써서 읽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관심은 전혀 없었다. 25살 시절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대체로 채워졌다. 또한 더 거대한 욕망들은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채워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큰 불만이 없었다. 35살에는 25세의 내가 바라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25세의 내가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해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루하고, 이게 내가 인생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심지어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나는 단어 그대로 병든 인간이 되었다.


라캉이 전혀 어렵지 않게 술술 이해되고 있는 이유.

첫째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 둘째 내 인생의 경험치가 라캉을 술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쌓였기 때문(25세의 나는 결코 라캉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그때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결국 채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결여된 존재, 결여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 시작이었다. 너무 기분 나쁜 말인데 뭐라 반박불가. 사는 거 너무 귀찮고, 하루하루 뭔가 불쾌한 기분, 사소한 모든 것들이 거슬리는 기분. 기분대로 막 살아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고. 규칙적으로 살아야 하고, 건강한 음식 먹어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이런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미션들에 나는 억압당하고 있는 것. 어떻게든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나. 즉 일기쓰는 나 자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기를 이렇게 정성껏 쓰는 이유가 나만의 픽션, 나만의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인 거 같다. 내가 왜 이런지, 지금 내 기분이 왜 이런지, 내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등등을 나에게 설명하는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나 자신이 받아들여진다. 이게 상징계 아닌가? 아님 말고.


라캉 책은 아직 읽지 않았고, 백상현 라캉 강의를 단 2개(반복 청취) 들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 논리 정연하여 종교로 삼고 싶을 지경. 도대체 내가 왜 이렇지,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하는 의문들의 답이 라캉의 욕망이론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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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을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몸이 가볍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10시간을 잤기 때문에 몸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주말 3일 동안 30시간을 잔 적도 많은데 그런 주말에도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덜 피곤하다, 적어도 졸리지는 않는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개운하고 가볍다. 몸이 없는 느낌이다. 2단 뛰기 30개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이런 적이 작년에도 있었다. <특성 없는 남자>를 읽으면서 뇌를 혹사시켰던 날의 밤에 나는 장르가 다른 숙면을 했다. 5권 세트를 다 샀는데 아직 1권에서 정차 중이다. 숙면을 위해서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 어제 읽었던 책은 <고독의 매뉴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의미의 간극이 많아 소리를 내면서 읽기까지 했으니 간만에 뇌가 혹사당한 것. 3주째 나는 고독과 고립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의 절반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동의하지 못하는 상태.  


내가 <고독의 매뉴얼>을 읽게 된 계기는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자크 라캉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맘에 드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라캉이 기독교 원죄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기에 받은 충격 혹은 모멸감 때문이었다. 대충 내가 이해한 바를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결여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 결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정도이다. 그래서 라캉을 검색해 보다가 백상현(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라캉 전문가인 줄은 몰랐다)의 <고독의 매뉴얼>을 구매하게 됨. <고독의 매뉴얼>과 문예출판사의 <욕망 이론> 2권을 결제했더니 자비로운 알라딘은 결제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서 배송완료해 주었다. 결여(결핍)가 완전하게 충족될 수는 없더라도 24시간 이내 배송이면 만족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사실 나는 심리, 정신분석 별로다. 지금 보니 칼 융의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옆에 꽂혀 있는 걸 발견. 읽다 만 것 같다. 결과론적 이야기에 불과하게 여겨져서다. 인간은 수 십, 수 만 가지 다른 이유로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같은 이유로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인데. 10명 중 3명이 같은 패턴의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머지 7명도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 짓는 게 내가 생각하는 현대 심리상담학(정신건강의학)이다. 


왜 조물주(신)는 인간을 원죄도 있고 결핍도 많은 어떤 것으로 만들었지? 시발 진짜 악취미.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동댕이쳐버린 건가(하이데거 ㅋㅋㅋㅋ)


권여선 신간 <각각의 계절>은 정말 재미있지만(왜 나는 60살 전후의 사람들에게 공감하는가 ㅠㅠ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무구>) 나에게 숙면을 선물해 주지는 않았다. 오지은 <당신께>도 내 마음을 토닥여주긴 했지만 숙면을 주진 않았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전적으로 나한테 손해를 덮어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

<각각의 계절> 중 <무구> / 권여선


고립은-고립되고 싶은 충동은-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고독은 우리를 보호패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 / 캐럴라인 냅



그들은 '무'를 보고 있으므로 고독하다. 고독의 절차는 이러한 응시의 고립을 창조적 사건의 시작으로 전환시키는 욕망에 의지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절차에서 무엇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고독해지는 것이며, 우리를 매혹시킬 사건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고독의 매뉴얼> / 백상현



솔직히 밑 줄 친 저 문장. 소리 내서 서너 번 읽지 않으면 이해 불가다.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적으로는 음...과속방지턱이 너무 많은 도로 같은 문장. 다시 말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불가하다는 것. 하지만 권여선의 단편 <무구>의 고독은 바로 이해가 되며, 캐럴라인 냅의 고립과 고독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익숙한 독서만 하고 지낸 건 아닐까 하는. 최근에는 전투적으로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낯선 생각으로 가득한 책,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장이 난무하는 책을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백조와 박쥐>를 읽으면서 '하 지능 낮아지네.' 했었다. 있으나 마나한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밥을 먹었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예뻤다. 휴대폰이 울렸다. 등등. 이런 책은 아무리 읽어도 뇌가 달구어지지 않는다. 


주말 3일간 30시간씩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낮동안 뇌를 혹사시키지 않아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한 길만 운전하고, 익숙한 업무만 하고, 익숙한 책만 읽고, 익숙한 영화만 보고. 이건 마치 외부자극이 없어서 발달을 제때에 못한 유아 같지 않은가! 


충분히 몸을 사용하지 않아서 선잠을 자는 아기처럼 나 역시 뇌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숙면을 못했던 걸지도. 


ps. 한나 아렌트와 자크 라캉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자극을 나에게 준 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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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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