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오랜 시간 나는 육체를 방임했다. 심지어 육체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니... 몇 시간씩 앉아서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주말 이틀간 소파에 누워서 16부작 드라마를 보는 것에 육체는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 먹는 즐거움(몸이 없으면 어떻게 먹냐고, 먹는 게 낙인데 하는 사람을 제법 봤다)에도 큰 관심이 없어서 더더욱 도대체 몸이 왜 필요한가 늘 물음표를 달고 사는 인간이었다.
"애초에 먹을 필요가 없다면 뱃속에 있는 소화기관이 필요가 없지. 그러면 질병 자체가 없어지는 거야. 장기 하나하나가 다 질병명이라고." 가 내 생각이(었??)다. 여전히 나는 우리 몸에는 너무 많은 장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라도 고장이 나게 되면, 운이 좋으면 걍 죽고, 운이 나쁘면 치료를 하면서 고통받으며 서서히 죽어가야만 하는 게 인간의 생로병사라고 나는 주장한다.
생로병사 사이에 어쩌다 있는 즐거움들이 태어날 이유, 살아야 할 이유가 될까? 전혀, 아니!!!
푸코는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지금 내 꼴을 보면 그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병들어 죽어가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라깡의 픽션 이론을 알게 되었다. 언어, 대타자의 불탄 영토, 핍진한 상태, 그 상태의 증상을 탐하는 쾌락, 내가 창조해 낸 나만의 상징계 등등 그 속에서 내가 즐거움(이걸 도파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탐할 때마다 인간(육체)은 병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방은 증상을 탐하는 것을 버리고 네가 걸어야 할 곳이 대타자의 불탄 영토일지라도 공백 속을 걸어라, 기꺼이 공백의 상태를 받아들여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kpop과 팟캐스트 속의 타인(이면서 나만 하는 지인들)이 주는 쾌락을 단박에 끊고 공백 속에서 지냈다. 와와!!!! 그랬더니 체력이 남아서 홈트를 하게 되었고, 홈트를 하게 되자 체력이 더 생겼고, 피곤하지 않았고, 낮 동안에 전혀 졸리지 않았고, 저녁에도 침대에 쓰러져 있지 않게 되고(저녁에 홈트를 함), 잘 시각(밤 10시)이 되면 신속히 잠들게 되었다. 추가적으로 최근에 한 혈액검사결과까지도 인상적으로 좋아졌다!
나는 내 병이 두려웠고, 끔찍한 수술 과정도 알고 싶지 않고 해서 내 병에 관한 그 어떤 유튜브 검색도 해보지 않았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용기를 내어 검색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병의 1번 원인은 노화. 그래서 나는 노화를 또 검색해 보게 되고,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교수를 알게 된다. 정희원의 모든 유튜브 영상을 다 봤다. 검색창에 정희원 교수 검색해서 새로 나온 영상도 찾아봤다. 이번 주에는 김작가TV라는 곳에 나왔다. 이 영상의 3부에서 나는 약간 실망했다. 마음 챙김과 번뇌 없는 상태가 중요하다고 했으면서 주식을 하신다고. 소비자본주의 경제원리를 공부하는 의미에서 하는 걸까? 수익은 덤일 뿐. 뭐 그런 건가? 돈에 대한 욕망이 인간 번뇌의 대부분 아닌지.
영상 속 말만으로는 부족하여 그의 책 2권을 냉큼 구입했다. 알라딘의 익일배송은 정말 엄청난 도파민! 사실 난 배송이 며칠 걸려도 상관없는데.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연관 추천 책으로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이 있었다. 일단 <자유 죽음>의 저자 장 아메리의 추천사가 있었고, 구매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희진도 추천사 씀. <자유 죽음>이 신간이던 작년 이 책을 구매한 나를 알라딘 알고리즘이 놓칠 리가 없지. "너 <자유 죽음> 샀지? 이 책도 안 살 수가 없을 걸." 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생로병사를 받아들인 입장에서 '죽음'이 매우 궁금하고, 죽음이라는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죽겠다, 죽고 싶다 아님. 반출생주의에 200% 동의한다. 여전히 왜 사람이 부모가 되려고 하는지 이해불가.
그래서 <감시와 처벌>을 잠시 제쳐두고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를 읽었다.
더 편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예컨대 더 비싼 의자를 사서 오래 앉아 있거나 가까운 곳도 차량을 타고 이동하려고 할수록 미래에 더 많은 고통을 얻는다. 사실 매우 비싼 의자를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기업의 의도는 건전하지 않다. 몸이 망가질지언정 비싸고 편안한 의자에 더 오래 앉아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 정희원>
설마 비싼 의자라 함은 허멀밀러를 말하는 건가? 허먼밀러냐 스트레스리스 사무용이냐 사이에서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일단은 2년 넘게 식탁의자를 사용하는 중인데(삼성이 직원들에게 제공한 의자가 시디즈 T80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난 시디즈 T80이 내 몸에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생집에 있어서 사용해 봤는데 맘에 들지 않았다.) 저 문장을 읽고 나서 그냥 계속 식탁의자(일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의자에서는 내가 내 코어 힘으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게 건강에 더 좋단 말로 해석되었기 때문.
롤스로이스의 뒷좌석과 허먼밀러 의자로도 소용이 없는 불편한 몸과 마음을 갖느냐, 두 다리만으로 충분한 몸과 마음을 갖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 정희원>
음 역시 허멀밀러였다. 넷플릭스 메탈리카 다큐에서 봤는데 메탈리카 작업실 의자 전부가 허먼밀러였음. 그때도 얼마나 견물생심이었던지!!! 내 거실에는 3인용 소파(주로 드러 눕는 용)와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가 있다. 문제의 1인용 리클라이너는 스트레스리스 제품으로 나는 사이드 테이블(제품 크기와 가격을 보면 그냥 호구인증. 일룸에서 어린이 책상 세트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아이패드 정도를 놓을 수 있는 초소형 테이블을 사는 것)까지 구매했다. 그야말로 스트레스리스 상태에서 편안하게 기대어 앉아(누워) 책을 읽거나 맥북질을 할 생각이었다. 이 안락하고 편안 의자에서 내 영혼(라깡적으로 말하면 무의식, 정희원식으로 말하면 도파민에 찌든 육체)은 쾌락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인간(육체)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 정희원이라면 "당신의 내재역량이 줄었습니다. 가속노화가 매우 빨리 진행되고 있습니다."라고 진단했을지도.
특별히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화벨이나 메신저 알람이 울릴 것을 기대하면서 약간 긴장하고 있는 상태가 그 예다. 그런데 끊임없이 스마트폰 알림이 시달리고, 메일함이나 메신저, 웹브라우저 여닫기를 반복하는 현대인의 뇌에서는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정작 집중해야 하는 일에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의력이 분산된 멀티태스킹 상태, 즉 마음 방황 상태가 반복되면서 쉬어도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 정희원>
알람이 나를 방해하는 것이 싫어서 나는 모든 알람을 다 꺼둔다. 알람이 울릴 때 확인하지 않고, 내가 확인하고 싶을 때 확인한다. 그리고 가급적 내 생활을 스마트폰 앱에 기록하지 않으려고 한다. 종이(중고생용 줄공책과 다이어리)와 볼펜, 형광펜 그리고 요즘엔 다꾸 스티커 ㅎㅎㅎ를 사용한다. 모든 중요한 것들은 공책에 기록해 뒀다. 카카오 데이터 센터에 불이나도 괜찮다. 나에겐 내 공책이 있으니까. 그리고 백업용 외장하드도 추가로 사용(웹하드 불신). 남동생은 최신형 아파트에 살면서 모든 가전제품을 홈네트워크로 제어하는데, 나는 그게 정신 건강에 좋은지 늘 의문이었다. 틈이 생길 때 로봇청소기가 집청소를 제대로 했는지 스마트폰 앱으로 확인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으냐 말이지. 나는 로봇청소기도 안 쓰는데 청소기도 사용 못할 정도로 피곤하다면 그때는 정말 요양병원 아니겠는가 싶어서.
남동생이 사는 최신형 아파트는 폭우에 물이 새는 고오급 브랜드 아파트. 내가 내 힘으로 지은 내 집은 적어도 물은 안 샌다. 누수는 근본 중의 근본인데, 스마트 옵션과 누수를 교환한다는 게 나로서는 납득이 안 되지만, 이미 서울 아파트 병에 걸려버린 남동생은 남들이 알아주는 동네의 브랜드 아파트에 산다는 것에 만족하여 모든 근본적인 문제에 눈감아 버린 듯하다. 조금의 여지를 준다면 누수인 곳은 주로 주차장 같은 공용공간이라 별 관심 없을지도. 그리고 남동생 소유의 집도 아니고 세입자니까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하긴 나도 제정신은 아닌 게 마찬가지여서 "디올 가방 보다 스트레스리스 의자가 더 저렴해. 디올 가방 하나 안 사고 허먼밀러 사는 건데."라고 했을 때 남동생왈. "디올 가방이든 허먼밀러 의자든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차라리 아이맥을 사고 스타일러를 사라. 전자제품이 남는 것!"(전자제품과 장비에 관해서는 다다익선, 거거익선주의자)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전자제품이 신체와 자연을 대신하는 것(특히 빨래 건조기)에는 불만 많은 사람. 육체무용론자지만 기계에 의존하는 인간의 생활은 싫다. 반대로 남동생은 육체옹호론지만 몸을 귀찮게 하는 모든 활동은 기계에게 외주를 주고 몸은 즐거움만을 경험해야 한다는 주의. 그래서 육체를 옹오하게 된 건가? 하지만 남동생과 같은 생활방식은 가속노화의 지름길!!
스마트기기로 인해 인간의 뇌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내가 귀에서 에어팟을 빼고, 자연의 소리만 듣기 시작하자마자 체력이 남아돌아서 홈트를 하게 된 것으로 증명되었기도 하고.
새벽 5시 기상 - 주방에 가서 오트밀에 물을 부어 둔다 - 거실에 있는 요가 매트를 침실로 가져온다 - 모닝홈트 10분을 한다 - 머리 감고 말리기 - 주방에 가서 샐러드를 만들고 먹는다(맛에 관심이 없어서 올리브유, 발효 식초 뿌리고 그냥 초식동물이 풀을 먹듯 먹는다) - 불려둔 오트밀을 먹는다(난 정말 맛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그냥 물에 불려 먹음) - 출근 준비(화장, 옷입기), 출근, 업무보기, 퇴근 - 저녁 준비하고 먹기 - 바로 설거지하고 치우기 20분 정도 걸림 - 홈트 1시간 또는 산책하기 - 샤워하고 - 홈트 다이어리 쓰기, 매일 1개씩 다꾸 스티커 붙이는 즐거움!! 8mm 반투명(즉 볼펜으로 쓴 글씨가 선명하게 비치는) 7색(요일별) 원형 스티커(딱 3주 치가 있었다)를 다 사용했는데, 다시 사려고 여기저기(10x10 등등) 검색을 해봐도 못 찾음. - 책 읽다가 22시가 되면 잠.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였나에서 달릴 때 아무 생각도 안 한다고 했는데, 내가 그렇다. 홈트 할 때 아무 생각도 안 한다. 그냥 동작을 계속할 뿐이다. 스쾃 1분 버티기 같은 걸 할 때 아무 생각도 안 한다. 그냥 버틴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서(소파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다 싶을 때 1인용 리클라이너에 앉고 너무 오래 앉았다 싶으면 다시 소파에 눕곤 했다. 아 진짜 왜 이런 방탕을 했을까. 내 인생 유일한 방탕은 운동을 안 한 것. 하지만 건강할 때는 건강을 지키는 행동을 하는 게 불가능하니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깨닫고 고친 게 어디냐. 매사가 전화위복임을 명심 또 명심하자) 넷플릭스를 하염없이 보던 내가, 거실 테이블을 치운 자리에 요가 매트를 깔고 넷플릭스를 보던 TV로 홈트 영상을 보면서 운동을 하게 되는 날을 맞이할 줄이야!!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일단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동 시작하고 나서 넷플릭스를 안 봤다. 볼 시간이 없고, 보고 싶은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운동을 하게 된 지 3주가 좀 지났는데(누가 보면 3년 정도 한 줄) '와, 이게 진짜 건강한 고독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의 연락도 기다리지도 않고(물론 연락이 오지만, 안 오는 게 더 좋고), 그 어떤 것을 사고 싶지도 않고(특히 위치재), 쉽게 말해 번뇌가 없달까? 뭔가를 욕망하지 않는달까? 유일한 욕망은 위에 적은 새벽 5시에서 밤 10시 사이의 루틴을 지켜나가고 싶다는 것 정도. 이 하루를 실천하고 다이어리에 실천 스티커를 붙이겠다는 아이 같은 욕망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 루틴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채워져서 무엇 하나 더할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완벽한 하루, 그 하루가 주는 충만함만 가득할 뿐이다.
육체무용론자인 나 -> 라캉의 상징계와 무의식을 알게 됨(무의식이라도 행복해서 다행이다라고 합리화함) -> 증상에 안주하지 않고 공백을 걷기로 한 후 왜인지 모르게 육체로 걷게 됨 ㅋㅋㅋㅋㅋ(진화론이라면 이거슨 돌연변이의 출현으로 인한 진화) -> 활력이 도는 육체를 가지 됨 -> 영혼은 건강한 고독상태에 진입(번뇌가 거의 없다, 아직은)
사실 내가 운동을 거의 안 한 시기는 최근 5년 동안이다. 가장 열심히 했어야 하는 시기였는데, 골든타임을 놓친 것. 20대 때는 10km 마라톤을 꾸준히 한 적도 있다. 주중에 달리기 연습하고 주말에 여기저기 대회 참가하고. 요가를 꾸준히 6년 넘게 했다. 그 요가를 그만둔 게 2018년. 운동을 안 한 5년(그중 3년은 코로나였고 2019년에 거대한 TV를 거실벽에 걸고 본격 넷플릭스 좀비가 되었다.) 사이에 나이가 나이인지라 가속노화가 진행되었고, 결국 대학병원에 주기적으로 가서 혈액검사를 하고 CT를 찍어야 하는 병들어 가는 육체가 된 것이다!!
어떤 알고리즘에 이끌려 나는 노화, 노쇠 전문가 정희원에게 도달했는데, 이 사람의 말 중 제일 충격적인 것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요양병원에서 콧줄을 끼고 살 것인지, 90세가 되어서도 혼자 힘으로 걷고 생활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 하는 말이었다. 나는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 하며, 죽을병에 걸려 존엄을 잃었을 때는 안락사를 하는 것만이 인류애라고 주장했고 믿었다. 그래서 생활습관을 고칠 생각을 안 했고, 아직 건강할 때 더더 즐겁게 좋아하는 것을 최대한 많이 하자 생각했다(하지만 이것도 다 내 무식의 소치. 과학에 의하면 쾌락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 그래서 디올을 사고, 마칸을 사고 싶어 했고, 비싼 소파에 누워서 넷플릭스를 탐했다. 건강수치가 계속 나빠져도 받아들였다. 오히려 건강할 때 더 즐기자, 완전 막가파였다. 죽으면 죽지 뭐 했다. 아침 공복에 스타벅스 조각케익과 커피를 먹은 적도 종종 있다. 죽기 전에 마칸이나 사자 싶었다. 한편으로는 죽을 때 죽더라도 죽음이 뭔지나 알아보자 싶어서 죽음에 관한 책을 탐했다. 한심하고 어리석지만 이 과정이 없었다면 최근 3주간의 성스러운 생활을 하는 나 자신에 도달할 수 없기에 이 방탕의 과정도 다 전화위복이라고 합리화 처리했다(라캉식으로 말하면 나만의 픽션 만들기!). 나의 이 전화위복의 합리화 능력을 나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웬만해선 우울하지 않다.
건강식 먹고, 홈트하고, 잠 자기 전에 <감시와 처벌> 읽는다.
이 정도면 성직자보다 더 성스러운 생활 아닌가!!
p.s. '영혼은 신체의 감옥이다.' 이 말이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뭘까? 영혼의 대부분은 무의식, 그 무의식은 어떤 증상을 탐하고, 그 탐함으로 인해 육체는 병든다. 증상을 탐하는 것이 주는 즐거움(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백-운동-고독-번뇌 없음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