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최악이라고 울부짖던 한 독일 심사위원은, 며칠 후 20년 동안 다녀본 영화제 중 제일 즐거웠던 영화제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수긍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말도 안 되게 재밌었다. 도로 사정이 엄청나게 안 좋은 디카에서 차가 막히면 이란 감독은 음악을 틀어달라고 했고, 나는 안전벨트를 뽑으면서 춤을 췄다. 영화나 예술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각종 잡다하고 쓸데없는 농지거리를 내내 주고받으면서, 영화제가 원하는 자리마다 우르르 몰려가서 사진 찍히고, 좋은 식당에 가서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서 다녔다.

(중략)

세수만 대충하고 조식뷔페에 아무렇게나 내려가서, 내가 너무 좋아하는 서남아시아풍의 볶음국수를 먹으며 여유 있게 아침을 시작했다. 방을 매일 청소되고 정돈되었으며, 무엇도 결정할 필요 없이, 그냥 놀다가 먹다가 수다떨다가 하면 하루가 완벽히 완성되었다. 인도에 가본 친구들이 방글라데시는 더할 거라며 각종 물갈이나 배탈을 걱정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질 나쁜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어서 한국에서 항상 달고 살던 소화불량마저 완전히 잊고 지냈다.

오히려 이렇게 가파른 삶의 낙차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장염으로 응급실에 가면서 여실히 확인받았다. 방글라데시에서의 2주 동안 어떤 부대낌도 보이지 않았던 나의 몸은, 한국에 돌아와서 먹은 한끼에 아주 심한 장염을 일으켜 내 장기의 솔직함을 투명하게 증명하였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 이반지하>


어떤 사람이 Tokyo 여행을  Kyoto로 가서 신나게 여행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필요한 생존전략은 이런 방식이다. 교토나 도쿄나! 신나고 즐겁게 여행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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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법칙에 따라 그냥 도는 것뿐이다. 지구상에서 물체가 1초에 4.9미터 자유낙하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4.9라는 숫자는 어떤 가치를 가질까? 4.9가 아니라 5.9였으면 더 정의로웠을까? 진화의 산물로 인간이 나타난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공룡이 멸종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딱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내용)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떨림과 울림 / 김상욱>



나는 상상 속에서 행복하고 싶지 않다. 

나는 물리적으로 행복하고 싶다. 

나는 뉴튼의 물리법칙처럼 행복하고 싶다. 

나는 양자역학적으로 행복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망상 속에서 행복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망상이나 상상 속으로 도피하느니 차라리 현실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


좋게 말해서 상상이지 따지고 보면 망상 아닌가.

상상 혹은 망상이 한 인간을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뜨리는지는 난 어려서 동화책에서 배웠다.

<성냥팔이 소녀> <플란다스의 개>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불에서 크리스마트 만찬을 보며 굶어, 얼어 죽고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신의 은총 속에서 굶어, 얼어 죽는다.


내가 왜 점과 운세를 보지 않는지

내가 왜 주식 같은 돈놀이를 하지 않는지

내가 왜 자식을 낳지 않는지

내가 왜 신(종교)를 믿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망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건 배가 고픈 것이고, 겨울 대리석 바닥은 차갑기 때문이다.



굳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위상수학을 현실에 적용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눈이나 얼음을 사랑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동족 인류에게 애정을 갖기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 편이 내게는 더 쉽다. 그렇지만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그걸 방향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자의 직관이라고 해도 된다. 뭐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기초 위에 서 있고, 더이상 나아가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내 삶이 아주 잘 꾸려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절대 공간을, 적어도 한번에 한 손가락으로라도 붙들고 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페터 회>



자연과 우주는 무심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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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18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즘 한방울 탄 것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는동안은 즐거우셨기를.

먼데이 2023-01-19 16:32   좋아요 2 | URL
뉴턴의 물리학과 위상수학이 특히 맘에 들었어요.
양자역학에 대해서 실컷 읽었지만 뉴턴이 좋아요!

인간이 경이롭다는 것에는 동의가 안되는 ㅎㅎ
 

위상수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입은 옷들에 대해 안과 밖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귤같이 껍질을 까야 내용물을 볼 수 있는 경우 안과 밖이 존재한다. 옷은 그냥 순서대롤 포개어놓은 거다. 단지 옷이 충분히 늘어날 수 없기에 안과 밖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늘어난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아. 신발을 신은 채로 양말을 벗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위상수학의 입장에서는 (뚜껑이 없는) 콜라병과 A4 용지는 같다. 콜라병의 주둥이 부분을 좌악 벌려서 아래로 내리며 펼치면 편평한 판같이 만들 수 있다. 그런 다음 두께를 줄이고 적당히 사각형으로 만들면 A4용지같이 된다.

(중략)
인생을 살아가며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위상수학적 구멍의 개수에 비유할 수도 있다. 구멍의 개수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변형도 받아들이며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위상수학적으로는 모두 동등한 삶이다. 삶의 겉모습을 몇 배로 늘리는 것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가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일까? 위상수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떨림과 울림 / 김상욱>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다. 나는 숙면하고 싶어서 낮 동안 내 몸과 뇌를 혹사시킨다. 수면의 양과 질 둘 다를 추구한다. 그래서 숙면하지 못했다 싶은 날에는 정오 즉 태양이 내 머리 위에 있을 때 햇빛을 섭취하기 위해 태양 아래에 서 있는다. 


나에게 구멍이 1개 있다면 그것은 잠일 것이다.

나에게 구멍이 2개 있다면 그것은 잠과 책일 것이다.

나에게 구멍이 3개 있다면 그것은 잠과 책과 햇빛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구멍 3개면 족하다.



불면증이 없다는 것이 나의 자부심이다.

나는 잘 잔다.

어디서든 잔다.

어느 시간에도 잔다.

잠이 오면 어느 구석에 숨어서 잔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없다. 

애초부터 나는 야망, 성취, 부, 명예 등 현대인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 없었다.

지금도 그런 걸 이룬 사람을 보면 '아 엄청나게 자신을 학대했겠구나.' 

하는 생각말고는 딱히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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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고 귀여운 생각만 하겠다고 한지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나는 책이 아닌 책 리뷰를 읽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페미니즘 책 리뷰를 읽고 있었다. 귀여움 따위 ㅋㅋ 그래도 노래는 소녀시대가 지겨워져서 시스타를 듣다가 시스타가 지겨워서 여자친구 듣다가 지금은 트와이스다.


책 리뷰 읽다가 마침 지난 5월 사서 비닐포장만 뜯은 채로 몇 권 안되는 페미니즘 책 코너(사고 읽지는 않는 책들이 많다. 나는 페미니즘 책은 사긴 하는데 읽지 않는다)에 보관한 하고 있던 <제2의 성>을 펼쳤다. 


연말, 연초에 행복 타령을 했지만 사실 행복에 별 관심없다. 그냥 조금만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혼자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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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15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마이걸>입니다. <나의 지구><살짝설렜어><돌핀> 좋아합니다.
저도 먼데이님 서재 들어오면 정신차리지 않으면 다 읽게되던데요?
그런데... 남의 일기 읽는 거 부담스러워하실까봐 정신을 차리고 애써서 안.읽.곤. 했습니다.
이제 우리 친구된 기념으로... 참지 않고 다 읽을 거예요. 크아앙!

먼데이 2023-01-16 14:36   좋아요 1 | URL
저도 돌핀은 많이 들었어요.
어차피 공개 일기니까요. 비공개도 엄청 많아요 ㅎㅎ
 

누구 하나, 둘, 셋, 넷 정도 죽여버리고 싶을 때마다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를 봤다.

"이제 신을 만날 시간이야" 빵빵빵.

요한 요한슨이 죽은 이후로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시큰거렸다.


어제도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가 절실했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찾아서 클릭을 했더니 마침 내가 좋아하는 장면 다은 씬이 재생되었다 ㅋㅋ

나란 인간 ㅋㅋ


이 영화를 보면서 카톡 중독자처럼 카톡질을 하고 있는데

친구가 그런 영화보면 톡 안 할 거라고 했다.

그런 걸 자꾸 보고 읽으니 내가 자꾸 예민해지는 거라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지 아냐고

그냥 남들처럼 단순한 거 보고 웃고 맛있는 거 보고 하라고

우울한 생각이 들 때마다 쓰잘데기 없는 카톡이나 보내라고.

얼마든지 톡해준다고 했다.


이랑, 오지은 노래는 그만 들어야지

대신 소녀시대노래나 줄창 들어야지.

소녀시대가 편한 나이. 요즘 아이돌(뉴진스, 아이브 등)은 역시 덜 편해서.



책도 그만 읽을 거고(정지돈, 김사과 이런 거 읽으면 정말 예민해짐)

ebs에서 고교영어특강이나 볼 거다.

내 평생의 숙제 영어.

그런데 또 요즘 선생님은 편하지 않아서.

이지민 선생님 강의 찾아 듣는 나란 인간 ㅋㅋㅋ



모든 상황을 영어로 번역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내 영어 실력으로 생각을 하면 사실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thanks for dinner.

이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7세 수준의 문장력으로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귀엽고 행복한가!!



뇌를 속여볼 생각이다.

나는 귀엽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영어공부, 소녀시대, 쓰잘데기없는 카톡으로 나는 귀엽고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날 거다.


체홉 나는 모르는데요.

이랑은 누군가요?


p.s.

영화 <3000년의 기다림>에는 카사노바 지니가 나온다. 

소원을 들어준다면서 여자들을 꼬시는 지니가 나온다.

왜 난 이 영화가 이렇게 해석되는건지 ㅋㅋㅋㅋㅋㅋ

그 무엇에도 의미부여 따위 하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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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13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카리오빵야빵야. 하하. 저는 사는 게 너무 무거울 땐 읽기 아주 어려운 책이나, 이과 책을 읽어요.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먼데이 2023-01-14 10:53   좋아요 2 | URL
김상욱도 <떨림과 울림>도 금시초문이예요. ㅎㅎ
검색해 보니 이과책이네요.

이과책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메모해 둘게요.

추천 고마워요!

댓글을 주고 받는 재미란 게 이런 거군요. 공쟝쟝님 덕분에 새로운 재미를 느낍니다.





공쟝쟝 2023-01-14 13:57   좋아요 1 | URL
네 130억년전 별에서 만들어진 우리 😌 저 같은 문돌이도 읽을 수 있었으니 먼데이님께도 좋을 거예요. 삶이 어려우면 우주를 생각하면 좀 저는 제 경우는 ㅋㅋㅋ 내 문제가 작아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