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다. 운명을 파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잘 단련된 서퍼가 파도를 타고 넘는 것을 성공적으로 운명에 순응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내 의지로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기보단 변화된 상황을 '이것은 기회요, 전화위복이다'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최근에 그런 상황 변화 2개가 있었고 나는 상황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으며 결과적으로 더 나은 생활이 되었다. 

변화1.
회사는 구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회사 앞 도로는 모든 지점에서 좌회전 금지다. 사거리에서도 좌회전은 무조건 금지다. 유턴도 없다. 오직 P턴만 가능하다. 즉 귀찮게 둘러 둘러 다녀야 한다는 것. 회사 앞 메인 도로는 최소 7km 이상이 직진만 가능하다. 그 긴 거리의 중앙선에는 중앙선 분리대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장벽처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분리장벽처럼, 휴전선의 철망처럼 빈 틈 없이(유일한 빈 틈은 횡단보다)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약 2~3주 전 그 중앙분리대가 뽑히고, 차로가 변경되었다. 왕복 4차로가 왕복 5차로가 되면서 좌회전 대기 차로가 생겼다. 좌회전 신호등이 생겼다. 생긴 이유는 회사 바로 옆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공사가 이제 완료 단계에 있으며 늦여름부터 입주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좌회전을 위한 1차로 추가는 아파트 입주민들을 위한 것. 1차로가 추가되면서 인도는 아파트 쪽으로 밀려났는데 아마도 그 인도가 아파트 소유의 땅일지도 모르겠다. 아님 말고. 
새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고 입주민 차량이 많아지면 좌회전 신호 대기가 길어지겠지만 지금은 이 좌회전 신호를 사용하는 차량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길로 다니기로 했다. 
새 출근 경로는 기존 출근 경로와는 9할이 다른 길이다. 기존 출근길의 장점은 진출입은 막히지만 일단 진입하고 나면 평균 시속 100으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 전용길이라는 점, 다만 경로가 길다. 새 경로의 장점은 기존 경로보다 4km 단축된 거리와 어느 시각에 출발해도 절대 막히지 않는다는 것!!!! 기존 경로와 새 경로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기존 경로는 어쩔 때는 속수무책으로 정체라서 어쩔 때는 15분 이상 더 걸리기도 하기에, 안정적인 출근 시간을 확보하기에는 새 경로가 훨씬 좋다. 하지만 장점만 있을 거 같은 새 경로의 치명적인 단점은 2가지인데, 2.6km 사이에 과속방지턱이 17개나 있는 있는 도로(?)를 주행해야 한다는 것과 그 길의 끝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그 흙탕물이 차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를 눈앞에 두고도 6~8분 정도 더 걸리는 P턴을 하지 않고 좌회전해서 30초 만에 회사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보다 더 큰 쾌감과 만족감을 주었기에 나는 새 경로를 택했다. 시속 100km로 주행하는 것과 과속방지턱 17개 중에서 과속방지턱 17개를 선택한 것의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이 새 경로, 더 정확히는 새로 생긴 좌회전이 나에게는 그저 주어진 선물처럼 여겨졌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을 정도로. 이 길이 선물처럼 주어졌으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만 더 출근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화2.
시력이 매우 매우 나쁘다. 라식수술의 부작용이 두려워 안티라식 카페에 가입하고 모든 부작용을 다 읽어봤다. 이 모든 부작용 알고서도 라식수술이 하고 싶어 진다면 수술을 하자는 생각에서 안티라식 카페에 가입한 것. 
나는 아직도 시력교정수술은 하지 않고 원데이렌즈와 안경을 번갈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식수술의 부작용을 감당하는 것보단 안경의 불편함을 감당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서.

평소 안경과 원데이렌즈 착용 비율은 1:1
그랬던 것이 코로나 상황 하에 마스크 의무 착용이 되면서 안경과 원데이 렌즈 비율은 0:1이 되었다.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기 전까지 나는 외출할 때는 단 한 번도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마스크 틈새로 압축되어 삐져나오는 뜨거운 숨이 안경 렌즈를 뿌옇게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안경이 뿌옇게 되는 것도 타인의 안경이 뿌옇게 되는 걸 목격하는 것 둘 다 힘들었다. 그 광경이 추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늘 원데이 렌즈를 끼고 다녔고, 안경은 집에서만 꼈는데 가까운 글자만 봤기에 시력이 떨어졌음을 인지할 기회가 없었다. 어쩌다 잘 안 보이면 '설마 노안?' 하곤 했다. 최근 건강검진을 했는데, 안경을 끼고 시력을 측정했더니 0.5였다. 이 안경은 전국민 코로나 지원금으로 받은 지역화폐로 맞춘 것이었다. 나라에서 받은 용돈으로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니 신기해하면서. 그때도 시력이 약간 떨어져서 안경 도수를 더 높인 거였는데. 
3년이 지난 지금, 시력도 떨어졌겠다, 마스크 안 껴도 되겠다, 새 안경을 맞추기로 했다.  기분 전환으로 테도 바꾸고 싶어서 젠틀몬스터에서 안경을 샀다. 내가 젠틀몬스터를 끼는 이유는 국내 브랜드라서 그런가 한국인의 얼굴뼈(광대와 콧대 사이의 문제)에 잘 맞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

3년 전에 갔던  안경점에 3년 만에 갔다. 나는 학생들 전문으로 지나치게 저렴하게 운영하는 안경점은 가지 않는데, 그런 곳에 내가 원하는 렌즈가 있을 거 같지 않아서이다. 
시력을 측정했다. 역시나 떨어져 있었다. 노안은 아니었다. 
- 렌즈는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했던 것과 같은 걸로 할까요? 
- 그거 보다 더 좋은 거로 하고 싶어요.
- 더 좋은 거는 수입 제품으로 1개 있어요. 21만 원이고요. 저번과 같은 건 11만 원이고요.
- 그래요? 안경 맞추러 올 때마다 렌즈가 업그레이드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아니네요. 항상 보면 2~3년 전에 제일 비쌌던(좋았던) 렌즈가 두 번째로 좋은 렌즈가 되어 있고 제일 좋은 신상 렌즈가 있던데 그게 아니네요. 가격도 다운되어 있고 하던데. 3년 전에 21만 원이던 렌즈가 주로는 11만 원이 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그대로네요. 그러면 제일 좋은 거 해주세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 체험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새 테에는 21만 원짜리 제일 좋은 렌즈를, 헌 테(3년 전 젠틀몬스터와 블랙핑크 제니가 콜라보해서 출시한 제니 안경)에는 11만 원짜리 렌즈+제일 짙은 색상추가(선글라스로 사용하려고, 색추가 비용 2만 원)로 주문했다. 안경 렌즈를 주문한 날에는 '괜히 10만 원 호갱 당한 거 아닐까? 큰 기능 차이도 없는데 무조건 제일 좋은 거만 하려는 부자들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렌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근시교정렌즈는 망막에 맺히는 사물의 각도를 좁게 해서 사물을 작게 보이게 한다. 도수가 높을수록 각도는 좁아지고 사물은 더 작게 보인다. 이게 내가 이해한 근시교정 원리다. 그래서 안경을 끼면 내 세계는 축소된다. 한글 11포인트가 9포인트로 보인달까? 32인치 모니터가 30인치로 보인달까? 시력이 더 나빠졌으니 이제 내 세계는 더 축소되겠구나 ㅠ 내 아이폰14 프로는 이제 아이폰 se 사이즈가 되겠구나 흑흑했는데, 21만 원짜리 렌즈는 사물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았다!!!!!! 같은 도수의 11만 원짜리 렌즈와 바로 비교할 수 있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다. 두 안경을 번갈아 껴보면서 비교해봤는데 차이는 확실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21만 원짜리 렌즈가 좀 더 무겁다는 것 정도. 하지만 축소왜곡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장점 앞에서 조금 더 무겁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가치가 있다. 나는 축소왜곡이 더 생기는 것이 싫어서 도수를 올리지 않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둘 다 체험해 보고 둘 중에서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하도영이 운전기사에 100만 원이 넘는 와인을 주면서 하는 말처럼
"편의점에서 1만 원짜리 와인 사서 마시고 난 후에 이 와인을 마셔봐요. 그러면 이 와인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될 테니."
안분지족, 무지가 가져다주는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
분명 세상에는 내가 느끼는 현재의 불편함(축소왜곡 같은)을 해결해주는 것이 있는데, 
그걸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안분지족하는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면?
영화 <기생충>의 돈이 구김살을 펴 주는 다리미라던 충숙의 대사가 생각났다.


결론.

새 출근 경로가 생긴 것도, 축소왜곡이 없는 렌즈를 맞추게 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단지 상황을 받아들인 것의 결과였을 뿐이다. 새 출근길은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나에게 아침에 더 늦게 일어나도 되는 상황을 선물해 주었다. 새 안경 렌즈는 비록 가격은 비쌌으나 나에게 축소왜곡이 없는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원데이 렌즈는 다 좋은데 안구건조를 더 강력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서 나는 원데이 렌즈와 안경을 1:1로 착용했던 것이다. 치킨반반 같은 느낌으로.

나는 내 의지와 상황이 일치할 때 행동하는 편이다. 의지가 강해도 상황이 별로면 행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험이나 도박 따위 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카드 게임에서 내 손에 들어온 패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이 패는 언제 써야 할까? 분명 패의 쓰임이 있을 것이고, 이 패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라고.

지금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패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이것이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를 궁리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패들이 일으키는 변화의 대부분을 전화위복으로 생각해 버리는 편이다. 어떤 (나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으로 인해 주로는 내 행동이 변하게 되는데, 대체로 그런 식의 행동 변화가 생활을 더 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ps.
나의 출근길에 좌회전 차로라는 지름길이 생김으로써 나는 아침잠을 확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름길이라는 선물을 얻어 <더글로리>의 문동은처럼 신나 하는 이때, 나로 인해 지름길 사용을 금지당해 같은 층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둘러 다녀야 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내 눈에 띄지 마. 니가 피해 다녀. 니가 돌아다녀."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동선이 꼬이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 꼬인 동선을 하루에도 수 차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 괴로울 것이다. 그 꼬인 동선을 이용할 때마다 짜증이 치솟을 것이다. 그 꼬인 동선은 어금니 사이에 낀 콩나물, 눈동자야 착 달라붙은 속눈썹, 손톱 아래 가시 같은 불편함일 것이다. 사소하지만 미치도록 불편한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찾자면 모기에게 발바닥을 물린 것 같은, 가려워서 긁으면 더 가려워 미칠 것 같은 불쾌. 하지만 네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은, 이 패는 또 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건 또 뭔지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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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즐겨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을 보면 침샘에서 침이 솟구치는 것처럼 사람을 보면 사회성이 흘러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인데 굳이 부족한 사회성을 끌어모아서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 


오늘 웃긴 얘기를 들었다.
알베르토(가명)가 나에게 "너 같은 사람은 혼자 지내야 해. 너 사회성이란 게 있어? 사회생활이 돼? 그러니까 니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지. 혼자 책이나 읽고 있지" 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미 혼자 지내고 있는데? 주변에 사람 없는 게 어때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처럼 무리생활을 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거고, 나는 그 반대라서 혼자 지내는 건데. 혼자 있는 게 쉬운 줄 알아? 적어도 정신력이 강하니까 혼자 지내는 거야. 나약한 인간은 혼자 있고 싶어도 혼자 못 있어. 알기나 해? 사회성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고 했더니 알베르토는 "너 사람이랑 대화가 돼? 너는 소통불가야. 벽이야. 거대한 벽. 사람들한테 물어봐. 다 니가 이상하다고 하지."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 그럼 양자역학 같은 건 다 이상한 거겠네? 다수가 이해하지 못 하니까. 자본론이나 헤겔철학 같은 것도 다 이상한 거겠네? 다수가 이해 못하니까. 대화의 정도가,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인기가요 순위 매기듯이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니가 이해 못 한다고 해서 나에게 소통불가라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도 소통불가인 건 마찬가지 아닐까?" 라고 했더니 알베르토는 나에게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한 대 칠 것 같은 행동을 했다. 그래서 나는 에어팟을 귀에 꽂고 kpop를 들었다. 
알베르토는 태양인일지도.

알베르토는 매우 이상하다. 나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서 찾아와서 엄청난 말을 쏟아내고 가곤 한다. 나는 들어준다. 다만 수용하지 않을 뿐. 그랬더니 오늘은 나더러 사회생활이 가능하냐 등등의 반응을 보였다. 내가 좀 맑은 눈의 광인 같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하긴 하는데, 이 점이 상대방을 확 돌게 하는 거 같다. 살면서 알베르토처럼 말문이 막히면 쌍욕, 인신공격, 육체적 위협을 하는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알베르토는 "너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냐? 차라리 욕을 해. 그게 낫다." 라고 했다. 

알베르토는 다시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나라면 싫은 사람한테 와서 1시간 넘게 말을 쏟아내고 가진 않을 거 같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알베르토가 처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와 친해지고 싶은데 내가 친하게 지내주지 않으면 꼭 사회성 부족, 친구 없지?, 성격 진짜 이상해, 또라이라고 한다. 나는 사람한테 저런 말하지 않는다. 그냥 무반응, 무시해버린다. 

친화력(사회성)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그저 공중도덕이나 교통법규 잘 지키고, 내 할 일 성실하게 하고, 세금 내고, 가끔 내가 좋아하는 디올이나 사고, 영화나 책 감상하면 그만인데? 사람이랑 대화하는 거 보다 혼자 일기 쓰는 게 더 좋은데. 나는 종종 가족, 지인 등등이 나를 자신들이 소유한 희귀템 정도로 여긴다고 느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사고방식이 안드로메다인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하면서 자신의 인맥의 깊음을 과시하는 거 같다는 느낌.

p.s. 도대체 책 읽는 거랑 혼자 있는 거랑은 또 무슨 상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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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썼다. 지금 필체를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글자를 작게 썼다. 종이가 떨어질까 두려웠다. 일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내게 밀려든 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종이에 몇 마디 긁적인 것 뿐이다. 침춤 호가 가라앉고 일주일쯤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일기에는 날짜나 순서를 적은 숫자가 없다. 지금 보니 시간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겠다. 며칠, 몇주일이 한 장에 기록되어 있다. 뭘 기대하고 있는지 적혀 있다. 일어난 일과 느낌에 대해, 뭘 낚시했고 뭘 놓쳤는지에 대해, 바다와 기후에 대해,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리처드 파커에 대해, 하나같이 굉장히 현실적인 내용이다.

( 38페이지 중략)

소용없다. 오늘 난 죽는다


오늘 죽을 거야.

난 죽는다.


이게 마지막 일기였다. 그후에도 계속 버텼지만 기록하지는 못했다. 일기장의 구석에 지렁이같이 눌린 자국이 보이는지? 나는 종이가 모자랄 걸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먼저 떨어진 것은 펜이었다.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4월에는 운동을 한 달 정지시켰다. 그리고 5월부터 다시 갔다. 5월 첫 주는 연휴가 있어서 이래저래 못 가고 지난주 수, 금요일에 가자 싶어서 예약을 해두었다. 수요일에 첫 출석을 했다. 이번 달에는 총 9일 출석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 오후에 필라테스에서 전화가 와서는 오늘 예약자가 나 혼자 뿐이어서 수업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이런 게 계약서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수업료가 지나치게 저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적었기에 내 사업장도 아닌데 걱정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운동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내가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타당한 이유는 언제나 대환영이기도 해서 예약 취소를 당해도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필라테스 센터에서 문자가 왔는데 이번 달 말부터 운영방법을 바꾼다고 했다. 그 방법은 무인 필라테스였다. 잔여 회원권은 무인필라테스로 전환 또는 환불해 준다고 했다. 선생님이 있는 수업도 간신히 가는 내가 무인 필라테스를 하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환불받아야겠다. 


나는 내가 먼저 지쳐서 수업 횟수를 다 못채우게 될 줄 알았는데, 필라테스 센터가 먼저 경영난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파이이야기>는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지만, 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부분도 강렬했다. 종이를 아꼈는데 펜잉크가 먼저 닳아버리는 상황이 너무 인생 같아서. 살아오면서 이 에피소드를 종종 떠올린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의외로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내가 미처 걱정하지 못한 것에서 올 것이다라고. 


그랬기에 오늘 필라테스 센터가 경영난으로 환불을 해준다고 했을 때, '아 종이보다 펜이 먼저 떨어졌구나.' 하면서 <파이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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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 컴퓨터가 48기가짜리 동영상 파일을 재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홀리 마운틴>을 굳이 8K로 봐야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자. 내 모니터가 8K를 지원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스페이스 (논)픽션 / 정지돈>


2021년 봄. 행위예술가 이불의 전시를 했고, 이 당시는 코로나 때였으므로(지금도 코로나이긴 하지만) 전시를 보려 해도 볼 게 없었다. 그래서일까 김영민(교수)도 정지돈(소설가)도 각자의 에세이에 이불 전시 관람을 언급한다. 나도 이불의 전시를 봤지만(무려 서울까지 가서) 에세이를 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냥 일기에 써 본다. 


<홀리 마운틴> 저 다섯 글자를 읽는데, 내가 이 영화를 본 때가 순식간에 환기되었다. 국도극장.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 영화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는 영화관 내의 로비 풍경. 영화라면 닥치는 대로 모조리 다 보고 다녔던 시절. 믿지 않겠지만 2008년 아이언맨 1까지는 히어로물도 영화관에서 개봉 첫 주에 보는 성실함을 보였다. 별거 아닌 시시한 아저씨가 슈트만 입으면 무적이 되는 게 너무 같잖아서 <아이언맨>을 끝으로 히어로물을 보지 않았는데, 이 영화를 기점으로 히어로물 전성시대가 열릴 줄이야! 


나는 <다음 소희> <벌새> <박화영> 등의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정확히는 회피하는 중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단순한 감상에서 끝나기보단 뭔가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 행동을 할 정도로 세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위선자가 정말 싫다. 나쁜 놈은 피하기 쉽다. 하지만 위선자를 피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위선자가 싫다. 위선도 선이라고 하는 멍청한 인간들도 피해야 한다. <더 글로리>의 하도영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위선자라고 할 수 있겠지. 하도영이 박연진을 선택한 이유는 박연진이 몸에 걸친 것이 제일 적었고, 그 걸친 것이 모두 디올이라서였다. 이 점에서 디올을 사랑하는 나는 생각한다. 김은숙 작가는 디올 옷을 알고 쓴 것인가? 디올의 옷들은 육체를 많이 가리는 것들이 90% 이상인데...미우미우랑 착각한 거 아녀?? 라고. 하도영과 전재준을 선을 측정하는 양팔 저울에 올려 두고 무게를 잰다면 수평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하도영은 위선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그의 악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하도영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위해 사람을 공구리 쳐 버리는 무시무시한 놈이다!!!!!!!!!!!!!!! ㄷ ㄷ 영화 신세계를 보면 드럼통에 산 사람을 넣고 시멘트를 부어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무시무시하지.(영화 신세계 진짜 싫어한다. 이 영화가 유일한 여자 등장인물을 사용하고 처리하는 방식이 진짜 아주 그냥 ㅅㅂ스럽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렇게 정액냄새 진동하는 영화는 구역질 없이 보기 힘들다.이 영화를 본 건 비교적 최근인데 2~3년 전 쯤? 남동생놈이 이 영화 대사 패러디를 너무 많이해서 봤는데, 역시나 별로였다. 단도적입적으로 한국 남자 감독의 조폭영화 안 봄) 이런 장면은 직관적으로 무섭다. 하지만 전재준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공구리 당하는 장면은 직관적으로 무섭진 않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산 사람을 공구리친 것이다. 


작년에 본 영화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문득문득 생각나면서 곱씹는 것은 <미래의 범죄들>(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2022 BIFF 오픈시네마로 상영함)이다. 아마 작년 일기에도 이 영화에 대해서 언급했을 텐데, 이 영화의 주제는 육체적 고통의 중요성이다. 인간은 육체의 고통이 없으면 안 된다 정도가 이 영화의 주제인 듯. 육체가 고통의 원인이라서 육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정말 충격적인 영화였다. ps. 나는 이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를 아주 좋아한다. 꽃미남 배우가 지긋지긋했던 로버트 패틴슨은 이 영화에서 배우가 되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데 그게 너무 좋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로버트 패틴슨의 팬이 되었다. 2022년 디올 옴므의 모델로 나타나서 다시 한번 나를 설레게 해 줌. 이때 나는 남자가 되어서 디올 옴므의 수트를 입고 싶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작년 가을 황정은의 책읽아웃에 정지돈이 출연하기 전까지 나는 정지돈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남자 작가 책을 언제부터인가 읽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읽는 게 박상영. 오은의 책읽아웃을 듣지 않아서, 정지돈을 늦게 알게 됨. 그때는 좀 흥미롭네 정도였는데, 이번에 알라디너TV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을 보고(듣고?) 반해버렸다. 제목 길이부터 맘에 든다!!!!! 사실 <스페이스 (논)픽션>은 작년에 사놓고 이번에 읽음. 



ps. <땅거미 질 때(이하생략)>도 진짜 좋다. 완전 내 스타일! 내가 진짜 싫어하는 소설은 김애란의 <칼자국> 같은 소설들. 그런 걸 왜 읽나? 그냥 아침마당 보면 되지. <칼자국>과 <침이 고인다>를 읽고는 주제의 촌티를 참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주제적 촌티는 2023 아카데미 작품상 받은 작품에도 있으니...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모름. 그러니까 아마도 <홀리 마우틴>을 개봉했을 무렵 이후부터 김애란은 읽지 않았다. 영화 <신세계> 촌스럽다. 김애란 <칼자국> 촌스럽다. 영화 <아이언맨> 촌스럽다. 나는 이런 걸 견딜 수가 없다. 낯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졸업식 송사 답사 같은 것들의 진부함, 촌스러움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진짜 싫다. 하지만 세상은 촌스러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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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5-0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지돈은 <영화와 시> 읽고 좀 웃었습니다. 반할정도는 아님! 다른 책들은 읽다가 말았어요…!
저도 알탕영화는 안보고요, 조폭에서 대세가 바뀐 거 같죠? 마동석 나오는 거 지겨워 ㅋㅋㅋㅋ이제 거의 혐 ㅋㅋㅋ 한국남자들 마동석 왤케 좋아하죠? 근육도 없으면서…
전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아하지 않지만 마블은 즐기고 스파이더맨과 가오갤을 좋아해요!!! 촌스럽죠? ㅋㅋㅋ
하도영 싫어요! 전재준이 더 좋습니다!ㅋ 선택지가 오로지 둘이라면 저는 닥후 입니다. 꼬였다면 꼬인 것이 보이는 사람이 좋습니다.

먼데이 2023-05-07 14:52   좋아요 1 | URL
정지돈은 현재까지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신선하여...
싫은 건 뻔한 거요. 견딜 수가 없어요 ㅠ
고생한 우리 엄마. 뭐 어쩌라고? 자식 낳아 키우면 당연히 고생이지. 그걸 어쩌라고...

저도 마동석 싫어합니다. 마동석 나오는 영화는 <부산행>말고는 없는 거 같기도 해요.

공쟝쟝 2023-05-07 15:22   좋아요 1 | URL
먼데이님을 위해 페이퍼를 하나 써야겠어요 ㅋㅋㅋ (수정) 트랙백-관련된 글에 서로 링크 거는 것- 걸었다가 삭제했어요, 먼데이님 안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무튼 정지돈을 지켜볼게요!
 

아디다스 아노락 바람막이(연보라 톤)와 블랙 삼선 조거 팬츠를 입고 아디다스 조깅화를 신고 동네 산책을 하던 중 어느 미용실 앞에 서서 가격표 메뉴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우리 동네 미용실 시세는 얼마인가, 내가 가는 다른 동네 미용실과 비슷한가를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가나던 아주머니가 내 옆에서 가격표를 보더니 가격표 사진을 찍어 갔다.


내가 물건을 고르고 있으면 70% 이상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 옆에 서서 그 물건을 고른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늘 있는 일이다. 한번은 백화점 지하 매대에서 엄마 모자를 보고 있었는데, 행색이 고운 할머니가 오시더니 점원에게 "저 아가씨가 한 모자 있어요?"라고 물었다. 점원은 "우리 매장(닥스)꺼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에게 직접 물었다. 내 대답은 "이건 프라다예요."였다. 내가 그 매장에 서서 물건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호객효과가 있는 품목은 의외로 이불이다. 어떤 손님은 내가 고른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나도 저거 주세요."라고 하고 똑같은 걸 사가기도 한다. 


나는 손님을 끌어당기는 후광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은 더 고급진 물건으로 보이게 하는 후광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별 관심이 없는데, 고작 아이다스를 입고 동네 산책을 하는 중에도 호객을 할 정도라면 종교인 또는 정치인이 되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농담삼아 해 보았다. 아닌가, 수입차나 중고차 판매원이 되었어야 했나? 혹은 성형외과나 피부과 상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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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5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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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6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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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6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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