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들처럼 사는 게 인생관인 40대 회사선배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자식을 낳는 게 분명해요."라고 했더니 선배는 "에이, 설마, 그런 사람이 어딧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침 뉴스에서 어린 자식이 3명이나 있는 사람이 죽었길래, 이 기사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죠.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서, 한 존재가 소멸해서,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어린 자식이 3명이나 있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안타까워 하는거죠. (부양가족이 없는)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저 사람만큼 안타까워할까요? 그렇진 않겠죠. 이게 바로 내가 사람들이 자식을 낳음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한다는 것의 증거예요." 라고 하자 선배는 내게서 저 말을 들을 내 모친과 꼭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안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하여 '나는 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2년 넘게 내가 성실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 기록을 보더니 동생은 "누나 이거 다 했단 말이야, 대단하네. 미칫네." 라고 평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 정도로 거지같다는 증거지. 니 눈에는 안보이겠지. 내 눈에는 다보여. 그래서 그걸 치우고 있는 것일 뿐이고 이게 내가 이 세상을 비관하는 이유지. 니 눈에는 이 세상이 즐겁기만 하지? 놀이터 같고. 그건 그만큼 보는 눈이 없고 인식의 폭이 좁다는 증거야. 아무것도 모르면 이 세상은 그저 낙원이지."
어제 그것이 알고싶다 : 슈퍼전파자 X의 비밀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다. 연관된 것끼리 줄로 잇는 문제를 푸는 기분이 들었다. 영생을 바라는 저들과 번식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를 것 없는 것에 맹종하는 부류는 것. 바로 이 세상, 이승 맹신자들이라는 것.
얼마전에 엄마한테 "엄마는 엄마가 양수검사를 했는데 아이가 팔다리가 전부 없는 아이라면 낳을거야 낙태할거야?" 했더니 별 망설임없이 "안낳아야지."라고 답했다.(하지만 엄마는 양수검사를 한 적이 없다.) 그러면 "엄마 아이가 사고가 나서 팔 다리를 다 잘라내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하면 죽일거야 살릴꺼야?" 라고 질문했더니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살려야지." 라고 했다. 내 다음 질문은 "근데 아이 본인이 팔다리 없이 사느니 그냥 안락사시켜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거야?" 였고 엄마의 대답은 "어렵네."였다. 내 대답은 "뭐가 어려워? 본인 의사를 100% 존중해줘야지. 엄마가 그 고통을 대신할 수 없잖아. 내가 늘 말하잖아. 내 몸 같은 자식은 없다고. 그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어."
양수검사를 실시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양수검사를 하는 걸까? 그 사람들은 그들이 양수검사를 하는 것이 한 인간이 태어나야 하는 이유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행동이라는 점을 모를 것이다. 다수의 부모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살아야 할 이유'를 전제로 자식을 태어나게 한다. 만약 이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근거로 자식을 낳는거라면 양수검사를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장애를 가진 사람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거니깐.
양수검사를 실시하는 부모 예정자는 장애를 가진 태아는 아직 사람이 아니므로 죽여도 되고, 장애를 가진 아이는 일단 사람이므로 죽일 수 없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 여기서 핵심은 낳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당신들은 태어나야 할 이유와 살아야 할 이유를 직관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낳아? 이 세상이 태어날만한 가치가 있어?" 라고 말하면 대체로는 "(사지육신 멀쩡하다면)그래도 한 번쯤은 살아볼만한 세상"이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아주 가끔 "무슨 이유가 있어. 내 욕심으로 낳는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뼈와 피가 있는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 잡식을 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해야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겪어야하는 고통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그저 '인생'에 대한 맹목으로 자식을 낳고자 하는 사람을 볼 때 내가 느끼는 연민과 동정과 불쾌감이 뒤썩인 이상한 감정이 있다. 그것은 카카오톡 프로필의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 유독 심해진다. 또한 그 감정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갓태어난 버림받은 아기 고양이를 볼 때의 감정과 비슷하다. 그런 감정을 어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영생을 바라면서 거대한 공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의 조아린 머리를 풀샷으로 찍은 장면을 봤을 때 똑같이 느꼈다.
나약한 존재를 봤을 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감정. 연민과 동정과 경멸이 뒤썩인 감정.
내 모친은 사람은 자식을 낳으면 강해진다라고 여긴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엄마는 강함과 억척스러움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 진짜 강한 것은 혼자 강해지는 것이지 어떤 다른 존재에게 기대서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약하기 때문에 자식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엄마한테 시큰둥하게 "왜 엄마가 강해지려고 자식을 이용해먹어? 좀 비겁한데. 자력으로 강해질 수 없었던 거야??" 말했을 뿐. 내 친구들은 "너 정말 부모한테 그런 말을 다한다고?" 하면서 몹시 놀라곤 하는데 나는 "자식은 부모한테 3가지만 안하면 효도하는 거야. 1 자살, 2 사이비종교 3. 불법 다단계. 그 셋만 안하면 효도야. 내가 자살 안하고 건전한 직장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뭘 더 바래? 우리 부모는 나한테 고맙다고 매일 절해야 해." 라고 말하면 이제 막 부모가 된 지인 및 친구들의 얼굴빛은 급격이 어두워진다.
대개의 사람들은 삶이 너무나 버겁고 두려운 건가보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생'을 맹목하고, '자식'을 낳아서 자식에게 의지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종교에 의지하고, 그러고도 부족해서 더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이상한 종교에 의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삶이 하찮다. 사람은 한 순간의 우연으로 죽을 수 있다. 삶은 갈치등뼈처럼 손쉽게 부러진다. 영생을 바라는 사람, 무병장수를 바라는 사람은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오늘 밤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요즘도 나는 사이렌을 울리면서 긴급하게 주행하는 119 응급차를 볼 때마다 아련한 감정에 사무치곤 한다. 그 때 죽었을 수도 있었다와 죽음엔 아무 고통이 없다는 것! 죽음이 실재이며 삶은 죽음에겐 일종의 바이러스 같은 것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전에 가족들에게 "내가 갑자기 죽으면 여기 이 금고만 열어보면 돼. 여기에 나의 모든 귀중품이 다 들어 있으니까 팔아 쓰라구. 난 할머니들처럼 가락지를 이상한 곳에 숨겨놔서 유족이 유품을 버리전에 금가락이 찾느라고 고생하게 만들지 않아. 금고 마스터키는 저기 있어."
팬테믹과 사이비종교와 바이러스로부터 내 유전자를 지켜내겠다고 악을 쓰는 부모들을 요즘 남일 보듯 보면서 다시 한 번 무능한 조물주의 솜씨에 감탄하곤 한다. 조물주 너도 부끄럽지? 이것도 작품이라고 만들어 놨냐? 결함이 너무 많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