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 : 보통 하루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나요?


이효민 : 하루가 굉장히 단순해요. 아침 7시 전에 출발하고 하루 25km 안팎을 걸어요. 식사 같은 경우는 아침은 순례길 도중에 카페 같은 데서 잠시 쉬면서 커피와 또띠아를 먹고 또 계속 걸어요.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점심때가 되면 점심도 간단히 먹어요. 도시락을 먹거나. 도착하면 알베르게 찾아가서 씻고 샤워하고 간단한 빨래하고 장을 보거나 동네 구경을 하고 저녁을 해 먹거나 저녁을 나가서 사 먹고 그냥 자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똑같이 반복이 돼요. 


오지은 : 그러면 숙소에 들어가는 시간이 좀 이르겠군요?


이효민 : 네 대체로 꽤 일렀어요. 몇 시까지 걷고 숙소를 잡겠다 하고 걷는 분들은 꽤 많이 걷기도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대체로 하루에 20-25km 안팎으로 걷고 그 맘 때 즈음에 있는 숙소에 가겠다 였기 때문에 12시에서 2시 사이면 대부분 도착을 해요. 대체로 하루에 6-7시간 걷고 오후랑 저녁을 쉬고 동네 구경하고 다음 날 준비하고. 그래서 삶이 굉장히 단순해지는 거죠. 걷고, 오늘은 어디서 묵을까, 오늘 저녁을 뭘 해 먹을까 이거 말고는 별로 생각할 게 없는 거예요. 삶이 굉장히 단순해져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걷다 보면 잊어버리고 며칠인지도 잊어버리고. 그거 자체가 단순한 삶이 반복되는 거 자체가 굉장한 힐링이었어요. 


<오지은의 이런 나라도 떠나고 싶다 / 53편 카미노 데 산티아고 feat. 이효민>



주중에 계속해서 이 53편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고 나서 판에 박힌 듯한 단순한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지루한지, 불만족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나의 경우 미리 생각을 해 두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계획을 미친 듯이 많이 짜고  있어서 불만족스럽고, 지루했던 것이다. 


"별로 생각할 게 없는 거예요. 삶이 굉장히 단순해져요."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있어서 위 문장과 같았던 나날은 큰 수술을 하고 그 회복을 기다리던 한 달 간이었다.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숙제는 나빠진 건강 상태에 적응하는 것과 부작용 없이 회복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출근을 안 해도 되어서 행복하기까지 했다. 동생은 "유급병가니까 걱정 없어서 행복한 거지. 무급이었으면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하는 어떤 면에서는 맞는 소리를 해댔다. 


생각을 덜 하는 생활을 하려면 계획을 짜지 않아야 하는 생활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참 애매해서 그만 두기에는 돈이 좀 부족(??)하고 일을 계속하려면 사치(??) 말고는 답이 없다. 그래서 어제는 "12-2시 사이에 숙소 마을에 도착한다"는 이효민의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해보자 싶어서 오후에는 휴가를 내고 일찍 집에 왔다. 


오후 계획은 이랬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은행 두 곳에 들러서 다 쓴 종이통장을 새로 발급받고(도장 챙기기!) 돌아오는 길에 꽃 집에 들러서 꽃 한 다발 사기. 남동생은 아직도 종이통장+도장을 사용하는 나를 뗀석기 시대 인간으로 여기지만 나는 종이통장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종이통장을 발급받아서 쓸 생각이다. 더욱이 내 도장은 기계가 판 게 아니라 사람이 직접 손으로 판 거라서 나름 소중하다. 지하철 환승역이 있는 유통인구가 엄청 많은 지하철역 입구 노상 가판대에 늘 있는 도장 장수 할아버지가 파 준 것이다. 


꽃 집에서는 분홍 미니 장미와 분홍 라넌큘러스 사이에서 고민을 좀 하다가 라넌큘러스 한 다발을 샀다. 내 꽃 취향은 송이가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좋고, 색상은 분홍이 좋고, 꽃 잎이 겹겹이 많은 것이 좋다. 그래서 올해는 튤립도 프리지아도 사지 않았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가장 실패했던 꽃은 보라색 리시안셔스였다. 유칼립투스 블랙잭도 한 다발 살까 생각했지만 나는 꽃을 2종 이상 함께 꽂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한 개의 화병에 꽃을 많이 꽂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라넌큘러스만 샀다. 내가 가진 화병은 알바 알토 1쌍(큰 것과 작은 것)과 마리메꼬 화병 3개다. 사실 화병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예뻐서 꽃은 거들뿐이다. 줄기를 화병 높이에 맞게 짧게 자르고 2송이씩 꽂았다. 그리고 화병을 침실, 서재, 거실, 식탁 이렇게 놓아두었다. 오랜만에 꽃을 샀다. 집에 꽃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는 나날이었다. 금요일 오후 휴가를 이용해서 모처럼 꽃 집까지 산책을 하고 꽃을 사 와서 집 안 곳곳에 꽃을 놓아두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주말을 기분 좋게 보내는 방법을 하나 발견했다. 금요일 오후에 주말을 위한 꽃을 구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정을 오후 2시에 끝내고 남은 시간은 느긋하게 동네 산책을 하면서 꽃을 사는 일 정도 하는 것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단순한 생활의 기쁨이고, 이것이나마 방법을 하나 찾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p.s. 이효민이 빨리 돌아와서 ebs 팟캐스트 <오래 달리기>도 다시 방송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