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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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찰리처럼 시작해. 악당을 모두 죽이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출발하는 거야. 그러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아마 리틀 비 나이쯤 될까, 세상의 악의 일부가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자신이 악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편안해지고 자신 안에서 발견한 악이 정말 그렇게 악한 건지 자문하기 시작해. 그러면서 10퍼센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거야." (p.335)

이 소설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10퍼센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찾아온. '찰리'적 세상. 10퍼센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사건에 직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잡지 편집장인 새라는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다 들키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없이 아이를 기를 자신도, 생활을 영위할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애인에게도 아내가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되돌리고자 나이지리아 여행을 감행한다. 나이지리아의 어느 구역은 위험하다고 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안전했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이지리아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덕분에 새라는 리틀비와 느키루카를 만나게 된다. 아주 처참한 모습으로. 그녀가 자주 생각했던 것처럼 그 해변가에 그처럼 앙증맞은 초록색 비키니 차림으로 나이지리아의 어느 마을에서 참혹한 일을 겪은 어린 소녀들과 총을 든 짐승같은 사내들 앞에 서게 되다니. 그녀가 처한 현실이라는 것이 그토록 우스꽝스러웠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잔인한 전쟁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보여주는 상징같아 보였다.

아무튼 새라는 리틀비를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 그리고 남편 오루크는 손가락 자르지 못했다. 대신 그는 거대한 석유자본을 무너뜨릴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러다 그는. 죽었다. 손가락을 내놓지 못한 죄책감이 그를 우울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히려 손가락을 잘랐던 그녀는 그 일을 잊을 수 있었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평온한 삶을 살아낼 수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문제였다. 우리는 어느정도의 희생을 내놓고 안전한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할 일을 다 해주었으니 그들의 불행을 위해 더이상 해 줄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깃불을 지금 켜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자동차를 오늘 타고 가지 않는다고 해도, 전기를 위해. 석유를 위해. 어딘가에서는 전쟁과 살인이 이어질 것이니까. 

그렇게 유지하는 우리의 평안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가. 매일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난민들을 비행기에 태워보내는 사람들의 위로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마치 전쟁에서 총살을 담당하는 군인들이 처형자를 향해 총을 쏘고는 돌아가 점심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처럼 말이다. 리틀비가 분연히 일어나 결국 잡혀가기를 자청하던 순간에 찰리가 뛰어갔던 것은 리틀비를 향해서가 아니라 멀리 보이는 놀고있는 아이들을 향해서였던 것처럼. 

새라와 리틀비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야기를 모으고 있었다. 하나의 이야기는 힘이 없지만 수많은 이야기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녀들은 믿었다. 리틀비의 마지막 다음장의 여백은 그 수많은 이야기가 채워야 한다. 그래야 결국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일상에 묻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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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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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신경과의사 이자부. 그는 늘 어린아이 같다는 말을 듣고 산다. 생의 엄청난 고민을 안고 등장하는 환자들에게 우선 주사부터 맞자고 조르고.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에는 아무런 신경도 안 쓰는 듯. 그들의 직업에 뛰어들어 야구면 야구, 소설이면 소설, 장난이면 장난. 다 해내겠다고 큰소리다. 그 모든 것들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일단 뛰어들어서 경험해보는 어린아이같은 천진함. 그가 뛰어든 일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그를 통해 환자의 치료를 성공해내고 만다. 아마도 주사를 놓는 모습을 보면서 기운을 차려서 치료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 ^^

 

그를 찾아온 환자들은 모두 인생의 최고 절정에서 머뭇거리게 된 인물들이다. 앞날이 창창한 야쿠자. 곧 교수가 될 수 있는 위치에 닿게 된 의사. 내야의 최고를 맡고 있는 야구선수. 연애소설로 스타급 대우를 받는 작가. 이들이 머뭇거리게 된 이유는 가지각색이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의 부족이라고. 나를 곧추세우지 못한다면 곧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불안감.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몰아부치는 그들의 긴장이 신경을 마비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라부는 그들에게 온 몸으로 말한다. '나처럼 해봐'라고. 그는 바보처럼 보이면서도 그들에게 냉철하게 지적한다. '너 그러고 싶은거 아니야?' 라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없애버리고 싶은 거 아니야?' '그 권위있는 체하는 장인의 머리가발을 벗겨버려!' '독약을 타고 싶은 거야?' 등등. 그의 입에서 나오면 전혀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쉽게 인정하고 만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극복할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 나를 찾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도 그런 질문을 해봐야하지 않을까. 니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바로 '그거'야. 할 수 있다면 하고. 할 수 없다면 인정해. 그리고 다시 나아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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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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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열풍이 불던 때가 있었다. 아니 최근에도 '형제'를 통해 그 이름의 존재를 굳건하게 알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오래 전에 지인으로부터 이 책을 소개받고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미루다가 결국 이제서야 읽게 되었을 뿐이다. 중국 작가에게서 우리 시대의 모습을 읽게 된 것은. 그 지인의 덕분이라고 해야할 듯 하다. 나는 아무튼 이 책을 통해서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 '그'의 이야기가 곧 '당신'의 이야기고 '나'의 이야기인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당신들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안에서 '당신'과 '나'와 '우리'의 초상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p.350)

 

비평가의 이 글을 읽고 그래. 라고 생각했다. '나'이면서 '당신'이면서 '우리'의 이야기. 피를 판다고 했을 때는 그가 무척이나 불쌍하고 가난한 인물 같이 보였지만 그는 오히려 웬만큼은 살 수 있는 축이었다. 어여쁜 아내가 있었고, 세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고, 가뭄이 되어도 죽을 끓여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식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늘 '피'를 팔 수 있었다.

 

도시에 살던 그가 시골의 넷째 삼촌을 보러 갔다가 농촌에서는 '피'를 팔아야 제대로 된 남자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피를 팔러 나가본다. 젊은 혈기에 피를 팔고도 멀쩡했던 그. 그는 자기 몸 속에서 언제나 만들어지는 피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기뻐한다. 그리고 이 '피'를 판 돈은 '힘'을 판 것과는 다르니 중요한 일에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아내'를 얻는 데 사용한다. 이 첫번째 선택이 그의 앞으로의 운명을 말해준다. 그는 '피'로 '가족'을 산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쭈욱 '가족'을 위해 '피'를 팔게 된다.

 

자기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는(여기서는 판명이 났다고 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일락이가 허삼관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허옥란이 좀 푼수짓만 안했어도..ㅡㅡ;) 일락이의 사고수습을 위해서 '피'를 팔기 시작한 허삼관은 가뭄에 굶주릴 때, 임분방과 열애중일 때, 일락이가 힘겹게 집에 돌아왔을 때, 이락이의 생산대장이 방문했을 때, 일락이의 생사가 위험해 졌을 때. 그때마다 피를 팔았고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목숨이 다 하기 직전까지 피를 팔아대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나는 이 모습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여겨지기 전까지는 가족을 위해 해야할 일들을 마다하지 않던 그 모습을 말이다. 우리 집은 그다지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다. 허삼관네처럼. 그렇지만 모두는 힘겹게 살아내야 했다. 아껴야했고, 힘을 써야 했고, 어떤 것들은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삶에 불어닥치는 폭풍은 그저 피해낼 수만은 없는 것이어서 폭풍이 불어닥치면 가족끼리 힘을 합쳐 겨우겨우 맞서 내고는 했었다.

 

그렇게 '가족'을 지켜낸 허삼관. 마지막으로 자기를 위해 (소박하게도 피를 팔고 난 후 늘 먹었던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으려고) 피를 팔고자 하나 생애 처음 거절당한다. 거절당하면서도 그는 생각한다. "이제 큰 일이 닥치면 어떡하나"라고 .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놓지 못하는 그. 마음이 아팠다. 이제 아들 셋이 넉넉한 벌이를 하고 그래서 피를 팔지 않아도 되는 그의 심사가 안타까워서.

 

아들들이 주는 돈으로 허옥란과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앞에 놓고 둘이 주고받는 대화는 그야말로 부부의 대화다. 피를 안 팔아주던 혈두놈을 욕하는 허옥란과 그 욕이 흐뭇하면서도 근엄하게 받아 마치 어른이 한 마디 하듯 내뱉는 허삼관의 유머는.

 

그가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언젠가 그도 죽겠지만. 우리 모두가 다 그렇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늘 살아남아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고 있을테니.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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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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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머리에 약간 모자란(?) 듯한 턱수염. 어설프게 잡은 담배와 학생신분인 듯도, 혹은 아닌듯도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표지 그림을 보고 스무살, 도쿄의 내용을 짐작하기란 그닥 어렵지 않다. 반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설명은 나중에서야 읽게 되었지만 읽는 내내 오쿠다 히데오의 이력을 떠올리며 반쯤은 혹은 그보다 더 많이 그의 실제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재미있기도 했다. 

'공중그네'를 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접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이라부의 모습을 지워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라부에 비하면 주인공 히사오는 제법 진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제법 진지하기도 하고 제법 유머스럽기도 한 그의 모습이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80년대에 한참 자라고 있었다. 정신없이 자라느라 시대에 대해 생각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크느라, 노느라 바빴으니까. 그러다가 20대가 되면서 80년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그 정신없던 시기가 나 어릴적에 지나가버린 것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야기거리가 사라져버린 것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 일생을 되돌아본다면 아마 이 책의 구조처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일매일 일상이 반복되고, 늘 그래왔던 것 같지만 그 중 어느 하루. 뚜렷하게 남는 어느 하루들이 있다. 그 하루의 기록이. 그리고 그 하루의 추억이 모여 오늘의 '내'가 된 것이다. 소설 속 히사오의 10년도 그렇게 뚜렷하게 남는 각각의 하루들의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일매일 술을 퍼마시던 대학 초년시절, 자신을 좋아하는 여학생과 그 친구들의 계략에 휘말려 어이없이 뛰어다니던 어느 하루. 처음 도쿄에 올라와 새로운 도시를 탐험하다 결국 고향 친구를 찾아가 어른인 척 해 보았던 하루.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고 하루종일 원치 않는 심부름 때문에 밥도 못 먹고 돌아다녔던 사회 초년생의 하루. 사회에 적응했다고 생각하고 우스대며 아래 직원을 부리다가 상사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받은 하루. 억지로 주선자리에 끌려나갔던 하루. 이제 제법 자리 잡은 카피라이터로서 여기 저기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느라 정신없어하다 문득 친구가 꿈을 잃었다고 말할 때 주춤. 했던 그 하루까지. 

그렇게 가끔씩은 계단을 그리며 성숙했던 히사오의 하루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간 나의 20대 하루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정도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성숙해 나가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이제 막 서른을 넘긴 나에게 그의 성장기는 울컥. 내게도 주춤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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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아이 - 특수학급 교사 토리 헤이든이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써가는 생생하고 아름다운 1년간의 여정
토리 헤이든 지음, 이중균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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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헤이든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다. 몇 해 전에 읽었던 한 아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녀의 이름을 익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만난 그녀는 매우 현실주의자였으나 이상주의자였고, 냉철했지만 따뜻했다. 그녀를 거쳐간 아이들이 모두 성공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녀는 매 번 최선을 다했고,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책을 펼치면서 나는 기대를 반쯤. 또 걱정을 반쯤 했다. 그녀가 다루는 아이들은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 특히나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공들인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보다 뿌리깊은 문제가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폭력과 학대, 무관심에 내던져진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의 경우는 그것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읽는 것이라고 해도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표지에 나와있는 어린 비너스의 얼굴에 희미하게 자리잡은 미소만큼 내 마음에도 희미하게 아릿한 슬픔이 자리잡았다. 

토리의 강점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전혀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으려니만큼 그녀도 그렇겠지만. 그야말로 막막한 상대인 비너스를 만났을 때에도 그녀는 포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시작한다. '그 아이는 말하게 될 것'이라는 토리의 확신은 그런 의미에서 교만이라기보다는 긍정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떤 말이나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는 아이. 귀머거리라고 느낄만큼 외부와 차단된 아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면 놀라운 공격성을 보이거나 괴성을 질러대는 아이. 깜깜한 절벽 앞에 선 것처럼 상대를 지치게 하는 이 아이의 내면을 향해 끊임없이 치열하게 도움의 손길을 뻗으려는 토리의 노력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너스가 "난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 치열함이 얼마나 이 아이를 행복의 길로 이끌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꼭 특수학급에 관심이 있거나, 교사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 이웃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한번 열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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