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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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 아픔을 극복하기 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

나는 이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는 한 권의 책으로 표현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의 글은 일상을 담고 있으면서 그 의미와 깊이가 남달라서 좋다. 그래서 읽으면 나도 세상을 더  깊게 알게 되는 느낌이다. 넓게가 아니라 깊게. 

남자가 여자를 만난다. 둘은 서로의 사소한 점에 이끌린다. 우리가 꼭 이상형만 만나는 것이 아닌 이유다. 여자의 사소한 습관, 남자의 특별하지 않은 한마디 말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낀다.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혹은 혐오스럽기까지 한 것들이다. 정말 그러한 것들에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기혼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결혼을 할 적정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이유가 참으로 건조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 대답은 어쩔 수 없는 현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사랑하던 남녀는 아무 이유없이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사소한 이유로 죽일듯이 다투고 화해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그래서 어느 한 쪽의 이별통보로 끝이난다. 남자는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 치면서 죽음까지도 생각해보지만 결국 아픔은 시간이 치유해주고 남자 역시 다른 여자를 쳐다보며 새로운 사랑을 준비한다. 

그래. 그게 사랑이고 연애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사랑한다. 남자에게 한 때 죽을 것 같은 사랑의 아픔도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때 아무런 교훈을 남기지 않듯이. 우리는 다시 상대의 아주 사소한 습관과 사소한 말투와 사소한 눈빛 하나를 붙잡고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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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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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기행과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다

안개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가스미초. 이 마을에서의 추억을 꺼내놓는 '나'는 이제는 사라진 시대를 읊듯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이 안개마을에서 청춘을 보냈으며 그리고 자기의 자유를 마음껏 만끽했다. 그리고 그 만끽을 통해서 삶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안개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았는지 알수 없는 하루코와의 만남을 읽으며 나는 무진기행을 떠올렸다. 물론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안개'로 가려진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공간이 주는 신비스럽고 꿈과도 같은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명문 사립대에 다니지만 공부보다는 방탕한 생활에 보다 익숙한. 그리고 그것을 전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주인공의 태도에서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소설 내내 흐르는 오티스 레딩의 노래도. 그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이노는 훨씬 더 삶을 긍정하는 인물이었지만. 그렇게 이 소설은 다른 여러 소설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자유로운 가족

이노 무에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는 명장 사진가 할아버지는 보기 드문 사랑을 지닌 인물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고집과 억지로 무장해 있지만, 얼핏 훨씬 더 따뜻한 사람으로 보이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게이샤였던 할머니를 온갖 돈을 빌려 기적에서 빼왔으며, 할머니는 이미 유부남의 아이까지 가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그렇게나 자신있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할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능력이 없다고 질책했던 자신의 제자 - 데릴사위 - 에게 풍경사진이나 찍는다며 호통을 쳤지만 할아버지는 손자인 이노에게 인물 사진을 찍었던 자신이 얼마나 서러운 일을 했는가를 말하면서 아버지는 그럴 필요 없이 풍경사진만 찍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위에 대한 사랑. 그것 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렇기에 여전히 풍경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고.
어린 이노 역시 그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청춘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부모의 방임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의 결정을 부모는 따라주었고, 그의 자유를 그 때문에 보장해 주었다. 

                                                       사라져버린. 그리고 우리가 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

공교롭게도 가스미초 이야기에는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안개마을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신이치삼촌. 도오루. 도키타와 료코. 할머니의 연인이었던 노신사.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연인 마치코까지 하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이야기의 이별은 독특하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과 이별하는 것은 아닐까. 사진 속에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인물들이지만. 절대 실물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들처럼. 우리의 과거 시간은 그 곳에 존재하지만 다시 돌아가 살아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추억은 기억보다, 기억은 사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이야기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움직이는 것은 천 분의 1초씩 멈춰 있는 것의 연속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한순간도 낭비해서는 안 돼요. 천 분의 1초의 멈춰 있는 자기 자신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거니까요. "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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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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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날의 일기를 꺼내어

7편의 단편 모두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꼭 '나'라고 할 수 없다. <나를 위해 웃다>에서는 엄마가, <첼로 농장>에서는 유진이, <마테의 맛>에는 J가, <댄스댄스>에서는 엄마아빠가, <휴일의 음악>에는 할머니가 매우 비중있게 혹은 거의 주인공으로 다뤄지고 있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음을 느끼는 순간. '나'는 성숙해진다. 그것은 남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보편적 진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로 서술되기에 또 하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들의 일기를 읽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 온 혹은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내가 이렇게 살았었노라고. 이러한 상처가 내게 있었노라고. 그리고 지금 나는 이러하게 살고 있노라고. 미래의 '나'는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지만 과거의 '나'의 일기를 통해 그들의 현재를 생각해보게 하는 힘. 그것이 1인칭 서술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상처받았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접착제도 없이 작은 조각들을 이어 만드는 그 조립식 비행기는 쉽게 망가졌지만 이어붙이면 금세 다시 날아올랐다. " (p.172)

쉽게 망가지지만 다시 날아오르는 이 조립식 비행기처럼 정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상처받고, 그래서 다시는 날지 못할 것 같지만 '이어붙임'을 통해서 새롭게 날아오를 힘을 얻는다. 이 힘은 '새롭게 된 것'이 아니라 '이어붙여서 된 것'이기 때문에 전과 같지는 않은, 그러나 전처럼 이어지는. 그런 힘이다. 그래서 더 견고한.

" 일부러 두는 거예요. 바람과 비를 충분히 겪어야 나중에 뒤틀림이 없어요." (p.141)

소설 속의 인물들은 버려지기도 하고 버려지지 않기도 한. 그런 인물들이다. 버려졌다고 하기에는 아직 가진 것이 있고, 버려지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못 가진 것이 있는. 누군가의 부재를 한번쯤 마음에 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게 부모든<나를 위해 웃다><아프리카>, 연인이든<첼로 농장><천막에서>,남편이든<휴일의 음악>, 아내이든<의자>, 자식이든<마테의맛> 혹은 그 누구든. 그들의 부재로 인해 삶은 상처받고, 그래서 그 상처때문에 휘청거리다가 결국은 이어지지 못할 것만 같아서 자신을 내던지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그들은 처절하게 싸워가면서 보내는 것이다. 상처의 딱지를 열고, 다시 딱지를 앉히고, 다시 그 딱지를 들여다보면서.

그러는 동안 딱지를 다시 열지 않아도 새살이 돋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들은 슬그머니 자신의 상처에서 눈을 돌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다가오는 내일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상처를 덮는 딱지가 어제보다 견고하게 자리잡아 더이상은 긁어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딱지를 열어보았던 경험은, 새로운 상처가 생겼을 때. 이어붙임의 접착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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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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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가장. 그러나 딸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빠가 벌이는 고군분투 복수기. 그는 딸애가 권투선수에게 맞아 얼굴이 엉망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분노한다. 그러나 상대는 죄책감을 갖기는 커녕, 위압적이고도 자신있는 태도로 피해자인 그들을 위협하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병원을 떠나버린다. 아빠로서 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드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딸을 대신해서 그녀석에게 복수해야한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죄책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소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그 소리를 듣고 이 소설을 집어들었으니까. 영화를 보고 싶어지는 생각은 오히려 좀 사라졌다. 소설이 충분히 재미있었으니까. 대개의 소설들은 영화화된 것을 먼저 보거나, 소설을 먼저 보거나 아무튼 먼저 본 것만으로 만족하는 편이어서 둘 다 섭렵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캐스팅된 인물들을 보고 그 역할에 어울리긴 하다라는 생각을 했을 뿐. 

아빠가 점차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순신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순화되는 것 또한 이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오히려 그 쪽에 관심을 갖고 그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가 아빠의 선생으로 군림하는 동안 그는 굉장히 어른스러워보였지만, 결정적으로 사회에서 그의 보호자 노릇을 해야했던 것은 아빠였다. 그 관계가 다시 전도되었을 때. 순신도 아빠도 자신이 본래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나'의 모습이 아닌채로 살아간다.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저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어른'임에도 아직 '아이'처럼, '아이'임에도 마치 '어른'처럼. 그런데 당시에 살아가면서 행동해야 할 보통의 과정을 못 밟으면 결국 그 과정으로 회귀한다고 하지 않던가. 본모습을 찾아 살아가는 것 그것도 도무지 쉬운 일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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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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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결심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새로운 나를 찾아 돌아오겠어. 혹은 지금의 나를 바꾸고 싶어. 그것이 계획되어있는 것이었든, 아니었든지간에 여행이라는 것이 우리의 '표지'를 벗겨주는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를 가려왔던 것. 내 본질.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혹은 내 거짓된 모습을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진실이다.

 



책의 표지를 벗기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져 있는 가득한 사진들이 펼쳐졌다. 그 안에 세상이 있었다. 여기가 네 명의 남녀가 버리고자 했던, 그리고 찾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다. 그림에 별로 소질이 없었던 나는 내 그림을 시간내에 완성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늘 집에까지 그 그림들을 가져와서 그림을 완성해야만했는데, 그려놓고 나면 비교대상이 없어 늘 혼자 내 기준에 그림을 평가했다. 어느날은 그정도면 아주 잘 그린 그림 같았고, 어느 날은 형편없어서 도저히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가면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 비교해가면서 내 그림의 위치를 잡아갈 수 있었다. 늘 그렇게 대단하지도, 그렇게 별볼일 없지도 않았다. 늘. 노력한 만큼. 그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이들의 삶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만 바라보던 이들이 '남'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의 삶의 궤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나작가가 그토록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며 모든 이들의 삶에서 등을 돌렸을 때에는 전혀 보아지 않았던 진실이. 원포토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ok김 역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로사의 불행을 직면하면서 드디어 사랑의 본질을 찾아가기 시작했던 것처럼. 또 박벤처가 자기의 희생만을 생각하다가 아내의 기다림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처럼.

 

"기억은 사랑을 확인하는 인증서와 같다. ...... 사랑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창고 속으로 깊숙이 저장된 채 언제든 필요할 때 현실 속으로 호출된다. "

 

사랑을 확인하는 것. 원포토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늘 우울을 동반했다. 그에게 사랑과 이별은 정 반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별 후에도 사랑한 기억은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스크린에 비친 그녀의 한결같은 그 말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별은 사랑했던 추억을 선물로 남겨준다. 그것은 오래될수록 아름다와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별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고 사랑했던 기억도 모두 망가뜨려버린다면 우리는 절대로 결과가 아름답지 않은 사랑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행을 떠나온 이들에게만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 있던 그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녀에게도 드라마가 있었다. 사랑했던 남편이 있었고, 아이가 있었고, 그리고 알콩달콩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녀가 늘 그렇게도 피워대던 담배는 그녀의 추억 저장 창고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늘 추억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도 현실적이면서 그렇게도 낭만적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든 드라마와 내 삶의 드라마들을 새롭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었다. 영화와 소설의 중간쯤이라고 해야할까. 여행기와 이야기의 중간쯤이라고 해야할까. 소설 속 인물들이 보는 듣는 아르헨티나의 모든 것들이 실물로 등장하고 그들이 함께 그 장면에 멈춰 이야기를 건넬 때 나는 함께 여행을 떠나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전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등장을 상상해 볼 수도 있었다. 이 책을 들고 아르헨티나로 떠나본다면 어떨까. 그러면 아마도 네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난듯한 기분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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