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과 영우 형제의 성장이야기. 라고 정리하면 될까. 제목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느낌과는 달리 성장소설. 로 정리되어 버려 서운한 감이 없지 않다. 여기에서의 비밀은 진실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비밀이다. 거짓말은 진실을 감추는 일이고 때로는 진실을 이유로 거짓말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거짓말에는 진실이 포함되지 않는가. 혹은 진실이 거짓말에 보태져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비밀은 얼마나 거짓말로 감추어져 있을까. 무언가 있을 것 같은제목과 달리 정말 어렵기만 하고 별 것 없는 글이어서 실망했다. 아마도 이제는 10년이 넘은 소설가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자세가 그토록 작가나 독자 모두를 힘들게 하는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 아닐까. 소설 후반에 그녀가 스스로도 밝힌 것처럼. - 다시는 이런 소설 쓰지 않겠다.- 는. 단지 새로운 소설 형식 때문에 낯설어서만 읽기 힘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너무나도 치밀하게 계획된듯한 플롯이 복선을 찾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한 느낌을 느끼게 한 것이라고, 개인저긍로는 이유를 찾고 싶다. 아무튼 다시는 쓰지 않겠다니 감사할뿐. ^^ 은희경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
베르메르의 미술 작품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녀의 매력에 빠져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베르메르는 매우 적은 양의 작품을(35점) 남겼는데, 그의 생애에 관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아 미스테리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작가는 그 점이 오히려 자기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장애가 없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베르메르의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을 함께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를 그리는 베르메르의 세밀한 행동까지 상상해 낸 작가의 글은 그림과 함께 잘 이해되었다. 소설 속에서 진주 귀고리의 소녀'그리트'는 베르메르의 하녀이다. 그녀는 매우 현실주의적이면서 또한 현명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메르에 대한 동경과도 같은 사랑을 과감하게 접을 줄 아는 면이나 후에 그의 유언에 따라 받게 된 귀고리를 팔아버리는 설정은 작가가 그녀의 그림에서 이지적이고 차가운 모습이 있음을 읽어냈기 때문일까. 실제로 베르메르가 매우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도 그의 그림이 매우 세밀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사실일 듯 하다. 11명의 자녀라면 부인에게 충실한 가장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소서렝서는 그리트와의 로맨스(?)를 위해 아내인 카트리나는 약간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림을 그린 작가와 그림 속의 소녀 모두 상상해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의 발원이 될 그림으로 계속 여러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병리적 인간상. 현대의 그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이처럼 적절한 단어가 또 있을까. 사회 운동도. 절절한 사랑도. 야망도. 이미 모든 것이 시들해진. 그리고 무기력해진. 사회. 누구나 마음 속에 감추고 살아갈 것 같은. 혹은 얼굴 포장 아래에 숨겨져 있을 것 같은 혐오감과 불신감. 자학과 자책.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더해지는 불쾌함. 이것들이 이 책의 간단한 감상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대체 무슨 정신병자들의 이야기이길래 그렇게 읽히느냐고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 그들의 내면을 작가가 드러내 주지 않는다면 겉모습만은 우리 주변의 모습이나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그 집요한 언어의 파고듦. 신선한 표현과 정신을 자극하는 언어들이 눈과 미각을 새롭게 해 주었다. 특히나 소설 곳곳에 음식을 기반으로 한 표현과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가을이 오면>에서는 딸의 행위가 부적절 하다고 판단한 어머니들이 딸에게 던지는 '미끈거리고 천덩거리는 바로 그 눈빛의 질감'을 미역 건더기에 비유한다. 또 <분홍 리본의 시절>에는 생선 조림을 잘하는 선배의 아내와 고기를 요리하기 좋아하는 '나'를 대비하면서 야채를 끓이는 수림으로 표현되는 여자들의 이미지들 처럼 여섯명이 가족처럼 사는 공동체에 들어온 '그'가 마련하는 일주일 한번의 회식.<솔숲 사이로>, 약콩을 끓이는 탄 내와 죽음이 드리워진 김교수의 집. 관같은 가야금이 등장하는 <약콩이 끓는 동안>, 우정에 대한 복수, 결투의 심정으로 대식가처럼 먹는 '나'를 그리고 있는 <반죽의 형상>, 술과 구토를 다룬 <문상>, 불륜인지 모를 커플의 뽈찜. 그녀가 꿈에서 보았던 남자가 대구로 뒤바뀌는 환상 <위험한 산책> 등. 입맛을 다셔야 하는지 혹은 입맛이 떨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게도 상황은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먹는 것으로 끝난다. 어쩌면 우리 모두 먹기 위해 혹은 먹음으로써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런지.
세기의 바람둥이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해야할까. 호색한이자 난봉꾼의 대명사인 그가 한 여자와의 사랑을 지고지순하게 지켜가며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그로 인한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하는 이야기라면. 돈 주앙이라는 이름이 떠오르게 하는 매력적인 모습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한 사람과의 결혼생활을 통해서도 충분히 쾌락을 누리고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돈 주앙에게 여러 여자와의 사랑을 가르친 페드로 후작은 그의 잡착으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고, 반대로 한 여자와 사랑하는 숭고함을 가르친 마누엘은 자신의 선술집을 대화의 집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소박한 꿈을 이룬다. 그리고 돈 주앙은 마누엘의 교훈을 따른다. 마누엘의 말 중에 인상깊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나도 다른 여자들을 원해. 하지만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할 필요는 없어. 내 아내에게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 아내의 웃음과 눈물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느낄 수 있거든." "대부분의 남자들은 한 여자의 일부분만을 맛보지만 한 여자의 몸과 마음, 영혼을 진실되게 아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만족스러워질 수 있어." 이 말을 끝으로 돈 주앙은 그의 친어머니(마누엘의 아내)세레나에게 자신이 그녀의 아들임을 밝히고 그의 진실된 사랑 '아나아가씨'를 향해 멈추지 않고 갈 수 있게 된다. 글의 주제와 더불어 이 책의 즐거움이라면 중세 스페인 세비야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황금시대이자 종교재판관의 횡포가 성행하던 시대. 잦은 정복전쟁으로 과부가 넘쳐나던 그 때. 소설의 배경으로서 이렇게 매력적인 시대가 있을까. 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사랑의 본질을 한 마디로 정의해본다. "사랑으로 충만한 키스에서 느끼는 기쁨은 낯선 사람과의 천일야보다 더 위대하다." 이 땅의 모든 바람둥이에게 읽혀볼 만 한 글이 될런지. ^^
나는 엄마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아빠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했던 철없던 시절이 언젠가, 인생에 한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한번쯤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만 그 방식 말고 내 방식으로, 살거야. 이렇게 생각한적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우리들을 위한 책이다. 여기 네 청춘이 있다. 각기의 꿈을 가지고 영생을 향해 나아가는 두개골의 서에는 분명 둘은 죽고 둘은 산다고 되어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그닥 믿지 않는다. 자기들에게는 그런 위험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영생을 결국 얻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굳게 믿는 것은 그래 그. 그 혼자라고 해 두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 사원에 도착한 그들이 결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영생을 얻는다면 만에 하나 얻게 된다면 저 사원에 갖힌 저들처럼은 살지 않겠어. 라고. 네명의 청춘이 꿈꾸는 영생의 모습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지다. 그야말로 영생을 얻는다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 할만한 인생을 말하는 그들. 그러나 친구 둘의 생명과 바꾼 영생을 가진 그들은 그 삶의 무게 때문에 사원에서 조용히 자리잡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그런 것.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고 버둥거리지만 결국은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살게 된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생의 부분들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삶을 인정하고 젊은 날의 꿈을 격려하게 되면서 끝내는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