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인 '나'는 카프카스의 어느 산속을 여행중이다. 여행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노인 막심 막시므이치는 화자의 흥미를 끄는 한 이야기를 해주게 된다. 그 노인은 다양한 인종을 경험해 봤을 뿐 아니라 여행중에 필요한 팁을 많이 알고 있었다. 화자는 그의 도움을 받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기를 계속 작성해 나간다. 노인이 해 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젊은 청년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페초린이다. 그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매력적인 악의를 지닌 인물이다. 페초린은 카프카스의 요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작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의 어린 딸 벨라를 마음에 두게 된다. 그는 그녀의 동생이며 분별력이 아직 부족하고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도련님 아자마트를 이용해 벨라를 얻는다. 카즈비치의 애마 카라교스를 그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그의 누이 벨라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 거래는 놀라울정도로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 애마를 잃은 카즈비치의 분노는 벨라의 아버지인 미르노이공작을 죽이고 결국은 벨라까지 목숨을 잃게 만든다. 페초린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지만 벨라에 대한 사랑도 한때였던 듯 그녀의 죽음 이후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는 초연함으로 주변을 무색케한다. 그리고 갑자기 실제 인물로 등장한 그와 애정어린 재회를 꿈꿨던 막심 막시므이치의 기대도 한 번에 저버리고는 그에게 있던 자신의 일기마저도 그저 내팽개친 채 페르시아로 떠난다.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화자인 '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페초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며 그의 일기중 일부분을 공개하겠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이후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는 페초린이다. 그는 타만에서 밀수꾼들을 만나 결국 그들을 해체하게 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이부분에서 그는 그다지 악한 의도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밀수꾼들을 잡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결국 장님소년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니 주변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의 인생의 결과는 그의 의지때문일 때도 있지만 어쩌면 그의 운명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숙명론자에서 그의 운명이 페초린에 의해 결정되어버린. 불리치의 죽음처럼 말이다. 그루슈니츠키는 영웅이 되는 것이 목표였던 남자다. 그러나 그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서도, 또 주변으로부터도 영웅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은 비참하게 죽어야했다. 영웅이 되고싶다는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 페초린을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고 이름붙인 편집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대 모든 악덕이 모인 남자. 이 시대에는 그런 인물이 자꾸 등장하고, 그런 인물 때문에 몇몇 선량하거나 평범한 인물들이 불행에 빠지게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일까.
어릴 때 옛날 이야기나 그림책에서 보았던 이야기거나, 조금 더 커서 우화라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접한 이야기일 것이다. 처음에는 우화라는 이야기와 동일한 의미인 줄 알았던 이솝이 커서는 사람 이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그가 실재한 인물이 아닐 가능성까지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바로 이 우화가 아닐까 싶다. 어릴 때는 이야기가 단순히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면 지금 읽을 때에는 그래. 사람이 그렇지. 또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재미랄까.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누가 지었다고 하기 보다는 애초에 어떤 원형이 있고 그것이 조금씩 보태어졌으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하다. 이솝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이 전달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도 아니라면 그가 순수하게 지었다고 볼 수도 있겠고.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이 아닌 것들에 빗댄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날카로운 비판이 가능하다는 점이 우화가 갖는 장점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원수의 죽음을 볼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이나, 자기보다 더 나은 인물에게 자기의 잘난 면을 보이려고 하다 망신을 당하는 모습은 우리 실제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 주인공들의 모습이 어느 때의 내 모습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많이 들은 이야기부터 생소한 이야기까지 삶에 도움이 되는 할머니 옛날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는 순간에 펼쳐보면 좋을 책이다.
한 노 부인의 몸짓에서 이 소설은 탄생한다. 얼굴은 그 개인의 고유한 것이지만 몸짓은 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영역이 아니라는 점. 그러나 어떤 몸짓은 그 주인의 이미지를 규정한다는 점. 하지만 그 몸짓을 다른 이에게서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개인이 몸짓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몸짓이 개인들을 거느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이런 점들은 노부인의 몸짓을 그녀 고유의 것으로 갖고 있었던 한 여인 아녜스를 탄생시켰다. 아녜스는 일탈을 꿈꾼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자유를 꿈꿀 가능성을 품게 해 줄만큼 여유있는 돈을 남겨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사랑한다. 딸도 있다. 가족에게 아무런 불만은 없지만 가끔 그녀는 그녀만의 공간을 원한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지 않아도 되는 곳. 온전히 그녀 하나로 가득 채워진 공간. 로라가 사람들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불멸을 꿈꾸었다면 아녜스는 사람들이 없는 공간에서 완전한 존재가 되는 불멸을 꿈꾼 것은 아닐까. 이야기는 베티나와 괴테에게로 넘어간다. 불멸이 보장된 사내 괴테를 통해 자신의 불멸을 꿈꿨던 여인 베티나. 진실이 무엇이던간데 베티나는 불멸에 성공했다. 그녀는 괴테의 연인으로 남았다. 괴테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연인 베티나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작가가 마지막 노년에 불태웠던 사랑의 대상을 어찌 사람들이 잊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녀를 피하기 위해 괴테가 그토록 노력했다고 할지라도, 베티나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의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어느 면에서 괴테보다 더 노련한 작가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직접 지어냈다. 소설속의 소설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작가는 소설의 탄생과정부터 진행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작가가 어느 노부인의 몸짓을 발견한 것에서 시작한 자기 경험의 토로로 시작하여 잠결에 들은 뉴스의 내용. 어느 소녀가 도로 위에 자살을 목적으로 웅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 소녀를 제외하고 그 도로위를 질주하던 자가용 운전자들이 사망하거나 다쳤다는 소식. 베티나의 불멸을 향한 욕구와 그녀가 천진함을 가장하여 괴테의 무릎에 앉았던 일화는 로라가 그의 형부인 폴의 무릎에 앉는 것으로 대체된다. 소설이 그 작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작가는 그가 경험하는 세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 이보다 더 잘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친구인 아베나리우스 교수를 만난다. 이 인물은 꽤나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아녜스의 동생 로라와 아는 사이이며 아녜스의 남편 폴의 변호를 받은 적이 있다. 아베나리우스 교수는 작가와 등장인물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다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가 밤이면 식칼을 차고 타이어에 구멍을 내고 다녔기 때문에 폴은 그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의 자동차 역시 교수에 의해 펑크가 나 버렸기 때문에 아내 아녜스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빨리 가고 싶었지만 15분 지각하게 된다. (그는 이 펑크로 30분을 허비했다.) 그는 등장인물이면서 실존인물처럼 보이지만 서술자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매우 다양한 면에서 즐거움을 준다. 이야기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그 독특한 구성이 주는 즐거움. 역사속의 인물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즐거움. 삶에서의 에피소드가 소설에서의 에피소드로 탈바꿈하는 즐거움. 등등. 밀란 쿤데라에게 자꾸만 빠져드는 이유는 이렇게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즐거움을 이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유진 오닐 자신의 이야기를 쓴 자전적 글이다. 자신이 죽은 후 이십오년간은 작품을 발표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그가 가슴아파했던 이야기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족들에게조차 돈을 아끼는 구두쇠 아버지와 그 때문에 마약중독자가 된 어머니, 알코올 중독 수준에다 창녀들과 어울리는 데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형과 함께 살아야했다면 끔찍한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면 이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또 가족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증오하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 이해될 수 있을까 싶게 이해된다. 아버지 제임스는 배우였다. 그는 자신이 돈 때문에 삼류배우로 전락해 버린 사실을 가슴아파하지만 자신도 자신의 기질을 어쩔 수 없어 괴로워한다. 부동산에 집착하고 늙어서 양로원에서 살다 죽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살아온 과거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 남매와 어머니를 두고 고향에 돌아가 죽어버린 아버지 때문에 가장의 짐을 져야 했던 그는 1달러가 온 식구를 먹여살리는 돈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의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시절은 그에게 돈을 쓰는 일이 두렵도록 가르쳤다. 뼛속까지 익힌 그 두려움 때문에 제임스는 그의 아내 메리가 통증으로 괴로워할 때 단순하게 모르핀을 처방해버리는 돌팔이 의사에게 맡기는 실수를 하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좋은 의사에게 식구들을 보일 생각 따위는 못하는 노랭이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위로했을 것이다. 그 의사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 줄 몰랐다고. 아들 에드먼드를 살피는 하디의사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그저 편견일 뿐이라고. 그가 값이 싸기 때문에 돌팔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그는 그렇게 자라온 사람이다. 그래서 에드먼드는 그에게 반항하고 그를 비난하면서도 결국 그를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머니 메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에드먼드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를 낳는 일이 그녀에게 두려움이었기 때문에 그가 아프다는 소식에 두려운 것이다. 낳지 말았어야 할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 그 전에 자신의 불찰로 죽인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그녀를 옥죄었다. 그녀에게는 안정된 집. 가정이 필요했지만 남편은 그녀에게 그것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마약중독은 그녀 자신의 자제력에만 호소해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녀는 마약이 필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역시 에드먼드가 비난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녀는 그의 눈에 가장 불쌍한 피해자였을 테니까. 그래서 형은 그에게 친구이자 숭배해야할 대상이었다. 이미 제이미는 동생 유진에게 홍역을 옮겨 죽게 한 전적이 있었다. 열 살 난 그 때의 그가 과연 알고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그가 그러한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는 방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에드먼드에게 취해서 한 고백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그는 스스로의 어느 한 부분이 동생이 죽었으면 바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형제는 가장 최초의 살해대상이었으니까. 형제간의 질투는 아주 태초부터 살인을 동반했으니까. 실제로 작가 유진 오닐은 셋째였다. 죽은 둘째 형의 이름이 에드먼드였다. 그러니 이 이야기에서 죽은 유진과 에드먼드의 이름만 바꾼다면 그의 실제 삶에서의 한 부분을 그대로 재현한 것일 터이다. 작가가 자신의 삶의 부분을 사람들 앞에 드러낸다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이 치명적일수록 두려운 일일 것이다. 그가 그 사실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삶의 질곡을 호소하고자 함이었을까. 아니면 이야기의 모든 부분. 모든 시선에서 느껴지는 그의 가족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을까.
스케치는 잘 짜여진 그림이라기 보다는 인상이다. 색을 덧입히기 전의 상태. 표현하고자하는 내용만 간략하게 들어있거나 또는 색을 입히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면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그림. 런던스케치는 딱 그런 그림을 상상하면 된다. 런던의 하루하루를 때로는 스쳐지나가는 지하철에서의 사람들의 모습이, 카페의 한 구석에 앉은 부부의 모습, 가족의 모습. 그리고 나이든 이들의 모습과 젊은 이들의 모습이 지나가는대로 휙휙 스케치 되어 있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은 후에 읽게 된 작품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녀가 '가족'이라는 테마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근간을 이루는 남녀 간의 사랑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말하는 남녀간의 살은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가족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이루기에 적합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함께 살기 힘들도록 만들었는가.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중요한 아이들에 대한 시각도 매우 깊이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아이들의 일탈은 그녀의 필체에서는 매우 현실적이고 진지하다. 아이가 자립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를 감싸주고 싶어하는 어머니. 부모의 지나친 이론적 배려 때문에 오히려 화가 나는 자식의 모습. 어린 나이에 출산을 하고서 아무렇지 않게 집에 돌아왔지만, 결국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보다 성숙하게 꾸려가겠다고 결심하는 소녀의 모습. 이러한 모습들은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아! 이 부분의 이 장면을 향해서 이야기가 달려왔구나를 느끼게 해준다. 도리스 레싱과 함께 런던을 거닐어보자. 그녀가 스케치한 그림들에 담긴 사람들의 모습을 같이 들여다보자. 그러면 그림으로부터 시대의 모습이. 또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 우리와 함께 걸어다닐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