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작가 박완서가 “그 많던 싱아들은 다 어디로 갔”는 지를 끈질기게 묻고 있을 때, 사라져 버린 것은 비단 ‘싱아’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많던’ 싱아들이 결국 다 사라져 버리고 나면 ‘싱아’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박완서의 소설 제목으로서는 ‘싱아’라는 말은 박제(剝製)처럼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싱아’가 사라지기 전부터 계속 사라져 왔고 사라져 가는 ‘그 많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언어들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에서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 지를 추적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사라져 왔는지, 어떻게 사라져 왔고, 또 사라져 가고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국에는 앞으로도 더 많은 언어들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약 6천여 종의 언어 중에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럼으로써 저자들은 이 사라져 가는 언어들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서 그 언어들을 보존하고 유지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어가 소멸한다거나, 잔인하게도 사멸(死滅)되어진다고 하는 것에 우려를 표명(表明)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그간 언어학계와 사회 일각에서 종종 언급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들의 이런 우려의 표명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적하는 언어의 사멸과, 그에 대한 우려가 가일층 강도 높게 읽히는 이유는, 이러한 언어의 사멸이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현재 각계에서 동의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와 오염의 문제가 이 언어의 사멸의 추세와 함께 동반하고 있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끌어내면서, 언어의 사멸이 생태계 전반의 문제를 대표하는 척도(尺度)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직 학계에서도 생소한 ‘생태 언어학’이란 학문 범주(範疇)를 이룬다. 어떻게 언어와 생태, 즉 자연이 관계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이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인데, 이는 “인간들의 언어들 속에” 이 생태계 전반과 긴밀하게 관계되는 “자연 환경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이것은 생태계 전반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청난 재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어 다양성의 상실은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언어가 생태계의 일부인지, 아니면 언어는 곧 생태계의 전부인지를 따지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유의미하겠지만, 어쨌든 언어와 생태계의 연관은, 그 소멸 현장이 공통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언어에 대한 우리 사회 일반의 인식에 의한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매개 역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각과 정신, 그리고 사회 문화를 폭넓게 담고 있는 유산이기에, 그러한 언어의 사멸은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의 소멸이며, 복원 불가능한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언어가 각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소산이며, 그 사회의 사고와 인식을 주관하는 매개로서, 각 사회 개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때, 언어의 상실은 곧 그 정체성의 상실임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결국 언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으로서, 그 가치와 보존의 정당성을 여실히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이 추적하기에 최근 200년간의 언어의 변화, 그 중에서도 소멸의 양상은 인류 기원의 시작과 그 맥을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같이한 오랜 언어의 역사적 양상과 대비할 때 매우 특이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몇몇 세계 언어들이 확산됨에 따라 많은 소규모 언어들이 사멸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는 세계 인구 중 약 90퍼센트가 백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재편됨에 따라 영어와 몇몇 세계 언어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재편이 “적자생존”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 아래서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시장경제 체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지배적인 언어의 등장은 사회적 변화가 불균등하게 일어남에 따라,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간에 현저한 자원의 불균형이 생긴 데서 나온 결과이다.(41쪽)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 책 전체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남음이 있다.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체제’가 ‘이상적인’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작금의 언어의 사멸이 단순히 어떤 자연적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생태계 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른 바 산업화와 공업화의 근대적 발전 이데올로기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급성장한 서구 근대 국가들의 산업화와 공업화 공세에 전 세계의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파괴되기에 이른 것이고,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와 경제 논리의 미명 아래 이러한 발전 이데올로기가 합당한 것으로 치장된다. 생태계가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려하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의 원인은 저자들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생태계와 언어의 관련성에 비추어, 언어 사멸의 제1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사회 변화는 자연적인 흐름이면서 필연이고, 그에 따른 언어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일부 선진국들의 언어가 대다수의 소수 언어들을 잠식(蠶食), 살해(殺害)해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매우 부당한 것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들의 말처럼, 산업화와 공업화를 앞장서서 세계에 전파했던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행각에 의해 사회적, 국가적 불균등이 생겨나고, 이러한 불균등 심화와 그에 따른 강압과 억압, 그리고 직 · 간접적 통제에 의해 언어가 사멸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변화, 즉 언어의 생성, 변화, 소멸은 그 언어가 기반으로 하는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사회의 변화는 곧 언어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그 둘의 관계에 입각할 때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 언어가 통째로 포기되어지고, 이른 바 언어가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그렇게 곧이곧대로 자연스러움을 부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언어 제국주의, 언어 식민주의’란 명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의 언어가 식민지의 언어로 강요되는 현 실태는 불합리하고도 참혹한 언어 말살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들은 이 책에서 언어의 소멸과 관련한 명명(命名)을 두고 논하면서, ‘언어의 자살’이란 명명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언어가 급변하는 사회에 맞게 자연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이미 앞에서 언급 했듯이, 그것은 언어가 살해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타살이란 측면이 강하다. 간혹 소수 언어의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네 언어를 포기하고 제국의 언어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원에는 자발성의 측면보다는 경제적 생존 논리에 의한 무의식적 강압이 작용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의 입장은 타살로 보는 것에 가깝다.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문에서의 표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사멸’이라고 부르듯이 그들의 논조 또한 피살되어지는 것으로 보는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여하튼 언어가 그렇게 사멸해 가는 것에 대한 일각의 이런 경각심을 모두가 호기(豪氣)롭게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로 대변되는 변형생성론자들의 논법을 따르는 이들의 경우 언어는 그 기저에 심층구조상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의 이러한 변화 내지 사멸은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이런 심층구조의 동일한 보편성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심층구조로 발화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심층구조 상의 생각이 각각의 사회의 사고방식 및 문화, 정체성에 따라 제각기로 표현되어지고 발화되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때 확실히 그런 언어들이 사라지고, 다양성이 극소수 몇 개의 언어만의 획일성으로 점철되는 것은 쉽게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언어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9개가 같고 1개가 다른 대동소이한 것이라 하더라고, 약 6,000여개의 언어가 가지는 다양성의 폭, 즉 ‘소이(小異)’한 것들의 개수는 6,000개 그 이상이며, 이것들이 사라진다고 할 때, 언어의 이런 보편성만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기에는 그 손실은 크나큰 것이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이 책에서 생태 언어학적 측면에서의 언어의 사멸을 고찰하고 있고, 그 원인으로 공업발전만을 강조한 서구의 경제논리에 따른 각기 사회의 불균형성을 들고 있지만, 아울러 그것이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구조는 ‘언어 식민주의’적,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을 보인다. 초강대국 미국의 언어인 영어와 강대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언어들 아래 재편(再編)되어진 중심부, 주변부의 언어들의 역학(力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이른바 ‘언어 제국주의’적 양상인데,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주변부들의 언어가 급속도로 제국의 언어의 강압 아래 굴복하고 복속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그러한 논리를 직접적으로 가져오진 않지만, 일부분의 서술에서도 그런 제국주의 논리가 언어의 사멸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는 있겠다.




우리는 언어 정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규모가 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강제로 사람들을 “현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잘되어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고, 잘못되면 다른 문제들을 덮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세계 경제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다른 세계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모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쉽사리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들에게 스스로 개발 조건을 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흔히 양쪽에 모두 유리한 방안을 찾아낼 것이다. 즉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보다 광역의 경제 및 정치 체제에 적절히 전략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되면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가 이루어져서 그 사회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가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중심지 언어와 주변 언어들이 오랜 갈등을 겪는 동안 변방의 사람들은 진정한 선택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선택은 인권의 측면에서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 모두 이로운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248쪽)




  저자들은 언어의 사멸 양상을 추적하면서 언어가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근 200년에 걸쳐 소멸되고 있으며, 그것은 생태적 파괴의 양상과 우연 이상으로 일치한다고 근거를 들어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가 인류의 자원이며, 그 소멸은 인류에게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물의 다양성 보존과 함께 언어의 다양성도 유지, 보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그들이 추구하는 언어적 다양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철저한 다중 언어 사회(多重言語社會)’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유지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국주의적인 외부의 근대적 발전의 강요와 억압은 그들의 자율과 권리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모든 다양성을 말살하는 것일 뿐, 아무런 득 될 것은 없다.

  이러한 ‘다중 언어 사회’를 이루기까지 필요한 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 보존하고, 그것이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대안들이 필요하다. 저자들은 그러한 대안 찾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여기서 그것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여러 가지 대안들이 있고, 그러한 대안들이 조속히 실천에 옮겨져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저 강대국 언어의 사용자들이 이러한 생태 언어적 현실에 대하여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그것을 유지 보존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들이 거기에 무관심하고 외면할 때 소수 언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많던 싱아”를 따라서 어디론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과 해결책들, 그리고 조속히 처리해야할 구체적인 방법들은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죽음』에서 보다 잘 설명되고 있다. 그 책과 함께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유효한 독서 방법이기도 하겠다.

  언어의 사멸은 우리 아닌 타 언어 사용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언어를 어떻게 구분 짓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내부에서도 언어는 사멸하고 있다. 방언도 엄밀히는 언어 중의 하나이고, 그것은 한국어 내부의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 또한 표준 한국어에 밀려 점차 사멸되어 가고 있다. 특히나 우려스러운 것은 다분히 독특한 점들을 보여주는 제주도 방언이 급속도로 사멸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어학계의 우려가 크다. 이런 내부의 문제이기도 한 언어의 사멸에 관한 우려를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와 애정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듯이 보이는 저 머나먼 타국의 소수 언어들이 사멸해가고 있는 현실은, 곧 우리 전 인류의 공통된 손실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전 지구적 손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우리는 인류에게 끼친 손실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 몰입 교육’이니, ‘영어 공교육 강화’니 하는 것들도 언어의 사멸의 과정에 있어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다중 언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제1언어인 한국어로 우리의 정체성을 갖추고,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들을 존중하고 배워가면서 언어적 다양성을 통해 전 인류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상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와 이웃한 중국, 일본 등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맺어오긴 했지만, 이런 언어적 다양성을 추구할 때, 우선적으로 이런 이웃의 언어를 존중하고 배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당시 제국의 언어인 중국의 문자를 통해 한 · 중 · 일은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고, 가능해지려면 영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연대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 이웃한 나라들만이라도 제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내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이 한 자리에서 중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은 일본어로 말하며, 일본인은 중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속에 다중 언어 사회의 구체적 모습이 희망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 공교육 강화’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共교육’이 아니라 ‘公교육’이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최상의 영어교육이 제공되는 것이 곧 공교육의 모습이다. 이것은 나아가 다중 언어 공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저 독재(獨裁) 정부가 그렇게 노래만 불렀으나 도달할 수 없었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사족을 더하자면, 몇 년 전부터 한글을 세계에 전파하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운동은 그것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할 일이다. 다니엘 네틀 등이 강조했듯이 언어에 있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그 언어 사용자들의 노력이 필수적인데, 거기에다 한글의 우수성은 곧 한민족의 우수성이고, 그런 자긍심과 민족적 우수성을 전파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한글 전파 운동은 성공할 수 없는 외부의 억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지만, 또한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의 장단점이 있다. 어떤 점에서 한글은 영어나 한자, 일본의 가타가나 보다 단점이 많을 수도 있고, 또 그와는 달리 그것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한글이 만능은 아니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3-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서 2차에 걸쳐 읽었더니 뭔 말인지...그래도 결론은 확실히 알아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내 언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며, 타인의 언어로 말해주고 전달하는 다중 언어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UN의 유네스코에서 까막눈(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수여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가치와 공적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상징으로 우리의 큰 자랑거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로 두 달 여만에 눈길주기다. 두 달 동안 새로나온 책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책들에 눈길주는 일을 (조금 소홀히 하긴 했지만)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두 달 사이에 계절은 바뀌고 있고, 나는 하루 하루 쇠락해지고만 있는 것 같고, 그간 무심했던 내 눈길을 피해 요리조리 잘도 숨어 있던 책들이 한가득이다.

오랫만의 눈길주기에는 오늘 깔끔한 봄날씨 마냥 산뜻한 책들이 가득해서 기분 좋다.

 

[역사/인물]
KBS 한국사傳 제작팀,『한국사傳』, 한겨레출판, 2008.3.

KBS에서 방영된 역사 관련 프로그램이 책으로 나왔다. 그간 KBS에서 제작, 방영된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이 책으로 많이 나왔었고, 대단히 칭찬받을 만한 일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이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역사를 뒤흔든 개인들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그간의 역사 서술이 왕조의 역사, 전쟁의 역사에 치우친 것이었다면, 그것으로부터 소외된 역사적 개인, 민중의 이야기로 새로쓰여진 역사 서술이 요구되어지고 있는 지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다. 영조와 신숙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가령 "임진왜란의 숨은 주역"이었다는 홍순언이라든지, 최근 소설화 되었던 리진의 이야기 등이 담겨있다. 이런 책을 흥미있게 탐독하는 것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 당했던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들, 곧 개개인으로서의 역사적 민중들의 이야기들을 복원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고전소설]
남영로,『옥루몽 1~4』, 보리, 2008.1.

겨레고전문학선집 31권부터 34권까지를 "19세기 당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옥루몽이 차지했다. 사실 보리에서 펴내는 겨레고전문학선집 시리즈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정열적으로 펴내는 물량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옥루몽 완역은 더욱 반갑다. 이 옥루몽은 19세기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듯 하다. 구운몽에서처럼 환몽구조를 가져오면서도 사랑이야기, 박진감 넘치는 대결 구도 등이 재미를 더한다. 옛 소설이 오늘날에도 재미나게 읽힐 수 있다면, 그 첫째가 이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회과학]
박경태,『소수자와 한국사회』, 후마니타스, 2008.2.

후마니타스에서 펴내는 민주주의 총서 7번째 책이다. "인종주의, 민족주의, 혈연주의적 시각에서 차별의 대상인 한국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이 민주주의 총서에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른 민주주의라면 소수자에 대한 소외와 공존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수자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사실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 저자 박경태가 풀어나가는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소수자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리에 그에 대한 대안과 우리 사회의 방향을 함께 경청하고 싶다.

[소설/음악]
전지한,『누구나 일주일 안에 피아노 죽이게 치는 방법』, 에듀박스, 2008.2.

교본인 줄만 알았더니, 소설이라네. 예전에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했더니 부모님께 야단만 맞은 기억, 보충수업 빼먹고 두 달 간 피아노 배우러 다녔던 기억, 패달도 닿지 않는 작은 꼬마 녀석을 보고 피아노를 포기했던 좌절, 나는 이런 기억과 좌절 속에서 피아노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득하다. 언제가 꼭 피아노를 배우고 말 거라는 다짐을 해왔는데, 제목이 내 눈길을 정면으로 받아버렸다. 그런데, 소설이라고? 소설이면 어떻게 교본이면 어떠랴? 아무튼 이 조합은 특이하면서도 재밌을 것만 같고, 정말로 일주일 만에 피아노 쳐서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2002년 결성된 밴드 '피터팬컴플렉스'의 리더 전지한이 쓴 연애소설 겸 피아노 교본"이란다. '피터팬컴플렉스'가 뭐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연애소설이란다. 이 참에 연애소설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이 산뜻한 봄맞이로는 나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내 로망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이 로망의 미래가 이 책에 그려져 있다고 하니, 피아노도 배우면서 확인해 보자.

[심리]
루보미르 라미,『우리는 왜 친구의 애인에게 끌리는가』, 브리즈, 2008.2.

이상도 하지, 제목이 딱 내 증상이다. 평소에 거들떠도 안 보던 여자애가 연애만 한다고 하면 왜 그리 예뻐보이는지, 나 원 참. 이런 얘기를 주위에 하면, 놀보심보라고들 한다. "남주긴 아깝다"고 생각하는 거라나, 그렇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내 여자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아무튼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에 내가 속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다소간 '금지된 사랑'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듯하다. 일종의 타부다. 이 책이 나의 이런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여기서 다루고 있는 '금지된 사랑'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호기심도 발동하기도 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8-03-19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마지막건 뭡니까.

멜기세덱 2008-03-19 01:29   좋아요 0 | URL
ㅋㅋ, 저에게 아프님의 애인은 보여주지 마세요....ㅋㅋ

웽스북스 2008-03-1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심뽀라고 해보는건 어떨까요 ㅋㅋ

멜기세덱 2008-03-19 01:29   좋아요 0 | URL
멜기의 마음은 여리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요......ㅠㅠ;;

2008-03-19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03-1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책의 결말은 왠지 남의 눈에 눈물 지 눈엔 피눈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L.SHIN 2008-03-1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일주일 안에 피아노 죽이게 치는 방법].....정말 제목만 본다면 전혀..
소설로 알지 못하겠는데요.(웃음)

순오기 2008-03-22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사전' 찜합니다. 유일하게 보는 프로거든요.
이 책은 남의 애인 아닌 알라딘의 내 애인에게도 선물해야겠어요.^^

순오기 2008-04-05 08:24   좋아요 0 | URL
이번엔 제 책으로 구입했어요.
한시간만 기다리면 도착할 것 같아요.
 

사단법인 한국어문회에서 발간하는 <어문생활>에 '대학생 좌담회'란 코너가 격월로 연재된다. 이번 3월(2008. 3. 통권 제124호) 좌담회는 인하대학교에서 맡았다. 얼떨결에 내가 사회를 보고 후배들을 데리고 좌담을 하게 됐다. 어쨌든 모여서 오랜 시간을 얘기했지만 지면 관계상 일정부분 삭제도 하고 가필도 해야 했다. 여기에는 <어문생활> 2008년 3월 통권 제124호에 실린 '대학생 좌담회'를 옮긴다.

본문 전체는 http://www.klls.or.kr/에서 PDF 파일로 내려받아 볼 수 있다.

座談 <漢字와 國語敎育>

 

司會(安炯男) : 안녕하세요? 추운 날씨 속에서도 이렇게 座談에 參與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모이신 분들은 모두 ‘國語敎育’을 專攻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 ‘漢字’와 關聯해서 보다 重要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漢字와 國語敎育’의 關係부터 따져보는 것이 必要할 것 같습니다.

曺大元 : 國語敎育은 말 그대로 國語를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漢字와 國語의 關係를 살펴보면 자연히 國語敎育과의 關係까지도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國立國語院에 따르면 󰡔標準國語大辭典󰡕에 올라있는 主標題語 44만여 개 중, 漢字語가 57.3%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漢字語와 混合된 형태까지 합하면 國語 語彙의 60% 이상이 漢字語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는 漢字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언어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보다 漢字와 國語의 關係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言語敎育으로서의 國語敎育에 있어 漢字 ․ 漢字語 지도는 必須的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禹壯元 : ‘創意的 國語使用 能力의 伸張’이라는 國語敎育의 목표에서 볼 때도 漢字와 漢字語의 必要性은 浮刻됩니다. 풍부한 어휘의 사용은 思考力의 擴張과 直結되고 곧 ‘創意的 國語使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漢字語 없이는 풍부는 고사하고 言語生活 자체가 거의 不可能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國語敎育은 이런 점을 충분히 考慮하고 反映해야 합니다.

劉錫鍾 : 國語와 國語敎育은 단순한 言語敎育에만 局限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歷史와 文化, 傳統이 統合되어 있는 高度의 정신을 繼承하는 것이기도 하죠. 이러한 것을 傳承, 發展시켜 나가는 것은 바로 國語敎育이 담당해야할 부분입니다. 우리의 歷史와 傳統은 대부분 漢字를 바탕으로 이룩되어 왔습니다. 國文學이나 國語學 등도 마찬가지지요. 漢字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된 國語敎育이 이루어기는 萬無한 일입니다.

司會 : 우리말에 있어 漢字語가 차지하는 比重이 매우 높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國語敎育에 있어서 여기에 대한 指導가 어느 정도는 이루어지고 있을 것 같은데요?

李玹敉 : 中學校에 다니는 동생의 󰡔국어󰡕 교과서를 보니, 각 단원의 끝에 어려운 낱말이나 漢字語 등을 정리해 놓았더군요. 그런데 실제 수업에서는 여기에 대한 指導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國語敎育課程’을 봐도 漢字語 指導를 언급하는 부분은 전혀 없고, 󰡔교사용 지도서󰡕 등에서도 여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상 漢字 ․ 漢字語 指導는 실제 國語敎育 현장에서는 全無하다고 하겠습니다.

曺大元 : 개정 敎育課程에서는 ‘狀況’과 ‘脈絡’이라는 요소를 매우 重視합니다. 이를 근거로 漢字語의 해석을 單語의 前後 맥락에 맡기는 식의 어휘지도를 强調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漢字를 몰라도 되죠. 게다가 한문교과가 따로 있으니 漢字는 國語敎育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國語敎育에서의 漢字 ․ 漢字語 指導의 死角이 形成되고 있습니다. 文脈에서 대강 해결하면 된다거나 한문교과에 책임을 轉嫁하는 식으로요.

司會 :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닙니까? 요즘 학생들의 경우, ‘主觀’이나 ‘客觀’, ‘形象化’ 같은 기본적인 용어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약간의 漢字에 대한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國語敎育에서 漢字 ․ 漢字語 指導가 必要한 이유가 될 수 있을 텐데요?

曺大元 : 그렇습니다. 漢字語는 漢字를 통해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이 가장 效果的입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대강 類推하는 것은 限界가 있죠. 우리말에서 漢字語가 차지하는 부분이 대다수라는 점을 통해 볼 때, 漢字語 指導는 다름 아닌 國語敎育의 소관인 것입니다. 결국 漢字를 통한 漢字語 指導가 國語敎育에서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특히 意味 辨別로서의 漢字 ․ 漢字語 指導가 가장 重要합니다. 漢字語를 적절하게 사용할 경우 狀況에 맞는 意味 傳達이 圓滑하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서 적절하게 使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漢字 指導가 必須的인 것이죠.

司會 : 얼마 전 <語文生活>에 실린 러시아에서 귀화한 朴露子 敎授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外國과 달리 우리의 경우, 漢字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傳統과의 斷絶이 심각한 지경이라고 합니다. 청소년이나 일반인들의 경우 책이나 신문에 조금이라도 漢字가 있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일종의 漢字에 대한 두려움 내지 偏見도 두드러져 보이는데요, 여기에는 國語敎育의 責任도 가볍지 못할 것 같습니다.

劉錫鍾 : 맞습니다. 近代에 들어오면서 漢字 ․ 漢文에 대한 偏見이 조장되어 왔습니다. 近代化와 함께 옛날 것은 나쁜 것, 버려야 할 것이란 二分法的 사고가 나타나는데요, 漢字도 그와 함께 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릅니다. 國語敎育에 있어서도 漢字語는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기고 우리 고유어만을 강조해 오다보니 자연히 學生들도 그런 偏見 속에 갇혀버린 것이죠. 그에 따라 漢字에 대한 接近性이 매우 낮아졌습니다. 반면 異質性은 높아졌죠. 漢字는 우리 것이 아니고 外國 것이라는 偏見, 固定觀念으로부터 否定的 認識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司會 :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텐데요?

禹壯元 : 漢字나 漢字語에 대한 그러한 二分法的 사고, 否定的 認識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早期敎育을 통한 接近性을 높이고, 漢字에 대한 興味나 관심 유발을 위해 다양한 매체나 교수 ․ 학습 방법을 개발해야 하겠죠.

劉錫鍾 : 原論的인 이야기 같습니다만 傳統文化에 대한 强調가 必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傳統文化에 대해서는 케케묵은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國語敎育을 통해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소중한 傳統文化가 있기까지, 漢字가 얼마나 유용하게 使用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司會 : 지금까지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을 한 것 같습니다. 國語敎育에 있어 漢字 ․ 漢字語 指導의 重要性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매우 소홀했었다는 사실을 反省하는 기회였던 것도 같습니다. 사실 그것을 소홀히 하고 배제해서는 올바른 國語敎育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國語敎育 專攻者로서 우리부터라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바꾸어 나가야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오늘 座談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漢字와 國語敎育’에 대해 말씀을 나눠주신 네 분께 감사드립니다.

參席者

安炯男(안형남 / 인하대 국어교육과 조교)

趙大元(인하대 국어교육과 학사과정)

禹壯元(인하대 국어교육과 학사과정)

劉錫鍾(인하대 한국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李玹敉(인하대 국어교육과 학사과정)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ookJourney 2008-03-16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저는 한글 전용에 대해서만 주로 듣고 살았는데, 오늘 새로운 시각을 배우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8-03-17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시각이랄 것까지는 없고요, 논의가 겉핥기 수준이라서...
 
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옛 삼한 시대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그러니 언제나 이곳은 신성한 곳, 성지(聖地)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속세의 어떤 힘도 이곳을 범할 수 없었다.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권역이 이 '소도'라는 곳이었다. 주지하듯이 '솟대'로 경계지어진 이곳에 죄인이 도망쳐 오면 누구도 그를 잡아갈 수 없었다. 역사 이래 이런 신성불가침의 권역들이 종종 존재했던 것 같다. 그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절대적 권역을 쉽게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종교적으로 신성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곳에는 속세의 권력이 침범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런 신성불가침의 위엄은 곧잘 역사적 위인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등이 그러한 예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종이나 이순신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트집을 잡는다면 거의 예외없이 무시무시한 댓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공로가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되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비판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그런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마더 테레사(Agnes Gonxha Bojaxhiu, 1910~1997) 수녀를 들 수 있다.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교도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 이르기까지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가난에 대한 봉사와 선교활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지고 있다. 그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는 가난과 굶주림이 있는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 그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며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간주된다.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불문하고 이 사랑의 선교회로 많고 적은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 테레사 수녀가 그들의 후원금을 좋은 곳에 써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녀의 이런 공로를 높이사 1979년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됐다. 2003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반열에 오르고 이후 시성절차가 진행중이라는 데 아직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는지는 과문하여 잘 모르겠다. 그녀의 이런 공로와 사랑의 실천에 어느 하나 존경은 못할 망정 누가 감히 비판하겠는가? 함부로 나서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성절차를 진행하면서 교황청에서는 '악마의 변호인'(시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검사 역할을 하는 증성관(證聖官))을 선임했다. 교황청이 선임한 '악마의 변호인'은 히친스였다. 몇 년 전 영미권 지식인 중 5위에 오른 이 뛰어난 저널리스트는 거침없이 이 '악마의 변호인'을 맡았다. 아마도 이 증성관 역할이 히친스에게 오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정중한 고사를 거친 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히친스를 증성관으로 선임한 교황청은 어쩌면 악수를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더 테레사가 성인을 반열에 오르는 데 치명적 결격사유를 히친스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 『자비를 팔다』(원제 The Missionary Position)가 그것이다.

'The Missionary Position'이란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면적 의미로는 '선교의 입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이 가지는 다른 의미는 '선교사의 체위', 즉 섹스의 '정상 체위'를 뜻한다. 이 원제는 이 책의 영미권 출간 당시 "책 내용에 관한 논란과는 별도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제가 보여주는 그 이중적 의미의 층위는 어쩌면 히친스가 비판하고 까발리는 마더 테레사라는 인물의 감추어진 이면들과의 그 이중성을 절묘히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테레사 수녀의 봉사와 헌신의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히친스가 지적하는 저급한 정상체위, 그녀의 선교의 입장이 된다고 말이다.

원제가 가지는 물의를 피하기 위해 한국어판의 제목은 '자비를 팔다'가 되었다. 이 한국어판 제목 또한 히친스가 제공하는 물의를 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고자 했던 그 이중성, 마더 테레사의 역설적 이중성을 적절히 담고 있는 고급한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자비'는 베풀어질 때 성립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그것이 판매된다면 더 이상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역설적 제목 '자비를 팔다' 또한 히친스가 담고자 하는 마더 테레사의 이중 플레이를 유효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히친스가 비판하는 그녀의 봉사와 헌신적 활동 이면에 그 어떤 저급함이 있을까? 150여 쪽의 이 짧은 책자에서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의 여러 활동들을 추적하고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돕고 사랑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녀의 온화하고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몇 장의 사진들과 함께 그것이 어떻게 연출되고 어떤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차분히 밝히고 있는 히친스의 지적을 읽는다면, 그녀의 그런 봉사와 헌신에 우리는 의문을 심하게 품게 된다.

이 책의 표지 사진으로 쓰인 80쪽과 81쪽 사이에 수록된 몇 장의 사진 중 첫 번째 사진을 보면, 어떤 가난한 이로 보이는 남자가 테레사 수녀의 손을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지만, 테레사는 뭔가 차갑게 초탈한 듯 그를 외면하고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콜카다의 선교회에서" 찍은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히친스는 그녀가 사실상 다른 목적으로 이 가난을 이용하고 세상에 팔아왔다고 말한다. 한 장을 넘기면 테레사 수녀가 "아이티에서 미셸 뒤발리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미셸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일인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부인, 그러니까 아이티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다. 이 사진은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선전지인 「공격」 1981년 1월호에 실렸다.

   
 

  잡지를 펼치면, 둥글게 부푼 아이티 '제1시민'과 그의 유명한 신부 미셸 뒤발리에의 결혼기념일에 대한 길고 경애하는 글 옆에 커다란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미셸은 백인 및 크리올 엘리트의 지도자로서 태연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팔찌를 찬 그녀의 팔을 다른 여인이 정답게 감쌌고, 이 여인은 존경과 복종으로 가득 찬 눈빛까지 바치고 있다. 사진 옆에 인용된 그녀의 말을 보면 자신의 아첨성 행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영부인은 느끼시고, 아시며, 자신의 사랑을 말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행동으로써도 보여주고자 하시는 분입니다." 이 외침은 이어진 사회 페이지의 헤드라인에서도 메아리친다. "영부인님, 나라가 당신 필생의 사업으로 진동합니다."(19쪽)

  CBS 다큐멘커리 프로그램 「60분」이 방영한 이 필름에서 마더 테레사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미셸 뒤발리에에 대해, 살아오는 동안 많은 왕과 대통령들을 만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의 우두머리와 이토록 친근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 내게는 아름다운 배움의 경험이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밖의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마더 테레사는 아이티 국가훈장 레종 도뇌르를 받았다. 지배자 부부에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의 단순한 증언은 국영 TV 방송에서 매일 밤 최소 일주일 동안 방영되었다.
  훈장을 받은 때부터, 아이티 국민이 장-클로드 및 미셸과 너무도 '친근한' 나머지 그 부부가 자기들의 짐가방을 국고 재산으로 채우고 프랑스 리비에라로 영영 도망치는 데 시간이 아슬아슬했을 정도였던 시기까지 마더 테레사가 이 필름에 대해 항의를 제기했다는 얘기는 알려진 바 없다.(20쪽)

 
   

그 옆에는 MSIA라는 이름을 지닌 광신집단의 지도자로서, "사기 행각은 가히 초서급"인 존-로저와 '존-로저 성실상'을 수상하고 1만 달러를 기부받은 테레사 수녀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고, 콜카타의 가난한 이들은 나중에 덧붙"인 것이다. 한 장을 다시 넘기면 "1995년 6월, 새로 문을 연 북서 워싱턴 입양의 집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몇 장을 더 넘겨 보면 "80년대 말 미국을 뒤흔든 저축대부조합 도산 사태 때 사기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찰스 키팅과 웃으면서 악수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테레사 수녀는 그에게 100만 달러 이상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외의 정치적 거물들과 찍은 사진들이 다수 있다.

마더 테레사는 찰스 키팅이 사기죄로 기소되자, 재판의 담당 판사인 랜스 이토 판사에게 탄원서를 보낸다. 말하자면 찰스 키팅이 "주님의 빈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필요가 생길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울 태세였다는 점"에서 그를 선처해 달라는 것이다.(102~103쪽에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 전문이 실려 있다.) 이 편지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지방 검사보로서 키팅 사건의 기소 담당자 중 하나였던 폴 털리"는 마더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냈다. 키팅이 사기 친 "대부분은 재산이 많지 않고 대형 금융 거래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의 돈, 그러니까 키팅이 선심 쓴 100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고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가 죽을 때까지 어떤 답변도 보내오지 않았다.

이런 갖가지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히친스는 마더 테레사의 이 이중생활을 폭로한다. 이쯤되면 악마의 변호인으로서 그의 역할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더 테레사가 성인이 되는데 지장이 없다면 이상할 일이다. 마더 테레사는 순박하고 아무 것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위해 아이티의 독재자 부인과 손을 잡고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인 찬사를 보냈을까? 또한 가난한 자들을 사기쳐 번 돈으로 선심 쓴 키팅의 기부금으로 마더 테레사는 누구를 도왔을까? 우리가 마더 테레사는 속세를 떠난 고귀한 성인으로서 오로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생각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그 노구에도 불구하고 굵직굵직한 정치적 현안이 존재하는 장소에 어김없이, 절묘하리만치 교묘하게 등장한다고 히친스는 지적한다. 이런 그녀가 아이티의 독재자 부부의 실체를 몰랐을까? 키팅이 엄청난 사기를 치고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도, 아직도 그가 "주님의 빈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관대했으며, 필요가 생길 때면 언제나 기꺼이 도울 태세"였다고 믿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는 얼마가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기부금과 후원금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에 수용되어 있는 가난한 이들은 별반 그 생활이 나아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수용소에 다름 아니다. 그 막대한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책의 히친스의 고발에 따르면 간단한 수술이면 해결될 어린 아이의 병도 단지 방치될 뿐이고, 최소한의 기본 의료도 무참하게 제공만 된다. 주사기도 물로 대충 씻어낼 뿐 소독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지병을 치료하게 위해 세계 최고의 병원에 입원하여 장기간 치료를 받았다. 그 막대한 돈은 그렇게 쓰였고, 세계 곳곳에 사랑의 선교회란 이름의 수용소만 지어댈 뿐이었다. 아직도 스위스의 비밀 금고에 그녀가 모금한 어마어마한 돈이 꿈틀대고 있일지 모를 일이다.

히친스가 이렇게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마더 테레사의 'The Missionary Position'의 저급함은 바로 가난을 이용하고 위선적 자비를 팔아가면서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악마의 변호인 히친스는 바로 '근본주의 종교-사업가'로서의 테레사 수녀의 위선을 기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소는 기각된 듯 보인다. 왜? 히친스가 악마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까? 주간지 「뉴욕 프레스」는 이 책에 대해 촌평하면서 다소 익살스럽게, "지옥이란 게 있다면, 히친스는 이 책 때문에 거기에 가게 될 터이다"라고 농을 친다. 이 책 때문만은 아니고, 아무튼 지옥이란 게 정말 있다면 무신론자이고 적극적인 반종교주의자인 히친스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다만, 그가 지옥에 갔을 때, 그곳에서 히친스를 마더 테레사가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까? 히친스는 후기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녀의 성공은 겸손과 소박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미신적인 유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교활한 자와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하는 자들이 소박하고 겸손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기댄, 천년왕국 이야기의 또 다른 장이다.(142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03-0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주문해서 오늘 받았어요! 리뷰는 다 읽어보고 읽어야지 ㅎㅎ
은근 멜기님이 추천해준 거 이것저것 접하고 있는 ㅋㅋㅋ
(제가 좀 스폰지같아요 ㅎㅎㅎ)

순오기 2008-03-06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단체나 성금이란 명목으로 방송매체에 얼굴을 휘날리며 후원하는 거부들이, 실은 가난한 종업원들의 임금을 착취하거나 혹은 비리로 받은 부정한 돈을 보낸다는 것 많은 이들이 알지만...마더 데레사에 대해선 맹신하는데, 이책은 그런 점을 잘 부각시켜줬군요. 일단은 추천하고 찜합니다!

김서늬 2008-03-1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모든 것은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죠.
진실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같이 기술은 좋은 시대에 온갖 진짜같은 가짜, 가짜같은 진짜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대중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게 할 것인가를 (나쁜 뜻으로는)조종하고, (좋은 뜻으로는)선도하는 역할의 책임을 맡은 것이 바로 글쟁이들이 아닐까요. 마더 테레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히친스도 테레사의 추종자들도 아무도 모르겠지요. 마더 테레사 본인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는 오직 자신만의 판단을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멜기세덱 2008-03-17 21:30   좋아요 1 | URL
저는 히친스가 우리들과 다른 위치에서 마더 테레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고 할까요? 히친스는 좀더 공을 들여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판단은 이것때문에 수정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구요.
 
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블로그(blog)'는 원래 우리말이었다? '카페'도 실은 우리말이다? 조선시대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책이 있다. '블로그'는 원래 우리말 '불로구(不怒口)'였고, '카페'도 '갑회(甲會)'였단다. '불로구갑회복원위원회'에서 편저한 이 책 『조선블로그』는 그 생생한 증거들을 담아놓고 있다. 21세기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블로그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니? 믿어지시는가? 믿거나 말거나.

사실 이 책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얼마 전 발견된 '불로구(不怒口)', '갑회(甲會)'라고 적혀있는 고문서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 고문서들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글들의 성격과 매우 비슷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당시에 인터넷과 블로그가 없었을 뿐이지,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블로그질을 불로구에 했었다는 거다. 여하튼 이런 우연한 발견에 힘입어 편저자들은 역사적 인물들이 '블로그'질을 하고 인터넷 카페를 한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한다. 그렇게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 이순신이 블로그를 만들고, 실학자들이 모여 카페를 개설한다. 가상의 일이지만, 사료에 근거해 그럴 듯 하게 꾸며놓은 이 블로그와 카페에 접속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에만 감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더욱 감탄할 것은 역사상의 인물들이 21세기에 재탄생해 우리와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일촌이 되고 이웃이 되어 그 속내를 솔직히 내뱉는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내뱉는 보다 솔직하고 거짓없는 글들에 네티즌들이 공감하고, 때론 논쟁하듯이, 편저자들은 철저히 역사상의 인물들을 21세기적 개인으로 창조해 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역사적 고증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이 색다른 시도에 역사는 어느덧 우리가 즐찾한 여느 블로그처럼 친근해 진다.

이성계와 일촌을 맺고, 세종대왕 블로그를 즐찾하면서, 의병 카페에 가입하고, 실학 카페에 정회원이 된다? 비록 그것은 가상의 일이지만, 역사 속 현장과 시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그 당대 역사 인물들과 동시에 호흡하게 만든다. 이것은 역사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체험하게 한다. 가령, 이순신에게 응원의 댓글을 달면 더욱 잘 싸워줄 것만 같고, 정암에게 딴지를 걸면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지요."라는 싸늘한 댓글이 날아올 것만 같다. 이것은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재현시키는 탁월한 역할을 담당한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역사 속 인물의 블로그를 즐찾한다는 것을.

아무튼 저자들은 이런 획기적인 기획을 앞으로 계속할 생각인 듯 하다. 고려 블로그도 나오고 삼국 시대 블로그도 나올 예정이란다. 싸이 미니 홈피와 접목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무엇보다 블로그가 좋은 장점은 역사의 대상으로서만 제시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의 속내가 비록 가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비춰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그 인물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참신한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이 기획들이 꾸준히 출간되어지길 기대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03-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재밌겠는데요?
멜기님 저 쾌도홍길동 1회 봤어요 ㅎㅎ 나름 재밌던데요?

마노아 2008-03-0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아이디어가 어찌나 번뜩이던지요^^

순오기 2008-03-06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노아님이 주신 민경이 책으로 봤지요.
창의성이란 게 이런 거구나~ 감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