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각각의 신문사, 잡지사, 서점 등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시사IN>도 2008년 12월 20일자 제66호에서 "<시사IN> 선정 올해의 책"을 발표했다.

  해마다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온라인 서점의 위세가 강해진 다음부터는 누리꾼이 직접 '클릭'한 '올해의 책' 선정 작업이 한창이다. <시사IN>은 각 분야 전문가 30명에게 '올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책을 세 권에서 다섯 권까지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굳이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사IN> 편집진조차도 미처 챙기지 못한 양서를 가능한 한 폭넓게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양서에 순위를 매기는 일은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이 각 분야 전문가들이 가장 언급을 많이 한 책을 첫머리에 실었지만, 4개 분야에서 추천된 책들은 한번 읽어보고 싶은 독서 욕망을 자극한다. 그래서 별도의 상자 기사에 추천 받은 목록을 최대한 실었다. 한 해 어떤 좋은 책이 우리 곁에 도달했는지 일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독서 가이드 구실을 하리라 기대한다.

<시사IN>에서 선정한 4개 분야는 문학분야, 인문·사회과학 분야, 생태·자연과학 분야, 어린이·청소년 분야로 나누었다. 간단하게, 그러나 두루뭉술하게 나누어서 이래저래 빠진 책들도 있으리라 싶기도 하다. 목록들을 보니 챙겨봤어야 할 책들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여기 정리해 둔다. <시사IN> 홈페이지에 가봤더니, 아직 제66호 기사는 안 올라와 있었다. 관련 기사와 함께 정리하면 좋겠으나, 여기서는 간단히 기사 중 일부분을 발췌 인용하며 정리해 두는 것에 만족하자. 우선 각 분야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책은 다음의 4권이다.

 

 

 

 

 

 

 

  먼저, 문학 분야에서는 특이하게도(?) 시집이 뽑혔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가 그 주인공이다. 나 조차도 보관함에 챙겨두지 못했던 시집이고, 시인의 이름도 그리 낯익지 않다. 출판 도서 시장에서 맥을 못 추기는 시집만한게 없는데, 분야를 나눴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설을 제치고 '올해의 책'에 선정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기도 하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가 뽑혔다. 보관함에 챙겨둔지 오래였으나, 역시나 아직 나의 낙점을 받지 못했다. 생태·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김종철 녹생평론 발행인의 저서 『땅의 옹호』(녹색평론사)가 뽑혔다. 자연과학 앞에 애써 '생태'를 붙인 이유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뽑으려한 주최측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렇다하더라도 그리 얄밉지는 않다. 어린이·청소년 분야에서는 권정생 선생의 『랑랑별 때때롱』(보리)가 선정됐다.

여기서는 문학 분야만을 정리하도록 한다. 기사를 대충 발췌 인용하는 것을 손으로 하려는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탓이다. 그런데, 문학은 올해 내가 참으로 소홀했던 듯 하다. 그래서 그나마 올해의 책 목록에 오른 책들이라도 챙겨 읽어야겠다 싶다. 혹여나 크리스마스니 연말연시니 해서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이 멜기세덱에게 전하려 하시는 아주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 목록과 페이퍼를 세심히 살펴보시라고 권한다. 더는 말하지 않는다.

문학 분야는 "고영직(문학 평론가), 박수연(문학 평론가), 신형철(문학 평론가), 오창은(문학 평론가), 이명원(문학 평론가), 이문재(시인), 임규찬(문학 평론가), 최성실(문학 평론가)"가 추천했다. 이들의 추천이 뭐 탁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신뢰가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이니, 이 목록을 열심히 읽어내는 것은 가히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시사IN> 기자들도 독자들에게 챙겨 읽겠다고 약속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읽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으니, 추후 독후감들을 챙겨서 잡지에 게재하는 것도 해봄직하다. 이 참에 기대해 본다.

문학 분야에서 '올해의 책'에 뽑힌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기사 중 몇몇 구절들을 발췌해 둔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이 거의 비슷비슷해요. 함께 모여서 매일 세미나를 하는 것처럼. 심보선 시인의 시집을 보고서 깜짝 놀랐어요. 시적 상상력이 굉장히 남달라요."

"심보선 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황동규 시인과 문학 평론가 김주연씨는 이 시에 대해 '기성 시단의 어떤 흐름과도 무관하며,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곧잘 사용하는 상투어들이나 빈말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이 시인에게 '독창성'이라는 낱말은 데뷔 때부터 친화력을 가진 단어였다."

심보선은 24살에 등단했다. 등단한 해가 1994년이니 14년이 되었다. 그럼 올해로 38~9이나 됐다. 이번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다.

"심보선의 시집을 추천한 평론가들의 약평은 이렇다. '심보선의 언어는 집단의 고통이면서 개인의 고통인 현실을 무미건조하게, 그러나 묘하게도 비극적으로 드러낸다. 현재 한국시의 언어가 점점 상실하고 있는 자본주의 비판도 있고, 상징적 권력인 아버지 이야기도 있다. 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과 집단의 이중주이다(박수연).' '한 권의 시집을 통해 1990년대를 거쳐 2008년에 이르는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94년에 등단해 14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낸 더딘 걸음이 이 시인에게는 복일 수도 있으리라. 그는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시대를 담아내고,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성찰의 알갱이들을 곳곳에 박아놓았다(오창은).'"

이 밖의 문학 분야 추천작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천작들에 오히려 쟁쟁한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김연수를 많이들 주목한 듯 하다. 그의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를 두고 평론가 신형철은 "김연수의 대표작은 늘 그의 최신작"이라고 말했단다. 사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그래서 뭘 읽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김연수의 작품을 하나쯤 읽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지난해 챙겨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외에 정도상의 『찔레꽃』(창비), 시인 김선우의 소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등이 꼽혔다.

 

 

 

 

 

 

 

이 외 추천작들로 시집에서는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고은의 『허공』(창비), 백무산의 『거대한 일상』(창비), 김정환의 『거룩한 줄넘기』(강),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김혜순의 『당신의 첫』(문학과지성사), 김사이의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황규관의 『패배는 나의 힘』(창비) 등이" 있다

 

 

 

 

 

 

 

 

"소설로는 황석영의 『개밥바리기 별』(문학동네), 이시백의 『누가 말을 죽였을까』(삶이보이는창),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한겨레출판),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물레),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박상륭의 『잡설품』(문학과지성사)" 등이 있고, 외국 문학으로 『로드』(문학동네)도 꼽혔다.

 

 

 

 

거의 챙겨 읽은 게 없다. 황석영의 『개밥바리기 별』도 며칠 전에야나 읽었다.(그런데 나는 왜 이 책의 제목을 그냥 '개밥바리기'라고 알고 있었을까?) 올해 문학에게는 참 미안하다. 하긴 올해는 여기저기 정신이 없어서 다른 분야의 책들도 그리 많이 읽지 못했다. 하여간 꼽꼽히 이 겨울내내 챙겨 읽어야겠다.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인문·사회과학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생태·자연과학 분야

<시사IN> 선정 "2008 올해의 책" - 어린이·청소년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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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2-17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책으로 올라온 것 중에 '엄마를 부탁해, 랑랑별 때때롱' 외에는 읽은 게 없군요.ㅜㅜ 고마운 페이퍼에요!^^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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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을 읽는다는 것 

 

  얼마 전 황석영은 <무릎팍 도사>란 프로그램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나왔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해 보았다(정확히 이 행위가 불법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낮은 가격을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았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의 황석영은 한국 문단의 원로답지 않게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이전에 출현했던 이외수와는 격이 한층 높았다고 생각된다. 이외수와 황석영을 놓고 격 자체를 따지는 것은 나에게 있어 좀 어색하긴 하다. 같은 기준을 놓고 그 격을 따져야 하지만, 기인 이외수와 소설가 황석영이란 두 대상을 가르는 기준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 황석영이 <무릎팍 도사>에 출현한 것 자체로 내게는 다소 흥미롭고 관심 가는 일이었고, 그 흥미와 관심을 여하히 채울 수 있어서 기뻤다. 

  다 늙어서 애들처럼 왜 이런 프로그램에 출현했을까 황석영의 주변 여럿이 의아해하고 걱정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문단의 원로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노파심이었겠지만, 또 하나의 이외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심초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외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무래도 황석영과는 많이 다른 영역에서 기인 소설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 영화 개봉이나 신작 드라마 출현, 가수의 경우 새 앨범 발매 즈음에 불이 낳게 출현하는 경우가 간혹 비판받아 왔다. 사실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은 게, 연예가 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면 그럴 만도 하겠다 하는 것이겠으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출현해 지겹고, 자기 새 작품 홍보에 열을 내는 것 같은 모습이 조금 구역질나기도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과한 것이 문제이지, 어느 정도는 유용한 정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의 이 프로그램 출현은 고무적이라고 하겠다(이외수의 경우도 그러한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책 안 읽는 세상에서, 특히나 더 소외되고 있는 문학(소설, 시 등)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서라도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런 대중적 프로그램에 출현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황석영의 <무릎팍 도사> 출현을 계기로 그의 신작 소설의 매출이 많이 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황석영이란 이름만으로도 불황을 밥 먹듯 하는 출판사에게는 한줄기 빛이었고, 매출로 확실히 보상했겠지만, 좀 더 득을 보는 것을 마다할 것은 전혀 못 된다. 여러모로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특히나 나를 비롯한 황석영에 대해 관심가지고 있는 유력한 독자들이라면, 황석영의 이러한 일탈(그는 사실 일탈을 밥 먹듯 했지만)은 다분히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 황석영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백한 고민(지식인처럼 보이고 싶다고?)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그가 풀어낸 그의 살아온 인생역정은 자못 박진감 넘치고 우리를 열나게 하고, 울고 웃기는 것임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무릎팍 도사>에서 황석영이란 소설가를 멋들어지게 읽었다고 하면 이상한 것일까? 1943년(잘 모르는 분이 계실지 몰라 하는 말이지만, 이때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대한독립 만세의 날 1945년 8월 15일보다 2년이나 이른 시기다)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나 업둥이시절 독립을 맞고, 이어지는 전쟁, 고등학교 자퇴(혹은 중퇴?), 이런저런 방랑 혹은 방황, 소설가로서의 삶, 어머니에 대한 못난 아들의 사랑, 험난한 일탈 혹은 도전, 베트남 전쟁 참전, 북한 방문, 그야말로 역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꺾고 꺾이어온 파란만장한 황석영이란 인간의 역사를 읽(듣)는 것은 참 값진 것이었다(그 점에서 약간의 다운로드 비용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남는 장사였던 것이 그 자체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4부작 중 절반에는 해당할 스펙터클 드라마틱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읽(들)었으니, 남기도 어지간히 남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신작은 미뤄오던 차에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중에서도 간간히 그의 신작 이야기들을 내비치고, 거기에 담긴 자신의 삶의 역정도 풀어놓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한번 읽어나 봐야겠군, 하는 생각을 더 가지게 한 듯하다. 사놓고는 시간을 조금 보내고, 엊그제야 하룻밤에 읽어내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읽었다는 것은 <무릎팍 도사>를 열 번 이상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해두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원론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때론 그 허구적 삶에 울기도 하고, 공감도 해가면서, 한번쯤은 그러한 낭만적 삶을 꿈꾸기도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모자란 경험들을 한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소설을 자주 즐기지는 못하지만, 애써 지루하게도 몇 편, 몇 권의 소설을 그래도 열심히 읽어내는 것은 소설이 주는 그러한 효용들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소설이 주는 효용”이라고 했지만, 무슨 교훈적 측면으로서의 효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무협지를 읽어가듯이, 그렇게라도 시간 때우기 위해 읽을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특징으로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 ‘허구성’이라는 것인데, 중고등학교에서는 이것을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이 소설하면, ‘허구성’이란 단어가 이구동생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교육을 시켜서 첫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가급적이면 이 허구라는 말을 소설이란 분야에서 제일 끝자리에나 앉히고 싶다.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은 대체로 허구이기때문이고, 또한 모두가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수필과 경계 짓는 곳에 허구를 놓지만, 수필의 어느 곳에는 허구덩어리가 있지 않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것인가? 소설 어느 곳에 허구 아닌 것이 있으리라고 나는 보장하지 못한다. 둘째손가락부터 꼽히는 소설의 다른 특징들로, 서사성, 개연성, 진실성, 갈등, 사건, 플롯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들을 다 합치면 소설이 된다고 말하기에도 좀 망설여진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라고는 우리 따지지 않는 것도 좋으리라. 서사, 곧 이야기라는 것은 소설 아닌 다른 것에도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온전히 전하는 장르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면 잘못일까? 아닐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이야기를 듣(읽)는 것이면 족하리라고 본다.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듣다가, 잠에 들면 꿈속에서 재현하고 재창조해내는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한 장이라도 넘기는 것이 지겹도록 무거운 것이 있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 무거운 것을 소중히 온 힘을 다해 넘겨 읽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로서의 소설도 있다. 또는 수십 장이 후루룩 넘어가면서도 허한 것도 있을 것이고, 푸근한 것도 있을 것이고, 재미난 것도 있을 것이며, 막막하기도, 아리기도, 씁쓸하기도, 하여간 다양할 것이다. 내 기준에서 좋은 소설이란, 잘 읽히면서 재미난, 그러면서도 무언가 찡하게 남는 그런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설을 가리는 보편적 기준은 아닌 것이, 또 다른 내 기준에서는 내가 읽지 않은 어떤 소설에 대해, 혹은 아주 힘겹게 읽어낸 어떤 소설에 대해, 나는 이 소설 좋은 소설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석영의 소설을 놓고 보자면, 어느 정도 전자에 해당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재미있고, 어느 정도 가슴 울리는 무엇이 있는 소설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높은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내가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니, 그의 소설 전반에 대한 나의 평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중단편들 몇 편(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해 「삼포 가는 길」, 「객지」 등)을 읽었을 뿐이고, 그의 장편들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중단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절 그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그리 유쾌하지 못 하였다고 어느 곳에서 고백한 바 있어, 씁쓸할 뿐이다. 요전에 그의 소설은 읽은 기억은 『바리데기』 뿐이고, 그러니까 그의 최근작인 2편의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문단의 평이 여러모로 갈리는 가운데, 그의 최근작에 대해 나는 확실히 다른 면을 발견한 듯하다. 호불호를 떠나서 그의 최근작은 이전의 것들과는 분명 다른 데가 있었다. 우선 호흡이 가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읽히고 빨리 넘어가며, 잔잔히 흥미로운 데가 있어 좋았다. 

  내가 앞서 좋은 소설을 가리는 내 기준을 밝혔는데, 그에 따르면, 황석영의 최근작은 분명 전자, 그러니까 잘 읽히면서 재미있고, 무언가 남는 그런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리데기』에서 2% 이상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에 대하여는 다른 리뷰에서 밝힌바 있어 재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의 최근 소설 경향을 내 나름대로 판단했을 경우, 이번의 작품도 그 경향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서 좋은 소설에 해당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리기 별』을 읽는다는 것 

  ‘신비평’이라는 근대적 비평의 조류를 세운 I. A. 리처즈는 1929년에 『실제비평』이란 뛰어난 업적을 토해놓는다. 이 책은 “사 년 동안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읽기이론과 이론의 적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리처즈는 저자를 밝히지 않고 시를 캠브리지 대학의 약 60명의 대학생들에게 나누어준 뒤 일 주일 후에 시를 읽은 횟수를 기입하고 시감상을 써오라는 과제물을 매번 제시”하는 실험(?)의 결과를 정리했다. 여기에 그의 장차 ‘신비평’이라고 불리는 이론이 실제적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학생들의 감상 결과는 많이 달라졌다. 결국 이 실험을 통해 리처즈는 ‘신비평’의 다른 이름이랄 수 있는 내재적 비평이 중요함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리처즈의 신비평은 후대에 와서 비판 혹은 부정되지만, 현대 비평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문학 비평 이론사를 떠벌일 능력이 못 되어 절미하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가를 말하자면, 이런 가정을 제시해보기 위해서다. 황석영의 최근 소설에서 “저자 황석영”을 거세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는 ‘황석영’이란 이름을 거세했을 때 지금보다는 저평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이 스스로 밝혔듯이(방송에 나와서까지) 자전적 소설에서 이 ‘자전’을 거세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자전적’을 거세했다고 해도 ‘소설’은 남는다. 그러니까 ‘황석영’이라는 ‘자전적’을 거세하고 『개밥바리기 별』이라는 소설만을 볼 때, 이 소설은 어떻게 평가될까?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볼 때, 우선,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겠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읽었다고 보고 말하자면, 사실 조금 아닌 데가 있다. 

  『개밥바리기 별』에서는 ‘준’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친구들(‘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칭 ‘성장소설’이다. ‘준’의 “베트남 파견이 결정”되고 며칠간의 휴가를 틈타 예전 여자 친구를 찾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런 시작에 이어서 회상 비슷한 형식으로 돌입한다. ‘준’이의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회상 형식의 작품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각 장에서 ‘준’의 시점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친구들의 시점이 교차되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그렇게 ‘준’의 사춘기 시절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홀어머니와 누이, 동생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준’이는 그 즘의 시각이나 오늘날의 시각에서나 다소 삐딱한 아이, 그러나 책 읽기를 즐기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아이였다. 학교를 때려치우기까지 그의 불우하다면 불우한 이야기가 끝나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다가, 어느 일용직 막노동자를 따라 몇 년을 전국을 떠돌며 산 이야기를 끝으로, 회상(?)은 끝난다. 끝끝내 옛 여자친구(‘미아’)를 만나지 못하고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부대로 복귀하는 열차에 오른다. 이게 대강의 줄거리다. 

  성장 소설은 인정하자. ‘준’이와 함께 그의 친구들은 각자의 삶에서 이래저래 살아가며, ‘성장’한다. 그러나 초점은 ‘준’이에 맞춰져야 한다. 우선 그는 반쯤 문제아다. 가족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진정 자신으로부터 방황하고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글을 잘 썼던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가족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다고 그가 열심히 어울리는 친구들은 그저 도우미 정도일 뿐이다(노래방 도우미를 연상하자!). 그래서 그는 혼자 열심히 이 모든 것을 떠나고자 방황하고 도망(?)친다. 그가 사랑을 살짝 느꼈던 것 같은 ‘미아’로부터도 말이다.(왜 갑자기 ‘미아’를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찾은 것일까? 그저 회포라도 풀 작정이었을까? 이런 쯧쯧. 사랑이라도 진하게 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으련만.) 

  그 방황의 과정에서 ‘준’은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힘은 아니었다. 하긴 세상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싶다. ‘대위’라는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를 만나서 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이 작품의 후반부쯤이지 싶다. 작품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싶기도 한데, 그에게 친구들이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서 ‘준’의 어떤 깨달음을 보자.

 

대위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좀 가만있으라고 짜증을 냈다.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라, 저놈 나왔네.

대위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 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리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방황 끝에서, 글쓰기를 통해서도 아니고, 막노동꾼을 따라 유랑하며 노동하면서, 깨달은 것 치고는 좀 허하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뿐이다. ‘개밥바리기’를 보며 ‘준’이는 “쓸쓸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망 하나를 새기는 문구 “잘 나갈 때는 샛별”이 왜 이리 공허한지 모르겠다. ‘개밥바리기’가 ‘준’을 비롯해 그의 친구들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는 ‘잘 나갈’ 것이라는 헤픈 희망이 새겨진다. 왜? 단지 ‘개밥바라기’는 ‘샛별’과 같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게 다인가? 온갖 방황과 고생 끝에 얻어진 것 치고는, 밤새 놀음을 하고 나와 초승달을 보며 느끼는 그 싸늘한 희망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비단 나뿐인가? 아무튼 황석영을 거세하고 보자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황석영’을 첨가하자면, 읽는 재미는 한층 나아진다. 그가 <무릎팍 도사>에서 풀어낸 인생역정, 파란만장의 썰을 대비하며 읽는 재미는 엄청나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적’ 재미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국제극장 골목에 줄지어 있던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두주전자쯤 마신 날, 둘이서 시청 쪽으로 걷다가 부민관 건물의 화단 뒤로 움푹 들어간 그늘 앞에서 선이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나를 차가운 벽에 밀어붙이면서 입술을 댔다. 첫키스를 했는데 나는 처음에는 얼떨결의 일이라 두 팔을 낙지처럼 늘어뜨리고 섰다가, 나도 모르게 한 팔은 그녀의 등을 감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자 선이가 그냥 내버려둔 채로 입술을 떼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작지?

  이런 뭔가 올 듯 말 듯 한 어린 시절의 첫 키스의 찝찔 짜릿한 추억의 재미가 재미라면 재미고 ‘준’의 어설픈 첫 여자경험의 그 못남의 어처구니없음이 웃음이라면 웃음이다. 그러나 할 건 다 하면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그래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우리 소희의 키스보다는 찌릿함이 떨어지고, 널브러진 포르노보다는 그 노골함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황석영’을 거세하고는 말이다. 

  ‘황석영’이 가세하면 상황은 보다 흥미로워진다. 가령 자살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본다거나, 어떻게 하다가 어린 시절 작가의 꿈을 키웠다거나(이 대목은 확인이 어렵다), 혹은 학교를 무엇 하다가 관뒀다거나, 학교 관두고 무엇하고 놀았다거나, 하는 대목이 황석영과 매치시키지 않고는 별반 재미날 것은 없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혹은 이런 대목에서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는데,

 

담임은 황새라는 별명의 국어선생이었는데 좀 독특한 데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길쭉하고 팔과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말씨는 느릿느릿했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보이면 입 양편에 비웃는 주름살을 지으며 냉소적인 말로 상처를 주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도 일단은 가차 없이 씹고 나서 한 줄씩 짚어주는 식이었다.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고 보는 게 어쩐지 통속적이지 않나? 낙엽 태우는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는 대목도 겉멋이라구 보이는데, 정서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야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귀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요.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중요하지.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여기서 ‘황새’는 혹여 황석영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 정말 ‘황새’가 황석영의 국어 선생님이었다면 황석영이 그에게 글쓰기에 대한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겠구나 하는 추측, 그러면서 여기서 남모르게 담아 놓은 황석영의 문학론을 살피는 것 등이 재미라면 재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씨발……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라는 ‘씨발’ 때문에 ‘맨숭맨숭하지’는 않은, 쓸데없어 보이는 아포리즘이 별다른 감동은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황석영이 이 말을 듣고 “거기 씨발은 왜 붙여요?” 물으면서 개운한 웃음을 웃었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재밌을 거란 생각, 나만 그런가?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사춘기 시절의 방황을 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사춘기 아이들에게 일말의 공감은 형성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걸 ‘소설’로서 잘 풀어냈느냐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이 소설로서 가지는 어떤 장점이라는 것은 앞서서 언급한 형식적인 면일 것이다. ‘준’이를 중심으로 번갈아 교체되는 여럿의 1인칭의 시점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춘기 모습을 그리면서, 한 인물의 사춘기 시절을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준’이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삶의 모습들, 사춘기의 일상과 정서를 보다 깊고 넓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상승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독특한 면이지만, 이것이 ‘준’이의 회상 형식과 중복될 때, 다소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준’이라는 인물의 총체적 삶의 모습(성장)과 동시에 다양한 인물 군상의 또 다른 성장이 중첩되면서 그 폭이 넓어졌다고 할 때, 이것이 ‘준’을 중심으로 열리고, 다시 ‘준’에 의해서 닫힐 때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듯 한 허함이 남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은 황석영이 소설이 아닌 일종의 자서전적 수필로 담아내었다면,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의 이러한 삶은 보다 사실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려냈다면, 보다 유효하과 적절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황석영’이라는 이름과 ‘소설’이라는 장르는 일종의 금상첨화와 같은 만남이지만, 때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개밥바리기 별』이 주는 교훈일수도 있겠지만, 황석영의 입장에서 그 소재들을 버리기 아까웠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무튼 황석영이 앞으로도 그의 “문학적 연대기의 기술”을 이어나간다고 할 때, 이 “작품이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되”기는 될 것이다. 그의 남은 생애 건필을 빌며, 졸렬한 이 글을 마치지만, 아쉬움은 다시 ‘황석영’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권하자면, <무릎팍 도사>를 먼저 보시고,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그 역도 가능하지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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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AT 2009-01-0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을 간절히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 『한 여름 밤의 꿈』과 살짝 헤깔려서 쪽팔렸지만, 아! 그 부커상에다가 '부커 오브 부커스'를 받았다는 그 책, 하며 이내 이 유명한 책이야, 어디든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가, 다시 한 번 쪽팔렸다. 구하기가 힘들게 되었단다. 인터넷이고 오프고 죄다 절판이고, 그래서인지 유명세 만큼이나 이제는 희귀본이 되어서, 헌책방에도 없단다. 그래서, 정 안되면 출판사에라도 전화해서 알아보지 그러냐 했는데, 아직까지 무소식인 걸 보면, 출판사에도 없는 모양이다.

일단, 내가 알라딘의 여러 고수들을 믿고, 한 번 알아보마 장담을 했는데, 이 희귀본을 선뜻 내어줄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하서출판사에서 1989년에 나온 『한밤의 아이들』이다. 어쩜 이 책, 이미지도 없다. 이런!

옆의 이미지는 『한 여름밤의 꿈』

 

 

살만 루시디는 여러모로 유명한 인사고, 그의 작품들도 전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언뜻 떠올려도 『한밤의 아이들』외에 『악마의 시』, 그리고 최근 한국에 번역된 『분노』 등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부커 오브 부커스에 뽑힌 『한 밤의 아이들』이 아무리 그래도 절판인 것은 좀 그렇다.

 

 

 

 

 

 

 

알라딘에서 '한밤의 아이들'로 검색해보면, 딸랑 2권의 책이 검색된다. 그 중 하나는 영역본이고, 우리말 번역은 하서출판사에서 1989년에 나온 것이 유일하다. 어쩜 이거 너무 하잖아. 아직 살아있는 작가라 저작권 문제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겠다 싶은데, 하서출판사에서 이 책을 재출간하지 않고 있는 것도 좀 그렇다. 혹시나 이 출판사 부도났나?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 지인이 왜 이 책을 구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나도 구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구서광고를 내보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이런 책이 89년에 딸랑 한 번 나와서 근 20년간 재출간 혹은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 쪽팔린 일은 아닐까? 하서출판사는 좀 반성하시고, 어쩜, 다시 나와도 돈이 안되는데, 손해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한민국 독자들도 좀 반성하시고, 여하튼, 어찌어찌 이 책을 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 지인은 원서를 구해서 돈을 들여 번역을 해서라도 읽고 싶다고 그러는데, 그 마음, 참 아름답잖은가? 알라딘 지기들이 많이들 도움을 주셔야지 싶다. 구하게 된다면 '사례'는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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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1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절절히 찾으시니 저도 궁금해집니다. 대체 어떤 책일까요.

멜기세덱 2008-12-13 21:19   좋아요 0 | URL
ㅎㅎ,어떤 분의 도움으로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책이야 뭐, 나름 유명하니깐...ㅎㅎ

MAMABOOK 2009-08-1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의 아이들 하서출판사
있습니다 연락 주세요
017-622-0222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시인 정희성의 4번째 시집 『詩를 찾아서』에 수록된 시다. 시인은 늦은 나이에 첫 시집 『답청』(1974년)을 펴내서인지, 여타 시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며, 느릿느릿 시의 걸음을 걸어왔다. 4년만에 두번째 시집으로 그 유명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수록된 동명의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출간한 것은 그의 느릿한 시작을 놓고 봤을때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얼마 전 시인의 인하대 강연에서, 아직도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소개되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고 멋쩍은 일이라고 한 바 있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오래 기억되는 법이긴 한데, 살아남은 노시인에겐 그게 뛰어넘기 힘든 높은 벽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정희성은 이것으로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아무리 봐도 정희성 시인은 김수영을 생각나게 한다. 중고등학교의 시험문제에서도 시인의 「답청」과 김수영의 「풀」이 비교지문으로 곧잘 등장하니 말이다. 이후 두번째 시집으로부터 13년만에 세번째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펴냈고, 그로부터 10년만에 바로 이 시집을 펴낸 것이다.(시인은 올해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를 펴낸 바 있다.)

 

 

 

 

10년을 묵혀온 시들을 모아 펴낸 시집이라면, 참 묵직하기도 하겠다 싶지만, 그마저도 기대를 저버리고 마는 시인이 정희성이다. 시집이란 이미지에 걸맞게 시인의 시집은 제법 가볍기 그지 없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43편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시인들은 보통 70~100편 가량을 시집으로 묶는다.) 과작(寡作)의 시인 정희성. 오랜 동안 교직에 몸담으면서 일과 생활에 지쳐서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울 성 싶지만, 그게 그의 과작을 이끈 주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많이 갈고 닦아서도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그의 과작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적은 시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고 읊조릴 시들이 비교적 많다는 사실이다.

한 권의 시집에는 어떤 천재적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시편들의 성취정도는 둘쭉날쭉이기 십상이다. 물론 정희성의 시도 예외일 수 없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으로 기억되는 일을 중단시킬만한 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집 『詩를 찾아서』에서 무척이나 주목되는 시가 바로 위의 시다. 이 시 「민지의 꽃」은 특별나거나 의미심장하거나, 시적 성취가 뛰어나거나, 뭔가 문제적이거나, 아름답거나, 괴기하거나, 어렵거나, 재미나거나, 독특하거나, 기타 등등의 시에 대한 찬사를 바치기에는 미흡한 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주목하게 되고, 자꾸 읊조리게 된다.

시를 읽어보자. 강원도 어느 산골에 귀농한 제자를 찾아간 시적화자는 거기서 몇날을 묵었던듯 싶다. 그집 딸 민지와의 에피소드가 주된 내용이다. 앞마당의 잡초에 물을 주는 민지를 보면서, 시적화자는 어떤 성찰을 얻는다. 잡초를 꽃으로 여기는 민지의 그 행위와 인식이 때묻은 시적화자에게 주는 어떤 파토스는 커다란 충격으로 남은 듯 하다. 그게 다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이 '詩를 찾아서'라는 점이고, 다시 눈여겨 볼 점은, 이 시가 「시가 오는 새벽」과 「詩를 찾아서」사이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이 시집이 13년만의 소산이란 점을 염두에 두자. 그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는 이 시집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시가 오는 새벽」에서 시인은 "내 이마 서늘"할 정도의 시적 영감을 받지만, 그것이 어떻게든 시로 탄생되어질 수 있었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 시적 영감 혹은 시에 대한 어떤 깨달음, 혹은 시에 대한 충격은 어느 한 날의 새벽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시적 영감이 시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 시적 인식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이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지의 꽃」이 필요했다.

「민지의 꽃」에서 시적화자는 때묻은 자신의 언어(말), 곧 세상의 때 묻은 인식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바로 민지가 보여주는 그 따뜻하고 순수하며, 시적화자와는 달리 결코 때묻지 않은 언어와 인식으로부터 언은 충격이다. 어떤 시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인에게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를 감동시켜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때 묻은 언어는 그로부터 어떤 시가 되어도 그런 감동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시가 오는 새벽'에 얻었던 시적 영감이 시가 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시인의 자신의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 아닐까? 뒤로 이어지는 「詩를 찾아서」에서 줄곧 찾아되는 것이 '말'이란 사실에서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시의 언어를 찾아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詩를 찾아서」)는 체념만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념만이 아니다.

시를 찾아 나선 시인이 생각한 "그 고운 사람"은 '우바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시인은 때묻은 말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시인은 자꾸만 그 볼 수 없는 마음을 찾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뇌하고 떠돌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민지'다. 그렇게 시인은 '우바이'를 생각하고 '민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여전히 시를 찾지는 못했지만, 어떤 마음을 볼 것인지, 어떤 마음에서 오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인식인지, 어떤 언어여야 하는지를 슬며시 깨달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시인은 늘상 '시가 오는 새벽'에 몸을 부르떨며 시적 영감을 얻고, 민지의 언어와 마음과 인식을 넘지 못하는 자신의 때묻은 언어와 인식을 한탄하고, 또한 시를 찾아 떠나는 행위를 반복해가며, 그렇게 살다가 뜨엄뜨엄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들을 뱉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산고의 산물이 이 시집에 엮인 시들일 것이고, 그것이 소량이고, 과작이어야 함은 분명한 이유를 가질 수도 있겠다. 연로한 시인에게 시를 토해내는 것은 말라가는 피를 토해내는 것일수도 있으니, 건강상으로도 과작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겠다.

민지는 세상의 눈으로는 '잡초'일 따름이지만, 그 마음으로부터는 '꽃'이다. '민지의 꽃'은 그래서 특별한 꽃이 된다. 시적화자가 그런 민지에게 세상적 인식, 곧 그것이 '잡초'란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은 아이에 대한 자애로움에서 온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틀렸다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오싹함이다. 시적화자가 입을 다물며 느껼 수 이 치떨림과 부끄러움이 느껴져 오는 듯하다. 그것이었으면 족하지 않을까? 시인의 "내 말은 때가 묻어/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는 마지막의 첨언은 사족과 같이 느껴진다.

정희성 시인은 아마도 이 「민지의 꽃」에서 시심을 본 것이 분명하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연로한 시인은 어쩌면 민지의 마음까지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래에 펴낸 『돌아다보면 문득』이란 시집에 대한 기대는 그런 것들이다. 시인의 신작시집『돌아다보면 문득』을 진작에 손에 넣고도 아직 읽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런 기대감을 만끽해보고 싶은 짖궂음이다. 이 겨울을 틈타 한적하게 읽어보아야 겠다. 내일은 어느 잡초에게 물을 주어볼까? 아차, 겨울이잖아!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때묻은 인간을 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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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

위 사람은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므로 상장을 수여함.

19○○년 ○○월 ○○일

★★국민학교장

 
   

많이들 받아봤을 법하다. 국민학교 시절 개근상 한 번 못 타본 나로서는 설상가상으로 공부도 잘 못해 그 흔해빠진 상장 한 번 변변히 타보지 못한 쓰라린 기억이 있다. 불쌍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국민학교 시절 그나마 받았던 추억의 상장이 한 두 장 쯤은 있다. 그런데 의문은 그 상장을 내가 왜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그렇다면, '품행'이 참 '방정'맞아서 주었던 것일까? 그것도 의문인게, 내가 그리 '방정' 맞은 놈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무슨 놈의 상장은 '방정'맞은 사람에게 준다는 말인가?

다들 아시겠지만, 이 '방정'이란 말은 거의 극과 극의 다른 의미를 가진 동음이의어다. 하나는 한자어고, 하나는 순우리말인 듯 싶다.

   
 

방정01 [명사]
찬찬하지 못하고 몹시 가볍고 점잖지 못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
방정을 떨다/입이 방정이다/시집갈 나이의 처녀가 조신하지 못하고 웬 방정이냐?/김 찰방이란 자의 요망과 방정 바람에 큰일을 잡쳐 놨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박종화, 임진왜란≫

방정02(方正) [명사]
‘방정하다’의 어근.
방정-하다 [형용사]
「1」말이나 행동이 바르고 점잖다.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므로 상장을 수여함.
「2」모양이 네모지고 반듯하다.
엄격한 규율을 느끼게 하는 방정한 해서체의 필치.
「3」『북한어』질서나 규모가 있거나 또는 체계가 서 있다.
수백 년을 묵은 이 잣나무 숲은 천연의 숲으로서의 너무나 방정한 줄을 이루고 있었고 또 그 첩첩한 년륜에 비해서는 너무나 배좁게 들어섰다.≪고난의 행군, 선대≫

 
   

우리말 '방정'은 부정적 의미를 가진다. 흔히 '방정-맞다'와 같이 쓰여서 조신치 못하고 까부는 이에게 "이런 방정맞은 놈"이라고 일침을 가할 때 자주 쓰인다. 이 방정이 심할 때는 특별히 '오두방정'이라고 해서 "몹시 방정맞은 행동"을 말하는데, 흔히 "오두방정을 떨다", "웬 오두방정이냐!"와 같이 훈계조로 쓰일 때가 많다.

일상에서는 아무래도 이 우리말 방정이 자주 쓰인다. '방정이다, 방정맞다, 방정떨다" 등으로 어른들의 입말에서 흔히 나타난다. 요즘 젊은 애들은 특히나 "방정맞아서" 그런지 이 말을 잘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자어 '방정(方正)'은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모 방에 바를 정 자를 쓰니까, 풀이하자면, 모양(행동, 품행)이 바르다, 란 뜻이다. 나름 쉬운 말인데, 우리말 '방정'과 연관되어 좀 우습게도 들리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 말은 90% 이상이 상장용 아닐까 싶다. 그 외에서 사용된 예를 찾기가 참 어렵다.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용례를 보다. '방정-하다'의 1번 뜻 외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모양이 네모지고 반듯하다."를 우리는 방정하다라고 잘 표현하지 않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말은 상장용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방정(方正)'과 '방정'은 발음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 다 발음은 짧게 [방정]이다. 그러나 사용 문맥에 따라 우리는 기가 막히게 이 동음이의어를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명사형 '방정'으로 나타나는 예를 거의 없다. 대부분이 어미를 동반하는데, 이 둘이 동반하는 어미를 상보적 분포를 보인다.

우리말 '방정'은 앞에서도 보았지만, '-맞다, -이다, ~ 떨다' 등과 결합하여 발화된다. 반면, 한자어 '방정'은 다소간 제한적이다. '방정-하다'에서처럼 거의 '하다'와만 결한하고 있는 것 같다. '방정-하다'를 활용하여 '방정한 ~'이라는 표현으로 대부분 쓰이고, 부사형으로 '방정-히-가 쓰인다. 이렇게 문맥과 활용 어미 등에 따라 거반 정확히, 자동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어, 이 모양이 같지만 그 의미가 정반대인 두 단어는 혼돈스럽지 않기는 하다.

그런데, 상장 속의 '품행이 방정하여'란 말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상장을 받은 사람중에 정말 품행이 방정(方正)했던 이가 있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방정맞아서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하여간 재미있다.

이 외에도 다른 방정들이 몇 개 더 있다. 방정(方釘)은 "몸통의 단면이나 못대가리가 네모진 못"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학의 '방정식' 등에서 보이는 방정(方程)은 "1세기 무렵에, 중국의 예수(隸首)가 만들었다고 하는 수학서인 ≪구장산술≫ 가운데 한 장(章). 일차 연립 방정식을 가감법(加減法)으로 푸는 것을 다루다"는 뜻을 가진다.

방정 중에 또한 멋진 의미가 담겨 있는 말로 방정(芳情)이 있다. '향기, 향내'를 의미하는 芳자와 뜻 정 자를 썼는데, 이 말의 뜻은 "향기로운 마음. 또는 꽃답고 애틋한 마음."을 가리킨다. 비슷한 뜻으로 "방심(芳心), 방의(芳意)"가 있다. 이 말은 "주로 편지글 따위에서, 다른 사람의 친절한 마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는 '방지(芳志)'가 있다.

하여간 방정에는 5개의 방정이 있다. 그런데 방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주연급 조연, 바로 '방자'다. 방정 맞고, 방정 떠는 인물로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무래도 이 방자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방자는 사실 이름이 아니라, 말하자면 직책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방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방자02(房子/幫子)
고려 시대에, 중국의 사신과 그 수행원이 머무는 사관(使館)에 속하여 허드렛일을 맡아보던 잡직.
조선 시대에, 지방의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 하인.
 
   

그러니까, 옛날에 방자는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의 그 방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많은 방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방자는 다른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이런 방자한 놈"하면서 방자에게 호되게 야단을 칠 때에 쓰이는 또 다른 '방자'다.

   
 

방자03(放恣)
‘방자하다02’의 어근. 
방자하다  [방ː---] 「형용사」
「1」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 ≒자방하다01(恣放―).
방자한 태도/어른 앞에서 방자하게 굴지 마라./방자한 발설을 거침없이, 목숨을 걸고 뱉어 낸 곽무출이는 오히려 자세조차 흩뜨리지 않고 태연자약하다.≪유현종, 들불≫/대장이 부하에게 말하는 공석에서 그따위로 무엄하고 방자하게 말대답하는 것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이냐.≪홍명희, 임꺽정≫
「2」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노는 태도가 있다.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이 섬에 유배 온 중죄인이 죄인 된 분수를 저버리고 방자한 생활을 했으니 이런 형벌을 받음은 마땅한 일이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모두 모두 빨리 취하고 싶어서 웃고 떠들며 방자하게 마셔 대고 있었다.≪박영한, 머나먼 송바 강≫

 
   

이 방자는 앞서의 한자어 방정과는 달리 부정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한자어 방정과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활용하여 쓰인다. 거반 '-하다'와만 결합하여 쓰인다는 점이다. 아무튼 춘향전의 방자는 간혹 '방자'할 정도의 품행을 보이기도 하였거니와, 아무래도 '방정(方正)'과는 거리가 먼 '방정'맞은 방자(放姿)한 놈이었기도 했을 것이다.

방자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리말의 방자는 "남이 못되거나 재앙을 받도록 귀신에게 빌어 저주하거나 그런 방술(方術)을 쓰는 일"을 가리킨다. 흔히 '방자질'이라고 하고, '방자하다' 혹은 '방자질하다'처럼 쓰인다. 남을 저주하고 무고(巫蠱)하는 것을 우리말로 '방자'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꽃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가리켜 '방자(芳姿)'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방정과 방자가 가지는 여러 동음이의어 속에는 참 거리가 멀고도 다른 의미들이 가득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런 낱말의 뜻은 사용되는 문맥과 상황 속에서 거의 전자동적으로 구분되어 사용하지만, 보다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사용한다면 보다 효과적인 언어생활과 풍부한 언어구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여간 난 조금 방정맞은 데가 있어서 그다지 방정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방자한 것까지는 아니니 방자 놈보다는 격이 좀 높은 데가 있으며, 때로는 참 예의바르고 아름다운 내 모습을 사람들은 방자하다고 칭송하기도 한다. 말놀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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