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을 꿋꿋하게 버텨 온 숭례문(崇禮門)이 단 5시간만에 무너져 내린지도 열흘이 되어간다. 국보 1호라는 위상에 걸맞게 그 무너짐도 비장해보였다. 숭례문이 왜 국보 1호를 등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수도 서울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현대 대한민국의 어떤 상징성이 강하게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문화재에까지 서열과 순위를 매기고 그 중요도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게 숭례문을 1등을 자리에 올려 둔 이들이 그토록 무참히 무너져내리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은 오늘날 순위와 서열 매겨지는 사회의 뻔한 앞날은 아닐런지 심히 걱정된다.

예를 높이고 숭상한다는 숭례문이 무너지는 순간, 바야흐로 대한민국에서 더이상 '禮'는 숭상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유교적 의미에서 禮가 왜곡되고 관념화되어 허례허식으로 치우쳐져 이제는 버려야 할 것이라는 편견이 생겼지만, 본디 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자에게 있어 예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표정을 단정히 하는" 것에서부터[禮義之始, 在於正容體, 齊顔色] 시작된다. 그리하여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강조한다. 각 개인의 몸가짐과 행동에서 먼저 예의를 지켜 행하는 것이 공자의 예였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현실을 외면하고 관념화 되면서 왜곡되고 폐해를 낳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선이 무너졌지만, 현재에는 숭례문이 무너졌다. 현실에 맞지 않는 예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유교주의 사회 조선이 무너졌다면, 오늘날에는 기본적인 예 조차 지켜지지 못해서 '숭례'의 상징 숭례문은 더이상 그 자리를 버티고 설 면목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예가 아님에도 돈이 되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말의 예가 남아 있을리 만무하다. 그래서 숭례문은 임란 호란을 이겨내고, 동족상잔의 비극까지도 감내해왔지만, 예조차 남아있지 않은 이 현실에선 라이터 불꽃에서 시작된 그 화염에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고 했지만, 대통령도 장차관도 모두 최고의 CEO일 뿐이고, 아비는 자식을 죽이고 학대하고, 자식은 부모를 버리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숭례문은 무너졌어도 벌써 무너졌어야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숭례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숭례문이 불타 무너져내리던 그 5시간 동안 나는, 앞으로의 대학민국 5년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도 같다. 발화 초기 연기만 나던 대수롭지 않아 보이던 화재가 순식간에 제어할 수 없는 화마로 돌변하기까지 우리 소방당국은 물만 뿌려댔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라가 무너지고 황폐화 되어가는 이 시기에 등장한 새 대통령이 "경제는 꼭 살리겠다"는 소리만 줄창 해대는 것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와 함께 오버랩 되는 것은 인수위원장이 어륀지인지, 오륀지인지 모를 소리를 해대며 몰입하라고 강권하는 모습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요, 세계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저 시골 5일장에서 이빠진 할머니도 살아남기 위해선 어륀지 해야할런지 모르겠다. 기와를 걷어내고, 뜯어서 그 작은 불의 원천을 꺼야 한다는 것을, 명박이도 경숙이도 몰랐던 것일까? 경제만 살려 놓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에 붙은 이 불이 꺼질까? 5년후 대신 무너져 줄 숭례문은 이제 없지 않은가?

한미FTA만이 살 길이라는 소리도 저 많던 수십대의 소방차에 불과할 뿐이다. 숭례문이 불타던 자리에 어느 누구도 공자가 말하는 "君君, 臣臣, 父父, 子子."를 다하던 이는 없었더랬다. 어느 인터뷰에서 외국인의 말은 뼈아프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숭례문을 관리했더라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거라며 우리만큼이나 안타까워 했다. 국보 1호라며 귀하게 여기던 숭례문을 벗겨놓으면서 가림막이라도 쳐 줄 사람 하나 세워놓지 못한 명박이는 아직 사과 한 마디 없다. 성금 모아 복원하자고 되로 줬다가, 헌납한다던 300억으로 해라며 말로 받았다. 그러나 그 꼴도 눈사나워 못보겠다는 성토가 이어진다.

일본놈들이 붙여줬다고 그러는지 '남대문'하면 영락 없이, '남대문'이 아니고 '숭례문'이 맞다고 하는데, 오히려 남대문은 다른 것을 상징할 때도 많다. 그럴때 남대문은 南大門인지 男大門인 것이지 잘 구분이 가지 않지만, 분명 그것은 남자들의 중요한 대문이었고, 남대문이 열리면 인사를 꼬박꼬박 잘 했더랬다. 남대문이 열리면 참 민망하다. 그도 속옷이나 제대로 있었으면 모르지만, 꼬질꼬질 한 팬티를 입고 있다면 못 볼 일이다. 더욱이, 노팬티라면 할 말 없다. 대한민국의 '남대문'이 열렸는데, 알고 봤더니 노팬티였던 것이다. 그런데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통령 (당선자하면 안 되고) 당선인은 경제만은 살리겠다고 하고, 전봇대 뽑으라고 명령했더니 하루 아침에 뽑혔다고 자랑하고, 자기는 매일매일 변하는 인간이라고 하고, 대한민국 통째로 땅파서 걸레만들어 놓겠다고 한다. 참 정안가는 경숙씨는 미국가서 오렌지 사먹기 힘드니 어륀지 사먹자고 하고, 자꾸 어디엘 그리 몰입하자고 하고, 당선인 찬양하기에만 바쁘다. 같은 교회 장로, 권사가 잘 어울려 노니 에구 아름다워라. 그 밑의 인수위원인지 자문위원이지 하는 것들을 이곳저곳 돌며 장어구이 식당을 인수하러 다니는 것은지, 방송가를 인수하려고 하는 것인지, 여튼 그 인간들은 짤렸지만, 나머지 인수위원들은 지금 다른 걸 인수하려고 맘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쯤하면 막하자는 거"라던 노무현의 말은 여기서도 썩 어울리는 언설이다. 숭례문이 무너져내렸는데, 사실 예서 더 막장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5년 후, 무너질 것은 뻔하다. 경제라는 물만 뿌려대겠다는, 영어만 잘 하면 최고라는, 여기저기 땅만 파면 되는 거라는, 대한민국의 5년이 그들의 손에 있는 한, 숭례문처럼 그렇게 무참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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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20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을 하리요!
애들도 한숨 쉬는 우리 미래가 뻔하게 보이는데.ㅠㅠ

마노아 2008-02-2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 사설 보는 줄 알았어요. 멜기세덱님 얘기 모두 옳아요! 그래서 슬퍼요ㅠ.ㅠ

bookJourney 2008-02-2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한숨이 나오네요.
그냥 추천만 꾸욱 ~
 

제가 요새 좀 게으름을 펴서 초라한 이벤트임에도 결과 발표가 늦었네요.ㅎㅎ

조금이라도 기다리신 분이 계셨다면 죄송스런 맘입니다.

좋은 책과 선물을 추천해 주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정성스런 페이퍼로 참여해 주신 마노아 님, 나비 님, 순오기 님, FTA반대조선인 님께 감사드리구요,

댓글로 추천해주신 웬디양 님, 용이랑슬이랑 님, 작은도서관 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우리 은솔이와 동혁이를 귀여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추천을 받아놓으니 그걸 다 사주면 좋겠지만, 참 어렵고 난감하네요,ㅎㅎㅎ

차근차근 돈 벌어서 하나 둘 씩 사줘야겠어요.

추천해 주신 것들 모아두었다가 틈틈이 조카들에게 두고두고 사주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해 주신 분들 중 한 분을 뽑아서 책 한 권 선물드리겠다고 했는데요,

모든 분들께 선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나 그 한 분으로는 용이랑슬이랑 님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자주 뵙고 인사 나누었던 분들이고 한데, 용이랑슬이랑 님은 초면이신 것 같아서요.ㅎㅎ

즐찾이 늘어나는 데 대한 공로를 높이 샀을 뿐입니다.ㅋㅋ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요,

용이랑슬이랑 님께서는 일만원 상당의 책을 고르셔서, 책제목과 주소, 우편번호, 성함, 연락처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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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멜기세덱님, 감사합니다 ~~
    from 용이랑 슬이의 책 이야기 2008-02-26 21:03 
    회사에서 근무를 하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알라딘 상품 배송 예정' 응? 이상하다, 내가 최근에 주문한 건 아직 올 때가 아닌데다가 판매자 직접 배송인데 ... 뭐지? 내가 뭔가를 주문하고 잊고 있었나? 퇴근해 살펴보니, 멜기세덱님께서 보내신 책이다. 돌 선물로 주던 책 리스트를 연결하고, 다른 분들 글에 몇 마디 보태고서 덥석 책 선물을 받다니 ... 내가 생각해도 좀 염치없는 짓인 것 같기는 하지만 ... 그래도 좋은 것 어쩔 수 없다. 우
 
 
조선인 2008-02-19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보관함에 사두고 때마다 사주세요. 생일, 어린이날, 추석, 설, 크리스마스...

마노아 2008-02-1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 덕분에 제 보관함에도 책이 늘어났어요. ^^ 용이랑슬이랑님 축하해요~

Mephistopheles 2008-02-1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제시한 선물은 아직까지는 당분간은 현실 불가능인 거란 말인가요...흑흑.

bookJourney 2008-02-1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
용이랑 고민하여 책을 고를래요~~

순오기 2008-02-1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용이랑슬이랑님을 선택하신 멜기님께 박수~~~
용이랑슬이랑님께는 축하 축하^^

2008-02-20 0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대학엘 들어가고, 이리저리 방황도 했다. 그러는 사이 군대라는 몹쓸 곳에도 다녀왔고, 현실과 나 자신에 대한 체념일지도 모르지만, 현재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 최선이나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복학을 했고, 무사히 졸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졸업 후 2년을 현실에 대해 허송세월했고, 책이나마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10년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숫자놀이에 재질이 없다. 10년이니 100년이니, 하물며 투투데이니 백일 기념일이니 하는 것을 썩 탐탁해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 기념하고 기억한다는 것, 어떤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의 흐름 뒤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구분지어 놓은 서른이란 나이에 서러워지는 것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10년이란 감상에 빠져드는 것이니, 이것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것으로 봐서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줄곧 듣지만, 내가 보는 내 주변의 '강산'들은 그리 썩 변한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는 많이 변했다. 많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 내가 느끼는 변한 바 없음은 그 생겨남이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심 밖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내가 느끼는 10년이란 세월의 무상함은 간혹 씁쓸함이다. 그나마 보이던 자그마한 서점이 자취를 감춰버린 것, 매일 같이 들르던 단골 당구장이 1년 넘게 문을 닫고 있다는 것 정도. 그런 사라짐의 씁쓸함 외에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이미 오래 전에 접어두었다. 문득 당구장 사장님의 병환에 차도가 있는지 궁금해 진다.

늘 같은 곳에 있으면서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변화로 느끼지 못하는 무딘 감각의 탓일지도 모르겠다.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며 큰 모양은 형태가 없다[大音希聲, 大象無形.]"는 노자의 말처럼,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 온 나로서는 어떤 거대한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현재까지는 여전히 '강산'의 10년 변화를 절감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문득 떠오른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었다는 장자의 이야기처럼 중요한 것은 마음인지 모르겠다. 강산이 변한 만큼 나 스스로도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변하는 세월 속에서 10년 전의 나만을 생각하고 세상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것도, 세상의 변화에 나 또한 체념하며 아무런 반성 없이 사는 것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내가 놓아야 할 것과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것,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10년의 세월을 바라보아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변하고, 나도 변하고, 우리는 모두 변하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그와 함께 이제는 버려두고 나아가야할 삶의 아집이나 편견들도 많을 것이다. 내가 지난 1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허심탄회 하는 것은 일전의 어떤 충격 혹은 만남 때문이다. 정확히 10년의 학번차가 나는 새내기와의 뜻밖의 만남, 그것이 주는 충격이 컸기에 나는 지난 10년을 묻게 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조교이니, 해마다 신입생들을 줄곧 만난다. 다들 내 후배이니 만큼 애정이 크다. 그와 함께 새로운 사람들을, 젊고 신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은 기쁨이면서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번의 아주 사소한 대면에서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간혹 이맘때 쯤에, 입학이 결정된 신입생들이 한 둘 학과사무실에 찾아오기도 한다. 학생증 발급 신청 때문이 주된 이유다. 며칠 전에 내가 만난 새내기도 그런 이유로 학과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의 대량의 학생증 발급을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일괄 접수하고 발급한다. 그러니 그렇게 미리와서 학생증 신청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학과사무실을 찾아 온 그 새내기는 헛걸음을 했으니 불만스러웠을 게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새내기에게 내가 이러한 사정을 친절히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불손하다거나 한참 어린 후배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한 것 같지는 않다. 있는 그대로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답변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새내기는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나갈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만이 그 마지막 표정이었던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새내기가 학과사무실을 나가면서 어디서 '퍽' 소리가 났다. 나와 내 후배였던 한 친구가 깜짝 놀랐다. 그 새내기는 사라졌고, 우리는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났던 것인지를 곧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새내기가 줄곧 들고 있었던 것이 종이컵이었고, 사무실 안쪽 문 옆에 놓여있던 쓰레기통에 힘차게 뿌리치고 나가버렸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남겨진 나와 내 후배는 한참을 멍했다. 그 후배는 뭐 저런 게 다 있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나 이제 어떻해야 할까?'를 걱정했다. 그 새내기는 나를 선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은 좋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일종의 싸가지 없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후배로서 선배에게 보여야할 싸기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간혹 우리가 은행이나 동사무소엘 가더라도 그 새내기처럼 행동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는 그런 종류의 싸가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그 새내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처음 만난 10학번 차이의 신입생 후배에게서 느낀 첫인상이다. 그래서 더욱 걱정인 것은, 내 후배 08학번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로 이것이 작용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배와 후배를 나누고 후배는 선배에게 깎듯하게 예의바르고 무조건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만남과 관계에서는 기본적 예의가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내가 처음 만난 그 새내기 친구에게서 그런 예의 없음을 본 것이 08학번 전부에 대한 편견으로 작용할 것이 두렵다. 그런 친구들에게 내가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도 걱정이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생각을 10년의 세월로 넓혀간 것은, 좀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모든 08학번들이 그 새내기와 같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10년 전의 나와, 아니 1년 전의 07학번 후배들과는 많이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 친구들과 앞으로의 1년을 지내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가짐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하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척 어려울 것 같다는 데서 오는 어떤 두려움이 크게 일어난다.

혹여, 내가 이 새내기들에게 자칫 무례한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선배로서의 헛된 권위로 그들을 강압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내 기준에서, 선배의 생각과 행동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내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간에 그런 부당함을 내가 저지른다면, 그 친구들에게 나는 며칠 전의 그 새내기처럼 인간적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인간으로 보여질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래서 1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걱정이다.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속에는 강산 이전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전제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10년의 세월 뒤에 내가 만나는 08학번 친구들은 10년 전의 98학번 나보다, 어느 10년 세월 변한 강산 만큼의 변화된 인간일 것이다. 나도 10년의 세월을 따라 변했지만, 그렇게 변한 나는 이제 30대의 모습이고, 그들은 20대다. 세대 차가 분명 있을 테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인간적 관계에서 지켜지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진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 지켜야할 예의를 사랑하는 내 후배가 될 08학번들에게 지켜주고 싶다.

어쩌면 장자와 나비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장자가 곧 나비고, 나비가 곧 장자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나 10년 후배나 다른 차원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고 인간이 변하더라도, 그 변화 속에 사는 내 마음을 어떻게 가져가는 가에 따라 삶은 달라질 것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우선 내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은, 내가 며칠 전 첫 대면한 그 후배의 다소 무례함을 이해하고 잊는 것부터일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지만 말이다. 내일이면 08학번 친구들이 학교에 온다. 그들은 또 어떤 모습이고 새로움일지 설레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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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1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08학번은 22일에 입학식을 한다네요. 아마도 21일 밤에 올라가야 할 듯...

멜기세덱 2008-02-19 09:35   좋아요 0 | URL
입학식을 그렇게 일찍해요?ㅎㅎ
아무튼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ㅎㅎㅎ
공부하다가 힘들면, 멜기세덱을 찾으라고도 전해주시구요...ㅋㅋㅋㅋ

순오기 2008-02-19 21:28   좋아요 0 | URL
원래 예비소집일이고 사흘뒤 OT, 3월 입학식이었는데, 지방생들 때문에 변경한 듯...감사하지만, 멜기님을 찾을만큼 힘들지 않기 바라는 엄마 마음 아시죠?^^

조선인 2008-02-1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의 간극 무섭죠. 그나저나 98학번이셨군요. 어맛, 어려라. ㅋㄷ

멜기세덱 2008-02-19 09:35   좋아요 0 | URL
아직, 철부지죠 뭐....ㅋㅋㅋ

마늘빵 2008-02-1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싸가지들 항상 있죠. 근데 해가 지날수록 점점 많아지는 거 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나이를 먹고, 보수적으로 변해서라기보다는, 아해들이 점점 싸가지 없어지는거 같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된 애들이 많아요. 00학번이었던 제 후배 하나도 그런 녀석이 있었어요. 동아리 후배였는데 교양수업 중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교수님이 화가 났는지 학생 뭐하는거냐 어쩌고 했는데 얘가 적반하장으로 막 싸가지 없게 굴은거죠. -_- 그래놓고 저한테 와서는 자기는 잘못한게 없는양 궁시렁궁시렁하는거에요. -_- 어이가 없었습니다.

bookJourney 2008-02-19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는 나이 차이를 의심했는데, 꼭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나이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인간됨'의 문제가 아닐런지 ... 가끔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라구요. --;
 

시골에 내려갔더니, 예년과 다르게 시끌벅적 하더군요. 역시나 애들이 있어야 사람 사는 맛이 나는가 봅니다.

누님댁도 인천에 있습니다만, 뭐 무슨 날이나 돼야 일 년에 한 번 볼까 하는데, 요새는 통 못 보고 지내지요. 이번 명절에 내려가 보니 조카들이 무럭무럭 컸더군요.



제 첫 조카 은솔이입니다. 참 이쁘네요.ㅎㅎ 제가 나이 26이 되도록 죄다 동생들이었는데, 누나가 매형이 만들어준 제 첫 조카가 되겠습니다. 이 아이 갓난 시절에는 한 집에 같이 살기도 했더랬는데, 요렇게 커서는 통 못보고 지냅니다.

요번에 시골에 내려가서 보니, 삼촌 하면서 달려와 안기고 뽀뽀를 해주는데는, 아주 이쁘고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더군요.

이제는 말도 제법 잘합니다. 몇 살이냐고 하면 지는 다섯 살이라고 우기는데, 이제 네 살이라더군요. 세배하는데 "할아버지 새해 복 마니 받으셔여"하고 혀짧은 소리를 내며 큰절을 엉거주춤하는데 고게 그렇게 깜찍할 수가 없더군요.

새뱃돈을 참 많이도 벌어갔더랍니다.ㅋㅋ

더 이쁜 건 이 아이가 어른에게는 언제고 높임말을 쓰더란 것입니다. 말끝마다 요자를 붙이고 주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감사합니다, 하는데는 어른들에게 이쁨을 듬뿍 받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이게 참, 제 엄마가 워낙 성질이 사나워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참 이쁘고 착하게 크겠구나 하는 생각에 참 즐거워지더군요.



이 놈은 우리 은솔이 동생 동혁이랍니다. 지난 가을인가 돌 때 보고 처음인데, 이제는 제법 사내아이 티가 나네요. 삼촌 뽀뽀하면 입을 크게 벌리고, 꼭 입에다 뽀뽀를 합니다. 세배도 얼굴을 바닥에 댈 정도로 허리를 휘청 구부려서 하는데, 이 아이 웃는 얼굴은 세배 보다도 더 좋은 축복 같더군요.

지금은 엄마 아빠 정도 하지만, 또 나중에 보면 부쩍 크겠지요.

이 아이들 하고 놀면서 보낸 명절이 가장 즐겁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놈들만 보면 얼런 장가가서 요렇게 이쁜 애들 낳고 싶어지더군요. ㅎㅎ

제 조카들 무척이나 이쁘죠? 은솔이는 무슨 미미핸드폰을 사달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세뱃돈만 만원 쥐어주고는 미미핸드폰은 사주지도 못했네요.ㅎㅎ

조카들에게 삼촌이라고 뭐 해준 것도 없고, 이거 삼촌이 영 변변찮아서 조카들에게 미안스럽네요. 조카들이 너무 이쁘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워서 모든 해주고 싶은 심정, 이게 삼촌의 마음인가봐요.ㅎㅎ

제가 아이들에게 뭐가 좋은지 뭘 알아야지요. 여러분들께서 좀 도와주실거죠? 여자아이 은솔이는 이제 4살이고요, 사내아이 동혁이는 지난 가을 돌을 지냈습니다. 얼마전 받은 알라딘 적립금이 조금 남아서 그걸로 뭐 아이들 책이나 장난감 같은 걸 사줄까 하고요.

뭐가 좋을지 좀 골라주세요.ㅎㅎ 골라주시는 분 중 한 분께 고작 딸랑 책 한 권 선물해 드릴거지마는 그래요, 좀 도와주십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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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카 선물 추천하기
    from 비우고 채우기 2008-02-10 02:12 
    지난 가을에 돌이었다구요. 제 둘째 조카랑 몇 달 정도 차이가 나네요. 조카를 지켜보니 유독 팝업북을 좋아라 했어요. 움직이고 튀어나오는 것이 신기한가봐요. ^^       그리고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책으로 열두 띠 동물 까꿍 놀이 추천이에요. '까꿍'이라는 의성어 때문에 아이들 반응이 좋은 듯해요. 그밖에...   부모가 읽어주기 때문에 함께 들여다볼 때 더 사랑스러운 책이에요. 도
  2.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from 나비의 오래된 감각 2008-02-10 06:45 
    4살과 작년 가을에 돌이 지난 조카의 선물로 고민하시는 멜기세댁님은 정말 좋은 삼촌이에요!! 제 동생 녀석들은 존으로 주고 때우던데,,,왕부럽군요~.ㅎㅎㅎ 조카들에게 잘하는 남자가 장가가면 자식들에게도 잘하던데...ㅎㅎㅎ 먼저 은솔이건 제 아이들을 키우며 유용하게 썼던 선물들을 떠올리고 바로 은솔이와 동갑인 제 조카가 즐겨 가지고 노는 것을 생각해서 함 골라 봤어요. 1. 퍼즐      &
  3. 멜기님 조카에게 추천하는 책
    from 파피루스 2008-02-10 11:23 
    멜기세덱님이 조카들에게 선물할 책을 고른다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끼적여봅니다. 나비님과 마노아님이 추천한 책 중에서 다른 책은 제가 잘 모르고,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는 저도 강추합니다. 동혁이 은솔이 모두 좋아할 책입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는 말의 반복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에 아주 흡족하지요. '사랑해'라는 말을 많이 해 줄 수 있어 제법 큰 아이들도 좋아합니다. 이 책을 보시면, 아마 멜기
  4. 4살 여자아이 2살 남자아이
    from 조선인과 마로, 그리고 해람 2008-02-10 23:37 
    마로 4살 때 기준과 지금 해람이 좋아하는 책을 골랐어요. 우선 4살이면 한참 이야기의 재미를 알게 될 때이지요. 감성이 따스한 책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 좋고, 그 중에서도 딸의 반응이 좋았던 것은...             감성에는 역시 시집. 넉 점 반과 엄마 마중. 그림도 아주 고와요. 강아지똥. 두 말 할 필요 없는 책이죠. 비디오도 좋아요. 구
 
 
멜기세덱 2008-02-10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로 달아주셔도 좋고요, 여기 [이벤트] 카테고리에 페이퍼를 작성해 주셔도 감사합니다. 알라디너 여러분들의 물심양면 협조 부탁드립니다.ㅎㅎ

웽스북스 2008-02-1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이런 건 마노아님 전문일 것 같은데 ^_^ 마노아님 동화책 리뷰 보면 저도 탐나는 것들이 몇개 있더라구요 ㅎㅎ

저는 얼마전 돌쟁이 애기한테 헝겊책을 선물했는데요, 애들 손가락 베지 않고, 물고 빨아도 안전해서 엄마들이 좋아한다고 그러더라구요- ㅎㅎ 은솔이 보고 너무 예뻐서 미소짓고, 동혁이 보고 너무 귀여워서 감탄했어요! ㅎㅎ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918345 요거 샀었는데 디게 귀여웠었어요 ^_^

Mephistopheles 2008-02-10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아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숙모"일지도 모릅니다.

순오기 2008-02-10 09:27   좋아요 0 | URL
호호~ 메피님 댓글 최고의 선물에 나도 동감!!
그러면 숙모가 알아서 척척 합니다~~ 요만한 애들보면 이뻐서 꺼벅 죽는...^^

멜기세덱 2008-02-10 19:29   좋아요 0 | URL
우선 그 선물은 저한테 먼저....ㅋㅋㅋ

마늘빵 2008-02-1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나도 어린이책엔 완전 전무 -_-

stella.K 2008-02-1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한창 이쁠 때로군요. 나는 25무렵에 첫조카를 봤는데 아, 이 녀석이 이제 이모라고 부르겠구나 하니 감개가 무량하더라구요. 근데 왠걸 이 녀석이 점말 이모라고 부르는 때는 그로부터 2,3년 후가 지나야했다는...남자 녀석이라 말이 좀 늦더라구요.ㅠ.ㅠ

bookJourney 2008-02-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눈팅만 하고 가다가 ... 전에 만들었던 리스트 중에 동혁이에게 맞을 것 같은 리스트가 있어 흔적 남깁니다. (꼭 이벤트 때문에 흔적 남기는 것 같아 쑥스럽네요.)

http://blog.aladdin.co.kr/mysunshines/1245943 직장 동료의 아가들에게 돌잔치 선물로 주었던 책들입니다. 막 돌이 되는 아기에게 주었던 선물이지만 대개 1~2년은 더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골랐던 거라 님의 조카에게도 괜찮을 것 같아요. (엄마들의 반응은 참 좋았어요. ^^)

http://blog.aladdin.co.kr/mysunshines/1485321 돌 지난 아가에게 보여줄 영어 그림책을 추천해 달라기에 골라보았던 리스트에요. 영어공부라기 보다는 아이가 재미있게 볼만한 책들을 모은 리스트랍니다.

한 가지 더 ... 멋진 삼촌이십니다 !!

라주미힌 2008-02-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조카들은 삼촌 얼굴 쳐다도 안보던데.. 몇 년만에 보니 남 남 ㅡ..ㅡ;;;;
선물공세를 안해서 그런가..

도서관 2008-02-11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단골로 선물하는 책 2권 - 구름빵, 입이 큰 개구리 추천합니다^^
 

* 집을 비워두고 며칠 외유를 했더니 방안이 냉골이다. 신발을 벗고 내딛은 첫발부터 찬기운에 까무라친다. 아이고 차가! 깜깜한 방에 불도 키기전 보일러부터 가동하고 온도를 최대한 높인다. 한 30분이 지났는데도 아직 차다. 좀 전까지 하얀 입김이 서렸는데, 지금은 가셨다. 그래도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시리다. 한 2년간 이렇게 오래 집을 비워보긴 처음인 것 같다. 뭐 워낙 재미없는 인생이고, 귀찮고 하찮은 인생인지라, 어디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천상 게을러 터져 돌아다니는 건 딱 질색이다.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갈 곳 있으면 귀찮고, 오라는 데 없으면 지겹다. 그나저나 이놈의 방은 언제 찬 기가 가시려나. 추운 건 딱 질겁이다. 그렇다고 더운 것은 취미 없다. 그냥 땃땃한 것이 좋고 서늘한 것이 애뜻하다. 그래서일까? 예수도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이도 저도 아니면 뱉어버린댔데나, 어쨌거나 그래서일까 보다. 성미가 영 우유부단하고 뭐하나 시원스레 하는 것이 없다. 아 아직도 춥구나. 얼른 따땃한 구들장에 등짝을 뜻뜻허니 지저볼란다.

** 외유를 했다는 것은 구정을 쇠러 시골에 다녀온 것을 말한다. 외유란 말이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 이 외유란 말이 어울리는 명절길이다. 사실 다녀온 시골이 내 고향도 아니고 부모님은 고향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시절좋게 말하면 귀농인데, 말인즉 귀농이지 실은 낙향이다. 헌데 고향 찾아간 것도 아니니 낙향도 딱히는 아니다. 도시 살기 힘들어 어데 큰이모댁 옆에 내려가 그냥저냥 밭이나 갈아 먹자고 내려간 길에, 터 잡고 눌러앉은 셈이다. 근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니 부모님은 이웃도 생겨 마실도 다니시고 하신데, 나는 명절이라고 내려가 봐야 뭐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재롱피는 나이도 지나 고래 잠만 퍼질러 자고 차려주는 밥만 꾸역꾸역 먹다가, 밤새 텔레비전만 보다 새벽에 잠들고, 그렇게 도야지마냥 굴러다닐 뿐이다.

그러니 명절이라고 부모님 계신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 영 신통찮다. 명절에 고향을 가면 오래간 못 본 친구놈들도 만나 술도 한 잔 떠들석하니 마시고, 시집간 순이 얼굴도 지나는 길에 보고 어릴 적 뒷동산에서 꽃 꺾어주던 추억도 눙치고 하는 것이 재미 아니던가. 그런 재미는 고사하고, 요새는 모이는 형제간이나 사촌들이 죄다 시집 장가들어 지네 짝들 데불고 와가지고 끼리끼리 노는 마당에야 내가 재미 볼 여지는 여간 없는 것이다.

이번에 내려간 길은 근 2년만이란다. 나는 셈이 잘 되지 않아 모르겠는데, 제작년 사촌 여동생이 시집갈 때에 내려가곤 첨이란다. 작년에 사촌 형도 장가를 가더니, 이번엔 내려가 보니 아들내미를 딱 놓았다. 누나는 4살짜리 딸내미하고 작년 가을 돌맞은 아들내미를 데리고 내려왔다. 시끌벅적 아이들 울고 웃는 소리가 즐겁지만, 그것도 한 때인 것이다.

*** 5일 저녁 늦게 집을 나와 시골엘 가려고 했더니만 차표가 없다. 그래서 몇 시간 늦게 근처 다른 곳으로 가는 고속버스엔 한 자리가 있어 그걸 타고 밤 늦게나 내려갔다. 근 새벽 2시가 되서야 도착했다. 내려가든마타 어머니는 내가 무슨 여자라도 데려오지 않을까 했단다. 이유인즉, 엊그제 인천 사는 작은 이모하고 통화하기를 내가 이제 여자 데려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별 말도 없었는데 무슨, 하지만은 은연중 기대를 한 눈치다. 나는 별반 말 없이, 못 먹은 저녁을 먹고는 티비를 보다가 늦게나마 잤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서 옆짚 큰이모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큰이모도 하는 말이 또 그거다. 이거 어른들이 무슨 작당을 하고 날 농칠려는 건지 원.

게다가 어머니는 내내 삼촌댁 아들내미 얘기만 한다. 외숙모가 만날 전화해 작은 아들내미 얘기에 재미를 붙였다는데, 이 아들내미가 네댓살 연상하고 사귀는데, 이 여자가 만날 집에 찾아온 온갖 아양을 떨고 음식도 만들고 하면서 아주 며느립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뭐가 어떻고 뭐가 잘하고 뭐에 좋은지 마냥 자랑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나보다 한참 아래인 이 사촌동생 얘기에 어머니가 영 부러워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젠장. 근데 왜 딴데 다 놔두고 외숙모는 우리 어머니한테 만날 그리 전화를 해서 자랑을 해대는 걸까? 하긴 그 자랑에 못내 부러워할 티를 낼 사람이 우리 어머니밖에는 없으니 고 재미가 외숙모에겐 쏠쏠할 게다.

**** 일정을 잡지 않고 무작정 내려간 길이다. 안 썼던 휴가를 몰아, 4일과 5일, 그리고 다음주 초 며칠을 냈다. 그러니 가서 내키는 대로 놀다가 올라올 참이었다. 근데 친척들도 모이고 누이 애들도 몰려들어 그저 마냥 제멋대로 놀기가 쉽잖아서, 올라가 할 일이 있다며 내처 오늘 올라온 길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함박눈이 내린 모양이다. 이거 올라갈 수 있겠나 싶었더니 날이 따뜻해 금새 길은 녹아내렸다. 눈이 더 오기 전에 올라가야겠다 싶어 낮 차를 타고 올라온 길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다보니 눈이 또 뿌린다. 날씨가 변덕 같기는 올라와 보니 저녁무렵 춥기가 쌀쌀맞다.

쌀쌀맞은 날씨 탓에 터미널 근처 서점에 들러 책들과 놀다가 몇 권 집어들고 이 밤에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또 한 일 이년은 못 내려가겠구나 생각한다. 내처 이번에는 여자를 하나 달고 내려갈 때까정 안 가리라고 생각한다. 올라오면서 읽었던 김유정의 「아내」란 단편을 읽으면서 마냥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또 이맘때고 저맘때면 어머니는 전화를 해서 내려오려므나 하겠지만, 나는 일하느라 바쁘고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방도 오래 찰 날이 몇 년간 없을 것이다. 방이 항시 또 땃땃하면 담번 내려갈 길에도 내 옆에 달릴 건 아무도 없을 것인데. 하여간 생각은 영 허무하다.

***** 방은 아직 찬 모양일까? 자판을 두들기는 손에 시린 기는 가신지 오래다. 사실 할 일이 몇 개 있다. 올라와 마냥 방바닥과 궁상 떨기만은 못할 것이다. 어데서 맡은 글짓기 숙제도 있고, 대학생 애들 데리고 뭐 간단한 좌담에 사회도 맡고 그랬다. 책도 좀 진득하니 볼 시간이 며칠 있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 올라오기 전 봉투에 돈 10만원을 여서 넌즈시 건네드리고 왔다. 사실 좀 많이 드리고도 싶었는데, 이래저래 버는 것도 없고 그렇다. 그래도 좀 아낀 셈이 없지 않아 미안스럽다. 아무튼 명절이 또 이렇게 같다. 이번 명절은 살 꽤나 쪘을 것이다. 기실 몇 년 명절 동안은 살이 쭉쭉 빠졌다. 대학가 주변에 살면서 명절이면 밥 먹을 곳 찾아 헤매기 일쑤다. 집에는 밥 해먹을 잡동사니는 거의 전무하다. 그러니 어데 밥집이라도 문 연 데가 있어야 그나마 풀칠을 할 수 있는 셈이다. 명절이면 밥집이란 밥집은 죄다 문을 닫아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삼각김밥 같은 걸로 떼우기가 종종이었다. 그러나 이번 명절 만큼은 삼시 세네끼를 꼭꼭 챙겨주어 먹었다. 살이 살짝이 올랐으리라. 아 이제는 방이 따땃해졌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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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2-10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멜기님도 압박이 장난이 아니군요- ㅋㅋㅋ
사람들의 설 이야기를 읽는 게 재밌긴 하오만, 아 우리 알라디너들은 다들 왜 비슷한 명절을 보낸 걸까요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가?

멜기세덱 2008-02-11 00:02   좋아요 0 | URL
압박이 그리 쪼이진 않아요. 그래도 전 항상 꾿꾿하답니다...ㅎㅎ

라로 2008-02-10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이 오르신걸 유지하심 좋은일이 생기실지도,,,3=3=3=3

멜기세덱 2008-02-11 00:02   좋아요 0 | URL
살이 오르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느낌이어서, 전 항상 날씬한게 좋은뎅...

마늘빵 2008-02-10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워낙에 결혼은 생각이 없다. 결혼하고픈 사람 생길 때까지는 안 한다, 고 누누히 말했기 때문에 그런 상상은 아예 안 하세요. :)

멜기세덱 2008-02-11 00:04   좋아요 0 | URL
음, 그런 상상은 부모님들의 고유권한 아닌가요? 그런 상상까지 뺏는건 참 죄송스런 일이라고 생각해요....ㅎㅎㅎ
그렇다고 아프님 결혼 생각이 정말 없는 건 아니잖아요...ㅋㅋㅋ

순오기 2008-02-10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땃해진 방바닥에 '그녀'만 있으면 딱인데...^^
남자들은 빈집 캄캄한 방에 불 키고 들어가는거 싫어서 '결혼'한다던데...
멜기님은 살이 좀 붙어야 하겠던데요. 나비님 말씀처럼 유지하심 좋은 일이 생길지도...2

멜기세덱 2008-02-11 00:05   좋아요 0 | URL
'그녀'만 있으면야 방바닥이 문제겠습니까? ㅋㅋㅋ
그렇담 찰 수록 더 좋지 않을까요?ㅎㅎ

순오기 2008-02-11 05:03   좋아요 0 | URL
ㅎㅎ'그녀'만 있으면 방바닥이 상관없고, '찰수록 더 좋다!' 맞아 맞아~~

마노아 2008-02-1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들장과의 싸움이 처절해요. 전기 장판 하나 장만하세요.ㅠ.ㅠ

멜기세덱 2008-02-11 00:05   좋아요 0 | URL
오래 집을 비워서 그렇지, 전기 장판까지 쓸 필요는 없겠어요.ㅎㅎㅎ
전기세 많이 나오잖아요...ㅎㅎ

순오기 2008-02-11 05:02   좋아요 0 | URL
ㅎㅎ전기세 얘기하는 멜기님은 진짜 주부같아요! ^^

2008-02-11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2-1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덱님 고향 잘 다녀오셨군요.^^
손가락 호호 불며 글자 치신거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