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그제 밤부터 내린 눈이 온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습니다. 곧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이 한 주간 맑고 깨끗한 마음가지고 아기 예수 탄생의 그 날을 맞이하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기대되는 것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환하게 하얀 눈이 날리면 그것처럼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2000여년 전에 이 땅에 아기예수가 탄생했습니다. 우리가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인데요, 요즘은 단지 크리스마스 그 날 자체만 기억되고 기념되는 듯한 인상입니다. 연인들의 특별 이벤트 기간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혹은 망년의 즐거운 밤으로만 말입니다. 호시탐탐 요날 어떻게 좀 낚아보자는 심사가 발동하는 날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런게 과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그렇지 않은 타종교의 사람들이나, 또는 무신론자들이나 크리스마스는 '휴일' 이상의 특별한 날일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메시아'로서, 이 땅의 죽어가는 인간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영으로서 오신 날이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년의 어떤 날보다도 이 날이 소중하고 감사하며, 복된 날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크리스마스가 의미 없는 날은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우리는 불교도가 아닐 지라도, 다만 한 뛰어난 성인으로서의 부처님의 자비가 이땅에 충만히 내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날을 맞이합니다. 이 크리스마스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사랑'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 우리 한국의 교회에서 그런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아타까운 일입니다만, 이 날 만큼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기독교 만의 신으로서 '예수'가 아닌 사랑과 헌신으로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간 '예수'를 기념하고 본 받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사랑'의 날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무척 연인들은 이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무언가 '합법적으로' 데이트할 수 있고, 뜻깊은(?)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에서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조금씩 축소되고 변질되는 것을 느낍니다. 연인들의 그런 사랑을 탓할 바는 못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변질의 원인소가 침투한 것은 아닐까요? 온갖 잡다한 상업주의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는 기분입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제게도 크리스마스는 다만 아기 예수 탄생의 거룩한 날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성적 설레임도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 때는 인터넷이 그렇게 발달한 때가 아니어서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정성스레 만들어서(혹은 만들어진 크리스마스를 사기도 하지만 그 안에 소중한 이야기들을 담았답니다.) 건내주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 느낌이 그립습니다.

가족에게, 선생님에게, 주위 친구들에게 카드를 주고 받는 기분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자 친구에게, 평소에는 말 한 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큰 맘 먹고 크리스마스에 '사랑'을 둠뿍 담아 보내기도 하였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뤄지는 커플들도 많이 있었죠. 안타깝지만 저는 예외였지만 말이에요.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여자 애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애들한테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반에서 젤 이쁜 애한테 카드를 못받은 저같은 애들은 괜히 시무룩하고, 받은 놈들은 자기가 최고인양 으스대도, 괜히 기분 나쁘고, 그 여자 애를 못된 계집애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고, 그런 설렘과 어쩌면 안타까운 마음들까지도 지금에서는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됩니다.

요즘 아쉬운 것이 이런 것입니다. 여자친구와 혹은 남자친구에 소중한 사랑의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보다 넓고 깊고, 그리고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작은 사랑의 마음을 나누어 주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있는 것을 테니까요.

그 좋은 방법이 바로 지금은 잃어버린 듯한 크리스마스 카드 보내기입니다. 언제부턴지 보내는 것도 줄어지더니 요새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고 받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다시 이것을 되돌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쁘고 비싸게 치장된 것 보낼 필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 '축복과 사랑'의 말 듬뿍 담아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직접 정성스레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구요. 저는 손재주가 없어 엇그제 문방구에 가서 하나에 1000원 쯤 하는 카드를 몇 개 골라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몇마디 쓰는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런게 아니더군요. "메리 크리스마스" 뿐이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우선은 그 카드를 받을 상대방을 다만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 생각가운데 그를 축복하고 행복하기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그것 자체로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지만 오늘부터 저와 함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보기로 하는 것을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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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눈을 봤습니다. 눈이, 함박눈이 내리더군요. 아침 집을 나서면서 골목길 옆에 주차된 차 지붕위에 얇지만 햐얗게 쌓인 눈을 보고서는 '아, 눈이 왔었네!'란 생각의 아쉬움을 달려주려는 듯, 그렇게 하늘에서 눈이 왔습니다. 올 겨울 들어 저에게는 첫눈입니다. 첫눈 소식은 몇 차례가 있었지만, 제가 깨어있는 공간에, 제 머리 위로 하얗게 소북이 내려 앉는, 그 눈은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참 아름답게 내리더군요. 함박눈이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거셈이 없이, 피부에 전해지는 추위의 싸늘함 없이, 어느 시인이 읊었던 시의 한 구절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내리는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뿌려지는 그 풍경, 그 설경이란 가히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내지 않은 함박눈의 방문을 우연찮게 깨달았습니다. 순간의 비명과 함께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습니다. 내 머리 위로 싸분히 내려앉는 함박눈은 아쉽게도 쉬 녹아버리더군요.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머리가 젖고, 옷이 젖어드는 것도 잊은체, 어린아이, 강아지처럼 주위를 뛰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였어도 좋아겠습니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내리는 함박눈을 내려받았습니다. 손 위에 손털처럼 가뿐히 내려앉은 함박눈 한 송이를 냉큼 입에 넣었습니다. 아무 맛도, 별반 차갑지도 않았지만, 내 속 가득히 산뜻해지고 시원해지더군요.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산성비가 어쩌구, 오염이 어쩌구 하더군요.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때는, 저에게는 올 겨울의 첫눈이 그렇게 아름답게 내리는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해보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일 모레에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창밖으로는 그 광경을 보았겠지요. 저는 그들이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무엇이 되었건간에, 우리가 누려야할 최소한의 낭만은 빼앗아 갈 수 없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저는 그들이 대학생으로서 충분히 누려야할 낭만을, 푸르고 푸른 청춘의 시간에 가져야할 이상, 그런 것들을 무엇엔가에 이리저리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이런 낭만을 회복시켜 줘야하지 않을까요? 내년이면 가수 김광석이 참 찡하게 불러낸 노래 '서른즈음에'에 제가 딱 걸려버립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런 생각들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생이 이제는 아니지만은, 지난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무엇을 했던가의 회의보다는 어떤 낭만이 있었는가의 후회가 더욱 큽니다. 그런 아쉬움들 모두 오늘 제게 보내준 하늘의 함박눈을 맞으며 달래고 또 달랬던 것이지요.

푸념과 체념은 이것으로 족하겠습니다. 그것이 길어지면, 제 삶이 궁구해질테니까요. 이번 겨울은 왠지 예감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내려준 함박눈을 보면서, 그리고 내 머리위에서 사뿐히 내려앉아 녹아버린 그 함박눈이, 제게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을 가능케 합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왼놈이 왼말을 해도" 제 맘 하나 꽉 붙들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이번 겨울 저에게만은 첫눈인 이 함박눈이 내리는 설경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엇보다 제게 의미깊게 다가오는 그런 눈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시험에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되었으면 좋겠구요, 이 겨울 모든 알라디너가 행복하고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을 인내하여 봄을 기다리지 마시고, 겨울은 그 겨울의 모습 그대로 만나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이 겨울은 따뜻할 거라 생각해요. 오늘 이 함박눈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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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의 겨울도 따스하기를 바래요. ^^

이리스 2006-12-0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내년이면 서른 즈음.. 이시군요. ^^;
눈을 보고 이렇게나 좋아하시다니 감성이 풍부하신 분 같아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편지 한 통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전국적으로 중등교원임용시험 공고가 났다. 예비교사들의 관심의 초점은 모집인원이다. 각 시도별 모집인원이 나오기만을 이들은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명이나 뽑을까?'에 대한 초조와 근심 속에서 이들은 임용시험 준비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공부해보지만 끝이 없으니 막막하고, 겨우 다잡아 자리에 앉아도, 이번엔 선생 적게 뽑는다는 풍문에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공고를 하려면 일찍이나 하지, 시험 겨우 한달 남겨 놓고 발표를 해대니,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11달 동안 초조와 불안과 근심 속에서 맘 편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발표가 나긴 했는데, 풍문은 사실이 되어 버렸다. 전국적으로 모집인원은 대폭 줄어든 것이다. 지난 해 미발추 문제를 비롯해서, 국가유공자 가산점 부여 등이 논란 속에 졸속적으로 처리가 된 여파가 올해 어김없이 나타난 데다가, 학생수 감소를 핑계로 신규 임용 인원 축소까지 올해 임용시험 준비생들은 그야말로 이른 한파에 몸서리가 처진다. 아하 가엾어라!

올해 국어과의 전국적 교원 모집인원은 일반 444명, 장애인 26명 미발추 98명 미발추 중 장애인 4명이다. 이것은 작년보다 일반 237명이 줄어든 것이다. 작년에는 장애인에 대한 별도 할당 모집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작년 미발추 법안이 통과된 후 작년 43명에서 올해 98명으로 배로 늘어났다. 장애인을 포함하면 102명으로 모집으로 일반인 모집에 1/3 수준이다. 이것을 볼때, 정원외로 뽑겠다던 미발추 모집인원이 일반 정원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고 보기 힘들것 같다.

그러니, 대부분의 예비교사(미발추, 장애인 제외. 장애인을 제외하는 것을 문제삼을 수 있겠으나, 나는 여기서 장애인에 대한 모집인원 할당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는 추후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 하도록 하겠다.)들에게는 200여명 이상 감소된 모집인원에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다.

인천 지역의 국어과 모집인원을 보면, 작년 56년에서 올해 27명으로 절반이 넘게 감소했다. 이건 그나마 난 거라고들 하니, 다른 지역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예외적으로 충청도 지역은 인원이 늘었는데, 그거야 행정도시니 뭐니 해서 늘어난 것일 뿐이고, 경기도 지역이 몇 명 준 정도가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작년도 국어과 전국 중등임용시험 실경쟁률은 13대 1일 넘는다. 한 해에 준교사(국어과) 자격증을 발급받는 사람이 수천명에 이르는 것을 볼때(정확한 수치를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해보면 더 참담하기만 할 뿐.) 적체인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올해 모집인원이 국어과가 200명 가량 줄었으니, 경쟁률은 훨씬 늘어날 것이다. 흔히들, 언론이나 교육부에서 미발추니 국가유공자 가산점 부여니 하는 문제들을 보도하면 '밥그릇' 싸움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정도의 경쟁률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찌 그 '밥그릇' 하나 잡기 안달에 애달에 하지 않겠는가? 1년 동안 굶은 사람 13명에게 밥 한 공기 던져줘봐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무대책에 허울 좋은 교원 경쟁력 강화를 외쳐대는 정부의 하는 짓이라는 게, 무분별한 자격증 남발이었다. 목적형 대학이라며 사범대학 만들어 놓고, 교사들의 역량 강화 및 재교육 기관으로 교육대학원 만들어 놓고서는 자격증 팔아 먹고, 사범대학을 뭐하러 만들어 놨는지 복수니 부전공이니로 자격증 또 남발하고, 교직이수로 또 남발에 망발하고, 그렇게 해놓고, 기하급수적으로 시험볼 사람만 양산해 놓고, 선발인원은 팍 줄여버리니, 경쟁률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다. 그래놓고 하는 말은 '교원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경쟁률 높아지면 교원 경쟁력이 강화되는 줄 아는가? 그렇담 우리나라 대학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일 게다.

이번 교원 선발인원 감소를 놓고 언론에서는 출산률 감소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라고들 떠든다. 교육당국의 아주 좋은 변명거리가 이 출산률 감소이다. 출산률이 감소하니 교사는 남아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규모집 교사를 줄여야 한다는 누가 봐도 흠 잡을 데 없는 논리인데, 실은 그렇지 않다.

정확한 집계나 통계를 내지는 않았지만, 현직 교사들은 내년 학급당 인원의 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향후 몇 년 간이나 지속될 지 누가 아는가?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교사 일인당 담당 학생수 있다. 학급당 인원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 교육이 옛날로 후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교육당국의 아주 교묘한, 아니 너무 속내 들여다 보이는 발상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출산률 감소와 학생수 감소를 핑계로 교원수급을 감소하는 것은 교육에 돈 투자하지 않겠다는 논리이다.

학생은 주는데, 학급당 인원은 늘어난다. 학급당 인원을 늘리면서 교원을 감소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출산률 감소로 학생수가 대폭 줄고, 교사들이 하는 일 없이 먹고 놀 것이라는 게 교육당국의 논리 아닌가?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출산률 감소로 인한 학생수의 감소는 큰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교육당국이 우리나라의 교육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보다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학생수가 주니까 그에 맞춰 교원수급을 줄일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교사 일인당 학생수를 줄여나가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예산의 비중을 높여나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이런 교육당국은 단세포적 숫자놀음에 노가나는 것은 수천 수만의 예비교사들이다. 밖으로는 밥그릇 싸움이니 뭐니에 매도당하고, 안으로는 자격증 뿌려놓고, 채용안하는 교육당국에게 사기당하는 꼴이니 말이다.

교육당국의 교원수급에 있어서 기본 방향는 경쟁력 있는 교사을 양성하는 것이다. 교육당국에서 그 일환으로 하는 일이란게 딸랑 두가지다. 우선 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아야 더 실력 있는 교사가 나올 것이라는 판단아래, 그야말로 준교사 자격증을 뿌려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쟁력 있는 교사 뽑기위해서 달랑 시험 한 번 잘 보는 사람 뽑는 것이다.

자격증을 남발하다보니, 사범대학 들어가 졸업하면 되고, 교육대학원 들어가 교원자격증 비싼 돈 주고 받으면 되고, 이래저래 하면 받아들게 되는 것이 이 준교사 자격증이다. 이걸 가지고 시험 합격하겠다고, 너도 나도 학원으로 학원으로 몰려가서 쪽집게 임용시험 잘 보는 방법 배워 오는 것이다. 어느 임용시험 학원 강사가 자랑스럽게 자기 배출한 교사가 전국에 널려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게 맞다고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이 참담하기 그지 없다. 전국의 대부분의 교사는 학원에서 길러낸 것이리라.

더이상 이야기하면 입은 안 아픈데, 욕만 나올것 같다. 12월 3일 일요일. 전국에서 임용시험이 있는 날이다. 이날을 우리는 비극의 날이라 이야기 하자. 요즘 뉴스에 간혹 나오는 교육대학의 수업거부니 시험거부니 하는 이야기는 그래도 부자놀음이다. 2명에게 밥 한 공기 던져주면 그런게 가능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13명, 아니 14명 15명에게 밥 한 공기 던져주면 그런 것 꿈꾸기 힘들다. 안 먹겠다고 단식투쟁 해봤자. 저 구석에선 몇 명은 싸우고 있으리라. 그 밥그릇 잡겠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우리 신세.

덤으로 이거 하나 더 이야기 하자. 사범대학의 한 해 졸업자는 과별 40~50명 선이다. 그 중에 시험에 합격해서 교사가 되는 경우는 많아야 3~4명 이다. 그것도 주요과목, 즉 국영수 정도고, 다른 과목들은 한 명도 어렵다. 사립이 있긴 하지만, 거기도 사정은 더 나쁘다. 그러니 그해 졸업자가 선생이 되는 것은 채 10%도 안된다. 나머지는 뭐하느냐? 대부분 또 일 년을 준비한다. 일부는 기간제나 시간강사를 알바삼아 한다. 또 일부는 학원강사의 길을 간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다시 재수생이 되어 임용시험을 치른다.

대학의 년초 취업률 조사에서 가장 기대치가 낮은 곳이 사범대학이다. 이게 교사되겠다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이런데서 날고 긴다고 해서 '밥그릇'에 초연할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교사 안되면 이 사람들이 이 험한 사회에서 뭘 해먹고 살겠나? 이 놈의 나라에서 선생 해먹기는 참 뭐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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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올해 서울에서 6명 뽑더라구요. 전국을 다 더해보아도 스무명 정도?
거기에 올해는 영양사 문제까지 포함되었고... 우리나라 교육정책엔 한숨이 태산이에요.
문제는 '돈'이라는 얘긴데, 비리로 썩어들어가는 돈을 나라 위해 투자를 하면 예산이 부족할까나 싶어요.

마늘빵 2006-11-04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멜기세덱님 임용시험 보시나요? 어떤 과목이세요 와락. 전 대학원 졸업 해야만 자격이 나오기 땜시롱. 철학은 있는데 도덕윤리가 없어서. 이러고 있슴다.

멜기세덱 2006-11-04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영양교사"라네요. 별의별 교사가 다 있어요.ㅎㅎ 이게 바로 교육당국의 전시행정인데, 참! 말막이 딱 막혀요...ㅎㅎ
아프락사스 님> 저는 '국어'에요. 이번 시험은 별 기대도 안하고 공부도 안 했는지라...ㅎㅎ 근데, 위의 교육대학원 언급은 교육대학원 다니시는 분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어요.

2006-11-04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6-11-0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졸업이 아주 조금 늦어서, 올 2월에 했습니다. 제가 철학이나 윤리교육에 관해서는 문외한입니다만, 교사가 되려면 교육적 자질 못지 않게, 해당 분야의 전문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분야에 대한 전문성 함양의 길은 끝이 없겠죠. 제가 볼 때도 사범대 달랑 나와서 선생한다는 것이 참 우스운 일이기도 해요. 아참, 저는 시험 준비는 통 안하고요, 현재는 대학조교하고 있습니다..ㅎㅎ
 

  오늘 내가 속한 모대학에서 시행하는 수시모집 적성평가에 시험감독으로 다녀왔다. 비가 어기적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적성평가를 보기위해 모인 많은 수험생들과 그에 못지 않은 학부모들로 학교가 떠들썩 했다. 주말을 주말답게 보내야 한다는 내 철두철미한 원칙이 오늘은 깨져야 한다는 억하의 심정과, 내 채우지 못한 잠을 내리는 빗방울이 놀리고만 있는 듯한 생각에 뭔가 어깃장이라도 놓아야 내일 산뜻하니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을 듯 싶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도 대학의 입시제도 등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는(운이 좋았는지 별 신경 안쓰고 이 모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시행되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대충을 주워들어 풍월을 대강 읊기는 하겠으나, 남들 하는 소리 앵무새처럼 따라할 뿐이니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오늘 이 적성평가 감독은 처음이다. 몇 번 이런저런 시험에 감독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무게있는(?) 시험 감독은 처음이니 적잖이 긴장이 되기도 했다. 막상 감독에 임해서는 뭐 그리 별반 다를 것도 없고, 나하고는 무려 9년의 차가 있는 젊디 젊어 애티가 줄줄이 흐르는 수험생들을 보면서 왠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는 '지금 얘네들이 왜 이런 시험을 볼까?'하는 어깃장이 놓여졌다.

  지금 이 시기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중간고사 기간이다.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 강의실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중간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우리 후배들이 불만이 많다. 도대체 공부할 자리도 없는데, 이놈의 수시니 적성평가니 하는 것때문에 주말 우리 후배들의 공부장소를 박탈해 버리고 있으니 그 불만이 아니 나올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것때문의 어깃장은 아니다. '적성평가? 지금 얘네들이 대학 들어오겠다는 애들 아닌가?'  이런데서 오는 어깃장이다.

  분명, 오늘 모인 많은 수험생들은 우리의 모대학에 들어오겠다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시험은 그들 중에서 누구를 받아들여야 할지를 선택하기 위해 평가하는 자리다. 그런데 '적성평가?' 뭔가 이상한듯이 야릇하다. 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때 이과 문과를 선택하기 전에 이 '적성검사'라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사실 이때의 적성검사가 그다지 신뢰성이 있는듯 보이지는 않다. 나는 그때의 적성검사에서 이학계열에 적성이 있는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이과엘 갔고, 대학은 보란듯이 문과, 그것도 문과 중의 문과계열이랄 수 있는 곳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이쪽이 내 적성에는 오히려 더 적합한 듯 싶다.) 그러나 그때의 '적성검사'와 오늘 이 '적성평가'는 그다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검사'와 '평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에서 왜 '적성'을 평가하고 있을까? 얼핏 들으니 "대학에서의 학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는 검사 "라는데, 말하자면 똑똑한 놈 뽑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말 그대로 '적성평가'라면 그 결과를 기초로 해서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알맞은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게 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지금의 이 '적성평가'라는 것은 대학 입학의 중요한 한 시험과목으로 그 위상을 드높이니, 본말이 전복되어도 한참을 뒤집혔다.

  시험감독을 하면서, 문제들을 얼핏보니, 예전에 본 IQ테스트 같기도 하고, 그냥 저냥 머리 좋은가 하는 검사만 같다. 사실 적성이라는 것이 이런 시험으로 딱하니 판별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둘째치고, 과연 이 평가를 대학 입시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가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타당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대단히 무가치, 무의미, 무분별 등등등, 여러 無한 것임에 틀림 없으리라. 말하자면 그렇게 뽑아 놓아도, 말짱 도로묵이 될 것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적성평가'가 대단히 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각 유명대학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대학이라면 이 적성평가로 거둬들이는 수익이 어지간히 적지 않단다. 뭐 그게 잘못 됐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수익이 많은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장사에서도 좋은 물건 팔아 돈 많이 벌면 그제 자랑이지 어디 욕 먹을 일인가? 그런데, 쓰잘데기 없는 물건 비싸게 팔아먹어 돈을 긁어 모았다면 그건 욕먹을 짓이고, 죄 받을 짓이긴 하다. 문제는 거기에 있을 듯 싶다. 지금의 대학에서 시행하는 '적성평가'라는 게 '쓸데없는 것' 아니냐라는 의문에 긍정한다면, 이것은 문제 아닐 수 없고, 욕먹을 짓 아닐 수 없으며, 어깃장을 놓아도 수 만 장을 놓아야 하리라.

  각 대학이 자신의 대학에 와서 공부 잘할 학생들을 뽑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적성평가'이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대학의 장삿속은 아닌지, 그 속에서 허우적 거려야할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쓰다보니 길어졌고, '오늘'은 어제가 된 지금이다. 하여간에, 오늘 어깃장은 여기까지만 하자. 한 가지, '적성평가'는 대학오기 전에 미리미리 해두는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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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10-2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금욜에 수시 면접본다고 시험을 월~목으로 몰아서 본-_-; 이제 나갈 물고기들보다는 새로운 물고기들에 관심이 많은건지 원. 그나저나 문법 달달달 외우기 힘들어요 ㅠ_ㅠ

마노아 2006-10-2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님의 얘기에 공감이에요. 교육정책도, 교육현장도 불만이 너무 많아요. 안티 교육이에요^^;;;

멜기세덱 2006-10-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제가 언제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이매지님이 시험 잘 보시는 거랍니다. ㅎㅎ
마노아님...저는 안티교육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처지네요....ㅜ.ㅜ;; 문제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안티'말고 다른 걸 해야 될 거 같아요. ㅎㅎ
 

  "그런데, 그런데...... 만일 어쩌면 우리에게 다시 그런 식의 결단의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불현듯 그런 불길한 생각을 해 본다. 상황을 조금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그런 암울한 결단을 강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암울한 먹구름이 끼어들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북핵 위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쟁 위기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점차 눈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다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라크에처럼 미국이 정말 막무가내로 북한을 공격한다면? 그때 나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할 것이며 어떤 결단을 해야 할 것인가? 북미간의 축구경기도 아니고 대량 살상이 불 보듯 뻔한 전쟁이라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원하지 않더라도 그 참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설사 100만 분의 1의 가능성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며, 우리 마음속의 이 명백한 불안은 그 가능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전쟁이 터지고, 한반도가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그저 내 한 몸, 내 가족만 살겠다고 산으로 숨어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그 부당하고 야만적인 전쟁에 대해 모든 것을 걸고 항거할 것인가? 차마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질문이지만, 나는 지금이 이 질문을 감당해 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마음속으로라도. 특히 이른바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더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적 결단의 순간을 맞지 않고 싶다면, 그런 순간이 오지 않도록 지금 당장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2003.02.17"
                                                      김명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6, p.28.

  북한이, 우리의 반쪽이, 그 '무서운' 핵을 실험하겠다고 공포하고나서, 그 살벌한 말한마디의 충격에 빠져 별다른 대응책도 제대로 간구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에, 또 한 방의 커다란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야말로' 핵 실험을 강행해버렸다는, 그 사실을 성대하게 만방에 널리 알린 것이다.

  오늘 한 후배와 저녁을 하면서 내가 물었다. "만약에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대로 군대로 끌려갈 거냐?", "별 수 있어요. 가야죠, 군대로!", "야! 너는 앞으로 제대로 된 시인은 되기 글렀다. 젠장!"

  나는 오늘 낮, 김명인 선생님으로부터 "북한이 핵 실험 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읽은 이 책의 위 구절이 떠올랐다. 2003년의 그 '결단'은 2006년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해진 것은 아닐까? 누군가 말했다. "교사는 지성인"이라고. 지성인은 지식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시인이 되겠다는 그 후배녀석에게 시인이란 무엇일까? 시인이란 존재를 '알바트로스'에 비유했던 그 시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진보적 지식인'의 최전선에 나는 과감히 시인이란 존재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되겠다는 그 녀석이 '가야죠, 군대로!"라고 말했을때 나는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아하 교사가 되겠다, 시인이 되겠다, 하는 이 못난 인간에게, '결단'은 애초에 불필요했던 것인가?

  북한이 핵 실험을 했다고 해서,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2003년의 '백만분의 일'은 현 상황에서 그 '만'자가 떨어지고 남음이 있다. 오늘 일제히 9시 뉴스는 그 소식을 다루면서,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폭격의 가능성을 낮지 않게 점치고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추측이다. 만약 미국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사전에 노무현 정권에 '동의'(?)를 구할 것이다. 그 '동의'에는 'NO'라는 대답은 수반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끝끝내 "NO"를 말할 수 있을까?

  노무현이 노하지 못하고, 한나라가 당근이라 생각하고, 열우당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땅의 지식인들은 지금 '김명인의 결단'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해야할 것이다.

  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려고 한다. 이 결단이 공갈이 된다하더라도 이렇게 말하겟다. "나는 이 땅의 전쟁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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