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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억하겠습니다!해콩 > 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2006년10월13일 제630호
     
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언어의 압축력을 만들어내는 ‘지혜의 건전지’… 언어는 ‘섞임’의 토양서 자라는 것, 순 우리말 고집은 ‘대인기피증’ 같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 년 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관련의 한 학회에서 한자를 “서양인 등 한자문화권 외부인들의 한국어 학습의 장벽 중 하나”로 꼽은 한 국내 학자의 발표를 들은 일이 있었다. 이 의견이 국내 학계에서 거의 통설인 듯한데,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렇게만 보기 힘들다. 이것이 외국어 학습의 변증법이라 할까?


△ 한글날을 맞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외국인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이들이 글쓰기에 한창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한자는 최대의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사진/ 연합)

 

최악의 걸림돌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좋은 학습 방법을 쓰면 바로 최고의 디딤돌이 된다는 법. 한국어를 전공하지 않는 학습자들에게 한자 학습이 추가 부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자를 배울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진 전공자 같으면, 초기의 진입장벽, 즉 어려운 습자 과정이라는 산맥만 넘으면 그야말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표적수사’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많은 한자어들이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의미의 압축성을 과시한다. 예컨대 ‘일조권’(日照權)과 같은 의미의 표현을 영어로 지어보시라. 직역하자면 ‘햇빛을 누릴 권리’ 같은 설명식의 표현이 되는데, 한국어 능통자가 긴 설명 없이 이 의미를 석 자의 한자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누가 봐도 부러운 일이 아닌가? 내 모국어인 러시아어 같으면, ‘일조권’을 의역하는 데 적어도 4~5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일조권’과 같은 의미의 표현은 유럽 언어들에서도 하나의 관용구가 될 수 있지만, ‘표적 수사’나 ‘친인척 비리’ 정도면 아예 따로 문장을 지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표적 수사’의 러어 의역을 한국어로 다시 직역해보면 ‘수사의 주체 내지 감독자가 특별히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자가 표적이 되어 불공평하게 진행되는 수사’쯤 될 것인가? 어쨌든 학생 때 나는 이런 압축적 표현력을 가진 한겵?일의 언어가 끝없이 부럽기만 했다. 약 7년 전 국내의 한 전문 번역자 양성기관에 출강했을 때 ‘지식기반 사회’의 러어 번역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어 같으면 준비된 번역어가 있지만, 이 간단한 여섯 글자의 한자 표현을 러어로 좀 어색하고 장황한 문어로 의역해야 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한자어들을 익히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학생으로서 나의 진정한 사랑은 고사성어였다. 나에게 넉 자짜리의 고사성어는 거의 한 권의 책과 맞바꿀 수 있는 지혜의 무게를 지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지금도 동아시아 종교사 수업 때면 불교의 방편론을 설명하려고 늘 칠판에 쓰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들어보자. 이 간단한 표현 하나를 머리에 떠올려 계속 반추하고 명상을 해보면,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서도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는 처세법을 다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처세서를 사느라 돈 쓸 일도 없이. 나는 이 표현을 접하면 꼭 남의 말에 잘 응대해 이 고사의 유래가 된 제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에게서 개인적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고마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재점검하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하루에 몇 번씩 각종 고사성어를 떠올리면서 내가 이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지 생각해본다. 눈이 높아봤자 재주가 따르지 않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안고수비(眼高手卑) 아닌가, 자신의 밭에 물을 대듯이 이미 내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논증 과정을 편의적으로 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이 아닌가? 러어에도 어떤 유럽 언어에도 없는 이 ‘지혜의 건전지’ 없이 내가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고사성어를 모르고 사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살아갔겠지만, ‘임기응변’의 의미를 한 번도 고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왠지 아쉬움이 생기기도 한다.

 

한글 통해 한자·한문·일본어까지 익혀

 

하이퍼텍스트인 인터넷에서는 한 사이트의 가치가 다른 사이트와 링크가 얼마나 잘되는지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언어 공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습 대상으로서 특정 언어의 가치는,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의 연속 학습의 디딤돌이 어느 정도 돼줄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돼 있다. 나에게 한글의 가치는 한글 공부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한글을 통해 한자, 한문 그리고- ‘한자 코드’를 통해- 초급 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한자 문화권 바깥에서 이 한자 문화권 안으로 틈입한 자인 나로서는 배우기 쉬운 과학적·체계적기호 체계로서의 한글이란 바로 난삽한 한문·일본식 국한문 혼용 표기 세계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 “한자는 ‘남의 글’일 뿐일까?” 지난 8월 충북 충주 탄금호에서 열린 호수축제 기간 동안 도내 대표 서예가 125명이 천자문 합작 휘호를 하고 있다.(사진/ 연합 박일 기자)

 

나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 한시까지 습관적으로 한글로 표기해 한국식 발음으로 읊고, 현재 체류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간판이나 식당 메뉴판들까지도 한국어 한자어 지식을 총동원해 어렵게 판독하다시피 한다. 나는 한국어 속의 한자어를 익혔기에 일본어를 따로 배울 일도 없이 “요야쿠가 무료데스”를 들으면 예약이 무료인 줄로 당장 눈치챌 수 있다. 과연 ‘토종 한국인’들도 한자를 ‘국어 속의 이질적인 요소’ ‘남의 글’로 배척하기만 해야 하는가? 대중적인 글에서 한자를 남용할 일은 없지만, 국내 인구보다 30배나 많은 이웃 나라들의 인구에게 통하는 ‘코드’가 이미 우리 언어 속에 내재돼 있다는 것을 굳이 나쁘게만 볼 일인가?

메이지 시대 초기의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처럼 한자를 아예 폐기처분해 ‘언문일치’의 완전을 기하자는 일본의 근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그들 후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한국의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언어 국수주의자들이 한자를 ‘남의 글’로 규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이미 고조선 시기에 이용됐을 법한 한자를 ‘남의 글’로 본다는 것은, 불교를 ‘외래 종교’라 규정해 1868~72년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강제 환속시켰던 메이지 시대 초기의 신도(神道) 국수주의자들의 사유 방법이나, 기독교를 “독일 민족에 이질적인 유대인들의 종교”로 생각했던 히틀러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두도 아닌 순수 한문만 쓴데다 그 저술에서 ‘신라’라는 자신의 국가 명칭을 겨우 몇 번만 썼을 뿐 주로 ‘국적이 없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했던 원효를 ‘우리’ 지성사에서 빼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진정한 ‘남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 사용을 굳이 그렇게까지 꺼릴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에게는 예컨대 일본어나 영어에서 온 차용어들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상돼서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단어들에 과연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한 유명한 국수주의적 언어학자가 ‘커피’라는 ‘외국말’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하여 ‘미국 차’라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역시 ‘순 우리말’이 아닌- 표현을 써왔다고 하는데, ‘커피’에다 과연 ‘미국’이라는 꼬리표를 꼭 달아야 하는가? 커피 원두의 원산지로 알려진 곳은 에티오피아고, 그 원두가 잘 자라는 한 계곡의 이름이 나중에 아랍어 ‘Qah’wa ’(중독성이 있는 음료)의 유래가 됐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 언어의 ‘커피’와 같은 단어는, 터키어를 매개로 하여 그 아랍어 단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 정도의 계보를 가진 단어라면 ‘미제 침략의 언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공유해도 좋을 세계사의 일부분이 아닌가? ‘남의 말’이 만약 모두 ‘침투’라면 바깥 세계에서도 ‘태권도’와 같은 한국어 차용어를 서둘러 그쪽의 ‘순 우리말’로 ‘순화’해야 하는가?

 

단어들에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음과 양의 합침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두 사람의 합침이 가족을 만들고 수많은 방언겙訛?영향들의 합침과 스며듦이 언어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사람이 외부인들과의 ‘소통’ 속에서 성장하듯 언어도 외부와의 ‘섞임’을 토양 삼아 자란다. 외부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꺼리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흔히 ‘대인기피증’이라고 진단한다. 솔직히 말하면, ‘순 우리말’을 고집하시는 분들을 보면 꼭 떠오르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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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최민식의 "꽃피는 봄이오면"을 직접 연주해보자!

 

게임방법은 지나가는 화살표가 박스에 들어왔을 때 키보드 방향키를 누르시면 됩니다.

과제다 시험이다 머리 아프실텐데 기분 전환 하시라고 올려 봅니다...^^

대학원 후배가 머리 아플 때 "쉬엄쉬엄(시험시험)"하며 하라고 올려준 건데...

생각보다 듣기가 괜찮더군요. 연주가 모두 완료되면 스스로의 연주를 들어볼 수도 있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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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을 읽는 시간

경향신문의 고전읽기에서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새물결)가 다루어지고 있길래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나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그 영역본을 타대학 도서관에 대출신청했다(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고아원'에 가 있다). 올 문단의 큰 논쟁거리를 가져온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진 스스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내용정리를 마저 끝내는 일도 아직 미뤄둔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페이퍼들을 자주 올렸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도 <탐구1>이었다. 그의 '비평'은 '고진식 비평'이라고 따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평을 접하기 어려웠던 거 아닌가?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는 쪽으로는 김우창 교수의 비평 정도가 예외적이었을 뿐) 독특하고 흥미로웠는데, 게다가 '읽히는' 비평이었다(아래의 기사를 보니 <탐구>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고진급의 비평가가 흔한 건 아니라는 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읽은 게 <은유로서의 건축>이었던 듯하며 나는 이 책을 영역본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영역본을 위한 이 선집이 <탐구>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에 나는 고진의 애독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후에 출간된 고진의 모든 책을 사들였으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정도를 빼고는 다 읽어본 듯하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몇몇 저작(가령 <의미라는 질병> 같은 비평집)을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혹 당신이 아직 이 거물급 비평가를 만나본/읽어본 적이 없다면 (뚜쟁이로서 말하건대) 한번쯤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충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면 당장 비평을 써보시라. '고진을 넘어선 비평'이 탄생하는 흔하지 않을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9. 30) ‘타자’와 ‘윤리’에 대한 치열한 성찰

한 권의 책이 생각하는 감각을 바꾼다고 할 때, 이는 날카로운 칼에 베는 일과 같다. 한 번 벤 자리는 아물어도 예전 같지 않다. 벨 때의 고통은 떠나겠으나 몸은 이미 전과 다르며, 미열이 가시지 않는 혼미함 속에서도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탐구’를 읽고 나서는 전처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1941~)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탐구’를 ‘전환’이라 일컫는다. ‘탐구’의 글들은 1985년에서 88년까지 잡지 ‘군조우(群像)’에 연재됐는데, 그 2년은 첨예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고진이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 이후 고진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패배한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의 싸움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나는 바깥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바깥이란 일단 그렇게 파악되면 이미 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내성과 소행’)

그는 형이상학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경제학, 문학, 철학의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형이상학과 맞섰다.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고진은 한 번도 쉽사리 자신을 형이상학 밖에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형이상학의 내부로, 사유되지 않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종국에는 형이상학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한 논리적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1983)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초월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그 전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메마른 감각과 갑갑한 논리였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타자’라는 생명력이었고, ‘윤리’로서의 소통이었다. 이제 고진은 형이상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고 할 것이다.”(‘탐구’ 후기)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자(他者)’이다. ‘타자’라는 말은 그 함의와는 달리 결코 낯설지 않다. 빈번히 사용되는 이 개념은 낯선 존재를 범박하게 처리하는 상투어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타자라는 말이 자기 확장의 의미를 띠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용법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타자는 주체의 ‘바깥’이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이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거리’가 빠져있다면 타자는 그저 주체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되는 신은 자기의 확장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리이다. 자신의 말을 마치 누군가의 말인 양 듣는다. 그때 타자와의 ‘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시는 신의 상정, ‘기복 신앙’은 자기독백이다.

여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비대칭적 관계’이다. 타자는 내가 품는 의미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이쪽에서 자명하다고 저쪽에서도 자명하지는 않다. 이때 고진이 ‘타자’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다. 독아론은 나에게 타당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독아론에서 남은 나와 동일한 주체로서, 동일한 규칙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화된 존재일 따름이다.

고진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독아론의 소산이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광인(푸코, ‘광기의 역사’)처럼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이란 무수한 존재들간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을 뛰어넘는 ‘가늠할 수 없는’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성찰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품으면서도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탐구’는 이렇듯 ‘타자’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탐구’를 선정했다. 80년대 후반의 저작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꼽힌 것은 ‘탐구’가 90년대의 맥락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소위 동구권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언’이 고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이성 혹은 자본주의의 독백일 따름이다. 문제는 그에 맞서는 해체주의가 90년대에 이르러서 파괴력을 잃고, 지적 유희의 경향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때 빠져있는 것 역시 ‘타자’와 ‘윤리’였다. ‘탐구’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어려운 지적 수사에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실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고진이 ‘탐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안에 신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이다.”(윤여일|‘수유+너머’ 연구원)

0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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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교수의 책과 100분토론을 2주간 보면서,한미 FTA의 전반적인 돌아가는 사항 정도 캐치했다.워낙 전문적인 분야가 많아서 책을 읽고 토론을 보아도 명확하게는 모르겠다.내 능력의 한계겠지만,다만 감은 온다.글쎄.그 감이 어설플수도 있으나..


1.맞바둑 VS 접바둑?


송영길 의원은 어제 토론에서,자꾸 안되는 쪽..최악의 상황으로 가정만 한다,한국을 비하하지 말자고 했다.일단 맞는 말이다.근데 우리가 칠레하고 FTA 맺는것과,미국과 맺는 것이 과연 동일체급의 경기인가? 를 생각해봐야 한다.내가 보기엔 급이 다르다.축구로 치면 칠레는 토고였고,미국은 프랑스다.바둑으로 치면 칠레는 맞바둑이고,미국은 3,4점 접바둑이다.우리를 비하하는게 아니라,현실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고수의 돌은 왠만해선 안 잡힌다.잡는 건 둘째치고,안 잡히면 다행이다.상대의 능력을 인정하고 겸손해질때,승산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2.충분한 수읽기 VS 손따라 두기.


어제 토론에 나선 경제학과 교수는,우리나라 관료 준비단이 밤을 세워가며,열심히 하고 있다,모두 다 똑똑한 분들이고 능력있는 분들이다,그러니 좀 더 지켜보고 그 분들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맞는 말이다.헌데,상당수의 국민들이 우려하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검토와 냉철한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느냐 하는 점이다.저들이 하자는대로,저들의 페이스에 말려 우리 스스로 따라가기 급급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바둑에서 손따라 두면 필패다,란 말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3.바꿔치기 가능? 맛이 나빠,잡아도 잡은게 아닌..


어제 토론을 보니,우리가 협상에서 비교우위를 나타낼 수 있는 분야가 섬유와 자동차 정도라고 했다.그리고 우리는 식량안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쌀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비교우위에 있는 섬유의 관세철폐와 미국이 원하는 더 많은 수준의 쌀,농산물 개방을 빅딜해서 상쇄하는 형태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일종의 바꿔치기인데,그렇게 됐을 경우의 이해득실도 문제지만 그런 수준에서라도 타결이 될지,의심스럽다.나는 분명 바꿔치기를 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고,한쪽에서 내 돌을 먼저 죽이고 남의 돌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나중에 그 돌이 움직이는 맛이 있어 살아가기라도 한다면..엄청난 판단 미스.돌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쌀은 이미 WTO협정에서 개방,매년 몇 %씩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4.연기 바둑과 페어바둑에서의 호흡.


두 명이 편을 지어 총 4명이 차례로 한수씩 두는 걸 연기바둑이라 한다.남녀 혼성이 됐을 경우엔 특별히 페어바둑이라 한다.일종의 단체전인데,이 경우에 있어선 무엇보다 서로간의 호흡이 중요하다.내 편이 둔 수의 의미를 재빨리 깨닫고,거기에 걸맞는 응수를 해나갈때,호흡이 척척 맞는 것.만약 그렇지 않고 같은 팀원이 둔 수의 의미를 전혀 잘못 읽고 엉뚱한 수를 두어 나가면,그것은 결국 필패.


미국은 FTA협상에 앞서,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취합했다 한다.실제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취합,검토했다고.거기엔 대형 자본을 매개로 한,다국적 기업도 분명 있을 터.반면 우리는 이해당사자는 차치하고,일반 국민들이 FTA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파악 못하는 상황.정부가 2004년부터 한미 FTA를 준비했다는데,나는 올 6월이 되어서야 그것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정부에서는 도대체 국민들과 이해당사자들에게 무얼 했단 말인가.어제 이 같은 지적에 대해 한 경제학과 교수는,다분히 엘리티즘적 요소를 드러내며 결국 협상은 정부가 한다는 것,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측과 이익을 보는 측은 당연히 존재하므로 그들의 의견을 일일이 다 들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더이다.소위 말하는 참여정부에서,그런말을 듣다니..어처구니가 없었다.


협상은 정부대표단이 하지만,그 협상은 연기바둑이나 페어바둑이나 마찬가지이다.보이지 않는 한쪽에선 국민들과 이해당사자들이 같이 착석해 앉아 있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그래서 국민들과 정부대표단은 같이 한수씩 번갈아 두어간다고 생각해야 한다.충분히 국민들과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고 같이 호흡해야 한다.일단 두어놓고 보자는 식의,안일한 생각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5.질 것 같으면 3패 빅을 만들면 된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협상단의 여러 가지 준비부족에,그리고 국민들과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하고,많은 국민들이 이제야 뭔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관심을 갖는 순간이라면..FTA협상 타결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같이 공부하고 좀 알자는 것이다.그리고 해도 늦지 않다는 것.가이드라인을 우리 스스로 정해서 2006년 12월 말~2007년 3월 말안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해내겠다는 식의 조급증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이다.안될 것 같으면,협상 결렬을 선언하면 되지 않을까.물론 그것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얼마간 감수해야 겠지만,조급한 체결에 따른 극심한 사회혼란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일 것이다.다음에 재협상 하면 된다.


바둑에선 자주 나오는 경우는 아니지만,3패 빅을 만들면 무승부 처리된다.FTA로 비유하면 쟁점 3가지를 만들어 놓고 두 나라 모두 한가지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 게임은 종료된다.그리곤 다시 재경기이다.상대 기보도 보면서 더 철저히 준비해서 경기에 임하는게 승산이 높다.


 

**

한미 FTA 얘기를 들을때마다 어쩔수 없는 당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지금 우리나라가 꼭 ‘축’에 몰린 듯 비틀비틀 곡예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축은 결국 막다른 골목을 의미하는데,내가 보기엔 그 축은 아직 초반이라 절망적일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축머리를 써서 그만큼의 댓가를 얻어낼수 있다.무모하게 축을 피하려고 나가봤자 기다리는건 장렬한 최후일 것이다.대신 그 축머리를 어디로 쓸 것인가? 에 대해선 진지한 수읽기를 하자.아직 시간은 있고,좀 더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면 좋은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막상 나는,바둑판위에 쓸모없게 놓여진 패석 한점처럼 느껴져,마음이 무겁다.하지만 바둑을 두다보면 그 패석 한점이,절묘한 축머리가 되지도 않는가.아주 미약하지만..그런 자그마한 희망으로 우리는 또 살아 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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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이글턴과 '이론 이후'

재작년 5월에 띄운 모스크바 통신문 가운데 '이론 이후에 무엇인 오는가?'라는 게 있었다. 당시에 모스크바에서 우편으로 받은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3월호)를 읽다가 해외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읽고 간단한 코멘트를 적은 것이었는데, 그걸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텍스트>에서 ‘직업상’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해외서평란에 연재된 것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맑시스트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신작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256쪽)에 대한 매튜 프라이스란 사람의 서평이 번역/소개돼 있었다(*이글턴의 책은 번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제목은 ‘자기비판(The Self Critic)’이고, 부제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가 이제는 그들이 문학이론을 폐기하길 바라고 있다”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평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문학이론입문>(1983)의 이글턴이다. 이 책은 국내에 2종(창비, 1986/ 인간사랑, 2001)이 번역돼 있고, 내가 알기엔 원저도 최소한 2판 이상을 찍었다(나는 원저의 2판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건 창비에서 나온 <문학이론입문>인데,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책이 나온 지 얼마 안된 시점인 학부 1학년 때 공대에 다니던 동창생의 하숙방에서였다. 물론 서점에서도 이 책을 봤지만, 비로소 이 책을 ‘알아’보고 흥미를 갖게 된 게 그때였던 것인데, 공대생도 읽는 문학이론서를 인문대생이 아직 읽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묘한 경쟁/분발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 책을 최소한 서너 번은 읽었는데, 책이 재미있기도 했고 ‘문학학회’의 이론 교재로서도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소개돼 있는 문학이론입문서는 이글턴의 것 말고도, 레이먼 셀던의 책이나 입슈/포케마의 책 등이 있지만, 역시나 가장 개성이 강하면서도 권장할 만한 것은 이글턴의 책이다(셀던의 책도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있고 많이 읽히지만, ‘교과서’적이어서 개성이 떨어진다). 약간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문학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인용하는 문학이론서로는 1위가 르네 웰렉과 펜 워렌의 <문학의 이론>이었다는 사실이다(2위가 미셸 제라파의 <소설의 사회사>였다). 요즘은 누가 웰렉/워렌을 읽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적절한 시기’에 <문학의 이론>을 대체했다.

그런데, 제목과는 다르게,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문학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소개하면서 한편으론 공박하는 책이었다. 결론도 ‘정치적 비평’이 아니었나? 앞의 서평 부제는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로 이글턴을 지칭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이글턴은 그러한 ‘이론’의 정치성을 폭로하면서, 이론의 과학성/객관성이라는 ‘허상’을 예리하고 비판하는 ‘반골적인’ 이글턴이다(그의 재치있고 신랄한 문체는 사르트르에 견줄 만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는 이미 <문학이론입문> 시절부터 이글턴의 문제의식 속에 ‘이론 이후’가 함축돼 있었던 것인데, 신간은 웬 ‘뒷북’인가 싶기도 하다. “이론의 황금기가 지나간 지는 오래되었다”고?

 

 

 



현재 맨체스터대학의 ‘문화이론’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이글턴은 신간에서 이론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진단/고발한다, 고 한다. 예컨대, “학계라는 거친 바닷가에서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혹적인 프렌치키스에 대한 관심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일부 문화연구 서클에서는 자위행위의 정치가 중동의 정치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이글턴은 이것을 ‘정치적 재앙’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론이 언제나처럼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렇듯 이론(특별히 ‘포스트모던 이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이론은 ‘문턱’이지만, 비평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해방’ 혹은 ‘진리’는 이론 속에서 구해질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과연 새로운 주장인가? 이글턴이 언제 이론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론은 언제나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던가?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러한 입장이 과연 이글턴에게서 ‘변화된’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방점의 이동은 있을지언정(이론은 진보적일 수도 있고, 보수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도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론관’이다), <이론 이후>에서 제기하고 있는 건 이미 20년전 <문학이론입문>에서도 충분히 암시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이 정말로 달라졌으며, 나는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었다. (2)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평자(혹은 어쩌면 이글턴 자신이)가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신간을 읽어봐야겠지만, 내 생각에 이글턴은 문학이론을 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폐기하길 바랄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는 단지 이론의 오용/남용과 오염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오용/오염이 제거될 수 없는 거라면, 물론 이론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후의 이론’, ‘이론 이후에 관한 이론’일 것이다. 이글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이론이라는 ‘문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이론은 전부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이다). 비유컨대, 우리는 ‘언어’에 구속돼 있지만, 우리의 자유는 언어 ‘이전’이 아닌 ‘이후’에 얻어질 수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 또한 우리의 비천한 삶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밝혀두자면, 상당한 식견과 적절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이 해외서평을 번역하고 주를 단 역자에게서 나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좋은 번역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글턴의 이 신간이 번역된다면, 그 적임자의 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한가지 궁금한 건, 역자의 주8)에서 이글턴의 ‘포스트모던 사상’을 공박하고 로티와 함께 지목하다는 스탠리 피쉬의 대표작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1980)가 <이런 기준의 텍스트는 있는 것인가?>로 번역된 점이다. 'Class'란 말이 여기서 중의적이긴 하지만, 보통은 ‘수업’이나 ‘교실’로 옮기기 때문인데,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Class'를 ‘기준’으로 옮긴 것은 특이해 보인다. 참고로, 피쉬의 이 책을 패러디한 글의 제목 중에는 'Is There a Fish in This Text?'란 것도 있다...

06.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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