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독(多讀)을 하다보면 사전 지식없이 느낌 좋은 책을 대충 선택할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인기 작가의 책을 그냥 믿고 사버리기도 한다. 주문한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이 책의 소재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도 나는 바람부는 화원(花園)을 생각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꽃밭의 평화로운 풍경같은 커다란 착각 말이다. 정말이지 바람처럼 살다간 화원(畫員)의 이야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며, 기대가 워낙 없었기 때문일까? 나는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에 빠졌다. 책을 펼치는 순간 오주석 선생님 맛깔스런 우리 그림 이야기가 떠오르고 내가 생각한 꽃밭이 아닌 화가를 소재로 한 이야기임에 쑥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뿐 술술 읽히는 흥미로움으로 날이 새는 것도 모르고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동시대를 살다간 인물의 작품들을 소재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와 추리를 해낸 이정명 작가를 알게 되어 몹시 기분이 좋았다. 책 중간중간에 실린 단원과 혜원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보는 느낌들은 깊은 밤을 기쁜 밤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우리 전통 소재로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와 같은 소설을 만들어 낸데에 진한 자부심을 느꼈다. 한 없이 따뜻한 마음이다.



왼쪽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이고, 오른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단원 김홍도의 '주막'이다. (1권 160쪽, 162쪽)

"나는 그 모든 백성들의 삶을 내 눈으로 보고싶다. 그들이 무엇을 아파하는지 ,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고 어찌 어진 군왕이라 하겠느냐. 하지만 군왕이란 자는 좁은 궁궐에 매인 몸. 궐 밖 출입 한 번에도 수많은 상소가 날아들고 벌침으로 위해가 도사리고 있지 않느냐?" (1권 155쪽)

왕은 그림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판단하고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설의 상상력은 이 두 작품을 정조 임금의 어명에 따라 거리로 내 보내지고, 도성 안팎 백성들의 있는 그대로를 그려오라는 주상의 명령에 따른다. 사람들의 눈에 대결로 비춰지는 이 난감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그 첫번째 화제를 도성 안의 술집 풍경으로 각자의 시각으로 전혀 다르게 그려오자고 타협하고 편전에 당도한 것이다.

같은 주막을 소재로 한 작품임에도 색상과 등장인물의 표정만으로 주상이 직접 관찰할 수 없는 백성들의 생활상을 취재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정명의 상상력이지만 주상은 이 두 작품을 나란히 관찰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주막을 그렸지만 두 점의 그림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렷다? 단원의 그림에선 질박한 상민들의 삶이 그대로 보이고, 혜원의 그림은 양반들의 호사를 드러냈구나. 단원의 그림은 누추한 초가지붕과 단조로운 색이 눈에 띄는 반면 혜원의 그림은 호화스런 기와지붕과 화려한 색감이 돋보인다. 같은 술을 먹더라도 곤궁한 백성의 삶과 호화로운 양반들의 삶이 대비된다 하겠다."
"흥미롭구나. 누추한 주막의 궁핍한 자들은 모두 웃는 얼굴인데, 호사스런 술자리의 양반들이 모두 찡그린 표정이 아니냐?"
······중략······
"호사스런 옷차림의 별감과 나장이 대낮부터 돈 많은 한량들을 끼고 술놀음이라니······. 그것이 어찌 나라의 녹봉을 받는 자들이 할짓인가!"

홍도와 윤복이 편전을 다녀온 후 관가에 정풍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중략······
낮부터 술놀음을 하던 관원들과 화원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평소같으면 점심 반주로 시작되던 술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야금과 퉁소 소리가 끊어진 방마다 정적이 감돌았다.
"아니 무슨, 정풍인지 뭔지 손님 다 끊기고 문닫게 생겼네!" (1권 166쪽)



작가의 상상력은 이 두 그림 또한 두 거리의 화원이 어명에 따라 우물가를 소재로 그려 온 작품으로 해석한다.
왼쪽은 김홍도의 '우물가'라는 작품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작품이고,  오른쪽은 신윤복의 정변야화(井邊夜話)이다. (1권 195쪽, 198쪽)

정조가 유발시킨 수많은 대결을 각기 다른 화법으로 절묘하게 그려내서 세상 사람들이 바라던 경쟁의 논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사제의 의리와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던 두 화가... 신윤복이 나타나기 전까지 김홍도는 당대 유일의 천재 화가였으나 이제 스스로 자신을 뛰어 넘는 위대한 제자를 만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정명은 이 소설이 그렇게 단조로운 그림 대결만으로 끝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정조는 억울하게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얼굴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두 화원에게 은밀하게 의뢰 하는데, 홍도와 윤복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10년 전 사라진 그림과 의문사를 추적하는 스릴러~ 바로 이 소설 안에 있다.

이 소설은 결국 조선중기의 두 천재 화가의 작품을 통해 쏙아낸 이야기이지만 나라가 운영하는 도화서 화원이었다가 속화 그리기를 좋아하는데다 고정관념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신윤복이 결국 도화서를 쫓겨나 바람의 화원이 되어 궐안의 스승 홍도와 함께 정조의 특명을 수행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도화서를 나와 거상 김조년의 밑으로 들어간 신윤복이 자신이 사모하던 기생 정향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내기에 응하고, 스승인 김홍도는 애제자 윤복을 구하기 위해 늙은 여우 김조년의 내기에 말려들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쟁투'라는 화제로 내기를 하게 된다.



이 두 작품은 거상 김조년의 모략에 따른 내기의 결과물이다. 왼쪽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김홍도의 '씨름'이고, 오른쪽은 간송미술관에 소장 중인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이다. (제2권 194쪽, 203쪽)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부분은 그냥 생략하고 넘어 가겠다.

 

다음은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김홍도의 독백이다.

그녀는 바람의 화원(Painter)이었다. 바람처럼 소리 없고, 바람처럼 서늘하며, 바람처럼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찾아 떠나는 그 길을 차마 나는 나설 수 없었다.

그녀는 바람이었고 나는 그녀가 흔들고 간 가지였다. 나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혼자 흔들리며 몸을 떨었다. 만약 나라는 가지에서 꽃이 핀다면 그것은 그녀가 피운 꽃이고, 열매가 열린다면 그 또한 그녀가 열리게 한 것일 터이다.

······ 중략 ······

그녀가 없는 나의 삶은 사계절이 없는 일 년 같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닌 겨울, 겨울, 겨울, 겨울······. (제2권 263쪽)



항상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던 혜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 신윤복이 단 두 줄의 기록만 겨우 남겨두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것을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뛰어난 상상력으로 복원시킨 이정명 작가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소설의 부분 부분 어설픈 구석도 없지 않지만 어차피 사람이 한 일이기에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가 좋은 소재를 갖고 무성의하게 써내려간 졸서였음에도 불구하고 TV 드라마가 그 허물을 감추고 매우 성공적으로 제작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문근영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드라마가 제작된다하니 그 또한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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