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압 탓인지.... 연세대학교에서 예정되었던 '故노무현 前대통령 추모 콘서트'가 학교측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무산 될 뻔 했다가 성공회대학교 운동장으로 옮겨져서 열렸다.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 참석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던 나는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 성공회대 갈까?"
아내가 나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동의했을 때는 나른했던 일요일 오후 3시40분쯤 이었고, 행사는 6시30분부터 선착순 입장으로 참석 가능하다고 했다. 걷는 시간 포함해서 지하철 이용시 집에서 성공회대까지 1시간반쯤은 예상되므로 약간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그리하여 분명히 여유롭게 온수역에 6시 겨우 넘은 시간에 도착하였으나 서울을 벗어난 대기줄은 역곡역 코앞에까지 쭈욱 늘어서 있었으며 우리가 끝줄에 도착하자 자원봉사 여학생은 분명히 못을 박았다. "줄은 서시되 아마도 입장이 불가능 하실 것 같습니다."
나보다 몇백미터 앞에 줄을 서 있던 옛날 직장 동료 정찬구씨가 전화를 걸어와서 입장 불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줬을 때 나는 불필요한 시간임을 판단하고 횡단보도를 길 건너 노란색깔 인파들을 구경하며 온수역으로 터벅터벅 걸어 갔다. 오가며 몇몇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온수역에 이르렀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부부는 그들의 초대를 받아 공식 행사장을 벗어난 성공회대 새천년기념관 6층 교수휴게실로 들어섰다.



운동장 가득 노란색 사람들이 모였고, 배우 권해효씨가 사회를 맡았으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 피아, 노래패 우리나라, 안치환과 자유, 신해철과 넥스트, 김C, 전인권, 강산에, YB 등이 무료로 출연했다. 대머리에 선글라스 착용한 신해철이 인상 깊었으며 재미없게 시작하고 선글라스를 벗어 눈물을 닦던 그가 '그대에게'를 열창할 때는 참으로 신이 났고 분위기가 고조 되었다. 유시민 전 장관이 등장하여 준비한 원고를 읽을 때는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으나 콘서트장의 특성 탓인지 그의 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 안타까웠다. 쥐새끼와 개새끼를 들먹이는 속 후련한 안치환 형의 노래가 좋았고, 보다 과격한 신해철 형의 노래는 내 듣기에 후련 했으나 주변에 뛰놀던 어린이들에게 약간 미안스러웠다. 정태춘 선생님의 시낭송 뒤에 사회자 권해효가 부른 노래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노래 제목은 잘 모르겠으나 박은옥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몇몇 지인들과 교수휴게실에 모여 앉아 행사장을 내려다 보며 즐겼다. 전체를 조감할 수는 있었지만 현장감도 덜 하고 약간은 아쉬웠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강산에가 무대에 올랐을 때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YB, DJ DOC, 이상은 등이 아직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
깊은 밤, 온수역까지 울려 퍼지는 콘서트장의 열기가 혹여나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마침 지하철 입구에서 술취한 중년 한 사람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욕하며 그날의 행사 자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노무현이 뭘 잘했어! 뭐 잘한게 있냐고!!" 안타깝지만 그런 이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한들 노무현이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우리 부부는 예정에 없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행사는 갑작스런 장소변경 탓인지 추모행사라고 하기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았고 감동은 깊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말같지도 않은 이유로 이 날 행사를 무산시키려 했던 연세대학교 측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며 같은 날 연세대학교 대강당을 쪽바리들의 아이돌 그룹 '베리즈코보'의 내한공연을 허락했다는 사실... 오래도록 기억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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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탄남자 2009-06-29 01:15   좋아요 0 | URL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분간 단체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답니다. 단지 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들 지지하고,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우리집 사랑방... 손님이 오면 머무는 곳... 렌즈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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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9-06-14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이중수납된 책들...뒤에 꽂힌 책도 보일 수 있게 되어있네요. 그나저나 넓직하니 좋습니다....차 한잔 내놓고 담소를 나눈다면 좋을 것 같아요...

동탄남자 2009-06-15 00:28   좋아요 0 | URL
한솔이 가족이 상경하실 때 저 방을 이용해 주신다면 그 또한 영광입니다. 우리집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철로 18분 거리에 있으니까요. ^^;

순오기 2009-07-0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멋진데요.
그래서 강남고속이면 놀아줄 수 있다고 하셨군요. 기억할게요~~ ^^
 





 

작은 기쁨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작은 기쁨 하나로 하여 엄청난 슬픔을 견디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한 것은 그 작은 기쁨의 소중함을 깨닫고 작은 기쁨의 기쁨의 그 위대한 증폭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2009년 6월 달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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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19일에 아내와 함께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공간 청와대에 갔었다.



방문 며칠 후, 당시 살던 우리 쌍문동집으로 배달된 기념 카드를 디카로 찍어 올려 본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귀가 아닌가 싶다.



다음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공동위원장 한명숙 전 국무총리께서 29일 영결식에서 낭독한  조사의 전문이다. 아내는 장모님과 함께 TV를 지켜보며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목소리와 눈빛에 하염 없이 울었다고 했다.


1.

노 무 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2.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3.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4.

노 무 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5.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6.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 오던 날(2003.2.25) 대통령에 취임하신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처제의 결혼(2009.5.30)을 하루 앞두고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 카드와 이 사진과  한명숙 선생님의 조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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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랜만에 신영복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원래 시청역3번 출구 쪽에 있는 성공회대성당 프란시스홀에서 있을 강연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 하시고, 그를 기리는 임시분향소가 덕수궁 앞에 자리한 관계로 장소가 성공회대학교 성당으로 바뀌었었다. 본강은 'CEO와 함께 하는 인문공부' 2기 수료식이 있던 날을 잡은 것이었는데, 나는 별다른 약속이 없다던 신입사원 세 명을 데리고 참석했으며, 노무현 정부때 통일부장관을 역임하신 이재정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선배와 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왼손은 오른손이 씻고 오른손은 왼손이 씻어준다며 좌우의 소모적인 이념 대립이 씻어지기를 희망하시는 한 마디로 운을 떼신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분필을 들어 칠판에 '여럿이함께'라 적으셨다. 출소 후 처음 이 글을 쓰시고 한글로도 액자를 채울 수 있는 디자인에 만족하시고 흐뭇해 하실 때, 한 친구가 남몰래 조용히 다가와서는 '여럿이 뭘 어쩌자고? 목적이 없잖아...'라는 의견을 주셨다고 한다.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의미심장했으리라. 그래서 단순했던 '여럿이 함께' 밑에는 목적의식 뚜렷한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라는 방서가 붙게된 것이다. 다음 사진은 우리집 서재와 화장실 사이 벽에 걸려 있는 바로 그 글귀다. 2005년 가을에 선생님으로부터 선물받은 멋진 글귀다.

 

당시에 우리 부부는 결혼한자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었으니 '더불어 한길', '함께여는 새날'과 같은 신혼에 어울릴법한 글귀를 열망했으나 여럿이함께 신혼 생활할 것도 아니기에 내심 실망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 글이 우리 부부의 손아귀에 전해지던 날, 멀리 시골에 계신 장인어른이 갑작스럽게 전남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며칠 뒤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기시게 되면서 우리 가족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함께 생활할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 병원과 집안을 오가며 가족들이 생활하는 집이 되면서 우리집은 정말 여럿이 함께 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때부터 나는 저 글귀를 보면서 선생님의 탁월한 선택에 탄복하고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다. 아내가 장녀이다 보니 우리집은 큰집이 되었고, 입원하신지 몇 달 되지 않아 슬프게도 장인어른은 영면하셨지만 그럴수록 우리 가족은 저 글귀 아래에서 똘똘 뭉치게 되었다. 단지 가족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우리 부부에게는 그렇게 시작된 의미였다. 바로 그 해에 아내의 연년생 처제가 결혼해서 동서도 생기고, 최근에 조카도 생기는 등 가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번 주말에는 셋째 처제의 결혼이라는 경사가 있어 다시 한 번 온가족이 우리집으로 모여들 것이다. 멀리 시골에서 아내의 친척들이 상경하여 여럿이함께 글귀 아래 둘러 앉아 한바탕 잔치를 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들뜬다.



한 편,  언젠가 우리집에 놀러왔던 후배 오규협이 저 글귀를 쳐다보며 했던 말이 생각나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형, 여럿 어렵게? 뭔 말이예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읽어졌다.

당연하게 읽던 글귀가 달리 읽히다니... 다양한 관점이 아름다웠다.
이 글 보시는 모든 분들, 여럿이 어렵지 않게 즐거이 생활 하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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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9-06-0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귀에 많은 것들이 깃들여있네요. 지금 우리집에도 이 글귀가 딱 필요할 것 같아요.

동탄남자 2009-06-02 00:55   좋아요 0 | URL
마음 후하신 신영복 선생님께서 그 곳에 내려 가실 때, 특강 참석 하셔서 멋진 붓글씨 받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