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화냈어야 했는데 - 제때 화내지 못해 밤마다 이불킥 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학 솔루션
조명국 지음 / 앳워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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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적극 표출한 동학농민운동이나 촛불집회는 나라의 미래를 바꾸지 않았나? 일본의 칼과 총 앞에 마찬가지로 칼과 총으로 응수한 독립투사들이나 민족적 분노를 만세 운동으로 승화시킨 삼일운동은 또 어떤가? 분노로 집결된 사람들의 움직임은 커다란 긍정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아까 화냈어야 했는데]의 저자는 이 책에서 화로 세상을 바꾼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카일라이 사티아르티라는 인도의 아동 권리 운동가는 TED 강연 <평화를 만드는 방법은? 분노하라>로 유명해졌다. 그는 그 강연에서 교과서가 없어 공부를 하기 못하게 되거나 노예 신분이기에 사창가로 팔려가는 소녀들을 보며 분노했고, 그 화의 결과 아이들을 구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아동 탄압에 맞서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책 97쪽 중에서)

 

 어떤 화는 관계를 망치거나 원한을 사고 어떤 화는 세상을 바꾼다. 이 모든 화의 시작점이 나는 같다고 본다. 감정이다. 특히 화라는 이름의 짜증, 불편함, 분노의 감정이다. 누구나 화를 느끼고 화를 내거나 그 화를 삭이며 생애를 산다. 화는 그 감정의 특성상 ‘뜨거움’을 동반하기에 잘 쓰면 약이 되고 못 쓰면 독이 된다. 화가 이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감정인 줄을 이 책을 읽고 나서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분노조절장애가 위험 수준에 오른 듯한 우리 사회에 ‘제대로 화 낼 수 있는 법’을 제안하는 이 책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아까 화냈어야 했는데]. 살면서 한번쯤은 누구나 다 이 생각해보지 않을까? ‘아!! 아까, 그 자리에서 버럭 화 냈어야 했는데!!’라면서 혼자 이불차고 곱씹고 분해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감정에 휩쓸려 앞뒤 없이 분풀이로 표출하는 화를 두고 ‘제대로 화를 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화라는 감정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왜 화가 필요한지? 어떻게 화를 내야 모두에게 좋은지, 화를 참으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나는 왜 제대로 화를 내지 못하는지? 당신은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는가? 답이 떠오르지 않거나 뭔가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기는 하는데 정리가 안 된다면 이 책을 당장 읽어보라. 우리가 느끼는 이 화라는 감정은 우리가 그동안 인식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긍정적인 감정이며, 이 화가 문제가 되는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화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여 그것을 병으로 만들어왔을 때뿐이다. 겉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 화가 없는 사람인 것도 아니고, 소리를 잘 지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제대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화를 잘 내는 법은 생각처럼 그리 만만하고 쉬운 게 아니다. 만약 그게 그리 쉬웠다면, 오늘도 뉴스 이곳저곳에 걸려있는 분노형 범죄들이 저토록 다양하게 양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 안에는 내가 화내는 것을 막는 장애감정은 무엇이며 나는 화를 낼 수 있는 기질이 얼마나 있는지를 테스트해보는 검사지(TIPI)도 있으니 꼭 해보시길!)

 

 이 책이 당장에, 우리 사회에 위험스럽게 쌓여 있는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전부 고칠 순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개인의 울분이나 울화 정도는 원만하게 풀어주는 해독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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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환경의 미래 - 어떻게 대응하고 적응할 것인가
이승은.고문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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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지구 생태계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전 세계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은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였다. 노르웨이 총리였던 브룬트란트는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통하여 자연 환경과 자원을 수탈적으로 소모한다면 인류의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내용으로 인류의 환경 의식에 경각심을 울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저 질문을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브룬트란트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인류가 환경과 자원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질 못했다. [기후변화와 환경의 미래]를 지은 이승은과 고문현 저자들은 이 책의 가장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며 현실의 위기를 알린다.

 

 

  1992년 리우회의(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각국 대표들과 민간 단체들이 지구 환경 보전을 위하여 개최한 회의)에서 기후변화 협약이 채택된 이래 국제 사회는 끊임없이 지구온난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선진국과 후진국은 책임 문제로 다투고 있고, 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갈리며, 산업계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정부 관료나 정치인들도 다들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를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미흡한 수준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지구의 기후 변화 위기를 극복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15쪽

 

 ‘인류는 지구 생태계를 지켜야만 한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지킬 수 있을까, 없을까? 방법이 있을까, 없을까?’를 논의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 당장부터 생태계를 지키지 못하면 지속가능한 발전은커녕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플라스틱 빨대를 잔뜩 먹고 죽음에 이른 동물들의 사체를 보고서도 여전히 커피가게에서 빨대를 주니, 안 주니 실랑이를 벌일 여유도 없다는 말이다.

 저널리스트인 마크 라이너스는 그의 저서 [6도의 악몽]에서 지구 평균 기온이 1도에서 6도까지 상승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기존 문헌의 종합적인 정리와 분석을 통하여 체계화했다. 그는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만년빙이 사라지고 사막화가 심화되면서 기상 이변 현상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바로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34쪽

 


 인간 환경은 인간을 주체로 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일체를 말한다. 즉 넓게는 자연의 발전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요소와 문화를 가지고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요소들의 행렬을 인간 환경이라 할 수 있고, 좁게는 물리적 환경만을 국한하여 인간이 생존을 영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건강과 삶의 향유에 필요하고 인간의 개성과 삶의 목표를 개발시키는 데 긴요한 물리적 상황의 결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주어진 자연 생태(태양광선, 대기, 기후, 토지, 물)를 이용하여 생존한다. 인류 역시 이 생태계 안에서 벗어나 생존할 수 없다. 다른 생물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생명 유지는 물론 문화도 발전할 수 없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풍부한 생태계를 최대한 이용하고 보전하면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연자원의 이용을 더욱 대규모로 촉진시켰고, 한정된 자연환경을 편익과 부를 위하여 무질서하게 이용, 변화, 파괴시켜왔다.
36-37쪽

 

 

 [기후변화와 환경의 미래]는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라는 엄청난 위기에 놓인 지구촌이 어떻게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지, 국가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함께 해나가야 하는지를 안내하는 책이다. 암울한 현실을 알려주면서 시작되는 책은, 그간 국제사회에서의 여러 회의와 각종 연구, 방침 등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설명하고 각 국가들의 정책이나 노력,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인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숙제들을 정리하며 마친다.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몇 가지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 차이에서 오는 상이한 정책이다. 혼란한 한국의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익과 경제 발전이라는 파이 앞에 국가별로 환경 문제에 대한 온도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어보고 난 지금, 우리는 이미 그런 여유-너희 나라는 여유 있으니까 하고 우리나라는 여유 없으니까 못한다-를 부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닌 듯 하다. 당장에 주변만 둘러봐도 몇 년 사이, 아토피를 비롯한 피부질환 환자가 너무나도 많이 늘었으며 불임 등 내분비계 이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수도 크게 늘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환경이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동시에, 이 변화는 어떤 생명체건 생존 자체에 빨간등이 켜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목표와 전략
 우리나라는 2008년 8월 15일 중장기 국가발전 비전으로 ‘저탄소 녹색성장’을 제시했다. 저탄소 녹색성장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정책과 조치를 취하면서 동시에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된 산업 또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국가의 성장을 동력화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2009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개회된 15차 기후변화 당사국총회에서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전망치 대비 30% 감축하겠다는 자발적인 감축 목표를 발표했다.
111쪽

 

 유엔이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를 내면서 세계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다. 당시 노르웨이 총리였던 브룬트란트는 세계환경개발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통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의 정의를 발표했고, 이를 오늘날 국제 사회에 널리 통용되게 했다. 이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미래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을 의미한다. 즉, 인류가 계속 살아가려면 자연 환경과 자원을 수탈적으로 소모해서는 안 되고 생존에 필요한 수준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0여 년 전 국제 사회에서 제기된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경제성장 중심의 개발 모델과 사고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환경 파괴가 이대로 진행되면 경제성장은 물론 인류의 생존조차 어렵다는 현실 진단을 토대로, 세대 간 형평과 정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류가 지구상에서 장기적인 목표를 공유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고 이 목표를 공동으로 실천하자는 제안과 문제의식이 대두되었고, 이는 개발과 경제성장에 대한 기존 관념을 흔들어놓았다. 세계가 달라지고는 있지만 30여 년 전에 제기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또한 환경 파괴가 지구적 규모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분쟁과 빈곤, 식량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적 환경에 맞춰 브룬트란트 당시의 문제의식을 다음 6가지 핵심 이슈로 정리하였다. 이는 오늘날 유엔을 비롯하여 국제적으로 합의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6대 이슈 <
국제분쟁, 빈곤, 성장 중심적 사고,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 식량문제, 도시팽창
259-260족

 

 


 얼마 전 버스를 타고 가다 버스 내에 게시된 화면을 통해서 나무 1조그루 심기 캠페인을 시작했다는 꼬마의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그 꼬마의 연설은 수많은 어른들을 움직였다고 했다.
‘지구 환경의 위기를 방관하지 마세요. 어른이든 아이든 우리는 누구든지, 모두가 다 함께 할 수 있어요. 우리의 꿈이 지구를 구해요.’
 나무 심기 캠페인에 동참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제는 70억이 모두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꿈이 지구만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마저도 구하게 될 것이기에.

저널리스트인 마크 라이너스는 그의 저서 [6도의 악몽]에서 지구 평균 기온이 1도에서 6도까지 상승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기존 문헌의 종합적인 정리와 분석을 통하여 체계화했다. 그는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만년빙이 사라지고 사막화가 심화되면서 기상 이변 현상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바로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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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오 옮김 / 하다(HadA)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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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진짜,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첫 페이지의 몇 줄을 읽는 것만으로 화자의 개성을 단번에 느끼게 되고 그 매력에 푸우우욱 빠지게 된다. 유학시절 신경쇠약을 앓았다던 이 일본의 예민하고 시니컬한 작가는 본인의 성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도련님’을 통해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못난 세상을 걷어찬다.

 서울대학교 선정 고전 독서 뭐 어쩌고~가 표지에 작게 들어가 있긴 한데, 굳이 그런 배지를 달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대표되며 일본의 국민 작가라는 소개로 우리나라에 익숙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고양이~~~ 외에도 [마음], [도련님], [그후] 등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들어와 있다. 


 [도련님]은 세상 물정 모르는 뚱딴지에 철부지에 호쾌하고 단순하지만 예민한 성정의 도련님이 부유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수학선생이 되어 시골학교에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첫 꼭지부터 무척이나 웃긴다. 이 도련님이 자기를 소개하는 대목으로 작품이 시작하는데, 실제로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나는 겉으로는 티를 못 내도 속으로는 ‘아유, 저 또라이’ 이래가면서 우습게 여겼을 것 같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도련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주 비웃음을 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도련님을 비웃는 작자들이 대부분 비열하고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인데 그것을 마치 성숙한 어른의 세계, 다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사의 이치인 것처럼 꾸며대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학문을 떠나서 개인의 덕으로 감화하지 못하면 진정한 교육자가 될 수 없다는 둥 터무니없고 과도한 요구 사항을 마구 늘어놓았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면 그깟 월급 40엔을 받고 멀고도 먼 이런 촌구석까지 내가 올 리 만무하지 않았겠는가. (중략)
 “교장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대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임명장을 도로 반납하겠습니다.”
 그러자 교장은 너구리처럼 생긴 눈을 깜빡거리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선생께서 이와 같은 희망사항을 액면 그대로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교장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처음부터 겁을 주지나 말았어야지.
 36-37쪽 

 

 생각해 보니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릇된 짓을 하도록 권장하는 것만 같았다. 그릇된 짓을 해야만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출세하는 것으로만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간혹 정직하고 때가 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철부지 도련님이라는 둥 샌님이라는 둥 괜한 트집을 잡아 깔아뭉개며 업신여긴다. 그런 식이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이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학교에서 차라리 대놓고 거짓말하는 방법이라든지 남들을 믿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게 한다든지 남을 속여 이용하는 술책을 가르치는 편이 세상을 위하고 당사자를 위해서도 보탬이 될 것이다. (중략)
 빨간 남방이 소리내어 웃은 이유는 나의 단순함을 비웃은 것이다. 단순함과 진솔함이 비웃음을 사는 세상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기요 할멈은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웃는 법이 없었다. 대단히 감동하며 귀담아들어 주었다. 그런 점에서 기요 할멈이 빨간 남방보다 훨씬 훌륭했다.
 “물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되지 하지만 본인이 나쁜 짓을 하지 않더라도 남이 나쁜 짓을 하는 걸 깨닫지 못하면 낭패를 보게 된다는 걸세. 세상은 만만하고 담백한 것처럼 보여도, 친절하게 하숙집을 소개해 준다고 해서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는 법이야.”
106-107쪽

 

 

 이 짧은 소설 중 이렇게 많은 텍스트를 인용해서 올리다니. 도련님이 보기라도 했다면 ‘아예 전체를 타이핑해서 공개해두지 그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부분은 이 또라이 비슷한 도련님의 강직함, 정의로움, 결벽증에 가까운 정직함을 드러내주는 부분이라 꼭 인용하고 싶었다. 이 부분만 읽어도 느껴지지 않는가? 도련님의 매력에 빠져들고 싶지 않은가? 기요 할멈이 왜 그토록 입이 마르고 닳게 도련님을 칭찬하고 어여뻐하였는지 너무나 공감이 된다. 나도 이 시대의 기요 할멈이 되고 싶으나, 도련님이 기요 할멈 같은 여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으니 진정해야겠다.

 누군가 진짜 재밌는 일본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미미여사, 뭐 이런 작가들도 좋겠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가장 먼저 입에 올릴 것 같다. 이야기도, 인물도,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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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단편선 - 영혼을 깨우는 이야기
미야자와 겐지 지음, 김미숙.이은숙 옮김 / 하다(HadA)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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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의 새벽. 자정은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으나 해가 뜨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까만 하늘은 고요하고 지구상에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 뿐인 것처럼 쓸쓸하고 고독한 새벽에 코로 들어오는 밤공기는 각별하다. 그 밤공기의 맛을 한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은 종종 그 새벽에 일부러 깨어있게 된다. 습하고, 쓸쓸하고, 고즈넉한 밤에 마치 ‘시간’도 달리기를 멈추어 호흡을 늦추고 어디 늘어지게 누워있을 듯하다. 낮 동안 몸을 숨겼던 온갖 상상의 갈래들이 날벌레처럼 여기저기서 내려와 앉는 특별한 순간들이다.
 미야자와 겐지 작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을까. 몽환적이고 영적인 그의 작품들 속에서 화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고독해하는 인물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어딘가 윤동주의 시를 생각나게 한다. 단편들을 엮은 책의 표지에는 ‘영혼을 깨우는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장수풍뎅이 한 마리가 요다카의 목 안으로 들어오더니 요다카의 목 안을 할퀴며 푸드덕거렸습니다. 요다카는 그것을 억지로 삼킨 순간 갑자기 가슴이 철령해져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면서 하늘을 빙빙 돌았습니다.
 ‘아아, 장수풍뎅이며 수많은 날벌레가 매일 밤 내게 잡아먹혔어. 이번엔 겨우 나 하나만 매에게 죽임을 당하면 그만일 뿐인데... 그게 이렇게도 괴롭다니. 아아! 괴롭다, 괴로워! 더는 벌레를 잡아먹지 말고 굶어 죽어야지. 아니, 그러기 전에 매가 나를 죽이겠지. 차라리 그 전에 하늘 저편으로 멀리 가 버려야지.’
121쪽 요다카의 별 중에서

 
 6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미야자와 겐지 단편선에서 가장 내 눈에 든 것은 [요다카의 별]이었다. 단편들은 동화적이지만 동화는 아니다. 동물이 화자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주는 교훈적인 내용이 이 단편들의 집필 동기는 아니리라. 아마도 순전히 작가 자신과 세계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성찰의 와중에 이런 단편들이 나왔으리라 추측한다. 위에서도 잠시 썼지만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 중에서 특히 [요다카의 별]이 윤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성찰. 남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나의 존재로 말미암아 애꿎은 날벌레들이 식량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현실을 사무치게 괴로워하는 주인공에게서 윤동주가 시 속에서 끝없이 풀어놓은 참회와 성찰의 면을 발견한다.
 첫 작품으로 실린 [은하철도의 밤]은 주인공에게 희소식이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아련하고 슬프게 끝나서, 이 작품 역시 많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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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스
제시 볼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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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용운이 쓴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나는 너무나 좋아한다.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빗대어 연인과의 이별로 쓴 그 시의 주제 때문만은 아니다. ‘아아, 님은 갔으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로 완성되는 그 시의 마무리는 정말 너무나 아름답고 대단해서 읽을 때마다 혹은 떠올릴 때마다 경이에 빠지곤 한다. 기억하고 있기에, 간직하고 있기에 이별하였으나 이별하지 않은 것, 보냈으나 보내지 않은 것. 이것을 뒤집으면 이별이란 기억하고 간직하는 과정 혹은 상태라는 의미라고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ㄱ, ㄴ, ㄷ’에 맞추어 내 기억을 정리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까지 왔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에 대한 의문에 가능한 객관적이고 명료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리를 하고 싶어서였다. 제시 볼의 신작 [센서스]를 읽으며 나는 그때의 내 시도와 맥락이 비슷한 주인공의 여정을 읽으며 묘한 기시감에 빠졌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인가, 나의 이야기인가? 하는.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내용과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화자의 내러티브 덕에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쯤, 이 소설의 종착지는 결국 헤어짐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더 이상 아들을 책임질 수 없는 아버지, 아버지의 옆에서 살아갈 수 없는 아들. 아버지는 아들을 기차로 떠나 보내고 흙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진짜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들과 여정에 나선 아버지는 병든 몸으로 불치의 병 끝에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내 무덤, 내 무덤, 내 무덤’이라고 화자가 되뇌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야기는 마치 아들을 요단강 건너로 떠나보내고 아버지만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이 읽힌다. 자식이 죽으면 마음에 묻는다 하던가. 마치 그것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잃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잃고 홀로 남겨진 듯한 시선이 소설의 끝에 길게 그림자로 남는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모두가 저 ‘센서스’일 것이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정보가 내게 기록이 되고, 간직이 되고 그러면서 나의 생애가 통째로 하나의 기록이 되는 것. 이 기록의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보존해야 할 것인가. 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어보려는 저자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생애의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나를 한없이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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