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인문 산책 - 역사와 예술, 대자연을 품은
홍민정 지음 / 미래의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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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둥의 신 토르,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드와 토르의 아버지이자 최고 신인 오딘 그리고 인간 세계의 경계를 지키는 헤임달의 이야기는 마블 시리즈(영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다. 영화가 이들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는 판타지로 구현했다면, 이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숨쉬고 있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스웨덴이다.
 최근에는 공포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미드소마’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어느 종교집단의 축제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미드소마 역시 영화 감독의 상상력으로 만든 가상이 아니다. 스웨덴 사람들이 해가 긴 한여름기간을 정해서 즐기는, 지금도 여전히 스웨덴의 일상으로 살아있는 실제 축제가 ‘미드소마‘다. 


 삐삐나 무미 등의 세계적인 캐릭터도, 노벨, 안데르센, 키르케고르, 그리그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 이상은 꼭 이름을 들어본 인물들도 모두 저 북유럽의 토양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흔히 북유럽이라고 부르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 수 백년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정서가 비슷하면서도 각 국만의 독자적인 개성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북유럽 5개 국가는 우리나라로부터 멀리 있지만 낯설지 않고, 친근하면서도 어딘가 가까이 하기엔 쉽지 않은 그런 나라들이다. 인터넷으로 치면 나오는 여러 정보들을 통해 각 나라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얻을 수 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스웨덴에서 4년을 거주한 저자는 현지에서 살아 본 사람이 쓸 수 있는 북유럽 여행기를 써서 책으로 냈다. 스웨덴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 김에 그는 스웨덴과 더불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까지 두루 돌았다. 각 국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들을 다니며 그곳에서의 감상들을 차분하게 책에 담았다.

 

 이 책은 관광지로서의 북유럽 5개국을 소개하는 게 아니다. 각 국가와 도시들이 담고 있는 역사, 그 역사가 비롯된 신화들, 이 신화로부터 만들어진 문화 그리고 역사와 신화와 문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북유럽 시민들의 일상까지, 저자는 자신의 여정을 통해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저자의 감상에 충실하되 독자들이 실감 있게 북유럽의 현실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리고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여행에 나섰을 때에 이 책의 내용들이 실용적인 도움이 되도록 한 세심함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덴마크 왕정의 역사를 다룬 영화 [로얄 어페어]를 찾아 본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는 덴마크 디자인을 찾아본 일. 세 번째는... 아직 꿈만 꾸고 있지만... 여행가고 싶다. 저기로 가고 싶다. 북유럽 5개국으로. 저자는 피오르의 실물은 그 어떤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기어이 가서 쌩눈으로 보는 수밖에. 여행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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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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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위화가 쓴 소설 [제7일]의 주인공은 사자(死者)다. 모든 사자가 그렇듯이, 그도 한때는 살아 있었다. 이미 태어나 버린 것을 마지못해,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았던 것이 아니라 아주 성실하고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40년을 살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아침에 그의 집 문에 붙어 있는, 화장터 몇 호로 오라는 쪽지를 확인하며 이 소설은 시작한다. 


 쪽지를 확인한 그는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양페이는 자신의 몸은 죽었고, 자신은 혼이 되어 사후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느끼고 있었다.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무덤이 없기에 그는 화장터에서 안식을 맞는 대신, 생전의 기억에 이끌려 몸이 살았을 적에 걸었던 거리를 찾아다닌다. 독자는 양페이 혼의 정처 없는 여로를 동행한다.

 

 

 “시간 나면 편지도 쓰고 전화도 해라. 잘 지내는지 알려주렴. 내 걱정은 말고.”
 내가 올라탄 기차가 역을 떠날 때 아버지는 그곳에 선 채 멀어지는 기차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플랫폼은 오가는 사람들도 붐볐지만 아버지 혼자만 거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내 삶에서 조용히 사라진 이후, 나는 그 여름날 아침 플랫폼의 광경을 가슴 시리게 떠올리곤 했다. 아버지가 스물한 살 때 갑자기 아버지 삶으로 뛰어든 나는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장악해버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마땅히 누려야 했던 행복은 아버지 삶에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온갖 고생을 참고 견디며 나를 길러낸 그 아버지를 나는 나도 모르게 플랫폼에 내버린 것이다.
소설 122-123쪽

 

 

 양페이가 사후 세계를 방황하는 목적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다. 우연히 철로에서 갓난쟁이를 주운 그 여름날 이후, 총각은 결혼도 포기하고 이 갓난쟁이를 번듯한 청년으로 키워냈다. 아버지의 가슴 절절한 사랑을 기억하는 양페이는 자기보다 먼저 죽었을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사후 세계의 이곳저곳을 수소문한다.
 이 여정에서 양페이는 현대 중국의 부패하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희생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저자는 양페이의 여정을 빌어, 천박한 자본주의와 부조리한 공산주의라는 양극단의 패악을 함께 앓고 있는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다. 자본 제일의 논리에 밀려 가족이 분해되고 장기 밀매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이승 속에서 사람들은 사람다운 생애를 살지 못한다. 이 끔찍한 모순들을 특유의 역설과 유머로 그려낸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 듯하다. ‘정말 거기 인생이 있는가?’ 


 언젠가 저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소하게 살아가는 어떤 버릇 같은 평범한 일상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의 관심사는 일상이 아닌 인생의 본질이라고. 그런 저자는 이 책에서 죽은 자들의 회상과 독백을 통하여 사람답게 사는 일의 본질을 두드린다.

 

 몸이 죽은 양페이가 갔던 화장터에서조차 비싼 무덤과 수의, 높으신 신분에 따라 화장 순서와 가마가 결정된다. (이미 몸이 죽었는데 시장이니 재산이 무슨 소용이라고!) 사후 세계에서조차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 모순은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그래서 양페이는 화장터를 떠나 7일 동안을 아버지를 찾아 헤맸나보다. 양페이에게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가르쳐준 것도, 인생의 본질이 되어준 것도 결국 그의 아버지였으니까.

 

 돈과 정치, 권력과 체면이 지배하는 인생의 모순을 대담하고 유쾌하게 꼬집은 저자는 동시에, 이 혼돈한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랑과 희생, 생명과 존엄의 가치도 드러낸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양페이와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는 너무나 아름답고 따듯하다. 요란한 사랑의 표현이나 과장된 희생이 있어서가 아니다. 철로 옆에 흔들리듯 피어난 풀꽃이 화려한 색이나 향기가 없어도 신선한 기쁨을 주듯이. 소란한 세상 속, 욕심껏 지내는 인간들 틈에서 그들이 남긴 기억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듯하다. 양페이를 담담히 사랑한 그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죽은 후에까지도 사랑한 아들의 이야기는, 책장을 덮은 뒤에도 한참동안 이들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이 이래서야 되겠냐’며 불만을 토로하고 문제제기만 하는 작품이라면, 아마 우리는 위화라는 작가를 이토록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위화가 그려낸, 때로 이별과 상실을 겪더라도 자신의 삶을 지키며 묵묵히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독자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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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무기가 되는 수학 초능력 : 미적분 편 일상의 무기가 되는 수학 초능력
오오가미 다케히코 지음, 이인호 옮김 / 북라이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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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상의 무기가 되는 수학 초능력]은 수학의 정리, 확률, 미적분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출간된 수학 교양서 시리즈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내가 수학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가면서 수학이라는 세계와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히게 만들어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읽기 힘든, 읽기 겁났던 시리즈가 바로 [미적분]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저자가 알았나보다. 일상의 무기가 되는 수학 초능력 시리즈 [미적분]편의 저자 오오가미 다케히코는 서문에서부터 독자를 위로한다.


 인간은 누구나 추상화하여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수학은 추상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이어서 내용이 심화될수록 점점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편입니다. (중략)
 이 책에서는 미적분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합니다.
 6편

 
  수학이 추상화의 학문이라는 설명을 이 책에서 읽는 것만으로 벌써 ‘미적분’이라는 어둠의 세계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1cm 정도는 녹아내렸던 것 같다. 미분과 적분, 그러니까 세세하게 나누어 분석하는 것과 세세하게 나눈 것을 더하는 일이라는 미적분의 발상이 얼마나 훌륭한 아이디어인지 충분히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세상은 아는 만큼, 깨달은 정도만 보인다고 하는데 미적분의 렌즈로 보이는 이 흥미로운 세상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보낸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미적분의 렌즈로 보이는 세계에 조금씩 다가가는 스스로를 바련할 수 있다. 기호니, 함수니 이런 것들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었고, 실제로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싫어하던 과목도 미적분을 강제로 가르치던 수학이었다. (으아, 진짜 너무 너무 싫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신기하게도 기호, 함수, 좌표 등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미지를 그리게 되면서) 이 세계가 미분과 적분의 언어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이 얇은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단번에 미적분의 모든 설명을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니다. 그 세계가 그렇게 정복하기 쉬운 것이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수포자(수학포기자)들이 애초에 양산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기하게도 이 책이 미적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실하게 넓혀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 미적분에 진저리를 치는 학생들에게 더 권하고 싶은 책이다. 미적분이 왜 탄생했으며, 이 발상의 기본적인 구상 핵심이 무엇인지만 잘 이해가 되어도 미적분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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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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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숙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도 화가 났어? 나만 별생각 없었던 거야? 그러나 그 질문은 곧 ‘당신도 B항공사가 유나를 죽였다고 생각해? 나만 별생각 없는 거야?’와 같은 말로 들릴 것이었다.
 18쪽 유나의 장례식장에서 정근의 독백

 
  하루에도 몇 번이고 비행기를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하늘이 김포공항으로 오고 가는 하늘길목에 있어서인지 비교적 낮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쉽게 보곤 한다. 비행기에 탄 채로 지상을 내려다보면 마치 속세를 떠난 신선이 된 것처럼 인생사가 무상하게 느껴진다고, 보통은 그렇게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지상에서 비행기를 바라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로서는 오히려 비행기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인생무상으로 느껴진다. 저 커다란 비행기 안에 탄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그 순간을 살고 있고, 그 안에서도 기장이니 승무원이니 하는 사람들이 긴장을 놓치 못한 채 분주히 일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멀찍이에서 바라다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에서 동물들의 한 때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듯 그 비행기의 풍경이 큰 의미도 없고, 나와는 무관한 일로 느껴진다.

 

 그 비행기 안에서 일하던 그녀가 자살했다. 차를 몰고 저수지로 돌진했다는 그녀에게 물어볼 순 없었다. 왜 그랬냐고? 그녀의 속사정은 그녀가 죽은 후, 살아남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비로소 복기된다. 그녀가 생존해 있었다면 아무도 그녀의 사정을 궁금해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딸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정근은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를 두고 갈등한다. 그녀의 죽음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기울이지 않았던 정근은 누가 딸을 죽였는가를 추적하면서 비로소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의문은 ‘누가 죽였는가?’에서 ‘왜 죽었는가?’로 옮겨간다.

 


 나는 귀찮아했을 거예요. 심지어 나 자신의 일도 귀찮았거든요.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았을 때 나는 집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반신욕하고 누워 자고 싶다.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32쪽  유나의 일기 중에서

 

 팀원 중 한 명, 엑스맨으로 배치하여 평소 생활을 상부에 보고하도록 만든 ‘엑스맨 제도’요. 우리 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혹시 그게 나인가? 싶었어요. (중략) 우리 중 누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섣불리 짐작하려 들지도 않았죠.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123쪽   유나의 일기 중에서

 


 유나의 사정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중학생이었던 그때로, 유나가 어른들의 비양심과 몰염치에 진저리를 내기 시작한 그때로 올라가야 한다. 그녀의 부모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유나의 기분과 선택은 유나의 지금을 만들었다. 정근은 딸이 그에게 했던 말들을 되새기려, 그 아이의 눈빛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려 애써본다. 이미 딸은 죽었고 지나간 모든 날들을 돌이킬 수는 없으나, 죽은 그 아이가 정근의 딸이기 때문에. 결국 그 아이가 스스로를 죽이도록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정근의 기분과 선택이 만들어 준 것인지도 모르기에.

 

 소설이라는, 글자와 허구에 불과한 이 얄팍한 페이지들이 현실의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이 작품은 보여주려 한다. 소설이 현실의 무게와 심연을 어디까지 짊어질 수 있는지 시도한다. 나의 읽기가 아직 둔탁한 까닭인지, 유나의 사정이 (그 양심의 무게와 가책, 괴로움의 부피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망자가 살아있을 적에 감내해야 했던 모욕에는 깊이 감화가 되나, 그녀의 죽음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비겁한 침묵과 권위주의로 일관했던 정근의 이야기가 보다 잘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싶다.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123쪽 유나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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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영혼들
알리사 가니에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열아홉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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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치인의 자살 소식으로 정국이 소란하다. 예고된 폭염은 불쾌한 습도와 불편한 고온이 합작한 오늘의 더위로 현실이 되었다. 아침 9시 즈음에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잠시 거리에서 보내고 왔을 뿐인데도 온 몸이 끈적거린다. 얇은 옷 따위가 늘어붙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어디선가 날파리들이 계속 끈적이는 팔다리를 노리고 날아드는데, 정말 이보다 귀찮고 찝찝할 수 있을까. 


 인터넷 뉴스 댓글들은 이미 만선이다. 부검을 하지 않겠다는 기사에도, 자살하는 그날 아침에도 생방송에 등장했다는 기사에도 거센 소리가 바글바글하다. 기사를 읽고 댓글까지 살펴보던 나는 그만 두 손을 들어버렸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아낼 수 없는 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놈들이 섞여 있는 곳이었다면 차라리 좀 구분하기 쉬웠을까?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더 나쁜 놈도 없고 덜 나쁜 놈도 없이 다 같이 나쁜 놈들 뿐이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뭔가를 더 구별해보겠다고 지푸라기를 잡는 내가 아마 제일 나쁜 놈일 것이라고. 나는 그만 이렇게 생각해버렸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 소설가 알리사 가니에바가 자국 러시아의 정치판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지는, 그녀의 소설에 잘 드러나 있다. 나이만 아니라 관점도 비슷한, 타국의 소설가를 바라보는 일은 어쩐지 어릴 때 헤어진 친구나 이민을 간 사촌을 만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알리사 가니에바가 2018년에 발표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올해 출간되었다. 소설은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러시아의 현대상을 그렸다. 책 뒤에 적혀 있듯 나쁜 놈들 천지 삐까리 중에 더 나쁜 놈을 추적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결말에 가면 사실, 더 나쁜 놈이 아니고 그냥 다 비슷하게 나쁜 놈이다. 소설 속 인물들과 그들이 사는 사회 전반이 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중상모략과 밀고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수백만 달러를 내연녀 선물에 쏟아부었다. 한 번은 럄진이 그녀에게 말한 것이 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나랏돈인데 뭘.’
73쪽

 

“생각해봐. 스탈린이 어떤 식으로 조직 개편을 했는지. 온통 피로 물들였었지! 잘못을 한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몰살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장관이 도둑질하거나 주지사가 공금 횡령을 해도 조용하지. 아무도 건드리질 않아. 간혹 누군가를 갑자기 해고할 수도 있지. 누군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재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단 말이지. 심지어 운이 더럽게 좋은 누군가는 소리 소문 없이 한 자리를 받을 수도 있어. 사는 게 더 즐거워지고, 좋아졌다 이거야!”
 179-180쪽

 


 젊은 피는 과감하다. 때로는 도를 넘어 필요이상으로 과격해지거나 섣부른 파격으로 치닫기도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적정선을 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세대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되 그것이 왜 이상하고 소름끼치는 일인지를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이 도시의 사람들은 누구도 이 바이러스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작은 풍선 하나만 하늘로 올라가 도시를 벗어날 뿐이다. 이것은 희망도 아니고 낙관도 아니다. 저런 무기체 정도가 되어야만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저자의 메시지를 그렇게 읽었다.

 

 시대가 소란하다.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더라.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이어지는 민족 전체의(어느 개인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공통의 비극을 겪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 피투성이의 상처를 치유 받을 틈도 없이 걸음마를 떼야 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아픔을 알되 그 아픔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모른 채로 그저 열심히만 살고 있다고, 그래서 도리어 치유가 아닌 더욱 깊은 상처와 고통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그런 식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를 해석하기도 했다. 이 해석이 맞건 틀리건 간에, 어쨌든 오늘도 하루는 소란하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여기 한국에도, 저기 러시아에도 살고 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뜻모를 동지애를 느끼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 자체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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