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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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 단연 ‘내 아이가 없어지는 일’이다. 우리 엄마에게 여쭤보니 그 일보다 더 최악은 없다고 단언하신다. 실제로 내가 2살 때(즉,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절에), 우리 엄마는 나를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집 앞 놀이터에서 놀던 아기가 잠시 방심한 사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엄마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미친 사람처럼 울고 불고 내 이름을 비명처럼 부르면서 동네를 다 뒤지셨다고. 그래도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기 전에 집 앞을 다시 둘러보자고 돌아온 그때, 아파트 수위실에 있었던 나를 발견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없어진 줄 알고 악을 쓰며 울던 나를 경비 할아버지가 달래느라 데려갔던 거였다. 
 엄마는 나를 잃었던 순간을 회상하시면서 하늘이 노랗고 땅이 어디 꺼진 것처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가 내가 아니더라는 그런 감상을 이야기하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우리 딸 못 보셨어요?”라고 물어보러 다닐 때 사람들의 눈빛이었다고 한다. ‘엄마가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애를 잃어버리나.’라고, 그들의 눈빛이 말없이 그렇게 질타하는 것 같았다고. ‘엄마 책임이야!’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고.

 

 엄마들의 이런 악몽으로 소설을 빚는다면 이 책이 되리라. 에이미 몰로이는 소설 [퍼펙트 마더]에서 아이가 유괴당한 엄마를 중심에 놓고 이 시대 엄마들이 겪어야만 하는 다양한 갈등과 고뇌를 다채롭게 엮어 이야기로 빚었다.

 

 

 “캐나다에서는 출산휴가 간 여자의 자리를 1년 동안 지켜줘요. 이 세상에 유급 휴가를 의무로 두지 않는 나라가 미국이랑 파푸아뉴기니밖에 없다는 거 알아요? 가족의 가치를 그토록 중시하는 미국이 말이죠.”
 넬이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술의 온기가 근육에 퍼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기란 게 사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아에 불과했다는 걸 깨우쳐주면, 사람들이 출산휴가를 좀더 많이 지원해줄까요?”
52쪽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지금은 모르겠지요.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이랍니다.”
 노부인이 사라지자 콜레트가 말했다.
 “감동적이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위니는 콜레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면서 콜레트 뒤쪽에 있는 돌벽 너머 공원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왜 사람들은 임신한 여자가 어떤 축복을 받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드는 걸까요? 왜 우리가 입는 손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거죠?”
 118쪽

 

 

 나는 양성평등주의자다. 하지만 차별과 구별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가를 잉태하여 낳아서 기르는 일, 그러니까 엄마가 되는 일은 분명 축복이다. 이건 성차별도 아니고 한 인격체가 그 가치나 역할을 억압 혹은 강제당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는 생명 존속과 순환에 절대적인 축을 담당하는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은 한 개체로서의 여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육아는 ‘축복’이라는 말로 그저 만만하게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옛날 세상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지도 않고, 세상이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자기 일(커리어)을 쟁취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 그런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아도 되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 세상은 온갖 ‘말’로 여성, 임신한 여자, 엄마들을 옥죄고 강요하고 도망갈 구석이 없는 코너로 몰아간다.

 

 이 소설은 여성과 엄마를 바라보는 이 시대의 극단적인 관점들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페미니스트의 딸이 ‘집에서 애를 보는 엄마의 길’을 선택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생후 2달 아가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겨놓고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맥주 한 잔하러 술집에 가는 건 나쁜 엄마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원하지 않은 성관계로 임신한 후에 낙태 수술을 받았고 그로 인해 난임이 되었다면, 자업자득이고 낙태 수술을 한 본인의 책임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소설 속에서는 양극단의 시선들이 끊임없이 날을 세우고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굉음을 낸다. 그리고 그 굉음 속에서 가냘픈 엄마들은 자책과 자괴감에 시달리고, 자기가 결코 알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사가 미디어에 공개되고, 대중의 댓글에 난도질당하며 험난한 시간을 보낸다.

 

 많은 육아서적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묻는다. 엄마가 행복하다는 건 대체 어떤 거냐고. 개성 있는 인물들과 촘촘한 전개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 책은 휴가철 추리소설로도 손색없고, 여성과 모성에 대한 좀더 진지하고 확장된 시각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읽을 만한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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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 사계절 네 도시에서 누리는 고독의 즐거움
스테파니 로젠블룸 지음, 김미란 옮김 / 미래의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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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돌아올 곳이 있어야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여행이란 굳이 어디 먼 데로 떠나는 게 아니라 낯선 장소에 잠시 머물고 오는 것만으로도 여행이라 부를만하다고 하기도 한다. 장소와 기간이라는 요소는 여행에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 얼마 후에 돌아온다는 행위는 여행이 아닌 일로도 가능하다. 몇 달 동안 출장을 다녀온 회사원들이 다녀와서 ‘여행 다녀왔다’고 하지 않는다. 취재차 국외의 다른 도시들을 다녀본 작가 스테파니 로젠블룸도 그랬다. 그녀가 에세이 취재를 위하여 머물렀던 파리에서의 며칠은 그녀에게 여행이 아니라 일이었다. 그녀는 분명 일을 하기 위하여 거기에 있었다.

 

 취재를 마친 후 돌아와서 그녀는 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 자기 자신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여행 동안 그녀의 머릿속을 내내 사로잡은 것은 여행지의 한적하고 평온한 풍광이나 음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파리에서 보낸 며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취재를 위하여 머물렀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파리의 며칠은 완벽했다. 그 시간은 완벽한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하면서 겪은 며칠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최고의 홀로 여행법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녀는 홀로 떠난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 배경을 설명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저자는 이 여행법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탐구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고 그 시간을 음미하며 보낸 사계절의 시간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냈다. 봄에는 파리, 여름에는 이스탄불, 가을에는 피렌체, 겨울에는 뉴욕에 거주했다. 최근에 어느 여행사에서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카피를 쓰던데 그녀가 시도했던 것이 딱 그것이었다. 4개의 도시를 살아보기로 한 그녀는 단, 철저하게 혼자있기를 택했다. 이 ‘혼자있기’에 대하여 개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 부연 설명을 하자면, 타인의 접촉을 굳이 피한다거나, 여행지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관계를 일부러 차단하거나 일체의 관계를 단절한 채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아니다. 저자가 택한 혼자있기란 혼자만의 시간에 몰입하여 음미하는 것이었다.

 

 혼밥, 혼영, 혼술 등 혼자하기가 대세가 된 한국사회에서 ‘혼자 하는 여행’ 역시 낯설지 않다. 다만, 단순히 혼자서 떠났다가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하고 돌아오는 여행보다는 여행지에서 혼자있기의 모든 장점을 누려본 저자의 조언에 귀기울여 보기를 추천한다. 혼자 여행은 단체 여행에 비하여 일정이 자유롭고, 움직이기 편하다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다. 여럿이 함께 있는 것도 즐겁지만,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조깅을 하다가 장미꽃의 향기를 음미하는 남자를 보며 무엇이 음미인지 사색해 볼 수 있는 기회나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무한 수다를 떨고 결국 도착지에서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아 친구가 되는 일을 겪는 건 혼자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저자는 혼자 보낸 4개의 도시에서의 4계절 동안 왜 사람은 필요할 때 혼자 있어야 하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거기에 맞는 답을 찾았다.

 

 우선 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 나 자신이 탐험하고 정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법률학자이자 프라이버시 전문가 앨런 웨스틴의 설명대로 은밀한 곳에서 독립적으로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 탐구, 상상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강한 집중력을 발휘하면 사고가 깨이고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던 아이디어가 밖으로 나오게 된다. 검증을 통해 그 아이디어를 내 것으로 취하거나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16쪽

 

 아인슈타인이 그랬던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어제와 다르기를 바라는 건 미친 거라고. 아마 우리는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듯하다. 어제와 다르기를 바라기에 어제와는 다르게 살기 위하여 미지의 시공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왕에 떠날 여행이라면, 좀더 깊고 다채롭고 인상 깊게, 오래오래 기억에서 곱씹을 생각들을 많이 하고 오면 더 좋겠지. 아마 그런 여행을 위한 조언을 구한다면 이 책이 꽤 괜찮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 나 자신이 탐험하고 정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법률학자이자 프라이버시 전문가 앨런 웨스틴의 설명대로 은밀한 곳에서 독립적으로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 탐구, 상상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강한 집중력을 발휘하면 사고가 깨이고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던 아이디어가 밖으로 나오게 된다. 검증을 통해 그 아이디어를 내 것으로 취하거나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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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밑에서
최일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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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이에 어떻소. 덤덤하게 들락날락 품앗이가 따로 없지 뭐. 나도 마누라 묻고 나면 또 어디선가 장사를 알리는 기별이 올 텐데.”
 “말이 났으니 말인데, 참 숱하게 다녔네. 서울 장안의 영안실을 안 간 데 없이 죄 가본 것 같애. 생긴 구조까지 환한걸.”
 “사람 안 죽은 아랫목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됐다구. 죽는 곳이 따로 있다더냐 이런 뜻인데, 이제는 거진 다 병원에서 죽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생을 마치는 꼴이지.”
 “아무렴. 나올 때도 울고 갈 때도 울고. 나올 때 안 울면 큰 일 나. 신생아실 간호사 손에 거꾸로 매달린 채 볼기를 찰싹 얻어맞기 십상이지.”
 “이른바 고고지성”
 “고통에 찬 비명이나 수술 뒤의 가스 새는 소리를 포함한 병원의 모든 소리는 살아 숨 쉬는 자들의 것이야. 넋이야 있고 없고 별채같이 나앉은 영안실 망자들은 아예 찍소리조차 못내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문신과 그는 드디어 말을 놓고 앞앞의 일회용 종이컵에 다투어 술을 따랐다.
 “그러나 대형 병원일수록 심한 북새통이며 온갖 발소리를 참기 힘들어. 충돌 직전의 인파가 아사리판이야.
 책 <국화 밑에서> 18쪽

 

 


 60년이 넘도록 소설을 써왔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이 60년 동안 거의 매해 소설을 발표해왔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지금까지 최일남 작가가 발표한 소설은 160편이 넘는다. 한국의 근대와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국문의 산실이라고 할 만한 작가 혹은 작품을 찾는다면 바로 그-여기다.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국화 밑에서]는 한국 현대소설사의 산증인이라고 일컫는 최일남 작가의 녹록한 현역의 에너지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변사들이 등장했던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주제나 시사성은 2019년의 한반도의 어딘가를 잘라 담은 것처럼 생생하다.

어쩌다보니 최근에 노년, 죽음 등의 주제와 관련된 작품들을 연이어 읽었는데,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저 주제들과 관련하여 과장이나 상상이 섞이지 않은, 가장 현실적이고 믿을만한 내용의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젊은 작가들이 상상이나 추측으로 저런 주제들을 다룬 작품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작중 인물들이 서로 치고 받듯이 주고 받는 말들도 대단하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소설로 옮긴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까. 다만 일상적이고 가벼운 단어들이 아니라 그 속에 한국어의 맛과 멋을 담아 졸여낸 단어와 문장들이다. 국어사전을 펴놓고 소설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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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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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때가 있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상대가 적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깔끔하게 표현해 냈을 때, 그때 느끼는 반가움과 기쁨 말이야.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을 읽을 때 나는 그런 기쁨들을 자주, 아주 많이 느낀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래서 이승우 작가의 책은 꼭 찾아서 읽게 된다. 굳이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봐야지~ 라고 작정하는 건 아닌데, 서점이나 도서관을 가서 책을 고르다 이 이름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아! 이건 안 읽어봤네. 이번에 읽어야지~’ 하며 기분 좋게 그 책을 고르곤 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 줄 아니. 이 사람들 중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더 경이롭다. 이 경이롭게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 속에서 나하고 맞는 상대를 – 어떤 쪽으로건 말이야. 일로든, 대화 상대로든, 연애 상대로든, 친구로든 간에 – 만난다는 건 더욱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 궁합이 맞는지 어떤지 알려면 일단 인연이 닿아서 만나는 게 먼저니까.

 

 이 책 [모르는 사람들]은 이승우 작가가 2014년부터 2017년 사이에 여러 문예지를 통해 발표한 단편들을 엮은 책이다. 표제작인 <모르는 사람>을 비롯하여 총 8개의 작품이 실려 있다. 나는 단편 소설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만은 예외다. 정말 너무 재밌다.

 

 표제작인 <모르는 사람>은 일단, 표제작이니까. 그만큼 좋은 작품이니까 이것 말고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윔블던, 김태호>다. 이 작품은 정말 꼼꼼하게 읽는 맛이 난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헛소리인줄 알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당기고 감기는 이야기다. 정말 윔블던에 가서 김태호를 만났을까.

 

 최근에 최일남 선생님의 단편집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한국말은 참 잘 쓰면 쓸수록 멋이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자기 언어를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여튼 한국말은 정말 최고다. 이런 언어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모르는 사람들]. 정말 만족스러운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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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
박형서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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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였던가, 이런 기사가 났다. 10년에 편의점에서 일하다 사라진 직원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음료 냉장고 틈새에 끼어 죽었다고 했다. 그가 구조를 요청하느라 소리를 질렀지만 음료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어느 댓글이 말했다. '야 그냥 기차에 치어 죽는 게 낫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그 틈새에 끼어, 빠져나갈 수도 없고 빼내줄 이도 없는 상황에서, 죽음이 결국 나를 완전히 삼키기를 견뎌야만 하는 존재...
냉장고 틈새에 끼인 게 비극이 아니라, 그가 살려달라고 보내는 구원의 사인이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비극이다.

 

박형서의 소설 [당신의 노후]에는 저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른 노인이 등장한다. 침대와 벽 사이 틈에 끼어 죽었다는 그 노인. 혼자 사는 그 노인의 구원의 외침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좀 스포일러를 하자면 저 노인은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된 거였다. 이 책속에서, 연금 100% 수령 대상이 되는 노인들은 저렇게 살해당하곤 한다. 국가에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국고만 축내는 노인들을, 국민연금공단 측에서는 저렇게 처리해버린다. 젊은이들이 보다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연금공단 측에서 처리를 목적으로 파견하는 공무원들은 국가 발전과 민생 안정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가차없이 노인들을 살해하고 자연사로 위장한다.

 

노인들의 안타까운 고독사나 사고사 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을 첫 장부터 잘금잘금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뒷목이 서늘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좍.. 끼친다. 노인 혐오가 극에 달하면 정말 이런 미래가 올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여기서 꼼지락거리는 가짜 이미지일 뿐이고. 사람은 누구나 아이 아니면 청년 아니면 빌어먹을 노인, 셋 중 하나야. 내가 왜 재수 없게 당신을 보며 내 미래를 생각하겠어?” 135쪽  연금이사의 말

 

 이 책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노년을 부정한다. 아니, 부정한다기 보다 현재에만 충실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현재 밖에 없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연속성의 실존을 부정하고 싶다면, 밀랍인형이 되면 된다. 현재에 박제된 채로 계속 있으면 된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그냥 이 순간인채로, 그 연속성에 걸리지 않는 모습인채로 있으면 된다. 그러나 호흡이란 무엇인가, 들숨과 날숨의 끊임없는 연속이고 이 연속이 생명을 준다. 이 연속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생명이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연속성을 부정할거라면 연속성이 주는 혜택마저 부정하라.

 

할 이야기가 많은 소설이다. 사회문제를 다루기도 하는 동시에 결국 인간의 근원전 존재감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SF 영화 같기도 하고 진한 로맨스 같기도 하다.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빚었으나, 그 어떤 소설보다 시사성과 현실감이 가득하다.

"여기서 꼼지락거리는 가짜 이미지일 뿐이고. 사람은 누구나 아이 아니면 청년 아니면 빌어먹을 노인, 셋 중 하나야. 내가 왜 재수 없게 당신을 보며 내 미래를 생각하겠어?" 135쪽 연금이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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