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 감시, 조종, 거짓에 맞서 싸운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영웅들
매슈 대니얼스 지음, 최이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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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겨울은 이전에 없었던 시위로 소란했다. 수도 리야드에서 여성 운전권에 대한 시위가 일어났고 ‘여성의 운전할 권리’를 외친 여성들은 체포되었다. 당국은 이들을 중죄를 저지른 인물로 취급하였고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2011년 ‘아랍의 봄’ 직후, 사우디아라비아의 겨울에 해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날 알 샤리프가 유튜브에 자신이 운전하는 영상을 게재하고 이 영상이 국제적인 관심을 얻게 되면서 여성 운전권 요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우디 여성의 운전권은 더 이상 사우디 내국의 문제도, 여성 문제도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전 인류가 함께 주목하고 고민하는 세계인의 이슈인 동시에 인권 문제로 자리 잡았다.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상 최초로 여성 운전을 허용하게 되었다.

 30년 전에는 실패했던 일이 지금은 성공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이유는 한 가지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딸애에게 수혈이 필요하다고 올리면 순식간에 주변의 수십 명이 헌혈하겠다는 응답이 오고, 물부족 국가에게 전해진 식수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오르면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 선행에 동참하겠다는 하트를 보낸다. 법학박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매슈 대니얼스의 말대로 ‘인터넷은 좋은 생각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보편적 인권 운동의 추진력을 마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109쪽)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그 어떤 시대도 요구되지 않았던 남다른 감수성이 필요하다. 인권 감수성이다. 인권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평범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대의나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정의 같은 것들이 떠올라 부담스러운가? 그러나 사실 인권이란 멀리 있고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 내 곁에 있는, 공기처럼 투명하고 가벼운 것이다.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는 세계 인권 10주년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보편적인 인권은 우리가 사는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장소, 그러니까 너무나 작아서 세계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은 개인의 세계입니다. 자신이 사는 동네, 다니는 학교, 일하는 농장이나 공장, 사무실 모두가 개인의 세계이지요. 이런 곳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고, 존엄성이 지켜져야 합니다. 거기에서 보편적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지켜질 수 없습니다. 집 가까이에서 보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합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책 40쪽)”

 

 오늘 집 앞에서 강도를 당하지 않고, 장을 보러 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시체나 핏자국을 보지 않았으며, 놀이터에서 납치된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개인의 세계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쉽게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손 닿는 곳에 있는 우리들이 식수가 없어 생존에 위협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위에 쓴 마날 알 샤리프의 심정에도 다가가기 어렵다. 분명히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운전대를 잡은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그녀와 그런 그녀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한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살고 있는 ‘개인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개인의 세계’란 마치 몇 광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다름은 고통이고, 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지구촌 각각의 ‘개인의 세계’가 모두 보편적 인권이 지켜지는 세계가 되도록,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왜냐하면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방관이며, 모든 방관은 유죄이기 때문이다.

 

 인권 운동가 매슈 대니얼스는 타인에게 무감하고 무지한 현대인들의 삶에 영감을 던지기 위하여 이야기를 썼다. 그 이야기란 얼마 전 출간된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계의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매슈 대니얼스는 성장기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며 책을 시작한다. 강도를 당해 척추가 부러진 어머니, 길에서 얻어맞지 않고 학교를 가기 위하여 고민했던 시간들, 청소년기에 수없이 보았던 시체들과 핏자국들, 그가 사는 곳에 언제나 맴돌던 강간을 당하고 죽거나 총격을 당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은 자신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방관하지 않으려는 의욕이 있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매슈 대니얼스는 이 책에서 ‘인권’이라는 가치가 대두되기까지의 간략한 역사와 1948년 발표된 세계 인권 선언문의 핵심 가치 그리고 그 가치가 실현되기에 충분한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특징을 설명하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인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인권 전쟁에서 승리한 시민들의 사례들까지 실었다. 나와 별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보여주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영감을 얻기를 바라면서.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이 책에 앞으로 어떻게 쓰이면 좋을지를 잠시 생각했다. 중고등학생들의 독서토론 주제도서가 되어 이 책을 읽고 각자가 SNS에서 할 수 있는 인권 활동이 무엇이 있을지 토론을 해도 좋겠고,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이 책을 함께 읽고 우리가 방관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권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나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들에게 이 책이 제일 필요하리라. 이 책은 ‘인권’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사람답게 사는 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 받는 것도,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도 모두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 옆에서 내가 살릴 수 있는 타인이 죽어가고 있을 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일 아닌가. 내가 내는 목소리가 무의미하게 묻히거나 분명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면 무지하고 방관해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이 무한대로 연결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세계적인 연대가 가능해진 우리 시대에 ‘무지와 방관’은 유죄다.
 유대와 연대가 희미해져, 사회와 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어쩌면 이 책은 더욱 특별하게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나라보다 디지털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 디지털 시대의 상호연결성이라는 힘을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잠재력도 있을테니까 말이다. 이 책이 우리의 인권 감수성 향상 뿐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는 풀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갈래갈래 찢어진 시민들의 연대를 회복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 문명사회는 우리 시대에 감춰진 이 홀로코스트를 끝내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암흑세계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공포를 알리고, 억압자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중단시켜야 한다.
 모든 인간의 자유가 보호되는 새로운 시대는 단순히 정보화 시대와는 다르다. 내가 펼치는 인권 혁명 운동은 실질적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벽을 허물며, 생명을 구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그 일은 성공하고 있다.
책 32쪽

 

https://www.instagram.com/p/B6X2mi8l3Hl/?igshid=pn51gshdv900

 


 
 

이제 문명사회는 우리 시대에 감춰진 이 홀로코스트를 끝내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암흑세계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공포를 알리고, 억압자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중단시켜야 한다.
모든 인간의 자유가 보호되는 새로운 시대는 단순히 정보화 시대와는 다르다. 내가 펼치는 인권 혁명 운동은 실질적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벽을 허물며, 생명을 구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그 일은 성공하고 있다.
책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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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명언으로 보는 심리학 - 생각의 깊이는 더하는 매일 한 문장의 힘 100개의 명언으로 보는 시리즈
알렉스 프라데라 지음, 김보람 옮김 / 미래의창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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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리학이 이렇게나 많은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는 일, 나의 감정을 들춰보고 비춰보는 건 누구나 시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시도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는 일이 철학에서 시작된 이후 근대와 현대에 접어들면서 심리학은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었다. [100개의 명언으로 보는 심리학]의 저자 알렉스 프라데라는 유명한 심리학자의 말 혹은 심리학 명언들 100개를 모았다. 결정적인 한 마디와 함께 그 한 마디를 남긴 심리학자를 소개하고 그의 주요 이론이나 달성 과업들을 설명한다. 칼 융, 프로이트, 아들러 등 이제는 대중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들도 실려 있지만, 윌리엄 제임스, 프레데릭 바틀릿 등 심리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학자들과 이백, 데이비드 흄 등 심리학에도 지분이 큰 사상가들도 함께 실려있다. 아마 이 책 한 권만 차분히 읽어도 웬만한 심리학자와 심리학 서적 혹은 이론가, 사상가들의 이름과 내용에 익숙해질 것이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적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면 인간의 행동을 형성하는 동기와 권력, 통제력을 포함하는 사회적 영역을 소홀히 여기게 된다고 생각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우리의 노력과 통제 욕구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인생은 틈만 나면 우리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려는 것 같다. 상담 시간만이라도 서로 인간이라는 동등한 존재가 되어 나란히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러한 생각 끝에 아들러는 진료실의 침상을 폐기했다. 낙천적이고 솔직한 아들러의 진료 방식은 결국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어느 환자가 가족력과 고민,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들을 털어놓자, 아들러는 그 환자에게 치료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환자가 대답하자 아들러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아들러는 열등감을 키우고 강조하는 사회 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이자 관념주의자였고,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각자의 미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게 하면서 가족들이 더욱 민주적으로 행동하길 격려했다.
 77쪽

 

 

 최근에 아들러 심리학에 한국 출판계에서 굉장한 호응을 얻었는데 알렉스 프리데라가 설명한 아들러 소개를 읽다보면 왜 아들러 심리학이 그렇게 큰 주목을 받았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곤 아들러 심리학을 좀더 깊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연이어진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저자는 독자들이 ‘온갖 신기한 심리학적 현상을 설명하며 심리학의 발달에 기여한 모든 인물을 공정하게 평가’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러기에 100개의 인용문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때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많은 사상가,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이 책과의 만남을 계기로 독자가 직접 심리학의 보다 깊은 앎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란 것이 저자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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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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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연애소설 [셰어하우스]

 

‘소유’에 질린 우리들은 이제 '공유'에 눈을 떴다. 에어비앤비, 쏘카 등을 이용해 숙박 공간과 차량을 공유하는 건 물론 옷, 책이나 사무 공간, 취업 정보까지도 함께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1인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미니멀리즘까지 유행하면서 무엇이든 ‘공유’하여 쓰는 게 우리 시대의 문화로 자리 잡았고 공유경제라는 단어로 총칭되는 이 세계적인 패러다임 속에는 당연히 셰어하우스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 셰어하우스의 경우 공유의 적정선이 조금 미묘해진다.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차단한 채로 각자의 영역을 꾸려가는 정도의 셰어하우스라면 그들의 관계는 그냥 기숙사를 함께 쓰는 지인 정도가 될 것이다. 한데 단순히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식을 공유하고 음식을 먹는 기분을 공유하고 음식을 먹은 후에 예정된 나의 계획까지 공유하는 사이라면 이들의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셰어하우스]의 주인공 티피는 남자친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다가 그와 헤어지면서 급하게 거주지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런던의 집값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라서(서울의 집값도 못지않다는 점에서 티피의 절박함에 자연스럽게 이입이 된다) 티피는 어떻게든 집값을 줄여보고자 낯선 남자의 셰어하우스로 들어가게 된다. 이 남자, 리언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동생의 변호 비용을 대기 위하여 야근 업무에 추가 업무까지 떠맡아가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온 집의 모든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조건으로 그가 얻게 될 월세는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셰어하우스 메이트가 여자라고 했을 때, 애인인 케이가 눈에 쌍심지를 켰음에도 불구하고 티피를 하우스메이트로 들이는 걸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학대한 남자친구로부터, 그가 채워놓은 족쇄 같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트라우마 투성이인채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티피와 동생의 구명, 환자 돌보기, 까칠한 여자친구 비위 맞추기에 24시간이 모자란 리언의 동거에는 철칙이 하나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 케이는 리언이 티피와 직접 이야기하지 않도록 자신이 리언의 대언자가 되어 티피에게 셰어하우스와 관련한 내용들을 전달했다. 티피 역시 리언의 여자친구인 케이에게 연락을 받는 걸 당연히 여겼다. 이 기묘한 동거에 신묘한 감정이 흐르게 만든 것은 얇디얇은 포스트잇이었다.
 베이킹을 잔뜩 해 놓고 포스트잇에 자기가 왜 이렇게 많은 먹거리를 구웠는지 적은 티피. 티피의 메모를 읽으며 티피가 구운 빵을 먹고 그녀에게 답문을 써서 그 옆에 붙여 놓은 리언. 욕실 사용의 디테일에 대해서, 윗집과 아랫집 이웃들에 대해서, 쓰레기를 내놓는 날에 대해서, 침대 밑에서 발견한 손뜨개 목도리들에 대해서, 어느 날 리언의 동생 리치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의 기분과 감정에 대해서 둘은 포스트잇 메모를 주고받았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순간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잇들을 타고 주고받은 감정은 인연의 끈이 되어 그들 사이를 엮었다. 마치 티피가 열광한 프라이어 씨의 손뜨개 목도리처럼, 촘촘하고 알록달록하게 엮인 티피와 리언은 결국 연인이 되고야 만다. 공유가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다. 기분과 감정의 공유는 서로가 상대의 얼굴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둘을 연인이 되게 하니까. 
 


 프라이어 씨 선생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어. 워낙 홀로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게 케이하고 같이 살지 않는 이유 아닌가?
 내 사생활 얘기를 환자들과 나누는 짓을 이제 그만두어야겠다.
 나 - 이건 다른 거예요. 저는 티피를 만나지 않아도 돼요. 우린 그냥 메모를 주고받는 것뿐이라고요. 정말이에요.
 프라이어 씨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인다.
 프라이어 씨편지의 예술이란 게 있지. 몹시도... 친밀한 행위야. (중략)
 이튿날 밤이 되자 홀리까지 티피에 대해 알고 있었다. 환자의 상당수가 병상을 못 벗어나는 병동들 사이로 별 흥미로운 것도 없는 소식이 빨리도 퍼진다. 신기할 따름이다.
 홀리 – 예뻐요?
 나 - 나도 몰라, 홀리. 그게 중요해?
 홀리가 말을 멈췄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홀리 – 착해요?
 나, 잠깐 생각하고 나서 – 그래, 착해. 좀 야단스럽고 특이하지만, 착해.
책 106-107쪽

 

 

 영국작가인 베스 올리리의 소설 [셰어하우스]는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아니, 어울린다기보다는 필요한 연애이라고 해야 더 맞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의 연애는 소유와 수집, 집착에 매몰되곤 했다. 내 남자, 내 여자 혹은 우리 자기. 연인들 간에 ‘너는 내 소유’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당연했고 이 합의에는 너의 시간, 너의 거취, 너의 선택도 모두 내 소유가 된다는 계산이 깔리기도 했다. [셰어하우스]는 이러한 연애와 사랑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저자는 티피와 리언을 통하여 연애도 사랑도 더 이상 소유가 아니라 SHARE 공유라고 이야기한다.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소속되어 내가 너의 시간과 감정, 너라는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감정, 경험, 문제, 위기, 갈등을 공유해서 함께 만들고 해결해 가는 점을 말이다.

 

 소유로서의 사랑과 공유로서의 사랑은 티피와 리언 각자의 전(前) 연인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티피의 전 남자친구 저스틴은 티피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쌍놈이다(욕을 적어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런 쌍놈이 서울에도 많다는 사실에서 또 한 번 자연스럽게 티피에게 이입되지 않을 수 없다.) 저스틴은 ‘가스라이팅’으로 여성을 학대하고 길들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많은 남성들을 대표한다. ‘너 같은 걸 만나주는 남자는 나밖에 없다, 너에게 이렇게 대단한 선물을 나니까 해주는 것이다, 너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내 결정만이 옳다.’로 일관하는 저스틴은 여성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 개체로서의 티피를 완전히 뭉개놓은 장본인이다. 자신의 행태가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 저스틴과 그에게 휘둘리는 티피의 관계는 서로에게 파괴적이다. 티피만 아니라 저스틴도 이 관계에서 피해를 입는 것이다. 이 굴레를 깨고 이 관계가 병(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티피나 저스틴은 평생 온전한 개체로서, 한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티피는 주변에 똑똑한 친구들과 공감능력이 높은 리언을 만나 소유가 아닌 공유로서의 건강한 연애에 눈을 뜬다. 


 한편 리언의 전 여자친구인 케이는 저스틴과는 다른 의미에서 파괴적이다. 공감능력이 낮은 케이는 리언과는 상극이었다. (사실 이 둘이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책을 다 덮고 나서도 의아하다.) 리언의 상황과 그의 절망, 가족애와 인류애, 애틋하고 따듯하게 주변을 돌보는 마음을 케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케이는 그저 리언에게 관심과 시간과 애정을 달라고 요구하는, 소유로서의 연애가 전형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공감과 연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리언의 가슴을 찢어놓는 말을 한 것은 어쩌면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우리 시대에 수많은 연인들이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려는 마음보다 상대로부터 관심과 감정을 수집하기에만 급급한 현실이다.

 


 케이 - 요즘 당신은 2주마다 면회를 다니지.
 진심으로. 감옥에 갇힌 동생을 만나러 가서 화가 났다는 건가?
 케이 - 그것 때문에 화내면 안 된다는 거 나도 알아. 잘 알아. 하지만 그냥.... 당신은 시간이 너무 없고, 이제 그 없는 시간 중에 더 작아진 짜투리만 내 몫이라는 기분이 든다고.
책 165쪽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30대로 접어들고 나서는 ‘연애소설’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왜 로맨스코미디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지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장르의 열렬한 팬으로 동참하게 된 건 두말 할 것 없고.
 연애소설을 읽게 되는 건 유사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다. 연애가 얼마나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지, 성숙하고 빛나고 아름답게 만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셰어하우스]는 이 책의 홍보문구 그대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로맨스’다. 모든 것이 공유 문화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제는 사랑도 공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TMI의 인간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티피의 매력 그리고 연인의 조건으로 ‘남다른 공감 능력’을 1순위에 올리게 만든 리언의 따듯함에 폭 빠져 그들의 로맨스를 부러워하게 만드는 소설, [셰어하우스]다.

홀리 – 예뻐요?
나 - 나도 몰라, 홀리. 그게 중요해?
홀리가 말을 멈췄다.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홀리 – 착해요?
나, 잠깐 생각하고 나서 – 그래, 착해. 좀 야단스럽고 특이하지만, 착해.
책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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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
라이언 노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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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에 ‘도대체 이게 뭔 책인가?’ 싶다면 저자의 이력을 먼저 확인해본다. 40살도 안 된 젊은 작가 라이언 노스는 마블 코믹스 ‘스쿼럴 걸’ 시리즈의 작가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그는 그의 전공을 십분 살려서 ‘이건 분명 공학도가 쓴거야’ 싶은 이야기들을 만들어왔다. 그의 명랑발측하고 기발한 이야기들이 통했는지 이 책 [문명 건설 가이드]의 책 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에서 그는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소개된다.

 왜 명랑 발측한 작가라고 이야기했냐면 이 책의 콘셉트 때문이다. 지은이가 멀쩡하게 라이언 노스라고 소개되고 있는 이 책에서 정작 저자는 ‘이 책을 쓴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진짜 저자는~~’이라고 이야기한다. 세계 최초로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전문을 소개하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럽다는 소감을 밝히면서.

 

 마치 온라인 게임처럼 느껴지는 이 책의 콘셉트가 다소 생소하고 낯설어 골치아프다고 느껴진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라이언 노스가 이것저것 깔아놓은 이야기들은 이 책을 읽는 데에 크게 필요치 않다. 이 책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 데에 필요한 건 그저 21세기 지구를 살아가는, 구글 어스에서 내가 사는 곳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정도의 부피감을 차지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 가질만한 적당한 호기심 뿐이다. 무슨 호기심? 오늘날 이 세계를 있게 한 ‘문명’에 대한 호기심 말이다.

 
 

당신의 문명은 5가지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각각의 체계는 정보에 기초한 것으로, 기본 개념만 갖추면 나머지는 그대로 따라옵니다. 또한 물질이 아닌 관념 형태로 존재하므로 회복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다시 말해 이 관념은 당신이 세운 문명의 구성원들이 살아 있는 한 (적어도 책의 형태로라도. 10.11.2절 참조) 파괴되지 않습니다.
 다음 페이지에 나열된 5가지 기술 체계는 밑바탕이 되는 기본 개념만 이해하면 얼마든지 쉽게 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그 체계를 생각해내기까지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39쪽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기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이 시작되어 어떤 흐름을 거쳤을까?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든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 인류사의 거대한 흐름을 나름의 기준과 관점으로 정리한 책들은 대부분 저 주제를 가지고 있다. [문명 건설 가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 문명의 체계의 기반을 음성 언어, 문자 언어, 수 체계, 과학적 방법, 잉여 열량 등 5가지로 정리한 저자는 온도나 무게 등을 재는 단위, 농업, 식량, 영양소, 화학, 철학 등 문명 전체를 관통하는 굵직한 분류들을 차례로 다루면서 책을 풀어간다. 이 책 제목 아래 부제로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라고 붙어 있는데 이 말이 사실상 이 책의 제목 같다.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고 특히 폭넓은, 잡다한 과학 지식을 수집하는 독자라면 아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만한 거리들이 가득한 책이다. 그러나, 역시 전지적 서구인의 시점에서 쓴 책이라는 게 느껴진다. 문자 언어의 발명을 이야기하면서 한글을 언급하지 않다니. 저자가 언어학자가 아닌 공학도이기 때문에 놓친 점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암튼 이제 곧 해가 바뀌는 시간, 정신없는 연말이 지나가고 새해를 시작하는 휴일을 맞았을 때 이 책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유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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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저 피는 꽃은 없다 사랑처럼
윤보영 지음 / 행복에너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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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서점엘 갔다. 학교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곳이 고시생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는데, 거기 대로변에 4층짜리 쇼핑몰이 있었다. 쇼핑몰 지하가 서점이었다. 그 주변 서점은 죄다 무슨 무슨 시험에 필요한 교재나 문제지들만 잔뜩 파는 곳이었는데, 그 쇼핑몰 지하 서점 만큼은 소설과 시집을 주력으로 팔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그 손바닥만한 시집들을 읽고는,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그래서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서재에는 시집이 많았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들은 죄다 무겁고 너무나 결사적이라 무섭기까지 했다. 교과서 밖에서 만난 시들은 아주 달랐다. 그냥 순수하고 가볍게, 그리고 있는 그대로 연애감정을 이야기했다. 보송보송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런 시들이 좋았다. 이름 없는 시인의, 대단한 시적 깊이 같은 건 생각하지 않은 시라고 해도 그런 시들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기분 때문에 나는 지금은 시집의 제목도, 시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많은 시집들을 일부러 보러 가서 사오곤 했나보다.

 

 [세상에 그저 피는 꽃은 없다 사랑처럼]은 제목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출발하는 시집이다. '너'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립고, 너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담은 시들이다. '너'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를 사랑해서, 꽃처럼 핀 내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쉼터]

 

내 마음에
정자 하나 만들었습니다.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쉬어가고
하지만
정말 쉬어가게 하고 싶은 건
그대입니다.

(책 속에서)


이 시집을 읽다보면, 사진으로 콕 찍어서 보여주고 싶은 시들을 만난다. 책의 뒷페이지에는 이해인 수녀의 추천시도 실려 있다. 연말이라 일정도 복잡하고 마음도 복잡한데, 이런 시집 읽어보면서 마음에 드는 시, 이 시를 같이 나누고 싶은 사람들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지.
보내주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도록 만듦새도 좋다. 연말이 아니라 신년에 이 책 한 권 보내주면서 인사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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