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의 힘 - 유튜브에 빠진 우리 아이 유튜브로 핵인싸 되기 부모되는 철학 시리즈 14
김윤수 외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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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로 세상을 배우는 세대들을 위한 교육 실용서가 나왔다. ‘유튜브에 중독된 아이들, 어쩌나?’ 라든지 ‘인터넷에 빠진 난독시대, 이대로 괜찮나?’라고 걱정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유튜브가 없는 세상으로 회귀할 수 없는 한, 유튜브를 더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하다.

 

 씽크스마트 출판사에서 내는 <부모되는 철학 시리즈> 열네 번째로 나온 [유튜브의 힘]은 저자가 자그마치 4명이다. 자녀 교육, 읽기와 쓰기, 유튜브 제작, 스피치 등 유튜브 콘텐츠 제작과 직결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각자의 노하우를 이 책 한 권에 담았다. 성공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서? 아니, 유튜브 콘텐츠 제작을 자녀의 교육과 미래 대비용으로 ‘잘’ 활용하기 위해서!

 

 [유튜브의 힘]의 목적은 ‘교육용’이다. 유튜브에 관심 있는 아이들이 콘텐츠 소비자에서 콘텐츠 생산자(크리에이터)로 도약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는 책이다. 이 다리를 놓는 주체는 아이지만 함께 놓는 역할은 부모다. 이 책은 이 점을 명확히 한다. 어디까지나 ‘아이’를 중심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고려하고 제작과정을 안내한다. 그저 구독자가 많은 콘텐츠를 생산하겠다는 취지가 아닌 것이다. 내 아이가 잘하는 부분, 내 아이에게 적합한 분야,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차원에서 유튜브 콘텐츠 제작 과정을 안내한다. 소비용이 아닌 교육용으로 유튜브 제작 과정을 안내하기 때문에, 아이가 있는 모든 부모님들이 한번쯤은 읽어볼만하다.

 

 아이들이 유튜브를 제작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로 이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은 초보 유튜버를 꿈꾸는 누구나에게 또한 유용하다. 나 역시 유튜버를 꿈꾸면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영상편집, 저작권 등의 문제였는데 이 책은 간략하지만 이런 고민되는 점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나 뿐만 아니라 아마 유튜버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분명히 메모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유익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대다수 성공한 유튜버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매주 1~2편의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손수 편집까지 했다면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검증된다.
책 47쪽

 

 그래서 올해는 유튜브에 발 담궈 보는 건가? 유튜브가 단순한 대세가 아니라 이미 이 세계를 이루는 공기의 일부가 아닌가, 싶은 시점에서 이런 책이라니. 참 적절하다.



대다수 성공한 유튜버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매주 1~2편의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손수 편집까지 했다면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검증된다.
책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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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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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부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인 김초엽 작가는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상기한 두 개의 단편과 함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감정의 물성」,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의 5개 단편이 하나로 묶여 이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되었다.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읽기도 전에 많은 질문이 들었던 작품이다. 이 책을 들고 독서모임에 갔던 날 다른 회원들도 물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가정법이에요 아니면 질문이에요, 아니면 다른 뭐예요?”
 나는 슬픔이지 않겠냐고 답했다.
“아직 다 못 읽어서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면, 내년이 오지 않는다면. 이 말들의 뒤에 꼬리처럼 달리는 것들 아닐까요?”
 표지가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이어서 더욱 슬펐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다른 속도로 가자!‘고 외치면 그건 청춘만화다. 이미 제목에서 우리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상상도 못할 애를 써도 도달할 수 없는 그곳에 대한 염원이 보였다. 꿈은 간절히 바라도 꿈일 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의 공식을 아마 안나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나는 과학자다. 그는 장거리 우주비행이나 의료계에 필요한, 완벽한 냉동수면 기술에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과 아들이 먼저 행성 슬렌포니아로 이민을 떠났고 그녀 역시 연구를 마치는 대로 슬렌포니아로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슬렌포니아로 가는 항로가 폐쇄되고 더 이상 지구에서 슬렌포니아로 우주선이 뜨지 않았다. 우주 항법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서 이전의 항로들과 항법은 경제성을 이유로 사장되고야 만 것이다. 기술의 진보가 빚은 생이별의 세월에 안나는 자신이 계발한 냉동수면 기술로 맞섰다. 냉동과 해동을 반복하면서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온 것이다. 이미 남편과 아들은 죽고 없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안나는 노인이 되었다. 이제 ‘운이 좋다면 같은 곳에 묻힐 수도 있겠지’라는 아련한 기대뿐인 안나에게 기술의 진보란 무엇일까?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 

 

 

 거실에 무심코 켜둔 텔레비전의 독백이 심상치 않다. 안나에게 아니, 나에게 마치 반박을 하듯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떠든다. 5분마다 새로운 기술이 발표되는 이 시대에 인간의 삶은 이전과 다르게 얼마나 윤택해졌는지를 돌아보라고 나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래? 그렇다면 왜 릴리는 지구를 떠나 낙원을 만들어야 했을까? 왜 데이지는 시초지로 떠났을까? 왜 그 많은 순례자들은 낙원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을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 책의 가장 첫 번째 작품이자 나로 하여금 단박에 이 책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소설이다. 주인공인 데이지는 친구 소피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이 사는 세계의 탄생 비밀을 들려준다. 
 

 


 데이지와 소피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온하고 안전하다. 갈등이나 혐오, 전쟁 같은 것들이 거기에는 없다. 그 마을에 어른은 적고 아이들은 많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치른다. 열여덟 살이 된 아이들은 순례자가 되어 이동선을 타고 떠났다가 1년 후, 귀환하여 비로소 어른으로 인정받는다. 데이지는 이 성인식의 기이한 점을 발견한다.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이 있다는 것. 심지어 돌아온 순례자 중 하나가 ‘그곳에 두고 온 것’ 때문에 절망하듯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한 후 데이지의 의문은 증폭된다. 대체 순례자들이 어디로 떠나는지, 그곳에서 그들은 어떤 일을 당하는지, 왜 순례자들은 그곳으로 떠나야 하며 어떤 순례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지. 데이지는 세계의 진실을 알기 위하여 가장 금지된 공간, 금서 구역으로 들어가 이 마을을 만든 릴리와 올리브의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릴리 다우드나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났다. 유전병 사전 진단이 일반화된 2035년의 지구에서, 그러나 릴리의 부모는 가난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유전병을 그대로 가진 채 태어나 멸시와 혐오를 감수해야 했던 릴리는 성공한 과학자로서의 삶을 접고 잠적했다가 인간배아를 조작하는 바이오해커가 되어 나타났다. 릴리는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인간배아를 개조하여 병도 없고 결점도 없는 명석한 인간을 배출했다. 아마 그것이 이 세상에서 고통과 슬픔을 지우는 길이라고 그녀는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릴리의 행위는 세상을 더욱 극단적으로 갈라놓았다. 완벽한 개조인간들은 도심에, 개조되지 못한 인간들은 외곽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그러던 중 아이를 갖고 싶어진 릴리는 그녀 자신에게 주고 싶었던 지성과 아름다움과 매력을 모두 유전자에 새겨 넣어 딸을 배양했다. 그러나 릴리의 아이에게도 릴리와 같은 유전병이 발견되었다. 그때 릴리는 결정했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상을 만들기로. 그건 얼굴의 흉터나 얕은 경제력이 멸시와 혐오의 근거가 되지 않는 세계, 데이지와 소피의 마을이었다.
 릴리는 딸 올리브에게 무균의 낙원을 선사했으나 올리브의 선택은 엄마의 마을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엄마가 마을을 만든 이유를 알게 된 올리브는, 마을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반드시 떠나 시초지인 지구를 순례하도록 순례의 관습을 만들었다. 그리곤 그녀는 마을을 완전히 떠나 지구에서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엄마인 릴리는 무균의 낙원을 꿈꾸었으나 딸 올리브는 사랑과 연대가 없다면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이라는 거, 살기 좋다는 건 무엇일까? 몸이 편안해지고 안전해지고 윤택해지면 우리는 행복한 걸까? 만약 그것을 행복이라고 규정한다면 아마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이 소설과 같은 현실을 살게 되고야 말 것이다. 모든 결점을 제거한 신인류가 태어나 신처럼 군림하는 동안, 경제 논리에 밀린 사람들은 쓰레기로 취급을 받고 이 세계는 분열되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의 별이 되고야 말리라. 그래서 올리브는 보호가 보장된 마을이 아닌, 지구로 돌아와 투쟁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을 위하여 이 지구를 바꾸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마을의 다른 아이들 역시 사랑을 느끼고 사랑하는 이와 연대하는 아름다운 생을 보내기를 바랐으리라. 비록 그것이 단단한 벽을 두드리고 거대한 파도에 맞서고 까마득한 벼랑 위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격동이라고 해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작품들의 배경은 미래이고 우주이지만 이 소설만큼 우리의 현실을, 사람의 본성을 절묘하게 그린 작품들이 또 있을까.
 4차산업혁명으로 우리의 삶은 점점 현란해진다. 대신 빈부격차와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급증한다. 김초엽 작가가 책에서 쓴 ‘지성의 황금기를 보는 것 같은’, 마치 과학이 치트키가 되고 기술의 진보가 핑크빛 미래의 보장책으로 등극한 지금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기술은 사람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이 편의 속에 인간성이 매몰되어 버리면 우리는 불행해진다. 행복을 손에 쥐기 위하여 우리가 띄워야 할 것은 빛의 속도로 가는 우주선이 아니다. 불통과 억압, 차별과 외면이 도사리고 기술의 진보가 이것들을 심화할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하여, 서로로부터 분실되고 분리되지 않기 위하여 시선이 필요하다. 공존하고 공생하기 위하여 보듬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온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SF소설을 읽으며 공감과 위로를 너머 도전까지 받는 것인가 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온기와 시선으로, 김초엽은 굉장한 소설을 완성했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책 181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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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그림 -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김한들 지음 / 원더박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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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작품에 집중하는 시종여일한 생활을 한다. 성실함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손에 익은 움직임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연스러움에 나는 곧, 잘 반한다. 톨스토이도 진실하며 필요 불가결한 것들은 언제나 오랜 시일에 걸친 꾸준한 노력으로 얻어진다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만들어 내기에 ‘소중한’ 이라는 형용사는 그 앞에서 떼어 낼 수가 없다.
책 153쪽

 

 

 삶은 꾸준한 것이라고 여긴다. 작은 물방울 몇 개가 산 바위틈에서 시작하여 바다로, 바다로 다다르기 위하여 계속 움직이듯이. 다다르려는 길에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긴 해도,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산책하듯이 삶은 꾸준히 간다. 저자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한 것들의 재료가 꾸준함이라면 우리 삶보다 더 진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꾸준함의 속성은 ‘연결’이다. 꾸준함 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연결되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가 연결된다. 점과 점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선들이 맞닿아 면이 되어 하나의 차원을 이루고 세계가 직조된다. 이렇게 탄생하는 세계,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생生. 


 그림 보는 일은 마치 나라는 세계가 만들어지는 일이라는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큐레이터로 일하는 김한들 저자는 ‘미술’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40년이 채 안 되는 그의 생은 그를 지탱해 주는 것들과 연결되는 꾸준한 노력들로 직조되었다. 

 

 

 

 


 혼자 보는 그림이지만 홀로 있지 않다. 그림과 함께 있고, 그림을 그린 작가와 함께 있다. 그곳에서 저자는 점과 점 사이의 선을 연결하듯 그림과 자신 사이를 의미로 연결한다. 저자는 그림에게만 연결되지 않는다. 세상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문학, 음악, 풍경에게도 조곤조곤 의미를 걸어 자신과 연결한다. 이 의미는 온기가 되어 저자의 삶을 견고하게 직조한다. 그런 저자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는 저자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건 누구에게나 자신의 몫이다.’ 나를 발견하고 대상을 탐구하고 결국 그 사이에 의미로 선을 놓아야 하는 주체는 나다. 이렇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삶은 누구의 것이라도 정처 없이 부유하기 쉽다.

 이 책은 그림 보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림을 보는 방법을 지도하거나 어떻게 예술을 읽어야 하는지를 교육하는 책은 아니나, 그림 보는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림이 달리 보이는 만화경 같은 수필이다. 저자는 학창시절의 공부, 진로, 직장 생활, 연애, 휴식까지의 생애를 담백하게 들려준다. 전병구, 박광수, 팀 아이텔, 알렉스 카츠의 그림과 함께 저자의 독백이 이어지는데,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그림을 보는 시선 그리고 그림과 연결되는 생의 면면이 절묘하다. 

 


 
 사람의 온도는 36.5도. 이 따듯한 기운이 꾸준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저자는 그림과 나, 사람과 나 사이에서 온기를 충전하는 플라뇌르다. 플라뇌르는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 단어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가리킨다(책 177쪽). 저자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따라 꾸준히 거닐면서 온기를 채운다. 이 책에서 ‘온다, 다다른다, 머무른다’ 등의 표현들이 눈에 자주 띄는 것은 아마 플라뇌르인 저자의 표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과 사는 일에 대한 저자의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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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 - 불확실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확신의 놀라운 힘
울리히 슈나벨 지음, 이지윤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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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표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특성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불확실성’.
삶은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고, 기대한 바로도 흘러가지 않는다.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성'. 이 불확실성이란, 나쁜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다는 의미도 되고 좋은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다는 의미도 된다. 이 앞에 오는 게 가시밭길일지 꽃길일지 알 수 없다.

 

이 불확실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두 갈래로 나뉜다. 가시밭길이 주는 위협이 꽃길이 주는 안심보다 훨씬 커서 비관주의 혹은 허무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경우, 어떤 보장이나 근거는 없지만 막연히 꽃길일거라고 기대하며 느긋하게 여유만만하게 구는 낙천주의자의 태도도 있다.
낙천주의자의 입장에 반대를 표하는 대부분은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한다. 인생은 위험투성이이고 세상은 적자생존의 도가니이므로 단순히 '잘될거야'라는 마인드 하나로 온 우주가 너를 도와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동감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다. 비관주의와 현실주의는 같은 말이 아니다. 인생은 위험투성이가 아니라 불확실성투성이이고 세상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공생터전이다.

 

이제 불확실성이라는 개념부터 바로 잡아야하지 않을까? 불확실성을 비관 혹은 비극하고만 연관지어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이 분명히 안 풀릴거야'라거나 '뭘 해도 소용없다'라는 비관이 내재되어 있다면 사람은 절대 어떤 것도 하지 않게 된다.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무기력과 우울감을 불러오고 이 감정들이 또 다른 비관을 불러오는 사이클이 반복되고야 만다.
그래서 울리히 슈나벨은 이 책을 썼다. 불확실성이 비극과 동의어가 아니며, 설령 비극이 내게 닥친다 해도 삶은 계속 나아간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내일 죽을지 다음 달에 죽을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불확실성이라면, 그 순간까지 명백하게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건 확실하다. 언제든 나는 죽을 예정인데 어차피 죽을 거니까 모두 부질없다는 식의 태도는 삶이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다. 결국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일을 당할 때 내 생애가 꺾이지 않도록 움직여 가는 건 '확신'이다. 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도망가거나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험한 상황이 나를 덮치기 전에 (혹은 이미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확신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 말이다.

 

 저자는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삶과 인류의 역사 속 사례들을 분석하여 확신이 삶의 에너지임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이 확신은 어떻게 생기며, 이 확신을 강화하는 방법까지도 제안한다. 확신이란 물질적으로 손에 잡히거나 측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저자는 신중하게 ‘낙관주이와 확신주의의 차이’를 설명하고 확신이 왜 삶의 에너지인지를 각종 사례를 근거로 증명하며, 확신의 중추인 ‘의미’를 경험하는 일이 현대인 초미의 관심사인 행복이나 만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시켜준다.

 

(위에서는 비관주의에 대해 위험하다고 썼는데) 낙천주의 역시 비관주의만큼 위험하다. 확증이 없는데 밑도 끝도 없이 '다 잘될거야'라는 식은 망함의 지름길이다. 내가 지금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여기는 건 더 큰 화를 부른다. 현실 부정이 삶에 좋은 영향을 주는 건 1도 없다. 희망이나 확신은 이런 자기 최면 같은 게 아니다. 이 책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인용한 인물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빅터 프랭클, 율리아네 쾨프케, 야쿠바 사와도고 등 고도의 역경을 이겨낸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사례를 통해 저자는 '이런 험한 일을 이긴 사람들'이라는 표본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의 생애는 몇 개의 표본으로 특정되지 않는다. 70억의 인류는 70억 개의 생을 산다. 그 속에서 각각이 크고 작은 성취나 어려움, 성공이나 실패를 경험한다. 특히 무한경쟁에 아무런 방비도 없이 내몰린 현대인은 한 두번의 실패나 어려움에도 곧잘 절망과 무기력, 자기혐오와 우울감에 쉽게 빠진다. 경쟁에서 진 실패자, 낙오자, 루저라는 프레임에 갇히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길은 야산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법도 아니고 어차피 흙수저로 태어난 이번 생은 틀렸으니 탕진하며 살겠다는 정신승리도 아니다. 실패 몇 번으로 인생을 루저로 낙인찍기에는 이르다. 부정의 순간이 더 오래 그리고 강하게 기억에 남기에 실패가 더 크게 느껴질 뿐이지, 나는 성공과 만족, 성취의 순간 역시 경험해왔다. 이 경험들을 모두 돌이켜 보고 그 의미를 단단히 새기는 게 확신이다. 삶의 불확실성을 적대하기보다 수용하고,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두려움과 외로움이라는 병을 이기기 위하여 필요한 능력을 장착해야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내 인생이므로 나만이 할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이나 빅터 프랭클이 어떻게 역경을 극복했는지의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혹독한 삶 속에서 단단한 뿌리가 되었던 그 '확신'이 오늘 내 삶에도 필요하기에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지옥 속을 걷고 있다면 계속 가라'. 끝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고, 그 끝에 무언가가 있을지 역시 알 수 없다. 삶은 불확실하니까. 그러나 살아 있는 한 계속 가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확신 자체가 길이 된다. 확신이라는 길이 없는 사람은 멈춘다. 길을 잃었거나 힘을 잃었으므로. 지옥 속을 걷는 모두에게 확신이 길이요 빛이 되어주기를 응원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우리의 과제는 기술적 문제와 현실적 위험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곳곳에 확산된 공포감, 자포자기, 의욕 상실을 극복하는 것 또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미국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우울증을 ‘미래를 구성하는 능력의 상실‘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에너지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석연료의 고갈만이 에너지 위기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확신이라는 동력과 이로부터 삶의 기본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준비하고 나아갈 수 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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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1 - 마음이 속상할 때는 몸으로 가라 참선 1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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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은 종교가 아니다”
 선불교 승려가 쓴 참선 권하는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순전히 저 한 마디에서 시작했다. 참선은 종교가 아니라는 단호한 저자의 말이 기독교인인 나를 움직였다.

 

이미 뉴욕 등지에서는 ‘명상’이 유행을 넘어 심리치료를 대신하는 유력한 마음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리나라 번화가에도 명상용으로 운영되는 살롱이나 스튜디오들이 제법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에게는 인도발(發) 명상법이나 선불교식 명상 수련이 여전히 종교 행위로 인식되었다. 뉴요커에서 선불교 승려가 된 테오도르 준 박 스님이 쓴 [참선 1,2]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허물고 명상이 왜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지를 명료하게 증언한다.

 

 

 

 

 

 

 겉이 상하면 병원으로 가면 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고장나면 얼른 가서 CT를 찍든 MRI를 찍든 해서 약을 처방받든가 수술을 하든가. 그러나 속이 상하면 우리는 대부분 속수무책이다. 어젯밤에 상한 속이 오늘까지 아프다. 시간이 흐른다고 나을 것 같지만 천만에. 아픈 데가 바쁜 일과 속에 파묻혀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조금씩 도화선을 타고 불씨로 남아 있다가 어느 날 꽝! 폭발하고 만다. 그래서 [참선 1,2]의 저자인 테오도르 준 박도, 그의 스승인 송담 스님도 현대인에게 참선을 권한다. 


 현대인에게 참선이 필요한 이유는 멘탈을 강화하고 싶다거나, 영성을 계발하고 싶다거나 혹은 자본주의가 치 떨리게 싫어서라든가 뭐 그런 대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참선을 한다고 자본주의의 공기를 벗어나게 된다거나 갑자기 신령한 존재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참선은 이런 세상 속에서, 외면과 내면의 자극이 거침없이 나를 집어삼켜 ‘나’는 매몰되고 오직 자극만 남게 되는 이 흐름 속에서 내가 삶의 주체인 나 자신을 자각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현실 직시력을 길러주고, 내 안에 영원히 파괴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한다.

 

 

 

 이 책은 단순한 참선법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감수성과 공감 능력으로 세상이 ‘어떻게’가 아니라 ‘왜’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어 애를 끓였던 저자의 생애가 오롯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책 초반에 현대 지식인으로서 그가 왜 윤택한 성공의 길이 아니라 참선가로서의 생을 택했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살아온 시간을 털어놓으며 저자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부와 성공이 부질없다는 허무주의도,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살라는 훈계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체험담이었다. 안전과 행복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로지 물질적 전략 하나만을 배운 현대인으로서 저자에게 참선이란 어떤 유익함을 주었는지 그리고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는 지식인으로서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는 참선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저자는 생생하고 솔직한 자기 체험담을 들려준다. 그 체험담이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 읽어본 사람은 안다. 우주의 본질 수준으로 철학적이고 거시적인 질문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일생에 어느 한 지점에 이르면 ‘나는 대체 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와 같은 고민을, 독자보다 먼저 혹은 비슷한 시기에 했던 저자는 ‘나도 당신과 같았다’라고 말을 꺼내며 답은 분명히 있으니 답을 찾고 싶다면 참선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종교적이다. 불교 교리를 믿는다 혹은 기독교 교리를 믿는다는 차원에서의 종교성이 아니라 참다운 종교라면 이런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싶은 이상적인 종교성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저자는 자신이 선불교 승려라는 이유로, 절에서 그가 체험한 모든 일을 포장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참선 수련과 관련한 선불교 내부의 사정을 꾸밈없이 이야기한다. 한국어도 모르고 한국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소화해야 했던 ‘어미 사자식 교육 방식’은 이제 시대에 어울리지 않으니 개선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건의하는 부분은 마치 ‘꼰대’와 ‘라떼킹’을 과감히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또한 스님들이 무의식중에 하는 ‘종교의 연극’을 언급하며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대 종교가 불신을 받고 있음을 꼬집기도 한다. 이런 저자의 태도 덕분에 독자 역시 더 이상 어떤 방어벽을 세우지 않고 꾸밈없는 태도로 책을 읽게 된다. 자기의 속내를 먼저 들춰보이는 진솔한 사람 앞에서 겉옷 한 장 벗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랴.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참선에 임할 때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한 언급이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사람이 자기 영혼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영혼을 마주보려고 할 때에는 몸이 방해를 한다'고 했다. 몸에 익은 습관과 몸이 받아 들여온 정보들이 몸 속에 있는 영혼의 의식을 깨우는 일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참선 1권 227쪽에서 저자는 이 문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마음 속 표상이 결국 무의식이라는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는 나 자신을 비추는 일을 방해한다’고.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순수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했다. 아이들이 전제 없이 만물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아이 같은 자가 천국을 간다고 하셨던가. 기존에 내가 알던 것을 내려놓고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는 존재’에게로 눈을 뜨는 일이란 불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어쩌면 모든 종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사람됨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절절하게 공감과 동감을 사는 책의 후반부에서 나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을 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게 정말로 가능합니까? 가능하다고 해도 쉽지 않겠지요?

그래, 쉽지 않다.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라고 이 책은 답한다. 그렇다면 선택은 내 몫이다. 쉽지 않으니 아예 시도조차, 시작조차 않겠는가?

 

이 책이 필요할 어쩌면 심리상담이나 우울증 약보다 훨씬 더 이 책이 간절할 사람들을 위하여 이 책의 한 부분을 실어본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고, 우리는 그 사건들로 인해 산만하고 속상해진다. 과거의 일이나 미래를 떠올리면 현재의 생각과 감정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관심을 되돌려 ‘이뭣고?’하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대의심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고통은 한순간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관심이 자연스레 현재에 맞춰지면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적 변화와 주변 상황을 좀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참선 1], 253쪽 중에서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내 몸과 마음 안에 있는 진정한 ‘나’, 경험의 주체를 왜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은 내가 그랬다. 진짜 나 같은 거 몰라도 오늘 하루 먹고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난 지금은 비로소 알았다. 더 이상 나는 ‘내가 되고 싶다’ 혹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 살 필요가 없다. 나는 그냥 본래의 나로 살면 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내부로부터의 욕망이 빚은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나로 살면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후련하고 당당할까. 종교의 유무 혹은 여부를 떠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마 이 책은 든든한 동지이자, 가이드 그리고 응원군이 되어줄 것이다. 

 

 

 

“시궁창에 빠진 사람이 거기서 허리를 쭉 펴고 앉아서 조금 더 있고 싶다고 말해. 한번 말해봐. 그 남자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거야?”
스님은 내 반응을 살피시고는 무척 즐거워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라고 말해야 맞제?”
 “네,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궁창보다도 훨씬 더 더러운 정신 상태에 빠지거든. 그런 감정들이 시궁창보다 더 더럽고 고약한데 말이야. 우리가 정말 시궁창에 빠진다면 옷이나 피부 같은 껍데기만 더러워지겠지. 옷은 빨면 되고 몸은 씻으면 해결되잖아. 하지만 우리가 탐욕과 화, 망상에 빠지면 내면이 더러워지고 병이 생긴단 말이여.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까지도 그렇게 돼.”
 나는 스님의 말씀을 외우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몸을 깨끗이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왜 마음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을까?”
[참선 1], 182쪽

시궁창에 빠진 사람이 거기서 허리를 쭉 펴고 앉아서 조금 더 있고 싶다고 말해. 한번 말해봐. 그 남자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거야?"
스님은 내 반응을 살피시고는 무척 즐거워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라고 말해야 맞제?"
"네,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궁창보다도 훨씬 더 더러운 정신 상태에 빠지거든. 그런 감정들이 시궁창보다 더 더럽고 고약한데 말이야. 우리가 정말 시궁창에 빠진다면 옷이나 피부 같은 껍데기만 더러워지겠지. 옷은 빨면 되고 몸은 씻으면 해결되잖아. 하지만 우리가 탐욕과 화, 망상에 빠지면 내면이 더러워지고 병이 생긴단 말이여.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까지도 그렇게 돼."
나는 스님의 말씀을 외우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몸을 깨끗이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왜 마음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을까?"
[참선 1],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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