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집어든 것은 오로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근래 경계성 인격장애 의증 진단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사적으로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처음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나쁜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 전에도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었고 경계성 인격장애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몇 만난적도 있지만, 사실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한 내 지식의 거의 대부분은 <나쁜 유전자>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제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사람을 나쁘게 혹은 트러블메이커로 만드는 요인들, 특히 선천적인 요인들에 대한 책이다. <나쁜 유전자>에서 책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사례자로서의 저자의 언니가 경계성 인격장애이며, 저자는 밀로셰비치나 마우쩌뚱 같은 독재자나 몇몇 범죄자들이 경계성 인격장애로 의심된다고도 서술해 놓았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우울증이나 조현증 같은 정신 질환이라기 보다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 유형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마침 대화의 빌미를 제공한 그 사람도 질환이 원인중의 하나가 되어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잡았다, 네가 술래야> 를 읽고 난 후, 내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이 것은 '병'이며,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책에서는 '경계인'이라 한다)과 그 주변인(이 책에서는 '비경계인'이라고 한다)모두 '도움과 이해가 필요하다' 점 그리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주변의 우울증이나 양극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병에 따른 증상으로서 이해해주려 하고 나름대로 도와주려 애쓰는 것처럼, 경계인 또한 그런 이해와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경계성 인격장애가 병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게 질환이라는 걸 아는 이들에게는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타인에 대한 평가가 양극단을 오가며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찬사와 격렬한 비난을 쏟아붓고 자해나 자살위협까지 이르는 그들의 행동을 직접 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울증이나 조현증 환자를 대할때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실제로 우울증 환자와, 양극성 장애(조울증)환자, 조현증(정신분열증) 환자를 주위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때마다 그들의 행동에 위협을 느낄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병 때문임이 확실했고 또한 그들의 행동이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보통은 환자들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옆에서 환자들을 보면 안스러운 마음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던 기억이다. '누구누구가 안 좋은 거 같은데 부모님께 연락을 해봐야 하지 않겠냐'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다는데 약을 먹으니 곧 좋아지겠지만 당분간 좀 당황스러수도 있을 거야. 이해해주자' 같은 말을 친구들과 나누기도 했었고. 특히 내가 이해심이 깊은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보게 되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는 좀 다르다. 그들의 행동 중 가장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것은 (경험상) 사소한 일,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도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고 타인을 몰아세우듯 비난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나오듯이 그들은 전화를 하면 자신을 간섭하고 잔소리를 퍼붓는다고 생각하며 비난하고 전화를 걸지 않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졌다고 비난을 퍼 붓는다. 심지어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를 비난하기도 한다.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그들의 행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면 지나친 반응이라 생각하지만, 나름 논리에 맞고 꼬투리일지라도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는 비경계인이 제3자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혹은 이 책에서 '투사'라고 부르는 경우, 즉 비경계인이 경계인의 문제를 마치 비경계인 자신의 문제인것처럼 생각하여 경계인에게 끌려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경계인 부모를 둔 아이들이 그렇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부산물은 타인에 대한 직관적이고 날카로운 이해와 교묘한 정신조종 인데, 비경계인은 이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경계성 인격장애인과 가까운 비경계인은 다른 정신질환자의 가족이나 친구 이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그들이 정신질환을 겪고 있음을 알고, 그들의 행동을 질환에 따른 증세로 이해하며, 그들이 나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과 언사들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 그 대처는 우선은 비경계인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그럼으로서 나아가 경계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쓰여진 책이고, 상당부분을 어떻게 나를 지키고 경계인을 도울 것인가에 대한 '전략'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전략' 중 하나는 '경계를 세우는 것' 이다. 앞서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 했지만, 정도가 지나친 경우, 즉 무조건적으로 경계인에게 공감해주고 맞춰주는 것은 경계인과 비경계인의 상태 모두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무조건적인 공감과 이해 그리고 비경계인의 끝없는 희생은 경계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불안한 자아상 때문에 고통받으며 그에 따른 공허감 때문에 타인을 비난하거나 우상화한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너 자신'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한데 경계의 존재는 그에 핵심적이라 한다. 비경계인 자신을 위해서도 경계인의 행동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럼으로서 나아가 그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 경계는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아마 사회를 살아가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우리 모두에게도 유용한 태도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외의 여러 전략을 친절한 설명으로, 때로는 나열된 항목으로, 경계인과 비경계인의 모임에서 발췌한 그들 자신의 글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전략은 원칙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까지, 심지어는 경계인이 자신을 부당히 모함하거나 상황을 조종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학대를 당하거나 돌이키기 어려운 피해를 받은 경우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이혼소송 중인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부당히 고발하는 경계인 아내나, 부모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신고를 하는 경계인 자녀, 그리고 아이를 학대하는 경계인 부모/배우자에 대한 것까지 말이다. 사람들이 경계성 인격장애인들에 대해 두려움이나 비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종종 일으킴으로서 가까운 사람들이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인데,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비경계인들에 대해서도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고 있다. 관계를 끊어야 되겠다는 결단까지 포함해서.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간혹 경계성 인격장애 말고도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까운 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이나 심지어 (가족같이 아주 가까운 사이일수록)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들을 진정을 돕기 위해서는 어떤 단호함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들을 돌보느라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비경계인에게 그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나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한다. 변화는 오로지 경계인들 자신만이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며, 사실 모든 문제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 책을 특히 경계성 인격장애인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햄릿의 대사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그러면 밤이 낮을 자연스럽게 따르듯
다른 사람에게도 충실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